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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32권 4화 – 어둠 속의 기습

어둠 속의 기습

라이는 바보가 아니다. 아니, 일반적인 잣대로 평가한다면 아주 눈치가 빠른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는 우직하고 순진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래야만 감시의 눈 길을 조금이라도 적게 받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으니까.

요즘 들어 라이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왠지 소대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놓고 따돌리는 건 아니었지만, 고참병들 끼리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수군거리다 자신이 근처에만 가면 대화를 멈추고 딴청을 부리기 일쑤였다.

노골적으로 따돌리는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소대에서 막내였기에 뭐라 불만을 토로하기도 그랬지만, 그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기분은 아주 더러웠다. 더군다나 그 고참병들 중에는 지금까지 믿고 의지해 왔던 하리스까지 끼어 있다는 게 그의 기분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었다.

고참병들이 자신에게 뭔가 애써 숨기려 하는 것을 눈치 빠른 라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얼마 전에 적군이 ‘본대가 전멸했으니 어서 항복하라’며 떠들어대던 소리 를 그도 직접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 후에 돌아가기 시작한 부대의 어색한 움직임. 그것만으로도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는 충분했다.

하지만 라이는 내심을 숨기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행동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장 친하게 지냈던 하리스에게 조차도…….

대원들이 자신에게 그런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는 그 저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지! 오늘은 여기에서 야영한다!”

누군가의 외침 소리에 모두들 가던 길을 멈추고 야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라이는 재빨리 솥단지부터 걸었다. 하루 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는 건 저녁 뿐이다.

아침에는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기 바빴기에 식사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점심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빡세게 강행군을 하다 보니 모두들 걸 으면서 딱딱한 비스킷 조각이나 육포 같은 건량을 물과 함께 씹어 먹으며 허기를 때워야 했다.

하루나 이틀 정도만 이동하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어서 필요한 물품들을 그때그때 보충할 수 있었던 평상시와 달리, 지금은 엄청난 장거리를 이동하고 있는 중이 다. 처음에 준비해 뒀던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물이 떨어진 것은 오래전이었다. 보관성이 형편없는 것은 둘째 치고, 부피가 너무 커서 많이 준비할 수가 없었기 때문 이다.

맛있는 식량이 떨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딱딱한 건조 식량에 의존해야 했다. 이때 애용되는 게 잡화점에서 여행객들을 위해 판매하는 비스킷이다. 바짝 마른 것 이 꼭 돌덩이처럼 딱딱했지만, 보관성 하나는 끝내줬기 때문이다. 1년을 처박아 둬도 괜찮을 정도다. 하지만 맛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살기 위해서 먹는다는 표현 이 딱 맞는 음식이었다. 너무 딱딱해서 이빨로 씹을 수조차도 없어 침으로 살살 녹여 먹어야 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겨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순간이니 라이로서는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물이 있는 곳 근처에 야영하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행군을 멈 춘 곳 근처에는 냇물이 없었다.

그렇다고 식사 준비를 못하는 건 아니다. 라이는 먼저 자신의 물통에 들어 있는 물을 1/3 정도 솥 안에 따른 뒤, 불을 피울 나뭇가지들을 주우러 주위를 돌아다녔 다.

라이가 나뭇가지를 한 아름 주워 들고 돌아왔을 때, 하리스는 불을 피워 물을 끓이고 있는 중이었다. 라이는 주워 온 나뭇가지들을 불 옆에 쌓아 둔 뒤 그중 몇 개를 불 속에 집어넣었다.

솥 옆에는 소대원들이 꺼내 둔 음식 재료들이 놓여 있었다. 육포, 소시지, 햄 등 여러 가지였는데, 그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건 비스킷 덩어리였다. 라이 는 그것들을 끓는 물속에 집어넣었다. 대원들이 음식 재료들을 놔두고 가면서, 각자 개인 수통 속의 물도 솥에 조금씩 넣었기에 물의 양은 넉넉했다.

딱딱했던 음식 재료들이 끓는 물속에서 부드럽게 풀어지며 제법 먹을 만한 먹거리로 변해갔다. 라이는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춘 뒤 조금 더 기다렸다. 구수한 음식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자, 소대원들은 각자의 식기를 들고 솥 근처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모두들 배가 고팠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어둠이 짙게 깔리더니 어느덧 모닥불 주위만 따스한 온기와 빛을 흘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가 건넨 죽을 받기 위해 식기를 내밀던 젠슨의 가슴에 화살촉이 삐죽 솟아올랐다. 등에 맞은 화살이 젠슨의 몸을 꿰뚫고 가슴으로 비 집고 나온 것이다. 핏방울이 라이에게까지 튀어 그의 얼굴 여기저기에 붉은 점을 만들었다.

