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1권 13화 – 넌 반드시 내가 죽여주마!
넌 반드시 내가 죽여주마!
드디어 적의 본대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전갈이 그려진 용병기(傭兵旗). 그 깃발을 선두로 2백여 기의 기마병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진격해 왔다. 착용하고 있는 갑주나 무장의 형태가 워낙에 다양하 여, 정규군 병사들과 비교한다면 난잡스럽다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용병들은 용병들만이 지니는 뭔가 독특한 거친 분위기가 있었다. 아름다운 의장용 갑옷과 투박한 실전용 갑옷의 차이라고나 할까…….
기마병들의 뒤를 이어 6백여 명의 노예병들이 쇠사슬을 철그렁거리며 뒤따랐다. 그리고 노예병들의 주변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는 또 다른 2백여 기의 기마병 들. 그들은 주위에 대한 경계는 물론이고, 노예병들에 대한 감시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붉은 전갈 용병단의 뒤로 3천여 명의 용병들이 뒤따르고 있긴 했지만 미하엘이 노리고 있는 적은 단 하나, 붉은 전갈 용병단 뿐이었다. 용병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고, 또 집단 전투에 능한 그들을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격멸해야만 했다. 대가리만 치면, 나머지는 그냥 오합지졸일 뿐이었으니까.
미하엘은 주위를 둘러봤다. 매복하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 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드디어 저 멀리 노예병들의 뒤쪽으로 마차 행렬이 보였다. 붉은 전갈 용병단의 치중대(輜重隊)였다. 이 길은 마차 1대가 통과하기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길 좌우로 여유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만약 선두가 기습을 당하게 된다면, 치중대의 우마차들은 도움을 주러 달려오는 후위 부대들의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이 될 것이다. “흐흐흣.”
미하엘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전투라는 게 이래서 재미있다. 이쪽보다 월등한 군세를 자랑하는 적들은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을 것이 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앞의 적병들은 이미 승리라도 거둔 듯 모두들 하나같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들이 지금 죽음의 구렁텅이를 향해 한 걸 음씩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미하엘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뒤쪽에 대기하고 있는 나팔수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공격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미하엘이 막 손을 아래로 내리려고 할 때였다. 느긋한 표정으로 걷고 있던 적들이 화들짝 놀라 이쪽을 바라보며 허둥지둥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해진 미하엘이 옆을 둘러봤을 때, 그는 볼 수 있었다. 일단의 기마병들이 산 아래쪽을 향해 용맹무쌍하게 돌진해 내려가고 있는 장면을.
미하엘은 이를 갈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미친! 아직 공격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저거 어떤 새끼들이야?”
옆에 있는 부관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미하엘은 자신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급히 손을 앞으로 뻗으며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빨리 공격 신호를 보내!”
대기하고 있던 나팔수들이 황급히 신호음을 울렸다.
“뿌우우우~~”
하지만 미하엘의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부하들의 공격은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모두들 땅속 깊이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몸을 숨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구덩이의 앞쪽을 흙이나 낙엽, 수풀 따위로 완벽하게 위장을 해 놓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런 엄폐물을 다 치운 후에 밖으로 뛰쳐나가 사격 자세를 잡으려면 약간 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윽고 아래쪽을 향해 사격이 시작되었다.
슈슉, 슈슈슉.
미하엘의 부하들이 쏘는 가느다란 화살도 간혹 보였지만,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창처럼 크고 굵은 도렌 병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이었다. 무거운 화살을 멀리 날리 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위쪽에서 아래로 쏘는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다.
지형적 잇점까지 더해지자 도렌 병사들의 화살은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워낙에 무겁고 위력적인 화살이라 그런지, 방패나 갑옷 따위는 아무런 장애도 되 지 못했다. 방패를 들고 막으려 해 봐도, 방패를 뚫고 들어가 몸을 산적(散)처럼 꿰뚫었다.
