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3권 1화 – 첩자의 정체
첩자의 정체
마지막 마을을 떠난 다음날,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슬부슬 내리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빗발이 점차 거세지더니 오후로 접어들 무 렵부터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퍼붓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거친 빗줄기 탓에 몇 미터 앞조차 보기 힘들 만큼 시야가 좁아졌고, 길까지 미끄럽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몸의 중심을 잃고 넘어질 정도로 죽죽 미끄러진다. 추 적을 하기에는 그야말로 최악의 날씨다.
얼굴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으로 대충 닦은 대장은 뒤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수녀님, 괜찮으십니까? 너무 힘드시다면 이쯤에서 잠시 쉬어가도…….”
소피아 수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차분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헉헉, 저는 괜찮습니다, 대장님.”
그런 소피아 수녀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던 대장은 이번에는 라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라이! 힘내라. 수녀님도 이렇게까지 힘을 내고 계신데, 사내 녀석이 비실거려서야 쓰겠나.”
대장은 소피아 수녀와 라이를 독려하며 함께 걸어갔다. 그리고 샘은 일행보다 10여 미터 정도 앞서서 홀로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혹여 도망자들이 남겨놓은 작은 흔적을 라이나 소피아 수녀가 뭉개 버릴 우려가 있기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에이, 뭔 비가 이렇게 많이 와?”
라이는 원망어린 시선으로 하늘을 한 번 올려본 후, 얼굴을 흠뻑 적시고 있는 빗물을 소매로 쓰윽 닦았다. 그가 입고 있는 외투는 틴스부르의 잡화점에서 구입한 판초(Poncho) 형태의 싸구려였다. 양털로 짠 두툼한 모포 중간에 구멍을 하나 뚫고, 그곳에 머리를 가릴 수 있는 후드(Hood)를 달았다. 볼품은 없지만 밤이 되면 싸늘하게 얼어붙는 고산지역에서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외투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비를 잔뜩 맞게 되니 싸구려 외투의 단점이 확연히 드러났다. 방수가 되지 않아 외투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흠뻑 젖은 탓에 뼛속까지 냉기가 전해 져 왔다. 물론 그가 지니고 있는 마나를 운용할 수만 있다면 냉기 따위야 단숨에 몰아낼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런 기법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으…, 추워.’
이빨이 덜덜 떨려올 정도로 추웠지만 라이는 외투를 거머쥐며 애써 참았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추울 텐데 자신만 못 견디겠다고 앓는 소리를 낸다는 것에 자존 심이 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라이의 착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것은 라이의 싸구려 외투와는 달리 모두 고급품들이었다. 겉보기에는 투박해도 방수 처리가 확실하게 되어 있어 외투 안쪽으로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고 그냥 흘러내리는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며 방수가 되는 외투를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라이였기에 그런 사실을 모르고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소매로 대충 닦아 내던 라이는 앞장서서 일행들을 격려하며 걸어가고 있는 대장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듬직함을 느낄 수 있 었다. 소피아 수녀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줬고,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짜증조차 내지 않고 자신들을 챙겨주지 않은가.
빗물에 흠뻑 젖은 대장의 넉넉한 등판을 보며 라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마저 느꼈다. 그건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어쩌면 주어 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내의 뒷모습이 라이의 싸늘하게 닫혀 버린 가슴에 살짝 빈틈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멍한 눈빛으로 대장의 뒷모습을 따라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던 라이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자신의 아버지도 저랬었다. 변방으로 도망친 자 신의 주군을 위해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해 나가던…..
라이는 대장의 뒷모습을 보며, 예전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순간 라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미쳤지. 저런 분을 도끼로 찍어 죽일 궁리만 하고 있었다니…….?
악천후를 뚫고 강행군을 재촉하던 대장은 그럭저럭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 움푹 패인 지형을 발견하자마자 그곳에서 야숙할 것을 지시했다. 이곳보다 더 좋은 장 소를 찾는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진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오늘은 저곳에서 야숙을 하기로 하자.”
절벽 쪽으로 바짝 붙으니 비를 피할 수 있었다. 라이는 황급히 흠뻑 젖은 외투부터 벗었다. 외투를 힘껏 쥐어짜자 물이 주르륵 떨어져 내린다.
라이는 외투가 마를 수 있도록 벽면에 잘 널어놓은 후에 밖으로 나가 땔감을 주워 왔다. 추위를 쫓아낼 모닥불을 피우려는 것이다. 비록 나무들이 빗물에 흠뻑 젖 어있긴 했지만, 용병생활을 하며 이런 상황에서도 불을 붙이는 요령을 익혀 둔 지 오래다. 나무가 젖은 탓에 연기가 많이 난다는 게 문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따뜻 한 열기로 몸을 덥힐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라이와 수녀가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대장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 아직까지도 폭우를 맞으며 서 있던 샘에게로 다가갔다. 못마땅하다
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라이와 수녀를 째려보고 있던 샘은, 대장이 다가오자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언제까지 저 둘을 꽁무니에 달고 다닐 생각이신 겁니까?”
불만 가득한 샘의 질문에 대장은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왜 그렇게 민감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자네가 오버하는 것 같아.”
