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3권 13화 – 우연한 조우
우연한 조우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소피아 수녀가 감시하고 있던 암살조 맥스 팀이 배신한 것이다. 수녀로부터 긴급보고를 받은 감찰부에서는 급히 척살대를 편성하기 시작했 다. 배신자들이 감찰부 내에서 인정받던 유능한 암살팀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규모 인원의 파견은 불가피했다. 최소한 4개 암살팀에 마법사 4명은 되어야 한 다는 게 주된 의견이었다. 광활한 몰몬트 산맥을 뒤져야 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셈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감찰부에서 보유하고 있는 암살팀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들은 저마다 수행하고 있는 임무가 있었다. 기존에 진행하고 있던 임무에 서 손을 떼게 하고,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세브롱 요새의 공간이동 마법진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감찰부에서는 가장 먼저 수 배된 해밀턴 팀부터 현장에 급파했다. 그들이 선발대로서 배신자들의 행방을 추적하고, 앞으로 구성될 후발대를 인도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꾼 것이다.
선발대로 파견한 해밀턴 팀 역시 맥스 팀처럼 검사와 레인저 2인 1조로 이뤄진 암살팀이었다. 그런데 이번 임무의 경우,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과 함 께 본부와의 통신도 해야 했기에 마법사 한 명이 증원되어 있었다.
“헉헉..
거친 숨을 연신 몰아쉬는 마법사. 하지만 행군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보조마법을 사용한 것인지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습과는 달리, 낙오하지 않고 꾸준히 킬러들 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소피아 수녀가 감찰부에 보낸 배신자들의 행적에 대한 정보를 기반으로 여기까지 추적해 들어왔다. 추적에 있어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레인저와 함께 마법사까지 끼어있으니 추적 작업은 아주 순조로웠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것들이 좋은 길 놔두고 한 걸음조차 내딛기 힘든 숲속을 뚫고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용기사의 존재를 아직 모르 고 있었던 그들로서는 배신자들의 이러한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이상하군요. 아무리 추적을 따돌릴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험악한 지형만 골라서 이동할 필요가 있을까요?”
레인저의 의문에 해밀턴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거야 도망치는 놈들 마음이겠지. 덕분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지만.”
“아, 정말! 여기를 보십쇼. 길도 없는 곳을 뚫고 나가려다 보니 오히려 자신들이 지나간 흔적만 잔뜩 남겨 놨잖습니까? 이 정도 흔적이면 제가 없더라도 대장님 혼 자서도 충분히 추적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추적을 염두에 뒀다면 정말 멍청한 짓이죠. 이렇게 험한 지형을 뚫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좋은 길을 택해서 전속력으로 움직였다면 지금쯤 국경선을 넘고도 남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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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잠자코 있던 마법사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계속 헛도는 것 같자 불쑥 끼어들었다.
“당신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소. 그자들이 이 일대 지리를 잘 모른다는 것을. 그래서 상부에서는 그자들이 트리스티가 잔당들의 뒤를 쫓아가는 걸 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지 않소? 그런데 길도 제대로 모르는 자들이 연막을 친답시고 옆길로 빠졌소. 그렇다면 그 후의 결과는 뻔하다고 봐야지요.”
사실 그들도 여섯 개의 발자국이 나란히 이어지다가 갑자기 세 개의 발자국이 엉뚱한 방향으로 이탈한 흔적을 찾아냈을 때, 어느 쪽이 반역자들의 흔적인지 잠시 고민했었다. 이때, 해밀턴은 마법사와 함께 왔다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해 대지의 기억을 묻는 것으로 이들의 고민 을 간단하게 해결해 줬던 것이다. 만약, 마법사와 함께 오지 않았었다면, 그들은 지금 트리스티 패거리를 쫓아가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제서야 감을 잡은 해밀턴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럼 그 자들이 지금 길을 잃어버렸다는 겁니까?”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내 생각은 그렇소. 방향만 대충 맞춰서 걸어가고 있다 보니, 이렇게 길도 없는 데를 뚫고 지나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마법사의 추리에 해밀턴과 레인저는 감탄했다. 과연 마법사가 머리가 좋긴 좋은 모양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난해했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순식간에 찾아내는 것 을 보면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해밀턴은 레인저를 바라보며 물었다.
“놈들이 이곳을 지나간 지 이틀 정도 되었다고 했나?”
“예, 대장.”
“서두르면 곧 따라잡을 수 있겠군. 이런 상황이라면 그놈들이 도망쳐 봐야 얼마나 멀리 갔겠나.”
이때 갑자기 레인저가 손가락을 입술 위로 가져가며 경고성을 발했다.
“쉿! 조용히 하십쇼. 오큽니다.”
“오크?”
