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1권 12화 – 세상사 서로 속고 속이고

세상사 서로 속고 속이고

다음 날 아침, 용병들이 일제히 이동을 시작했다. 제일 앞에서 행군하는 부대는 용병들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붉은 전갈 용병단이었고, 그 뒤를 돌핀 용병대가 뒤따랐다. 세력이 강한 순서에 따라, 길게 줄을 지어 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떠돌이 용병들의 무질서한 행렬이었다. 앞서 지나간 용병대들과 달리, 질서나 규율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만큼 흐트러진 모습이 었다.

몇몇 용병들은 창녀들을 잔뜩 태운 마차 옆을 걸어가면서 음탕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활기찬 모습을 보인 자들은 극히 일부였 고, 대부분은 어젯밤 늦게까지 야습해 들어온 적들과 난전을 치른 탓인지 피곤에 지친 얼굴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개중에는 꽤 심각한 상처를 입은 자들도 보였는데, 절룩거리면서도 대열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발버둥 치고 있었다. 비록 상처가 심해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전사한 시체의 몸을 뒤지는 것만으로도 짭짤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 호기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붉은 전갈 용병단의 맨 앞 선두에서 보무도 당당하게 진격하고 있는 부대는 제1대대였다. 그 뒤를 6백 명 정도의 전쟁 포로들이 발에 매인 쇠사슬을 철그렁거리며 뒤따라 걷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포로 주변을 제2대대가 엄중히 포위한 채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이들 중 그 어디에도 라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7독립대대는 적들의 배후를 치기 위해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몰래 주둔지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후방 침투 임무를 부여받은 제7독립대대원의 수는 겨우 136명에 불과했다. 결원도 꽤 있었지만, 곳곳으로 흩어져 있던 부대원들이 아직 메르헨 영지에 도착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지시를 내린 연대장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적의 배후를 치는 데는 그 정도 병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제5정찰대로부터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전갈입니다.”

부관의 보고에 연대장은 흡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든 게 그의 예상대로였다. 어젯밤 아무 실속도 없는 야습(夜襲)을 한답시고 진을 뺀 것만 봐도 알 수 있 다. 적들은 몬스터들을 상대로 한 실전 경험은 풍부하다 해도, 사람을 상대로 한 전투에는 숙맥인 것이다.

게다가 1차전 당시에도 메르헨 영지군이 요새 지대에 도착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어젯밤에 야습을 해 온 것은 좀 의외이기는 했 지만, 아마 이번 전투 역시 1차전처럼 요새에서의 공방전으로 판가름이 날 게 틀림없다고 그는 예상하고 있었다.

“부관.”

“옛, 연대장님.”

“진격 속도를 조금 더 올리라고 하게. 해가 있을 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여러모로 유리할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관은 즉시 전령을 한 명 불러, 연대장의 명령을 제1대대장에게 전하기 위해 보냈다. 지시를 받은 전령은 1분이라도 빨리 상관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서둘렀지 만, 그의 마음과는 달리 쉽사리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좁은 산길이 노예병들로 꽉꽉 막혀 있었던 탓이다.

“급한 전령이다! 비켜! 비켯! 야, 이 자식들아! 옆으로 좀 비키란 말이닷. 비키라는 소리가 안 들려?”

말이 등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니 노예병들은 무서워서라도 피해 주고 싶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십여 명 단위로 쇠사슬을 발에 연결해 놨기 때문이다.

전령은 어쩔 수 없이 길 바깥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자 노예병들은 서로의 몸을 바짝 밀착시켜 말이 달릴 수 있도록 길가 쪽 자리를 내주었다. 노예병들의 협조 로 그럭저럭 말을 달릴 수는 있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나뭇가지들이 말썽이었다. 나뭇가지를 피하면서 말을 몰자니 속도가 날 턱이 없었다.

앞으로 나가려고 애쓰는 전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부관은 눈길을 돌려 주변 산세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험한 산길 옆으로 수목들이 짙게 우거져 있어, 만약 기습 이라도 당한다면 움치고 뛸 수도 없이 막심한 피해를 각오해야 하리라. 연대장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정찰조를 몇 개씩이나 선행시키며 앞길을 샅샅이 훑고 있는 중이 아니겠는가.

‘멍청한 것들! 나 같으면 야습하는 데 기력을 낭비할 게 아니라, 이런 곳에서 미리 매복해 있었을 거다. 주변 환경을 봐. 얼마나 매복하기 좋아.”