“으헉!”

바로 코앞에서 일어난 갑작스런 사태에 라이는 기절초풍할 듯 놀랐다. 지금껏 이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죽음에 대한 공포로 머릿속이 하얗 게 텅 비어 버렸다.

단 하나 느낄 수 있었던 건, 비릿한 피비린내만이 그의 후각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뿐.

이때, 라이의 머리통을 억지로 땅바닥에 처박아 엎드리게 만든 사람이 있었다.

“이 멍청한 녀석! 죽고 싶어? 멍청하게 서 있으면 어떻게 해!”

하리스였다. 하리스는 라이를 땅바닥에 패대기쳐 버린 다음, 자신도 납작 엎드렸다. 그런 뒤 발로 모닥불을 향해 흙을 밀어 넣었다. 어느새 주위에 있던 대원들 역 시 땅바닥에 엎드린 채 모닥불을 향해 발로 흙을 밀어 넣고 있었다.

라이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쯤에는 이미 모닥불은 꺼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살 공격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아직 모닥불을 제대로 끄지 못한 곳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빨리 불을 끄라는 악쓰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연신 터져 나왔다. 급한 마음에 불 위로 올라가 발로 짓밟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사람, 환한 모 닥불 근처를 벗어나겠다고 일어나 어두운 곳으로 달려가다 쓰러지는 사람……. 순식간에 사방에서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도대체 어디에서 쏘는 거야?”

론도 소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교들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몇몇 고참병들은 이미 무장을 챙긴 뒤 화살이 날아오는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 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밤이 깊어 워낙 어두운 탓에 대략적인 방향만 짐작할 뿐, 어딘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모라이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원들이 쓰러지는 방향을 봐서는 서쪽인 것 같습니다.”

“적의 숫자는 어느 정도 되는 것 같나?”

“몇 명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첫 공격에 4명 정도가 동시에 쓰러진 것 같았는데…, 그걸 보면 적은 최소 4명 이상이고 많아 봐야 10명 이내인 것 같습니다.”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서도 그런 미세한 부분까지 파악해 적 병력의 수를 짐작해 낸다는 건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라이처럼 실전 경험이 떨어지는 대원들은 모두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으니까.

어둠 속을 환히 밝히던 모닥불의 숫자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모닥불들이 다 꺼져 버리자 주위는 짙은 어둠에 잠겨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극심했던 혼란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더 이상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처박고 있던 라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툭툭 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믿음직스런 목소리, 하리스였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이젠 일어나도 돼.”

그 말에도 라이가 살짝 고개만 치켜들고 일어서지 않자 하리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고 일어서도 돼. 이런 어둠 속에서는 사격이 불가능하거든.”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니 모닥불이 꺼졌음에도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다. 하늘에 달 하나가 떠올라 있어 어렴풋한 빛을 비춰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거리에서 목표를 겨냥하여 사격을 가하기에는 빛이 너무 부족했다.

이때, 라이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시커먼 그림자. 모라이어스였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자 하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녀석들을 잡으러 가는 거야.”

“모라이어스 혼자서요? 아무리 그가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런 어둠 속에서 혼자 어떻게……?”

“누가 혼자 간다고 하든? 모라이어스만이 아니라 다른 소대에 배속되어 있는 저격수들도 모두 다 저 사냥에 동참하고 있을 걸.”

“아, 그렇구나.”

“잔말 말고 너는 배식 준비나 해. 배고파 죽겠다. 개새끼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모처럼 따끈한 음식 좀 먹으려니 화살을 퍼붓고 지랄이야.”

라이가 흙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솥을 바로 세우고 있는 동안 하리스는 옆의 동료들과 함께 젠슨의 시체를 멀찌감치 치우고 돌아왔다. 하리스가 일찍 불을 끈 덕분 에 분대 내에 더 이상의 사상자는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체를 치우고 돌아온 하리스가 라이를 향해 말했다.

“자, 밥이나 먹자. 한 그릇 듬뿍 퍼 봐라.”

그런 하리스를 향해 라이가 풀이 죽은 어조로 말했다.

