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2권 5화 – 불완전한 각성

불완전한 각성

사내가 접선지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동료들이 모여 있었다. 있지도 않은 적을 상대로 씨름을 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동료들 중에서 가장 먼저 사내의 접근을 눈치챈 털보가 짜증스런 말투로 말했다.

“랜달! 왜 이렇게 늦었어?”

하지만 말투와는 달리 털보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랜달은 알고 있었다. 그가 오지 않자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쩝, 뭐 어쩌다 보니…….”

그때 털보 옆에 앉아 육포를 우물거리고 있던 길게 찢어진 눈매의 사내가 물었다.

“그쪽으로는 몇 명이나 왔어?”

“한 놈. 워낙 조심성이 많은 놈이라 겨우 잡았어.”

랜달은 있지도 않은 적을 경계하느라 늦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창피했기에 적당히 둘러댔다. “그래? 나도 한 명인데…….”

길게 찢어진 눈매의 사내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털보가 자랑스럽다는 듯 끼어들었다. “흐흐, 나는 두 놈 잡았지. 내가 제일 많이 잡았구먼.”

하지만 길게 찢어진 눈매의 사내는 별 같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깟 삼류 쓰레기 몇 놈 죽인 게 뭐가 그렇게 자랑이라고. 나처럼 하나를 잡아도 생포를 하는 게 어렵지.”

그 말에 랜달은 믿기 힘들다는 듯 길게 찢어진 눈매의 사내에게 물었다.

“생포라고? 헤먼, 그렇다면 저놈 아직 살아 있는 거야?”

랜달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갑옷이 벗겨진 사내 하나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헤먼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걸 시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랜달의 질문에 헤먼은 묘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진행될 일이 무척 기대가 된다는 듯.

“죽었다면 내가 왜 힘들게 저놈을 여기까지 끌고 왔겠어? 잡을 때 말에서 떨어져 충격을 심하게 받긴 했지만, 목이 부러진 건 아니니 기다리다 보면 깨어나겠지.” 헤먼은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용병패와 용병수첩, 그리고 약간의 푼돈이었다. 물론 그것은 헤먼의 것이 아니었다. “저놈의 이름은 라이, 나이는 어리지만 벌써 6급 용병이야. 꽤 똘똘한 놈 같으니 족쳐 보면 제법 쏠쏠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몰라.”

“다른 건 몰라도, 본대가 어떻게 된 건지 그것만이라도 알아냈으면 좋겠군.”

이때, 랜달은 죽은 듯 쓰러져 있던 포로의 머리가 살그머니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놈은 기절해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 명 탈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저렇게 침착하게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나이에 비해서는 제법 경험이 많은 놈이라고 봐야 했다. 그렇 다면 쓸 만한 정보를 약간은 캐낼 수 있을지도…….

랜달은 피식 웃으며 옆에 앉아 있던 털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놈 깨어 있는데?”

“정말이야?”

“머리통 움직이는 거 내가 분명히 봤어.”

랜달의 말에 털보는 심심한데 잘됐다는 듯 포로에게 다가갔다. 발로 밀어, 엎어져 있던 포로의 몸을 바로 눕혔다. 포로는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굴러갔다. 6급 용 병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앳된 얼굴이다.

“호오, 어린놈이 아주 능청스럽구만. 이렇게 기절한 척하고 있으면, 우리가 모를 줄 알았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자세히 살펴봤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만약 랜달의 말이 아니었다면 아직까지 기절해 있는 줄로 착각했을 것이다.

털보는 히죽 웃더니 포로의 코를 꾹꾹 누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얌마, 깼지? 깬 거 다 알어. 얼라, 그래도 기절한 척하네. 이놈 아주 음흉스런 놈이잖아.”

“흠, 랜달이 잘못 본 걸까? 에이, 귀찮긴 하지만 깼는지 아닌지 한번 알아보지 뭐. 발바닥을 모닥불로 지지면..”

털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포로는 살짝 눈을 뜨고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신음성을 흘렸다. 이제 막 깨어났다는 듯…….

“으흐흐음.”

