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3권 10화 – 기사의 최고의 로망

기사의 최고의 로망

마도왕국 알카사스를 움직이는 실세가 국왕이 아니라 원로원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원로원이 지닌 힘은 마법사들에게서 나온 다. 왕국 내 마법사들의 대부분을 회원으로 거느리고 있는, 마법사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단체인 마법사 길드가 원로원이 지닌 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길드에서 성 장한 마법사들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가 바로 원로원 의원이었기에 그런 권력의 고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마법사 길드장. 그런 그에게 커다란 공로를 세울 기회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원로원 직속의 비밀연구소 들 중 한곳에서 길드 본부에 협조 요청을 보내온 것이다. 비밀연구소에 침투하려고 한 첩자들을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길드장은 중앙지구장에게 그 일을 맡겼다. 자신도 공을 세우고, 또 자신의 오른팔인 중앙지구장도 공을 세울 수 있도록. 그래야 자신이 원로원으로 들어갈 때 그가 길드장이 되어 자신의 뒤를 받쳐 줄 수 있을 게 아닌가.

명령을 받은 중앙지구장은 곧바로 엄청난 현상금을 내건 뒤 휘하 길드원들을 총 동원해 몰몬트 산맥 주변을 샅샅이 뒤져 비밀연구소에 접근했음직한 모험가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수색에 투입한 마법사의 숫자만 무려 5백여 명. 마법사 한 명당 몇 개의 마을만 살펴보면 산맥 전체의 마을을 다 훑어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인 원이었다. 더군다나 마법사들은 기동성이 좋다. 각자 공간이동 마법을 통해 꽤 먼 거리까지도 이동이 가능했으니까.

물론, 왕국 내에는 개인이 임의로 공간이동을 하려면 커다란 제약이 뒤따른다. 왕국 곳곳에 빈틈없이 세워진 마법탑에서 역장을 방출하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왕 국 내의 모든 마법탑은 길드의 손아귀에 있었다. 공간이동에 방해가 되는 마법탑들에 연락을 보내 잠시 역장 방출을 중지시키면, 최단시간 내에 마법사들을 필요한 지점으로 공간이동을 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마을에 도착한 마법사가 가장 먼저 뒤질 곳이 여관일 것은 뻔한 일. 이런 상황에서 타지에서 들어온 투숙객을 잡아내지 못하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수상쩍은 타지 사람을 가장 먼저 찾아낸 것은 ‘스틴’이라는 마법사였다. 그는 곧바로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런 다음 그가 두 번째로 통신을 보 낸 사람은 자신의 친구였다. 자신의 행운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야, 엉뚱한 곳에서 헛물켜지 말고 이쪽으로 와.”

「무슨 헛소리야. 나 지금 바빠.」

“바쁜 소리하고 자빠졌네. 거긴 아무리 뒤져 봐야 나올 게 없거든.” 수정구 속에 비치고 있던 친구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혹시 상부에서 무슨 연락이라도 받았냐?」 “에헴! 그게 아니라, 그놈을 조금 전에 내가 찾아냈다는 말씀이지.”

친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거 정말이냐?」

스틴은 짐짓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당근이지.”

「이런 빌어먹을! 좋겠다. 좋겠어.」

부러워하는 친구에게 스틴은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 일도 없을 텐데 이쪽으로 넘어와라. 나랑 같이 있다 보면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스페슈라라는 마을이야.” 「스페슈라?」

“응?”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간다.」

몰몬트 산맥에 도착한 중앙지구 소속 마법사들은 자유자재로 공간이동 마법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타국에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초대형 마법진을 통해 생산 된 대량의 마나가 집결되는 장소인 마법탑에서만 공간이동 마법을 방해하는 역장을 뿌릴 수가 있다. 즉, 마법탑이 없는 이런 산골짜기에서는 자유롭게 공간이동 마 법을 쓸 수가 있다는 말이다.

잠시 후, 스틴의 말에 부리나케 공간이동 마법을 통해 현장에 도착한 친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놈 어디 있냐?”

“어디긴 어디겠어. 저기 보이는 여관에 있지. 무려 5일 동안, 밥 먹을 때 외에는 방 안에서 꼼짝도 안하고 있었단다.”