매복 공격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최초의 화살 공격이다. 일제 사격을 통해 적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놔야, 그 다음에 진행되는 백병전에서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격 시작부터 틀어져 버렸다. 일단의 기마병들이 미하엘이 아직 공격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적을 향해 돌격해 들어간 것이다.
현재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간 일단의 부하들은 적과 맹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등 뒤에서 날아오는 아군의 화살비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로.
작전이 틀어졌을 때 최대한 빨리 상황에 맞는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지휘관의 중요 덕목이다. 그런 점에서 미하엘은 지휘관의 자격이 충분했다. 그는 지체 없이 나팔수들에게 명령했다.
“돌격 신호를 보내라!”
1개 소대 정도만 달려 내려간 상황이었다면, 눈 딱 감고 모른 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1개 중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그가 냉혈한이라고 해도, 50여 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 수는 없었던 것이다.
브로마네스는 초조했다.
자신들이 이곳에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적들은 사지(死地)를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느긋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표정 만 봐도 앞으로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연히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브로마네스가 초조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이런 상황에서는 적 지휘관을 죽이는 영웅적인 전공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하들은 참호 안에 완벽히 몸을 숨긴 상태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소대장인 그는 틈새로 밖을 내다보며 안타까움 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브로마네스는 적 대열의 중간 부분에서 눈에 확 띄는 존재를 찾아냈다. 짙은 밤색 말을 몰고 있는 중년 사내였다. 주위의 다른 용병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멋 진 갑옷만 봐도, 그가 적군의 지휘관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브로마네스는 무심결에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들 몸을 얼마나 잘 숨기고들 있는지 단 한 놈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빗발치듯 화살이 적군을 향해 날아가리라. 그러면 저 적군 지휘관은 자신이 손을 쓸 새도 없이 목숨을 잃을 게 아닌가.
브로마네스는 유희의 첫 단추를 이렇게 허망하게 끝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럴 수는 없지. 저건 내 먹잇감이란 말이다!’
브로마네스는 참호 입구를 가리고 있던 위장물들을 조용히 치우기 시작했다. 보병이 위주인 도렌 영지병들은 자신들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참호만 파면 되었지만, 기마병 위주인 용병들은 말과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참호를 크고 넉넉하게 파야만 했다.
그와 그의 부하들이 판 참호는 두 개. 각기 다섯 명씩 자신의 말과 함께 들어가 앉아 있었다.
부하들은 브로마네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참호 밖으로 나가는 것은 공격을 뜻하는 나팔 소리가 들려온 후라고 알고 있었 는데…….
참호 앞에 놓인 위장물을 모두 제거한 브로마네스는 부하들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우리 소대는 적군을 향해 제일 먼저 돌진한다. 알겠나?”
“저, 하지만 소대장님,”
반론을 제기하려던 부하는 브로마네스의 광기 어린 눈과 마주치자마자 숨을 죽여야만 했다. 몸서리가 쳐질 만큼 아찔한 공포와 함께 상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면 죽는다! 그 이외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따라 나와라. 그리고 너, 옆 토굴에 가서 나머지 대원들도 다 밖으로 나오라고 해.”
브로마네스와 그의 부하들이 자기들 딴에는 살금살금 은밀히 움직인다고 애를 쓰기는 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할 중대장이 아니었다. 그 역시 참호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는, 주위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로마네스의 난데없는 돌발 행동을 눈치 챈 중대장은 질겁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 소리조차 지를 수도 없었다. 바로 코앞에서 적군이 통과하고 있었다. 이 중차대한 시점에 자칫 적군에게 아군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 곤란했기에, 중대장으로서는 초조함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브로마네스만 노려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브로마네스가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아래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한 것은.
중대장은 입이 떡 벌어진 채 아래쪽으로 질주하는 인마(人馬)들을 바라봤다.
신참 소대장놈이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극한 긴장감을 못 이겨 어설픈 행동을 한다고 여겼지, 설마하니 겨우 10기로 몇천 명이나 되는 적군을 향해 돌진할 줄은 꿈 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 대대장의 공격 명령조차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이윽고 정신을 차린 중대장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터질 듯한 분노를 토해 냈다.