“별로 먹을 게 남아 있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라이는 솥이 엎어져 음식이 절반 이상 쏟아져 버렸다는 것을 설명했다. 아마 하리스를 비롯한 몇몇 대원들이 불을 끈다며 정신없이 발로 흙을 차 넣을 때 솥까지 함게 차버린 것이리라.

하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젠장, 할 수 없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조금씩 나눠 봐.”

“모두들 그릇 내놓으세요. 양이 그다지 많지 않아 넉넉하게는 못 드립니다.”

각자의 그릇에 조금씩 덜어 준 다음, 라이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가 등가죽에 붙을 정도로 배가 고팠던 라이는 스프를 한숫가락 듬뿍 퍼서 입에 밀어 넣었다. 우드득!

흙을 차는 와중에 솥 안에까지 흙이 들어간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까운 음식을 버릴 수는 없었다.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모닥불을 다시 피울 수도 없는 데다가, 무엇보다 지금 배가 너무 고팠으니까.

돌덩이처럼 딱딱한 비스킷을 씹어 먹느니, 흙을 골라내며 먹는 게 훨씬 나았다. 다른 대원들도 돌을 씹었는지 여기저기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무 도 먹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이런 음식조차 건지지 못한 주변의 다른 소대원들은 부러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귀에는 우두둑 거리는 소리 따위는 전혀 들리지도 않 았을 것이다. 쩝쩝거리며 먹는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구수한 음식 냄새! 모두들 말은 안 했지만, 먹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었으리라.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자고 있던 라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툭툭 치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뜨려고 애썼다.

‘벌써 아침이 됐나?’

억지로 눈을 떠보니 아직 주위가 시커먼 어둠에 잠겨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이는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깨운 게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라이는 다시 자리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나 오늘 불침번 아니에요.”

“그건 나도 알아, 새꺄. 빨리 일어나! 매복하러 가야 해.”

하리스의 목소리였다. 라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요 며칠 동안 강행군을 한 탓인지, 그의 몸은 흡사 쇳덩이라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매복이라니요?”

“이 근처에 자리 잡고 매복하라는 대대장님의 명령이란다. 시간이 없어. 빨리 짐 챙겨.”

다른 부대원들이 잠에서 깨기도 전에 올란도의 중대는 적당한 자리를 골라 매복에 들어갔다.

하리스가 라이를 이끌고 자리를 잡은 곳은 커다란 나무 아래였다. 울창한 나뭇가지로 인해 달빛이 가로막혀서인지 나무 아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 두웠다.

하리스는 뒷편 덤풀 속에 말들을 묶어 놓은 후, 나무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라이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놈들이 또 올까요?”

라이는 긴장된 어조로 물었지만 하리스는 태평스럽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잔뜩 독이 올라 있다는 걸 뻔히 알 텐데, 너 같으면 또 오겠냐?”

그래도 긴장감에 라이가 주위를 열심히 살피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드르릉 거리는 코 고는 소리가 옆 자리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본대를 습격하려는 적 이 나타나면 즉시 공격하라는 대대장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은밀히 매복 중인데, 느닷없이 코 고는 소리라니. 라이로서는 하리스의 저 엄청난 간뎅이에 할 말을 잊 을 정도였다.

라이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하리스를 흔들어 깨웠다.

“무슨 일이냐?”

“적이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하리스는 짜증 어린 말투로 대꾸했다.

“아, 짜식.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날이 밝기 시작하면 본대가 후퇴할 거야. 적들이 움직이는 건 그 이후가 되겠지. 그러니 그동안만이라도 너도 좀 자 둬.” 또다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뒤로 돌아눕는 모양이다.

하리스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알겠지만, 라이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저 어둠 속 어딘가에서 금방이라도 적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어제 놈들이 쏴 댄 화살에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게다가 젠슨은 그의 코앞에서 화 살에 맞아 죽기까지 했다.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은데, 잠을 자라니 그건 너무 무리한 주문이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신도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흠칫하며 라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주위가 훤하게 밝아 있었다. 저 아래쪽에 보이는 본대 대원들은 야영 장비를 걷고 한창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라이는 하리스를 흔들어 깨웠다.

“선배, 일어나세요.”

“음냐…, 또 뭐야?”

“본대가 곧 철수할 것 같습니다. 그럼 곧 적들이 습격해 올 거잖아요?”

