묵향 30권 4화 – 발정난 여우
발정난 여우
따가닥, 따가닥.
목적지인 전갈 성에 도착했을 때, 라이는 기절한 채 말 등에 실려 있었다. 올란도가 성문 앞에 도착하자, 경계병들은 곧바로 그를 알아보고 얼른 성문을 열었다.
성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말들에게 곧바로 물을 먹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커다란 물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풍차를 통해 길어 올려 진물이 끊임없이 흘러들고 있었기에 물은 비교적 깨끗했다.
물통 언저리에는 이미 수십 필의 말들이 묶여있었다. 올란도는 안장과 짐, 그리고 라이를 말 등에서 내린 다음 자신의 애마를 그 말들 옆에 묶었다. 말은 물을 보자 마자 주둥이를 틀어박고 열심히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만큼 목이 말랐던 것이다.
“성에 도착했으니 라이를 깨워야겠군.”
올란도가 고개를 돌렸을 때, 라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이 어디로……?”
첨벙, 첨벙.
이리저리 뒤쪽을 둘러보던 올란도가 요란한 물소리에 고개를 그쪽으로 돌려보니 물통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라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 깨어났는지 라이는 말 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한 물통을 부여잡고 게걸스럽게 물을 마시고 있었다. 엄청나게 목이 마르긴 말랐던 모양이다.
올란도는 급히 달려가 라이의 허리를 붙잡고 물통 밖으로 끌어냈다.
“놔! 이거 놓으라고. 물! 물을 마시게 해줘. 물~~.”
“짜식아! 그렇게 갑자기 물을 잔뜩 마시면 죽어, 임마. 아무리 목이 말라도 조금씩 마셔야 하는 거라구.”
하지만 이미 갈증에 눈이 뒤집힌 라이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 죽을 힘을 다해 물통으로 다시 기어가려는 라이와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던 올란도는 짜증이 슬슬 치밀기 시작했다. 눈이 뒤집혀서 물통으로 기어가는 놈을 끌어당기자니, 힘도 들었고 말이다.
“젠장, 도저히 말로 해서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군.”
올란도는 주먹으로 라이의 뒤통수를 힘껏 가격했다.
“큭!”
단 한 방이었다. 라이는 기절해서 축 늘어졌다. 올란도는 급히 품속에서 소금을 꺼내 가루로 만들어 라이의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런 다음 주위를 둘러보다 심부 름을 시키기에 적당해 보이는 용병 하나를 찾아냈다.
“이봐, 자네.”
“예?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말이야.”
그 말에 주춤주춤 다가오는 덩치가 큰 사내. 제법 용병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벌써 올란도가 자신에게 귀찮은 일을 시킬 것 같다는 짐작에 인상이 잔뜩 구겨져 있 었다.
같은 용병들인 만큼, 자신의 직속상관이 아닌 이상 굳이 올란도의 명령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올란도는 덩치가 큰 사내가 마치 자신의 부하인양 주저 하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올란도는 축 늘어져 있는 라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을 대기대(待期隊)에 넣어둬. 나는 지금 단장님께 보고 드리러 가야 하니까.”
그러자 사내는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손사래를 쳤다.
“하, 하지만 저도 바쁜데…….”
사내의 반응에 올란도는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호오, 꽤나 한가해 보였는데, 그렇게 바빴었나? 참, 나는 마틴 올란도라고 한다네. 들어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일세.”
올란도의 이름을 듣자마자 사내는 마치 똥 씹은 것처럼 인상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서, 설마 그 발정난 여우라는……?”
사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올란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어허, 낭만 여우라고 불러주게. 남의 별명을 자네 마음대로 그렇게 함부로 바꾸면 안 되지.”
그 말에 자신이 알고 있는 올란도가 확실하다는 걸 깨달은 사내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젠장, 알겠습니다. 이 녀석을 대기대에 넣어두기만 하면 되는 거죠?”
사내가 이렇게 금방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용병단에 자자하게 퍼져있는 올란도의 악명 때문이었다. 올란도는 자신이 낭만 여우라고 불리길 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발정난 여우라고 불렀다.
‘발정난’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여자를 엄청나게 밝히는 주제에, 왜 그렇게 잔머리는 뛰어난 것인지. 더군다나 워낙에 뒤끝이 강한 인간이라서 한번 찍혔다가 는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해야만 했다. 타고난 잔머리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마수에 걸려 고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투덜거리는 사내를 바라보던 올란도는 그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준 뒤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가 자진해서 협조해 준다니, 정말 고맙군.”
