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1권 6화 – 왠지 수상쩍은 마법사
왠지 수상쩍은 마법사
정보 단체로부터 넘겨받은 자료를 분석한 후, 아르티어스와 브로마네스는 ‘페가수스’ 용병단을 선택했다.
유희의 첫 시작을 제대로 된 신분증으로 하고 싶다며 똥고집을 부리는 브로마네스를 뒤로하고, 아르티어스는 홀로 페가수스 용병단을 향해 떠났다. 공간이동 마법 을 썼기에 그곳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헉, 마법사?”
용병단에 지원하는 마법사가 드물기는 드문 모양이다. 곧바로 행정관실로 안내된 것을 보면 말이다.
“어서 오게.”
“랄프 디겔이라고 합니다.”
붉은 머리를 길게 기른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다운 생김새의 마법사. 평소 아르티어스가 애용하는 여성스러운 얼굴이 너무 눈에 띈다는 브로마네스의 조언 에 따라, 그는 이곳에 오기 전에 얼굴을 남성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상태였다.
“자, 이리 앉게. 그나저나 자네 안목이 높구먼. 우리 페가수스 용병단에 지원한 것을 보면 말이야.”
행정관은 페가수스 용병단이 얼마나 좋은지 한참 동안이나 떠벌여댔다. 그러면서도 그 사이사이에 어느 정도 수준의 월급을 원하는지 타진하는 것을 보면, 꽤나 말재주가 화려한 인물이었다.
행정관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이곳을 선택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밀고 당기면서도 매끄럽게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행정관 녀석이, 나중에 자신에게 꽤나 쓸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 전에 있던 곳보다는 조금 더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암. 그건 당연하지. 그래, 그 전에는 얼마나 받았나?”
엄청나게 많이 줄 듯 얘기했지만, 막상 행정관이 제시한 금액은 예전에 받았다고 했던 금액보다 고작 10실버 더 많은 액수였다.
“적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자네의 오산일세. 우리 용병단은 성공 수당을 꽤나 후하게 지급하는 것으로 유명하니까 말이야.”
“그 정도면 괜찮은 것 같군요.”
“그래, 잘 생각했네. 다른 용병단에 가 봐야 이쪽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기는 힘들 걸세.”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행정관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사내를 은근슬쩍 살펴보고 있었다. 그건 사내가 자신이 처음에 제시한 금액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기 때문 이다. 마법사가 용병단에 들어오는 목적이라고 한다면, 돈 말고 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흐음……. 이건 좀 수상쩍군. 용병단에서 굴러먹었다는 인간이 순진하다는 건 말도 안 되고 말이야.’
용병단 내에 있는 마법사라고 해 봐야 채 30명도 되지 않는다. 그들을 통신기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인력이 모자라는 판에, 화력 지원을 위해 최전선에 동원할 여 력은 없었다. 즉, 마법사로 입단해서는 성공 수당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다른 용병단에서 일했다며 용병패와 용병수첩까지 제시한 인물이 그런 내막을 모를 리가 없다. 즉, 저자가 용병단에서 일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뜻이 다.
이곳 용병단에 잘 왔다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행정관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당장 저놈을 붙잡아다가 족쳐 볼까? 아냐, 모르는 척 그냥 놔두고 관찰을 해? 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리 용병단에 침투하려고 하는 건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려 해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은밀한 침투를 목적으로 한다면, 굳이 이렇게 눈에 확 띄는 마법사라는 직종으로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마법사라는 건 사실일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마법사라는 병과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지만, 행정관은 겉으로는 태연자약하게 행동했다. 그는 입단지원서에 사내가 받게 될 혜택과 급료 따위를 꼼꼼하게 작성한 다음, 그 것을 건네주며 말했다.
“잘 읽어 본 다음, 여기에 서명하게.”
사내가 서명을 마치자 행정관은 소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용병단의 한 식구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절대 후회는 하지 않을 게야.”
새로 온 마법사 랄프 디겔이 자신의 집무실을 떠나자마자 행정관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제대로 된 용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수상쩍은 놈이었지만, 그렇다고 첩자로 단정하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정식으로 첩자 교육을 받은 인물이 저렇게까지 어 수룩하게 행동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일단은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게 좋겠어.’
행정부 병사가 아르티어스를 안내한 곳은 대기대(待機隊)였다. 처음 입단한 신병들이 기거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남루한 차림의 앳된 병사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아마 저들은 오늘 입단한 애들이리라. 정상적인 신병이었다면 지금 이 시간에는 훈련대로 가서 훈련을 받고 있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이 방입니다. 거처가 정해지시기 전까지, 당분간 여기서 기거하시면 됩니다.”
