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2권 10화 – 배신, 그리고 도주

배신, 그리고 도주

오크족과의 전투 이후, 그들을 위협하는 몬스터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3일을 더 간 후에야 그들은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에 동굴이 보이지? 저곳이 바로 던전 입구일세.”

리치몬드의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커다랗게 뚫려 있는 동굴이 보였다. 동굴 입구 크기만 해도 엄청나게 커서, 안에 굉장한 던전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동굴 입구를 바라보던 라이는 흥분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들과 만나 모험을 떠난 이래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게 될 줄이야. 더군다나 던전은 그런 꿈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악당 보스가 숨어 있는 곳이 바로 던전이었으니까.

해가 지려면 아직 반나절 정도의 여유가 있었지만, 리치몬드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며 준비를 단단히 한 다음, 동굴에는 내일 아침 들어가기로 하세.”

리치몬드의 제안에 모두들 찬성했다. 일주일간의 강행군으로 인해 모두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쉴 곳을 찾아 지친 몸을 눕히기 바쁜데, 리치몬 드는 젠슨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쉬려고 하는데 이런 말 꺼내기는 좀 미안하네만, 자네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슬쩍 살펴보고 오게. 잠자다가 동굴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몬스터에게 습격당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으니 말일세.”

“핫핫, 그러지요, 뭐. 얼른 둘러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떠난 지 삼십 분쯤 지난 후, 젠슨이 돌아왔다.

“생각 외로 발자국이 별로 없었습니다. 제법 깊은 곳까지 들어가 봤는데, 안쪽은 석회동굴이더군요. 워낙에 습기가 많은 곳이라 동굴에 자리잡은 동물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그리고 습기가 많다는 점도 꽤 마음에 들어.”

그 말에 젠슨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축축해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뭘 모르는군. 우리들은 지금 던전을 발굴하러 온 걸세. 정밀한 기계장치는 습기에 매우 취약하지. 그만큼 함정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건데, 내가 싫어할 리가 없 지 않겠나.”

“그건 그렇군요. 자, 오늘은 모두들 배불리 먹고 푹 쉽시다. 내일은 또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다음 날, 일행은 10시쯤 되어서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속으로 얼마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공기가 서늘하면서도 축축하게 느껴졌다.

좀 더 깊이 들어가자 석회석 동굴 특유의 형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횃불의 밝은 불빛을 받고 반짝이는 석순들. 흔히 보기 힘든 석순의 아름다운 모습에 소피아 수녀는 눈을 떼지 못했다.

동굴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바닥의 물기가 점점 더 많아지더니, 급기야는 발목이 잠길 정도의 깊이가 되었다. 졸졸거리며 흐르는 시원해 보이는 물의 유혹에 라이는 잠시 투구를 벗고 물을 떠 마셨다. 정말 가슴속 깊은 곳까지 시원해질 정도로 맑고 깨끗한 물맛이었다.

그런 라이를 못마땅하다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닉이 도저히 참기 힘들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리치몬드 씨가 허락한 것도 아닌데, 투구를 네 멋대로 벗으면 어떻게 해? 빨리 다시 써.”

오크와의 전투 이후, 닉은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을 잡아 라이를 질책하곤 했다. 속이 뒤틀렸지만 라이는 애써 참았다. 어쨌거나 자기는 이 파티에서 신참이었으니 까.

‘젠장. 그래 너 잘났다, 새꺄.’

어딘가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큰 만큼, 모두들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며 이동했다. 하지만 아무리 동굴 깊숙이 들어가도 함정 같은 건 나타나지 않다 보 니 모두의 조심성은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뭔가 시커먼 음영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듯하더니 캉! 하는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인가?”

“모…, 모르겠습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저를 때렸는데…….”

직접 공격을 당한 젠슨조차도 상대가 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모두들 당황하여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이때, 또다시 뭔가가 젠슨을 향해 번개처럼 돌진해 왔다. 이번에는 미리 대비를 하고 있다 보니 적의 움직임을 조금은 파악해 낼 수가 있었다.

놈은 천장의 석주 뒤쪽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불시에 튀어나온 것이다. 석회동굴 안은 꽤나 넓었지만, 어둡고 시야가 좋지 못하다 보니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엇!”

간신히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아 낸 젠슨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키이익!”

괴성을 지른 것으로 봐서 베인 것 같았지만, 미지의 적은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망연한 표정으로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는 젠슨을 향해 리치몬드가 물었다.