레인저는 땅바닥에 찍혀있는 발자국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기 발자국들을 보십쇼. 저 동굴 속에 오크들이 서식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설마…, 저 안으로 들어간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고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서 저쪽으로 갔습니다. 빗물에 발자국이 지워진 탓에 오크 소굴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챈 모양입니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자. 오크들이 우리가 있다는 걸 눈치채면 귀찮아져.”
“예.”
해밀턴 팀은 비밀 연구소의 환기구 코앞까지 갔었지만, 그 안에 비밀 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오크 떼가 서식하고 있다고만 생 각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던 것이다.
동굴을 떠나고 얼마나 걸었을까. 빠른 속도로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던 레인저가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오크들의 발자국이 여기까지 계속 이어져 있는 걸로 봐서, 어쩌면 놈들의 뒤를 쫓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요?”
“이쪽으로 다시 돌아온 발자국은 없지?”
“예. 발자국들이 모두 다 저쪽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대략 스무 마리 정도…….”
오크들이 스무 마리 정도밖에 안 된다는 말에 해밀턴이 피식 하며 웃었다.
“젠장, 좋다 말았네. 나는 오크들이 배신자들을 우리 대신 처리해 주지는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말이야.”
농담조의 해밀턴의 말에 레인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겨우 20여 마리 가지고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어쨌거나 오크들이 이렇게 뚜렷하게 흔적을 만들어 놓은 덕분에 뒤따라가기는 엄청 편하네요.”
“본대 쪽에서 연락이 오기 전에 반드시 그놈들의 꼬리를 잡아야만 해.”
“앤트러스라는 분이 특무대장으로 선택되었다고 하던데, 혹시 대장님이 아시는 분입니까?”
레인저의 질문에 해밀턴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글쎄, 그런 분이 특무대장에 임명됐다는 것은 이번 사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겠지.”
그때 지금까지 말없이 뒤따라오고 있던 마법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내가 그분을 알고 있소.”
“아, 마법사님이 알고 계십니까? 어떤 분이신가요?”
“특무대장으로 뽑히시기에 충분한 분이시지요. 감찰부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지위가 높으신 분이니까요.”
지위가 높다는 말을 듣고 괜히 배알이 뒤틀린 레인저가 이죽거렸다.
“편안하게 방 안에서 펜대나 굴리고 있던 사람은 영 믿음이 가지 않는데…….”
레인저의 말에 마법사는 발끈해서 말했다.
“말조심하게. 앤트러스 후작 각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야. 감찰부 내에서도 몇 안 되는 검의 달인들 중 한 분이시니까. 감찰부 소속이라 전쟁의 신전에는 가지 않 으셨지만, 만약 가신다면 곧바로 그래듀에이트급의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분이시지.”
마법사의 말에 레인저는 찔끔해서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칫 안 좋은 말을 했다는 게 앤트러스 특무대장의 귀에 들어간다면 인생 꼬일게 뻔했으니까.
“호오, 그렇습니까? 이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런 분이 이번 임무를 총괄 지휘하신다니 정말 든든하군요. 사실 현장을 잘 모르는 분이 총 지휘를 맡았을 때 개고생을 한 기억이 몇 번 있어서요.”
하지만 해밀턴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이런 젠장, 그럼 놈들의 뒤를 발에 땀나도록 그냥 쫓다 끝내자는 말인가? 어차피 배반자 놈들은 늙어빠진 퇴물들이야. 우리끼리 해치우지 못할 건 또 뭐야. 놈들 은 퇴물 둘에 애새끼 하나고, 우리 쪽은 마법사님까지 계신데 말이야. 안 그래?”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저희 임무는 본대를 보조하기 위한 추적조 역할이잖습니까?”
“괜찮아. 한번 건드려 보고, 정히 잡기 힘들 것 같으면 슬쩍 뒤로 물러서서 본대를 기다리면 되니까.”
해밀턴의 의견에 마법사도 찬성했다. 크게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나도 그 생각에는 찬성이오. 본부에서 4개팀 이상을 동원하려고 했던 것은 이 넓은 몰몬트 산맥 속에서 놈들을 찾는 게 힘들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지, 우리들 의 전투력이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요.”
“제 말이 그 말이라니까요.”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해밀턴 팀이 한층 추적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수풀이 거칠게 흔들리며 버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꿀꿀거리는 소리가 저 앞쪽 숲속 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크인가?”
긴장된 표정으로 후다닥 활에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기는 레인저와 달리 해밀턴은 오크의 출현에 반색했다.
“오, 잘됐네. 어쩌면 저것들이 배신자들을 포획해서 소굴로 돌아오고 있는 중인지도 몰라. 그러면 정말 횡재한 거지. 안 그래?”
