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2권 2화 – 비열한 자의 신위

비열한 자의 신위

악마의 골짜기는 전체 길이가 1킬로미터 남짓밖에 안 되는 통로다. 그렇지 않아도 험한 산길에 사람의 손길이 더해져 더욱 위험한 길이 되어 버렸다. 루니엘 중대 장이 자청해서 정찰 임무를 맡겠다고 나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방벽 위에 서 있는 루니엘 중대장의 시야에 이쪽으로 오기 위해 길 위에서 말들과 씨름을 하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쳐 버린 말 은 걸으려 하지 않고,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투레질만 연신 해 댔다. 그런 말을 강제로 끌고 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멀리 있지만 짜증으로 인해 왈칵 일그러진 동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루니엘 중대장은 자신의 선택이 탁월했다고 생각하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킬킬, 내 이럴 줄 알았지.”

자신들은 정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최소한의 무장만 하고 왔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저 밑에서 오고 있는 자신의 중대원들은 동료들의 말까지 끌고 오느라 개고 생을 곱빼기로 하고 있는 것이다.

“크흐흣, 이래서 상황 판단이 빨라야 몸이 편한 거야. 안 그래?”

자신의 탁월한 판단 덕분에 편히 온 부하 놈들이 아무도 맞장구를 쳐 주지 않자, 기분이 상한 루니엘 중대장은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순간 그의 눈이 경악으로 인해 부릅떠졌다. 짙은 녹색 로브로 몸을 감싼 괴한이 부하의 입을 틀어막고 단검으로 목을 베고 있었던 것이다.

부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버둥거리다 축 늘어졌다. 죽은 것이다.

“이, 이런……!!”

경악한 루니엘이 급히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이어지지 못했다.

퍽.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의 미간을 꿰뚫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무너지듯 쓰러져 버렸다. 루니엘 중대장과 대원 10명을 단숨에 해치워 버 린 정체불명의 사내들. 그들은 한결같이 짙은 녹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일격에 루니엘을 사살해 버린 사내는 재빨리 화살을 장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적의 지휘관을 처리하는 동안 그의 부하들도 자신이 맡은 놈들을 모두 다 해치워 버렸는지 저항하고 있는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쯧, 적진에서 경계도 하지 않고 퍼져 있는 놈들이 뭔 용병 짓을 하겠다고. 이러니 3류라는 소리를 듣지.”

루니엘 중대장과 대원들이 이토록 허무하게 제압된 이유는 이곳이 앞쪽을 향해서만 튼튼한 벽으로 방어되어 있을 뿐 뒤쪽은 무방비 상태로 뻥 뚫려 있었던 탓이 다.

적병이 없다고 안심한 대원들은 두셋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 올라오고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느라 한눈을 팔고 있었다. 그런 방심(放心)이 적 의 기습을 허용했던 것이다.

***

짙은 녹색 로브를 입은 사내들은 페가수스 용병단의 레인저들이었다.

용병단의 편제상 각 소대에는 대개 1명씩의 레인저를 배치한다. 페델 중대장은 그들을 모두 차출하여 임시로 특공조를 편성한 뒤, 적을 추월하여 이곳에서 은신할 것을 명령했다. 험악한 산길을 가로질러 적들을 추월해야 하는 고난도의 임무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려운 임무를 깨끗하게 완수했고, 명령받은 대로 이곳 방벽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특공조를 이끌고 있는 선임 레인저는 방벽을 향해 접근해 오는 적들을 향해 비릿한 조소를 날렸다.

“모든 게 계획대로로군.”

그는 자신의 활에 화살을 메기며 동료들에게 지시했다.

“전원 사격 준비!”

동료들을 돌아보며 사격 준비가 완료되었는지 확인했다. 그런 다음 그도 시위를 힘껏 뒤로 당기며 목표물을 찾았다. 정규군과 달리 용병은 계급장을 붙이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헐렁한 원피스 형태의 로브로 전신을 가린 상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력 있는 놈을 찾아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곧이어 그는 꽤 관록이 있어 보이는 듯한 먹잇감을 발견했다.

