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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30권 7화 – 노예병들의 71중대

노예병들의 71중대

대기대 건물 밖으로 나오려고 하니, 경비병이 가로막았다. 훈련병 하나가 무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으니, 그건 당연한 대응이었다. “서라! 어디로 가는 거냐?”

라이는 주머니 안에서 발령장을 꺼내 경비병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71중대로 가려고 하는데요. 어디로 가면 되죠?”

71중대라는 말에 경비병들은 흠칫 했다. 하지만 라이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그가 아직 어리다는 것을 알고 안심하는 게 역력했다.

“거기에는 왜 가는 거냐?”

“거기에 써져 있잖아요. 길게 얘기하고 싶은 기분 아니거든요. 빨리 길이나 가르쳐 줘요.”

71중대는 3연대의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얼핏 보면 71중대를 3연대 전체가 포위하고 있는 것 같은 위치였다. 그 때문에 라이는 중대를 찾아가는데 애를 먹어야만 했다. 71중대의 위치를 물었는데, 모두들 3연대 쪽을 가르쳐줬기에 아주 헷갈렸던 것이다.

“저기가 71중대다.”

“예, 감사합니다. 드디어 찾아왔네.”

다른 모든 병영에서는 자신들이 맡은 구역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반해, 71중대에서는 단 한 명의 경계병도 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똑똑!

“이 한밤중에 누구야?”

막사 문을 두드리자 곧바로 터져 나온 거친 응대에 주눅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들어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빼꼼히 문을 열고 슬쩍 머리를 들이미는 라 이. 안을 들여다보니 모두들 한 성깔 할 것 같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뿐이다.

“넌 뭐야?”

찔끔해 하는 라이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한 사내가 막아서며 물었다.

“야, 전령한테 겁줘서 뭐하려고 그래! 중대장 찾아왔냐?”

그도 다른 사내들 못지않게 덩치가 좋았다. 행동은 꽤 친절했지만,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로 인해 인상은 더욱 무시무시했다.

“예.”

“저쪽으로 가봐.”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긴장감에 쭈뼛쭈뼛 걸어가는 라이를 바라보며 모두들 키득거렸다.

“쓰벌. 저런 초짜를 전령으로 보내다니. 저러다가 길 잃으면 어쩌려고.”

“귀엽잖아.”

“이런 미친 새끼. 사내놈이 귀엽긴 뭐가 귀여워? 귀여운 거라면 당연히 어린 여자애지. 그런데 왜 우리 대대에는 여자 용병이 없는 거야? 젠장.”

“너 같은 놈이 있는데 여자를 넣겠냐?”

그러자 모두들 왁자지껄하게 웃는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대화 속에는 걸쭉한 욕설이 난무했다. 라이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원색적인 욕지거 리들이…….

똑똑!

“들어와!”

빼꼼히 문을 여니, 침대 위에 반쯤 드러누워 책을 읽고 있는 올란도가 보였다. 올란도는 라이가 이런 한밤중에 찾아온 게 뜻밖인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들 발령이 난 그날 밤은 편안하게 대기대에서 자고, 그 다음날 자대로 들어가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들어간다고 해서, 월급을 한 푼이라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던 올란도는 이내 활짝 웃으며 라이를 맞이했다.

“어이구, 우리 순둥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쪄?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걸 보면 말이야.”

일부러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자신을 놀리는 올란도의 짓궂음에 라이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것을 어쩌란

말인가. 라이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누가 보고 싶었다고 그러십니까.”

“뭐, 어쨌거나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 어제 축 늘어져 버렸을 때는 파묻어야 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말이야. 너도 모래를 파봤으니 알 거 아니냐. 시체를 묻을 만큼 구덩이를 깊게 파는 게 얼마나 힘든지.”

“말도 안 되는 농담 그만 하시구요. 자요, 이거나 받으세요.”

라이가 건넨 것은 발령장이었다. 발령장을 보던 올란도의 눈동자가 약간 커진다.

“어라, 6급 용병? 녀석 제법 인심 후하게 썼는데? 젠장, 술 한 잔 더 사줘야 하는 거 아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넌 알 것 없다.”