축 늘어져 있는 라이 문제가 해결되자 올란도는 단장에게 복귀 신고를 하기 위해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마침 단장은 집무실에 있었다. 올란도는 군례를 올리며 단장에게 보고했다.
“71중대장, 마틴 올란도, 단장님의 명을 받아 신입 부대원 한 명을 노예상으로부터 인수한 후 지금 귀대하였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올란도의 경례를 받은 단장은 탐탁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질책했다.
“왜 이렇게 늦었나?”
“신입 부대원의 실력을 테스트 할 겸, 사막을 한 바퀴 빙 돌았습니다.”
계집질을 하다 늦은 게 아니라, 사막을 한 바퀴 빙 돌았다는 말에 단장의 딱딱했던 표정이 약간은 풀어졌다.
“그래? 수고했구먼. 그런데 본관은 자네에게 실력 테스트를 해보라는 명령을 내린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나간 김에 노예를 하나 인수해 오라고 했을 뿐이지.”
“흐흐, 150골드나 주고 사오라고 하신 노예가 너무 볼품이 없어 보여서, 어떤 놈인지 살짝 맛을 봤을 뿐입니다.”
자신의 질책에도 태연하게 대꾸하는 올란도의 태도에 단장은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사실 올란도는 이런 곳에서 중대장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단장은 지금도 올란도를 볼 때마다, 그를 자신의 수하로 부릴 수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저놈의 개차반 같은 성격만 바꿔도…….’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단장은 애써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그런 올란도를 과연 자신이 감당할 수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사실, 올란도는 이런 용 병단에 머물만한 그릇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잠시 올란도를 바라보며 입맛을 마시던 단장은 곧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래, 녀석의 검술 실력은 어떻던가? 테귤러가 호언장담을 할 정도니, 제법 쓸 만하겠지?”
그 말에 올란도는 속이 뜨끔했다. 그러고 보니 노예상에 있는 미모의 여자노예에게 홀딱 빠지는 바람에 검술 실력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게 그제서야 떠오른 것이 다. 물론 용병단으로 데리고 오는 도중에도 대련을 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충분히 있었지만, 깜빡 잊어버리고 하지 않았다.
라이를 괴롭히는 것에 재미가 들리는 통에…….
하지만 올란도는 임무를 소홀히 했다는 점을 시인하기 보다는, 곧 자신의 특기인 화려한 말빨로 화제를 은근슬쩍 돌렸다.
“150골드씩이나 주고 산 놈이니, 당연히 그 정도 값어치는 해야죠. 문제는 그게 아니라, 녀석을 우리 용병단의 일원으로 회유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아니겠습니 까? 사실, 단장님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셨으니까, 150골드라는 거금을 배팅하신 거겠지요. 주위에 널려있는 전쟁노예라면 그 반값만 줘도, 녀석보다 훨씬 더 대단 한 실력을 지닌 놈을 구입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올란도의 말에 단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우려하는 바를 정확히 짚었기 때문이다.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수하를 둔 기쁨 때문인지, 단장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자네의 말이 옳아. 그래,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녀석이 쓸 만하더란 말이지?”
‘어,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올란도는 썩은 미소를 애써 지으며 어색하게 말했다.
“무, 물론이죠. 괜찮지 않다면 제가 단장님께 이런 말은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단장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녀석을 한번 키워보고 싶다는 뜻인 것 같군.”
당연히 올란도로서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본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얘기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을까? 그건 단장이 올란도를 용병단에 붙잡아두고 싶었던 마 음에 그 노예를 구입했고, 또 그런 이유로 올란도에게 노예를 인수해 오라고 보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올란도가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기 위해 말한 것이, 단장에게는 노예에게 꽤 관심이 있다고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물론 그건 엄청난 오해였지만, 어쩌 다 보니 올란도로서는 그 말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젠장, 얘기가 어쩌다가 이렇게 꼬인 거지??
여자를 꼬시기에도 바쁜 자신이 왜 눈치를 보며 도망칠 궁리만 하는 꼬맹이를 키워야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바짝 말린 멸치 같은 체형을 가지고 있는 형편없는 놈 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50골드나 주고 산 노예의 실력도 파악하지 않고, 녀석을 데리고 노는 재미에 너무 농땡이를 피운 것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무엇보다 변명을 하느라 주저리 주저리 헛소리를 한 게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고맙죠.”
올란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단장은 씨익 미소 지었다.
“알겠네. 그렇다면 노예의 정확한 실력 평가가 끝난 뒤, 자네 중대에 배속시켜 주겠네. 한번 잘 키워 보게나.”