“오버하는 게 아닙니다. 트리스티 패거리 속에 첩자가 침투해 있었을 거라는 걸 대장도 이미 짐작하고 계셨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시시 콜콜한 정보까지 우리에게 보내 줄 수 있었을 리가 없죠.”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둘은 아냐.”
하지만 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장의 말에 단호하게 반박했다.
“아닙니다. 첩자는 분명 저 둘 중 하납니다. 처음 저들을 심문할 때 분명히 들었잖습니까. 트리스티 패거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자신들 둘밖에 없다고 말입니 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장도 샘의 주장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흠,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때 갑자기 샘이 비릿하게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
“아무래도 대장님은 지금 저 수녀 때문에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곡을 찔렸는지 대장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쳤다.
“뭐야? 수녀님 때문에 내가 왜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한다는 건가! 앙!”
“지금 우리 상황이 어떤지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차 실수라도 하면 목 잘린 시체가 되어 산속에 파묻힌단 말입니다. 이런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위태로운 상황 에서 연애질을 하실 생각을 하시다니. 더군다나 맺어질 가능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수녀하고 말입니다.”
“젠장! 나는 연애질을 하고 있는 게 아냐. 나도 충분히 고민했어. 그런 다음 결론을 내린 게 바로 이거야.”
대장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아 내며 말을 이었다. 그런 그의 말투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 나왔다.
“한 번 생각을 해 보게. 라이 저 녀석은 첩보원이라 의심하기에는 너무 어려. 우리 조직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어린놈을 첩보원으로 쓰겠나? 그리고 소피아 수녀님은 진짜 수녀가 맞잖나. 얼마 전에 치료마법 쓰는 거 너도 봤지? 더군다나 어리숙하다 느껴질 만큼 저렇게 순진한데.
성직자는 거짓말을 못한다. 특히 성직자가 믿고 있는 신의 이름을 걸고 심문을 할 경우 금방 정체가 들통난다. 그렇기에 음모와 귀계로 점철되어 있는 이쪽 계통에 서는 성직자를 첩보원으로 쓰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수녀에 대한 반박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수녀를 의심하자는 게 아닙니다. 제 말은 라이가 아주 의심스럽다는 말입니다.”
샘이 수녀를 첩자 용의선상에서 제외하자 대장의 짜증스런 어투가 슬그머니 부드러워진다.
“뭐가 그렇게 의심스럽다는 건가?”
“저놈 나이에 비해 실력이 너무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화살도 잘 쏘고, 게다가 도끼질도 제법…….?
샘의 주장을 듣던 대장은 고개를 흔들며 반박했다.
“나이에 비해 실력이 있긴 하지만, 그래 봐야 첩보원으로 쓰기엔 너무 어설퍼. 게다가 저놈, 몇 번씩이나 내게 살기를 품었다고. 생각을 해 봐. 저 녀석이 만약 첩보 원이라면 왜 같은 편인 내게 살기를 품겠어? 우리가 배신했다는 것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데 말이야.”
“일부러 그러는 것일 수도 있죠. 녀석이 조직 내 첩보원이라면 대장이 살기를 감지할 수 있는 실력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게 아닙니까. 그렇다면 가끔 대장을 향 해 살기를 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체를 완벽히 감출 수 있으니까요.”
샘의 말이 제법 그럴 듯 했기에 대장은 곧바로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라이를 첩자라고 의심하기에는 힘들었다.
대장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샘은 답답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사실 저놈을 첩자라고 의심하기 시작한 건 수녀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트리스티 패거리가 저놈을 처음 발견했을 때 당시 녀석은 오크를 생으로 뜯어먹고 있었다 고 했습니다. 제가 생존술(生存術)을 배울 때 몇 번 몬스터 고기를 먹어 봐서 잘 아는데…, 익혀도 역겨운 냄새 때문에 목구멍으로 넘기기 힘든 걸 생으로 씹어 먹다 니! 몬스터 고기는 저와 같이 특수 훈련을 받은 군인들도 맨 정신으로는 절대 먹을 수 없는 거란 말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팠다고 해도 그렇지, 과연 그걸 평범한 꼬 맹이가 먹을 수 있을까요?”
레인저는 산악전에 특화된 병과다. 적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는 것을 장기로 하는 만큼, 레인저 훈련에 있어 가장 중요시되는 것들 중 하나가 보급이 끊겼을 때를 대비한 식량의 확보였다. 무기가 망가지면 돌멩이나 몽둥이라도 들고 싸우면 되겠지만, 식량이 떨어지면 아예 싸울 수가 없지 않겠는가.
야생 속에서 살아남는 기술인 생존술에서 다루는 먹거리는 아주 다양했다. 열매나 초목은 물론이고, 꿈틀거리는 작은 곤충과 포악하기 짝이 없는 몬스터들까 지…….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먹기 힘든 게 바로 몬스터의 고기였다. 독이 있는 부분을 제거한다고 해도, 몬스터 특유의 누릿한 냄새는 너무나도 비위를 상하게 했었기에 입에 넣자마자 토하는 훈련병이 대다수였다. 때문에 생존술 훈련을 진행하는 교관들조차도 얼차려를 목적으로 던져 주던 것이 바로 몬스터 고기였다.
그 중 가장 지독한 냄새를 풍겼던 게 바로 트롤의 고기였었는데, 그때 기억이 떠오른 샘은 하마터면 헛구역질까지 할 뻔했다. 그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 다.