단호하게 말을 끊으며 대충 넘겨버리는 올란도였지만, 눈치 빠른 라이는 그 반응만으로도 자신이 어떻게 6급 용병패를 받게 된 것인지 금방 이해했다. 그러자 로 크로 인해 더러웠던 기분이 더욱 더러워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올란도는 성큼성큼 문 쪽으로 걸어가서는 문을 벌컥 열고 머리를 밖으로 내밀며 외쳤다.

“각 소대 소대장들 집합!”

올란도의 명령에 사내 2명이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 한 명은 이미 면식이 있는 사내였다. 방금 전에 이곳 중대장실의 위치를 가르쳐 줬던 바로 그 친절했던 사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중대장님.”

“또 출동 명령이라도 떨어졌습니까?”

“그게 아니라 신입이 들어왔기에 너희들에게 소개나 시켜줄까 하고 불렀다. 너희 둘 다 결원이 있지? 누가 데리고 갈래?”

신입이라는 말에 소대장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겉모습으로만 봤을 때, 라이를 쓸 만한 용병이라고 판단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약간 마른 체형에 사나워 보이는 인상의 사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놈이 신참이라고요? 젠장! 어쩌다 하나 들어오나 싶었더니, 저런 비쩍 마른 꼬맹이가 들어오다니. 햇빛에 바짝 말린 멸치도 이놈보다는 통통하겠네요.”

“너는 포기야? 그렇다면 너는?”

그러자 뭔가 탐색하는 듯한 눈길로 라이를 노려보는 사내.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에다가 흉터까지 있다 보니 더욱 인상파로 보였다. 긴장한 라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그 소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제가 데리고 가죠. 어차피 충원이 언제 될지 알 수도 없는데…….’

그 말에 올란도는 휘파람을 불며 감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놀리는 것 같은 말투다.

“오오, 과연 현명한 라이언 언제 올지도 모를 대어를 기다리느니, 눈앞의 피라미라도 키워서 잡아먹겠다?”

‘누굴 보고 피라미라는 겁니까?’하고 콱 쏘아주고 싶었지만, 한 덩치 하는 위압적인 인상의 소대장들 앞에서 감히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는 라이.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소대장 중 한 명은 올란도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내의 그런 행동에 올란도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 면, 여기서는 원래 그렇게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군기 빠진 행동을 지금껏 촌장네 기사들에게서는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라이였기에 내심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올란도는 빙글빙글 웃으며 두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라이, 그리고 이쪽은 내가 총애하는 3소대장 라이언이야. 그리고 방금 전에 나간 녀석은 2소대장 론도. 그 외에 3명의 소대장이 더 있지만 모두들 임무를 맡아 밖에 나가 있으니 한동안은 만날 수 없을 거다.”

“더 이상 하실 말이 없으시면 저도 가보겠습니다.”

3소대장 라이언은 라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짐챙겨서 나를 따라와라.”

돌아서는 라이언에게 올란도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급히 말했다.

“참, 라이언.”

“예, 뭔가 지시하실 게 있으십니까?”

올란도는 손가락으로 라이를 가리키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저 녀석 상태를 좀 봐. 지금 당장 써먹을 수는 없겠지?”

“그렇겠죠.”

“그러니까 누구 한 명 붙여서 단련 좀 시켜.”

올란도는 라이가 받은 실력 평가가 제대로 된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렇기에 자신의 협박과 뇌물에 의해 획득한 엉터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라이를 지금 당장 일터(?)에 투입했다가는 곧바로 시체가 되어 돌아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때문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훈련을 시켜 생존율을 높이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올란도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라이언은 인상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소대원을 한명 증원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뜩이나 모자라 는 인원에서 한 명이 더 없어진다는 뜻이었으니까.

라이언은 불만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길어봐야 한두 달이야. 기왕에 들어온 놈인데 제대로 써먹어야 할 거 아냐?”

“그건 그렇죠.”

아무리 규율이 엉망인 용병단이라고 해도 계급이 깡패다. 라이언은 올란도의 말에 불만이 많았지만, 애써 참으며 방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중대장실에서 라이를 데리고 돌아온 라이언 소대장은 약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누군가를 호명했다.

“하리스!”

그러자 침상에 누워있던 사내 하나가 몸을 부시시 일으키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 체구가 큰 사내는 아니었다. 특징이 있다면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점 과 귀쪽으로 커다란 흉터가 나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창 같은 무기가 그쪽을 훑고 지나간 모양인 듯, 그의 오른쪽 귀까지 통째로 뜯겨 나가고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번에 우리 소대에 새로 들어온 녀석이다. 두어 달 시간 여유를 줄 테니, 네가 책임지고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라.”