“감사합니다, 단장님.”
귀찮음에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얼른 고개를 숙인 올란도는 용건이 모두 마무리 되자 더 이상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게 잽싸게 단장실을 빠져 나가려 했다. 그런 올란도를 단장이 불러 세웠다.
“참, 한 시간 후에 간부회의가 있을 거야. 자네도 참석해 줬으면 하는데…….”
“중대장급까지 모두 다 모이는 회의입니까?”
“그건…, 아니고 지휘관 회의일세.”
지휘관 회의라면 용병단 내의 독립부대 지휘관들을 말하는 것이다. 5명의 연대장들과 그리고 3명의 독립대대장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아직 거기에 참석할 계급이 되지 못해서 말이지요. 헤헤…….”
“쯧,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만 가보게.”
“옛!”
올란도가 단장실 밖으로 나가자 단장은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며 그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올란도가 용병단에 가입하고 싶다며 처음 자신을 찾아왔던 그날을.
그를 봤을 때 단장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처음에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황실에서 파견한 기사인 줄 알았다. 온 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패도적인 기 운. 그런 기운을 그는 숨기지도 않고, 고스란히 내뿜고 있었다.
“내 실력이 이 정도니, 알아서 항복하라는 뜻인가?”
하지만 놀랍게도 그게 아니었다. 상대는 지금 자신의 존재감이 고스란히 밖으로 뿜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침울하게 가라앉 아있는 우울한 눈빛. 이건 세상 다 산 듯한 그런 눈빛이 아닌가. 한눈에 단장은 올란도에게 뭔가 깊은 사연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사람을 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내뿜는 기세가 워낙에 강했기에, 부하들도 설마 이런 사람이 용병단에 입단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정규기사 단에 들어가고도 남을만한 기세의 소유자가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용병단에 가입하겠다고 찾아왔겠는가. 그것도 이런 변방에 위치한 용병단에 말이다.
“벌써 10년이나 되었군.”
그가 이곳에 오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전혀 용병단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임무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범 한 용병 중대장의 실력 그 이상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게 단장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과연 무슨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기에, 저러고 있는 것일까…….
‘그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150골드를 쓴 값어치는 있군.’
하지만 곧이어 단장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신을 차리는 것은 좋지만, 기사단에 들어가겠답시고 떠나버리면 나만 손해잖아.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단장은 자신의 결정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만큼 올란도를 아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장실을 나선 올란도는 곧바로 훈련장으로 달려갔다. 자신과 친한 교관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용병단 내에 신입이 들어오면 훈련소 교관이 실력 테스트를 행한 다. 어느 정도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야, 그에 맞는 곳에 써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라이를 자신의 부대에 배속시켜 주겠다는 말에 올란도가 뜨끔한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훈련소에서 실력 테스트를 받았는데, 평가가 영 형편없이 나온다 면 방금 전에 자신이 단장한테 거짓보고를 올린 게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몸값이 몸값인 만큼 놈의 실력이 쓸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놈의 멸치 같은 몸매로 봤을 때는 영 못미더운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실력 테스트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무슨 짓’ 중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은 평가를 사전에 조작하는 것이 라는 것은 올란도에게는 진리와 같은 해답이었다.
용병 사내가 막사까지 업고 왔을 때도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있었던 라이. 워낙 지쳤었기에 기절한 것이 곧바로 깊은 숙면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한참을 곤하게 자고 있던 라이는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살며시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직 한밤중인 모양이다. 무심결에 다시금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던 라이는 갑자기 깨달았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사막의 모래 위가 아니라는 것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살벌한 추위 대신, 따스한 공기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응? 어떻게 된 거지?”
깜짝 놀란 라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쿵!
“크윽!”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아픈 머리통을 감싸 쥐며 더듬어 보니 머리 위쪽으로 나무의 질감이 만져졌다.
“아그그극, 머리야. 방금 전까지 사막이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여긴 어디지?”
두 눈에 힘을 주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어두운 실내였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 덕분에, 실내의 정경을 어렵지 않게 파 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머리를 박은 것은 천정이었다. 2층 침대의 위쪽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이 자고 있는 것과 같은 2층 침대가 4개 정도 더 있었다. 그러니까 층마다 침대 5개, 총 10명이 잘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방이다.
“드르렁…….”
“으드득, 뽀드득!!”
