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0권 8화 – 크라레스의 속셈?

크라레스의 속셈?

“루겔 다란스?”

“예. 그녀석도 포함시켰으면 합니다.”

교관의 말에, 상급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녀석은 그동안 배운 검술조차 제대로 구사하지도 못하는데……?”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는, 검술을 얼마나 완벽하게 익혔느냐가 아니라 검술에 대한 이해도입니다. 루겔 다란스는 검술을 숙달시킬 시간이 부족해서 제대로 구사 하지 못하는 것일 뿐, 검술에 대한 이해도는 여기에 있는 아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허, 참. 정말 이해를 못하겠군. 자네 말대로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한 거지?”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코린트에서 2년 동안 지낸 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아마, 그 때문에 기사학부 입학시험에 탈락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코린트에 감으로 인해서 잃어버리게 된 세월을 검법만 새롭게 익힌다고 해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코린트에서 검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몰라도, 배웠다면 미묘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상대편 기사와 조금만 검을 섞어 봐도 상대가 어느 나라에서 어떤 검술을 배웠는지를 파악하는 게 가능한 이유는, 그만큼 나라마다 각기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 기 때문이다.

검을 쥐는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미세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스텝을 밟는 간격이나 공격하는 타이밍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사소한 차이점들 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다른 나라에서 검술을 배워오게 되면, 거기에서 무심결에 몸에 배여 온 자세를 교정하는 것만으로도 족히 몇 년이 필요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코린트 쪽에서는 권장되는 자세가, 크라레스쪽에서는 고쳐야 되는 나쁜 자세인 경우까지 있었다.

사실, 이것도 다 실전검술로 따진다면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는 문제겠지만, 학교 수업이라는, 실전과는 거리가 먼 우물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보니 한번 그곳 의 선생들에게 눈 밖에 나게 되면 두고두고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흠, 자네가 그렇게까지 추천하는 것을 보면 재능이 있긴 있는 모양이군. 그런데 신분 조회는 의뢰했나? 코린트에 가있었다고 하니 조금 미심쩍어서 말일세.” 그러자 교관은 곧바로 대답했다.

“이미 정보부에 다란스의 신분 의뢰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없다는 답장을 얼마 전에 받았고 말입니다.”

부하의 꼼꼼한 일처리가 마음에 든 듯 흐뭇한 표정을 짓던 상급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겨우 아카데미에 특례 입학시키는 것 정도 가지고, 다른 나라의 정보부가 관심을 가질리는 없겠지. 알겠네. 자네의 말대로 그녀석의 이름도 승급자 명 단에 포함시키도록 하지.”

하지만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위쪽에서 원하는 것은 ‘재능’이었을 뿐, 이 아이들을 어떻게 써먹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하달된 바가 없었다. 그들도 여기에서 뽑힌 애들이 아카데미 기사학부에 특례입학 된다는 정도밖에는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곳 아카데미에 가서 조금만 더 ‘재능’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되면, 그 다음 과정부터는 그들을 가르치게 되는 교관들이 크라레스의 정규 기사들이 된다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만약 그 정보가 조금이라도 새나갔다면 크라레스의 상층부에서는 난리가 났으리라. 기사들을 투입해서 테스트를 한다는 말은 곧 ‘오러(氣)의 수련을 의미했기 때 문이다. 왜냐하면 정규 기사들만이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니까.

그날 교관들은 겨우 이 정도 미끼를 가지고 타국의 정보부가 관심을 가지지는 않을 거라고 나름 결론을 지었지만, 거기에 관심을 가진 나라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제국 코린트였다.

예전에 한번 크라레스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까여본 경험이 있는 코린트였기에, 이번 일도 무슨 일인가 싶어 박쥐들을 몇 마리 밀어 넣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루겔 다란스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루겔 다란스라구요?”

“오늘부터 네 이름이다. 신상정보를 확실하게 외우도록! 실수하면 안 돼. 알겠나?”

