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1권 10화 – 탐욕이 부른 영지전

탐욕이 부른 영지전

도렌과 메르헨, 두 영주가 서로 소유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 지역의 원 소유주는 메르헨 영주였다. 봉토의 대부분이 척박한 산악지역으로 이뤄진 도렌과 달 리, 메르헨은 크기는 작아도 비옥한 배후 평야를 지니고 있었기에 훨씬 더 부유한 영지였다.

국왕이 메르헨의 영주에게 그런 옥토를 배당한 것은, 산맥과 인접해 있는 영지의 방어선을 지키는 데 상당한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메르헨이 담당하고 있는 방어선은 겨울철 굶주린 몬스터들의 주된 침입 경로들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메르헨을 다스렸던 역대 영주들은 침입 경로에 대한 방어 에 엄청난 공을 들여 왔다. 방어하기에 적합한 길목을 골라 튼튼한 요새 6개를 건설했고, 1천에 달하는 병력을 상주시켜 지키게 했다.

병사들이야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살 수밖에 없겠지만, 주민들은 달랐다. 해마다 몬스터들이 쳐들어오는 아주 흉험한 곳이다. 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갔다가 행방불 명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그것도 다른 곳에 살 곳이 아예 없다면 몰라도…….

먼저 거주 이전의 자유를 지니고 있는 주민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농노(農奴)들도 떠나기 시작했다. 영지 밖으로 도망친다면 무단이탈로 문책을 받겠 지만, 영지 내에서의 이동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윗사람에게 뇌물을 집어주던지, 뭐 그런 식의 편법을 써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간 것이다. 산 밑쪽의 보다 안전한 곳 으로.

그리고 그 빈자리를 이웃 영지의 굶주림에 지친 농노들이 파고 들어왔다. 아무리 흉험한 곳이라고는 해도 도렌의 척박한 산지에 비한다면, 이쪽이 훨씬 더 비옥했 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농노들에게서 누가 세금을 거둬 가느냐에서 발생했다. 처음 몇 가구 정도가 은근슬쩍 끼어 들어와서 농사를 지을 때야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 었다. 안 그래도 노는 땅이었기에 그냥 놔두면 완전히 황무지가 되어 버릴 것은 뻔한 이치.

그렇기에 메르헨 영주는 마치 큰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 그들을 내쫓지 않았고, 도렌 쪽에서 세금을 거둬 가는 것도 묵인해 줬다.

처음에는 농토를 보존하기 위해 취한 임시방편이었지만, 요새 지대에 정착하는 도렌 농노들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그 생산량이 무시하기 힘들 정 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걸 통째로 이웃 영주에게 양보하기에는 배가 아팠던 메르헨 영주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농노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가난한 도렌 영주로서도 포기하기에는 이미 덩어리가 너무 커져 있었던 것이다.

서로 간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던 어느 날, 메르헨 영주는 결단을 내렸다.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그때, 요새 지대를 방어하고 있던 사령관에게 철수 명령을 내려 버렸던 것이다. 병사들이 떠난 후, 남겨진 농노들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했다.

천인공노할 만행이기는 했지만, 메르헨 영주는 개의치 않았다. 머리 아프게 이웃 영주와 다툼을 벌이느니, 이 편이 훨씬 뒤처리가 쉽다고 생각했으니까. 몬스터들 의 침입에 의해 농노들이 전멸당했다는데 도렌 영주가 뭐라고 하며 따지겠는가.

그런데 상황은 메르헨 영주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다음 해 봄이 되어 요새를 접수하기 위해 떠난 영주의 병사들이 만난 것은, 요새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도렌의 병사들이었다.

이것은 명백한 침입 행위였지만, 메르헨 영주는 그냥 놔뒀다. 처음에는 도렌 영주의 처사에 분노한 게 사실이었지만, 부하들과 의논을 해 본 결과 현 상황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던 것이다. 바꿔 생각하면, 지금껏 자신의 골치를 썩혀 왔던 방어 임무에서 해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게 아니겠 는가.

‘멍청한 새끼들. 그게 그렇게 먹음직해 보였던 모양이지? 그래! 그거 먹고, 몬스터들하고 피 터지게 싸워 봐라.’