* * *

저 멀리 산봉우리 쪽에서 갑작스레 뭔가가 반짝반짝하는 빛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마자 모두의 안색이 환해졌다.

“대장님, 제대로 걸렸습니다.”

대장이라고 불린 중년의 사내. 언제 씻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먼지투성이에다가 머리카락은 떡이 져서 엉망이었다. 그런 더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은 근히 박력이 느껴지는 매서운 얼굴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한순간 미소가 어렸다.

그는 옆에 서 있는 마법사로 보이는 음침한 표정의 사내에게 부탁했다.

“도렌 쪽에 전갈을 보내 주십시오. 앞으로도 최소한 두 차례 이상 적 정찰병이 올 것이 예상되니, 발각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고 말입니다.”

대장의 말에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 수정구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때, 어디선가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짙은 불쾌감이 내 포되어 있었다.

“우리 쪽은 신경 쓰지 말고, 그쪽이나 잘하도록 하시지요.”

말소리가 들린 쪽으로 급히 시선을 돌려 보니, 하급 용병들도 입지 않을 것만 같은 허름한 갑옷을 입은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대장은 알고 있었다. 디자인은 물론이고 만든 솜씨마저 개판이었지만, 그 재료만큼은 최고급이라는 사실을. 질기디 질긴 몬스터 가죽을 실력도 없는 장인 이 손을 댔으니, 저런 형편없는 모양새의 물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겉모양이야 어떠하든 간에, 방어력 하나만큼은 끝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름한 갑옷의 사내는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인간에 비해 수십, 아니 수백 배나 뛰어난 감각을 지닌 몬스터들을 상대로 매복전을 펼쳤던 우리들이오. 정찰병들을 수십, 아니 수백씩 보내 탐색한다 해도, 내 부 하들은 절대로 찾아낼 수 없을 거요.”

대장은 잘 알고 있었다. 사내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말없이 산 아래쪽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지금껏 그래왔듯, 산 아래쪽에서는 그 어떤 인기 척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보는 것과는 달리 저 아래쪽에는 지금 3개 대대, 총 6백여 명에 달하는 병력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중 1개 대대는 자신의 부하들이었고, 나머지는 눈앞 의 이 사내의 부하들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이야 밥 먹고 하는 짓이 이것이니 그렇다고 쳐도, 도렌 영지의 병사들이 보여 준 매복 실력은 정말 놀라웠다. 본능적으로 최대한 자연지물을 이용해 녹아들어 가는 모습은, 옆에서 보고 있다 보면 감탄사가 터져 나올 정도로 아주 훌륭했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트레친 준남작님. 하지만 이번 작전이 워낙에 중요하다 보니, 재삼 당부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트레친 준남작은 흥! 하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영주님께서 당신을 사령관으로 내세우신 이상, 그 권위에 도전할 생각은 없소. 하지만 불필요한 지시가 계속 반복되다 보니, 약간 짜증이 나는군요.”

“짜증이 나셨다면 죄송합니다. 어쨌거나 서로가 잘해 보자고 하는 거니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외에 더 이상 할 말은 없소?”

“준남작님 같으신 분이 지휘를 하고 계신데, 제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게 있겠습니까.”

“그럼 나는 가 보겠소.”

트레친 준남작은 뻣뻣한 자세로 군례를 올리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매복을 하고 있는 자신의 부하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준남작이 충분히 멀리 떨어진 후에야 지금까지 조용히 서 있던 마법사가 열 받는다는 듯 투덜거렸다.

“망할 놈의 새끼. 이런 중요한 시점에 지휘관이라는 놈이 마법사는 어따 팽개치고 혼자 여기에 나타나.”

“핫핫, 지금껏 마법통신을 이용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죠. 마법사님께서 이해하시죠.”

“어쨌거나 아주 기분 나쁜 놈이야.”

연신 투덜거리는 마법사를 달래며 대장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도렌 영주가 신임하는 인물입니다. 게다가 요새 지역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던 귀족이, 우리 같은 용병 나부랭이의 지시를 받아야 되는 처지가 된 게 아니겠습니 까. 저 정도만 해도 아주 잘 협조해 주는 거라고 봐야겠죠.”

“어쨌거나 기분 나쁜 놈임에는 변함이 없어.”

