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2권 12화 – 도망자에서 추격자로
도망자에서 추격자로
“이봐, 일어나.”
낯선 목소리에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누, 누구……?”
잠시 멍했지만, 곧이어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라이는 크게 기지개를 켠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브자락에 의지해서, 그것도 갑옷까지 입은 채 잠을 잤을 뿐인 데도 이렇게 몸이 개운하다니…….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 준 다음, 잠잘 때 옆에 놔뒀던 도끼와 단검을 주워 들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앙상한 토끼 뼈다귀.
‘헉’
라이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도 자신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라이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개새끼도 아닌데 땅 바닥에 떨어진 뼈다귀를 맨들맨들해질 정도로 훑어 먹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곧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오크 소굴에 갇혀 살 때는 이보다 더한 것도 먹고 살았었다. 환경이 좀 바뀌었다고 해서, 뼈다귀 주워 먹은 걸 부끄러워하다니. ‘제깟 것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라도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라이는 은근슬쩍 토끼 뼈를 발로 툭 걷어차 모닥불로 밀어 넣었다. 라이가 고개를 돌려 보니 중년 사내가 소피아 수녀에게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반역도 수색 작전에 협조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 노파심에 드리는 말인데, 이번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함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소피아 수녀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설마 이 깊은 산중에 연약한 여자만 놔두고 그냥 가시겠다는 건가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근처 마을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지만, 반역도를 잡아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보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나보고 그냥 죽으라는 말과 똑같은 거잖아요.”
당황스런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소피아를 바라보는 중년 사내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짙게 깔렸다. 아무리 능력 없는 신관이라고 해도,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 휘하기만 한다면 웬만한 병사보다 백배 낫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작 이삼일 거리만 가면 마을이 나오는데, 그걸 못하겠다며 자길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 원망을 하다니.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흑흑, 농담 아니거든요.”
옆에서 듣고 있던 라이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흠. 소피아 수녀가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데, 과연 저 늙은이는 어떻게 반응할까??
닳고 닳은 중년 사내가 소피아에게 쉽게 휘둘릴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상대가 워낙에 미녀인지라 중년 사내의 대응이 궁금하긴 했다. 아무 리 나이를 많이 먹었다 해도 남자가 미녀에게 약한 건 불변의 진리였으니까.
하지만 중년 사내의 반응은 라이의 상상밖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수녀님 혼자 마을로 돌아가는 게 너무 힘들다고 눈물을 흘리는 걸 저보고 지금 믿으라는 겁니까? 우리들과 같이 동행하고 싶다는 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렇지. 그런 치졸한 이유를 대시는 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제가 바보도 아니고.”
중년 사내의 짜증스런 말투에 일순 소피아 수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껏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정말인데요. 그리고 저에게 그런 능력도 없지만, 설사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연약한 여자에게 혼자 마을로 돌아가라 말씀하실 수 있으시죠?”
이런 소피아의 말에 중년 사내는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들로서도 사제가 함께 있으면 득 이 되면 됐지, 해가 될 건 전혀 없었으니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저희와 함께 가시죠.”
혹시 반역도를 잡지 못할까 염려해서인지, 중년 사내는 일행을 독려하며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험한 산길을 가로질러 가는 만큼 연약한 여자인 소피아 로서는 당연히 견디기 힘든 강행군이었다.
라이가 놀란 것은 이미 몇 번이고 다리가 아프다며 징징거려야 할 소피아가 이를 악물고 따라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좀 버틸 만한가 보다 라고 생각했지 만,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될 정도로 지쳤음에는 그녀는 단 한 마디도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힘들게 따라오고 있는지를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라이의 눈빛은 애잔함 따위가 아닌 가증스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하, 정말 기가 막히는군. 나랑 단둘이 있을 때는 30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다리가 아프다며 징징거리더니, 지금은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잘 참고 있잖아? 정말 여 우가 따로 없구만. 가만, 결론은 그만큼 날 만만하게 본 건가?”
라이가 걸어가면서도 소피아를 자꾸 쳐다보자, 중년 사내 역시 무슨 일인가 하여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일순 의아하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랐 다.
“다리가…, 많이 아프신 것 같군요.”
“예, 좀 힘드네요.”
중년 사내는 잠시 걸음을 멈춘 뒤 답답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힘드시다면서 왜 자기 자신에게 신성마법을 걸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러자 소피아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제 자신에게 신성마법을 쓰게 되면, 위급할 때 동료들에게 신성마법을 써 줄 수가 없잖아요. 파티원들이 눈앞에서 전멸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신성력 을 허투루 쓰지 말라고 배웠어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신성력이라는 게 무한한 게 아니다 보니 그런 조언을 들었었던 모양이다. 소중한 신성력을 전투능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자신에게 쓸 게 아니라, 능력 있는 파티 원을 위해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이다.