하리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 말씀은…, 임무가 생겨 소대가 출동하게 된다 해도 저보고 여기 남아서 저 녀석을 가르치라는 겁니까?”

“당연하지. 어쩌면 내 등 뒤를 맡겨야 할지도 모르는 동료인데, 제대로 훈련을 시켜서 써먹어야 할 거 아니겠냐.”

“흐흐, 그거 농담이시죠? 소대장님 성격을 내가 빤히 아는데, 저놈한테 등 뒤를 맡겨요? 그 말을 내게 믿으라구요?”

하리스의 말에 라이온 소대장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임마! 잔소리 말고 해.”

“싫어요. 다른 사람 시켜요. 한 푼이 아쉬운 판에..

용병 월급은 매우 빈약하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한건씩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따로 수당을 책정해서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누가 목숨을 걸고 임 무를 수행하러 달려 나가겠는가.

“아, 정말 두세 달만 좀 하라니까. 네가 임무를 받지 못해 손해를 보는 건 맞으니, 내가 신병을 교육시키는 것에 대한 수당을 위쪽에 청구해 주도록 하지. 어때?” “흐음, 얼마나 줄 건데요?”

“그건 나중에 이놈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끌어올려 놨는지에 따라 다르지.”

라이언은 라이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너 테스트에서 몇 급 받았냐?”

“6급 받았습니다.”

“뭐, 6급이라고?”

6급이라는 라이의 말에 라이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마치 봉 잡았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바짝 말린 멸치 같은 체구로 봤을 때 잘 받아봐야

8급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6급이라니! 그 정도라면 체력만 좀 보완시켜 놔도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해내고도 남는다는 말이 아닌가.

“완전 재수! 내가 뽑기 운이 있었군. 흐흐, 론도 녀석이 배 꽤나 아파하겠는데.”

기분이 좋은 듯 라이언은 환하게 웃으며 라이에게 다시 물었다.

“너 딴 데서 용병 생활 해봤었냐?”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럼 실전 경험은?”

“없습니다.”

실전 경험이 없다는 대답에 라이언의 환하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죽어라 훈련만 받았다는 말이군.”

“예.”

초짜라는 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른 용병대에서 나쁜 버릇을 배워오지 않았다는 장점도 있으니까. 라이는 지금 몸도 마음도 백지인 상태. 이쪽에서 가르쳐 주는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놈인 것이다. 라이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위안했다.

“목검으로 말뚝을 두들겨 패는 것과 진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완전히 다르지. 네가 6급 용병패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실전에 나간다면 첫 임무 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고 시체가 될 게 뻔해.”

라이언은 하리스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두어 달 뒤에 라이가 5급을 통과할 수 있는 실력으로 만들어 놓으면 내 수당으로 3골드를 받도록 해주지.”

목숨을 거는 것도 아닌데, 3골드씩이나 준다니. 그 정도라면 꽤나 보수가 후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제안을 받은 하리스는 실쭉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럽 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요? 하지만 나중에 그런 일 없었다고 시침 뚝 떼시면 나만 바보 되는 거 아닙니까. 제가 소대장님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만한 재량권을 쥐고 있는 것도 아 니고…….”

하리스의 의심스런 시선에 라이언은 울컥해서 소리쳤다.

“이 망할 새끼! 날 못 믿겠다고? 좋아. 지금 당장 중대장한테로 같이 가자. 중대장 말이라면 믿겠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헤헤. 뭐, 저야 그래 주시면 좋죠.”

하리스는 슬쩍 라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저쪽 자리를 써. 내 옆자리니까 여러모로 편리할 거야. 너는 우리가 다녀오는 동안 짐 정리나 하고 있어.”

“예.”

“자, 그럼 중대장실로 가시죠.”

그런 뒤 기분 좋은 얼굴로 중대장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하리스. 그런 하리스를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던 라이언은 이빨을 으드득 갈 수밖에 없었다. “이 개새끼. 나중에 두고 보자.”