수천이 넘는 적군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가 이번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6백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총 병력은 8백 명이 약간 넘었지만, 2백은 요새의 수비 를 위해 남겨 놓고 와야 했던 것이다.

그런 소수의 병력으로 그가 감히 승리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은 다 도렌 영지의 병사들이 실전으로 단련된 정예병들인 덕분이었다. 도렌 영지의 병사들은 그가 이곳 에 오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훈련이 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도렌 영지병을 이끌고 있는 지휘관이 왜 안 좋게 보이겠는가. 아니, 상대가 아무리 까칠하게 나온다고 해도, 좋게좋게 넘어가는 것 외에는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장, 아니 페가수스 용병대의 제35대대장 미하엘은 2주 전, 단장(團長)과 대면했을 때를 떠올렸다.

단장이 건네준 서류에는 도렌이라는 가난한 영지에 대한 각종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서류를 면밀히 읽어 본 미하엘은 황당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여기를 저 혼자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단장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귀관 혼자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네. 자네 대대를 이끌고 가라는 거였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메르헨 영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긴 꽤나 부유한 영지란 말입니다. 여기 서류를 보니 메르헨에서 보유하고 있는 병력만 3천. 그리고

용병들을 4천에서 5천 정도 모집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데, 저희 대대만으로 도렌을 방어해 내라구요?”

하마터면 지금 제정신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하는 말까지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미하엘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마지막 선은 넘지 않는 데 성공할 수 있 었다.

“쯧, 자네 대대만으로 방어하라고는 하지 않았네. 거기에 기록되어 있듯이 도렌 영주에게도 1천 5백 정도의 병력이 있다네.”

“저도 읽어 봤습니다. 그중에서 전쟁터가 될 요새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병력은 겨우 6백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 6백 명으로 1차 전투 때 2천에 달하는 용병들을 단숨에 무찔렀다네. 거의 피해도 없이 말이야.”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임무라고 생각한 미하엘이었기에 미간을 왈칵 찡그리며 소리쳤다.

“1차 전투 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1차 전투 때 무찔렀다는 2천! 제대로 된 용병단도 아니고, 어중이떠중이 용병들을 대충 긁어모아 놓은 거 였다면서요. 그런 오합지졸 따위는 1만이라고 해도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메르헨 쪽에서 끌어들인 것은 붉은 전갈 용병단이 아닙니까. 그리 이름이 잘 알려진 용병단은 아니지만, 실력은 꽤나…….”

하지만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단장이 말을 잘랐던 것이다.

“메르헨 영지에서 고용한 붉은 전갈 용병단은 최대한으로 잡아 봐야 1천 2백 정도밖에 안 된다네. 노예병 1개 연대와 1개 독립대대를 고용했다고 하니 말일세.”

“예, 그건 서류를 봤으니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들이 용병들의 구심점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지죠. 붉은 전갈 용병단에서 연대장을 하고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 정도 능력은 지니고 있을 게 아닙니까?”

“……”

능구렁이 같은 단장도 그 말에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게 쉬운 임무가 아니라는 것을.

“단장님께서도 말이 안 되는 의뢰인 줄 잘 아실 텐데, 그런데도 이 의뢰를 받아들이신 이유를 좀 알 수 있겠습니까? 서류에도 나와 있듯 도렌은 병사들에게 줄 군 량조차 부족한 가난한 영지입니다. 그런 그들을 왜 우리 용병단에서 도와줘야 하는지,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미하엘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음흉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물었다.

“혹시 그곳 영주의 딸이나 부인과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어떻게 보면 대단히 불손한 질문이었지만, 단장은 가벼운 미소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이유를 꼭 알고 싶나?”

“예, 물론입니다.”

“자네가 싸워야 하는 그 요새 지대 인근에 꽤 큰 규모의 구리광산이 발견되었다네. 메르헨 영주의 방해로 인해, 판로(販路)를 개척하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그 말에 미하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구리가 의뢰 대금입니까?”

“물론일세. 이번 임무만 완수한다면 자네나, 자네 부하들 모두 한몫 톡톡히 잡을 수 있을 걸세. 내 약속하지.”

