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2권 9화 – 라이 코는 개코?

라이 코는 개코?

‘이상하네? 분명히 오크 냄새가 난 것 같았는데…

바람 방향이 갑자기 바뀌었을 때 얼핏 풍겨 온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오크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라이도 혹시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서 쉬었다가 가자.”

리치몬드의 말에 모두들 편한 장소를 골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더위 탓에 겉에 걸치고 있던 망토나 로브는 벗어 버린 지 오래. 그 덕분에 라이는 소피아 수녀의 아 름다운 얼굴을 몰래 감상할 수 있었다.

‘쩝, 혼자 멍청한 짓 하지 말고 나도 투구를 벗자. 괜히 이러다가 리치몬드에게 미운털이라도 박히는 날에는 앞날이 고달파지게 돼.’

라이는 투구를 쓰고 있는 탓에 이마 위로 줄줄 흘러내리는 땀도 닦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막 투구 끈을 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오크 냄새가 풍겨 왔다. 이번에는 아주 짙었다. 지금까지는 놈들이 바람의 방향을 헤아리며 조심스럽게 따라오고 있었기에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지만, 최후의 순간이 되어 포위 망을 갖추자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온 것이다.

라이는 급히 일어나 화살을 장전하며 외쳤다.

“오큽니다! 모두들 주의하세요.”

라이의 경고에 모두들 경악해서 황급히 주위를 살펴봤다. 하지만 리치몬드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라이를 향해 짜증 어린 질책부터 날렸다. 안 그래도 덥고 피곤한 데, 새파란 신참이 자신의 충고에도 아랑곳 않고 깝죽대고 있으니 짜증이 울컥 치솟았던 것이다.

“또 그 소리로군. 내가 분명히 말했었지 않은가. 여기에는 오크가 없다고 말일세.”

리치몬드의 말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말이다. 긴장을 푼 그들은 저마다 배낭에서 먹을 것부터 꺼냈다. 강행군을 하느라 지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배가 고팠던 것이다.

“이보게, 라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새파란 신참 주제에 주제 파악도 못하고 나대고 있는 라이에게 경고를 할 작정이었다. 또다시 이런 식으로 동료들의 휴식을 방해하면 가만히 안 놔두겠다고 말이 다. 하지만 그때, 리치몬드는 볼 수 있었다. 라이가 일어서 있는 저 뒤쪽의 수풀이 묘하게 들썩이고 있는 것을.

리치몬드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수풀이 들썩이고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라이의 말대로 오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가 자신들을 포 위한 채 육박해 들어오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리치몬드는 경악해서 외쳤다.

“전원 전투 준비!”

그는 급히 나귀 등에 걸어 둔 방패부터 집어 들었다. 투구를 쓸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턱 끈을 묶지 않으면, 거칠게 움직일 때 투구가 이리저리 움직일 것은 뻔한 이치. 결정적인 순간에 시야를 가리게 되면 오히려 쓰지 않은 것만 못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그것을 잘 알기에 그는 처음부터 투구를 집어 들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검을 뽑아 들었을 무렵, 미지의 적은 리치몬드의 코앞에까지 육박해 들어와 있었다. 수풀을 헤치며 튀어나온 적은 라이의 말대로 오크였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 니었다. 자신에게 휘둘러 오는 오크의 몽둥이를 방패로 막아 내자마자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붉은 피가 확 하고 뿜어져 나와 그의 갑옷은 물론이고 얼굴에까지 튀었다. 하지만 리치몬드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또 다른 오크를 향해 칼을 휘둘 러야 했기에. 주변이 온통 오크 천지였다. 한 놈이라도 빨리 해치우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리치몬드나 젠슨은 그럭저럭 오크와의 접전을 시작하는 데 성공했지만 닉은 그렇지 못했다. 한창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던 그는 미처 방어 자세를 취하지도 못했 던 것이다.

몽둥이를 치켜든 채 순식간에 자신의 코앞까지 육박해 들어온 오크! 닉은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몽둥이가 자신의 머리통으 로 떨어지는 것을 본 닉은 본능적으로 눈부터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들려온 오크의 처절한 비명 소리!

“꾸우욱!!”