“이런 젠장! 기왕이면 내게 배정된 마을에 숨어 있을 것이지, 하필이면 이곳에 숨어 있을 게 뭐람. 그런지도 모르고 샅샅이 뒤지고 다니느라 개고생만 했네.” 연신 투덜거리는 친구의 모습에 스틴은 입 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환히 웃으며 말했다.

“흐흐, 행운의 여신께서 날 보고 방실방실 웃고 계시나 봐. 상금을 받게 되면 뭘 할까나? 그동안 돈이 없어 해 보지 못했던 실험이나 원 없이 해 봐야겠다.”

“쩝, 게다가 이번 일로 지구장님께 눈도장 확실하게 찍었을 테니. 부럽다, 부러워.”

스틴의 행운에 입맛을 다시던 그는 여관을 향해 ‘뷰 마나 포스(View Mana Force)’를 사용하여 목표물을 구경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잡힌 것은 일반적인 시민들뿐이었다.

“없는데? 네가 까불고 있는 동안에 혹시 놈이 도망쳐 버린 거 아냐?”

친구의 지적에 스틴은 ‘그러니 네가 안 되는 거야’ 라고 말하듯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쯧쯧, 첩자들을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하긴, 나도 하마터면 그놈을 놓칠 뻔했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으로는 놈의 기척을 잡아낼 수 없어. 아마도 기척을 숨기는 마법 따위를 쓰는 모양이야.”

“그럼 ‘뷰 매직 포스(View Magic Force)’를 쓰면 되잖아?”

스틴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것도 안 통해.”

“그렇다면 대탐색마법(對探索魔法) 2가지를 동시에 쓰고 있다는 말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기까지 말하던 친구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스틴에게 다급히 물었다.

“혹시 첩자가 마법사 아냐?”

“아니야. 내가 패밀리어를 집어넣어서 확인까지 했어. 잘 발달된 근육을 지닌 건장한 사내놈이더라고. 내가 그런 기본적인 것도 확인해 보지 않고 상부에 보고를 했겠냐?”

“흠, 그렇다면 그놈이 틀림없…….”

여기까지 말하던 친구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갑자기 뭔가 떠오른 것이다.

“야, 너 저 녀석이 5일 동안 줄곧 여관 안에만 처박혀 있었다고 했지?”

“응. 그 덕분에 찾는 게 쉬웠어. 여관에서 일하는 꼬마 녀석이 오랜만에 찾아온 장기 투숙객이라며 떠벌여댔었거든.”

“설마…, 그 5일 동안 계속 마법도구를 돌리고 있었던 거 아냐?”

친구의 말에 스틴의 안색도 창백하게 질렸다.

“허걱! 그, 그렇구나…….”

5일 밤낮으로 마법도구를 구동시킨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법도구를 구동시키려면 엄청난 마나가 지속적으로 소비되기 때문이다. 그런 마나를 감당 할 수 있다면 검사의 실력도 상당해야 하겠지만, 최고급 마법도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효율이 나쁜 싸구려 마법도구라면 제아무리 그래듀에이트급 실력자라고 해도 채 1시간도 구동시키지 못하고 마나가 고갈될 게 뻔했으니까.

마법도구의 가격은 효율이 좋을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비싸진다. 그런 엄청난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인물이 하찮은 자일 가능성은 없다. 한번 쓰고 버리는 그런 소 모용 첩자 나부랭이는 절대로 아니라고 봐야 했다.

스틴은 다급히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 상급자를 찾았다. 이 사실을 알리고 좀 더 많은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호크 기사단 몰몬트 분견대장 스트론은 최근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고 느낄 정도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망할 놈의 동부지구장으로부터 받은 청탁 때문이었다.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덥석 받아들였는데, 그게 탈이었다. 예상외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도튼이 엉뚱한 놈들을 잡아온 탓에 금쪽같은 반나절을 날려먹기까지 했다. 각 도시에 설치되어 있는 영구적인 공간이동 마법진을 통하지 않고서는 공간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제약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시간적 여유는 길게 잡아 봐야 채 이틀도 되지 않는다.