“저놈은 틀림없이 레인저 훈련을 받았을 겁니다. 그것도 아주 독하게. 그건 제가 보장하죠.”
이렇게까지 샘이 말하자 대장은 두 눈을 감고 차분하게 라이에 대한 기억들을 하나둘 떠올려 봤다. 만약 샘의 말처럼 라이가 전문적인 레인저 훈련을 받은 게 확실 하다면, 자신이 도망노예라고 한 건 새빨간 거짓일 가능성이 컸다.
생각해 보니 라이가 한 말들 중 앞뒤가 안 맞는 부분들이 꽤나 있었다. 노예병들에게는 활을 안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는 활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오 랜 시간 다루어 봤을 것으로 짐작될 만큼 활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그리고 보니 오크와 맞닥트렸을 때의 라이의 모습이 영 마음에 걸렸다. 일반적인 그 나이대의 아이라면 겁먹고 도망치는 게 보통이었을 텐데, 살기를 뿜어대며 오 크와 맞서 싸우지 않았던가. 게다가 당시 라이의 도끼를 다루던 솜씨는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노예상인에게 붙잡혀 노예병으로 키워지다 도망쳤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가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 금껏 무시해 왔다니……. 어쩌면 라이가 영악하기도 했지만 샘의 말처럼 수녀 때문에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렇기에 대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허, 참……. 이제 나도 은퇴할 때가 다 됐나 보군.”
자신의 말이 대장에게 먹혀들어갔다고 느껴지자 샘이 음침한 어조로 다그쳤다.
“당장 해치웁시다. 대장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꼬리를 달고 산맥을 넘어 탈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샘의 말 대로였다. 어쩌면 저 영악스러운 놈이 자신들의 배반을 눈치채고 상부에 보고라도 하는 날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대장은 싸늘하 게 굳은 표정으로 샘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라이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를 활을 움켜진 샘이 따라왔다.
라이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대장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샘을 향해 말했다.
“비 때문에 놈들의 흔적을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다행이야.”
대장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금방 눈치챈 샘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흐흐, 녀석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대놓고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 다면 이번 비로 흔적이 지워져 추적하기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능청스런 샘의 대답에 피식 웃은 대장은 이번에는 라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다 저 녀석 덕분이지. 라이가 아니었다면 놈들의 계략에 빠져 아직까지도 동굴 속을 뒤지며 헛수고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야.”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빗물에 씻어서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굽고 있던 라이. 그는 대장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두 사람이 빗속에서 꽤 오랜 시간 쑥덕거리고 있던 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얘기를 듣고 보니 도망자들을 어떻게 추적할 것인지에 대해 상 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 대장의 입에서 튀어나올 줄이야.
일행의 리더인 대장에게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켜졌다는 말과 같았으니까. 당연히 기분이 좋아진 라이는 대장과 샘이 가까이 다 가오자 흥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드실 수 있을 겁니다.”
“이거 기다리기 힘들 만큼 배가 고픈걸. 참, 수녀님.”
그 순간 라이로서는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등 뒤를 지나 수녀에게로 가는 듯하던 대장이 갑자기 그의 뒷통수를 검집으로 거칠게 후려쳤던 것이다. “컥!”
한방에 정신을 잃은 라이가 푹 쓰러지자 깜짝 놀란 수녀가 비명을 질러댔다.
“꺄아아악! 가,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욧!”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수녀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자 샘은 왈칵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젠장, 엄청나게 오버하네. 지금껏 여러 수녀들과 다녀봤지만 저 년만큼 호들갑 떠는 계집은 보다보다 처음이야. 만약 목이라도 잘랐으면 오줌을 질질 싸며 난리가 아니었겠군.”
하지만 샘과 달리 수녀에게 은근히 마음이 있던 대장의 반응은 달랐다. 대장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말해야 이 상황을 수녀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지 난감했던 것이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수녀님. 제가 이런 건 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이, 이유라니요?”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대장의 얼굴이 조금씩 어둡게 변해 갔다. 자신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하러 가는 길이라는 말에 수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 웠던 것이다.
이제 반역자로 쫓기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를 자신들인데 과연 흔쾌히 함께 가 줄까? 어쩌면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애꿎은 수녀까지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일이 다. 아무리 생각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해 줘야 할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대장은 차라리 지금 수녀에게 어느 정도까지는 말해 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수녀님,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라이를 기절시킨 건 놈이 감찰부의 첩보원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어서인지 소피아 수녀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가, 감찰부라면…, 왕실에서 일하는 사람이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마, 말도 안돼. 라이는 제게 분명 노예병이었는데 겨우 도망쳤다고 말했었는데요?”