“에이, 사내가 왜 그리 꽁해요. 그리고 제가 지금 틀린 소리 하는 게 아니잖아요. 계약은 언제나 확실하고 명확하게! 이게 좋은 겁니다, 흐흐흐.”

그 둘이 중대장실로 떠난 후, 라이는 하리스가 권한 침상에 살며시 앉았다. 건초를 잔뜩 넣은 매트는 향긋하면서도 푹신했다. 대기대와 달리 이곳에 있는 매트는 건초를 자주 갈아주는 모양이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여기에서 살아야 되는 건가?”

집 떠난 이후 참으로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다. 여기도 평안한 곳은 결코 아닌 것 같았지만, 일단 매트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꼭 고향의 자기 침대 같았으니까. 매트를 가만히 매만지던 라이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흠칫 고개를 들었다. 옆쪽 침대에 누워있던 사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는 눈이 환해질 만 큼 대단한 미남자를 이런 노예부대 안에서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멍하니 라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상대는 되려 불쾌하다는 듯 툭 내뱉었다.

“뭘 봐?”

“먼저 보고 있었던 놈은 자기면서…….?”

울컥했지만 라이는 슬쩍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저쪽은 고참이었고, 자신은 신입이니 괜히 다퉈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자도 괜찮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임자 있는 침상만 아니라면, 자리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니까 말이야.”

생긴 것과 달리 말투는 아주 퉁명스럽고 싸가지가 없었다.

‘젠장, 내가 참아야지.’

라이는 무기류를 자신의 사물함에 쑤셔 넣은 다음, 갑옷을 벗었다.

“이대로 잘까??

무척 피곤했지만 아직 이곳의 분위기를 잘 모르는 상황이니만큼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에 소대장과 하리스라는 인간이 주고받던 얘기 를 떠올려보면, 아무래도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자신을 찾을 것만 같았다.

이때, 그의 시야에 낡아빠진 갑옷이 들어왔다.

‘그래, 노니 뭐해. 기름이나 먹이자.’

가죽제품을 오래 쓰는 데는 기름을 듬뿍 먹여두는 게 최고였으니까.

라이언의 얘기를 들으며, 올란도는 내심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라이가 받은 6급 용병패는 자신이 교관에게 협박과 뇌물을 퍼부어서 받게 만든 완전 엉터리 자격 증이었으니까. 그런 놈을 두세 달 교육시켜 5급으로 만든다? 하리스가 초특급 능력을 지닌 교관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올란도는 희망에 들떠 환히 웃고 있는 하리스에게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그건 자신의 비리와 관련된 일이었 으니까.

“좋아.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위에 건의해서 수당 3골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지. 그럼 됐나?”

하리스는 희희낙락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중대장님. 그럼 약속하신 겁니다?”

“그래, 내 약속하지.”

하리스가 중대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라이는 침상에 앉아 갑옷에 기름을 먹이고 있었다.

“뭐하고 있냐?”

“갑옷에 기름 먹이는 중인데요.”

하리스는 라이의 갑옷을 뺏어들고 대충 살펴보더니, 다시금 라이에게 던져준 뒤 말했다.

“시간 낭비하지 마라. 그런 쓰레기에다 기름을 먹여봐야 어디에다가 쓰겠냐. 이미 수명이 다한 갑옷이야.”

“그래도 갑옷이라고는 이거 밖에 없는데 어쩝니까. 이렇게라도 해서 써야지.”

“네 두세 달 월급을 모아서 중고품을 구입하도록 해. 아무리 싸구려라고 해도 저것보다는 백배 나을 테니까.”

그 말에 라이는 답답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럴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어요. 행정관님한테 얘기 들었는데, 월급은 직접 주는 게 아니라, 통장에 입금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그 통장에 입금된 돈으로 사라는 거잖아.”

“아, 정말 행정관님께서 말씀하시길, 돈은 나중에 제대할 때가 돼야 찾을 수 있다고…….”

이런 식의 동문서답이 계속되자, 하리스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라이에게 물었다.

“너 은행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지?”

“예. 아직까지 한 번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라이. 하리스는 한심하다는 듯 라이의 뒤통수를 내리치며 말했다.

탁!

“에라이! 그게 자랑이냐?”

“제가 언제 자랑했다고 그래요. 지금껏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했잖아요.”