“그게 뭐던가?”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제 짐작으로는 놀(Gnoll) 같습니다.”

“놀이라고?”

리치몬드는 다급한 어조로 동료들에게 경고했다.

“그게 정말 놀이라면 큰일이군. 모두들 조심하게. 놀은 독이 있는 몬스터니까 말이야. 만약 작은 상처라도 입게 되면, 곧바로 소피아 수녀님께 치료를 받도록 하게. 알겠나?”

바짝 긴장한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놀이라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얘기는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늑대와 원숭이를 합쳐 놓은 듯한 생 김새의 몬스터라고 했다. 독을 제외하면 그리 대단한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놀을 두려워 하는 것은 그 엄청난 숫자 때문이었다. 군집생활을 하는 놀의 습 성상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면 그 뒤로 수백 마리는 보통이고, 많게는 천 단위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많이 있다고 봐야 했다.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닉이 두려움 섞인 어조로 말했지만, 리치몬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온갖 개고생을 다 했는데,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이대로 허무하게 포기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천천히 앞으로 전진한다.”

결정을 내린 리치몬드는 각자에게 임무를 배당했다.

“라이, 자네는 후미에서 따라오면서 당나귀들을 보호하게.”

“예.”

“닉, 놈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니 가급적 화살을 아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앞쪽에서 쿵, 퍽 하는 소리가 간혹 들려왔다. 라이는 뒤쪽을 신경 쓰느라 앞쪽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뒷걸음질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때, 라이의 발에 뭔가 물컹 한 것이 밟혔고, 그 탓에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질 뻔했다.

급히 고개를 숙여 아래쪽을 바라보니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놀의 사체가 보였다. 윤기가 도는 시커먼 털, 그리고 길쭉한 주둥이 틈을 비집고 솟아 있는 긴 송곳니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저 정도라면 가죽갑옷도 쉽게 뚫을 수 있을지 몰랐다.

용병대 고참에게 얘기 들었던 대로 머리 모양은 늑대와 비슷했고, 몸은 날렵한 원숭이를 떠올릴 정도로 호리호리하게 생겼다. 저런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으니, 석 주 사이를 마치 제집처럼 날쌔게 뛰어다닐 수 있었던 것이리라.

놀의 사체를 본 라이의 마음은 한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쨌거나 상대가 가능한 것만큼은 틀림이 없었으니까. 예전에 헤슬러 일행과 함께 집을 떠났을 때 맞닥 뜨렸던 트롤이 안겨 줬던 공포감을 라이는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대적 불가능한 몬스터를 만나면 도망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그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켜 준 게 바로 트롤이었으니까.

“휴~, 이 정도면 뭐, 충분히 상대할만하겠네.”

이때였다! 석회동굴 특유의 수없이 많이 솟아 있는 석순들 사이에서 갑자기 시커먼게 튀어나온 것은. 라이는 반사적으로 방패로 앞을 가로막았다.

퉁!

다른 사람들의 것과 달리 라이의 방패는 겉을 가죽으로 감싼 나무 방패다. 강철 방패에 비한다면 방어력이 떨어지지만, 무게가 가벼워 사용하기 편리하다는 장점 이 있었다. 라이는 곧바로 도끼를 휘둘렀지만, 손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젠장, 엄청나게 빠르네.”

도끼는 장검에 비해 파괴력은 뛰어나지만, 무겁고 길이가 무척 짧다. 놀처럼 재빠른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는 적합한 무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라이는 닉을 향해 급히 말했다.

“닉, 네 검 좀 빌려 주면 안 돼?”

닉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단숨에 거절했다.

“싫어.”

라이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래도 재차 부탁했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제발 좀 빌려 줘. 이런 도끼로는 놀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어서 그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한 자루밖에 없는 검을 너에게 빌려 주고 나면, 난 뭘 가지고 싸우라는 거야?”

닉은 지금 활을 주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쓰지도 않는 검을 가지고 있을 바에야, 자신에게 빌려 주는 편이 파티 플레이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은 뻔한 사실. 라이는 리치몬드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라이에게 검을 빌려 주라는 말을 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지만 라이의 기대와는 달리 리치몬드는 못 들은 척 외면 했다.

그때 소피아 수녀가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괜찮다면 여기 내 검을 써. 어차피 나는 검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니까.”

소피아가 지니고 있는 검은 여성들이 호신용으로 즐겨 쓰는 샤벨(Shabel)이었다. 검신의 길이가 70Cm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그가 들고 있는 도 끼보다는 100배 더 나았다. 라이는 염치불구하고 냉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수녀님.”