해밀턴이 그런 희망을 품은 건, 배신자들의 뒤를 쫓아갔던 오크들이 되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크들은 한 번 찍은 사냥감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아주 집요한 몬스터이다. 사냥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냥 돌아올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에휴, 바랄 걸 바라십쇼. 아마 그놈들과 싸우다가 살아서 도망친 놈들이거나, 아니면 추적을 포기하고 돌아오고 있는 거겠죠.”
배반자들이 아무리 은퇴할 때가 다 된 퇴물들이라고는 하지만, 겨우 20여 마리의 오크들에게 사냥 당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벌써 오크들이 숲을 뚫고 달려 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크들의 생김새가 조금 이상했다. 일반적인 보통 오크들보다 덩치가 훨씬 더 우람했을 뿐만 아니라, 생긴 것도 더욱 험악했다. 광활한 몰몬트 산맥 속에서 살고 있었기에 이들의 존재가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쭈? 이 동네 오크들은 모두 한가락 하게 생겼는데? 뭐가 저렇게 인상파야.”
너스레를 떠는 해밀턴에게 레인저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봐야 오크죠. 그런데…, 대장님 말처럼 저놈들이 정말 배신자들을 포획한 걸까요? 어라, 저건 또 뭐야?”
레인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오크 두 마리가 큼지막한 푸대를 둘러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매끄럽게 잘 빠진 가마를 들고 있는 오크도 보였다.
“허, 거참. 어디서 약탈이라도 한 걸까? 이 동네 오크들은 정말 특이하군.”
심드렁한 표정의 해밀턴과는 달리, 마법사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아무래도 이상해. 오크들이 들고 있는 무기들도 그렇고, 저 탈것도 그렇고……. 그냥 오크라고 하기에는…….?
하지만 마법사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해밀턴 팀을 발견한 오크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챙챙챙.
“뭐, 뭐야 이거?”
“으아악!”
배신자들을 추적하고 있던 해밀턴 팀. 그리고 전멸당한 동료들의 사체를 처리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귀환하던 키메라들이 동선이 겹쳐 마주친 것이다. 해밀턴 팀으로서는 정말 재수가 없었던 만남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만만하게 보고 싸우기 시작한 상대가 사실은 오크가 아니라, 자국의 비밀 연구소에서 극비리에 개발한 키메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포션으로 응급처치를 끝낸 월터는 지혈을 끝내자마자 도주로를 변경했다. 지금까지는 산맥을 관통하는 최단거리를 택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산맥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도약하며 이동하는 그의 움직임은 엘프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얼마나 달려갔을까. 그는 저 먼 곳에서 격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포착했다. 들려오는 소음으로 봤을 때, 누군가가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듯 했다. 평범한 사람 들이 이렇게 깊은 산속까지 들어와 있을 리 없다.
•벌써 여기까지 포위망이 펼쳐졌나?”
처음에는 그들의 곁을 조용히 통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가 겨우 셋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생각을 바꿨다. 슬그머니 접근해서 동정을 살 펴보는 게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필요에 따라서는 약간의 고문을 곁들일 생각까지 바탕에 깔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로서는 자신이 왜 알카사스 정규 기사단의 표적이 된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들 근처에 접근한 월터는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기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가 많았다. 50대 중반은 족히 되었으리라. 그런 중년사내 둘과 아직 솜털도 다 가시지 않은 소년 한 명.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잡기 위해 투입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인선이다.
추격팀이 아닌 그냥 모험가들인 것이다.
‘젠장, 모험가들이잖아. 그냥 갈걸. 괜히 이리 왔네.’
상황을 빠르게 판단한 월터는 슬그머니 자기 갈 길을 가려고 할 때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활을 든 사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벌레 소리가 멈췄습니다. 저쪽에 뭔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아주 감이 좋은 사내였다. 급히 활을 벗겨 들더니 화살통에서 화살 네 발을 한꺼번에 뽑아드는 사내. 그 중 셋은 왼손에 든 채, 화살 한 발을 장전하고 시위를 힘껏 당긴다. 그런 사내의 모습을 보며 월터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속사 기술은 레인저들이 주로 애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모험가들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꼭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레인저가 하는 모습을 옆에서 훔쳐보고, 그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습득하여 써먹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기왕에 들킨 것, 월터는 숨어있던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월터였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상대가 활을 겨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칼조차 뽑지 않고 말이다.
이때, 중년 사내들 중에서 검을 든 쪽이 갑자기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어이, 여기야! 여기!”
마치 누군가에게 손짓을 하는 듯한 중년 사내의 모습. 이런 중년 사내의 돌연한 행동에 월터는 어이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
문득 월터는 활을 든 사내의 화살이 겨누고 있는 게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살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자신의 뒤쪽이었다.
‘내 뒤에 누군가 있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를 내줬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한 노릇이다. 하지만 월터는 자신의 감각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다.
“내 뒤에는 아무도 없어.’