“누가 그렇게 가르쳐 주던가요?”
“처음 파티를 맺었었던 사람들이요.”
중년 사내는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소피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입니다. 물론 위급할 때 신성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파티의 생사가 갈리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그런 식으로 신성력을 관 리하시면 수녀님에게 아무런 발전이 없다는 게 문제죠.”
““발전… 이요?”
자신이 지금까지 가져왔던 관념에 반대되는 얘기가 나왔을 때는 보통 거부반응을 보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소피아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중년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물물은 퍼내면 퍼낼수록 더욱 깨끗해지죠. 신성력이 소중하긴 합니다만, 끊임없이 써 줘야 맑고 깨끗한 신성력이 몸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 문이나 몸짓도 평소에 계속 반복 숙달해 둬야 위급할 때 실수 없이 행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이제 수녀님의 문제점을 아시겠습니까?”
“하지만 평상시에 신성력을 그렇게 낭비했다가, 정말 위급할 때 쓸 신성력이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해요?”
“그렇기에 자신이 쓸 수 있는 신성력의 한계가 얼마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동료의 상처가 깊다면 신성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치료를 해 준 다음, 소모된 신성력이 회복되면 그때 깨끗하게 완치시켜 주면 될 거 아닙니까.”
중년 사내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소피아는 반론을 말하기보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수녀님이 평소에 자기 자신의 수련에 부단한 노력을 했다면, 이런 산길 며칠 정도 걷는 것 따위는 식은 스프 마시는 것보다 쉬웠을 테죠. 하지만 그러지 못했 기에 지금의 모습이신 겁니다.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여 안주하신다면, 죄송하지만 생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 쓰레기 같은 파티원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사셔 야 할 겁니다.”
중년 사내의 냉정할 정도로 단호한 말투에 소피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껏 그렇게 안이하게 살아왔었으니
까.
잠시 고심하던 소피아는 곧이어 자신을 향해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예의 그 아름다운 주문과 몸동작, 당신을 섬기는 종에게 자그마한 은총을 허락해 주십사 하는 경배와 찬양이었다. 순간 희뿌연 빛이 소피아의 온몸을 감싸며 스며들었다.
“이젠 됐어요.”
“잘했습니다. 앞으로도 아침에 출발하기 전에는 꼭 그렇게 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짐은 되지 말아야죠.”
중년 사내는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다시 출발! 이곳에서 시간을 쓸데없이 많이 지체했으니, 좀 더 속도를 내도록 합시다.”
잠시 후, 라이는 신성마법의 효능에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화를 나누느라 시간이 지체된 만큼, 일행의 이동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출발한 지 2시간쯤 지나자 용병생활을 하면서 단련된 라이조차도 힘겨워 다리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들어 헐떡거리던 소피아가 지금은 아주 기운차게 걷고 있었다. 아니, 라이의 눈에는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이래서 모험가 파티에 사제를 꼭 포함시키는 모양이야.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네.’
동굴에서 탈출한 후, 소피아와 함께 근 이틀에 걸쳐 이동했던 길을, 거의 반나절만에 되돌아왔을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길을 걸어가면서 중년 사내와 샘이라는 궁 수가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주의 깊게 엿들었지만, 아무리 해도 그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샘이 중년 사내를 ‘대장’이라고 부르는 정도
였다.
소피아야 스스로에게 신성마법을 썼으니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게 당연했지만, 뒤를 따라가는 라이는 죽을힘을 다해서 견뎌야 했다. 그런데 그런 라이의 강인한 체력에 중년 사내가 관심을 드러냈다.
중년 사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라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체력이 아주 좋군. 수녀님 말씀으로는 도끼를 제법 잘 다룬다던데…, 몇 급이었나?”
“6급이었습니다.”
오크 십여 마리를 순식간에 쳐 죽였다는 소피아 수녀의 증언을 생각한다면 등급이 꽤 낮은 거라고 봐야 했다. 중년 사내는 내심 4급 정도는 될 거라고 짐작했던 것 이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은근슬쩍 칭찬을 해 주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벌써 6급인 걸 보면, 그런대로 괜찮은 재능이군. 열심히 노력해 봐라. 잘만 하면 중대장까지는 충분할 것 같으니 말이야.”
“그건 나으리께서 저를 자유롭게 풀어 주셨을 때 얘기죠. 붉은 전갈 용병단으로 되돌아간다면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제발 인정을 좀 베푸시 죠, 나으리. 고향 집에…….”
“어허, 그건 어제 네놈이 이미 말했잖느냐. 홀로 된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다고 말이야. 그래, 집 떠난 지는 얼마나 됐지?”