두로인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카데미 기사학부에서 중위권 성적을 거두고 있던 성실한 학생일 뿐이었다. 그가 자신 있게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지금껏 배워온 칼질뿐이다. 물론 그것도 제대로 다 배우지 못한 엉터리일 뿐이었지만…

그런 그를 데려다가 정보원으로 써먹겠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저…, 구체적으로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뭡니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보고서를 보니, 어렸을 때 크라레스에서 몇 년간 거주했다지?”

“그건…”

잠시 머뭇거렸지만, 도저히 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곧 인정했다.

“예,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두 눈을 치켜뜨며 따졌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오기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죠? 그렇게 자세히 조사해 보셨다면, 제가 왜 그 지방에서 거주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실 거 아닙니까. 순전히 그건 아버지의…….”

사내는 차가운 표정으로 두로인의 말을 끊었다.

“자네 아버지와는 상관없다네, 젊은이.”

“그, 그럼.. .?”

“자네가 크라레스 쪽에서 자랐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어때? 지금은 잘 숨기고 있지만, 크라레스 쪽 억양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겠지? 하긴, 무려 5년씩이 나 살았으니 말이야.”

“그…, 그야…….”

“자네한테 건네 준 그 문서를 읽어 봐. 물론 크라레스쪽 억양으로 말이야.”

어쩔 수 없었다. 사내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두로인은 루겔 다란스라는 놈의 신상정보를 쭉 읽어 내려갔다. 크라레스쪽 사투리로……. 두로인이 다 읽고 나자 사내는 박수를 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단 한 점의 미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억양 없이 말 하다 보니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호오, 제법이군. 그 정도면 아주 훌륭해. 기대 이상이야. 지금부터 그 문서를 확실하게 암기하도록 해. 나중에 테스트 해보고, 틀리면 약간의 고통을 당하게 될 테 니까,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나?”

그는 일어서면서 다시 한 번 더 강조했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두로인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는 레카스 아카데미의 기사학부에 다니는 평범한 학생일 뿐이란 말입니다. 아카데미에 다닌 이후로, 집에도 거의 돌아가 본 적이 없습니다. 제 아버지의 잘못, 아니 저희 친척의 잘못 때문이라면..”

“쉬~, 우리 시간낭비 하지 말자구. 분명하게 말하지. 네가 이리로 잡혀 온 것은, 크라레스쪽 말에 익숙하다는 점, 그것 하나였어. 15세 전후의 소년 중에서 검술에 능하면서도 크라레스쪽 억양에 익숙한 놈. 그게 위쪽에서 찾아내라고 한 조건의 전부였거든. 알겠냐?”

“예? 예.”

“그럼 이제부터 그걸 달달 외워. 안 그러면 뜨거운 맛을 보게 될 테니.”

두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문서의 내용을 달달 외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몇 대 맞고 보니, 이건 개긴다고 해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정보부에서 두로인이 받은 교육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형편없는 것이었다. 사실, 시간여유가 너무 촉박한 이유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정보부로서는 선택의 여지 가 없었다.

크라레스 말에 능통하면서도, 검술에 능해야 했고, 또 15세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렇다보니 정보부에서도 두로인 같은 초보자를 잡아다가 이런 무리 수를 두게 된 것이었다.

“자, 영문도 모르고 우리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와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네, 젊은이.”

사내는 두로인을 잠시 바라본 다음 말을 이었다.

“자네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무척 궁금하겠지? 물론 자세한 것까지 밝힐 수는 없지만, 몇 가지만은 알려주지. 자네가 이제부터 해야 하는 일은 황제 폐하 와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거야. 크라레스에서는 지금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어. 그런데 왜 그런 짓을 벌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쪽에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못하고 있단 말이야. 그래서 자네와 같은 젊은이를 뽑아 들이게 된 거지.”

“하지만 저는…..”

사내는 두로인이 말조차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쉬~, 물론 자네가 전문적인 첩자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자네도 알고, 여기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야. 우리는 자네가 무슨 일을 해주길 원하는 게 아니야.”

“그, 그렇다면……?”

“자네는 그저 여기에서 교육받은 대로 루겔 다란스라는 사람으로 살기만 하면 되는 거야. 크라레스에서 말이지. 자네는 최대한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도록 주 의만 하면 돼. 그러자면 자네가 코린트에서 배운 검술! 특히 아카데미 정규과정에서 배운 것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건 잘 알겠지?”

