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1권 7화 – 원래 이 정도는 다 하잖아
원래 이 정도는 다 하잖아
실버 드래곤의 예상과 달리, 아르티어스는 레어에 있지 않았다. 레어에 있어 봐야 신경질만 더 날 것이 뻔했기에, 곧바로 용병단으로 공간이동해 버렸던 것이다. 며칠 후, 드디어 아르티어스가 기다리고 있던 명령이 하달되었다. 344중대의 임무 수행을 도우라는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신입 마법사에게 이런 임무를 덜컥 맡기 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이번 경우는 얘기가 달랐다.
행정관의 건의에 따라 상부에서는 이번 임무를 통해 신입 마법사가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하는지, 그리고 대인관계는 어떤지 등등……. 마법사가 내밀었던 용병 수첩에 적힌 내용만으로는 판별할 수 없었던 것들을 알아볼 요량이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통보받은 시간에 맞춰 344중대를 찾아갔다.
이미 중대원들은 출발 준비를 완료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50여 기(騎)에 달하는 인마(人馬)가 도열해 있는 모습은 꽤나 위압적이었지만, 드래곤인 아르티 어스에게 있어서 그 모습은 애완동물 한 떼거리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못했다.
‘그놈들에게서 받은 정보대로 그런대로 훈련은 잘되어 있는 것 같군.’
“어서 오십시오, 마법사님.”
서로 인사가 오고 간 뒤 7시가 넘었지만 중대원들은 출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직 신관(神官) 2명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신관이라는 것들은…….”
어쩌고저쩌고.. 도열해 있던 중대원들 중 몇 명이 차마 입에 담기 힘들 만큼 지독한 욕설을 내뱉으며 투덜거렸다. 물론, 아르티어스에게 들리지 않도록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이다. 혹시 저 붉은 머리털의 마법사가 신관에게 고자질을 할 수도 있으니까.
“신관이 오기는 오는 건가?”
기다림에 지친 아르티어스가 짜증이 나서 중얼거려 본 것이었는데, 소대장 중 한 명이 곧바로 응대해 왔다. 그는 마법사가 신관이 오지 않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물론입니다, 마법사님. 신관도 없이 어찌 의뢰를 수행하러 가겠습니까.”
“내가 이곳 용병단은 처음이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여기 신관들은 원래 이렇게 늦게 오나?”
“처, 처음 오셨다구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는 장교들과 고참병들의 눈빛이 수상쩍다. 옷차림으로 봤을 때는 꽤나 실전 경험이 많은 마법사라고 생각됐는데, 처음이라고 하니 가슴이 덜 컹 내려앉았던 것이다.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너무 젊어 보인다는 점까지도 수상쩍게 느껴졌다.
신관들의 경우 신성력으로 젊음과 미모를 유지하기에 미남미녀가 아닌 자들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마법사에게도 어느 정도는 통용되는 말이다. 처음에는 아르티 어스의 젊음이 마법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진짜로 젊어서 그런 것이라면? 당연히 입 안이 씁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래, 여기에 온 지 3일쯤 되었다네.”
“이런 질문 드리는 것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혹시 그 전에 계셨던 곳을 알려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혹시 내가 초짜가 아닌가 걱정하는 건가?”
“그, 그건 아닙니다. 저희들이 어찌 감히…….”
“아니면 됐어.”
중대원들은 아르티어스가 소대장의 질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러지 않았다. 저등한 호비트들 따위가 자신 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런 것은 그의 안중에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자신감을 중대원들은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겉모습은 꽤 경험 많은 마법사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니 쥐뿔도 모르는 생초보였던 것이다. 중대원 들은 내심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력 있는 마법사가 용병단에 들어올 리 없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마법사를 지원해 준다기에 이게 웬 떡이냐 했더니……. 그러면 그렇지. 쓸 만한 마법사를 중대 단위 임무에 보내 줄 리가 없잖아. 휴~ 이번 임무도 고생문 이 훤하게 열렸구나.’
용병들은 출동할 때, 마법사와 신관을 지원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신관에게서는 치료를, 그리고 마법사에게서는 막강한 화력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 만 그들의 요구는 거의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대라면 혹 모를까, 중대 단위에까지 지원해 줄 만큼 마법사의 숫자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이번에 마법사를 대동할 수 있게 된 것은, 의뢰를 수행할 곳이 워낙에 외진 곳이라서 본대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즉, 이번 출동에서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주된 용도는 장거리 통신기였던 것이다.