“그럼, 잘해 봐.”

“맡겨만 주십쇼.”

샤벨을 들고 보니 왜 이 검에 여성용이라는 딱지가 붙은 것인지를 알 만했다. 장검에 비해 엄청나게 가벼웠다. 라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디 걸리기만 해 봐라. 두 토막을 내 주마.’

기회는 머지않아 찾아왔다. 방금 전에 라이를 공격하고 튀었던 바로 그 놀이 재차 공격을 시도해 왔던 것이다.

퉁!

공격이 방패에 막힘과 동시에 방패를 발로 차 뒤로 몸을 날리는 놀. 그 순간, 은빛 궤적이 번개처럼 놀의 신형을 뒤쫓았다.

“키에엑!”

이미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놀의 몸은 관성(慣性)에 따라 4미터쯤 날아간 후에야 바닥에 나뒹굴었다.

털썩!

앞서 가고 있는 젠슨이나 리치몬드가 꽤 오랜 시간 검을 휘둘러서 겨우 한 마리 잡는 데 성공한 것을, 라이가 단번에 해낸 건 검이 가벼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 게 가벼운 검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놀의 몸을 두 토막 내지 못한 것은, 그만큼 놀의 움직임이 재빨랐던 탓이다.

“좋았어! 우선 한 마리!”

샤벨을 치켜들며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리는 라이의 모습을 뒤에서 노려보고 있는 닉의 눈동자가 더욱 싸늘하게 식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놀의 공격은 점점 더 심해졌다. 처음에 우려한 대로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놀의 숫자가 꽤 많은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래서 이런 좋은 동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몬스터도 자리를 잡지 못했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흔적이 없었다고 해도 이런 커다란 동굴을 오크들이 그냥 놔둘 리 없다는 것에 의심을 품었어야 했는데…….”

젠슨의 사과에 리치몬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런 말 말게. 놀은 나도 전혀 생각도 못했으니 말일세. 설사 놀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뭐가 달라졌겠나? 어차피 우리는 던전의 보물을 발굴하기 위 해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이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라 해도 들어왔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는 젠슨의 어깨를 툭툭 쳐 준 리치몬드는 뒤를 돌아본 뒤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보물들을 생각하며 모두들 힘내자!”

“우와~~!”

모두들 환호성을 질러 화답했다. 그렇다. 보물을 생각하면 없던 힘도 불끈불끈 솟아오른다. 파티원들은 힘을 내어 공격하는 놀들을 베며 앞으로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보물을 향하여!

얼마나 들어갔을까. 커다란 공동(空洞)이 모습을 드러냈다. 횃불로 이리저리 비춰 봐도 벽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동 안은 넓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불 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는 수십 개의 눈동자들. 저 붉게 물든 놀의 눈동자만 봐도 놈들이 이곳을 순순히 통과시켜 줄 리 만무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리치몬드가 공동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닉이 일행들을 멈춰 세웠다.

“모두들 저게 안 보여요? 이대로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라구요.”

그러자 젠슨이 공동 안을 대충 훑어보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구만. 끽 해야 삼사십 마리쯤 될까?”

“그게 적다는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한두 마리씩 덤빌 때도 잡느라 그 개고생을 했었는데…….”

하지만 젠슨은 히죽 웃으며 쾌활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그러니 모험을 해 보는 수밖에. 안 그래?”

그 말에 찬성한다는 듯 리치몬드도 거들었다.

“자네가 그렇게 겁먹을 만큼 어려운 상대는 아닐세. 놀의 손톱은 물론이고, 이빨조차도 우리 갑옷을 꿰뚫고 들어오지 못해. 물론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덤벼든다 면 좀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힘을 합쳐 적절히 대응만 잘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가 있어. 그러니 힘을 내세나.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그냥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닉의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 리치몬드는 일행을 향해 말했다.

“이곳 지형의 구조상 한 번에 진입하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네.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2개 조로 나눠 행동하기로 하세. 라이, 자네는 소피아 수녀님과 함께 이곳에서 퇴로를 확보하고 있게 우리 셋이 앞으로 나가면서 길을 개척해 보겠네.”

그때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닉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제가 남아 있으면 안 될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단호하게 닉의 의견을 묵살한 리치몬드는 방금 전에 통과해 온 동굴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마 우리를 뒤따라오고 있는 놈들의 숫자도 그리 적지는 않을 걸세. 그럼 물어보겠네. 자네 혼자서 소피아 수녀님을 지키며 그놈들을 상대할 수 있겠나?”