사내의 말에 두로인은 무척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뻔한 주의는 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핫핫, 아직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스텝을 밟는 타이밍이라든지, 손목을 꺾는 각도 등등……. 우리 코린트 검술의 특징들이 묻어나올 수 있는 곳은 너무 나도 많다는 게 사실이야. 그러니 자네가 어린 시절 초등교육을 그곳에서 받았다는 게 그 때문에 중요한 거야. 제발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 말에 두로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예.”

아버지의 일 때문에 크라레스에서 살았던 5년. 그곳에서 그는 어쩔 수 없이 크라레스의 초등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서 가르쳐 주는 기초검술을 배웠 고, 몸에 익혔다. 그로인해 그의 인생은 엉망으로 꼬여버렸다.

나중에 아버지와 함께 코린트로 돌아와 보니, 검술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아카데미에서의 검술 성적이 중간 정도밖에 가지 못한 것도 다 그 탓이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자신이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다니…….

낙담해 하는 두로인을 향해 사내는 예의 그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이것은 자네에게 커다란 기회가 될 수 있다네. 별 볼일 없는 3류 기사의 아들. 주위에 자네의 뒤를 봐줄만한 지위를 가진 사람도, 재력을 지닌 사람도 없지. 그렇 다고 아카데미 성적이 특출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이래서는 자네도 자네 아버지처럼 3류 인생을 살다 갈 뿐이야. 하지만 이번에 자네는 엄청난 기회를 잡은 거야. 크라레스는 본국만큼이나 기사들의 실력이 뛰어난 강국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거기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되는 거라고.”

“뭘 가르치는 것인지, 뭐 그런 정보를 빼내라는 겁니까?”

예상외로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정보는 필요 없네.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까지 교육시키려는 것인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선발된 인원이 과연 몇 명이나 될지..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바로 그거라네. 그러니 자네는 딴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열심히 하기만 하면 돼. 최종적인 것은 자네가 탈락하고 난 다음에 묻기로 하지.”

코린트의 정보부에서는 두로인이 최종 과정까지 따라갈 수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두로인에게만 목을 매달고 있는 게 아니었으니 까.

두로인에게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크라레스에 첩자로 투입하는 아이들의 숫자는 한둘 정도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을 선발하는 기준은 크라레스쪽 말을 얼마나 능 숙하게 구사하느냐였다.

때문에 검술 실력이 뛰어난 아이를 보낼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크라레스와 코린트의 검술은 완전히 달랐다. 그런 만큼 코린트의 검술에 이미 익숙한 아 이일수록 발각될 가능성만 높아질 것은 뻔한 사실이었으니까.

두로인을 돌려보낸 다음, 사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첩자로 심어놓은 애들이 하나 둘씩 탈락할 때, 그때쯤 되서야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런 얼토당토않은 짓을 꾸미는 크라레스의 저의가 도대체 뭐 지? 이런 식의 벼락치기 교육으로 제대로 된 기사를 양성시킬 수는 없다는 것쯤은 그쪽도 뻔히 알 텐데 말이야. 생각할수록 미스터리로군.”

크라레스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코린트의 정보부. 코린트는 크라레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처지였기에 이런 식으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코린트와 달리 대부분의 국가들은 크라레스의 움직임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알카사스나 크루마라고 해서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이곳은 크루마의 정보부.

“이건 또 뭔가? 15세 정도의 아이들을 대량으로 끌어모아 검술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예.”

정보관은 보고서를 탁자에 탁 내려놓으며 으르렁거렸다.

“겨우 이따위 보고서를 나한테까지 올린 이유가 뭔가?”

매서운 질책에 크라레스 담당관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노예까지 몽땅 다 그 소집대상에 포함시켰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재능이 있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아카데미 기사학부로 편입까지 시켜준다고…….?

“헛소리! 겨우 그 정도 교육만으로 제대로 된 실력자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정도 수준의 교육은 우리나라의 웬만한 학교에서는 다 가르치고 있어. 아니,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수준 높게 가르치고 있지.”

“하, 하지만.”