거친 삶을 살아가는 용병들에게 있어서 돈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돈 이상으로 목숨 또한 중요했다. 죽은 다음에 아무리 많은 돈을 받아 봐야, 뭐에 쓰겠는가. “아무래도 저는 안 되겠는데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용병들의 세계에서는 상관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실패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임무를 명령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번 임무는 목숨을 잃게 될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말이 2백 대 4천이지, 아무리 방어만 한다 하더라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임무였다. 하지만 그런 권리가 있다 하더라도 쉽게 거부를 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왜냐하면 상관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이 용병단을 떠나야 함을 의미했으니까. 누구라도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를 부하로 데리고 있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이런 미하엘의 거부를 미리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가 어떻게 10대 용병단의 하나로 꼽히는 대용병단의 단장이 될 수 있었겠는가. 지금껏 용병단에서 잔뼈가 굵어 오며 산전, 수전, 마법전, 심지어 타이탄전까지 다 겪어 온 단장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부하 하나쯤 구워삶지 못한데서야 말이 되겠는가.

“어쩔 수 없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 대대밖에 보낼 수 없는 내 심정을 이해해 주게.”

단장은 답답한지 한숨을 푹 내쉰 후, 계속 말을 이었다.

“식량만 넉넉하다면야 2~3개 연대라도 보내 확실히 끝을 냈을 걸세. 하지만 문제는 도렌에는 영지군에 지급할 군량조차도 부족한 상황이야. 게다가 대규모 병력 을 이동시키다 보면 정보가 새 나갈 확률도 높아진다네. 생각해 보게. 우리가 참전했다는 것을 상대가 알 때와 모를 때의 차이점을.”

페가수스 용병단이 도렌 영지전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메르헨 영주 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다른 10대 용병단을 끌어들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구 리 광산에서 얻는 이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본전이나 건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다른 10대 용병단과의 싸움에서 입게 될 손실이 적을 리 없을 테니까.

“그래서 작전관들과 토의를 해 본 결과, 우리가 참전했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소리 소문 없이 도렌 영지로 스며들어 가 조기에 전투를 끝내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 을 내렸지. 도렌의 식량 사정을 감안해 보면 최대 1개 대대가 한계야. 그렇다면 답은 이미 나온 거나 다름없지 않나. 우리 용병단에서 가장 뛰어난 대대장인 자네를 부를 수밖에. 자네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부탁하는 걸세. 내 마음을 이해하겠나?”

존경해 마지않는 단장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신뢰하고 있다는 말에 미하엘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만약 이번 임무를 어떻게든 완수할 수만 있다면 단장의 신뢰는 더 욱 깊어질 것이고, 앞으로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 아니겠는가. 미하엘은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올 뿐, 너무 흥분해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단장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믿는 부하가 자신의 믿음에 부응해 줬다는 게 너무나도 기쁘다는 듯이. 그는 미하엘의 어깨를 두드리며 장하다는 듯 말했다. “핫핫핫, 역시 자네밖에 없구만. 그래, 부탁하네. 나는 자네가 이번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 낼 것을 굳게 믿고 있겠네.”

그때쯤에야 겨우 냉정을 회복한 미하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젠장. 나야 그렇다 쳐도, 대대원들에게는 뭐라 말하지??

자신이야 단장의 신뢰에 부응하기 위해 싸우다 죽는다 해도 별 아쉬움은 없었지만, 대대원들은 뭔 죄가 있어 사지로 끌려들어 가야 한단 말인가. 그만큼 이번 임무 는 완수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만큼 수적인 열세가 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번 내뱉은 말을 곧바로 주워 담기에는 사내인 자신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그럼 나가 보게.”

힘없이 문 밖으로 나가려던 미하엘은 마음을 굳게 먹고 되돌아섰다. 아무래도 이대로 그냥 나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얘기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조건을 제시하자, 단장은 몹시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거기에 쫄아서 해야 할 말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대대 전체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인 것이다.

미하엘은 단장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잠시 눈싸움이 진행된 후, 단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 보게.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주지.”

“마법사를 지원해 주십시오.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최소한 2명 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마법사? 강력한 화력 지원을 원하는 모양인데, 그 정도 실력의 마법사라면……..”

그 정도 실력을 지닌 마법사는 아예 기대도 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단장의 심중을 짐작한 미하엘이 먼저 선수를 쳐 왔다.

“화력 지원을 위해 필요한 게 아니라, 통신 때문에 그렇습니다.”

“통신 통신을 위해서라……?”

소수의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려면 마법통신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요청이었기에, 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3명을 붙여 주지. 더 이상은 안 돼.”