그걸 보자 털보는 가소롭다는 듯 입가를 이죽거렸다.

“흠, 아직 정신이 혼미한 거 같은데 이래서야 뭘 물어보기도 힘들잖아. 역시 모닥불로 발바닥을 지지는 게…….”

순간 라이는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뜬 뒤 소리쳤다. “불로 지지실 필요 없어요. 깼어요. 완전히 깼다구요.”

털보는 라이의 머리통을 툭 친 뒤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헤먼! 이 녀석 깼어!”

모두들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털보의 위협이 있기 전까지 꿈쩍도 안 하고 주위를 살핀 걸 보면 아주 능청스런 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협박 몇 마디에 기겁 을 해서는 눈을 번쩍 뜨다니. 그걸 보면 간뎅이는 아주 작은 놈이라고 봐야 했다.

‘젠장, 안 불겠다고 좀 버텨야 고문할 맛이 날 텐데, 이건 뭐 살짝만 위협해도 술술 불게 생겼단 말이지. 재미없게 말이야.”

헤먼은 털보를 옆으로 밀치고는 라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을 심문해 봤던 헤먼이다. 그렇다고 그가 고문 기술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길게 찢어진 눈매와 날카로운 매부리코, 거기에다가 얼굴을 가로질러 길게 이어져 있는 상흔까지. 그의 얼굴은 어딘지 독살스러운 맹금류를 연상시켰다. 그래서인지 그 가 약간만 인상을 써도 포로들이 지레 겁을 먹고 술술 다 불었던 것이다.

라이를 바라보고 있는 헤먼이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봤을 때는 저승에서 막 기어 올라온 마귀와도 같은 음산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헤먼의 독살스러운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라이는 이미 잔뜩 주눅이 들어 버린 상태다.

“재수가 정말 좋군. 낙마(落馬)했을 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 그냥 죽어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말이야.”

“다, 당신들은 누구죠? 뭐, 뭣 때문에 나를 이렇게.

“그건 알 필요 없고, 너는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돼.”

“그, 그럼 절 살려 주실 겁니까?”

헤먼은 포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짐짓 푸근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그게 라이의 눈에는 살기 어린 음산한 표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당연하지. 성실하게 협조를 해 준다면 우리가 자네를 왜 죽이겠나. 안 그런가?”

“대체 뭘 알고 싶으십니까?”

“자네의 이름과 소속 부대는?”

“제 이름은 라이라고 합니다. 성은 없구요. 그리고 제가 소속된 부대는 붉은 전갈 용병단의 제7독립대대 휘하의 1중대, 3소대입니다.”

그밖에도 라이는 헤먼이 묻는 말에 자신이 아는 한 상세하게 대답했다. 중대장인 올란도가 홀로 방벽 너머의 적들을 헤치운 것까지도.

인상도 험악한 사내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담량도 없었을 뿐더러, 그깟 붉은 전갈 용병단에 대한 정보 따위야 라이에게는 손톱만큼도 감출 가치가 없었던 것이 다.

게다가 라이에게는 속셈이 따로 있었다. 그건 지금껏 그가 해왔던 것처럼 최대한 협조하는 척하며 상대를 안심시킨 후,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때 탈출할 생각이었 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솔직하게 주저하지 않고 대답해 준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줄은 라이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알고 싶다는 건 다 말해 줬건만, 자 신을 심문하고 있던 사내의 인상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질문을 던지던 헤먼이 갑자기 짜증스럽다는 듯 외쳤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 순진하고 어리숙한 척하더니, 알고 보니 뱃속에 능구렁이가 대여섯 마리는 들어앉아 있는 놈이잖아.” 옆에 서 있던 랜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내가 눈치채기 전까지만 해도, 죽은 척하고 누워서 눈치만 살살 보던 놈이잖아.”

“쥐새끼 같은 놈. 이런 놈은 처음부터 반쯤 죽여 놓고 시작하는 거였는데……. 시간 낭비만 했네! 이봐, 몽둥이 하나 가져와 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이 내뱉는 험악한 소리에 라이의 얼굴색은 빠른 속도로 새하얗게 탈색되고 있었다.