“그, 그건…”

그제서야 말을 채 잇지 못하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닉.

라이는 순간 닉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투구를 확 벗겨 버리고 싶었다. 투구만 아니었다면 굴욕감에 가득 찬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껏 비웃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인지 라이의 오른손이 닉을 향해 자꾸만 움찔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퇴로를 지키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네. 우리 파티의 개개인의 실력을 감안해서 내린 결정이니, 자네는 우리와 함께 가면서 지원사격을 해 주는 게 최선 이야. 알겠나?”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었는지, 닉은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닉의 일그러진 얼굴을 감상할 수 없었던 것은 무척 아쉬웠지만, 녀석의 풀이 죽은 목소리만으로도 라이의 기분은 아주 상쾌해졌다. 다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 을 참는 게 고역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닉보다 자신의 실력을 훨씬 높게 평가해준 리치몬드에게 고마움마저 느꼈다.

리치몬드는 닉이 쥐고 있던 당나귀의 고삐까지도 모두 소피아 수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일단은 라이와 함께 여기에 계시다가, 우리가 신호를 하면 나귀들을 몰고 와 주십시오.”

그리고 라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당부했다.

“소피아 수녀님을 잘 부탁하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까지 오면서 놀을 다섯 마리씩이나 잡은 접니다. 수녀님은 제가 확실하게 보호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부탁하네.”

돌아서서 공동 안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리치몬드를 향해 소피아가 황급히 말을 걸었다.

“지금 신성마법을 걸어 드릴까요? 하다못해 속도 증가만이라도……?”

“아뇨. 좀 더 위험할 때 사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동굴 안으로 얼마 들어가지도 못한 상태인데, 벌써부터 마법의 도움을 받아서야 쓰겠습니까. 그리고 혹시라 도 놈들의 독에 당했을 때도 대비해야죠.”

수녀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 리치몬드는 젠슨과 닉을 데리고 조심스럽게 공동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리치몬드 일행이 공동 안으로 20여 미터쯤 들어갔을까? 횃불에 비춰 붉게 빛나던 눈동자들이 일순 깜빡거리더니, “끼익!” 하는 괴성을 신호로 사방에서 놀들이 떼거지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삼사십 마리 정도가 아니었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백 마리는 넘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이백 마리가 넘을지도…….

겨우 몇 십 마리쯤 있을 거라는 짐작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끽끽! 끼긱!”

“모두 정신차려!”

“으아악!”

넓은 공동에 비명과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자 알아듣기 힘든 괴성들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라이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수십 마리의 놀들을 볼 수 있었 다. 긴장감에 방패를 힘껏 움켜쥔 라이는 재빨리 뒤쪽을 살펴봤다. 다행히 자신들이 통과해 들어온 방향은 조용했다.

“제, 젠장,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시간이 없었다. 빨리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대로 싸우다가 죽을 것인지, 아니면 아직 실낱같은 기회가 남아 있을 때 도망칠 것인지. 앞서 공동 안으로 들어간 일 행은 새까맣게 덤벼드는 놀들에게 둘러싸여 생사조차 알 수가 없는 상황.

리치몬드와 젠슨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많은 놀들을 상대로 과연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그리고 문제는 지금 눈에 보이는 놀들 외에도 얼

마나 더 많은 숫자의 놀이 저 어둠 속에 숨어 있을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언제부터인지 검을 쥐고 있는 라이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때, 라이는 자신의 손을 감싸 오는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흠칫해서 옆을 바라보니 소피아 수녀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미소는 슬퍼 보였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 여신께서 우리를 버리지는 않으실 거야. 그러니 기운 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그동안 겪어야 했던 지난 과거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인 데. 만약 이런 동굴 속에서 허무하게 놀에게 죽을 거였다면, 용병단에서 아예 탈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이는 살고 싶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리고 이 절망적인 순간에도 자신을 위로하려 애쓰고 있는 수녀 역시 살려 주고 싶었다. 위로해 준답시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 역시 공포에 질려 가녀리게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라이는 소피아 수녀의 손을 꽉 붙잡고 무작정 밖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 이러면 안 돼! 동료들을 놔두고, 어떻게 우리들만…….?

