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0권 6화 – 6급 용병이 된 라이
6급 용병이 된 라이
“이쪽으로 와. 길 잃지 않도록 조심해라. 저쪽이 행정실이야. 월급을 받을 때는 저 건물로 찾아가면 된다.”
병사는 행정관실로 라이를 데리고 가며 주위에 있는 건물들의 이름과 뭘 하는지를 라이에게 알려줬다. 하지만 라이는 벌써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태어나서 이렇 게 복잡한 곳은 처음 와봤으니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성장한 라이였기에, 이런 복잡한 3차원적인 미로 같은 길을 찾아가는 능력이 전혀 발달해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라이는 병사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행정관님의 집무실이야.”
한참을 복잡한 건물 사이를 지나다 보니 어느새 『행정관실이라고 써져 있는 방문 앞에 서있었다.
똑똑!
그러자 문 저편에서 굵직하면서도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병사는 문을 열고 들어가 군례를 올리며 보고했다.
“라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행정관님.”
“수고했다. 나가봐도 좋다.”
행정관이라는 직함에서 풍기는 문약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로크보다 더욱 큰 덩치를 지닌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사내였다. 덩치가 곰만한 사내가 사무실에 앉아 솥뚜껑만한 손으로 가느다란 펜대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니, 뭔가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루베르크가 네게 준 것이 있을 텐데?”
라이는 얼른 품속에서 6급 용병패와 봉투를 꺼내 행정관에게 건네줬다. 봉투 안의 종이를 꺼내 내용을 읽어보던 행정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신병노 예의 평가가 제법 괜찮았기 때문이다.
평가는 6급 용병.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기술이 뛰어나다고 적혀 있었다. 그 기술을 받쳐줄 수 있는 강한 체력만 가질 수 있다면 4급 용병패를 수여해도 전혀 아까울 게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평가란의 맨 밑쪽에는 전투에 대한 감각이 탁월하고, 무술에 대한 재능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첨언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단장의 선택은 정확한 것이었다. 이런 놈을 10년 동안 부려먹을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150골드쯤이야 그리 큰돈이 아니었다.
‘쩝, 옛날 같았으면 이런 귀찮은 작업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텐데…….?
옛날이 좋았다. 그때는 노예 하나 설득한다고 자신이 직접 나서는 일은 절대로 없었으니까. 행정관은 커다란 덩치를 일으켜 세워 창가로 걸어갔다.
“이쪽으로 와봐.”
라이가 쭈뼛쭈뼛 옆으로 다가오자, 행정관은 넓은 연병장에 서있는 무리들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허름한 갑옷을 입고 있는 그들의 다리에는 족쇄가 채 워져 있었다. 오늘 아침에 라이가 봤었던 노예병의 무리였다.
“저들이 우리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는 노예병들이다. 노예병들이 하는 일은 아주 단순하지. 그저 전쟁터의 가장 앞쪽에 서서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몬스터를 잡 기 위한 미끼가 되곤 한다.”
행정관의 말에 라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설마 저 상태로 싸우게 한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노예병이라고 하지만, 저렇게 해놓으면 자기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기도 힘들 텐데요.”
“어쩔 수 없지. 전쟁터의 한복판은 아비규환이나 다름없으니까. 저렇게 족쇄를 채워놓지 않으면 중무장을 한 저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거 든. 혼란한 틈을 타서 탈영을 할 수도 있고 말이다. 예전에 흑마법사들을 구하기 쉬웠던 시절에는 저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었다. 탈영을 하기만 하면 죽게 되는 저주 를 걸어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흑마법사를 구경도 하기 힘들기에, 저런 원시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된 거지.”
“…..”
그렇게 말하며 행정관은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을 떠올렸다. 흑마법사를 고용하기 쉬웠던 그 옛날, 그때는 노예병사들을 다루기가 아주 쉬웠었다. 노예병들에 게 가장 많이 사용했던 저주는, 아이템을 하나 지정해 놓고 거기에서 일정거리 이상 멀어지면 자동적으로 몸이 폭발해 버리는 저주였다. 이 흑마법으로 인해 노예병 들의 탈출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더군다나 실력이 좋은 흑마법사라면 아이템을 향해 ‘폭발’같은 시동어를 정해두고, 그 한 마디로 노예를 죽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했다. 덕분에 말 한 마디로, 항명하는 노예를 본보기로 처형해 버리는 게 얼마나 쉬웠던가.