하지만 하리스는 귀찮다는 듯 등을 돌려 누우며 투덜거렸다.

“상대는 페가수스 용병단의 레인저들이야. 이런 어설픈 매복에 걸려들 거라고 생각하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너도 좀 더 자 둬. 1시간 후에는 출발할 거니 까.”

라이는 하리스가 입고 있는 양털로 짠 두꺼운 청회색 로브 자락이 아주 따뜻하게 보였다. 저걸로 몸을 감싸고 자면, 마치 방에서 자는 것처럼 푹 잘 수 있을 것만 같 았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하리스의 코 고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돌아누운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다니, 청회색 로브가 엄청 포근한 모양

이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그런 하리스를 보다 보니 자신의 눈꺼풀도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어제 하루 종일 강행군을 한 데다가, 오밤중에 일어나 매복을 한답시고 잠도 제 대로 자지 못했으니 라이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으하아아암~.”

밀려오는 졸음에 하품을 하며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던 순간, 라이의 머릿속을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지금이야말로 용병단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가장 껄끄러운 존재였던 모라이어스는 어젯밤 적을 사냥한답시고 어둠 속으로 사라 졌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감시하던 올란도도 어딘가로 떠나 버린 상태.

평상시라면 탈영병이 생겼을 때 그놈을 잡기 위해 모두들 혈안이 되어 주변을 샅샅이 뒤지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기습작전은 실패했고, 본대 마저 전멸했다고 하니 최대한 빨리 후퇴하여 아군과 합류해야만 한다. 게다가 적의 레인저들이 암암리에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두 명이 사라진다 한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설혹 탈영했다는 것을 알게 돼도, 그 한 명을 잡겠다고 주위를 수색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라이는 곁눈질로 살그머니 하리스를 훔쳐봤다. 아무리 봐도 잠자는 척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드르렁거리며 연신 코를 고는 것이 진짜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이대로 도망칠까??

하지만 곧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은 소음에도 하리스가 금방 잠에서 깬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물며 덤불 속에 매어 놓은 말을 끌고 나오는 기척을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동안 자신을 아껴줬던 선배였지만, 그냥 이대로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라이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미안하긴 하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이는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 슬금슬금 하리스와의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꼭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라이는 침을 꿀떡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 행히도 기분 탓인 모양이다. 그 어떤 인기척도 발견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리스에게 바싹 다가선 라이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며 망설였다. 이대로 탈출을 실행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이 최고의 기회였다. 이 좋은 기회 를 그냥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라이는 하리스의 몸을 살며시 건드리며 걱정스럽다는 어투로 나직하게 말했다.

“선배, 이왕 자려면 투구라도 벗고 주무세요. 그렇게 불편하게 자면 목이 뻐근해지잖아요.”

꿈틀하기는 했지만, 하리스는 더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금 잠에 빠져든 모양이다. 라이는 하리스의 투구를 살며시 위로 잡아당겼다. 턱 끈을 매지도 않은 상태인 데다, 하리스가 잠결에 고개를 위로 들어 줘 투구를 쉽게 벗길 수 있었다.

하리스의 뒤통수가 무방비 상태로 드러났다.

‘미안합니다, 선배.’

주변에 있던 커다란 돌덩어리 하나를 집어 들자마자 힘차게 휘둘렀다. 망설이면 도저히 선배의 뒤통수를 찍을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퍽!

하리스는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쭉 뻗어 버렸다.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급히 하리스의 코에 귀를 대보자, 쌕쌕 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리스의 뒤통수를 돌로 찍어 버린 이상, 이제 탈출하는 것 외에 다 른 방법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무 뒤편 덤불 안으로 들어가자 숨겨 놓은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라이를 반겼다.

라이는 재빨리 말들을 다독이며 속삭였다.

“워, 워, 조용히 해.”

라이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아무도 이쪽에서 벌어진 변고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자신의 말을 이끌고 막 도망치려던 라이의 눈에 하리스의 말안장에 매달려 있는 활과 화살이 보였다. 라이는 즉시 그걸 챙겨 자신의 말안장에 매달았다. 도망칠 때 가장 유용한 무기가 바로 활이었으니까. 그리고 말안장에 매달려 있는 불룩한 주머니도 챙겨 넣었다. 그것은 바로 하리스의 식량 주머니였다.

도망칠 준비가 끝나자 라이는 말을 끌고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대원들이 이동하는 곳의 반대 방향을 향해서…….

