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3권 2화 – 숲속의 유령, 트롤

숲속의 유령, 트롤

다음날 아침, 대장은 샘을 앞세워 올리버 트리스티 일행이 지나간 흔적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새벽녘에 비는 그쳤지만, 길은 한발자국도 떼기 힘들 만큼 질 척거렸다. 게다가 자칫 몸의 균형을 잃기라도 하면 흙탕물에 나뒹굴 만큼 엄청 미끄러웠다. 그렇다보니 평소보다 이동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늦은 오후쯤 되었을 때 흔적을 살피며 맨 앞에서 걸어가던 샘의 발길이 우뚝 멈췄다. 그는 땅바닥을 가리키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트롤입니다.”

샘의 말에 라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걸 느꼈다. 트롤의 무서움을 직접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샘이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아주 커다란 발자국들을. 비가 온 다음이라 땅바닥이 물렁했기에 발자국이 아주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표정의 샘과 달리 대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런 깊은 산맥이라면 트롤 몇 마리쯤 사는 게 당연한 건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그게 아니라 발자국 방향이 문제죠. 아무래도 놈들을 뒤따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발자국을 살펴보던 대장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우연히 방향이 겹친 게 아닐까? 놈들과는 아직 3일 정도의 거리차가 있다고 했었잖아.”

“트롤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 보시는 거 아닙니까?”

트롤이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 거리쯤은 하룻저녁이라도 주파가 가능했다.

“겨우 세 명입니다. 무장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트롤이 그런 것쯤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이게 웬 떡이냐 하며 군침을 흘리면서 쫓아가고 있는 거겠죠.” 샘의 말에 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길안내 좀 편하게 받는가 싶었더니…….”

대장과 샘은 상부로부터 올리버 트리스티 일행을 처리하라는 급작스런 명령을 받고 이리로 달려왔다. 그러니 제대로 된 준비가 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상부에서 는 소피아 수녀라는 첩자가 있었기에, 수월하게 임무를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지도 따위의 부가적인 자료들을 지원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어느 쪽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기에 올리버 트리스티 일행이 트롤에 의해 전멸당한다고 해서 산맥을 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길을 모르는 만큼, 고생을 몇 갑절은 더 해야 하리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간 여유는?”

“그다지 많지 없습니다. 숲의 유령이라 불리듯, 숲속에서 트롤의 이동속도는 경이적일 정도니까요. 어쩌면 오늘 밤에 놈들을 덮칠지도 모르죠.”

“허, 참. 그렇다고 트롤의 이동 속도를 우리가 따라잡는다는 건 아예 불가능할 테니, 이거 난감하군.”

어찌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 대장에게 샘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뭘 그렇게 어렵게 고민하십니까?”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다리 아프게 우리가 왜 쫓아갑니까? 차라리 놈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면 되죠.”

라이가 그게 무슨 소린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대장은 금방 이해를 했는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갑자기 허공을 향해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야이, 빌어 처먹을 트롤 새끼야! 이거나 먹어랏!!”

대장이 내지른 웅혼한 외침은 메아리를 남기며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대장이 갑자기 허공을 향해 감자바위를 먹이며 괴성을 지르자마자 라이는 기겁해서 소리쳤 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트롤이 가까이에 있다는데 소리를 지르시다니……

대장은 패닉상태에 빠져있는 라이의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대답했다.

“뭐가 어때서, 어차피 놈이 들으라고 그런 건데.”

“미쳤어. 미쳤어……..

얼굴에 핏기를 잃고 허둥거리고 있는 라이를 대장은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대장은 확신했다. 녀석은 어딘가에서 트롤을 만나 아주 뜨거운 맛을 본 경험이 있다 는 것을.

“정말 특이한 놈이야.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많은 경험을 한 것 같거든. 그러기도 쉬운 게 아닌데 말이지.”

대장은 당황해 하는 라이에게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일부러 말해 주지 않았다. 라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으니까.

“네 표정을 보니 트롤에게 뜨거운 맛을 봤던 적이 있는 모양이구나?”

“뭐…, 개고생을 한 적이 있긴 있었죠.”

“그때 얘기 좀 해봐.”

트롤이 올까 두려워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초조해 하는 라이와 달리 대장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샘의 뒤를 따르며 라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사방에 짙은 어둠이 깔리며 해가 지기 시작했다.

앞서 가던 샘이 나무가 몇 그루 없는 평탄한 곳을 발견하자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에서 야숙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두근, 두근, 두근….

해질 무렵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게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는다. 대장이 질러댄 고성을 트롤이 못 들었을 리 없다고 라이는 판단했다. 그렇다면 놈은 반 드시 이리로 올 거다. 그것도 오늘 밤에!