그건 마치 피빤다고 덤벼드는 모기새끼 한 마리 때려잡기보다 더 쉬웠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처형당한 시체의 끔찍한 모습으로 인해, 다른 노예들에게 공포를 심 어주기에도 좋았다.
따라서 그 당시에는 아이템을 통해 노예들의 명줄을 쥐고 있는 대대장이 왕처럼 군림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 빌어먹을 아르티어스라는 도마뱀 한 마리 가 난리를 피워댄 통에 흑마법사들은 거의 씨가 말라버렸고, 설혹 살아남은 흑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오지 깊숙이 숨어버려 고용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
저주를 걸 수 있는 흑마법사가 없는 이상, 예전처럼 쉽게 노예를 다루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렇기에 쓸 만한 노예를 회유한답시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창밖을 지켜보고 있던 라이의 안색이 점차 창백하게 질려갔다. 저런 몰골로 평생을 노예로 살란 말인가? 그건 정말이지 싫었다.
“저는 원래 노예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웬 양아치 같은 놈들에게 붙잡혀 이런 꼴.
주절거리는 라이의 말을 끊으며 행정관은 단호하게 말했다.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지금 넌 우리 용병단에 팔려온 노예에 불과하다. 잘못이 있다면 어리숙하게 그런 놈들에게 잡혀 노예가 된 너에게 있는 거고.”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라이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 행정관의 말이 들려왔다.
“지금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첫 번째는, 창밖에 보이는 노예병들처럼 살다 죽는 거다. 두 번째는, 우리 용병단과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10년 동안의 의무 복무를 서약하는 거다. 물론 10년 후에는 자유가 주어지는 거지. 자,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행정관은 노련했다. 라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끔 잔뜩 겁을 준 다음, 그러면서 슬쩍 당근을 제시한 것이다. 만약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밀 어 넣었다면 당연히 반발했겠지만,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솔깃한 말에 라이는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당근은 성으로 끌려오는 도중에 올란도에게 잠깐 들었던 10년간의 의무 복무였다. 라이는 주저하지 않고 계약을 하겠다며 말을 하려 했지만, 불현듯 떠 오른 의구심에 잠시 망설였다.
노예문서만으로도 자신을 개처럼 부릴 수 있는데, 왜 10년만 복무하면 노예에서 풀어주겠다는 계약을 하려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런 거대한 용병단의 행정관이 직접 말이다.
잠시 망설이던 라이는 행정관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저,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냐?”
“왜 굳이 저와 계약을 하려 하십니까? 노예문서가 있는 이상, 그냥 부리시면 될 텐데 말입니다.”
라이의 질문을 이미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곧바로 행정관에게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어느 집단이든 조직을 이루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그건 우리 용병단도 마찬가지지. 넌 무술에 재능이 있고, 우리 용병단에서는 그 재능이 필요하다. 물론 널 돈을 주고 사왔으니 노예로 쓸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겪어본 노예들은 그저 살기 위해 몸을 숨기기에 바빴고, 틈만 나면 도망치려 했다. 그래서 너처럼 쓸 만하다 고 판단되는 노예에게만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게 된 거지. 10년 동안 도망칠 생각하지 말고, 목숨을 걸고 싸워라. 10년간 그렇게 해준다면 그 대가로 너에게 자유를 주겠다. 잘 생각해 보고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하거라.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
그제서야 라이는 행정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했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목숨을 걸고 10년 동안 싸우면 풀어주겠다는 말이 오히려 신빙성 있게 들렸던 것이다.
행정관은 고민에 빠져있는 라이를 바라보며 피식 웃은 뒤, 책상 앞에 놓여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흔들리고 있으니 쐐기를 박을 때라는 걸 느낀 것이다. “거기 앉거라.”