매복해 있던 장소에서 충분히 벗어났다고 판단한 순간, 라이는 번개처럼 말 등에 올라탔다.

“끼럇! 핫!”

라이의 채찍질에 말은 미친 듯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라이는 재빨리 등 뒤를 살펴봤다. 다행히도 뒤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입가에서 자신도 모르게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 곧이어 그 웃음은 입가가 찢어질 만큼 커다랗게 터져 나왔다.

“크하하핫!!”

드디어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했다. 이젠 자유다!

아직 고향땅에 도착하지도 않았지만, 라이는 탈출했다는 기쁨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꿀꺽!’

***

너무 긴장한 탓일까? 제2소대 저격수 아스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어딘가에 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행동은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아스탄은 나름 자신이 붉은 전갈 용병단에서 손꼽히는 레인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적이 페가수스 용병단 소속의 레인저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조금씩 자신 감이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괜찮은 자리를 골라, 매복을 하는 게 좋을까?”

아스탄이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적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의 기습을 받자마자 재빨리 숲 속으로 스며든 이후, 밤새도록 주위를 샅샅 이 수색하고 있었지만 적의 흔적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 이상 혼자 숲 속을 뒤지는 건 위험해. 이럴 줄 알았으면 모라이어스 녀석과 함께 보조를 맞추는 거였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숲을 뒤졌는데도 적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적이 어딘가에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계속 움직이는 것 은 위험하다. 자신도 모르게 적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곧바로 사망이니까.

이때였다. 그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낙엽이 떨어져 있는 모양이 조금 이상했던 것이다. 마치 뭔가에 밀쳐진 듯한……. 그는 낙엽 사이를 헤쳐 그 아래쪽을 확인했다. 긴장감 가득하던 그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어린다. 드디어 꼬리를 잡은 것이다.

“한 명이군. 이리로 갔나?”

발걸음에 눌린 이끼가 아직 원상태로 복구되지 않은 걸로 봐서 지나간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은 듯했다.

적의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놈들을 먼저 찾아낼 수만 있다면, 붉은 전갈 용병단이 페가수스 용병단에 비해 실력이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놈들에게 뼈저리 게 알려 줄 수 있으리라. 레인저들끼리의 싸움에 있어서 먼저 본 쪽이 이긴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였으니까.

아스탄은 미세하게 남아 있는 흔적들을 하나하나 찾아내며 추적을 시작했다. 물론 주변을 샅샅이 살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살금살금 이동하던 그의 눈에 또 다른 흔적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재빨리 쭈그리고 앉아 그 흔적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읽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모든 오감이 흔적을 읽는 것에 집중된 그 순간, 어딘가에서 슛!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아스탄은 가슴을 찢는 듯한 무시무 시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터뜨려야만 했다.

“크윽!”

이미 적이 쏜 화살이 가죽갑옷을 꿰뚫고 들어와 심장에 구멍을 뚫어 버린 상태. 혹 주변에 있을지도 모를 동료들을 향해 경고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이 미 비명을 지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빌어먹을! 어쩐지 너무 쉽게 꼬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더니…….’

그 순간, 저 멀리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듯 수풀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정말 용의주도한 놈이었다. 한 발 쏜 다음 곧바로 위치를 바꾸고 있는 것을 보면, 놈은 주변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적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페가수스 용병단의 명성이 거저 만들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스탄은 점차 시야가 검게 물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숨을 거두었다.

페가수스 용병단의 레인저는 적병을 사살하자마자 왼손에 활과 함께 잡고 있던 두 번째 화살을 재빨리 장전했다. 정찰조의 경우 2명이 한 조를 이뤄 움직인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런 만큼 적의 동료가 공격해 올 것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쪽 어딘가에 숨어 있을 놈의 동료는 화살이 날아온 곳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으리라. 활시위를 팽팽히 당긴 자세로 적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훑어봤지만, 맥 빠지게도 그 어떤 움직임조차 찾아낼 수가 없었다.

‘설마…, 저놈 혼자 온 건가?”

그는 애써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심은 곧 죽음! 저쪽 어딘가에 적병이 숨어 있다고 가정하는 게 옳다. 이런 조심성 덕분에 그가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뒤 살금살금 기어 또다시 자리를 옮겼다. 방금 전에 그가 숨어들었던 장소는 최초 사격 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 서 너무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다. 이럴 땐 위치를 옮기는 게 안전하다고 봐야 했다.