몰몬트 산맥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공간이동 마법진이 갖춰진 도시까지 공간이동한 후, 역장이 미치지 않는 거리까지만 이동하면 그 이후부터는 마음껏 공 간이동 마법을 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감찰부에서 보낸 추격조가 지금쯤 산맥 어딘가에 도착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들이 용기사들보다 빨리 배신자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 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자들에게도 눈이 달려있는 이상, 하늘 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용기사들을 봤을 거라는 게 문제였다. 그것도 감찰부에서 찾고 있는 자들과 스트론이 찾는 자들이 같으니, 한 지역에서 모두 다 만나게 될 게 아니겠는가. 왜 용기사들이 총출동하여 그쪽 지역을 집중적으로 뒤지고 있었느냐고 감찰부에서 의문을 제기해 온 다면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까? 스트론으로서는 골치가 아픈 문제였다.

이때, 마법사 한 명이 통신실에서 헐레벌떡 달려왔다.

“빠, 빨리 통신실로 오시랍니다.”

통신실이라는 말에 스트론은 용기사들 중 하나가 배신자들을 포획한 줄 알았다. 그는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렇게 애를 먹이더니 결국에는 잡혔군. 그래, 누가 잡았나? 핫핫핫, 포상을 두둑이 해야겠구만.”

스트론의 질문에 마법사는 난처하다는 듯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게 아니라 부단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부단장이 찾는다는 말에 미소를 짓고 있던 스트론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어떤 놈이 큰 일도 없는데 와이번을 떼거리로 내보냈다고 밀고라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젠장,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스트론은 허둥지둥 통신실로 달려갔다.

통신실에는 선임 마법사와 당직 마법사 두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스트론이 들어오자 선임 마법사는 수정구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대장님.”

선임 마법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정구 안에는 회색 제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의 상반신이 입체적으로 비치고 있는 중이었다. 수정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까 칠한 인상의 중년인. 신참 마법사를 두려움에 질리게 만들었을 정도로 매서운 눈매의 인물이다. 만약 그에게 융통성이라는 게 조금만이라도 있었다면 단장이 되고 도 남았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사내인 만큼,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스트론은 재빨리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수정구 앞에 섰다. 괜한 꼬투리 잡히지 않도록.

“안녕하셨습니까, 부단장님?”

「귀관에게 지시할 게 있어서 찾았다네.」

지시할 게 있다는 말에 스트론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곧바로 아부성 짙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 거라면 당직 마법사에게 통보만 해 주셔도 되는데.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별일은 아닐세.」

부단장은 방금 전에 마법사 길드로부터 지원요청이 들어왔음을 알렸다. 길드 쪽의 말에 의하면, 첩자 하나가 기어들어왔는데 아무래도 그래듀에이트급 실력자인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듀에이트를 상대로 마법사가 근접전을 벌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런 만큼 그자를 제압하기 위해 그래듀에이트 네 명만 지원 해 달라는 것이다.

“지원을 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부단장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임무의 지휘권은 길드 쪽이 가지고 있는 거로군요.”

부단장은 스트론이 왜 그런 말을 꺼낸 것인지 곧바로 감을 잡았다. 그가 알고 있는 스트론은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아부꾼이었으니까.

「귀관의 말대로 지휘권이 길드 쪽에 있는 건 사실이라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혹시라도 그 자를 놓쳤을 때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지.」

여기까지 말한 부단장은 목소리를 한층 낮게 깔면서 무시무시한 음색으로 명령했다.

「길드 놈들 앞에서 만약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내가 자네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알겠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자를 잡도록 하게!」

부단장의 호통에 스트론은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사력을 다해 도망치려고 드는 놈을 생포하겠답시고, 어설프게 공격해서는 도저히…….”

만에 하나, 혹시라도 모를 일이 생길 것에 대비해 미리 빠져나갈 길을 만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스트론의 모습에 부단장은 왈칵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생포가 힘들다면 죽여도 돼. 어쨌거나 기사단 망신을 시키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돼. 알겠나?」

더 이상 빠져나갈 방법이 없자, 스트론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옛, 부단장님.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게.」

마지못해 고개를 조아리는 스트론을 향해 잠시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던 부단장은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을 끊었다. 수정구에서 부단장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스트 론은 불쾌하다든 듯 툴툴거렸다.