순간, 라이의 말문이 턱하니 막혔다. 기간을 길게 잡아도 문제고, 짧게 잡아도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길게 잡는다면 그동안 홀로 된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아남아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하지만 짧게 잡으면, 자신이 보여 줬던 실력이 말이 안되는 것이다. 용병단에서 습득한 게 아니라는 말이 되니까. 그렇다면 홀로 남았다는 어머니가 힘없는 늙은이가 아닌 도끼술의 고수라는 소리밖에 더 되겠는가.
라이가 섣불리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중년 사내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크하핫, 언제 집을 떠났는지 기억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까마득한 옛일이더냐? 뭐, 네놈이 언제 집을 떠났는지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어쨌거나 내가 어제 했던 약 속은 유효하다. 반역자를 잡거나, 아니면 놈의 시체라도 찾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풀어 주마. 하지만 만약 거짓을 말했거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는 가차없이 네놈이 탈출했다는 그 용병단에 넘겨 버릴 테다.”
“예예, 당연히 제가 도움이 되어야죠. 아, 저쪽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시면 동굴 입구가 보일 겁니다.”
만만해 보이던 첫인상과는 달리 중년 사내가 자신을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논다는 기분이 들어 약간 언짢기는 했지만 그래도 화는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리 오래 볼 얼굴은 아니었으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동굴 속에 들어가 그들의 시체를 보여 주기만 하면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된다. 그것만 생각하면 없던 힘도 불끈 솟아오르는 라이였다. “저 동굴입니다. 겉은 저래 보여도, 속은 아주 넓고 깊습니다. 시체를 확인하시려면 꽤 깊게 들어가셔야…….?”
라이는 말을 하며 중년 사내를 슬쩍 돌아봤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동굴 안으로 들어가 시체를 확인시켜 주고 싶었지만, 수백 마리의 놀 떼가 와글거리 며 모여 있는 걸 뻔히 아는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걸 감안한다면 이렇게 동굴 가까이에 있는 것조차 위험했다.
따라서 리치몬드가 했던 것처럼 동굴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야숙을 하는 게 안전했다. 그렇게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준비를 철저히 한 후, 내일 아침에 들어 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중년 사내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동굴을 향해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침내 동굴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중년 사내는 샘과 라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주위를 샅샅이 뒤져라. 분명히 어딘가에 흔적을 남겼을 게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샘은 동굴 왼쪽을 중심으로 수색했고, 중년 사내는 오른쪽 방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동굴 안으로는 들어갈 생각조 차 안 하고 동굴 밖만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동굴 안에서 밖으로 나온 흔적을 찾고 있다는 말인데…….
라이는 그런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의문을 참지 못하고 중년 사내에게 물었다.
“설마…, 그들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그러자 중년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뻔한 거 아니겠냐. 놀 떼가 무섭다고는 하지만, 동굴 안에 놀이 서식하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만 있다면 대처하는 게 그리 어려운 게 아니거든. 한 번 기억을 잘 떠 올려 봐. 당시 그놈들이 입고 있던 갑옷을 말이야. 빈틈 하나 없이 아주 정밀하게 이음매가 만들어져 있지 않던가?”
남의 갑옷을 구석진 곳까지 자세히 살펴보는 건 아주 큰 실례였다. 상대방을 기습하려는 의도가 없다면 그렇게까지 남의 갑옷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없기 때문 이다.
어쨌든 라이는 중년 사내의 말에 애써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닉은 언제나 로브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기에 파악이 불가능했었고, 리치몬드나 젠슨의 경우에는 마 치 보란 듯 갑옷을 드러내 놓고 있었기에 대충이나마 살펴보는 게 가능했었다. 그때의 기억을 잠시 떠올려 보던 라이는 곧 중년 사내의 말에 공감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갑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네요.”
“놀의 이빨이 날카롭다고는 하지만, 송곳처럼 가느다란 건 아냐. 물론 가죽갑옷만 입고 있다면 위험할지 몰라도, 사슬갑옷 정도만 되어도 놀의 이빨이 뚫고 들어 올 수 없다는 말이지. 갑옷만 빈틈없이 잘 갖춰 입고 있다면, 놀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어.”
소피아에게서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미 파악한 후였기에 내린 결론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라이는 선뜻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 하지만…, 놀에게는 독도 있는데…….”
“물론 있지. 그런데 놀의 독은 그렇게 강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효력이 늦게 나타난다는 특성이 있어. 그렇다면 설혹 재수가 없어서 놀의 이빨에 깨물려 독에 중독 됐다고 해도 그 자리를 벗어난 뒤 천천히 대처해도 늦지 않다는 말일세.”