“감사합니다, 단장님.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내가 큰 마음 먹고 마법사를 3명씩이나 지원해 주는 만큼, 꼭 승리해야만 해. 알겠나?”

“……”

미하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렇게 단장의 꼬드김에 속아 이 먼 변방에까지 달려왔다. 겨우 200명밖에 안 되는 부하들만을 거느리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곳의 영주가 말이 통하는 인간이었다는 것이었다. 미하엘은 그를 설득해서 요새 지역 전체에 대한 지휘권을 넘겨받는 데 성공했다. 사실, 지휘권을 넘겨받지 못했다면 미하엘은 단장에게 호된 구박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미련 없이 돌아갈 생각이었다. 도렌 영지군은 사람과의 전투라고는 거의 해 보지 도 않았다고 한다. 그런 자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긴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단장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군. 처음에는 아예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대장님의 계책이 제대로 맞아 들어간 덕분이죠. 어젯밤에 저희가 야습을 하지 않았다면, 저놈들이 이쪽 길로 들어올 생각을 하기나 했겠습니까? 좀 힘들더라도 다른 길을 택했겠죠.”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컸다. 1차 전투에서 도렌은 적이 요새 앞에 올 때까지 손 놓고 기다렸었다. 더군다나 그런 상황에서 승리까지 쟁취해 냈으니, 2차 전투 에서도 요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미하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적이 이쪽을 좀 더 경시하도록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야습을 지시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까지 부하에게 시시콜콜 얘기해 줄 필요는 없으리라.

“그건 그래. 어쨌거나 운이 좋았어. 우리가 야습한 바로 다음 날 곧바로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할 줄이야……. 하루만 늦었어도 미끼를 던져 보지도 못할 뻔했잖 아.”

“그러게 말입니다. 시작부터 징조가 아주 좋지 않습니까? 전쟁의 신 아레스께서 저희를 돕는 게 확실하다며 부하들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레스를 믿지 않는 그로서는 신(神)이 어떤 생각을 하든 자신이 알 바 아니었지만, 부하들의 사기가 올라갔다는 점은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이때, 주위를 살펴보고 있던 병사가 나직한 어조로 경고를 발했다.

“적의 정찰병입니다.”

포장이 잘된 산길을 타고 말을 달려오는 정찰 기마병 셋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정찰이라는 것도 잊은 듯 주변을 대충대충 훑어보며 빠른 속도로 지나 쳐 갔다.

하지만 미하엘은 알고 있었다. 저게 다 속임수라는 것을. 이미 저런 놈들이 세 패거리나 지나갔다. 그런데도 또다시 정찰병을 보내다니, 상대방 지휘관은 정말 치 밀한 인물이었다. 하기야 천성이 그러니까 연대장까지 진급을 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그런 인물이 페가수스 용병단이 도렌 쪽에 붙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면? 아마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전개가 되었을 것이다.

잠시 후, 미하엘의 예상대로 정찰병 두 명이 마치 유령과도 같이 숲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둘 다 레인저 교육을 꽤나 엄격하게 받았는지 산 타는 솜씨들이 보통 이 아니었다. 주변의 수풀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기에, 보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수풀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은 세심한 눈길로 주위를 살피며 앞으로 나갔다. 간혹 쭈그리고 앉아 뭔가를 살펴보는 듯한 동작을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도렌 병사들의 존재는 찾아내지 못하고, 다른 데로 발길을 옮겼다.

미하엘은 정찰병의 모습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휘소를 꾸린 위치가 도로에서 멀리 벗어난 저 뒤쪽 산꼭 대기였기 때문이다.

전장(戰場) 전역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부하들을 통제하려면 조금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자리를 잡을 필요성이 있었다. 정찰병들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조 용히 수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미하엘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옆에 앉아 있던 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마법사님, 페델에게서 연락 온 거 있었습니까?”

페델이라면 제2중대장이었다.

“그때 전해 준 거 말고, 다른 보고는 들어온 게 없다네.”

새벽녘에 적 백여 명이 몰래 주둔지를 벗어났다는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그들을 상대하라며 급히 내보낸 인물이 바로 페델이었다. 페델에게는 자신이 허락하기 전 에는 적에게 어떤 공격 행위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놨었다.

적을 포착했다는 보고를 끝으로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적에게 들키지 않고 잘 따라가고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