처음 시작은 문제가 약간 있었지만, 결국 양쪽 다 만족스러운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도렌은 식량을 증산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고, 메르헨은 요새 지대 방어에 들 어가던 돈을 절약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그렇게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이 펼쳐진다. 요새 인근에서 대규모 구리 광맥이 발견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개월쯤 전에 벌어진 사 건이었다. 거지나 다름없던 도렌 영주가 단숨에 부유하게 된다고 하니 메르헨 영주의 배가 아프지 않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그 땅은 원래 자신의 것이었지 않은가. 구리 광맥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메르헨 영주는 곧바로 땅을 돌려달라며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땅들 중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을 도렌 영 주가 순순히 돌려줄 리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구리까지 채굴할 수 있게 된 금싸라기 땅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메르헨 영주가 땅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영지전 외에는 없었다. 영지전으로 결론이 나자, 메르헨 영주는 신속히 움직였다. 영지전을 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국왕의 허가를 받는 것이었다.

그는 왜 영지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나열한 장문(長)의 보고서와 함께 상당액의 금품을 뇌물로 바치기까지 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허가는 예상보 다 아주 빨리 떨어졌다. 물론 개전허가(開戰許可) 문서는 메르헨 영주에게만 보내지는 게 아니라, 도렌 영주에게도 보내진다. 영지전에 대비할 여유를 주기 위해서 다.

허가가 떨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도렌 영지로 쳐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는 확실한 승리를 원했다. 그래서 용병길드에 의뢰하여 2천씩이나 되는 떠돌이 용병들까지 끌어들였다. 떠돌이 용병들의 경우 용병단을 고용하는 것에 비해 통솔은 힘들지만, 가격이 아주 저렴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도렌 영주가 요새 지역에 주둔시키고 있는 병력은 겨우 600명 정도. 병사들이 먹을 식량조차도 넉넉하게 지급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군장

(軍葬)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가난뱅이 영주가 자신처럼 부유한 영주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 자체가 그저 가소롭게만 느껴졌다.

메르헨 영주는 봄이 되어 사람의 통행이 가능해지자마자 병력을 일으켰다.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너무 지나쳤던 것일까? 군사적 재능도 별 볼일 없으면서 지휘를 병무관(兵務官)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는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 결과는… 최악의 참패로 돌아왔다.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친 거지 떼로만 보였던 도렌 영지병들이, 사실은 몬스터들을 상대 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지닌 강병(强兵)일 줄이야 그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이게 다 상대를 얕잡아 보고 무턱대고 공격해 들어간 그의 잘못이었다.

메르헨 영주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달은 후였다. 앞쪽에 포진시켰던 용병 부대가 순식간에 붕괴되는 것을 보자마자, 잽싸게 안전한 후방으로 달아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병사들의 피해가 예상보다는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그게 다 도렌 영지병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추격을 멈춰 준 덕분이었다. 어쩌면 그게 도렌 영주가 보낸 화해의 표시였는지 모르지만, 메르헨 영주는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가신(家臣)들이 모두 복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병력은 온전히 남아 있고, 군자금으로 쓸 돈도 풍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평소 깔보던 가난뱅이 영 주에게 평화를 구걸한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도렌 영주가 보내온 평화사절을 내쫓은 메르헨 영주는 이번에는 제대로 상대편을 압박해 들어갔다. 주변의 모든 상인들에게 압박을 가해 도렌과의 거래를 끊게 만 들었던 것이다. 무기나 갑옷은 물론이고, 식량 한 톨까지도 도렌 영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한편, 전쟁 준비도 착착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 해 봄까지 참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겨울이 되기 전에 쳐들어가 끝장을 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번에는 떠돌이 용병들만 고용할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대규모 용병단을 고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병무관의 제안에 재무관은 강하게 반대했다.

“규모가 큰 용병단은 돈이 너무 많이 듭니다, 영주님. 그때 제가 알아봤는데, 떠돌이 용병들을 고용하는 것에 비해 최소 10배 이상의 금액을 줘야 합니다.” “흠, 10배라…….?