의뢰를 수행해야 할 곳은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동마법진을 통해 거리를 대폭 단축시켰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한 달에 걸쳐 말을 타고 이동 해야만 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과연 상부에서 마법사를 지원해 줄 만도 했다. 이렇게 외진 산골마을에 용병길드의 지부가 건설되어 있을 턱이 없었으니까.
이때, 중대장은 경이로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마법사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품속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내더니 그 위쪽으로 손바닥을 쓱 훑었다. 그 순 간 수정구는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하듯 그 움직임에 반응해 번쩍하고 빛났다. 빛이 사라졌을 때, 놀랍게도 수정구 안에는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마법사의 모습이 비 춰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중대원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장거리 통신마법을 저토록 쉽게 행하는 마법사를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는 페가수스 용병단입니다. 무슨 일로…….」
공용 채널이었기에 습관적으로 주절거리는 마법사. 그런 마법사에게 아르티어스가 말했다.
“여기는 344중대입니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기에 보고 드리는 겁니다.”
「아, 자네가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신입이로군. 열심히 해 보게. 하기야, 고블린 때려잡는 것 정도를 가지고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긴 하겠지만 말이지. 하지만 이번에 자네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보여 준다면, 다음부터는 그런 하찮은 임무에 동원되는 일은 없을 걸세.」
“친절하신 조언 감사드립니다. 그럼 중대장을 바꿔 드리죠.”
아르티어스는 중대장 앞으로 수정구를 쓱 들이밀었다.
순간 중대장은 당황했다.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말 위에 앉은 채 수정구를 가동시키는 마법사를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는 땅바닥에 마법진부 터 그리고, 그 중간에다 수정구를 놓아 통신을 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마법사가 수정구를 갑자기 자신 앞으로 들이밀자, 그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급히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말했다.
“저,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중대장이 따로 보고할 사항은 없다고 합니다.”
「그럼 귀 중대가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상부에 보고하겠네.」
“예, 감사합니다.”
「그럼 고생하게.」
“예, 수고하십쇼.”
고블린이라는 것은 덩치도 작고, 힘도 약한 몬스터다. 하지만 고블린만큼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도 드물었다. 땅굴을 파는 데 있어서 두더지 저리 가라 할 정도 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들은 땅속에 자신들의 마을을 건설한다. 놈들이 얼마나 넓은 면적에 걸쳐 땅굴망을 구축해 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고블린들이 득 실거리고 있는지도…….
중대장은 우선 마을 사람들을 통해, 놈들의 대략적인 서식 지역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동안에 소대장들은 각자 자신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마을로 들어오는 통로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중대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르티어스는 페가수스 용병단원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유희를 즐겼던 것도 꽤나 오래전의 일이다. 하지만 호비트들의 세상이 바뀌어 봐야 얼마나 바뀌었겠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마법사들은 마법을 쓰고, 용병들은 칼질을 하면서 먹고사는 건 똑같은데 말이다. 드래곤의 입장에서 봤을 때, 호비트들이 하는 짓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전혀 없었다.
“하는 짓을 보니 완전히 쓰레기들은 아니군.”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고블린의 대략적인 서식지를 알아보고 돌아오던 중대장의 눈에 이런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보였다. 아르티어스는 나무 그늘에 반쯤 드 러누운 채 중대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문제는 중대원들이 땀을 줄줄 흘리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음에도,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한 저 나른한 표정이었다. 순간 중대장은 짜증이 왈칵 치솟았다.
‘아무리 본대와 연락을 주고받는 게 저 인간의 주 임무이기는 하지만, 저렇게까지 태평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열이 받는군. 젠장, 우리들은 뺑이를 쳐 야 돈을 벌 수 있는데, 저 인간은 대체 뭐야.’
눈치 없는 마법사에 비한다면 신관들은 그나마 좀 나았다. 게으름을 피우더라도, 중대원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늘어져 있을 테니까. 하지만 불만이 있다고 하 더라도, 마법사에게 뭐라 따지지는 못했다. 아무리 그가 중대장이라고 하지만, 신관과 마법사에게 육체노동을 강요할 권한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봐, 호크! 방어진 작업은 모두 끝났나?”