라이가 눈치를 살피며 의자에 엉거주춤 앉자, 행정관은 서랍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 던져주며 말했다.
“네가 노예라고 해서 소모품으로 쓰다 버릴 생각은 전혀 없다. 그 증거로, 우리는 10년 동안 너를 노예로 부리는 게 아니라, 일반 용병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줄 것 이다. 보수도 좋을 뿐더러, 우수한 지휘관 밑에 배속시켜 개죽음을 당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줄 것을 약속하마.”
그 말에 라이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서는 그 길만이 최선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이런 기회를 제공받는 노예가 거의 없다지 않는가.
“계약서에 서명하겠습니다.”
행정관은 그제서야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사실, 10년의 복무기간이라는 것은 일종의 당근이었다. 도망치지 말고 전쟁터에서 뼈 빠지게 싸우라는. 그러나 정규군도 아니고, 온갖 궂은일을 수행해야 하는 용 병들의 세계에서 10년 동안 살아남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이 따라주지 못하면 전장에서 살아서 돌아올 수 없었다.
라이는 계약서에 서명하며 행정관에게 물었다.
“보수도 주신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줍니까?”
“6급 용병에게 지급하는 월급은 30실버다.”
그러면서 행정관은 용병수첩을 하나 꺼내 거기에다가 오늘 날짜를 적고, ‘붉은 전갈 용병단 입단, 6급 용병패 취득, 제7독립대대 근무 시작.’이라고 썼다. 그런 다 음 그 수첩을 라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네 용병수첩이다. 네 신분을 증명하는 물건인 만큼, 소중히 간직해야만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네가 이곳에서 받은 모든 상벌내역들이 기록된다. 만약 네가 다른 용병단으로 옮기게 되면, 이 수첩을 기준으로 네 월급을 정하게 되겠지.”
라이는 용병 월급이 예상보다는 꽤나 후하다고 생각했다. 기사인 아버지가 촌장으로부터 받는 월급이 겨우 1골드 남짓이었으니까.
내심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는 라이에게 행정관이 말했다.
“생각보다 월급이 적지? 하기야, 정규군 월급의 절반도 안 되는 액수니 적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라이는 하마터면 그렇습니까?”하고 반문할 뻔 했다. 하지만 간신히 참았다. 만약 그렇게 되묻는다면 자신의 무식함을 폭로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 에 라이는 짐짓 다 알고 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다. 용병의 월급은 적다. 하지만 용병에게는 정규군에게는 없는 수당이라는 게 있지. 자, 생각해 보거라. 부대 안에서 적 당히 경비만 서며 팽팽 놀고 있는 녀석과 위험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사람이 똑같은 월급을 받는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겠느 LF?”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위험한 임무를 완수하게 되면 우리 용병단에서는 특별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그 수당까지 합치면 정규군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게 될 테니 불 만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알겠냐?”
“예.”
겉으로는 평온한 어조로 대꾸했지만, 최소한 2배 이상의 돈을 챙길 수 있을 거라는 말에 라이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받는 월급은 아버지가 받는 월 급보다도 많아진다. 더군다나 체력단련을 열심히 해서 급수가 더 높아진다면, 훨씬 더 많은 액수의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야, 이거 잘 하면 떼돈 벌겠는데? 도망칠 때 치더라도, 돈 좀 번 다음에 도망치는 게 좋겠어.’
잽싸게 머리를 굴리던 라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4급이 되면 월급은 얼마를 받습니까?”
“1골드 20실버를 받게 되지. 물론 그건 최소로 잡았을 때 얘기야. 4급 정도 되면 꽤 위험한 일거리도 맡을 수 있거든. 운만 제대로 따라준다면 한 달에 5골드를 버 는 행운을 누릴수도 있지.”
“오, 오 골드라고요?”
5골드라면 아버지의 5개월 치 월급이었다. 그걸 한달동안에 벌어들일 수 있다니!
“우와, 뭐야 이거. 노다지가 따로 없잖아!!’