이때, 털보가 혀를 차며 두 사람을 말렸다.

“쯧쯧. 이봐, 이놈이 하는 짓은 얄밉지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보자고. 아직 어린 친구 같은데, 벌써부터 병신을 만들어 놓으면 쓰나.”

살벌한 얼굴의 헤먼과는 달리 털보는 옆집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에 말빨이 아주 좋았다. 어찌할까 망설이는 헤먼을 밀어낸 뒤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털보는 짐 짓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봐, 어린 친구. 용병대를 위해 발버둥치는 자네의 노력은 가상하다만…, 이제 쓸데없는 거짓말은 그만두고 진실을 말해 보는 게 어떤가?”

“전 하늘에 맹세컨대 진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흠, 그래서 방벽 위에 있던 우리 일행을 모두 처치한 게 단 한 명의 소행이라는 말을 우리보고 믿으란 말인가?”

“예.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중대장님이 그랬습니다. 마치 새처럼 날아 단숨에 성벽 위로 뛰어오르더니 파파팍 하고.. 그 말에 모두들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에이, 이 새끼가 진짜 우릴 대가리가 텅 빈 오크로 아나?”

결국 헤먼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 버린 모양이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라이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퍽!

“크흑!”

얼마나 강하게 얻어맞았는지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맞는 순간 재빨리 고개를 돌려 충격을 흘린다고 흘렸지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걸 보면 입 안이 터져 버린 모 양이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건 이빨은 부러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진 무지막지한 구타

퍽퍽 퍽!!

“크윽! 악! 으악!”

처음 몇 번인가는 주먹으로 때리더니, 그것만으로는 성이 풀리지 않는지 발로 인정사정없이 걷어차기까지 했다. 라이는 몸을 최대한 동그랗게 웅크리고 팔로 얼굴 앞을 가로막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점잖게 말로 했더니, 이 새끼가 우릴 아주 가지고 놀려고 드네!”

헤먼이 한참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있을 때, 털보가 그를 말렸다.

“이봐, 그만해. 잘못하면 죽이겠어. 이렇게 소중한 포로를 심문도 제대로 못하고 죽여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숨기는 걸 보면, 뭔가 아는 게 있다는 뜻이겠 지. 안 그래?”

“그건 그렇지.”

“이젠 내가 알아서 하지. 맡겨 주게.”

“콜록콜록!”

핏물을 내뱉으며 심하게 기침을 해대는 라이. 털보는 그런 라이 곁에 쭈그리고 앉아,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봐, 어린 친구. 실없는 농담은 이제 그만하고 알맹이가 있는 얘기를 좀 해 보라구. 만약 계속 이딴 식으로 나온다면, 내 인내심도 한계를 느낄 거야. 그러니 뜨거 운 맛을 보기 전에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서로를 위해 좋지 않겠나?”

“묻는 대로 솔직하게 다 대답했는데, 대체 왜 이러세요?”

털보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삭이려는 듯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러니까 네놈의 중대장이 그 높은 방벽을 한순간에 뛰어 올라가, 우리 동료 수십 명을 혼자서 모두 죽였다는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그, 그게 사실인 걸 어쩝니까? 중대장 혼자서 다 한 거라니까요.”

물론 그런 학살극을 혼자서도 저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레인저들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실력자가 고작 이런 삼류 용병단에 배치되 어 있을 리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털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냈다.

“아, 정말 미치겠네. 거짓말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껏 해야 내가 믿는 척이라도 해 주지. 이 새끼, 완전 또라이 아냐? 얌마, 그럼 너네 용병단에는 그래듀에이트급의 실력자들이 득시글거린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너희 연대장은 왜 힘도 제대로 못써보고 모가지가 날아갔는데?”

“…..”

“고작 중대장 따위가 화살이 빗발치는 방벽을 혼자 뛰어넘어가 1개 중대 병력을 몰살시켰다고? 에라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새꺄!”

