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0권 9화 – 엘프들의 오랜 꿈

엘프들의 오랜 꿈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오랜 세월 떠돌아다닌 엘프들에게 있어서, 자신들만의 왕국 건설은 거의 꿈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왕국을 개국하기 전에 처리되어야 할 선결 조건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외세로부터 자신들의 왕국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이었다.

물론 인간에 비해 엘프는 훨씬 더 우수한 육체적 조건을 지니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날씬하면서도 탄탄한 근육, 뛰어난 시력과 집중력. 더군다나 정령과의 친화력 마저도 아주 높아, 정령술사의 비율이 인간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다.

엘프들이 지닌 그런 우수한 특성에 가장 궁합이 잘 맞는 무기는 바로 활이었다. 그리고 활은 마법과도 잘 어울렸다. 아니, 잘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 위력을 수 십, 수백 배 증폭시켜 주는 효과까지 안겨주었다.

울창한 삼림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엘프들의 왕국을 치기 위해 출동한 1만 명에 달하는 중무장 보병대를 전멸시키는데, 겨우 100여 명 정도의 엘프들만 보내도 충 분할 정도로 말이다.

엘프들의 전성시대 때는 중앙대륙 전체를 엘프들이 지배했었을 정도였다. 그때는 한낱 노예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하등한 호비트가, 지금은 대륙 전체를 지배하 는 상위 종족으로 탈바꿈할 줄이야 그 누가 예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활과 마법과 숲이라는, 이 세 박자의 효율이 너무 좋았던 탓이었다. 인간들이 타이탄이라는 무시무시한 병기를 개발하고 또 발전시키고 있을 때, 그들은 그저 과거의 전통대로 활과 마법만을 갈고 닦았다. 숲속에서의 그들은 거의 무적이었으니까.

하지만 타이탄을 앞세운 호비트족 병사들이 숲 속으로 쳐들어 왔을 때, 엘프들은 깊은 절망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이 가진 무기로는 타이탄이라 불리 는 거대한 강철괴물에게 그 어떠한 상처도 입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로나사 평원 인근의 광활한 원시림에 자리잡고 있던 엘프들의 위대했던 왕국들이 하나 둘 멸망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엘프들은 저 북쪽 변방의 척박한 지역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다급해진 엘프들의 모든 왕국들이 연대하여 타이탄에 대한 방어책을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했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얻은 결론은 타이탄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타이탄 외에 다른 대안이 전혀 없다는 것뿐이었다.

이에 엘프들의 왕들 중 한 명이 드워프와 합작하여 타이탄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긴 하지만, 그 타이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왕 국 역시 몇 십 년 후, 타이탄을 앞세우고 쳐들어온 호비트들에 의해 멸망당해 버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거 선조들이 세웠던 왕국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우수한 기사와 강력한 타이탄의 보유는 필수사항이었다. 타이탄이야 마법으로 만드는 것이니 생산 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걸 조종할 기사였다.

바로 엘프 기사 말이다.

그래서 엘프족의 장로회의는 언제나 이 문제로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의 선조들께서 세우셨던 영광스러웠던 왕국들이 하나 둘 몰락한 이유가 뭐겠나? 그 저주받아 마땅한 마물, 타이탄 때문이었지 않나. 우리가 아무리 활과 마법에 능하다고 해도, 타이탄과 맞서 싸울 수는 없음이야.”

그랜딜의 회한에 찬 말투에 한 장로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타이탄 제작 과정에 참여해 본 경험까지 가지고 있으니, 의장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동족들 중에서 검술을 제대로 익힌 엘 프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지요. 어떻게든 타이탄을 만든다고 해도, 누가 그걸 조종할 겁니까?”

그러자 한 장로가 손을 들고 일어나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호비트 기사놈들을 고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랜딜은 답답하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만약 그놈들이 타이탄을 들고 도망친다면, 현실적으로 막을 방법이 있나?”

타이탄을 막는 방법은 타이탄 뿐. 만약 기사가 마음을 모질게 먹고 튄다면,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전혀 없었다.

“제 말은, 타이탄을 인계하기 전에 안전장치로 미리 마법으로 세뇌한 뒤에 쓰면 되지 않습니까?”