대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까지 감쪽같이 속았는데 저 순진한 수녀가 영악한 라이를 의심하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죠. 라이는 레인저 교육을 받은 감찰부의 첩보원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수녀의 두 눈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역력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라이가 감찰부 첩보원이라는 것도 믿기지 않고, 만약 그 말이 맞다면 두 분과는 같은 왕실 소속 아닌가요? 부서는 말씀 하지 않으셨지만, 트리스티 일행을 추적하고 계신 걸로 보아 법무부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실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지방영주가 사병을 키워 치안유지를 하고 있기에 굳이 중앙에서 범죄자들을 처리해 주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법무부에서 하는 일은 재판관을 파견하여 각 영지를 돌며 순회재판을 열어 억울하게 잡혀 감옥에 들어가 있는 자들을 구제해 줬다. 물론,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형이 집행되어 버렸다면 어쩔 수가 없는 것이고……. 하지만 법무부에서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모반과 같이 국가 안보와 관련된 일이거나, 왕이 직접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린 경우에는 조 사관을 급파하여 증거를 수집하고 죄인들을 잡아들였다. 그렇기에 수녀는 두 사람이 법무부에서 파견 나온 게 아니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장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힘들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도 저놈과 같은 감찰부 소속입니다.”
소피아 수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급히 반문했다.
“예에? 같은 소속이시라구요? 그런데 왜……?”
“수녀님께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이 왕국을 떠나 다른 왕국으로 망명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이 녀석을 그냥 놔둘 수가 없는 거죠.”
대장의 말에 뭘 느꼈는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소피아 수녀는 목이 메이는 듯 어색한 음성으로 급히 물었다.
“설마, 라이를 죽이실…, 건가요?”
그러면서 쓰러져 있는 라이를 눈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피아 수녀. 어찌되었건 지금까지 생사를 같이 했던 동료였던 만큼 걱정이 되는 것이리라. 대장은 다 시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이 녀석이 감찰부에서 나온 게 맞는지 확인부터 해야겠죠. 수녀님은 여기서 편히 앉아 쉬고 계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대장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샘에게 명령을 내렸다.
“샘, 이놈을 밖으로 데리고 가 첩보원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 보도록.”
수녀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라이가 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 결국 처참한 죽음을 당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저, 대, 대장님. 잠시만요. 잠깐…….?
“예? 왜 그러십니까?”
수녀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배를 살살 만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긴장을 했더니 배가…….”
대장은 곧바로 수녀가 생리현상 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걸 눈치챘다.
“아, 그럼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소피아 수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한 뒤 비가 쏟아지고 있는 숲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처음에는 천천히 걸어가는 듯싶던 수녀가 갑자기 속도 를 올려 전속력으로 숲 속을 향해 내달리는 게 아닌가.
착잡한 표정으로 수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대장은 이런 수녀의 변화에 그저 멍하니 있었지만, 샘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자마자 주 저하지 않고 화살을 뽑아 수녀를 향해 연거푸 쏴댔다.
슉, 슉, 슈슉.
놀라운 속사 실력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간 화살들 중에서 한두 발 정도가 수녀의 몸을 꿰뚫은 듯 보였다. 하지만 수녀는 잠시 몸을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더욱 빨리 가속하며 순식간에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 짧은 순간에 50여 미터가 넘는 거리를 도망친 것만 해도 놀라운데, 신성마법을 사용하여 화살까지 막아내다니. 그것만 봐도 소피아 수녀의 능력이 어떠한지 짐 작할 수 있으리라. 결국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줬던 어리버리했던 모습이 모두 연극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움직임이었다.
자신의 화살 공격을 피한 수녀가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샘은 분통을 터트리듯 소리쳤다.
“이런 젠장할! 저년이었을 줄이야!”
소피아 수녀는 처음에는 은근슬쩍 달라붙어 이들의 행동과 위치를 상부에 보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이를 죽이지 않고 심문하겠다는 말에 생각을 바꿔 도주를 감행했다. 라이를 고문하다 보면 결국 자신이 첩자라는 것이 들통날 게 뻔했으니까.
이를 으드득 갈던 샘은 장비를 챙겨들며 대장에게 말했다.
“뒤쫓아 가서 저 잡년을 해치우고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소피아 수녀가 사라진 곳을 망연히 바라보며 서있던 대장은 샘의 말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뭐…, 뭐라고?”
“뒤쫓아 가서 해치우고 오겠다구요.”
수녀가 제아무리 첩자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숲 속에서는 레인저인 샘의 손바닥 안이었다. 가녀린 소피아 수녀가 샘이 쏜 화살에 맞아 숲속에 시체가 되어 뒹굴게 될 것을 생각하면 대장은 샘을 보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폭우가 내리는데 뒤쫓아 가겠다는 건가? 게다가 조금 있으면 완전히 어두워질 텐데.”
“겨우 수녀 나부랭이를 쫓는 일인데 큰 문제없습니다. 늦어도 내일 새벽까지는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처연한 음색으로 대꾸했다. 말을 하는 대장의 얼굴은 한순간 10년은 늙어 버린 듯 추레하게 변해 있었다.
“그냥 놔두게.”
“예? 설마, 저년을 이대로 살려 주자는 말씀이십니까?”
대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그녀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이따위 조직에 몸담고 있는 가엾은 여인일 뿐일세.”
샘은 답답하다는 듯 활로 숲속을 가리키며 대장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죄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디로 갈지 저년이 훤히 다 알고 있다는 게 문제란 말입니다. 만약 저년이 상부에 보고라도 하는 날에 는…….”
“보고를 한다 해도 별 상관은 없을 거야.”
“예? 그게 무슨…….”