“예, 중대장님.”
“그럼 포위망을 구축하러 가자.”
전통적인 고블린 사냥법은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했다. 먼저 고블린 서식지 전체에 걸쳐 광범위한 포위망을 구축한 뒤, 놈들이 식량을 구하지 못하도록 차단한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리면 된다. 녀석들의 비축된 식량이 다 떨어지기만을.
결국 식량이 바닥난 고블린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땅굴 속에서 기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때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죽이면 일은 끝난다. 정말 무식한 방법이긴 했지만, 그것만큼 효과적인 사냥법도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전통적인 방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블린 사냥을 시도해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땅굴의 폭이 워낙 좁아서 그 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기 도 힘들었고, 워낙 넓은 지역에 걸쳐 땅굴망을 구축해 놓았기에 땅을 파서 놈들의 본거지를 밖으로 드러나게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여우 사냥하듯 연기를 땅굴 속으로 불어넣어도 봤지만 고블린들이 통로를 재빨리 막아 버리자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물이나 기타 다른 것을 통 한 공격에도 해당되었다.
결국에는 전통적인 방법, 즉 식량 조달을 차단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이유로 인해 고블린 사냥은 보통 봄에 집중적으로 행해졌다. 왜 그런가 하면, 겨울을 나는 과정에서 비축해 놨던 식량의 대부분을 소진했을 게 뻔했기에, 포위망을 구축한 뒤 기다리는 시간을 대폭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중대원들이 포위망을 구축한답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며 갈등했다. 사실, 자신이 손을 쓴다면 순식간에 고블린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것쯤은 잘 안다.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실력을 보이면 중대원들이 자신을 의심하게 될 것은 당연한 사실. 물론 이 정도 병력의 용병들 따위가 자신을 의심하는 것쯤이야 신경도 쓰 지 않지만, 혹시라도 이놈들이 사방에 소문이라도 퍼뜨리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재수가 없다 보면 그 소문이 실버 드래곤의 귀에도 들어갈 수 있는 노릇이었으니 까.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자니 답답함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조금만 도와주면 모를 거야. 그래, 웬만한 호비트 마법사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그런 마법을 쓴다면, 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어떤 놈이 눈치 채겠어??
결국 마음을 정한 아르티어스는 중대장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이봐,
“중대장.”
“예, 디겔님, 무슨 일이십니까?”
“고블린의 본거지가 어디쯤인 것 같나?”
중대장은 앞쪽에 보이는 들판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일대 전체입니다. 이쪽에서부터 시작해서, 저쪽에 보이는 커다란 나무 보이시죠? 제 생각에는 거기까지가 녀석들의 세력권인 것 같습니다.”
들판의 북쪽에는 야트막한 산이 솟아올라 있어, 겨울에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 줘 꽤나 따뜻할 게 분명했다. 설명을 듣고 가만히 살펴보자 과연 고블린들이 자리를 잡음 직한 그런 지형이었다.
“놈들이 제 발로 기어 나올 때까지 한없이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내가 저 위쪽에다가 마법진을 몇 개 설치할까 하는데, 자네가 나를 좀 도와 줘야겠어.”
순간 중대장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진을 설치하시겠다고요? 그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저쪽을 보십쇼. 수풀이 우거져 있어 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저 안으로 들 어가셨다가 놈들이 쏜 독침이라도 맞으신다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절대 안 됩니다.”
방어막을 치고 들어가면 된다며 반박하려던 아르티어스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저급한 마법사가 고난도의 마법진을 그리러 들어가면서, 자신의 몸을 물리 방어막으로 감싸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면 어쩌지??
잠시 궁리하는 아르티어스. 그리고 그는 곧이어 해답을 찾아냈다. 다년간의 유희를 통해 쌓은 경험 덕분이었다.
“저 위를 불태우게.”
중대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불을 질러 봐야 놈들에게는 그 어떤 타격도 줄 수가 없는데…….”