병사가 방문을 활짝 열자, 단정하게 정리된 실내가 드러났다. 열 명씩 기거할 수 있도록 짜여 있는 일반적인 숙소와 달리, 이 방은 침대가 하나만 놓여 있는 독실이 었다.
병사는 침대 옆쪽에 놓여 있는 사물함을 가리키며 말했다.
“짐은 여기에 정리해 두시면 됩니다. 그리고 식사는 조금 수고스러우시겠지만, 훈련대로 가셔서 그곳의 교관 식당을 이용하십시오. 이쪽에 있는 건 훈련병용 식당 밖에 없으니까요. 나중에 드셔 보시면 아시겠지만, 훈련병용으로 지급되는 식사는 정말 형편없거든요.”
병사는 아르티어스가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면서도 쉬지 않고 부대의 상황에 대해, 알아 두면 편리할 만한 것들에 대해 조언을 해 줬다. 별로 가지고 온 게 없 었기에, 짐 정리는 금방 끝났다. 정리가 끝나자 병사는 아르티어스에게 제안했다.
“용병단 내를 좀 구경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그가 안내했던 다른 사람들은 이 제안에 대해 모두들 쌍수를 들고 고마워했었다. 하지만 이번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상대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안 해 줘도 돼.”
“그래도…….”
“아, 괜찮아. 그러니까 가 봐. 나는 좀 쉬고 싶어.”
잠시 머뭇거리는 병사. 지금 이렇게 내보내 놓고는 나중에 뒤에서 무슨 소리를 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한 번 안내를 해 줘도 나중에 혼자 찾아다니려면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태반인데, 이렇게 안내조차 받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이곳 용병단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여기서 보면 안쪽이 다 보이지 않기에 작다고 착각하시는…….”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병사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 버렸다.
“용병 숫자만 7천 명 내외. 그리고 용병단에 빌붙어서 사는 것들의 숫자는 약 3천 정도……. 합계 1만 명 정도가 생활하는 작은 도시 규모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네. 내 말이 틀렸나?”
“아, 아니…,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병사가 머뭇거리면서도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자, 슬그머니 짜증이 난 아르티어스 어르신. 갑자기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 손을 넣어 주머니 안을 뒤졌 다.
“오호, 그러고 보니 팁을 주지 않아서 그러는 모양이군. 가라는데도 왜 안 나가고 버티고 있나 했지.”
아르티어스는 주머니 속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 앞으로 내밀며 이죽거렸다.
“여기 있네, 수고료.”
자신의 순수한 호의가 무시당한 건 그래도 참을 만했다. 수고료랍시고 돈을 준 놈을 지금껏 단 한 명도 만나 본 적이 없었지만, 무엇보다 그 액수가 치가 떨릴 지경 이었다. 겨우 단돈 1타라. 순간적으로 병사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개자식이! 나를 뭐로 보고. 그래, 길을 잃고 한번 고생을 죽어라 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망할 놈. 콱, 시궁창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 버려랏!’
병사는 분노로 인해 떨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상대는 마법사였으니까.
“수고료를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그래, 수고했네.”
병사를 내보낸 후, 아르티어스는 안쪽에서 열쇠를 걸어 문을 잠그며 투덜거렸다.
“망할 자식! 꺼지라면 재깍재깍 꺼질 것이지 군소리는…….”
교관 식당의 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레어에서 대기 중인 노예들이 차려준 밥만 하겠는가. 그 전에는 밥을 차려 줄 노예들이 없었기에 이리저리 식당을 찾아다닌 다고 고생을 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노예들이 차려 준 맛있었던 요리들을 주르륵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룰루루, 오늘은 과연 어떤 메뉴가 기다리고 있을까?”
아르티어스가 레어로 돌아갈 때, 즐겨 이용하는 곳은 레어의 제일 안쪽에 위치한 거대한 공동(空洞)이었다. 그곳을 애용하는 이유는 타고난 그의 신중함 때문이었 다.
인간 세상을 떠돌 때, 온갖 나쁜 짓을 다 해 봤던 그가 아닌가. 공간 이동 출구에 장난을 치는 것쯤은 당연히 해 봤던 일이다.
물론 다른 놈에게 그 방법을 쓸 때야 재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역으로 그것에 자신이 당한다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한 노릇이다. 아무리 자신이 드래곤이라고 하
지만, 한 방에 끽소리도 못 내고 사망할 게 뻔했으니까.