“상부에서 우리가 배신한 걸 알았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을 거라는 말이지. 우리를 잡겠다고 청소부를 보내기에는 너무 늦었거든. 국경이 바로 코앞이지 않은가.” “하지만 마법사를 통해 공간이동 시키면 순식간이잖습니까.”
“자네가 잠시 잊어버리고 있나 본데, 왕도에서 이곳까지 공간이동한다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닐세.”
알카사스 전역에 공간이동 마법을 방해하는 역장이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이유는 제2차 제국전쟁과 마도전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륙이 뒤흔들릴 만큼 거대한 전쟁들을 겪으면서 알카사스는 기사단 전력에 있어 코린트나 크라레스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과거 코린트가 크라레스를 박살냈을 때 써먹었던 공간이동을 활용한 기습공격이라는 전술을 자신들이 당한다면 일격에 나라가 멸망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질 수 있었다. 그만큼 두 국가의 기사단 전력은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막강했던 것이다.
알카사스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법에서 찾아냈다. 드래곤들이 사막지역에 역장을 쳐서 인간들이 공간이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놨듯, 그들도 그와 유사한 시설들을 왕국 곳곳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물론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드래곤들이야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공간이동을 하겠지만, 실력이 떨어지는 인간 마법사들은 공간이동 중에 아차 하면 역장에 휘말 려 엉뚱한 곳으로 공간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운 좋게 생명을 건지는 사람도 간혹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땅속으로 공간이동을 해 시체조차 건지지 못하게 되었 다.
“하지만 본부에서 마법사 길드에 연락해 잠시만 역장 방출을 멈추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껏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말에 이렇게까지 반박을 하는 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지만 대장은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산맥에 파묻히기 싫은 것이리라. 아니, 단칼에 죽으면 차라리 낫다. 자칫 사로잡히기라도 하면 끊임없는 고문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할 게 뻔했다.
“샘, 날 믿게. 왕국 최고의 방어무기라고 할 수 있는 역장 방출을 멈추려면, 제아무리 감찰부라고 해도 마법사 길드가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를 대야 하지. 그 런데 그 이유를 뭐라고 꾸며대지? 그러다 자칫 조직 내에 배신자가 나왔다는 걸 길드가 눈치채기라도 하면 오히려 혹을 떼려다가 혹을 더 붙이는 꼴이 되는데 말이 야. 그렇기에 차라리 우리들에 대한 암살을 은밀히 의뢰하면 했지, 그런 무모한 짓은 절대로 못할 거야.”
공간이동을 할 수 없다면 감찰부의 킬러들이 여기까지 오는 데 굉장히 많은 시간이 소모되리라. 그리고 그들이 도착할 즈음에는 자신들은 이미 국경을 넘어 멀리 사라진 뒤일 터였다. 그렇기에 샘은 마지못한 척 활을 내려놓았다.
“쩝…, 대장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사실,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조건 속에서 수녀를 추격하여 죽인다는 게 레인저인 샘으로서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문제만 없다면 대장의 심기 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던 샘의 시야에 아직까지도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라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라이를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 녀석은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목을 따버릴까요?”
“그냥 놔둬. 감찰부에서 첩보원을 두 명씩이나 투입했겠나? 가뜩이나 인력도 모자랄 텐데…….”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구태여 저 녀석을 데리고 갈 필요는 없잖습니까? 이번 기회에 깔끔하게 정리를 하는 게…….”
잠시 처연한 눈빛으로 소피아 수녀가 도망간 숲속을 바라보던 대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얼굴 표정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어느 샌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휴우, 아냐. 그냥 놔두는 게 좋겠네. 트리스티 패거리도 3명, 우리도 3명. 혹시라도 청소부들이 우리 뒤를 쫓아온다면 혼란을 주기에 딱 좋지 않겠나?”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없애는 거야 국경을 넘어간 뒤에 해도 언제든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한동안은 동료인 척 이용해 먹어야 했기에, 샘은 쓰러져 있는 라이를 발로 대충 밀어 비교적 물기가 적은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모닥불가로 가서 라이가 굽던 돼 지고기를 집어 들고 다시 굽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지 고기를 굽는 샘의 입에서 연신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망할 년! 어쩐지 수상쩍더라. 동료들이 다 죽었다는데도 불구하고 놀(Gnoll)이 득실거리는 동굴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 말에 대장의 얼굴에 착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 지금 와서 그런 말 해 봤자 뭐하겠나?”
“그년한테 그렇게까지 감쪽같이 속은 게 너무 화나고 분통이 터져서 그럽니다.”
초보티를 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사랑에 빠진 듯 미인계까지 쓸 줄이야.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꼬리를 살랑살랑 쳐대니 대장 같은 목석까지도 홀랑 넘어간 것 이리라. 청소부 노릇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대장이었지만, 설마 그녀의 그런 행동이 계산된 것일 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왜냐하면 상대는 신을 받드는 사제였으니까. 그것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이때, 라이가 부시시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아이고, 뒷골이야…….”
라이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뒤통수 쪽을 문지르다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뭔가가 내 뒤통수를 친 것 같은데……?”
샘은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이죽거렸다.
“절벽 위쪽에서 돌덩이가 떨어졌다. 그나마 뒤통수에 혹 하나 생긴 걸로 끝난 것을 대지의 여신께 감사해라. 만약 돌덩이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네 대갈통이 박살 났을 테니까.”