“그, 그럴 수가…….”
중년 사내는 동굴 주위를 천천히 둘려보며 비웃듯 말했다.
“하지만 갑옷을 그렇게까지 갖춰 입게 되면 무게가 급증하게 되지. 그리고 무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흔적 역시 깊게 남길 수밖에 없고 말이야. 동굴 입구 쪽이 야 놈들이 자신들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워 놓을 수 있겠지만, 제까짓 놈들이 언제까지 그럴 수가 있겠나. 그러니 조만간에 놈들의 발자국을 찾아낼 수 있을 게야. 아 주 깊게 파여진 발자국들을..
중년 사내는 호언장담했지만, 세 시간 동안 동굴 주변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리치몬드 일행의 흔적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설마 놈들이 정말로 동굴 속에서 놀에게 죽었단 말인가? 젠장! 놈들이 아주 견실하게 갑옷을 차려입었다는 수녀님의 말에 놈들이 잔꾀를 부린거라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라이의 뇌리 속을 번쩍 하며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용병은 망토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방어 상태를 상대편이 파악하기 쉽기 때문 이다. 허접하다는 용병조차 그런데, 하물며 도망자라는 것들이 보라는 듯 갑옷을 드러내고 다녔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정규군들처럼 폼 잡기 좋아하는 것들이나 애용하는 망토를 보란 듯이 두르고…….
어쩌면 이게 함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약 그들이 두터운 갑옷을 드러낸 게 일부러 그런 것이라면?
라이는 다급히 중년 사내에게 물었다.
“혹시 그들이 어딘가에서 무거운 갑옷을 벗어 버렸다면 어쩌죠?”
라이의 말에 샘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빈정거렸다.
“흥! 이런 위험한 곳에서 갑옷을 벗는다고? 그건 그냥 죽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야.”
“잘 생각해 보니 그들이 착용하고 있던 갑옷은 최소 두 겹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니 한 겹 정도 벗어 버린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건 없죠. 대신 무게는 대폭 감소할 테고 말이죠.”
그러자 뭔가를 깨달았는지 중년 사내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런 모습을 보며 라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무게가 가벼워진 만큼 흔적 역시 얕게 생겼을 확률이 큽니다. 안 그렇습니까?”
중년 사내는 다급히 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들었지? 깊은 흔적만 찾지 말고, 작은 거라도 샅샅이 찾아봐.”
그러면서 중년 사내는 방금 전에 놈들의 흔적이 아닌 것으로 판단해서 그냥 건너뛰었던 자국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 위해 달려갔다. 그렇게 수색을 재개한 지 얼 마 지나지 않아 그토록 찾아 헤맸던 리치몬드 일행의 발자국을 찾아냈다. 라이의 조언이 적중한 덕분이었다.
라이의 짐작대로 그들의 발자국은 아주 얕게 패여 있었고, 발자국의 형태조차도 예전과는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아마도 당나귀에 실어 놨던 가죽부츠로 갈아 신 은 모양이었다. 물론 값비싸 보이던 강철부츠는 버렸을 테고…….
‘젠장, 아까워라……. 버릴 거였다면 나를 주지.’
발자국을 확인한 중년 사내는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허,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준비를 해 놨을 줄이야…….”
잠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중년 사내는 갑자기 라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칭찬했다.
“이번에는 네놈의 도움이 꽤 컸다. 아주 제법이야.”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수녀님을 빨리 모시고 와라. 출발이다!”
“저…,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놈들이 만약에 이미 국경을 넘어가 버렸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러자 중년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 그놈의 머리통을 잘라야 끝난다고 말이야.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서 수녀님이나 모시고 와.”
중년 사내의 대답에 라이는 울컥하는 걸 느꼈다. 곧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언제 끝날지도 모를 숨바꼭질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도 광활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산맥을 헤매며. 그러다 만약 재수가 없어 트롤이나 오우거와 같은 몬스터라도 만나게 되면 목숨마저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명령을 내리고 흔적을 따라 점차 멀어져 가는 중년 사내의 등판을 바라보며 라이는 갈등했다.
‘에이 씨. 확 죽여 버리고 튀어??’
순간 라이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매어 놓았던 도끼를 향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눈감고 던져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샘의 존 재가 마음에 걸렸다. 그가 아직 본격적인 실력을 보여 준 것은 아니었지만, 느낌상 아무래도 레인저 교육을 받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라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탈출을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전에 노예로 잡혀 오는 과정에서 섣불리 행동하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인내하고 고심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라이는 소피아 수녀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며 소리를 꽥 질렀다.
“수녀님! 흔적을 따라 출발한대요. 빨리 오세요!”
<묵향> 3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