사실 미치고 팔딱 뛰고 싶은 심정은 털보보다 라이가 더했다. 솔직하게 다 털어놨는데도 왜 믿지를 않는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말해 준 것도 아니고,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실만을 말해 줬는데 말이다.

“흐흐, 네놈이 굳이 내 취미 생활을 도와주겠다며 이렇게까지 애를 쓰는데, 매정하게 그 청을 거절할 수는 없겠지. 알겠어. 그렇게 바란다면 내 흔쾌히 네게 은혜를 베풀어 주지.”

사람 좋아 보이던 털보의 얼굴이 갑자기 스산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두 눈에서는 헤먼과는 또 다른 의미의 광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런 털보의 모습에 모두들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제, 제발 제 말을 좀 믿어 주세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했는데, 왜 안 믿으시는 겁니까?”

“좋아,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즐겁게 취미를 즐길 수 있도록 최대한 버텨 보라고.”

털보는 품속에서 뭔가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건 짧지만 아주 날카롭게 끝이 갈린 송곳이었다. 그는 송곳 끝을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콕콕 누르며 으시시한 어조로 물었다.

“이게 뭔지 아나?”

“송곳이잖습니까. 갑옷을 수선하는 데 쓰는…”

“흐흐, 맞아. 평상시에는 모두들 그런 용도로 쓰지. 하지만 이걸 또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지. 지옥문을 여는 특급 열쇠로 말이야. 왜, 내 말이 믿기지 않나? 걱정하 지 마. 내 말이 맞다는 걸 네놈도 금방 인정하게 될 테니 말이야.”

그 순간 라이는 알 수 있었다. 이 털보 자식은 완전히 미친놈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미친놈이 자신에게 지금부터 뭘 하려는지도. 겁에 질린 라이는 급하게 고개

를 가로저으며 소리쳤다.

“저, 전 알고 싶지 않아요!”

털보는 뒤를 돌아보며 주위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놈 팔 좀 꽉 잡아 줘. 움직일 수 없도록”

“뭘 하려고?”

헤먼의 질문에 털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 송곳을 손톱 밑에 찔러 넣으면 엄청나게 아프거든. 더군다나 죽을 염려도 없으니 얼마나 좋아.”

털보의 말에 랜달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란 사람은 헤먼이었다. 그도 냉막한 인상 덕분에 자주 차출이 되어 포 로를 족치다 보니, 이런저런 고문 기술들을 제법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털보가 말한 이런 기괴한 짓거리는 지금껏 들어 본 적도 없는 아주 신선한 방법이었던 것 이다.

털보는 라이의 엄지손가락을 꽉 움켜쥐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걸로 여기를 찌르면 꽤나 아프다네, 어린 친구. 자, 어떤가?”

조금씩 손톱 밑을 파고드는 송곳.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라이는 몸을 거칠게 뒤틀며 처절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윽! 으아아악!!”

송곳 하나를 엄지손톱 밑에 깊숙이 박아 넣은 다음, 털보는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흐, 표정을 보니 너도 무척 즐거운가 보군. 벌써 끝나 버렸다고 아쉬워 할 거 없어.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라이는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을 치려 했지만 헤먼과 랜달이 꽉 붙잡고 있어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라이는 입에 거품까지 물며 악을 쓰듯 소리쳤다. “뭐든 대답할 테니, 제발 그만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긴 했지만, 털보는 능청스레 말했다.

“오우, 벌써 날 실망시키면 안 되지. 말을 하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일단 열 손가락 밑에 송곳을 박아 넣은 뒤 네게 대답할 기회를 줄 테니까.”

그러면서 털보는 품속에서 송곳 하나를 더 꺼내 라이의 손가락에 가져다 댔다. 그때였다. 뒤에서 보다 못한 선임 레인저가 만류하며 나선 것은.

“잠깐! 일단 놈이 제대로 실토하나 들어 보자. 고문을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잖아.”

“쩝, 양쪽 엄지손가락에 송곳을 하나씩 쑤셔 박고 시작하는 게 최곤데……. 하여튼 알겠어.”