“허걱!”
깜짝 놀란 라이는 허둥지둥 투구를 꺼내 머리에 덮어썼다. 그리고는 절벽 위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물탓에 위쪽을 관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배고플 텐데 멍청하게 있지 말고 이거나 먹어.”
샘이 건네주는 구운 돼지고기를 받던 라이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근데 수녀님은 어디 가셨어요?”
“몰라. 배가 아프다며 밖으로 튀어나가셨는데…….”
“저 빗속으로요?”
라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자 샘은 콧방귀를 뀌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우리들 눈요기하라고 여기서 허연 엉덩이를 드러내고 싸시겠냐?”
그것도 그렇기에 라이는 돼지고기를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불에 구워서인지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과 함께 구수한 고깃국물이 입안에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돼지고기 육포만으로는 배가 차지 않을 것 같아 뭐 먹을 게 있나 배낭을 뒤지려 할 때였다.
그때까지 비오는 숲쪽을 침울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묵묵히 앉아 있던 대장이 갑자기 라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게 좋겠지. 라이, 네가 알아 둬야 할 게 있다.”
대장은 담담한 어조로 얘기를 꺼냈다.
“사실…, 우리는 감찰부 소속 사람들이다. 왕실 직속이지.”
감찰부라는 데가 뭐하는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라이였기에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왕실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요.”
감찰부라는 말까지 해 줬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대장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
“너, 감찰부가 뭐하는 곳인지 제대로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당연히 모르는 라이였기에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글쎄요, 잘…….?
“하기야, 모를 수도 있지. 무식한 용병에게 뭘 바라겠냐.”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쉰 후 감찰부가 하는 일이 뭔지 간단히 설명했다. 강대한 권력을 지닌 기관이나 개인에 대한 감시나 감독을 하는 게 감찰부에서 하는 일이라 고.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력을 지닌 기관이 바로 감찰부였던 것이다.
“우와, 정말 대단한 분이셨군요.”
말 몇 마디 했을 뿐인데도 두 눈 가득 존경심을 듬뿍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라이의 눈빛에 대장은 씁쓸한 미소를 감추기가 힘들었다. 저런 촌무지렁이 따위를 첩자 라고 오판했다니. 정말 은퇴할 때가 되었다고 대장은 생각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 어차피 우리들은 상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었으니까 말이야.”
“꼬, 꼭두각시요?”
“그래, 그 표현 그대로지. 상부에서 시키는 일이 정말 옳은 것인지, 아니면 권력자와 야합을 한 결과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꼭두각시 말이야. 사실, 지금 우리가 쫓고 있는 트리스티 백작가의 경우도 정말 반역을 꾸민 게 맞는지조차 전혀 모르거든.”
“그, 그럴 수가…….”
어이없어 하는 라이의 표정에 대장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행동대원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웃기는 노릇이지. 행동대원은 그저 상관이 시킨 대로만 행할 뿐, 다른 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배웠으니까. 하기야, 다른 생각을 할 만한 정보조차 주어지지 않긴 하지만 말이야.”
그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샘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는 라이가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가며 말했다.
“우리와 같은 하급 대원들은 트리스티 백작가의 잔당들을 잡으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또는 어디로 도주하고 있는지 그 경로만 알면 그 것으로 충분해. 그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까지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단 소리지. 그건 우리보다 높은 직급의 상관들의 몫이거든. 안 그래?”
“그, 그건 그렇죠.”
알아듣기는 한 것인지 라이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대장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음성은 착잡함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내가 지금껏 적지 않은 세월동안 감찰부에서 일해 왔지만, 첩보원과 직접 접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윗쪽에서 내린 지시대로 행동할 뿐이지, 첩보 원에게서 직접 정보를 들을 수는 없거든.”
“처, 첩보원이요?”
라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자 대장은 부연 설명을 해줬다.
“흠, 감찰부에는 여러 부서가 있는데 그 중에는 각지에서 정보를 취합하여 보고하는 첩보원과 우리처럼 죄인을 추적하여 체포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없애 버 리는 일을 하는 청소부가 있지.”
맡은 임무만 다를 뿐,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차피 같은 감찰부 소속인데 왜 그렇게까지 첩보원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지 라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런 라이의 모습에 대장은 또다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런 첩보원을 너도 만났었지. 바로 소피아 수녀 말이야. 사실 그녀가 트리스티 패거리의 움직임을 감시해서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던 첩보원이었거든.” 대장의 말에 라이는 순간 망치로 머리통을 한대 맞은 것처럼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좋게 말하면 순진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한 수녀가 감찰부 첩보원이었을 줄이야.
“노, 농담이시죠?”
“믿기 힘든 모양인데 나도 얼마 전에야 겨우 알았지. 그만큼 아주 교활한 계집이야. 순진한 척 시간을 끌면서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나, 얼토 당토않은 이유를 대면서 우리와 합류한 것이나…….”
그 말에 라이는 다급히 의문을 토해냈다.
“잠깐만요. 대장님 말씀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좀 이상하잖아요. 소피아 수녀님이 트리스티 패거리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거기에 잠입해 계셨던 거라면, 그들과 떨어져 나온 것으로 임무는 종료된 거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대장님과 함께 여기까지……?”