곧이어 자신의 발 앞에서 뭔가가 털썩 쓰러지는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닉은 살짝 눈을 떠 봤다. 그는 볼 수 있었다. 방금 전에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던 오크가 쓰러져 있는 것을. 그리고 오크의 등을 관통하고 삐죽이 솟아나와 있는 창 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창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굵고 긴 화살이었다.

급히 뒤를 돌아보니 얼마 전에 동료가 된 라이라는 녀석이 활을 쏘고 있는 게 보였다. 화살 한 발을 쏘고는, 또다시 화살을 활통에서 뽑으려고 할 때였다. 닉은 라이

의 뒤통수를 향해 육박해 들어가고 있는 오크를 발견했다. “라이! 뒤를 조심해!”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긴 했지만, 그는 사실 라이가 이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굵고 긴 화살은 연사에 부적합했다. 다음 화살을 장전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너무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는 죽지 않았다. 그는 화살을 활동에서 뽑는 대신, 허리에 차고 있던 도끼를 뽑아드는 것과 동시에 집어던졌던 것이다. 커다랗게 회전하며 날아간 그의 도끼는 놀랍게도 오크의 이마에 정확히 박혔다.

“꾸에에엑!”

정말이지 놀라운 실력!

라이는 닉을 향해 감사의 눈빛이라도 보내려고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닉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또 다른 오크를 라이는 짜증이 벌컥 치솟았다. ‘저 새끼는 싸우지도 않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어느샌가 화살을 뽑아 든 라이는 닉을 공격하려고 하는 오크를 향해 쐈다. 그런 다음 활을 집어던지고 방금 전에 자신의 도끼에 맞아죽은 오크에게로 달려가 놈의 이마에 박혀 있는 도끼를 뽑아 들었다.

“이 새끼들! 다 죽었어!”

라이가 활쏘기를 포기한 것은 화살의 크기가 너무 커 한 발 한 발 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과 뒤엉켜 싸울 때는 오히려 칼이 나 도끼 같은 단병기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한 마리, 두 마리. 놀라운 속도로 오크를 해치워 나가는 라이. 라이의 활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닉에게 어느새 다가왔는지 젠슨이 옆에 와 있었다. 그의 장검은 물론이고, 방패까지 오크의 피로 붉게 얼룩져 있었다.

“이봐, 닉!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

“아, 예.”

닉은 얼굴을 붉혔다.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도 아니면서 정신을 놓고 있었다니, 창피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재빨리 어깨에 메고 있던 활을 끌러 들었다. 화살 을 화살통에서 뽑아 든 그는 화살을 시위에 걸어 당기는 순간 조준까지 함께 완료했다. 최대치까지 시위를 당김과 동시에 놔 버린 그는 눈으로는 새로운 목표를 찾 으며 화살을 화살통에서 뽑아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발사하는 닉. 라이의 장대한 화살에 비한다면 파괴력은 약할지 몰라도, 연사속도에 있어서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격전은 시작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미친 듯 공격하던 오크들이 어느 순간, 썰물 빠지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헐떡거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 앉은 라이는 급히 투구부터 벗어던졌다. 그의 얼굴 전체는 땀으로 목욕을 한 듯 흥건했다. 땀을 훔칠 새도 없이 수통부터 꺼내 입에 무는 라이.

어느새 라이 옆으로 다가온 리치몬드가 말을 건넸다.

“다친 데는 없는가?”

라이는 물 마시기에 바빠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대신 괜찮다는 듯 손바닥을 흔들어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라이를 보며 리치몬드는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자네의 경고를 무시한 것, 정말 미안하네.”

간신히 수통에서 입을 뗀 라이는 거친 숨소리를 뿜어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도 오크가 있는지 정확히 확신하지는 못했었는데요, 뭘.”

“그러고 보니 자네 실력이 아주 출중하더군.”

이런 칭찬은 용병대 안에서는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라이는 무척이나 쑥스러웠다. 그런 라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리치몬드가 말했다.

“자네가 큰소리칠 만도 했어. 일전에 자네에게 3%의 배당을 주겠다고 했지만, 오늘 보니 내가 너무 적게 불렀더군. 자네 실력을 몰라봤기에 벌어진 착오였다네. 용서해 주게. 자네한테 10%를 주지. 그만한 실력이 되니까.”