“젠장. 대충 잡는 시늉만 하려고 했더니, 저 영감이 어떻게 눈치를 채고……. 그래듀에이트 넷 정도 보냈다가 잘못되면 나만 왕창 깨지게 되는 거잖아. 부단장이 직접 저렇게까지 말을 했으니 말이야.”

보신(保身)을 삶의 제1신조로 삼고 살아오던 스트론이었기에 자칫 첩자를 놓치게 될 상황이 벌어질까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옆에 서있던 선임 마법사가 피식 웃 으며 조언했다.

“잘못될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대장님. 길드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였으니 스페슈라 마을 일대에는 마법사들이 이미 쫙 깔려 있을 게 뻔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들 이 주문을 외울 시간만 벌어 주면 될 겁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걱정이 좀 되는군.”

잠시 주위를 서성이며 고민을 하던 스트론이 불쑥 물었다.

“지금 맷은 어디에 있지?”

맷은 그의 휘하에 있는 네 명의 오너들 중 하나였다.

“그는 왜 찾으십니까?”

“맷에게 그 임무를 책임지고 완수하라고 해. 그래듀에이트만 넷 보내기에는 안심이 안 돼.”

이때 수정구들 중 하나가 번쩍번쩍 점멸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접속을 요청해 오고 있는 것이다. 당직 마법사가 수정구 위에 손을 쓱 올려 채널을 열자 상대방의 모습이 수정구 안에 나타났다. 그는 길드에서 일하는 마법사들이 착용하는 정식 제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당직 마법사는 한눈에 상대의 지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고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호크 기사단 몰몬트 분견대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분견대장을 바꿔 주게. 급히 전할 말이 있다네.」

아직 통신실 안에 있었던 스트론은 당연히 그 얘기를 들었다. 당직 마법사를 옆으로 슬쩍 밀치며 수정구 앞에 자리 잡았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상대 마법사는 스트론에게 인사를 건넨 후, 방금 전에 입수된 특급 정보를 전했다. 자신들이 제압하려고 하는 자가 그냥 그래듀에이트도 아니고 오너일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분견대 전력을 모두 동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너라는 말에 스트론은 긴장해서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방금 한 말, 책임지실 수 있소?”

자신의 말을 불신하는 듯하자 상대방 마법사는 불쾌하다는 듯 대꾸했다.

「물론이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들어 귀하에게 증원을 요청하지는 않소. 긴급을 요하는 일이오. 최대한 빨리 지원을 해 주길 부탁드리오.」

‘오너’라는 말에 스트론의 이성이 마비되었다. 오너라면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들 중에서 타이탄을 지급받은 자를 말하는 단어가 아니던가.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 혀 있다 보니 오너 급 기사와 격투를 벌일 수 있는 기회가 올 거라고는 기대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런 기회가 굴러 들어온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한 스트론은 선임 마법사에게 다급히 지시했다.

“최대한 빨리 대원들 전부 다 집합시켜. 외출, 외박 나간 녀석들도 모두 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산맥 쪽으로 나가 있는 용기사들도 모두 다 스페슈라 마을 근처로 집결하라고 해.”

선임 마법사는 스트론의 명령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지금 그들은 배신자들을 수색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용기사들을 모두 빼 버리면 배신자들에 대한 수색이 완전히 중단된다. 자칫 동부지구장의 청탁을 들어주지 못하게 되면, 상관이 적잖은 불이익을 받게 될 수도 있 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미 타이탄 사냥에 눈이 뒤집힌 스트론에게 그 말은 씨알도 먹혀들지 않았다.

“괜찮아. 그건 이 일이 끝낸 후에 다시 시작해도 돼. 그래 봐야 오늘 하루만 수색을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지금은 첩자 놈을 잡을 수 있도록 분견대의 전력을 다해 야 한단 말일세. 자칫 놈이 포위망이 구축되기도 전에 도망이라도 치면 문책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란 말이야. 알겠나?”

외부로 나가 있는 대원들까지 모두 집합시켜 스페슈라 마을로 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혹시라도 놈이 도망이라도 치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것이다. 아 니, 자신의 모가지까지 위태로울 수도 있는 일이다.