“이봐, 다섯 번째 열에서 이마에 흰점 박힌 밤색말 끌고 오는 놈. 누가 조준하고 있나?”

그러자 옆에서 동료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놈은 내가 침발라 놓은 놈이야. 그러니 넘보지 말라구.”

“젠장.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하기야 앞에서 걸어오는 놈들 중에서 그놈이 쓰고 있는 투구가 가장 눈에 띄었는데, 당연히 찜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놈 바로 뒷녀석은 누가 조준하고 있나?”

이번에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목표물의 가슴을 겨누며 최대한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쏴!”

순간, 레인저들의 활에서 일제히 화살이 발사되었다.

쉬우우웅―.

매서운 파공성을 울리며 날아가는 화살들.

퍽, 퍽, 퍽.

“으악!”

“케엑!”

화살이 꽂히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삽시간에 다섯 명의 대원들이 쓰러졌다.

“적이다!”

갑작스러운 화살 공격에 여기저기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소대장들의 악쓰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방패벽! 전원 방패벽을 쌓아라!”

소대장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대원들은 재빨리 방패를 들어 소대별로 방어벽을 만들었다. 가장 아래쪽에 3명, 중간열에 4명, 그리고 맨 윗줄에 3명. 평소 빡세 게 훈련을 해 왔기에 방패벽은 거의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슈우우웅―.

퍼퍽, 퍽!

방패벽을 제대로 쌓은 소대는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가장 앞쪽에 위치해 있던 소대는 이번에도 두 명의 사망자를 냈다. 최초 공격에 반수 가까이 죽어 버린 상태 였기에 제대로 방어벽을 쌓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살아남은 대원들은 재빨리 다른 소대의 방패벽 뒤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대대장은 기가 막히는지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루니엘 이 자식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아마 모두 죽은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 화살들을 루니엘과 그 부하들이 쏘고 있다는 말일 테니까요.”

올란도의 대답에 대대장은 아직도 현재의 상황을 믿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힘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설마 루니엘이 그렇게 맥없이 당했을라고……?”

“적들이 없다고 마음 푹 놓고 방심하고 있었다면,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한순간에 휙!”

올란도는 익살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목을 손가락으로 쓱 긋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최악의 관문이라고 길잡이가 입에 거품을 물더니, 어쩐지 너무 쉽게 넘어간다 싶었습니다.”

대대장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장난스럽게 말하는 올란도가 때려죽일 만큼 얄미웠다. 하지만 지금은 부하를 질책하기보다,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 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기에 대대장은 애써 짜증을 가라앉히며 올란도에게 물었다.

“뭐 좋은 대처 방안이라도 있나?”

“일단 첫 번째 방벽으로 되돌아가서 전열을 재정비하는 게 낫겠습니다. 현재 우리 대대에는 공성장비(攻城裝備)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고 완벽하게 길을 틀어막고 있는 방벽.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 건설해 놓은 첫 번째 방벽에 비한다면야 아무래도 좀 부실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지만, 막상 공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망할! 루니엘 이 자식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았으면 제대로 지켜내야 할 거 아냐.”

결국 대대장은 분노를 터뜨렸다. 사기가 저하될까 주위에 있는 부하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릴 수 없었기에, 그는 죽은 루니엘을 향해 욕설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대대장님, 어떻게 할지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대대장은 어쩔 수 없이 후퇴를 명령했다. 다시 되돌아가든지, 아니면 저쪽 방벽으로 돌아가 충차(衝車)라도 만들어 공성전을 펼치든지 할 생각이었다. 화살이 날 아오는 숫자로 봤을 때, 적병의 숫자가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

“모두 후퇴하라!”

붉은 전갈 용병단 내에서도 정예로 꼽히는 부대답게 계속 화살이 날아오는데도 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마 자기 한목숨이나마 살겠답시고 허겁지겁 내빼려 들었다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피떡이 되는 대원이 속출했었으리라.

적의 사격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이쪽에서 후퇴하기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사격을 멈춘 것이다. 화살을 쏴 봤자 전혀 먹혀들지 않았기에 사

격을 멈췄을 수도 있었지만, 대대장은 그걸 다르게 판단했다.