리치몬드가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 줬을 뿐만 아니라, 배당까지 파격적으로 올려 준다고 하니 라이는 하늘이라도 날듯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리치몬드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누구 다친 사람은 없나?”

파티원 한 명 한 명의 몸 상태를 훑어보며 확인한 후에야 리치몬드는 말을 이었다.

“오크 영역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힘들더라도 완전무장한 상태로 움직이도록 하자. 자네들도 알다시피 이번에는 아주 운이 좋았어. 여기 이 친구가 경고를 해 준 것도 도움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오크 놈들이 우리들을 얕보고 얼마 안 되는 숫자로 덤빈 덕분이라고 봐야 하겠지. 만약 이번에 공격한 오크들의 숫자가 30마리 정도가 아닌, 100마리 이상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리치몬드의 지적은 모두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이번 같은 행운이 또다시 반복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말자. 아마 오크의 다음번 공격은 전력을 다한 것이 될 거야. 모두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리치몬드의 지시가 떨어진 후, 모두들 당나귀 등에 올려 뒀던 여분의 무장을 착용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닉은 무장을 갖추는 것도 잊은 채 질투 어린 시 선으로 라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놀라운 실력을 가질 수가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기사가 되는 수업을 받아 왔던 자신도 한순간 공포에 질렸었는데….. “별 볼일 없는 용병의 자식인 주제에.

방금 전에 보인 자신의 추태를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까지는 라이를 천한 상인 나부랭이라고 생각하며 은근히 무시해 왔었다. 그런 그에게 실력에 서 밀린 것은 둘째 치고,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릴 추태까지 보였으니……. 겉으로 말은 못했지만 속으로는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젠슨은 완전무장을 갖춘 후 라이에게로 다가왔다. 라이의 투구가 눈구멍만 대충 뚫어 놓은 대량 생산형이라면, 젠슨이 사용하는 투구는 평상시에는 안면 부위의 방어판을 위쪽으로 들어 올려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고급품이었다. 그렇기에 투구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는 그의 얼굴을 잘 볼 수 있었다.

젠슨은 든든한 우군이라도 만난 듯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덕분에 오늘 살았다.”

“뭘요. 운이 좋았던 것뿐입니다.”

“내가 앞서 가면서 아무리 살펴봐도 오크의 흔적은 찾지 못했었는데, 너는 어떻게 찾아낸 거지?”

“후각이죠. 오크에게서는 독특한 냄새가 나거든요.”

젠슨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냄새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젠슨은 오크 사체로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다. 오크에게서 지독한 악취가 난다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개가 아니고서야 여러 가지 냄 새가 혼재되어 흐르는 숲 속에서, 오크의 냄새만을 꼭 집어 파악해 낼 수가 있는 것일까?

“제가 후각이 좀 예민한 편이거든요.”

“호오, 그거 정말 굉장한 후각이군. 어쨌거나 오늘 네 덕을 톡톡히 봤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그날 하루는 모두들 긴장한 채 오크의 습격에 대비했다. 특히, 밤이 되었을 때는 주변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오크가 야습을 좋아한다는 것은 상식이었으니 까.

습격에 대한 불안감에 모두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밝아 오는 아침 해를 보며 젠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한 게 아닐까요?”

젠슨의 물음에 리치몬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습했는데도, 스물두 마리가 순식간에 죽어나갔으니 겁을 집어먹을 만도 하지.”

하나의 오크 부족이 보유한 전사의 숫자는 통상 100~150마리 수준이다. 물론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전사를 보유한 부족도 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 다. 그만한 숫자를 유지하려면 그만큼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참인데다 나이도 어린 주제에, 제 의견을 말씀드리는 게 주제넘는다는 건 잘 압니다만……..

어렵게 말을 꺼내는 라이를 바라보며 리치몬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한다며 짜증을 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말해 보게. 오크의 습격을 경고했던 건 자네였지 않은가. 지금 자네의 말을 무시할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다네.”

“그놈들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나?”

“먹을 것에 대한 놈들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당나귀 네 마리가 있는 한 그놈들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리치몬드는 당나귀를 힐끗 바라봤다.

“당나귀라…….”