“자네는 노예까지 끌어 모았다는 점에 무게를 둔 모양인데, 내 생각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행동이야. 여기, 이곳을 읽어보란 말이야.”

정보관은 보고서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먼저 교육이 시작되고 있는 곳의 실태를 말이야. 어중이떠중이 다 끌어 모아 놓다보니, 가르치고 있다는 게 겨우 기본검술 정도가 아닌가. 이렇게 해서 제대로 된 기사를 만든다고? 흥! 웃기는 소리지. 명문가에서의 검술교육은 늦어도 7세 이전에 시작되는 게 상식이야. 그렇게 해도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로 성장하는 자는 극소 수지. 그런데 15세? 흥!”

괜히 쓸데없는 보고서를 올렸다가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게 된 부하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너는 그놈들이 왜 이런 쇼를 벌이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나 찾아봐.”

“이유를…, 말씀이십니까?”

떨떠름한 반응에 정보관은 더욱 불같이 역정을 터뜨렸다.

“이런 답답한 놈을 봤나! 전 국가적으로 이런 쇼를 벌이는 것은, 뭔가 숨기기 위한 연막작전일 가능성이 크잖아. 안 그래?”

“아, 그, 그렇군요. 지금 당장 가서 조사해 보라고 이르겠습니다.”

황급히 부하가 나가고 난 후, 정보관은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쓸모없는 놈. 크라레스쪽 담당관을 다른 놈으로 바꾸던지 해야지 원……. 저렇게 대가리가 안돌아가서야.”

이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겐님께서 급히 뵙기를 청하십니다.”

루겐이라는 말에 정보관은 인상을 찡그렸다. 루겐은 엘프들에 대한 정보를 전담하는 담당관이었다.

“들어오라고 해.”

곧이어 루겐이라 불린 사내가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엘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심상치 않다? 뭐가 말인가?”

“상당수의 엘프들이 국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게 확실합니다.”

어떻게 보면 엉뚱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엘프들이 이 세상의 마지막 안식처로 선택한 곳이 바로 크루마 제국이다. 알카사스와 같은 강대국마저도 엘프 노예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이상, 크루마쯤 되는 강대국이 아닌 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크루마를 떠난다는 말 인가?

“확실한 정보인가?”

“예, 정보관님. 떠난 것 외에, 그들의 인구수의 급격한 감소를 설명할 다른 요인이 없었으니까요. 치명적인 전염병이 퍼져 엘프들이 떼몰살을 당했다는 보고는 정 보관님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흐음…, 대체 인구가 얼마나 줄어들었기에?”

“최소한 3만…….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3만이라면 엄청난 숫자였다. 크루마 전역에 거주하는 엘프들의 숫자를 몽땅 다 모은다고 해도 100만이 채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조사해 봤나?”

“국외로 빠져나간 것 같다는 정도만 파악해 냈을 뿐입니다.”

루겐의 활동영역은 크루마 국내로 한정되어 있었다. 사실, 크루마 국내의 엘프만 조사하는데도 인력이 모자라는 게 사실이었다. 외모가 뛰어난 엘프들을 노리는 사냥꾼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인 만큼, 엘프들은 숲 속 깊은 곳에 자신들만의 마을을 건설하고 살고 있었다. 외지인들의 출입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그런 폐쇄적인 마 을을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정도까지라도 조사해 낸 것만 봐도 루겐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알겠네. 나머지는 내가 알아보기로 하지. 그럼 나가보게.”

정보관은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한동안 고민했다.

엘프들에 대한 인구 조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행해진 적이 없었다. 티란 엘 그린레이크가 엘프족을 대표하여 크루마 황실과 협상을 할 때, 세금과 병역을 면제받 는 것으로 합의를 봤기 때문이다.

그 대신 엘프족은 크루마 제국의 마법이 발전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크루마는 초강대국 코린트에 버금가는 마법능력을 단기간에 구축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엘프들의 숫자가 줄었다고 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아니, 오히려 엘프들의 반발만 살 수 있었다. 자신들이 엘프들을 항시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 뻔히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일 테니까.

“아냐. 아직은 그냥 지켜보는 게 좋을 거 같아.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보관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지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