정식으로 고용하겠다고 속여 용병기사들을 모집한 다음, 그들을 몽땅 다 세뇌해서 써먹자는 것이다.

“호~,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용병으로 떠도는 그래듀에이트가 몇이나 되겠나? 더군다나 세뇌에 성공할 확률도 그리 높지 않고 말일세. 최소한 2/3는 미쳐버리던 지, 아니면 폐인이 되어버릴 텐데…….”

“그렇게 해서라도 1/3이라도 건지는 게 어딥니까?”

턱을 만지며 고심하던 그랜딜은 잠시 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쩔 수 없지. 한번 모집을 해보게. 제대로 된 것들이 걸려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수밖에 없으니까 말일세.”

“예, 의장님.”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장로가 자리에 앉자 그랜딜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낱 호비트 따위도 그래듀에이트가 잘만 되는데, 신들께 선택받은 종족인 우리 엘프가 그깟 검술 하나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있다니……. 쯧쯧, 참으로 통탄할 일이로구먼.”

“속설대로 우리들 엘프는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힐 능력이 없는 것일지도…….”

장로 중 한 명이 마치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걸 들은 그랜딜 의장은 불 같이 소리치며 화를 냈다.

“헛소리! 한낱 호비트 따위도 검술의 궁극을 익히는데, 호비트보다 월등한 신체조건과 오랜 수명을 지닌 우리 엘프에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가 그 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 아카데미에서 실력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한 검술교관들만을 초빙해서, 재능 있는 아이들 만을 가려 뽑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그것도 무려 5년씩이나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대로 된 결과가 없다는 것은…….?

이것은 그랜딜을 주축으로 하여 추진하고 있는 대규모 엘프 기사 양성 계획을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모두들 성공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지 만, 지금까지 나온 결과가 그다지 신통치 않자 실망한 것이다.

“어허, 아직 겨우 5년밖에 안 지났네. 호비트들이 검술을 익히는데 있어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투자하는지 자네들도 잘 알지 않나. 아주 어린 6~7세부터 교육을 시작하여, 30년은 지나야 그래듀에이트의 자격을 얻게 되지. 그것도 극소수가 말일세.”

“교관들의 말이 더 이상 해봐야 시간낭비랍니다.”

그때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한 장로가 불쑥 말을 던졌다.

“얼마 전에 짐머맨이라는 교관이 좀 엉뚱한 얘기를 하더군요. 이 상태로는 아무리 교육을 시켜봐야 헛거라면서 말입니다.”

그랜딜은 그 장로의 말에 호기심을 드러내며 급히 물었다.

“도대체 그 교관이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러나?”

“제발 검술 교육 외에 다른 걸 가르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방해만 된다면서요.”

“그건 대체 무슨 말인가?”

“아이들이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말(言語)을 배우듯, 우리 엘프들은 마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어깨너머로 배운 마법이 검술 교육에 방해가 된다고 하더군요. 힘겹게 검술을 익히기 보다는, 마법을 이용한 편법에 빠져든다고 말입니다.”

그 장로의 말에 멍하니 생각하던 그랜딜이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꽤 일리가 있는 의견이로군.”

그랜딜이 호응을 해주자 그 장로는 자신감을 얻은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검술을 익힘에 있어서 좀 더 깊은 경지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은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열심히 검술을 갈고닦다 보면, 어느 샌가 보다 깊은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호, 그것 참 말이 되는구먼. 어떤 면에서는 마법하고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네 그려.”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마법을 익힌 상태에서는 그게 잘 안 된다는 거죠. 우리 엘프들은 검술을 익히면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그걸 마법으로 그냥 대치해 버 리게 된답니다. 즉, 마검사가 된다는 말인데요. 일대일 대결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겠지만, 절대로 타이탄을 조종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로까지 검술을 익힐 수 없다는 게 문제라고 하더군요.”

장로의 말이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고 느낀 그랜딜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그 교관의 의견대로 해주도록 하게. 앞으로 검술교육 대상자들에게는 절대로 마법을 알려주면 안 된다고 말이야. 물론 궁술 교육도 금지 시키도록 하게. 오로지 검술만을 교육시키도록 해. 그렇게까지 해도 안 된다면, 우리 종족은 타이탄을 조종할 수 없는 것이겠지.”