“저, 저런 미친 새끼!”
전력으로 질주하는 말 위에서 몸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산속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는 경우에는 더더욱 힘들다. 길이 가 파른 것도 문제였지만, 나무나 바위와 같은 장애물에 부딪치기라도 하면 어디 한두 군데 부러지는 정도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브로마네스의 머릿속에는 그런 위험에 대한 걱정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말을 몰며 장애물을 피해 달려 내려갔다.
브로마네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로지 적장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멋있게 저놈을 죽일 수 있을까? 그렇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닌, ‘멋 있게’ 죽여야 한다는 점이 아주 중요했다.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는지, 브로마네스는 등에 메고 있던 장검을 거칠게 뽑아 들었다.
“크흐흣! 기다려라. 넌 내 거야.”
브로마네스를 뒤따르던 부하들 중 하나가 옆으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딪쳤다.
퍽!
“으아악!”
그리 굵은 나뭇가지도 아니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부딪치는 순간 목이 부러져 버린 것이다.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그의 몸은 뒤로 붕 날아 떨어지더니, 흙먼지 를 피워 올리며 데굴데굴 구르다가 나무 덤불 사이에 처박혀 버렸다.
갑작스런 기습을 당한 상황이었기에, 브로마네스 쪽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적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적진에 도착했을 때, 브로마네스의 뒤를 따르고 있는 부하는 겨우 네 명밖에 되지 않았다.
중대장이 기가 막혀 잠시 멍하니 있던 바로 그 시간, 대대장 미하엘의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요란한 나팔 소리와 함께 참호 속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밖으 로 쏟아져 나왔다. 병사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는 대로, 아래쪽에 보이는 적들을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활이라는 무기의 특성상 발사된 화살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적에게 꽂히게 된다. 그렇기에 브로마네스가 이끄는 소대가 적을 향해 달려갈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적들과 부딪쳐 접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활은 정확도가 그렇게 뛰어난 병기가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장거리 사격을 하는 경우의 정확도는 더욱 떨어진다. 적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브로마 네스의 부하들 중 한 명이 갑자기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적의 칼에 맞은 게 아니라, 운 나쁘게도 뒤에서 날아온 아군의 화살에 등판이 꿰뚫린 것이다.
이대로라면 적이 아닌 아군까지 쏴 죽이게 될 게 뻔했다. 중대장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눈을 질끈 감고 아군이 맞든 말든 계속 화살을 쏠 것이냐, 아니면 사 격을 중지시키느냐.
“사, 사격 중지!”
중대장의 외마디 비명과 같은 명령에 대원들은 사격을 멈췄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이를 으드득 갈아붙인 중대장은 황급히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각자 말을 꺼내 와! 적진을 향해 돌격해. 저 개 같은 새끼들을 구하러 간다.”
중대장의 명령에 부하들은 황급히 참호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말들을 데리고 나왔다. 말들은 모두 눈가리개가 씌워져 있었고, 입에는 소리를 낼 수 없도록 헝겊으 로 막아 놓은 상태였다.
부하가 건네준 자신의 말고삐를 받아 쥔 중대장은 먼저 말의 눈을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를 풀어 주고 입에서 헝겊을 빼냈다. 그런 다음 말에 올라타며 큰 소리로 명령했다.
“전원 승마!”
부하들이 말에 오른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칼을 뽑아 들어 하늘 위로 치켜들며 외쳤다.
“우리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중대장의 선창에 부하들도 일제히 따라서 우렁차게 외쳤다.
“우리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중대장은 비장한 표정으로 적군이 득실거리는 아래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레스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선창을 끝낸 중대장은 칼을 앞으로 쭉 뻗으며 외쳤다.
“전원 돌격!”
중대장의 돌격 명령에 부하들은 일제히 산 밑으로 말을 몰아 돌격해 내려갔다.
“우와아아아!”