“저 사람들이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생각을 해 보십쇼. 놀이 이삼백 마리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넓은 공동 안이라면… 우 리 둘이 그들을 도우러 들어가 봐야, 시체 둘을 더 늘릴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라이의 말에 수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도 아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뜻밖에도 수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라 이는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일렁이는 횃불에 비친 그녀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젠장! 누군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는 게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라이는 더 이상 말을 해 봐야 구차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소피아 수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더욱 주며 달리기 시작했다.

“끼히이잉!”

이때, 내버려 두고 온 당나귀들이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 오던 놀들이 당나귀들을 덮친 모양이다. 라이는 달리면서도 간절히 빌었다. 제발 놀들이 당나귀 고기를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자신들의 존재를 잊게 해달라고.

“끼익!”

“끽끽! 끼긱!”

뒤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괴상한 울음소리와 당나귀들의 처참한 비명. 라이와 소피아 수녀는 둘 다 공포에 질려 무작정 밖으로 내달렸을 뿐이다. 어떻게 동굴 밖 까지 달려 나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동굴 밖으로 나왔음에도 라이는 멈추지 않고 조금이라도 넓은 공터를 향해 달렸다. 움직임을 볼 수 있고, 대비할 약간의 여유만 가질 수가 있다면 놀 따위야 무서 울 게 없었으니까.

“헉헉헉!”

한동안 숨을 고르며 동굴 입구를 살펴봤지만, 다행히도 놀은 한 마리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람 셋과 당나귀 네 마리로 만족한 모양이다.

“휴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라이. 하지만 그때까지도 소피아 수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동료를 내팽개치고 자신들만 밖으로 도망쳤다는 게 너 무나도 죄스러웠던 모양이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른 후에 라이는 수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여기 이렇게 계속 있을 수는 없어요. 해가 지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야 합니다.”

“정말…, 그들을 구할 수 없었을까?”

애처롭게 묻는 수녀를 향해 라이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건 수녀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실 거 아닙니까. 후퇴를 결정한 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좀 전의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요.” 물론 이건 소피아 수녀에게 하는 말인 듯싶었지만,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동료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할 테니까. 하지만 정말 그 상황에서 동료들을 구출할 수 없었을까? 시도를 해 보지 않았으니, 그건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신성마법을 걸어 드렸어야 했어. 최소한 ‘속도 증가’만이라도 리치몬드 씨에게 걸어 드렸었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일을 이제 와서 후회하셔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안전하게 마을로 돌아갈 고민을 하는 게 옳습니다.”

최악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라이의 마음은 절망감이 아닌 묘한 기대감으로 잔뜩 들떠 있었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지금 아름다운 수녀와 단둘이 있지 않은가. 물론 내딛는 걸음마다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하루 종일 쫄쫄 굶게 된다고 해도, 그럼에도 낭만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라이의 나이는 열일곱, 한창 성에 눈을 뜰 나이였다. 때문에 아름다운 소피아 수녀와 함께 걸어간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한껏 들떠 있었다.

“헉헉~, 좀 쉬었다가 가면 안 될까?”

“동굴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합니다.”

“나, 다리 아파……. 조금만 쉬었다가 가.”

밤이 되어 어두워지기 전에 동굴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다리가 아프다며 눈물을 흘리는 소피아 수녀가 너무 애잔해 보였다. 그랬기에 라이는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럼 잠깐만 쉬었다 갈게요. 정말 잠깐만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가급적 동굴에서 멀리 떨어져야만 하니까요.”

“그래, 알겠어.”

소피아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아 품속에 지니고 있던 육포를 꺼내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짭짤한 육포를 먹었으니 목이 마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 물까지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을 보던 라이는 애가 타서 급하게 말했다.

“지금 가지고 계신 식량과 물로 마을까지 가야만 해요. 아껴서 드세요.”

“알았어, 내 껀 내가 알아서 할게.”

대부분의 식량과 물은 당나귀 등에 실려 있었다. 지금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건 개인적으로 품속에 지니고 있던 약간의 육포와 작은 물통 하나씩이 전부였다. 아껴서 먹는다면 이틀 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배고프다고 저렇게 먹어 대면 한입에 끝날 적은 양이었다.

하지만 라이는 모질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소피아 수녀는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으니까.

‘우와, 어떻게 된 게 얼굴이 온통 눈물 콧물 범벅인데도 저렇게 예쁘냐?”

지금까지 소피아 수녀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 동료들을 내팽개치고 두 사람만 살겠다며 도망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심신이 극도 로 지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얼마 도망치지도 못했는데도, 다리가 아프다며 투정을 부리는 것이리라. 라이는 소피아 몰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반드시 지켜 주겠다는 결심을 굳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