“물론 연기나 화기가 땅굴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겠지. 하지만 놈들이 은폐할 수 있는 수풀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내가 저 안으로 들어가서 마법진을 그리기가 훨씬 쉬워지지 않겠나?”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을 도와 마법진을 그리겠다는 말에 중대장은 아르티어스를 다시 봤다. 지금껏 자진해서 자신들을 돕겠다고 나선 마법사는 이 사람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중대장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언제나 마법사나 신관에게는 공손하긴 했지만, 지금 그의 언행에 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 그러시다면 그렇게 해 드리지요.”
중대장은 마법사가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하자마자 부하들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우선 한 개 부대를 차출하여 목표로 하는 지점에 불을 지르 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런 뒤 중대장은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그리시겠다는 마법진이 대체 어느 정도 크기입니까?”
아르티어스는 막대기를 들고 흙바닥에 커다란 원을 하나 그린 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정도 크기요.”
중대장은 즉각 부하들을 불러서 그 원의 외곽에 빙 둘러서라고 지시했다. 널찍한 방패를 들었다고 가정하고 촘촘히 자리를 잡게 하고 보니, 32명이나 되는 병사가
필요했다. 중대장은 그들에게 각자 널찍한 사각형 방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고블린의 독침 공격만 막으면 되는 만큼, 그리 튼튼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독침 이 들어올 작은 간격도 있으면 안 되었다.
중대장이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페가수스 용병단을 선택한 자신의 혜안에 스스로 감탄했다.
‘용병단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중대장들의 실력이 모두 다 저 정도라면, 예상보다 빨리 주변 용병단들을 통합할 수 있겠어. 어쨌거나 브로마네스 이놈이 좀 눈치껏 잘해 줘야 할 텐데…….’
지금쯤이면 브로마네스도 용병단에 들어와 있을 것이다. 꽤나 오랜 세월 유희를 즐겨 왔던 놈인 만큼, 실수는 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녀석에게는 쓸데없는 똥고집이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직까지도 제정신을 못 차렸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에 그런 고집불통인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고집을 피울 때가 따로 있지, 지금은 실버 드래곤들에게 자신들의 행적이 탄로 날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그런 중차대한 시점에 화려한 갑옷과 무기 를 들지 못해 안달이라니! 도저히 안심이 안 되는 것이다.
결국 불안감을 참지 못했던 아르티어스는 수정 구슬을 꺼내 통신을 보냈다.
“뭐 하냐?”
아르티어스의 물음에 브로마네스는 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런 젠장. 뭐 하냐고? 훈련소에서 멍충이들 가르치느라 아주 미쳐 버리겠다.」
뜬금없이 들어온 특급 용병이다. 신원이 확실하게 파악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중요 임무를 맡기지 않는다. 당연히 기밀 사항에 접근할 수 있는 자리는 더더욱. 그렇기에 본부에서 브로마네스를 훈련대 교관으로 발령 낸 모양이었다.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지켜보며 감시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상대의 성격도 가늠해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가르치는 모양새를 보며 실력까지 살펴볼 수 있으니 가히 일석삼조라고 봐야 했다.
“킥킥, 그래 열심히 해 봐라. 누가 아냐? 조만간에 네 능력을 알아보고 중대장 시켜 줄지 말이야.”
아르티어스의 농담에 브로마네스는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젠장. 감히 호비트 따위가 나를 뭐로 보고!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단장을 찾아가서 협박을 해 볼까?」
“아서라.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그러다가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게 밖으로 새나가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껄끄러워져.”
「그 정도는 말 안 해도 나도 알고 있어. 짜증이 나서 한번 해 본 소리지.」
이때, 성난 듯한 우렁찬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크레스터 교관! 지금 어디에 있나?」
그러자 브로마네스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만 끊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들! 내가 쉬는 꼴을 못보는구만.」
“킥킥, 어쨌거나 수고해라. 건투를 빈다.”
브로마네스를 좀 더 놀려 주고 싶었지만, 아르티어스는 서둘러 통신을 끊었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중대장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목표 지역에 대한 소각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방패도 준비되었구요.”
“수고했소.”
아르티어스는 품속에서 두툼한 마법책 한 권을 꺼낸 뒤,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너무 오래전에 배웠던 마법이라, 제대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물론 들으라고 한 소리였지만, 아르티어스의 혼잣말에 중대장은 어떤 마법을 쓰려고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성공하면 그때 가서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도 늦지 않다. 괜히 이것저것 물어본 뒤, 자칫 실패라도 하게 되는 날에는 서로 난처해지는 것이다.