털보는 투덜거리며 라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 다시 한 번 더 묻겠다. 그때 상황을 자세히 말해 봐. 만약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또다시 늘어놓는다면 네놈의 모든 손가락과 발가락에도 송곳을 쑤셔 박아 줄 테다.”

라이는 두려움에 질린 눈빛으로 털보를 올려다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봐.”

진실을 말해도 상대가 믿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라이는 차라리 거짓말을 늘어놓기로 결심했다. 그의 머리는 그럴듯한 스토리를 생각해 내느라 맹렬한 속도로 움직 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대장님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항복하는 척했습니다. 포위를 당했으니 어쩔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무기를 버리고 방벽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 놨기에 우리는 한 명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들어가자마자 철저히 몸수색을 당했고 말입니다. 우리가 비무장 상태라고 생각 했는지 적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대대장님이 슬쩍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어쩌고저쩌고……. 없는 말을 지어내려고 하니, 라이로서는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그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에는 송곳이 깊숙하게 박혀 있는 상황. 엄청난 고통에 기절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불가사의할 정도인데, 그런 상태에서 그럴듯한 거짓말까지 지어내야만 하다니.

포로를 잡으면 왜 고문을 하는지 그 이유를 라이는 오늘에야 깨달았다.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면 논리 정연한 거짓말을 꾸며낸다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런데 웃 긴 건 털보의 반응이었다.

“흠, 그럭저럭 납득이 가긴 하는데, 몇 군데 미심쩍은 부분이 있단 말씀이야. 아무래도 이 짜식이 은근슬쩍 거짓을 섞은 것 같거든.”

“무, 무슨 말씀을. 단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순수한 사실만 말한 겁니다! 제발, 고문만은…….?

라이는 이제 더 이상 말을 지어낼 여력도 없었다. 그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 외에는.

털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선임 레인저의 눈치부터 살폈다. 선임 레인저 역시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는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털보는 다른 두 동 료들을 향해 말했다.

“이놈 왼손 좀 잡아 줘.”

두 사내가 자신의 왼손을 덥석 붙잡자, 라이의 얼굴은 극심한 공포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시끄럿! 한 번 기회를 줬음에도 또다시 거짓말을 늘어놓다니. 이젠 용서할 수 없다.”

신경질적으로 외친 털보는 송곳을 왼쪽 엄지손가락 밑에 깊숙이 쑤셔 넣었다. 그러고도 성이 안 차는지 주변의 나뭇가지를 꺾어 끝을 뾰족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송곳 대용으로 쓰려는 심산인 것이다.

“으아아악! 야이, 미친놈아! 말해 달라는 대로 다 말했는데, 왜 이 지랄이야. 아니, 아니, 제가 미쳐서 말이 헛나왔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쇼, 엉엉. 이번엔 정말 다 말할게요, 제발!”

하지만 털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뾰족한 나뭇가지 여덟 개를 라이의 손톱 밑에 하나씩 쑤셔 박았다. 그러고도 모자라는지 열 개의 나뭇가지를 더 가져와 끝을 날카롭게 깎기 시작했다. 휘파람까지 룰루랄라 불면서…….

나뭇가지를 깎아 어디에 쓰려는지는 뻔한 사실. 그것이 고통에 몸부림치던 라이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크아아악! 차라리 날 죽여. 죽여 줘!”

“크크, 네놈이 자초한 일이니 어쩔 수가 없지. 자, 이번에는 네놈 발가락에 이 예쁜이들을 밀어 넣을 차례인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대던 라이는 결국 게거품을 뿜어내며 기절하고야 말았다.

“어쭈구리, 거짓말이 안 통하니 이번엔 기절한 척하시겠다 이거지?”

평소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고 다니던 털보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모두들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헤먼이었다. 냉막한 인상 때문에 평소 악역이란 악역은 그가 도맡아 왔었으니까.

그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선임 레인저가 털보를 향해 말했다.

“이봐, 사람이 저 상태가 될 때까지 버틴다는 게 가능할까? 나는 저놈이 한 말이 어느 정도는 진실이라고 생각되는데…….”

“물론 대부분은 사실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몇 가지 숨기는 게 있어.”