방에는 라이 혼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코를 고는 놈도 있고, 또 어떤 놈은 외나무다리 위에서 웬수라도 만난 듯 무서운 기세로 이빨을 갈아대고 있었다. 라이는 주위를 살피며 살그머니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걸어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귀를 기울여 밖의 동정을 살폈다.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 려오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볼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라이의 눈에 띈 것이 작은 창문이었다. 라이는 재빨리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광경. 높은 성벽 위에는 주위를 환하게 밝혀주는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경계를 서는 보초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서야 현 상황을 이해한 라이가 감격스런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성으로 간다고 했었지. 성에…, 겨우 도착했구나. 도착했어.”
그러자 흐릿하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 했던 갈증.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올란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라이는 필사적으로 걸었었다. 발이 마치 지면에 쩍쩍 달라붙는 것처럼 무거웠지만, 그래도 악착같이 올란도의 뒤를 따라갔었다. 그를 놓치면 죽는다는 생각에…….
결국 자신이 해 낸 모양이다. 라이는 스스로가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도 몸이 가뿐할 수가 있지?
침대라고는 하지만 딱딱한 나무 침상에 그저 이불 하나 덮고 잔 것이기에 편한 잠자리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잠자리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올란도와 사막으로 들어선 이후부터 그랬다. 밤새도록 덜덜 떨면서 걸어야 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요 근래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오크족 노예 생활 로 인해 피폐해진 체력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빈약한 근육이 그걸 잘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 들어 아침에 쓰러지듯이 잠을 자고 일어나면, 온몸에 활력이 용솟음치는 걸 느낀다.
“내가 옛날에도 그랬었나?”
라이는 잠시 자신의 앙상한 손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예전에 집에서 지내던 그 시절, 몸 상태가 훨씬 더 좋았던 그때도 이렇지는 않았었다. 아버지 가시켜 엄청나게 쌓인 장작을 패고 난 뒤, 온몸을 쑤시는 근육통에 며칠 동안 고생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건 수련이라는 미명하에 받아야 했던 검술훈련 때도 마찬가지였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몸이 바뀌었어.”
잠을 자고 나면 활력이 샘솟는 듯한 이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더라?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 라이의 머릿속에 곧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 다.
아름다운 이국적인 분위기의 여인.
곧이어 그녀의 비현실적인 검무가 떠오르자, 라이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개꿈은 떠올려 봐야, 정신만 사나워지고…….”
그때 머릿속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테귤러 씨가 내 몸의 활성도를 높여줬다고 했었지. 대신관에게 부탁해서 말이야. 그래, 그거야. 그것 때문인 게 분명해.”
라이는 오크 소굴에서 구출될 때 만났던 사제가 신성마법을 쓰는 것을 직접 경험한 이후, 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라면 무조건 믿기로 했다. 예전에 마을에 있을 때 신의 존재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는 무슨 옛날 얘기 듣는 것처럼 무감동했던 게 사실이었지만,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되자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제보다 훨씬 지위도 높고, 신앙심도 깊다는 대신관이 자신에게 직접 신성마법을 걸었었지 않은가. 맞다! 그랬기에 요즘 잠만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개운해
지고 활력이 샘솟는 것이리라.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이 해소되자 라이는 자신의 오줌보가 터지기 일보직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커다란 물통에 머리를 처박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때 자신의 주위에는 말들 역시 코를 처박고 물을 마시고 있었다.
“우웩! 이런 젠장, 아무리 내가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그렇지. 말들이나 먹는 그딴 더러운 물을 머리까지 처박고 마셨다니…….”
지금은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릴 정도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로지 물을 마셔야겠다는 것 외에는.
“젠장,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뭐해. 이미 뱃속에서 소화가 끝나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는데 말이야.”
중얼거리던 라이는 살금살금 문 쪽으로 다가갔다. 오줌을 핑계로 문밖을 살펴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라이가 조심스럽게 문을 빼꼼이 여는 순간, 갑자기 어둠속에 서 거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허억!’
너무 놀라 하마터면 오줌을 싸버릴 뻔 했다.
‘기왕에 들킨 것.’
라이는 당당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긴 복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복도를 중심으로 그 양쪽 끝에 중무장한 병사들이 2명씩 서서 경비를 서고 있었 다. 그 중 라이의 방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병사들 중 한 명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수고하십니다. 저, 소변이 마려워서…….”
병사는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장실은 저쪽에 있다. 왼쪽에서 3번째 문이야.”
“감사합니다.”
‘휴우, 이제 살겠네.’
오줌을 누면서도 라이는 이곳이 성은 성이라고 생각했다. 잠자는 방 앞에도 중무장을 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니. 지금까지 그가 잡혀있었던 그 어떤 곳보다도 탈 출하기 힘든 곳일 가능성이 컸다. 더군다나 성 밖은 뜨거운 사막! 도저히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볼일을 마친 라이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자신이 깨어난 방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방금 전의 그 병사가 말을 걸었다.