적을 향해 돌진할 때는 딴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이런 가파른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야 할 때는. 하지만 중대장의 마음은 분노로 인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전투가 끝난 후에, 어디 두고 보자. 모가지를 아주 비틀어 주마.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붉은 전갈 용병단원들이 실전 경험이 풍부하기는 했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기습에는 그런 경험조차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산골짜기의 좁은 길목에서 당한 기습이다. 그것도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반격은 고사하고 모두들 우왕좌왕하며 화살을 피해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하지만 딱히 몸을 감출 만한 곳도 없었다. 화살이 한 방향에서만 날아오고 있는 게 아니 라, 사방에서 날아왔기 때문이다. 용병들은 당황해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화살에 꿰여 헛되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용병들의 상황이 이러한 데다, 움직임이 제어된 노예병들의 혼란은 더욱 극심했다. 그들은 발에 쇠사슬까지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옆에 있 는 다른 노예들의 발과 연결되어 있었다. 옆의 노예 두셋이 화살에 맞아 죽어 버리면, 시체 무게로 인해 어디로 도망조차 가지 못하고 그대로 화살밥이 되어야만 했
다. 이때, 소수의 적 기마병들이 가파른 산길을 타고 맹렬히 돌진해 내려왔다. 일부는 말과 함께 구르기도 했고, 나무에 부딪치며 나뒹굴기도 했다. 하지만 당황한 그 들의 눈에 그런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오로지 가장 선두에 서서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내려오는 브로마네스의 광기 어린 모습뿐이었다.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순간, 순식간에 그들의 코앞에까지 들이닥친 브로마네스와 그의 부하들.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닥치는 대로 용병들의 목을 베며 주위를 제 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일단의 기마병들이 적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워낙 좁은 산길인지라 아군 용병들에 가로막혀 발만 동 동굴러야 했다.
침착하게 전황을 살피던 연대장은 그 모습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저런 가파른 산길을 맹렬한 속도로 말을 몰아 달려 내려오다니. 초개와도 같이 목숨을 내던질 정 도의 각오가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제일 앞에서 달려오며 용맹스럽게 길을 개척하는 자의 실력은 참으로 놀라웠다.
“허, 굉장하군. 설마 이런 촌구석에 저런 실력자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연대장은 저들이 도렌 영지의 기마병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용병들의 경우 자신들이 어느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밝히는 문장을 갑 옷에 달지 않는다.
정규군들이야 일부러 자신의 소속을 드러내어 그것을 과시하는 데 이용했지만, 용병들의 경우에는 문장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숨기는 쪽을 택했다. 의뢰를 수행하 다 보면 감추는 쪽이 행동하기에 훨씬 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야 할 때는, 용병단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이용했다.
하지만 저들은 깃발을 들고 있지 않았기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이때, 그의 부관이 칼을 뽑아 들며 연대장에게 외쳤다.
“어서 피하십시오, 연대장님.”
그리고 부관은 비장한 표정으로 호위병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은 나를 따르라!”
연대장이 피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벌어 주기 위해 적들을 막아서려는 것이다. 하지만 연대장은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돌진해 들어오는 적의 실력이 꽤 뛰어 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적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노쇠해 가던 자신의 육체에 기분 좋은 투지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지금은 연대장으로서 뒤에서 지휘를 하고 있지만, 이 자리에 올라오기 전까지 그 는 붉은 전갈 용병단의 선봉을 지켜 왔던 강자였다. 그런 그가 몇 되지도 않는 적의 도발에 겁먹을 리가 없었다.
연대장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저 멀리서 아군 기마병들이 이쪽으로 오려고 애쓰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길이 좁아 아군 보병들에게 가로막혀 제자리걸음 만 하고 있었다.
“쯧, 칼밥을 먹고 산 게 하루 이틀이 아닌데, 겨우 이 정도 기습에 허둥대고 있다니……..”