돈독이 바짝 오른 라이가 머릿속으로 분주하게 계산을 하고 있을 때, 행정관은 서랍에서 수첩 하나를 더 꺼내 뭔가를 기입하더니 건네주었다. 그 수첩 역시 용병수 첩처럼 가죽표지로 장정되어 있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건 네 통장이다.”
“통장이라뇨?”
그게 뭐냐는 듯 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이를 향해 행정관은 한심하다는 듯 되물었다.
“통장이 뭔지도 모르냐?”
“예.”
“그렇다면 은행이라는 말은?”
난생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라이의 모습에 행정관은 한숨을 푹 내쉰 뒤 자세히 설명해 줬다. 이 통장을 어디에다가 쓰는 것인지를 말이다.
“그러니까 제 월급이 은행이라는 곳에 보관되고, 이걸 들고 은행에 가면 그 돈을 찾을 수 있다는 겁니까?”
“그렇지. 10년 의무복무를 끝마치기 전까지는 자네는 노예의 신분이야. 노예에게 현금을 바로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납득이 되기는 하지만, 뭔가 묘하게 수상쩍다. 예전에 커밍스 씨는 노예도 돈을 지급받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쪽도 이런 식으로 통장으로 관리했던 것일 까?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만큼, 행정관에게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라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그건 그렇죠.”
“나중에 의무복무를 모두 끝마치면, 통장에 기록된 전액을 현금으로 지급해 준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본 용병단에서 돈을 지급 받지 못한 용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만큼,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다. 알겠냐?”
“예.”
행정관의 말을 들으며, 이놈의 통장이라는 것이 굉장히 사악한 물건이라는 것을 라이는 금방 간파했다. 통장에 들어있는 돈을 찾고 싶다면 의무 복무기간을 채워 야 했다.
통장에 있는 돈을 찾고자 하는 욕심은 그 액수가 커지면 커질수록 강해지리라. 어쩌면 돈 찾겠다는 욕심에 10년을 꼬박 채울지도 모른다. 그 전에 탈영하면 한 푼 도 못 받게 될 테니까.
“우리 용병단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 자네가 배속될 곳은 71중대야. 올란도 중대장에게 가서 전입 신고를 하도록.”
그러면서 행정관은 라이의 발령장을 건네줬다. 발령장에도 분명히 써져 있었다. 71중대, 중대장의 이름은 마틴 올란도
“설마 했는데, 올란도가 중대장이라니…….”
성으로 데려오면서 여자 얘기만 줄창 해대던 호색한.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당했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집을 떠난 이후, 옆집 형처럼 친근하게 자신을 대해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으니까.
“그게 의도적인 것이었을까??
그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보여지는 모습과는 달리 결코 녹록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라이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기회가 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자. 괜히 섣부른 짓 하지 말고.’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조용히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경계심은 약해진다는 것이었다. 또다시 둥지를 옮긴 만큼, 제대로 적응할 때까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게 좋으리라.
“아차, 이건 앞으로 네가 7대대 소속이라는 증표다. 정확한 명칭은 제7독립대대지. 그걸 옷깃은 물론이고, 갑옷의 오른쪽 가슴어림에 달도록 해라.”
행정관은 급히 서랍을 열고 이상한 문양과 숫자가 써져있는 작은 천 조각 몇 개와 실과 바늘을 꺼내줬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열심히 해보도록. 이제 나가봐.”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병사가 행정관에게 군례를 올리는 모습을 떠올리며 따라 해보는 라이. 어설프기는 했지만, 제법 군기가 빳빳하게 든 용병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기 위한 위장술의 시작이었다.
열심히 용병생활을 하는 척 해야 아무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지금 당장 탈출할 생각은 없었다.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예전의 체력을 회복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라이가 지금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 있었다. 집을 떠날 때,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손가락에 꼽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규 모가 큰 용병단에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었다.
하층민의 경우, 그게 출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오크 소굴에서 풀려났을 때, 자신을 구출해 줬었던 브리스코 용병대에 들어가기 위해 그렇 게 애쓰지 않았던가. 붉은 전갈 용병단에 비한다면 그 규모에 있어서 새발의 피도 안 되는 브리스코 용병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 라이의 머릿속에는 출세고 뭐고, 그런 건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노예라는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이었다. 그놈의 자유라 는 것이 뭐길래…….