이때, 한 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의장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저는 마도전쟁때 위대한 엘프 기사를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그 장로는 당시 미네르바가 이끄는 기사단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던 장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엘프들의 전설, 즉 골든 나이트를 조종하는 엘프 를 만났던 일을 말이다.

엘프가 타이탄을 조종한다는 말도 처음 듣는데, 그가 조종하는 타이탄이 하필이면 전설적인 골든 나이트라니. 그랜딜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 랜딜은 의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정말 사실인가?”

“물론입니다.”

워낙 당당하게 대답하는 장로였기에 그랜딜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급히 되물었다.

“혹시 그와 얘기는 나눠봤나?”

“얘기는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켄타로아 공작이 개별 행동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었죠. 그 엘프가 다크 폰 치레아 대공과 꽤나 가까운 사이 같아 보였는데, 아 마도 그 때문인 듯 싶었습니다.”

“치레아 대공과?”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이라면 코린트 제국과의 전쟁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크라레스 제국의 영웅이 아닌가. 지금의 크라레스 제국이 코린트 제국과 쌍벽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든 1등 공신이다.

그리고 그의 주인이 되는 드래곤의 양자이기도 했다. 그런 전설적인 영웅과 함께 했다는 말을 들으니, 오히려 그의 이야기가 더욱 신빙성이 있게 느껴졌다. 원래 영웅은 영웅들과 어울린다고 하지 않은가.

그랜딜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한다고 느꼈는지 그 장로가 재빨리 첨언했다.

“제 말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혹시라도 믿지 못하시겠다면, 그 당시 저와 함께 그곳으로 파병되었던 마법사들을 만나 확인해 보십시오. 제 말이 거짓인지, 아닌 지.”

이렇게까지 말하니 그랜딜로서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엘프도 타이탄을 조종할 수 있다는 말이로군. 검술에 숨겨진 깊은 세계는 호비트들만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좋아. 희망이 생겼다. 즉시 검 술에 재능이 있는 애들을 뽑아보도록 하게. 이번에는 마법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애들로 말이야. 그리고 그 조언을 해준 교관을 수석교관으로 삼아 아이들을 가르 쳐 보도록 하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의장님.”

이때, 다른 엘프 장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얘긴데 그러나?”

“정보부 쪽에서 흘러나온 얘긴데, 크라레스 제국에서 15세 전후의 아이들을 대규모로 끌어 모아 검술을 가리치고 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노예든 계집 아이든 상관하지 않고 말입니다.”

“크라레스에서?”

“예.”

그랜딜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크라레스의 의중을 짐작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전쟁 준비일까? 하지만 코린트 같은 강국을 상대로 인해전술(人海戰術) 이 먹혀들 리가 없다.

그렇다고 그딴 짓을 한다고 해서, 그래듀에이트를 대량으로 양산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 더군다나 왜 15세 전후로 연령을 한정시킨 것일까? 한참을 이 리저리 고민해봤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알기 힘들었던 그랜딜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낸 장로에게 지시했다.

“자네가 그 일을 맡아 자세히 알아보게. 그쪽에서 전쟁 준비를 하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조사는 해보는 게 좋겠지.”

“옛, 알겠습니다.”

이때, 또 다른 엘프 장로가 주저주저 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실은, 얼마 전에 정보부쪽에 심어놓은 애한테서 들어온 정보인데 말입니다. 엘프들에 대한 감시를 좀 더 강화하라는 지시가 상부에서 내려왔다고 하더군요.” 감시를 강화하라고 했다는 말에 그랜딜을 둘러싸고 앉아있던 엘프 장로들이 동요했다.

“그게 믿을 수 있는 정보인가?”

“비록 호비트이기는 하지만, 제 제자들 중 하나가 직접 마법을 가르치며 돌봐줬었던 애랍니다. 사제(師弟)의 인연으로 얽매여 있는 관계인만큼, 거짓은 아닐 거라 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너무 추상적인 게 흠이로군. 감시를 강화하라는 것뿐이라니…….”

“좀 더 깊이 알아보라고 할까요?”