“화살 보유량이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군.”

올란도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급히 물었다.

“이대로 후퇴하지 않고, 공성전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 열 명도 채 안 되는 적병이 무서워 다른 길로 돌아갔다는 게 알려지면, 모두들 얼마나 우리를 비웃겠나? 더군다나 놈들은 화살도 얼마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어차피 기습은 물 건너간 것 같은데, 그냥 평탄한 길로 진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여길 깨부수려면 공성장비를 만드는 데만 최소한 반나절 이상 걸릴 겁니 다. 그사이에 적의 지원부대라도 도착한다면……..

하지만 대대장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올란도의 패기 없음을 나무라는 듯 자신의 검집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두드리며 말을 하였다.

“자네는 고작 몇 명 되지도 않는 적이 무서워 나에게 후퇴를 종용하는 겐가? 게다가 도렌 영지에서 이쪽으로 돌릴 여유 병력이 얼마나 되겠나? 설혹 지원병이 온 다고 하세. 저놈들이 지금 당장 전서구를 날린다고 해도 지원병이 오려면 최소 하루나 이틀은 족히 걸릴 걸세. 어차피 여기서 우리의 정체가 발각된 이상, 적들이 방 비할 틈을 주지 않게 최대한 빨리 이곳을 뚫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단 말이야.”

하지만 대대장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슈우우웅—!

갑자기 날카로운 파공성을 울리며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가장 선두에서 걷고 있던 대원의 발치에 ‘푹’ 하고 꽂혔다. 처음에는 뒤에서 날아온 화살인 줄 착각했 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화살이 꽂혀 있는 각도를 보면 이게 어느 쪽에서 날아온 것인지는 뻔했다.

‘도대체 언제 적들이 저곳까지?”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들 흠칫 굳어있을 때, 앞쪽에 보이는 첫 번째 방벽 위에서 커다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항복하라! 너희들은 독 안에 든 쥐다. 반항해 봐야 죽음을 자초할 뿐, 살길은 어디에도 없다. 항복하여 목숨이나마 보전하라. 첫 발은 경고하는 의미에서 너희들 의 발치에 쐈지만, 다음에도 그럴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길 바란다.”

모두들 경악하여 방벽 위로 시선을 돌렸다. 놀랍게도 방벽 위 성가퀴 사이로 30여 명의 적병들이 빽빽이 들어차 아래쪽으로 활을 겨누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성가 퀴 사이로 사람이 설 만한 장소에는 모두 다 적군들이 들어차 있는 것을 보면, 방벽 아래쪽에도 더 많은 적군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난데없는 적의 출현에 모두들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올란도의 얼굴만은 평시와 전혀 변한 게 없었다. 싱글거리며 방벽 위를 바라보고 있던 그는 문득 생각났 다는 듯 땅바닥에 꽂혀 있는 화살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무기점에 가든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흔한 형태의 화살이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는 올란도.

‘어,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습격을 당했을 때 날아왔던 화살도 저렇게 생긴 거 아니었나??

본진에서 출발하기 전의 작전회의 때, 연대장이 도렌 영지군이 하고 있는 무장이라며 보여 줬었던 적군의 화살은 이런 흔한 형태가 아니었다. 흡사 창이라 착각할 만큼 몬스터 사냥에 특화된 굵고 묵직한 화살이었던 것이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올란도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적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은 누구냐? 도렌 영지군은 아닌 것 같은데…….?

올란도의 질문에 적군들 중에서 가장 비싸 보이는 장비를 입고 있는 자가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항복을 종용했던 사내였다.

“크크, 제법 눈치가 빠른 녀석이로군. 우리는 도렌 영지에 고용된 용병들이다. 피차 칼로 벌어먹고 사는 처지에, 서로 원수진 것도 아닌데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 지 않겠나. 이미 승패는 갈렸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너희들을 꼭 학살해야만 하겠나? 나는 피보다는 돈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좋게 말로 할 때 항복하는 게 좋을 게다.”