“그걸 발가락에 쑤셔 박으면 진실을 실토할까?”

털보는 스산한 눈빛으로 손에 든 나뭇가지를 흔들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내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거 20개를 손발톱 밑에 박히고도 거짓말하는 놈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주 교활한 놈인 거 같은데, 그러고도 통하지 않으면?”

“흐흐, 그렇다면 내 비장의 수법을 몇 가지 더 보여 주지. 눈알을 뽑든지, 아니면 가죽을 벗기고 소금을 치든지…….”

라이가 거짓으로 기절한 척하고 있다면, 들으라고 하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포로를 심문하는 데 예상보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이곳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 었던 것이다. 상대는 붉은 전갈 용병단이다. 그런 3류 쓰레기들이 자신들의 행적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놈들의 실력은 어젯밤부터 시작해서 오늘 아침까지 실컷 맛본 상태다. 부대 안에서 은신과 추적술이 가장 뛰어나다는 레인저들의 실력이 겨우 그 정도였던 것을 보면, 나머지 부대원들의 실력은 보나 마나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들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모라이어스였다. 그는 덤불 밑에 바짝 엎드린 채, 적들이 포로로 잡힌 라이에게 고문을 하는 모습 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저 등신은 왜 잡힌 거야?”

그렇다고 해서 동료인 라이를 구하겠답시고, 놈들을 향해 화살을 날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적병의 숫자는 모두 네 명. 한 명 한 명이 다 자신보다 실력이 높 다고 보는 게 옳았다. 최악의 상황이다. 자신의 목숨조차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구한다니,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라이어스는 적들의 이목이 모두 라이에게 쏠려 있을 때, 전투를 벌이기에 가장 유리한 지형을 찾아 살며시 이동했다. 지형의 이점이라도 안고 있지 않는 한, 싸 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닌 것이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한 모라이어스는 속으로 라이를 향해 애도의 념을 표했다.

‘멍청한 놈이었지만 이럴 땐 도움이 되는군. 네 복수는 내가 확실하게 해 줄 테니 마음 편히 가거라.’

모라이어스는 화살통에서 4대의 화살들을 꺼내 옆에 가지런히 놨다. 속사(速射)를 할 때, 이렇게 땅에 놔둔 것을 잡는 편이 화살통에서 꺼내는 것보다 속도가 약간 이나마 더 빠르기 때문이다. 이걸 다 쏜 다음 재빨리 옮겨 갈 다음 위치도 이미 정해 둔 상태다.

“어떤 놈을 먼저 쏠까??

첫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건 상태로 어떤 순서로 화살을 날릴 것인지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죽은 듯 쓰러져 있던 라이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는 게 보였다. ‘저놈 아직도 살아 있었나??

비정상적일 정도로 좋은 시력 탓에 모라이어스는 라이의 얼굴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핏발이 곤두서 붉게 번들거리는 눈빛! 입가에는 허연 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야생의 짐승들처럼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살기까지!

몬스터를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붙였을 때나 나오는 그런 광기 어린 모습이었다. 모라이어스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인간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 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질긴 목숨이로군.’

라이가 살기를 내뿜으며 일어서자 적들의 이목이 모두 그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은 습격 기회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끝까지 나를 도와줘서 고맙군, 애송이. 잘 가라.’

드디어 네 명의 적들에게 어떤 순서로 화살을 날릴지를 정했다. 일단 화살을 쏘기 시작하면 최대한 빨리 네 발을 연사(射)해야 했다. 천천히 호흡을 멈추고 막 시 위를 당기려고 할 때였다. 이때, 그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목격되었다. 라이의 손가락에 꽂혀 있던 송곳과 나뭇가지들이 손도 대지 않았는데 갑자기 쭈욱 뽑혀 나오 더니 땅바닥에 툭툭 하고 떨어지는 것을.

‘헉!’