행정관실을 나선 라이는 길을 물어물어 대기대로 돌아갔다. 곧바로 제7독립대대로 갈 수도 있었지만, 아침에 사귄 로크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기는 싫었다. 나중에 시간을 내 그를 찾아 대기대로 갔을 때, 자대에 배치 받아 떠나버렸다고 하면 무슨 재주로 그를 찾겠는가.
헐레벌떡 달려 대기대 방으로 돌아와 보니 로크는 없었다. 하지만 침대 위에 낡은 가방이 놓여있었고, 침대 옆에는 그의 창이 걸쳐져 있었다. 그는 아직 대기대를 떠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시간에 그가 있을 곳은 뻔했다. 그곳은 바로 식당이다. 라이는 다시 허둥지둥 식당을 향해 달려갔다.
식당에 도착하여 황급히 둘러보니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로크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확인한 라이는 재빨리 배식을 받기 위해 늘어서 있는 훈련병들의 뒤쪽에 가서 섰다.
식당에서 배식을 해주는 사람들은 병사가 아니라 노예였다. 징집병도 아니고 용병들을 상대로 당번을 정해서 식당 일을 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노예 가격은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특히 식당에서 잡일이나 시킬 목적의 나이 어린 노예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배식하는 노예들이 분주히 움직일수록 길게 늘어선 줄이 급속도로 줄어들어 갔다. 배식대 가까이까지 다가선 라이는 한쪽에 수북이 쌓여있는 나무 그릇들 중 하나 를 집어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썼기 때문인지 칠이 벗겨진 것도 모자라 흠집 투성이였다. 그릇 사이사이에는 제대로 씻지 않아서인지 더러운 때가 끼어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에 대해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무 그릇이라는 게 원래 그랬으니까.
라이가 나무그릇을 들이대자 노예소년은 거기에다가 걸쭉한 스튜를 듬뿍 퍼서 넣어줬다. 얼마나 오랫동안 끓였는지, 내용물이 다 녹아버려서 뭘 넣고 끓인 것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자 옆쪽에 서있던 노예가 딱딱한 방 한 덩어리를 건네줬다.
고기조각이라고는 구경도 하기 힘든 짭짤한 스튜 한 사발에 빵 한 덩어리. 이게 신병들이 먹는 한 끼 식사의 정량이었다. 스튜를 필요 이상으로 짜게 끓이는 이유 는, 이들이 훈련을 받으면서 많은 땀을 흘리게 되기에 염분 보충을 위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라이는 문득 낮에 교관을 따라 들어갔었던 간부식당이 떠올랐다. 똑같은 사람인데 먹는 게 이렇게까지 다르다니. 망할 녀석들!
자신의 앞자리에 라이가 털썩 앉는 것을 보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빵조각을 씹고 있던 로크의 표정이 환히 밝아진다. 안 그래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던 모양 이다.
“야, 축하해주라.”
“왜? 무슨 좋은 일 있었어?”
로크는 고개를 약간 치켜들고 으스대듯 말했다.
“에헴! 나 오늘 테스트 통과했어. 자, 봐봐. 이 피땀 어린 결과물을 말이야.”
흥분한 로크는 주머니를 뒤져 용병패를 꺼내 보여줬다. 용병패에는 ‘9급’이라고 써져 있었다.
“너무 좋아 죽겠어. 교관님도 칭찬해 주더라. 한 달 만에 테스트를 통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정말 축하한다고 말이야. 나하고 함께 대기대에 들어온 사람
들 중에서 태반 이상이 아직도 이 패를 못 받았거든. 내일부터는 월급도 2배로 뛰어올라. 무려 은화 10개라구! 흐흐흐, 그걸 가지고 뭐 하지?”
겨우 은화 10개를 가지고 저렇게 좋아하다니……. 로크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용병은 월급보다도 수당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기야 그것도 다 행 정관에게 얻어들은 것이었지만….
로크는 스튜를 떠먹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너, 그거 알아? 자대 배치되면 식사도 훨씬 더 좋아진다는 거 말이야.”