연대장은 다시금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부관은 호위병들과 함께 적의 돌격대를 저지하느라 사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적장에게는 부관을 비롯해서 5명의 호위병이 집중공격을 가하고 있었지만 적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적장의 칼에 호위병들만 한 명, 두 명 목숨을 잃고 있었 다. 정말이지 놀라운 솜씨를 지닌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좀 도와줘야겠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은 활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덜렁거리지 않도록 말 등에 묶여 있었지만, 그는 놀라운 속도로 활을 끌러 들었다.
그가 안장에 매여 있는 화살통에서 꺼내 든 화살은 3발. 시위를 잔뜩 당긴다 싶은 순간, 화살은 맹렬한 속도로 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의 속사(速射) 실력은 놀라웠다. 보통의 사수들은 시위를 끝까지 당긴 상태로 목표를 조준하는 데 반해, 그는 시위를 끝까지 당기는 순간 그냥 놔 버렸다. 그리고 숨 쉴 틈도 없이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어 당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빨리 쏴대는지 첫 번째 화살이 미처 목표물에 닿기도 전에 2번째 화살이 날아갔고, 적장이 놀라운 솜씨로 자신에게로 날아온 화살을 쳐 냈을 때쯤, 3번째 화살이 그의 손을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순간 연대장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빈틈을 노리고 날아간 화살을 놈이 막아 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적장의 실력이 자신의 예상보다 더 대단하다 는 증거였다. 그 외에 다른 2명은 자신의 몸을 꿰뚫고 들어온 화살을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세상을 하직했으니까.
“허허, 참. 그 와중에 그걸 막다니! 그것도 방패도 아닌 칼로……. 쯧, 이럴 줄 알았으면 저놈에게 집중사격을 할 걸 그랬나…….”
연대장은 다시금 손을 뻗어 화살을 잡으려 했다. 그때였다. 적장의 칼이 번뜩이더니 부관과 2명의 호위병이 거의 동시에 피를 뿜으며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갑작스런 부관의 죽음에 호위병들이 멈칫하는 그 순간을 노려 적장은 말에 박차를 가해 포위망을 돌파했다. 호위병 2명이 급히 그 뒤를 따라붙었지만, 적장과의 간격은 쉽사리 좁히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육박해 들어오는 적장의 모습을 바라보며 연대장은 화살을 집는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서로 간의 거리가 워낙 가까워 화살 한두 대 정도는 날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장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면 자신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런 멋진 적을 화살로 쏘아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핫!”
연대장이 짧은 기합성과 함께 발로 배를 툭 치자,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해 온 말은 주인의 의도를 읽고 맹렬히 앞으로 내달렸다. 돌진해 오는 적장을 향해 이쪽에서
도 달려 나가자 순식간에 두 사람의 간격이 좁혀졌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연대장은 적장이 너무나도 젊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갑옷이나 투구 틈 사이로 드러난 팽팽한 살 갗을 그제서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산위에서 아래로 달려 내려가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 경사가 심하게 진 데다가 아름드리나무는 물론이고, 바위까지 군데군데 솟아올라 앞을 가로막고 있 다.
단 한순간만 실수해도 목숨이 날아간다.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린다고 해도, 산길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가는 것은 말이다. 당연히 말을 자신의 의지대로 능수능란 하게 다뤄야 한다는 뜻이다. 그건 말과의 오랜 유대관계와 호흡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악조건을 뚫고 달려 내려온 다음에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아마도 제일 앞에서 달려가며 용맹무쌍하게 아군의 방어를 뚫고 나간 적 장이 없었다면, 그들은 아래쪽에 도착하는 즉시 전멸했으리라.
자신을 가로막는 아군 수십 명을 베며 여기까지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적장의 호흡은 단 한 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호오, 이거 예상보다 더 대단한 놈인지도 모르겠는걸??
순간 연대장의 가슴에 호승심(好勝心)이 크게 일었다. 지금껏 전장에서 부상을 당한 것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그중에는 생사를 넘나들 정도의 치명 상도 몇 번인가 입었다. 하지만 일대일 대결에서 패한 적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애송이한테 질 리가 있겠는 가.