“네 말이 맞다. 그녀는 우리에게 직접 정보를 줄 수 없어. 그리고 추적이라면 그녀보다는 샘 쪽이 훨씬 뛰어나지. 그런데도 굳이 우리와 합류하는 길을 택했다면 그 이유가 뭐겠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떠올리기 힘들자 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러자 옆에 있던 샘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것도 몰라?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서일 게 뻔하잖아. 아마 위쪽에서 지시를 받은 것이겠지.”
샘의 생뚱맞은 말에 라이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감시라고요? 대장님도 감찰부라면서요. 그런데 왜 같은 식구를 감시한다는 겁니까?”
라이의 질문에 씁쓸한 미소를 짓던 대장은 잠깐 입술을 질끈 깨문 뒤 씹어뱉듯 말을 토해냈다.
“난 은퇴할 때가 다 된 몸이야. 그리고 샘도 그건 마찬가지지. 너에게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만…, 감찰부에서 나 같은 청소부를 그대로 은퇴시켜 줄 거 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그래야죠. 그동안 열심히 충성을 다하신 거에 대한 대가이지 않습니까?”
“그래, 네 말대로 몇십 년을 충성을 다해 일을 했지. 그런데 우리 알카사스는 다른 나라하고 다른 점이 하나 있단다. 그게 뭐냐 하면, 원로원의 힘이 너무 강하다는 거야. 거의 왕권에 필적할 정도지. 우리 신세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라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랬기에 아무 말 없이 그저 대장만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 네게 감찰부에서 하는 일이 뭔지 설명해 줬었지?”
“예.”
“다른 나라들처럼 왕권이 막강하다면야 비리를 저지른 단체나 사람을 국왕이 징계하면 끝나는 일이야. 하지만 그들이 국왕과 맞먹는 힘을 가진 원로원과 관계가 있다면? 그때는 감찰부에서 국왕에게 조사 결과를 보고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그것들을 비밀리에 처리해 버리는 거야. 이렇게.”
그러면서 대장은 자신의 목을 손가락으로 휙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런데 그런 사실이 원로원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그 말은 라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원로원에서 알면 큰일나겠네요. 안 그래도 왕권하고 맞먹는 힘을 가졌다고 했으니…….
“네 말이 맞다. 증거만 있다만 그런 감찰부를 원로원에서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여기까지 말한 대장은 침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하지만 그건 라이에게 건넨 질문이라기보다는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되씹어보려는 듯한 느낌이 더 강했다.
“이제 왜 감찰부에서 몇십 년 동안 충성을 다한 우리를 고이 은퇴시켜 주지 않고 죽이려고 하는지 이해를 하겠냐? 그리고 첩보원을 시켜 우리를 감시하게 했는지 도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대장과 샘은 아무 말 없이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봤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그들 사이를 짓눌렀다. 침중한 표정으로 불빛을 바라보던 대장은 힘겹 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은 대장이 8년 전쯤에 하달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당시 대장과 샘은 한적한 시골에서 농부로 위장한 채 암약하고 있는 적의 첩자를 처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전까지의 사냥감들처럼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다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이번 사냥감은 좀 달랐다. 샘이 장거리에서 은밀하게 저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 감지능력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기습을 했는데도 성공을 못하고 오히려 반격을 당한 것이다.
곧이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자칫 샘이 그자의 손에 목숨을 잃을 위기까지 겪어야 할 만큼 농부로 위장한 중년사내의 실력은 뛰어났었다. 이에 도주로를 차단 하고 있던 대장까지 달려와 합류해서야 겨우 중년사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마지막 명줄을 끊기 위해 다가간 대장에게 중년사내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충격적인 말을 해줬다. 그건 그 중년사내가 적국의 첩 자도 아니었고, 죄인이거나 반역자도 아닌, 대장과 똑같은 감찰부의 사냥개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것도 이제는 은퇴한……. “감찰부에서는 그가 알고 있는 비밀이 혹여 원로원파의 귀로 흘러들어갈까 우려하여 없애 버리려 한 것이다. 죽은 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법이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지금 대장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는 정보부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원래 감찰부는 감시하고 조사한 결과를 국왕에게 보고만 할 뿐, 그에 대한 처리 를 할 권한은 지니고 있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알카사스의 왕실에서는 멀쩡한 정보부를 놔두고 왜 감찰부까지 킬러를 운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까? 그 이유는 막강한 힘을 지닌 원로원 때문이었다. 알카사스 마법사들의 대다수를 회원으로 거느리고 있는 마법사 길드를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 정보부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 다 속속들이 원로원의 귀에 들어가 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렇기에 왕실에서는 자신들이 은밀히 움직일 수 있는 정보단체가 필요했고, 그래서 만들어낸 해답이 감찰부의 보강이었던 것이다. 감찰부는 국왕 직속의 기관이었으니까.
대장의 설명을 듣고 난 라이는 놀라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리고 대장과 샘이 감찰부를 벗어나 타국으로의 망명을 원하고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샘도 나도 이제 슬슬 은퇴할 나이가 되어가지. 결국 임무를 수행하기 힘들어지면 8년 전 그 중년사내처럼 누군가의 손에 의해 싸늘한 시체가 될 걸세. 그런 사실 을 뻔히 알면서도 죽음의 길로 달려갈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 이번 임무는 우리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기회야. 반역자들 을 추격한다는 핑계로 산맥을 뚫고 지나가다 몬스터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처럼 위장할 수도 있고, 잘만하면 국외로 도주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감찰부는 국내에 서야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지만 타국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거든.”