말도 안 되는 이 기괴한 상황에 모라이어스는 시위를 당기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건 라이 앞에 서 있던 적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이가 보여 주고 있는 괴기스런 모습에 모두들 기절초풍할 듯 놀랬지만, 그중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역시 털보였다. 사람 몸속 깊숙이 찔러 넣은 송곳이나 나뭇가지는 억지로 잡아 빼지 않는 한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저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 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저건 말도 안 돼!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저럴 수는 없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놈부터 잡아. 도망이라도 치면 곤란하니까.”

선임의 말에 털보는 라이를 제압하기 위해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라이의 손이 묘하게 움직이더니 갑자기 털보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 에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털보는 세상이 한 바퀴 빙 도는 듯한 느낌과 함께 땅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퍽!

“크아악!”

처절한 털보의 비명 소리에 분위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모두들 허겁지겁 칼을 뽑아 들고 라이를 포위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으윽! 내, 내 팔.”

털보는 힘없이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붙잡고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만 봐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대충 짐작이 갈 정도다. 헤먼은 칼을 겨눠 라이를 위협하면서도 털보를 향해 걱정스런 시선을 보냈다.

“이봐, 괜찮아?”

“팔이 빠진 거 같은데, 빨리 끼워 줘.”

선임은 재빨리 털보 옆에 앉아 힘없이 덜렁거리는 팔을 붙잡았다.

“이를 악물어라. 그럼 시작한다.”

빠진 팔을 다시 끼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힘껏 팔을 잡아당긴 후, 제자리에 맞춰 주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 했음에도 팔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덜렁거리기만 했다.

“이거…, 빠진 게 아니라 완전히 꺾여 버린 거 같은데?”

“꺾여 버렸다고?”

나약해 보이는 닭다리 관절도 비틀어서 꺾으려면 꽤나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두꺼운 사람의 팔이다. 게다가 털보의 팔은 일반인과 달리 오랜 훈련 으로 다져져 강철과도 같이 튼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팔을 비틀어 관절을 박살내 버린다는 게 과연 가능이나 한 일일까? 물론 트롤 같은 몬스터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이런 젠장!”

털보는 선임을 왈칵 밀쳐 버리고는 라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분기탱천한 그의 눈에는 이제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고문이고 나발이고, 자신의 오른팔을 못 쓰 게 만든 저놈을 처참하게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의 왼손에는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시퍼런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 이봐. 아무리 신경질이 난다고 해도, 죽여 버리면 안…….’

하지만 선임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라이가 자신을 향해 찔러 오는 단검을 묘하게 움직여 피하더니 털보의 팔을 덥석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털보의 팔이 으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통째로 뽑혀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저, 저럴 수가!”

“으아아악!”

털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방금 전까지 팔이 붙어 있었던 그의 왼쪽 어깨에서는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람의 팔을 잡아 뽑아 버리다니! 몬스터라면 몰라도 사람이 저런 괴력을 발휘하는 것은 본 적조차 없었다.

라이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기괴하게 변하고 있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핏발선 눈동자. 그리고 온몸의 혈관과 근육은 한껏 부풀어 올라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마치 무슨 괴이한 약물이라도 삼킨 듯한 모습이다.

현재 라이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금단의 마법에 의한 자기 보호 기능이었다. 각성을 하기 전에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신체가 지닌 잠재력을 폭발시켜 위 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전생의 비술을 통해 태어난 어린 생명체에게는 꼭 필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일찍부터 내공에 눈을 떠버린 라이에게 있어서, 이 자기 보호 기능으로 파급된 여파가 너무나도 컸다. 그가 무의식중에 익히고 있는 내공심법이 무림에서도 최고의 안정성을 자랑한다는 태허무령심법(太虛無靈心法)이 아니었다면,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한 내공에 의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리고도 남았으리라.

태허무령심법의 효능으로 인해 간신히 주화입마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지금 라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

기절초풍할 일이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레인저들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런 일이야 중대형 몬스터들을 상대하다 보면 흔히 겪게 되는 일이었으니까. 선임 레인저는 침착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모두들 침착해라. 저놈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트롤이라고 생각해라. 헤먼, 넌 우리들이 앞에서 막고 있는 동안 석궁부터 확보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헤먼은 자신의 석궁을 놔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료들이 저 괴물 같은 놈을 막아 줄 거라고 굳게 믿으며.