희미한 빛이 생기는가 싶더니 공동의 중간쯤에 모습을 드러낸 아르티어스. 공간이동이 완료되자마자 즉시 비행마법을 시전했다. 그렇지 않으면 밑바닥으로 추락 할 게 뻔했으니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변을 밝혀 주는 라이팅(Lighting) 마법도 함께 시전했다. 본체일 때는 상관없었지만, 호비트의 몸으로 변신한 상태에서는 어둠을 뚫고 사물 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정령과의 소통을 차단하는 마법목걸이까지 걸고 있는 지금, 공동 안은 칠흑과도 같이 어두웠고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서며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예들을 부리기 시작한 이래, 이 안쪽에서 광구(光球)가 떠오르면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엘프들 이 안으로 달려 들어와 허겁지겁 인사를 건넸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별을 받은 그랜딜도 곧이어 이쪽으로 달려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네…….?
공동 밖으로 나가 보니,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에는 그랜딜이 세워 놓은 보초병 둘이 언제나 서 있었는데 말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아르티어스는 즉시 목걸이를 벗었다. 목걸이를 벗자마자 주변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반쯤 잠에 취했다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듯이.
아르티어스는 그랜딜의 집무실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걷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는 자신이 만든 작은 빛의 구슬만이 빛을 뿜어내고 있을 뿐,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 지 않았다. 온기가 완전히 사라진 황량한 모습이다. 예전에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광경이었지만, 요 근래 엘프들이 만들어 놓은 따뜻한 온기를 느꼈던 그였기에 이런 모습이 아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설마 단체로 도망쳤을 리는 없을 텐데.
이때, 그의 눈에 확 하고 들어오는 게 있었다. 벽에 흩뿌려져 있는 검붉은 얼룩들. 바닥에는 웅덩이처럼 붉게 고여 있는 곳도 있었다. 만져 보고 그 질감 및 냄새를 확인할 것도 없었다. 정령들이 그에게 다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피였다.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는 아직 완전히 굳지도 않은 상태였다. 불현듯 그랜딜 공작이 자신에게 실버 드래곤이 레어에 방문했다며 보고했었다는 사실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리멤버런스 오브 더 어스(Remembrance Of The Earth;대지의 기억)!”
그러자 커다란 원반 형태의 빛무리가 생겨나더니 그 안에 엘프들의 모습과 함께 보이는 오크 한 마리. 비록 희미한 영상이기는 했지만, 그 오크의 머리털 색깔이 은빛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의 눈이 실쭉 가늘어지며 음산하게 빛났다. 순간, 그의 몸이 쏜살처럼 앞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비행마법이었다.
인간이나 엘프라면 아무리 마법에 능숙하다고 해도, 이렇게 장애물이 산적해 있는 비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고속의 비행마법을 쓸 엄두는 절대로 내지 못할 것이 다. 한 번만 실수해도 곧바로 사망이었으니까. 하지만 드래곤인 아르티어스는 달랐다. 정령의 도움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저 앞쪽까지도, 이미 완벽하게 파악을 끝내 버린 상태였으니까.
다행히 그랜딜 공작은 살아 있었다. 자신의 노예가 침대 위에 처참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본 아르티어스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어떤 놈이냐? 혹 이름을 들었느냐?”
몸져누워 있던 그랜딜 공작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주, 주인님께서 오셨습니까?”
“인사는 필요 없으니,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만, 그의 모습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인님.”
그랜딜 공작은 힘겹게 수인을 맺으며 환영마법(幻影魔法)을 사용해서 오크의 모습을 보여 줬다. 대지의 기억에서 뽑아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영상이었다.
영상 속에 나타난 오크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재빠른 몸놀림을 보여 줬다. 게다가 마법까지 능수능란하게 쓰고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엘프들. 상대는 오크 따위가 아니라 드래곤임에 틀림이 없었다.
워낙에 많은 드래곤들과 원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아르티어스다. 범인이 실버 드래곤이라는 것 정도밖에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심증이 가는 놈이 하나 있었다. 그랜딜 공작의 영상을 보다 보니 그의 뇌리에 탁 하고 떠오르는 놈이 있었던 것이다. 자기 아들이 고자가 되면 어쩌겠느냐며 중얼거리던 그 팔푼이 아빠. 그놈이 범인임에 틀림없었다. 영상 속의 오크의 머리카락 색은 분명 은발이었다. 은발인 만큼 실버 드래곤임이 틀림없고, 이 정도면 증거로도 충분…..
“끄응…….”