적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포로로 잡으면 몸값을 받을 수 있고, 노획물도 깔끔하게 챙길 수 있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몸값이 날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노 획물의 상태 역시 개판이 되는 것이다. 구멍이 숭숭 뚫린 갑옷을 제값 주고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올란도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긴 한데, 우선 자신들의 정체부터 밝히는 게 순서가 아닐까?”

방벽 위의 사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만하게 대꾸했다.

“핫핫, 제법 말이 통하는 녀석이군. 항복할 놈에게까지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겠지. 놀라지 마라. 우리는 그 이름도 드높은 페가수스 용병단이다.”

페가수스 용병단이라는 말에 모두의 얼굴에 깊은 절망감이 어렸다. 어쩐지 귀신에게 홀린 듯 손도 못 쓰고 당했다고 생각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대장은 적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 상대가 페가수스 용병단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부하들의 사기가 엉망진창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거짓말하지 마라!”

자신도 모르게 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 대대장은 부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들 속지 마라! 저건 우리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적의 얄팍한 술책이다. 저놈들이 페가수스 용병단일 리가 없지 않느냐. 가난뱅이 도렌 영주에게 무슨 돈이 있어서, 10대 용병단의 하나인 페가수스 용병단을 고용하겠나. 안 그런가?”

대대장의 말에 모두들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원들의 얼굴에서 희망이 막 피어나려 할 때였다. 방벽 위에서 다시금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페가수스의 용사라는 것을 못 믿겠다는 거냐? 그렇다면 이걸 봐라.”

사내는 페가수스 용병단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깃발을 꺼내들었다. 붉은색의 유니콘이 그려져 있는…

“믿고 안 믿고는 너희들의 자유다. 하지만 오판에 대한 댓가는 혹독하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10분 주겠다. 항복할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죽을 것인지 선택하라.”

눈치를 살피고 있던 올란도는 슬그머니 대대장에게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항복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올란도의 어이없는 제안에 대대장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부하들을 다독이며 현재의 위기 상황을 돌파해 나갈 의지를 불태워야 할 고위급 장교 가 이렇게 쉽게 항복을 입에 담다니. 아무리 자신들이 용병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게 지금 중대장인 자네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인가?”

하지만 올란도는 그게 뭐 어떠냐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마치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남의 일이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다.

“현실을 직시한 조언입니다, 대대장님. 아무리 궁리해 봐도 앞뒤로 포위당해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없는데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괜히 반항하다 헛되이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그냥 깔끔하게 항복하죠. 단장님께서는 우리들의 몸값을 흔쾌히 지불해 주실 겁니다.”

대대장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는 듯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런 개 같은 자식! 아무리 용병이라지만 최소한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게 있는 거다. 게다가 간부라는 놈이 위험에 처했다고, 곧바로 항복하자는 소리나 주절거리 다니…….”

“쩝. 단장님께서는 우리가 도리를 지킨답시고 전멸당하는 것보다, 몸값을 지불하더라도 살아 있는 걸 더 기뻐하실 겁니다.”

결국 분노가 극에 달한 대대장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거칠게 뽑아 들었다. 그리고 칼끝을 올란도의 코앞에 겨누며 으르렁거렸다.

“그게 아니라 네놈이 살고 싶은 거겠지. 겁먹은 개새끼와 같은 네놈과 날 동류로 취급하지 마라. 알겠냐? 이 비겁하기 짝이 없는 자식아.”

자칫 목이 날아갈 상황임에도 올란도의 표정은 너무나도 태평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코앞에 겨누어진 대대장의 칼끝을 손가락 끝으로 옆으로 쓱 밀어내며 태연자 약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대대장의 분노를 더욱 끓어오르게 했다.

“제가 비겁하다구요? 좋습니다. 그럼 무슨 수로 저 엄청난 방벽을 뚫고 나갈 겁니까? 하다못해 방벽 위로 올라갈 사다리는커녕, 문을 부술 통나무 조각조차 하나 없는데 말입니다.”

이때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3중대장 오웬이 끼어들었다.