“대장님의 말씀도 옳으십니다만, 그래도 용기사들을 전부 다 철수시킬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동부지구장이 직접 부탁을 한 일이니 만큼, 한두 명 정도는 계속 수 색 작업을 하게 놔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흠, 그것도 그렇군. 알겠네. 그건 자네 마음대로 하게. 참, 용기사들 보고 스페슈라 마을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이 있는지 철저히 감시하고 보고하라고 해. 포위망이 갖춰지기 전에 놈이 도망치면 큰일이니까 말이야.”

“예, 지금 즉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신도 출동 준비를 하기 위해 다급히 통신실을 나가려던 스트론은 고개를 뒤로 돌리며 선임 마법사에게 덧붙여 말했다.

“아, 참! 그놈들 보고 스페슈라 마을 근처에는 절대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주의도 빠뜨리지 마! 알겠나? 행여 첩자 녀석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허둥지둥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스트론은 검대에 걸려 있던 검부터 허리에 찼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대륙 전체를 뒤흔들었던 전쟁이 끝 난 지 이미 오래다. 당연히 적을 제압하여 공을 세울 수 있는 일 자체가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오너를 잡을 수 있는 이런 엄청난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오 다니. 게다가 첩자는 꼴랑 한 명인데 반해 이쪽은 자신을 포함해 오너만 다섯 명이다. 더군다나 마법사 길드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받을 수 있으니 도저히 실패할 수 가 없는 임무인 것이다.

첩자인 오너를 잡게 된다면 진창에 빠졌던 스트론의 인생도 완전히 바뀌게 될 것이다. 스트론이 흥분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집무실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집무실 문이 활짝 열리며 외출복 차림의 사내 하나가 씩씩거리며 실내로 들어왔다.

“아니, 무조건 집합하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오늘 외박할 거라고 며칠 전부터 말씀드렸고, 대장님께 직접 허락까지 받지 않았었습 니까?”

신경질적인 사내의 말에 스트론은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검을 쓰다듬었다.

“흐흐, 첩자 한 마리가 우리 구역에 들어왔다. 놈을 사냥하라는 상부의 지시야.”

사내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겨우 첩자 한 명 때문에…….”

“아, 그런데 그놈이 오너 급이라고 하더군.”

스트론의 말에 화가 잔뜩 난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오너 급이라고요?”

“그래.”

오너 급이라는 말에 사내의 눈에 참을 수 없는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이곳에 배치된 이래 언감생심, 감히 꿈조차 꾸지 못하고 있었던 일이다. 적 타이탄의 목을 베 는 것이 타이탄을 지급받은 기사에게 있어서 최고의 로망인 이유는, 그 한방으로 출세길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런 탐스러운 먹잇감이 손아귀에 들어왔는데 그까 짓 계집과의 약속 따위 뇌리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이번 임무로 팔자가 바뀌게 생겼는데…….

이곳 분견대에 배치된 오너의 숫자는 분견대장 스트론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명이다. 상대가 타이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숫자상으로 5대 1의 우위에 있는 만큼, 맞붙기만 한다면 상대를 제압하는 데 무리가 없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그자가 싸우지 않고 도망치려 한다면 자칫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놈이 정면대결을 회피하고, 무조건 도망을 치려 하면 어떻게 합니까?”

사내의 질문에 스트론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걸 대체 말이라고 하나? 첩자 따위를 잡는데 지금부터 공격하겠다고 정중하게 경고라도 하고 잡겠단 말인가? 당연히 은밀하게 포위망을 갖춤과 동시에 곧바로 기습을 해야지. 그렇게 하면 제아무리 실력 좋은 놈이라고 해도 당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야.”

“놈이 어디 소속인지 정체도 모르는데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만약 3대 강국의…….”

사내의 질문에 스트론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3대 강국 소속이든 아니든 이건 상부의 지시란 말일세. 그리고 놈의 목을 베어 버리면 끝날 일이잖은가. 그러니 쓰잘데기 없는 헛소리 말고 빨리 출동 준비나 해!”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뒤끝이 깔끔하려면 역시 기습공격이 최고다. 혹시라도 놈이 도망치면 죽도 밥도 되지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