메르헨 영주의 미간에 주름이 깊이 잡히는 것을 본 병무관은 급히 덧붙여 말했다.

“이전 전투의 패인이 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모두 다 떠돌이 용병들 탓이었습니다. 그놈들이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단숨에 허물어진 탓에 그 뒤쪽에 포진하 고 있었던 우리 병사들까지 싸울 의욕을 상실해 버린 게 아니었습니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행정관도 불만을 토로했다.

“값이 싸다는 것은 분명 강점이긴 합니다만, 떠돌이 용병들을 통제하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일전에도 그것들이 시내로 들어와 말썽을 부리는 통에 경비대 가 크나큰 곤욕을 치렀지 않습니까.”

자신의 말에 행정관이 긍정적인 발언을 하자, 병무관은 잽싸게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용병들의 일은 용병들에게 맡기는 게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규모가 큰 용병단을 끌어들여, 그들에게 떠돌이 용병들의 통제까지 모두 다 맡겨 버리는 겁니다.”

이번에 동원하고자 하는 용병의 숫자는 전보다 더 많은 4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대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다른 이에게 맡겨 버리자고 하니 영주로서는 썩 내키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그럴 게 아니라, 우리 병사들을 앞에 포진시키면 어떻겠나?”

“안 될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하면 설혹 승리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쪽 병력 손실이 너무 큽니다. 용병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곧 떠날 자들입니다. 그런 자 들과 우리 병사들을 동일시하시다니요. 영주님께서 이번 전쟁에 많은 병사들을 잃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될 걸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를. 아마도 주 변의 다른 영주들이 기회는 이때다 하면서 싸움을 걸어올 겁니다.”

병무관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메르헨 영주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그 말도 옳구먼. 그렇다면 생각해 둔 용병단이라도 있나?”

“록산나 용병단을 천거하겠습니다. 록산나는 왕국 내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용병단으로서.

하지만 병무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재무관이 그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불가합니다, 영주님.”

“무슨 일인데 그러나?”

재무관은 슬쩍 영주에게 다가선 다음, 귓속말로 그들을 고용하는 데 필요한 액수를 말했다. 메르헨 영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렇게 많은 액수를 지급해 야 한다면, 이건 승리해도 승리한 게 아닌 것이다.

메르헨 영주는 조금 어색해진 말투로 병무관에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록산나 용병단은 안 되겠어. 그들보다 좀 더 저렴하게 고용할 수 있는 용병단은 없겠나?”

잠시 머리를 굴려 생각해 보던 병무관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전쟁노예를 주력으로 쓰는 용병단은 어떻겠습니까?”

“전쟁노예를?”

“예.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쓰는 것인 만큼, 실력에 비해 가격이 아주 저렴합니다. 그리고 후퇴는 절대 용납되지 않지요. 그들을 전면에 세운다면 든든한 방벽이 되어 줄 것입니다.”

병무관은 전쟁포로를 주력으로 쓰는 용병단의 장점들을 열거했다. 그 장점들 중에서 영주의 마음을 파고든 것은, 실력에 비해 가격이 매우 저렴하다는 것이었다. “그래, 경이 생각해 둔 용병단이라도 있나?”

“붉은 전갈 용병단이 그 분야에서 꽤나 이름을 떨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맡은 임무를 확실하게 수행해 준다고 말이지요.”

“좋아. 지금 즉시 그들과 접촉해 보게.”

가격이 예상보다 저렴하다는 데 크게 만족한 메르헨 영주는 그 자리에서 1천 2백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의 고용을 허가했다. 물론, 메르헨 영주는 붉은 전갈 용병단 만으로 전쟁을 치를 생각은 없었다.

도렌 영지군이 하고 있는 행색과는 달리, 꽤나 뛰어난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번 전투를 통해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그렇기에 메르헨 영주는 추가로 군소 용병단 세 군데와 접촉하여 1천여 명을 더 끌어들였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어 용병길드에 사람을 보내 떠돌이 용병 2천여 명과의 계약까지 끝마친 상태였다. 이 정도 대군(軍)이라면 도렌 영지군을 완전히 쓸어버 리고도 남음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