이 대목에서 아르티어스는 신음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저런 환영(幻影) 따위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놈이 정령마법이라도 썼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상 이게 실버 드래곤이 저질러 놓은 짓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 색깔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지, 실버 드래곤이 변신하면 무조건 은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다른 드래곤이 실버 드래곤인 척 꾸미 고 와서 깽판을 쳐 놨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전의 아르티어스였다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바로 그 팔푼이 아빠의 레어로 달려가 박살을 내 놨을 것이다. 놈이 범인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만약 놈 이 범인이 아니라고 해도 치솟는 울분을 해소할 수 있을 테고, 범인이 발견될 때까지 다른 드래곤들을 박살 내다 보면 언젠가는 범인을 잡아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쟈크레아라는 존재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지금껏 그만한 능력을 지닌 드래곤이 자신을 손봐주겠답시고 별렀던 적이 있었던가. 쟈크레아 를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한기가 들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번쩍하며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맞아! 그거였어…….’
닳고 닳은 아르티어스는 곧바로 감을 잡았다. 놈이 왜 겁대가리를 상실해서 이런 맹랑한 짓을 저질렀는지, 그 이유를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 렸다.
“흥! 내가 이런 얄팍한 수법에 멍청하게 걸려들 거라고 생각하다니. …. 가소로운 놈.”
호비트들은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수명에 비해 처절하게 부대끼며 삶을 살아가는 특별한 종족이다. 엘프나 드워프 같은 놈들의 삶은 몇백 년을 살아서인지 느긋하 면서도 지루했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가 주로 유희를 즐기기 위해 선택한 곳은 호비트들의 세상이었다.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못된 짓을 보고 따라했는지……. 그 러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호비트 찜쪄 먹을 정도의 교활함을 배웠다.
“내가 자기를 찾아가는 그 순간, 쟈크레아를 불러들이겠다는 것이겠지. 어쩌면 쟈크레아 놈과 함께 이 계략을 꾸민 것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아르티어스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그랜딜 공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인님. 제가 주인님께 무슨 짓을 했다고…….”
방금 전에 아르티어스가 중얼거린 말만 듣고는, 그가 그렇게 오해할 만했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너에게 한 말이 아니다. 그 침입자라는 놈에게 한 소리지. 자, 조사해 볼 것이 있으니, 가만히 있거라.”
아르티어스는 마법을 사용해서 그랜딜 공작의 머릿속을 차근차근 훑어 나갔다. 혹 놈이 그랜딜 공작을 세뇌해 놓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입장 을 바꿔 놓고 생각해서, 자신이 만약 놈의 처지였다면 그랜딜 공작을 세뇌해 놨을 것이다. 목표물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는 그게 가장 효용성이 높았으니까. 마법으로 들여다본 그랜딜 공작의 머릿속은 수많은 정보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아무런 감정의 색깔도 씌워져 있지 않은 것들도 있었지만, 복잡한 감정의 색 깔을 띠고 있는 것들도 많았다. 분노, 흥분, 회한(悔恨), 아쉬움, 사랑 등등..
정보에 덧씌워져 있는 감정의 다채로운 색깔들로 인해, 기억의 실타래는 더욱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다른 기억과 엉켜 버리거나 심지어는 끊어져 버린 것들도 많 았다. 오래된 기억의 경우, 서로가 뒤엉켜 있어 어떤 게 더 최근의 것인지 그 구분조차 모호하다.
그 어떤 규칙도 없이 다채롭게 엉켜 있는 기억의 실타래를 왜곡시킨다는 것은 신의 영역에나 들어가야 가능할 정도의 고난도 작업이다. 그렇다 보니 기억을 조작 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 흔적이 크냐, 작냐의 차이가 있을 뿐.
초보자들의 경우, 너무 심하게 정신 체계를 헤집어 놓아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 결과 기억의 붕괴를 초래하여 백치가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물론, 드래곤들이 그런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는 없었지만 말이다.
“놈이 남겨 놓은 흔적만 찾아낸다면, 어떤 놈이 그랬는지 조금이라도 범위를 좁힐 수 있을 거야. 드래곤들이 모두 다 똑같은 정신계 마법을 배운 것도 아니고, 연구 하는 방향도 종족에 따라 조금씩 다르니까.?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그랜딜의 정신세계를 끈질기게 훑어댔지만, 결국 아르티어스는 포기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어떤 이상 징후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 다.
“세뇌를 해 놨을 거라는 추측은 내가 너무 앞서 나간 거였나?”
하지만 그랜딜 공작이 괜찮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랜딜 공작 말고 다른 엘프를 세뇌해 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르티어스는 레어 안의 모든 엘프들을 다 불러들여, 그들의 기억을 샅샅이 훑어보는 중노동을 해야만 했다. 맛있는 요리를 먹으러 왔다가 쫄쫄 굶으며 고생 만 실컷 하고 있는 셈이다.