당나귀들은 한가로운 표정으로 주위에 돋아 있는 풀을 뜯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쪽의 전력이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정면 대결은 삼가겠죠. 하지만 당나귀만 죽인다고 생각한다면 그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 까? 높은 곳에서 바위를 굴려도 되고…….”

그제서야 리치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리치몬드는 젠슨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놈들의 목표가 당나귀라면, 그냥 던져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자 닉이 즉각 반대하며 나섰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럼 저 많은 짐을 다 지고 가자고요?”

“하지만 오크들의 습격을 받을 위험까지 생각한다면 당나귀를 포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놈들이 끝까지 따라다니며 해꼬지를 해 댄다면, 당나귀는 물론이 고 필경 누군가 죽거나 다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라이의 말에 젠슨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동조했다.

“전 라이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교활한 놈들인 만큼,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죠. 더군다나 우리들은 기습당하기 아주 좋은 곳만 골라서 걸어가 야 하는 처지고요.”

“흠, 자네까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때, 닉이 리치몬드의 말을 끊었다. 그는 지금껏 조용히 앉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던 소피아 수녀를 향해 고개를 돌려 질문을 던졌다.

“잠깐, 수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리치몬드도 소피아 수녀를 무시하기는 힘들었는지, 그녀가 의견을 개진할 때까지 결론을 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생각하던 수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라이의 의견도 맞긴 합니다만, 던전에서 찾은 보물을 운반할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짐을 실을 당나귀가 없다면 기껏 개고생을 하며 보물을 찾아냈다고 해도, 그것을 들고 산을 내려올 수가 없게 된다.

그러자 닉이 재빨리 그 의견에 동조했다. 당나귀를 없앴을 때 그 많은 짐들을 자신이 직접 지고 가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라이가 잘난 척하며 나서는 것도 기분이 나빴기에 이렇게 심통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수녀님의 말씀이 바로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라니까요.”

“흠, 소피아 수녀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당나귀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하지요.”

순간 라이는 리치몬드의 리더로서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당나귀 몇 마리 때문에 오크 부족과의 충돌을 감수하려 하다니. 그것도 절대적으로 오 크에게 유리한 산악 지대를 통과하면서…….

어제 있었던 오크들의 기습은 이쪽에서 대처를 조금만 잘못 했어도 몰살당했을 게 확실했을 정도였지 않던가. 30마리 내외의 오크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도 이 정 도였는데, 부족 전체가 덤비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겠는가.

‘젠장, 파티를 잘못 골랐어. 저렇게까지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이 리더라니. 몇 사람 죽어 나가야 정신을 차리려나? 우리 소대장이었다면 당나귀 따위는 부담 없 이 버렸을 텐데……. 그리고 저 닉이라는 놈은 이번에 보니까 실력도 별 볼일 없던데, 왜 파티원으로 받아들인 거지??

머릿속은 불만으로 가득했지만 라이는 입을 꾹 다물고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서는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젠장, 용병단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어째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조신하게 붙어 있을 걸.’

라이 일행은 없는 길을 개척하며 이동하고 있는 게 아니라, 길을 따라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을 따라 전진할 것이다. 오크들도 그걸 잘 알고 있 다는 게 문제였다. 놈들은 이 일대 지리를 자기 손바닥 들여다보듯 빤히 알고 있을 테니, 기습하기에 가장 좋은 곳에서 매복한 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오크가 어디에 숨어 있을지 알 수 없는 만큼, 모두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었다. 물론 대부분은 건성건성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고, 제대로 주위를 살피고 있는 건 젠슨과 라이 단 둘 뿐이었다. 그 두 사람만이 오크를 찾아낼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산길을 타고 가다 보면 바람 방향이 자주 바뀐다. 오크 뱃속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던 라이였기에, 바람 방향이 바뀔 때마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확인했 다. 오크족에 대한 대비를 후각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라이로서는 바람이 뒤쪽에서 불어오는 게 제일 싫었다. 앞쪽에 오크가 매복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 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모퉁이를 한 바퀴 돌았을 때였다. 라이는 급히 리치몬드를 불러 세웠다.

“리치몬드 씨, 잠깐만요.”

“무슨 일인데 그러나?”