헤먼의 석궁은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300미터 안쪽이라면 철판갑옷까지도 꿰뚫어 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장전하는 데 필요로 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다는 사실이었다.

모두들 긴장해서 라이의 눈치만 살필 뿐, 공격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그들은 사격술에 능통한 레인저였지, 단병(短)을 이용한 직접적인 몸싸움은 그리 능하 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이를 향해 단검을 겨누고 있는 그들의 손에 식은땀이 흐른다. 저런 괴물을 이런 단검으로 저지해야 한다는 게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라이는 멀뚱히 서 있기만 할뿐, 공격해 오지 않았다. 지금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최고의 기회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레인저들은 애 가 탔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힐끔힐끔 헤먼을 훔쳐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석궁을 장전시키지 못했나? 저러다가 놈이 공격해 오면 엿 되는데…….”

‘헤먼, 이 새끼, 왜 이렇게 미적거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나도 활을 드는 거였는데…….”

적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헤먼의 석궁이 장전되는 것을 훔쳐보는 긴장감. 이런 것에 정신이 팔려 그들은 라이가 보이는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 미치광 이 포로가 자신을 향해 살기를 드러낸 사람만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윽고 헤먼이 석궁의 장전을 완료했다. 헤먼이 석궁을 들어 라이를 조준하는 것을 보고서야 모라이어스는 아차 싶었다. 자신이 정신을 놓고 있는 동안에 라이의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시위를 뒤로 힘껏 당겼다. 하지만 헤먼이 한발 빨랐다.

텅!

강한 반동과 함께 화살은 엄청난 속도로 라이를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레인저들은 곧이어 벌어진 놀라운 광경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떠야만 했다.

툭!

철판갑옷도 꿰뚫는 화살이 맨몸인 라이의 몸통을 꿰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것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화살의 날카로운 살촉은 마치 해머로 두들긴 듯 뭉툭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으악! 괴물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전의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화살이 라이의 몸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는 순간, 레인저들은 공포에 찬 비명을 질러대며 사방으 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도망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바로 헤먼이었다. 석궁을 발사한 직후 모라이어스가 날린 화살에 맞아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모라이어스는 재빨리 화살을 재장전한 뒤 두 번째 목표물을 찾았지만, 적 레인저들의 발이 워낙에 빨라 한 놈도 조준할 수가 없었다.

이때, 그는 볼 수 있었다. 라이가 핏발선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아마 라이는 모라이어스가 자신을 쏘려고 한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소름이 끼칠 정 도로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라이의 모습에 모라이어스는 본능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저…, 저게 대체……?”

몸이 위축되자 시위를 당기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갈 리 만무하다. 모라이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활을 내려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살렸다. 더 이상 살기가 감 지되지 않자, 라이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점점 작아지는 라이의 뒷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던 모라이어스는 갑자기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정신이라도 차리려는 듯. 그리고 급히 주위를 둘러봤 다. 이미 이 근처에서는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라이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금 전에 적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땅바닥에는 적 레인저의 사체 두 구가 쓰러져 있었다. 하나는 헤먼의 시체였고, 다른 하나는 과다 출혈로 인해 사망한 털보의 시체였다.

하지만 모라이어스는 적의 시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급히 헤먼이 쐈던 화살이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가 그것부터 집어 들었다. 석궁용으로 제작된 짧으 면서도 굵은 화살이다. 그것도 보통 물건이 아니라 중심에 철심까지 박아 파괴력을 극대화해 놓은 화살이었다.

그런데 그의 얼을 빼놓은 것은 화살의 촉 부분이었다. 뭉툭하게 찌그러진 모습! 이건 두터운 철판에 맞고 튕겨 나왔을 때에나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 이게 대체 가능한 일일까? 아니, 무엇보다 아까 그놈이, 정말 내가 알고 있던 라이가 맞기는 한 걸까? 아니면 비슷하게 생긴 놈이었나?” 시력이 좋은 모라이어스가 사람을 잘못 볼 리 만무했다. 모라이어스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