저들의 행동은 자신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라고 단정한 월터는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내가 뒤를 돌아보는 그 순간을 노려 쏘려는 네놈들의 속셈을 모를 줄 알고? 나이가 제법 많다고 생각했더니, 역시 능구렁이들이로군. 하지만 그런 얄팍한 수 에 속아 넘어갈 내가 아니지.’
월터는 중년 사내들을 향해 느긋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다가갔다. 저자들을 어떻게 요리하는 게 좋을지 궁리하면서…….
이때, 갑자기 검을 든 중년 사내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는 월터를 향해 검을 겨누며 외쳤다.
“거기서라! 너는 누구냐?”
그제서야 뒤쪽을 겨누고 있던 중년 사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는 게 보였다. 그걸 보고 월터는 확신했다. 저들은 자신의 적이 아니라고.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저들은 월터가 몬스터 같은 것들에게 쫓기고 있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온통 피로 범벅이 된 자신의 몰골을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적의를 드러낸 것일까?
궁금해 하던 찰나, 월터는 검을 든 중년 사내가 자신의 검집을 힐끗힐끗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런 몰골을 하고 있는 사람이 허리 에 차고 있기에는 너무 고급스런 검이다.
“젠장,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검집을 싸구려로 바꿔서 들고 오는 거였는데…….’
지금 와서 후회해 봐야 뭘 어쩌겠는가.
월터는 양손을 위로 살짝 들어 올려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쏘지 마시오. 나는 귀하들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소.”
““너는 누구냐?”
월터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대충 둘러대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깊은 산골짜기에 이런 몰골로 있을 그럴듯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월터는 쓸데 없는 변명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했다. 중년 사내들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별로 아쉬울 것은 없었으니까.
“이보시오. 당신들 모험가인 듯싶은데, 나를 산맥 너머까지 안내해 주면 후하게 사례하도록 하겠소. 어쩌다 보니 이렇게 거지꼴을 하고 있지만, 여기 이 검을 보다 시피 그 정도 능력은 있는 사람이오.”
“코린트 사람인가?”
월터는 코린트쪽 사투리나 억양을 쓰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마디 채 나누지도 않았는데, 출신지를 정확히 짚어 내는 것을 보면 중년 사내도 보통은 아닌 모양이다.
‘젠장, 눈치가 이만저만 빠른 놈이 아니로군.’
저렇게 닳고 닳은 것들을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저런 자들은 설득보다는 힘으로 찍어 눌러 버리는 쪽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마음을 정하자마 자 월터는 짐짓 살기를 내뿜었다. 역시 그의 의도대로 상대방들은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월터가 슬며시 손을 아래로 내리는 것을 본 활을 든 중년 사내가 강하게 경 고를 보내왔다.
“손 올려! 그렇지 않으면 쏜다!”
월터가 경고를 무시하고 검을 뽑으려 하자, 활을 든 중년 사내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화살을 쐈다.
피우웅!
서로간의 거리가 열 걸음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월터는 화살을 어렵지 않게 피해 냈다. 그리고는 검을 뽑아들며 싸늘하게 외쳤다.
“내 정체를 눈치채다니……. 어쩔 수 없군.”
그러자 검을 든 중년 사내가 당황한 듯 외쳤다.
“자, 잠깐! 이렇게 싸울 필요 있겠소? 밀입국하려는 거라면 함께 갑시다. 길을 안내해 드리겠소.”
“흥! 내가 당신네들을 어떻게 믿고?”
“걱정 마시오. 우리도 쫓기는 입장이오.”
“쫓기는 입장이라고?”
“그렇소.”
자신이 코린트쪽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은데도 상대방들이 합류를 요청해 오자 윌터는 잠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저들 역시 쫓기는 입장이 라면 충분히 납득이 되는 일이긴 하다.
의심이 채 가시지는 않았지만 월터는 일단 저들의 합류를 승낙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저들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월터는 이 일대 지리 는 물론이고,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으니까.
“함께 가기로 했으니, 서로 통성명이나 합시다. 이쪽은 샘, 저쪽은 라이, 그리고 나는 맥스라고 하오. 우리 셋 다 성 같은 건 없는 천민들이라오.”
낡은 판초 외투를 뒤집어쓰고 있는 라이라는 소년이라면 혹 몰라도, 맥스나 샘의 경우 천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월터는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 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씨익 웃으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월터라고 하오. 공교롭게도 나도 성이 없소. 국경을 넘을 때까지 우리 천민 넷이서 잘해 봅시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고풍스런 검, 비록 피범벅이 되어 있긴 했지만 고급 원단의 옷,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몸동작 하나하나에는 오랜 세월 몸에 밴 자연스런 기품 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명 이름 있는 가문 출신임이 확실한데, 천민이라고? 월터의 대답에 맥스의 얼굴은 한 방 먹었다는 듯 왈칵 일그러졌다
<묵향> 3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