“아니, 몰랐어.”
“크크, 이런 개밥을 먹는 것도 오늘부로 끝이야.”
그러다 갑자기 뭘 떠올렸는지 로크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미안하다는 듯 라이에게 말했다.
“아, 미안. 너는 한동안 이걸 먹어야 할 텐데, 나 혼자서 기분 내서…….”
“아냐, 괜찮아. 네가 기분이 좋다고 하니까,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거 같아.”
라이가 괜찮다며 환하게 웃어주자 로크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흐흐, 아주 기분이 째진다. 그러니까 오늘 실력평가 받을 때 말이야. 내 앞에 받았던 지미라는 녀석이 실수를 했거든? 그래서…….”
흥분한 로크는 빵을 먹으면서도 오늘 있었던 테스트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놨다. 로크의 얘기는 식사가 끝난 후, 대기대 방에 돌아올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한 달 동안 그를 고생하게 만들었던 실력평가를 통과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그걸 잘 알기에 라이는 맞장구만을 쳐줬을 뿐, 초치는 소리는 단 한 마디도 하 지 않았다.
그럭저럭 오늘 있었던 얘기를 다 한 로크는 그제서야 라이에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미안해. 내 얘기만 해서.”
“아냐. 괜찮아.”
“너는 오늘 어떻게 됐어?”
로크의 질문에 라이는 별 감흥 없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도 그럭저럭 통과 했어.”
첫날에 바로 실력평가를 통과했다는 말에 로크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같은 초짜인줄 알았는데, 실상은 경력자였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경력자가 왜 이런 허 접한 갑옷과 무기를 지급받은 것인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크는 라이의 침상 옆에 기대 세워져 있는 낡은 도끼를 힐끗 바라봤다. 그의 눈길에는 희미한 의심이 묻어 있었다.
“축하해. 나는 324중대로 발령났어. 너는?”
““나는 71중대.”
71중대라는 말에 로크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훈련소의 교관들은 무기술을 가르치는 것 외에도 용병단의 편제 같은 것을 틈틈이 가르쳐 줬다. 연대 휘하에 있는 대대의 숫자는 5개 대대 휘하에 있는 중대의 숫 자는 4개다. 그리고 중대는 5개 소대로 구성된다. 로크가 배속되게 될 324중대라는 말은, 3연대 2대대 4중대라는 뜻이었다.
편제상 대대를 뜻하는 번호는 절대로 5를 넘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고, 붉은 전갈 용병단에는 3개의 독립대대가 존재했다. 6, 7, 8대대가 바 로 그것들이다. 그중 7대대는 노예들로 구성된 대대였다.
“너, 서, 설마 노예병이었냐?”
로크가 경기를 일으킬 만도 했다. 대기대에서 생활하면서 지금까지 그가 봐온 노예병들은 모두들 인간 이하의 말종들 뿐이었으니까. 오죽하면 모두들 족쇄를 채워 놨을까.
“그래, 나 노예병이야.”
로크의 눈에 어리는 짙은 두려움을 보며, 라이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다정했었는데, 자신의 신분을 알자마자 저런 반응을 보이 다니. 누구는 노예가 되고 싶어서 됐나?
갑자기 불쾌해졌다. 이제 더 이상 로크와 얘기를 나눌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이곳 방에 있는 것 자체가 싫어졌다.
“자대로 가자.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자대로 가려면 자신의 소지품을 모두 다 챙겨가지고 가야 한다. 그가 챙길 거라고는 침대 옆에 걸쳐놓은 낡아빠진 도끼 한 자루가 전부였다. 라이가 도끼를 집어 들자 로크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의 손이 창이 있는 쪽으로 슬쩍 가는 듯 하더니 이내 멈췄다. 이 좁은 방안에서 창을 들어봐야 도끼를 든 라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잡는 걸 포 기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걸 라이가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서운한 마음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나를 그따위로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니.
“어쨌건 잘 지내라. 잠시이기는 했지만, 너를 만나서 즐거웠다.”
라이가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을 보며 로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냥 앉아있었다. 라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