“에이, 빌어먹을! 이런 촌놈한테 그따위로 설명을 해주다니. 잘 들어. 그 말은, 통장의 돈을 현금으로 빼서, 현찰로 들고 다닐 수 없다는 말이야. 대신, 이곳 성내에 있는 모든 상점에서는 물건을 살 때 통장만 들이밀면 알아서 그 안에 들어있는 돈을 빼간다고.”

그 말에 라이는 황급히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통장을 꺼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단순한 종이뭉치인데, 그 속에 돈이 들어갈 수도 있고, 또 그 돈을 빼내 는 재주가 있다니. 정말 놀랄 노자였다.

“와, 신기하네. 어떻게 이 안에 들어있는 돈을 빼갈 수 있지?”

옆에서 듣고 있던 하리스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라이의 뒤통수를 다시 한번 쥐어박았다.

딱!

그리고는 속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쿵쿵 치며 말했다.

“이런 무식한 새끼! 말이 그렇다는 말이야. 그 속에 돈이 어떻게 들어가 있겠냐? 돈은 은행이라는 곳에 있지. 대신 여기에는 은행에 보관되어 있는 네 돈의 액수가 기록된다는 말이야. 상점에서 네가 물건을 구입한 다음에 통장을 내밀면 물건 값만큼을 통장에 기록된 금액에서 제외한 다음, 그만큼의 금액을 은행에서 찾아가는 거야. 이제 이해가 가냐?”

하리스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라이는 월급을 어떻게 빼서 쓰는지 그 방법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네 월급이 좀 모이게 되면 갑옷부터 사러 같이 가자. 그놈의 통장을 어떻게 쓰는 건지 내가 직접 가르쳐 주지. 가만히 보니 너 혼자 갔다가는 바가지를 왕 창 뒤집어쓸 게 뻔하니 말이야.”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고맙죠.”

두 사람이 통장을 사이에 두고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중대장실이 있는 방향에서 올란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대장들 집합!”

“이런 젠장, 또 무슨 일이야?”

라이가 고개를 들어 보니, 불만 가득한 어조로 투덜거리며 중대장실로 걸어가는 라이언 소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설마 또 출동하라는 것은 아니겠지?”

“이런 젠장,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게 며칠 전인데, 또야?”

“윗사람들이 우리를 그냥 놀려 둘 리가 있겠냐? 놀고 있는 놈들에게 돈 줘야지, 밥 줘야지……. 배가 아플 수밖에 없겠지.”

짜증스런 어조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소대원들의 말대로라면 출동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출동 명령이 떨어질 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 말 그들의 예상대로 출동을 나가는 것일까? 그 해답은 곧이어 밝혀졌다.

라이언 소대장이 거칠게 문을 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출동 준비해라.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예? 무슨 임무인데 그러십니까?”

그러자 딴 쪽에서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출동이야.”

“야야, 바트. 그 주둥이 닥치지 못해!”

연신 투덜거리는 바트라는 사내에게 인상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매섭게 쏘아붙인 라이언 소대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이번에는 상단 호위 임무다. 예정기한은 약 1개월! 성공 수당은 월급의 100%다. 20분 내로 출발할 예정이니, 알아서 짐들 챙기도록! 알겠나?” “옛!”

아침이 되어 해가 뜨면 더욱 이동하기 힘든 게 사막이다. 그렇기에 이 한밤중에 바로 출발하는 모양이다. 지금 출발하면 최소한 덥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성공 수당을 퍼센트 단위로 발표하는 이유는, 각 용병들마다 월급의 액수가 틀렸기 때문이다. 즉, 성공수당이 100%라면, 월급 1골드 받는 자는 1골드를, 2 골드 받는 자는 2골드를 추가로 받게 된다는 말이었다. 물론, 임무 수행에 실패했을 때는 땡전 한 푼 받지 못하고 말이다.

출동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짐을 싸고 있는 동료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하리스. 여기에 남게 된다는 것은 곧 이번 수당을 날리게 된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였 다.

“젠장,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이 중대한 시점에 이런 꼬맹이한테 발목이 잡히다니…….”

투덜거리던 하리스는 라이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외쳤다.

“뭘봐, 새꺄!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자. 내일 아침부터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될 만큼 박박 굴려줄 테니까.”

“예.”

동료들과 같이 출동할 수 없다는 답답함에 괜히 라이에게 신경질을 내는 하리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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