“저쪽에 오크가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라이가 손짓으로 가리킨 곳은 저 앞 급경사 위쪽이었다. 산을 한 바퀴 돌면서 이쪽으로 왔기에, 저 위쪽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접근하지도 못한 상태다. 더군다나 바람은 등 뒤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제아무리 후각이 좋다고 해도, 앞에 숨어 있는 오크의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리치몬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의 감이 좋은 건 이미 알고 있네. 하지만 그렇게 단언하는 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구먼. 바람 방향으로 봐서 저쪽의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게다가 지금까지 저런 지형을 만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도 저 위에 오크가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다니. 무슨 근거라도 있나?” 라이는 자신 있게 말했다.

“이쪽으로 돌면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죠.”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예. 방금 전에 리치몬드 씨가 말씀하셨듯 저런 지형을 꽤 많이 만났었죠. 하지만 그때는 다 바람이 이쪽으로 불어 줬었습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부는 상태에서 저 런 지형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라이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젠슨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줬기에 라이는 힘을 내서 덧붙였다.

“오크는 후각이 아주 뛰어납니다. 그리고 오크들이 사냥하는 대부분의 동물들도 후각이 뛰어난 편이죠. 제가 만약 오크라면 저 위쪽에서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완벽한 기습이 가능하니까요.”

라이는 리치몬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궁금했다. 이대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곧장 앞으로 나갈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저 위쪽으로 누군가 정찰을 보내 확인해 볼 것인가..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세 번째일 것이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위쪽으로 헐떡거리며 올라간 사람을 오크가 가만히 놔두겠느냐 하는 것이다. 필히 죽임을 당할 게 뻔한데,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사지(死地)로 보내겠는가.

“젠장.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만만한 게 나니까, 나보고 올라가라고 하겠지? 저 위쪽에 오크가 있다고 말을 꺼낸 것도 나니까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냥 조용히 있을 걸 그랬나…….’

심각한 표정으로 살길을 궁리하고 있는 라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치몬드는 급경사 위쪽을 살펴보고 서 있었다.

“적게 잡아도 백 마리쯤은 있다고 봐야 하겠지? 나 혼자서는 조금 벅차겠군.”

리치몬드는 젠슨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도와줘야겠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둘의 대화를 듣고 라이는 일단 마음을 놓았다. 자신이 저 위에 올라가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의견에 찬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리 치몬드의 리더로서의 자질에 대해 더욱 불신감만 느끼게 만들었을 뿐이다.

라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급히 물었다.

“설마 둘이서 저 위로 올라가실 생각이십니까?”

“물론일세.”

“만약 제 추측이 옳다면, 두 분은 살아서 내려오기 힘들다구요.”

“자네가 그런 걱정까지 해 줄 필요는 없다네.”

단호하게 말을 끊은 리치몬드는 고개를 돌려 수녀를 향해 말했다.

“우리 두 사람에게 축복을 부탁드립니다, 소피아 수녀님. 속도 증가와 근력 증가가 좋겠군요.”

“그렇게 되면 한동안은 치료마법을 쓸 수가 없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소피아 수녀님. 오크들의 숫자가 많은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저 위에 오크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거지요.”

라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속도 증가? 근력 증가? 그게 뭐지? 사제는 상처 치료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지금껏 라이가 봐 왔던 사제들 중에서 상처 치료 외에 다른 마법을 구사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에 발생한 무지였다. 라이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소피아 수녀가 신성마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춤과도 같은 부드러운 율동. 그리고 그에 맞춰 입으로는 특이한 음률의 노래를 나직이 부른다. 곧이어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빛까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현 실이 아닌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라이가 홀린 듯 바라보는 가운데, 언제 주문이 끝났는지 수녀의 행동이 멈췄다. 그 순간, 리치몬드와 젠슨의 몸에서 뭔가 희뿌연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빛이 사 그라졌다.

“휴우, 다 끝났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소피아 수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듯하더니, 다음 순간 그 둘의 신형은 엄청난 속도로 산 위를 향해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놀라운 속도였다. 일행 중에서 가장 중무장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 라이가 맨몸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파른 산길을 달려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라이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런 게 실제로 가능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잠시 후, 충격에서 깨어난 라이는 소피아 수녀를 향해 황급히 물었다.