“자, 이제 출발 준비! 모두들 위치로!”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크게 원형으로 둘러선 중대원들의 손에는 널찍한 나무판이 들려 있었다. 각자가 휴대하고 있는 방패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블린을 상 대로 작고 탄탄한 방패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고블린의 주 무기는 독침이다. 독침을 막는 데는 방어력 따위는 의미가 없었고, 최대한 넓은 면을 막을 수 있기만 하면 족했다. 그렇기에 몇몇 병사들은 어디서 떼 어 왔는지 문짝 같은 것을 들고 있는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중대장은 그들 중에 제2소대장에게 지시했다.
“쿠르다인! 자네가 책임지고 마법사님이 안전하게 일을 끝마치실 수 있도록 보좌해 드리게.”
“옛, 중대장님.”
아르티어스는 언덕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쿠르다인을 향해 말했다.
“저곳을 중심으로 해서 마법진 5개를 그리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법사님.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르티어스가 원형방진의 중앙으로 들어오자 쿠르다인이 다시 말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면 좋을지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쪽으로 병사들을 인도하겠습니다.”
“앞으로.”
아르티어스의 주문에 쿠르다인은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앞으로 갓!”
척척척…….
“빨리 갈 생각하지 말고, 좌우 동료의 방패와 자신의 방패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라.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원형방진(圓形方陣)을 유지한 채 이동하기란 대단히 힘들다. 평탄한 지형만 있는 게 아니라 높낮이가 심한 지형도 있고, 어떤 곳은 타다가 만 굵은 나무나 바위 등 방해물들까지 있기 때문이다.
틱, 틱.
대형을 유지하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을 때, 나무 방패에 뭔가가 부딪치는 듯한 가벼운 소리가 몇 번인가 들렸다. 고블린들이 날린 독침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하지 만 곧이어 그런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중대 내에 정밀사격이 가능한 저격수만 5명이다. 그들은 조그마한 움직임만 포착되어도, 곧장 그쪽으로 화살을 날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위는 짙은 수풀이 우거져 있어, 고블린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풀을 모두 태워 버린 지금은 훤히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고블린들이 아무리 조심스 럽게 움직인다고 해도 눈에 띄기 쉬웠다.
물론 은폐된 땅굴 안쪽에서 살짝 대롱만을 내밀고 독침을 쏴대는 고블린을 일격에 쏴 죽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 놓고 독침을 쏠 수 있는 것과,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쏘는 것은 천지 차이가 난다.
고블린들은 독침을 몇 발 날려 본 다음, 사정이 여의치 않자 공격을 포기하고 다시금 굴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이쯤이 좋겠소.”
아르티어스의 말에 2소대장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제자리에 섯! 방패 놓고 현 상태에서 대기! 방어에 만전을 기해라.”
척! 척!
병사들은 자신의 방패와 옆의 동료들이 가지고 있는 방패가 빈틈없이 연결되도록 세심하게 신경 써서 바닥에 내려놨다. 그렇게 원형방진 안쪽으로 동그란 공터가 안전하게 확보되었다.
아르티어스는 그 안에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그리는 것이 무척 힘든 듯 천천히 그려 나가는 아르티어스. 게다가 자신의 품속에서 책을 꺼내 든 뒤 그것을 보며 그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끔씩 오랜 시간 고민하는 척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시간을 질질 끌다 보니, 마법진이 완성된 것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였다.
“휴우~ 겨우 다 그렸네.”
긴 한숨과 함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일어서는 아르티어스. 그로서는 최대한 마법이 미숙한 척하고 있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표정에는 경외감이 어려 있었다. 그들로서는 마법사가 마법진을 그리는 것을 처음 봤던 것이다.