“좀 더 자두도록 해라.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예.”
병사의 조언대로 라이는 좀 전에 일어났던 침대를 찾아 드러누웠다. 잘 수 있을 때 푹 자서 체력을 비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건 오랜 시간 노예생활을 하며 체 득한 경험에서였다.
꼬로로록..
오줌을 누고 나니, 이번에는 배가 격렬하게 고파오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밥을 먹었었지??
물통에 머리를 처박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그 이전의 기억도 반쯤은 정신이 나간 상태였기에 가물가물 하기만 했다.
“내가 물통에 머리를 처박은 게 아침때였나, 점심때였나? 그런데 지금은 오밤중이니 도대체 몇 시간을 잔거야? 그러니 몸이 가뿐할 수밖에 없네.’
정신을 잃기 시작했을 때에는 물이 거의 다 떨어진 상황이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라이는 애써 잠을 청 하려고 노력했다. 오크족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 배고픔을 잊는 데는 잠자는 게 최고라는 것을 배웠으니까.
하지만 잠을 자려고 노력할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있으니 그게 문제였다. 배는 고프고, 더군다나 주위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코고는 소리와 이빨 가는 소리. 소 음에 신경이 거슬릴수록 잠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졌다.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다.
라이는 양쪽 귀를 손으로 콱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걸 생각해야 해. 오크 소굴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잘만 생활했었잖아.”
이럴 때는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게 좋았다. 그편이 시간도 훨씬 잘 흘러갈 것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라이는 이리저리 다른 것들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하 지만 떠오르는 것은 비관적인 생각들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릴 때 들었던 영웅담이 떠올랐다. 아무도 병역을 이행하지 않으려는 산골 오지를 지키기 위해, 죄수들이나 노예들을 병사로 써먹었다는 얘기. 그 얘 기에 나왔던 노예들처럼 자신도 도적떼나, 아니면 사막에 서식하는 몬스터나 때려잡다가 생을 마치게 되리라.
“말도 안 돼!”
갑자기 라이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긍정적인 생각만을 해야 한다. 영웅담에도 나오지 않던가. 비관적인 생각만 해서는 난관을 벗 어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영웅담의 주인공들은 모두들 하나 같이 활기찼고, 긍정적인 사람들뿐이었다.
“그래!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대로 노예로 죽을 줄 알아? 나를 잘못 봤지. 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여길 탈출하고 말거야. 아니, 탈출할 수 있어!’
라이는 이곳에서 탈출하려면 뭘 해야 하는지부터 생각했다. 우선 상관들의 환심을 사 그들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주변의 지리를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사막이라 는 게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는, 이곳에 오는 도중에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이리저리 잡다한 생각을 하던 라이의 머릿속에 문득 이국의 여인이 등장했던 그 꿈이 떠올랐다. 그녀가 췄던 아름다운 칼춤. 그리고 그녀가 몸속의 기운을 수련하 던 괴이한 방법. 꿈에서 깼을 때는 마치 방금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었던 것처럼 뇌리에 선명했었는데, 그새 며칠이나 지났다고 모든 게 희미해져 버린 상태다. “그것 참, 예쁜 여자였는데……. 그나저나 내가 그런 여자를 언제 본적이 있었나? 아니면 예전에 들었던 영웅담들 중에서 그런 여자가 나온 대목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왜 그런 괴이한 꿈을 꾸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이, 관두자. 개꿈이 달리 개꿈이겠어?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개꿈이지. 그건 그렇고, 그 여자가 나오는 꿈을 다시 한 번 더 꾸고 싶어. 정말 예뻤는데 말이지.” 중얼거리며 라이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얼굴은 거의 생각나지 않고, 그녀가 입고 있던 옷차림의 윤곽만이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오늘밤에도 그녀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 그러면 좋겠는데…….
하지만 라이의 생각은 오랜 시간 그녀에게 고정되지는 못했다. 좀 더 현실적인 부분으로 생각이 옮겨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먼저 성 주변의 지리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야.’
올란도! 그 호색한 인간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여자 얘기만 했지, 탈출에 도움이 될 만한 얘기는 거의 해주지 않았다. 밤에 걷고, 낮에는 잠을 자야 한다는 것. 그리 고 모래뿐인 사막이라고 하지만, 어딘가에는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줬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오아시스의 위치는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거기를 어떻게 찾 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