미하엘은 결국 돌격 신호를 보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날카로운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부하들이 일제히 숨어 있던 참호를 벗어나 적을 향해 달려 내 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흡사 사냥꾼 같은 너덜너덜한 갑옷을 걸친 도렌 영지군이 달려 내려갔다.
미하엘은 고개를 돌려 붉은 전갈 용병단을 뒤따르는 다른 용병단 쪽을 바라봤다. 예상대로 그들은 붉은 전갈 용병단의 치중대와 뒤엉켜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미하엘의 시선은 다시금 격전의 중심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작전을 엉망으로 망쳐 놓은 소대장놈을 찾아냈다. 그를 노려보며 미하엘은 이빨을 갈 지 않을 수 없었다. 저놈 하나 때문에 자신이 계획했던 전투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예정보다 너무 빠른 시간에 감행된 돌격이었다. 화살로 충분히 타격을 입힌 뒤 돌격을 했어야 했는데, 제대로 타격조차 주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 명령을 내려야 했 다.
당연히 적은 거칠게 대응을 해 올 것이다. 즉, 저 한 놈 때문에 승리를 확신했던 이번 전투의 승패가 안개가 낀 것처럼 모호해져 버린 것이다.
“신이시여, 제발 저 녀석이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해 주십시오. 제가 저놈의 목을 잘라, 적장의 목과 함께 장대 꼭대기에 매달 수 있도록!”
미하엘은 소대장 녀석이 어떻게든 살아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래야 전투가 끝난 후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한 죗값을 치르게 해 줄 수 있을 테 니까.
아니,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녀석의 목이 잘려 장대 꼭대기에 매달리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미하엘은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단 호하게 본보기를 보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때, 분노로 가득 찼던 미하엘의 두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호오, 제법인데?”
내려가는 도중에 다섯이 죽고, 아래쪽까지 도착한 것은 겨우 다섯 기. 하지만 소수의 기마병이 난입했을 뿐인데도, 적들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들이 치 고 들어간 위치 때문이었다.
그들이 번개가 무색할 속도로 휘젓고 있는 곳은 붉은 전갈 용병단의 중군(中軍)이었다. 지휘부가 갑작스럽게 습격을 받게 되자, 명령 체계가 마비되었는지 적은 혼란에 빠져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더군다나 곧이어 중대장이 이끄는 후속 기마대까지 도착하여 그 뒤를 받쳐 주자, 적들은 더욱 극심하게 혼란에 빠져들었다.
전장 전체를 재빨리 훑어본 후, 다시금 소대장 쪽으로 시선을 돌린 미하엘. 지금껏 산전수전 다 겪어 온 그였지만, 지금처럼 놀라운 광경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어 느새 그 빌어먹을 소대장놈이 호위 병력을 뚫고 적의 지휘관에게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적장이 부딪치는 순간, 그들의 주위로 맹렬한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그건 엄청난 속도로 검과 검이 부딪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놀라운 실력!”
미하엘은 다급히 옆에 대기하고 있던 전령에게 물었다.
“자네, 저 녀석이 누군지 아나? 저쪽에서 적 지휘관과 싸우고 있는 녀석 말이야.”
“아, 이번에 저희 대대로 새로 발령받아 온 소대장입니다.”
“소대장이라고? 확실해?”
“그렇습니다. 얼마 전까지 훈련대 교관으로 있다가, 소대장으로 임관돼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저런 대단한 검술 실력을 지닌 자가 소대장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병들의 세계는 강자존(强者尊)의 법칙이 존재한다. 나이나 예전 신분 따위는 한 푼의 가치조차 없는 게 용병들의 세계다. 강하면 강할수록 대우를 받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그런데 저런 놀라운 실력을 지닌 놈이 겨우 소대장이라니. 혹시 다른 용병단에서 보낸 첩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저렇게 대놓고 주위의 이목을 끄는 행 동을 하고 있으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어쨌거나 수상쩍은 놈인 건 사실이군.”
전장 전체를 통제하며 아군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이끌어야 할 지휘관인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 미하엘은 자신의 임무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전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둘의 검투는 격렬하면서도 장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