마법진 그리는 것을 끝낸 아르티어스는 진의 한쪽 편에 서서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한쪽 손으로는 괴이한 문양을 끊임없이 그리면서, 책에 쓰여 있는 주 문을 천천히 읽어 나가는 마법사의 모습을 훔쳐보는 병사들의 눈빛은 모두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주문이 끝나면 과연 얼마나 대단한 일이 벌어질까? 혹시 고블린들이 넋이라도 빠진 것처럼 슬금슬금 땅굴 밖으로 기어 나오기라도 하는 걸까? 진이 발동된 후 어 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보니, 병사들의 기대치는 더욱더 상승하고 있는 중이었다.
드디어 마법사의 두 손이 번쩍 들리자, 온통 기하학적인 문양이 잔뜩 그려진 마법진에서 희뿌연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굉장히 신비로웠고, 금방 이라도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해 줬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번 번쩍하고 빛났던 마법진의 빛은 마치 불 꺼진 등불처럼 처음과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당황한 병사들이 동료들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끝이야?”
“설마, 그럴 리가.”
“아냐. 지금 여기서 마법이 발동되면 우리들이 어떻게 되겠어? 우리들이 마법진에서 멀리 떨어진 후에 뭔가 큰일이 벌어지겠지.”
그럴듯한 말이었기에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 말이 맞겠다.”
지휘를 맡은 쿠르다인도 병사들처럼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마법사님, 이제 끝나신 겁니까?”
“소대장, 이쪽은 끝났으니 옆쪽으로 이동하세. 이거하고 똑같이 생긴 걸 3개 더 그려야 하거든.”
“그, 그러십니까? 전원 이동 준비! 방패 들어!”
순간, 쿠르다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는 급히 마법사에게 물었다.
“이거 진을 밟아도 괜찮습니까? 아니면 옆으로 헤쳐 모이라고 지시할까요?”
“아, 일단 발동하기 시작한 마법진은 짓밟아도 하등의 영향이 없다네.”
“아, 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은 쿠르다인은 부하들에게 힘차게 명령했다.
“전원 이동! 오른쪽으로!”
이동할 방향을 지시한 후, 쿠르다인은 부하들이 진형을 유지한 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구령을 붙였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병사들은 쿠르다인의 지시 하에 아르티어스를 호위하여 마법진이 완성되도록 도왔다. 마법진은 정사각형의 모서리에 해당되는 지점에, 일정한 간격으로 그려졌 다. 4개의 마법진을 모두 완성한 후, 아르티어스는 쿠르다인에게 부탁해 4개의 마법진 중심으로 원형방진을 이동시키라고 했다. 그곳에 마지막 마법진을 그릴 생각 인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지금 그리고 있는 마법진들을 하나씩 놓고 본다면 평범한 수준의 4사이클급 마법사라면 누구나 다 만들 수 있는 수준의 마법진이었다. 하지만 그런 하찮은 마법진이라도 이런 식으로 연계해서 사용하는 것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마지막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병사들은 의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마법이라고 하면 뭔가 엄청난 위력이라도 발 휘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한 번 빛을 번쩍 내뿜은 것 외에는 그 어떤 특이점도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있었다. 마법진 위를 군홧발로 짓밟고 지나갔음에도 형이상학적인 도형은 전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런 것을 보면, 뭔가 기대 감을 가지게 만드는 게 사실이기는 했지만……. 처음에 비해 병사들의 기대감은 많이 감소해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마법진까지 모두 완성되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것 또한 한 번 번쩍 빛을 내뿜더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어떤 변화도 보여 주지 않는 마법진 들. 병사들의 얼굴에 짙은 실망감이 어릴 수밖에 없었다.
“젠장. 처음에는 그럴듯한 거 같더니…….?
“마법사 혼자서 마법진을 그려 봐야 뭐 그리 대단한 위력이 있겠냐? 산이 부서지고, 들판이 불타고 하는 건 순전히 옛날 얘기 속에서나 나오는 거겠지.”
부하들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마법사가 행여 들을세라 쿠르다인은 급히 외쳤다.
“시끄러! 언제 내가 대화를 나눠도 좋다고 허락했나? 모두들 입 닥치고 주위를 경계하는 데나 신경을 집중해라!”
그러면서 쿠르다인은 아르티어스의 눈치부터 살폈다. 아르티어스가 부하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을까? 자신도 들었는데,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의 외로 아르티어스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신경질이라도 낸다면 꽤나 난감할 텐데 말이다.