“우리와 합류하지 못하고 뒤처진 레인저가 네 명이나 있지 않소? 아마 적들의 후방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게 분명하오. 지금이야 적의 숫자가 많으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겠지만, 밤이 되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소? 그때를 기다려 봅시다.”

“허, 정말 바랄 걸 바래야지. 아무리 레인저라고 하지만, 상대는 페가수스 용병단이란 말이야. 게다가 꼴랑 4명이서. 적은 대충 봐도 30여 명이 넘을 것 같은 데 뭘 어쩌라고? 저놈들이 승리를 자축하며 밤늦게 술이라도 처마신다면 혹 모를까. 당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렇다. 아직 방벽 저 뒤편에는 4명이나 되는 레인저가 남아있다. 비아냥거리는 올란도의 말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대대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레인저는 일반 대원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자들이다. 비록 숫자가 많이 차이가 나긴 하지만, 이쪽에서 적당히 적의 시선을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것만 같았다.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이자, 대대장은 힘찬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오웬의 말대로 밤까지 기다리기로 하겠다. 전 대원들은 뒤로 물러나 방패벽을 쌓아.

이때, 아직까지 항복하지 않고 버티는 적의 모습이 답답했던지 방벽 위의 사내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혹시 마냥 버티고 있으면 본대에서 구원병이라도 보내 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개꿈은 지금 당장 버려라. 너희들이 믿고 있는 본대는 두 시간 전에 이미 전멸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너희들의 본대는 이미 전멸했다. 그러니 너희들도 각자 살길을 찾도록 해라.”

“본대가 전멸당했다고?”

그 말에 모두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순간, 올란도에게서 풍겨 나오던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하게 바뀌었다. 언제나 염세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술과 여자를 탐닉하는 모습만 보여 주던 인물이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올란도의 무겁게 느껴지는 말투에 사내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쯧쯧,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전멸시킬 수 있는 네놈들에게 내가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다못해 이 상태로 포위만 하고 있어도,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는 너희들인데 말이야. 내 말이 틀렸나?”

사내의 말에 대대장이 뭐라 대꾸하려고 할 때, 올란도가 이를 제지하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왠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연대장님은…, 연대장님은 어떻게 되셨나?”

올란도의 물음에 사내는 조롱기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너희들의 대장은 이미 죽었다. 이런 말까지 하게 되어 좀 그렇긴 하지만, 목을 잘라 장대 높은 곳에 걸어 놨다고 하더군. 그러니 너희들도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팟!

바로 그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의 눈앞에 서 있던 올란도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저…, 저기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 그건 항복을 종용한 사내가 서 있는 방벽이 있는 쪽이었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대원들은 볼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 려가고 있는 올란도의 뒷모습을.

올란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웬만하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살려고 했었는데……. 그런데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연대장의 목을 잘라 장대 끝에 매달아 놨다는 말을 듣자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새 그의 두 눈은 짙은 살기(殺氣)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런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어!”

올란도는 지금껏 철저하게 방관자로 살아왔다. 이곳은 자신이 살아야 할 세상이 아니었기에. 왕궁이 불타오를 때, 그곳에서 명예롭게 죽었어야 했다. 왕과 함 께…….

하지만 지금 그는 그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직 미칠 듯한 분노뿐이었다.

“뭐, 뭐야! 멍청하게 보고 있지 말고 쏴! 활을 쏘란 말이다!”

당황한 사내가 부하들을 질책하는 한편 그 자신도 직접 활시위를 뒤로 당기려고 할 때, 올란도는 어느새 방벽을 뛰어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순간, 사람들은 자신 의 두 눈을 의심했다. 인간이 저렇게 높은 거리를 도약할 수가 있다니…….

“적은 한 놈뿐이다. 죽여!”

“으아악!”

곧이어 방벽 위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밑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제7독립대대원들은 이런 갑작스런 상 황에 모두들 얼이 빠져 있을 뿐, 올란도를 도와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럴 정신이 있는 인물이 있다고 해도, 사실상 그들이 올란도를 도울 방 법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모두가 입만 쩍 벌리고 있을 뿐,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끼이이익! 하는 요란한 소음을 내며 방벽의 문이 열렸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입만 헤 벌리고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대대장은 급히 제3중대장 오웬에게 지시했다.