“그럼 국경만 넘으면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샘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을 해줬다.
“젠장! 겨우 한숨 돌리는 정도지, 그걸로 안심할 수는 없다. 그동안 우리가 감찰부에서 행한 숱한 임무들 때문이라도 놈들이 우릴 가만 놔두겠냐? 당연히 우리의 흔적을 쫓아 암살자를 보내거나 뭔 수를 쓰겠지. 어쩌면 평생 쫓기며 살아야 할지도 몰라.”
라이는 두 사람이 이런 얘기까지 왜 자신에게 해 주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뭘 떠올렸는지 급격히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저한테 그런 걸 얘기해 주는 이유가 뭐죠? 이제 저를 죽이시려는 건가요?”
샘이 힐끗 대장을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묵묵히 모닥불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저는 한낱 도망노예라구요. 대장님과 샘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감찰부에 고발할 수도, 할 생각도 없어요. 게다가 저 역시 용병대에서 보내올 추격자를 피해 타국으로 도망쳐야 할 판이라구요. 전 그저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단 말입니다.”
라이의 울먹거리는 말투에 대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우, 죽이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단지 우리 사정이 이렇다는 걸 그저 말해 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이때, 샘이 슬쩍 활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야기를 하던 중 추격자에 대한 말이 나온 뒤부터 그의 얼굴에는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 정도 쉬었으니 슬슬 출발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주위는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좍좍 퍼붓고 있는 중이다. 대장은 밤하늘을 올려보다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금 움직이기에는 너무 상황이 안 좋아. 차라리 푹 쉰 뒤 내일 아침에 움직이는 게…….”
하지만 샘은 대장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거칠게 반박했다.
“이러다 그 망할 년이 세브롱 요새로 달려가서 지원요청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폭우를 뚫고 가려면 좀 힘들기는 하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산맥을 넘는 게 최선입니다.”
알카사스는 크라레스 제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몰몬트 산맥 주변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광활한 산맥에 대한 순찰은 필요했고, 그 필요 에 의해 세브롱 요새에 1개 분대급의 기사단 분견대(分遣隊)를 주둔시켜 두고 있었다.
조급해 하는 샘의 심정을 다 안다는 듯 대장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세브롱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단은 원로원파야. 수녀가 머리통에 망치라도 맞지 않고서야 거기에 찾아가서 도움을 청할 리가 없지.”
“하지만 감찰부의 이름으로 협조를 요청한다면, 시시콜콜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그래듀에이트 한두 명 정도 지원받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거 아닙니까?” 이에 대장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자네는 기사단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군. 비록 변방에 처박혀있는 기사단 분견대라고는 하지만 감찰부라는 이름에 덜덜 떨 만큼 나약한 곳이 아니야. 게다가 첩보원 주제에 제대로 된 감찰부 신분증을 몸에 지니고 있을 리도 없지 않겠나. 자신의 신분도 제대로 증명할 수 없는 수녀의 말 몇 마디에 그래듀에이트들이 움직 일 거라고 생각하나? 오히려 감찰부를 사칭한 죄로 그녀를 지하감옥에 처넣어 버리겠지. 그런 상황에서는 감찰부에서도 어떻게 할 방법도 없을 테고 말이야.”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저 마법통신을 쓰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감찰부 쪽과 채널이 연결되기만 하면……..”
처음에는 격정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토로하기 시작했지만 뭘 느꼈는지 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기만 했다. 대장은 그런 샘의 모습을 바라보다 피식 웃더니 천천 히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 생각대로야. 그러다 자칫 우리들에 대한 정보가 원로원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점이지. 그렇기에 그녀가 세브롱 요새로 가서 지원을 요청하거나, 마 법통신을 하지는 못할 거라는 걸세.”
샘도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불안감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대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부연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감찰부 소속인 우리들이 배신을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세브롱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우리를 붙잡더라도 절대로 감찰부에 넘겨 주진 않을 거야. 너무 반항이 심해서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둘러댄 뒤, 곧바로 원로원 쪽에 넘겨줄 테지.”
“아, 아무리 그래도 감찰부를 상대로 그런 거짓말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우리가 감찰부 소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거라는 데 내 목을 걸어도 좋네.”
은퇴한 킬러들을 감찰부에서 죽이는 이유가 뭐겠는가. 그들이 그동안 수행했던 숱한 임무들 중에는 차마 세상에 공표하기 힘든 추악한 비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감찰부의 비리, 아니 왕실의 비리가 왕권을 위협하고 있는 원로원의 귀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했다. 그런 감찰부였기에 두 사람을 잡는답시 고 원로원파에 속해있는 세브롱의 기사단에 협조 요청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샘도 납득이 되는지 더 이상의 반론은 제기하지 않았다.
“나 같은 청소부도 이런 사실을 아는데 첩보 교육을 받은 수녀가 그걸 모를까. 그녀는 절대로 세브롱 요새로는 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오늘은 마음 편히 푹 쉬고, 내일 날이 밝은 후에 출발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