아니, 어쩌면 돌아가서 중대장에게 따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쿠르다인은 신경질적인 눈초리로 부하들을 노려봤다.
‘중대장에게 한소리 듣기만 해 봐라. 너희들은 오늘 죽었어!”
이때, 아르티어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그만 돌아가지, 소대장.”
부하들을 노려보던 것을 그만두고 쿠르다인은 황급히 대답했다.
“아, 예. 그, 그러시죠.”
처음에는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마법사를 비웃던 용병들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더 이상 비웃을 수가 없었다. 해가 져 사위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그 들은 볼 수 있었다. 시커멓게 타 버린 들판의 중간쯤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마법진들의 모습을.
처음에는 5개의 마법진들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강도가 거의 엇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새벽녘쯤 되었을 때는 중간에 그려진 마법진이 훨씬 더 밝게 빛나고 있다는 게 육안으로도 뚜렷이 구별이 가능할 정도로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중간에 있는 게 훨씬 더 밝은 것 같지 않아?”
“확실히.”
처음에는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던 중대장이었지만, 밤에 보초를 섰던 부하들의 보고를 종합해 본 결과 그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실패한 마법진이 밤새도록 빛을 내뿜고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중간에 있는 마법진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빛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다고 한다.
“마법사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뭔가?”
“저쪽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들……. 언제 발동하는 겁니까?”
“이미 발동된 상태야. 여기서 육안으로 봐도 식별이 가능하니까, 직접 확인해 보면 알 게 아닌가. 낮에는 태양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겠지만, 주변이 어둑해지면 마 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저 마법진이 하는 일이 뭡니까? 일을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으니…, 고블린들을 땅굴에서 밖으로 쫓아내는 그런 종류의 마법입니까?”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은 뒤, 중대장이 바라던 대답을 해 주었다.
“그거보다 더 좋은 거지. 한꺼번에 몰살시켜 버리는 거니까. 땅속에서 죽어 버릴 테니, 시체 처리도 하지 않아도 되고……..”
그 말에 중대장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 살상용이라고요?”
“물론이지. 살상용도 아닌 것을 저기에다가 발동시켜서 뭐에 쓰려고?”
“그렇다면 저 마법이 언제 발동되는 겁니까? 미리 말씀을 해 주셔야, 저희도 대비를 할 게 아니겠습니까.”
잠시 생각해 보던 아르티어스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건 뭐라고 확답을 줄 수가 없구먼. 발동 시기를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아르티어스는 손가락으로 마법진들을 가리키며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바깥을 싸고 있는 4개의 마법진은 중간에 있는 마법진에 마나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하지. 중간에 있는 마법진이 주위의 마법진보다 훨씬 더 밝은 빛을 띠는 게 바로 그 이유야.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마나가 쌓이게 되고, 결국 마법진이 발동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마나가 쌓이게 되면……..
아르티어스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양 손바닥을 옆으로 확 펼치며 말했다.
“펑! 하고 터지게 되는 거야. 어때, 이해가 되었나?”
하지만 중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차가 좀 커도 상관없습니다. 대략적으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펑 하고 터지게 되는 게 대체 언제쯤입니까?”
“흠, 날씨가 이 상태로 지속된다면 아마 모레 정오쯤?”
“위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마을까지 여파가 미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걸세. 그런 걱정보다는 고블린들이 포위망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잡는 데 신경을 쓰게나.” 아르티어스의 말에 중대장은 답답하다는 듯 되물었다.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야 포위망을 구성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현재 상태대로만 하면 돼. 아슬아슬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충격파는 지하로 흘러 들어가는 거지, 지상으로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니니까.” 아리송한 대답만을 하는 아르티어스가 짜증스러웠지만, 중대장은 그쯤에서 질문을 멈췄다. 자신이 원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준다고 해도, 자신이 그걸 알아들 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무술에 대해 심도 깊은 설명을 해 준다고 해서, 마법사가 그걸 알아들을 리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이로군.’
시간이 지날수록 중간에 새겨져 있는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강도는 점차 강해졌다. 마법사가 마법진이 발동될 것이라고 예측했던 날이 되자, 마법진에서 흘 러나오는 빛의 강도는 더욱 강해져서 대낮에도 명확하게 인지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빛이 강해지는 만큼, 사람들의 호기심과 기대치 역시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마법진이 발동될 거라고 예측한 시각이 되자, 용병들은 물론이고 마을사람들까지 몽땅 다 몰려들었다. 마법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구경조차 못해 본 사람이 대부 분이었다.