“빨리 부하들을 이끌고 올라가. 올란도를 지원해 주도록 하게.”

“옛!”

제3중대가 가장 앞에 서 있었기에 이런 지시를 받게 된 것이다. 오웬은 부하들을 둘러봤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방벽의 문이 열리기는 했지만, 그걸 누 가 열었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게 문제인 것이다.

올란도일까? 아니면 적일까?

오웬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허리에서 검부터 뽑아 들었다. 검을 들고 나니 마음이 안정된다. 그는 대원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 쳤다.

“전원 발검(劍)!”

대원들이 검을 뽑아 들자마자 오웬은 앞장서서 달려가며 외쳤다.

“전원 나를 따르라!”

“우와아아아!!”

모두들 방패로 몸을 가린 채 비탈길을 뛰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오웬과 대원들이 살짝 열려진 방벽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적의 화살 공격 은 없었다.

오웬은 긴장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방패로 몸을 확실히 방비한 뒤 문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하지만 문 안쪽에 들어서자마자 오웬의 발걸음이 뚝 하고 멈추었다. 그건 뒤따라 들어오던 그의 중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대원들. 사위는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보이는 것은 온통 시체들뿐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적들이 무기를 꼬나들고 자신들을 죽이겠다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주위를 둘러보던 오웬의 눈에 올란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나무 밑둥에 걸터앉아 뭔 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언제나 경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과 행동이 가벼워 내심 경멸하던 올란도였는데, 지금은 감히 말조차 걸기 힘들 정도로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의 중대원들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인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올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조금 전의 인간 같지 않은 몸놀림,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적들을 도륙해 놓은 이 모습. 이 모든 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지금껏 그들

이 ‘발정난 여우’라며 씹어댔던 올란도가 사실은 그래듀에이트급의 초강자라는 것을.

오웬은 인상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중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멍하니 서 있는 놈들은 뭐야! 빨리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도록 해. 혹, 살아 있는 적이 있는지 말이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중대원들이 방벽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다.

오웬은 다시 한 번 올란도를 바라봤다. 자신이 내심 경멸하며 비웃던 사내 덕분에 오늘 목숨을 건졌다. 그렇다면 감사한 마음이 들어야 할 텐데, 이해할 수 없게도 뭔가 불쾌한 기분이 스멀스멀 가슴을 채우며 올라왔다.

저 정도의 실력자라면 이런 하찮은 용병단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실력을 숨긴 채 실실 웃으며 난봉꾼 짓이나 하며 살다니……. 아마 저놈은 분명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을 속으로는 같잖게 생각하며 비웃고 있었으리라.

“젠장, 아무리 봐도 정말 재수 없는 새끼로군.”

이런 상황에서도 오웬이 올란도를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또한 올란도에게 애인을 뺏긴 뼈아픈 과거를 지닌 남자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대대장이 부대원들을 이끌고 방벽 안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오웬은 대대장에게로 달려가 현재 상황을 간략히 보고했다.

“적병들은 모두 전멸한 것 같습니다. 일단 대원들에게 주위를 샅샅이 수색하라는 지시를 내렸.

대대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오웬의 입을 막았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적병들의 시체를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저런 강자가 동료로 있는데…….

그는 곧바로 올란도에게 다가가 살짝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신세를 졌습니다.”

깍듯하게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짙은 경외감(敬畏感)이 어려 있었다. 그래듀에이트씩이나 되는 강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게 그저 놀 라웠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능구렁이 같은 단장이 경박하기 짝이 없던 올란도를 그렇게 감싸 줬던 게 다 이런 이유 때문인 모양이다. 단장이라면 올란도의 숨겨진 정체를 이 미 알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올란도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신세라니요? 제가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말씀 놓으십시오. 대대장님께서는 제 상관이 아니십니까.”

“그, 그래도…….”