자리를 옮긴 후, 그는 주변을 다시금 세밀히 관찰했다.

“아주 조심성이 많은 놈이야. 보통 동료가 죽는 그 순간에 움직였을 텐데…….’

만약 그랬다면 놈의 존재는 물론이고 그 위치까지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적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저놈 혼자 온 게 아니었을까??

있지도 않은 적을 있다고 오판하며 자신이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0여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그러다가 결국에 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또다시 30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동료들과 합류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괜히 있지도 않은 적을 찾는답시고 한 시간씩이나 숨죽이며 긴장했던 사실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차라리 적을 잡은 뒤 곧바로 또 다른 자리로 이동했더라면, 한 놈 더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젠장! 숲 속에서 움직일 때는 반드시 두 명이 1개 조로 움직인다는 기본 중의 기본조차 모르는 놈이 있었을 줄이야. 그러면서 어떻게 레인저가 될 수 있었지? 정 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니까 네놈들이 삼류 용병단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거야.”

본대에서 출발할 때, 아스탄과 모라이어스는 따로 움직였다. 그러다가 새벽녘쯤에 모라이어스가 먼저 아스탄을 발견했다.

아마 아스탄이 모라이어스를 먼저 발견했다면 손이라도 흔들며 아는 척을 했겠지만, 모라이어스는 그런 성격의 사내가 아니었다. 대원들이 그를 왜 ‘새침데기’라 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겠는가.

주위가 밝아 오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숲 속을 혼자 돌아다니는 짓은 거의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특히 지금처럼 적들의 실력이 더 뛰어날지도 모르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모라이어스였기에 아스탄의 뒤를 몰래 뒤따르며 그를 호위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페가수스 용병단원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눈을 절대로 속이지 못할 것이라고. 적이 아스탄을 노리고 움직이는 그 순간이 바 로 저승길로 직행하는 지름길일 것이라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적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전혀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아스탄이 목숨을 잃는 모습을 봐야만 했으니까.

아스탄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을 때, 모라이어스는 그 화살의 궤적을 추적하여 적이 숨어 있는 곳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해 화살을 날릴 뻔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전장에서 다져진 그의 본능이 경고를 발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놈은 처음부터 상대가 둘이라는 가정 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아스탄을 향해 화살을 쏘자마자 재빨리 자리를 옮긴 게 바로 그 증거다. 그리고 자리를 옮기는 시간을 이용하여 두 번째 화살을 장전한 다음, 방금 전 자신이 숨어 있던 곳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적을 찾아내어 그곳을 향해 화살을 날리려고 했다.

아마 모라이어스가 적을 향해 화살을 쐈다면 놈의 수법에 걸려들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렸으리라.

‘젠장, 정말 잘 훈련받은 놈이로군.’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고 거침이 없었다. 곧이어 적은 모라이어스의 시야에서 그 모습을 감췄다. 물론 어딘가로 가 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저쪽 어 딘가에 은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직까지도 적이 있다고 생각하며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조심성이 많은 놈이야. 내가 만약 저놈이었다면 30분씩이나 기다려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 는다면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일어나 버렸을 텐데……. 저걸 보면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그로부터 모라이어스와 적과의 치열한 심리 싸움이 이어졌다. 하지만 모라이어스는 이 싸움에서 자신이 이길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적은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지만, 그는 적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놈은 죽은 목숨이었다.

10분, 20분. 지루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동안 모라이어스의 머릿속은 갖가지 돌발 변수와 대처 방안으로 복잡하게 얽혀 갔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지 금 저놈을 죽일 것이 아니라, 놈의 뒤를 추적해 적의 본거지를 알아내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저놈은 물론이고, 놈의 동료들까지 몽땅 다 죽여 버리자. 그게 한 놈을 죽이고, 또 다른 적을 찾아 하염없이 숲 속을 헤매는 것보다 더 나으리라. 적들을 확실 히 제거해야 철수를 하는 동안 뒤통수가 간지럽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때였다. 덤불 밑 어두운 곳에서 한 사내가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주위를 둘러보다 서둘러 자리를 옮기는 것이 보였다. 결국 적과의 인내력 싸움에서 그가 이긴 것 이다. 적의 뒤통수가 빤히 시야에 들어왔지만 모라이어스는 놈을 향해 화살을 날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은밀하게 그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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