아르티어스는 새벽이 다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작업을 했지만, 그 어떤 엘프에게서도 정신계 마법에 걸린 흔적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젠장. 범인이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그냥 놔둬야 하다니…….’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과거 같았다면 증거 따위는 무시하고 일단 박살부터 내놨었겠지만, 쟈크레아가 놈의 뒤에 떠억 버티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무덤을 팔 정도로 아르티어스는 멍청하지 않았다.
‘망할 놈의 새끼들. 내 노예들을 두들겨 패 놓고, 레어를 부숴 놨다고 해서 내가 이성을 잃고 날뛸 줄 알았냐? 그런 얄팍한 수에 내가 걸려들 거라고 생각했다니, 가 소로운 것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자꾸만 울화가 치미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호비트들 세상에 나가서 서로 속고 속이며 아웅다웅할 때에는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않았다. 처 음부터 유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같은 드래곤에게 이런 꼴을 당하고 나니, 기분이 아주아주 더러웠다. 옆집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얘기를 듣는 것과, 자신이 직접 그 일을 당한 것과 의 차이라고나 할까? 울화가 치밀어 오른 아르티어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먹에서 우드드득 하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흥! 내가 그냥 참고 넘어갈 거라고 착각하지 마라. 오늘의 치욕! 반드시 몇 곱절로 갚아 줄 테니.’
* * *
쟈크레아로부터 밀명을 받고 아르티어스의 레어로 가 마음껏 분탕질을 친 실버 드래곤은 지금 자신의 레어로 돌아가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르티어 스가 자신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상하네……. 박살이 난 엘프 놈들이 아르티어스에게 보고를 했을 텐데, 왜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거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차례대로 자신의 노예들을 호출해서 확인했다.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주인님.」
「드래곤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
아르티어스가 미쳐 날뛰며 쫓아갈 만한 실버 드래곤들의 레어에는 모두 다 자신의 노예들을 배치해 뒀다. 만약 그곳에 이상한 낌새라도 보인다면 노예들은 즉시 자신에게 보고를 올릴 것이다. 그럼 그 정보를 곧바로 쟈크레아에게 전해 주기만 하면 된다.
자신은 아르티어스와 만날 일이 없는 만큼, 혹여 아르티어스가 그곳에서 운 좋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후환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범죄.
곧 끝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게 의외로 감감무소식이다.
“이상하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번에는 아르티어스의 레어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해 놓은 노예들을 불렀다.
“그쪽 동태는 어떠냐?”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주인님.」
“그럴 리가 있나. 혹시 네놈들이 게으름을 피우다가…….”
그가 채 질책을 쏟아 놓기도 전에 노예는 고개를 연신 가로저으며 다급하게 변명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주인님. 지엄하신 명령을 받고, 저희들이 어찌 감히 한눈을 팔 수 있겠습니까. 단언컨대 드래곤은커녕 엘프 한 마리도 밖으로 빠져 나간 적이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여기저기에 파견해 놓은 노예들을 닦달해 본 결과, 놈이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흐음. 급한 성질을 억제하지 못하고 곧바로 튀어나올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의외로군.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한 번 더 놈의 레어로 쳐들어가서 쑥대밭을 만들어 버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지만, 그는 곧이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놈의 노예 들이 아직까지도 놈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 즉, 놈은 이 모든 사태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설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봐야 했다. 성격이 급하고 호전적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놈은 절대로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방금 전, 그가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아르티어스의 레어에 한 번 더 분탕질을 치러 갈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듯, 그놈도 자신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범인이 못 참고 한 번 더 분탕질을 치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다.
분명 놈은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춰 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치 거미줄 위에 앉아 먹잇감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거미처럼.
“결국 인내심이 강한 자가 이긴다는 소린가?”
그는 노예들에게 명령하여, 술과 안주를 준비하라 일렀다.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놈 못지않게 자신도 일가견이 있는 드래곤이다.
그는 확신했다. 반드시 놈이 먼저 움직일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자신은 적이 누군지 알지만, 아르티어스는 적이 누군지 모른다. 아는 것이 없는 만큼, 인내심도 그만큼 빨리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아르티어스라는 골드 드래곤은 인내심이라는 게 천성적으로 부족한 놈이 아니던가.
그는 의자에 푸근하게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겠지. 씩씩거리며 뛰쳐나와서 근처 실버 드래곤들의 레어를 기웃거릴 때가 바로 네놈의 제삿날이니까. 크흐흐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