용병들의 세계는 철저한 강자지존의 세계다. 자신보다 훨씬 강자인 올란도가 말을 놓으라고 해도 그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입장이 곤란해지자 대대장은 채 말을 잇지 못하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런 대대장의 모습에 올란도는 고개를 돌려 시체들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시체가 보이십니까? 다른 적병들과는 달리,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는 시체 말입니다.”

올란도의 말에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던 대대장은 곧 눈살을 찌푸렸다. 처참한 모습의 시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다른 시체들은 목이 베이 거나 몸통이 잘린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 시체만은 기이한 각도로 손발이 뒤틀려 있었고, 얼마나 고통에 발버둥쳤는지 주위가 온통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극심한 고문이라도 당한 것처럼…….

“마법사였습니다.”

순간 대대장의 눈이 놀라움으로 왈칵 커졌다.

“마법사? 겨우 1개 중대 병력밖에 안 되는 것 같았는데…….”

“페가수스 용병단씩이나 되니 그럴 수도 있겠죠. 어쨌거나 저놈이 마법을 쓰려는 것을 일찍 눈치채고 막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놓쳤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시체의 손목 부근이 잘려져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잘린 손목에 붙어 있는 손가락 중 하나에는 은색의 반지가 끼여 있었다. 아마 탈출용으로 끼고 있던 마법반지의 사용을 막기 위해 손목을 자른 모양이었다.

“주변을 정리한 다음, 저 녀석을 붙들고 심문을 했습니다. 순순히 다 털어놓더군요.”

대대장은 그 말이 새빨간 거짓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순순히 다 털어놓았는데 저렇게 걸레쪽이 될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 고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본대가 패배한 것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연대장님께서 돌아가신 것도 말입니다.”

“적의 규모는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겨우 1개 대대밖에 안 된답니다.”

너무 적은 병력에 대대장은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1개 대대밖에 안 된다고? 그런데 어떻게 본대가 패배를 당했지……?”

“그만큼 뛰어난 인물들을 파견한 것이겠죠. 우리도 여기서 몇 명 되지도 않는 놈들에게 항복할 뻔했지 않았습니까?”

대대장은 좀 전의 아찔했던 상황이 떠오르자, 몸을 부르르 떨며 순순히 인정했다.

“그건 그렇군. 만약 자네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꼼짝없이 당했겠지.”

“이런 상황에서 예정대로 적의 뒤를 기습하겠다는 건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놈의 자백에 의하면 이미 우리의 기습을 적이 눈치채고, 요새지대에 1개 대대급의 병 력을 배치해뒀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 병력쯤이야 문제가 되겠나. 자네가 있는데…….”

하지만 이런 대대장의 기대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여지없이 무너졌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여기서 따로 움직일까 합니다.”

그 말에 대대장의 얼굴에는 아연실색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듀에이트급인 올란도와 함께한다면 반격의 기회를 엿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없다면 작전 자체를 취 소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따로 움직이겠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연대장님의 시신은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혼자 적진에 침투하여 연대장의 시체를 탈환해 오겠다는 말에 대대장은 차마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올란도는 무심한 눈빛으로 대대장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대대장님은 본대로 회군하시든지, 아니면 메르헨 영지로 돌아가 다른 용병대와 힘을 합치도록 하십시오. 이 일대 지리에 밝은 적들을 상대로 싸워 봐야 좋을 게 전혀 없으니까요.”

“그, 그건 그렇지만 자네만 도와준다면…….’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 이보게. 잠깐 내 말 좀 들어 보는 게…….”

자신을 급하게 붙잡으려는 대대장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난 올란도는 제2소대장인 론도를 찾아갔다.

“이봐, 론도.”

올란도의 놀라웠던 신위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론도였다. 그런 엄청난 실력자가 자신의 중대장이라는 사실에 론도는 기합이 바짝 들었다.

“옛, 중대장님!”

“나는 지금부터 따로 움직일 거야. 내가 없는 동안 자네가 선임 소대장으로서 중대원들을 잘 이끌어 주길 바라네. 알겠나?”

“아, 옛! 걱정 마십시오!”

“그럼 부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