잠시 궁리하는 그랜딜. 하지만 그는 곧이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나? 역으로 파악당할 우려도 있으니까 말일세. 이제 우리들의 왕국에 대한 것도 서서히 기틀이 잡혀가는 만큼, 우리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호비트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게. 참, 이번에 자네가 정보부를 하나 조직하는 것도 좋겠군. 지금까지는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정보를 취득해 온 것도 사실이니 말이야.”

“저는 그런 일을 하기에는…….”

“내 생각에는 자네가 적격인 듯 하군. 크루마 상층부에 안면이 있는 사람도 많이 있고 말일세.”

“정 그러시다면. 최선을 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장님.”

“그래, 부탁함세.”

그랜딜은 또 다른 엘프 장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참, 우리 종족의 말토리오 산맥으로의 이주는 어찌되어 가고 있는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의장님. 현재까지 약 4만 2천 명 정도가 말토리오 산맥으로의 이동을 완료했습니다.”

생각 외로 많은 숫자의 엘프들이 벌써 이동을 끝마쳤다는 말에 그랜딜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사냥꾼들의 습격을 막아내기 힘든 소규모 일족들이나 정착을 못하고 홀로 떠돌아다니는 엘프들을 대상으로, 말토리오 산맥으로의 이주를 은밀히 권유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벌써 4만 2천명

에 달한다니.

“이주를 희망하는 엘프들에게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도록 하지. 드워프 촌장들과 약속이 있어서 말일세.”

“의장님, 마을을 좀 더 건설해 달라고 해주십시오. 현재 건설된 마을로는 더 이상 엘프들을 수용하기가 힘듭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들은 염려할 거 없네. 그럼 모두들 수고하게.”

말토리오 산맥에 거주하고 있는 드워프 마을들에는 영구적인 공간이동 마법진이 구축되어 있었다. 그랜딜이 엘프들을 이끌고 건설해 놓은 것이다. 영구적인 공간 이동 마법진의 경우 처음에 구축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구축만 해놓으면 이것만큼 편리한 게 없었다. 이로서, 드워프 마을들은 각기 생산한 방대한 물품들을 효과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모든 드워프 마을의 촌장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도, 다 이 공간이동 마법진의 덕분이었다. 물론, 그게 드워프 마을에 득이 되지만은 않았지만 말이다.

“엘프들이 거주할 마을 3개를 더 건설해 주십시오. 규모는 예전과 동일하게 말입니다.”

“지금까지 건설한 마을의 숫자만 해도 벌써 20개가 넘는데, 또 3개를 건설해 달라는 말이오?”

불만 가득한 항의가 날아왔지만, 그랜딜은 무덤덤한 어조로 대꾸했다.

“하기 싫다면 나한테 뭐라 하지 말고, 주인님께 직접 따지는 게 좋겠군요. 지금 당장 주인님께 말씀드릴까요?”

그러자 격렬하게 항의하던 촌장의 안색이 핼쑥하게 질렸다. 그는 자신이 언제 항의했냐는 듯 다급하게 변명했다. “그, 그런 뜻은 아니었소.”

순식간에 꼬리를 마는 드워프 촌장을 살짝 째려본 그랜딜은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또 누구 이의가 있으신 분 안계십니까?”

“……”

상대는 드래곤이다. 이미 착취당하는 데 이골이 난 드워프들인지라, 이의가 있을 턱이 없었다. 이의를 제기해 봐야 돌아오는 것은 처참한 죽음뿐이라는 것을 그들 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마을 건설에 따른 인원 동원에 대해서는 촌장님들끼리 협의하여 결정하시도록 하십시오.”

“그 외에 더 지시하신 사항은 없소?”

“예, 없으십니다.”

그 말에 드워프 촌장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나마 다행이군. 또, 보석 같은 걸 더 내놓으라고 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귀금속 종류야 이쪽에서 아무리 노력한다고 쑴풍쑴풍 쏟아지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다. 그랜딜은 이런 식으로 드워프들을 쥐어짜고 있는 중이었다. 모든 것은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는 한 마디로 끝이었다. 예전에는 1년에 1개씩 가져다 바치 던 예술품의 숫자가 1달에 1개로 늘어나 있었고, 그 외에 다른 귀중품들도 따로 바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바친 엄청난 양의 재물들이 드래곤에게로 가지 않고, 엘프들의 새로운 왕국을 건국하는 데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