“수, 수녀님. 방금 전에 본 게 꿈은 아니겠죠?”

호들갑스런 라이의 반응에 수녀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그리 대단한 마법도 아니야.”

“대단한 마법이 아니라뇨. 저 둘이 산 위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시고도……. 참,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만든 건 수녀님이었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런 게 마법으로 가능하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요.”

“일반인들이 마법사나 신관을 볼 일이 거의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세월이 흘러 네가 좀 더 경험을 쌓게 되면 알게 될 거야. 나 정도는 별로 대 단할 것도 없다는 것을 말이야.”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데요.”

소피아 수녀는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각 종단의 대신관님들의 능력을 언제 볼 기회가 생긴다면, 나랑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소피아 수녀의 말에 라이는 과거를 떠올리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까……?”

라이가 기억하는 대신관의 능력은 그리 대단할 게 없었다. 무슨 정신계 마법을 쓴답시고 하다가 안 되자 허둥거리던 모습, 그러다가 갑자기 불을 뿜어 화상을 입히 지를 않나, 곧이어 난처한 얼굴로 치료해 주지를 않나…….

대신관이라면 뭔가 대단한 권세와 위엄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함에도, 그가 기억하는 대신관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당황하고, 허둥대는 그런 초보자와 같 은 모습이었다.

이때, 테귤러가 해 줬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대신관께서 행한 것은 너의 육체적 능력을 좀 더 활성화시키기 위한 비법이다.」

그날 이후, 자신의 몸이 조금씩 달라진 게 사실이지 않은가. 웬만해서는 지치지도 않았고, 아무리 고된 일을 해도 다음 날 일어나면 온몸이 상쾌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대단한 분이셨을지도……?”

신성마법이라는 것에 대해 소피아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닉이 소피아 수녀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

“이제 끝난 모양입니다. 가시죠, 수녀님.”

그제야 라이는 산 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젠슨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손짓으로 이동해도 좋다는 신호를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

나귀를 이끌고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저 높은 비탈에서부터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리치몬드와 젠슨이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으로 봐 서 다행히도 부상을 당한 사람은 없는 듯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서로 간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자 라이는 그 둘이 벌인 엄청난 격전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던 것이 다.

합류하자마자 리치몬드는 활짝 웃으며 라이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자네 공이 커 놈들이 이 위쪽에 매복하고 있다는 걸 자네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네.”

“오크가 꽤 많았었던 모양이죠?”

닉의 물음에 젠슨이 대답해 줬다.

“100여 마리는 족히 되었던 것 같아. 그중 70여 마리쯤 죽였더니, 나머지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 버렸지. 아마 두 번 다시 우리를 노리고 공격해 오지는 못할 거 “야.”

젠슨의 말에 라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둘이서 오크를 70여 마리나 죽였다는 겁니까? 그게 대체 가능한 건가요?”

며칠 전에 오크 떼의 기습공격을 당했을 때 이들의 실력을 살짝 구경할 수 있었다. 리치몬드나 젠슨의 실력이 꽤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오크를 무자 비하게 학살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파티 전체가 오크 30여 마리 때문에 하마터면 전멸당할 뻔했었으니까.

그런데 겨우 둘이서 산 위로 달려 올라가 오크 100여 마리와 싸워 그중 70여 마리를 죽여 없앴다니. 저게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라면, 신성마법 덕분일 것은 불 보 듯 뻔한 사실.

‘우와, 신성마법이라는 게 이렇게나 대단한 것일 줄이야. 세상에! 이래서 옛날 영웅담에 나오던 용사 파티에 사제가 빠지지를 않았던 거였구나. 나는 그거 다 재미 있자고 써 놓은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젠슨은 외갑과 투구, 방패를 벗어 당나귀 등에 실으며 연신 투덜거렸다.

“에휴~, 어디 씻을 데 없나? 피가 말라붙으면 씻어 내기 힘든데…….”

그러자 리치몬드는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말게. 반나절쯤 더 가면 냇물이 나올 거야.”

“망할 오크 놈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꼭 시비를 걸어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니까. 에휴, 그나저나 이거 온몸이 온통 피로 끈적거려서 기분 더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