그들은 모두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밝게 빛나고 있는 마법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사람들의 기대는 정오가 되었을 때 극에 이르렀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아무 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10분, 20분…….
1시간, 2시간……
처음에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마법진을 바라보던 사람들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뿔뿔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속았다고 생각하면서… 몇 명인가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바라봤지만, 그것도 한두 시간이지 3시간이 넘어가자 보초를 선 일부 용병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들 일상으로 돌아갔다. 요리를 하는 아낙, 밭을 가는 농부, 휴식시간을 이용해 낮잠을 즐기는 용병들…….
슬슬 해가 기울어져 가고 있을 때, 보초를 서고 있던 용병들 중 하나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 저거 좀 더 밝아진 거 아냐?”
“정오에서 해가 기우니까 그런 거겠지. 어두울 때 더 밝게 빛이 나잖아.”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고 하는 그 순간, 쿵! 하는 거대한 울림이 그의 몸을 강타했다. 쿵 하는 소리만 귀에 들린 게 아니라, 그야말로
오장육부를 진동시키는 듯한 커다란 울림이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던 것이다.
“흐윽! 이게 뭐야?”
그 순간 용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본 것이다. 마법진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하더니, 그 빛이 사라졌을 때는 마법진도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마법진이 그려져 있던 곳의 땅이 갑자기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마치 잔잔한 호수 중간에 돌멩이라도 던진 듯이.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떨림음.
쿠쿠쿠쿠쿠…..
지축을 울리는 듯한 괴성이 울려 퍼지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호수에 돌멩이가 떨어진 지점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넓게 파동이 퍼져 나가듯, 그곳의 땅 도 그렇게 엄청난 동심원이 솟아올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경이로운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놀라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는 이미 마법은 끝나 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요란한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넓게 퍼져 나가던 흙의 파동은 점차 잦아들더니 이윽고 사라져 버렸다.
“세, 세상에…….”
중대장을 비롯한 장교들이 자신들의 거처에서 후다닥 튀어나와 방어선 쪽으로 달려왔다.
“대체 무, 무슨 일이냐?”
그들이 와서 봤을 때는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도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들판 중간에 그려져 있던 5개의 마법진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 정도? 보초들은 저마다 방금 전에 봤던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대해 중대장에게 보고했지만, 완전 미친놈이 횡설수설하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이때, 아르티어스가 숙소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걸 본 중대장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마법사님, 마법진이 발동된 겁니까?”
“자네는 느끼지 못했나? 내가 있는 곳까지 충격파가 느껴졌었는데 말일세.”
“물론 느끼기는 했습니다만…….”
중대장은 고블린이 서식하던 벌판 쪽을 빙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마법사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잘된 거 같습니까?”
중대장이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마법이 발동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변화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봤을 때는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 없겠지. 하지만 땅속은 지상과 달리 쑥대밭이 됐을 거야. 파동이 휩쓸고 지나가면 제아무리 튼튼하게 지어 놓은 지하구 조물이라도 버틸 수가 없거든. 지하 전체가 동시에 무너져 내리는데, 제아무리 고블린이 땅을 잘 판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가 없지.”
그 말에 중대장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오, 정말 감탄했습니다. 이런 위대한 마법사님과 함께 의뢰를 수행할 수 있어 정말 영광입니다.”
아르티어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리 대단한 마법은 아닐세.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대지 계열의 마법을 익히지 않기에 자네가 처음 보는 것일 뿐이야.”
“저렇게 위력이 대단한데, 왜 안 익힌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는 꽤 위력적이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일세. 생각을 한번 해 보게. 지하에 가만히 숨어 있기만 하는 고블린들한 테나 저런 마법진을 쓸 수 있지, 그 외에 어디에다가 저런 걸 쓰겠나?”
아르티어스의 지적은 옳은 것이었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전쟁터에서 쓸 수 있는 마법은 절대로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마법이 준 감동이 희 석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 지독하기 짝이 없는 고블린을 이렇게 쉽게 몰살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모두들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