라이는 슬그머니 모닥불 주위의 나무들을 올려다봤다.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자는 게 좋지 않을까??

참기 힘들 정도로 매혹적인 생각이었지만, 라이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그건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트롤이 얼마나 나무를 잘 타는지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모닥불 옆에 모두와 함께 있는 게 보다 안전하리라.

라이는 슬쩍 모닥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 옆에 자리를 잡고 반쯤 드러누워 있는 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나른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하고 있다. 트롤의 습격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천하태평이다.

‘설마…, 트롤도 오크처럼 불을 겁내지 않는 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반쯤 누워 있는 자세는 대장과 비슷했지만 한결 긴장감 어린 표정이다. 불빛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매섭게 느껴진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인상만 봤을 때는 샘 쪽이 대장보다 훨씬 높은 사람처럼 보인다. 두툼한 눈썹, 사나워 보이는 매부리코, 덥수룩한 콧수염. 그리고 자신감 있어 보이 는 표정까지도…….

그에 비해 대장은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순한 인상이다. 돈을 빌려주고도 돈 달라는 소리를 못하고 쩔쩔매며 속만 태우고 있는 그런 순둥이. 어떤 때는 아 주 무능력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 탓에 라이는 처음에 그를 과소평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생긴 것과 성격이나 능력이 전혀 상관이 없 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저렇게 순하게 생긴 사람이 검술 실력도 좋았고, 두뇌 회전도 재빨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이 된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의 첫 여행을 함께했었던 백작의 부하들도 나름 실력자들이었지만, 트롤 한 마리를 당해 내지 못해 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지 않았던가.

‘젠장, 피해 다녀도 시원찮을 판에 고함을 질러서 트롤을 불러들인다고?”

트롤이 얼마나 무서운지조차 모르고 있다니. 이대로 몰래 빠져나가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라이는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그러다 트 롤의 뱃속으로 한끼 식사감이 될 확률이 높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뭉쳐 있어도 살아남을까 말까 한 상황인데, 혼자 떨어져 나갈 생각을 하다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밤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샘이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어딘가로 슬그머니 사라졌을 샘인데 말이다.

‘샘도 아는 거야. 트롤이 올 거라는 것을!’

그 이후부터 라이는 샘을 관찰하는 것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가 하는 작은 움직임까지도. 화살 한 발과 함께 활을 품에 안고 있는 걸 보면, 유사시에 저걸 쏠 생각임 에 틀림없다. 하지만 트롤이 겨우 화살 한 발 맞는다고 꿈쩍이나 할까? 트롤이 얼마나 재생력이 뛰어난데…..

‘혹시…, 독?”

독화살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트롤이 경이적인 해독능력까지 지니고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꽤 오랜 시간이 흘러있었다. 트롤에 대한 공포감에 잠은 이미 멀리 달아나 버린 상태.

라이는 문득, 지금 이 순간이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장도 자고 있고, 샘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슬그머니 도끼를 들어 저 둘의 머리통을 쪼개 놓기만 하면 끝인 것이다.

만약 지금 트롤이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라이는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겨 버렸으리라.

“젠장, 재수가 없으려니. 기회가 와도 꼭 이런 지랄 같은 상황에 오다니…….”

이때였다. 자는 줄 알았던 대장이 벌떡 일어선 것은. 대장은 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대장의 머리통을 도끼로 까버리겠다는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라이 는 크게 당황했다.

“왜, 갑자기……?”

하지만 대장이 노려보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라이가 누워 있는 뒤쪽 숲이었다. 그리고 대장의 손에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시퍼런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크르르르.”

트롤은 낮은 소리로 목을 울렸다. 기분이 좋을 때 내는 울림이다.

‘어떤 놈이 맛있을까?’

모닥불 가에 자리 잡고 있는 호비트의 숫자는 셋. 사위는 짙은 어둠에 잠겨 있고, 쌍방 간의 거리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트롤의 눈에는 호비트들의 얼굴 주름까지 셀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보였다.

호비트 사냥을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아닌 트롤이었기에, 그 중 가장 만만해 보이는 놈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왼쪽에 누워 있는 어린 놈! 고기도 연한 것이 입속에 넣으면 살살 녹을 것만 같았고, 더군다나 녀석에게서는 신경 쓰이는 쇠 냄새가 적게 난다.

트롤은 사냥감들의 냄새를 다시 한 번 음미한 후에 목표와의 거리를 천천히 좁혀 나갔다. 바람을 타고 향기로운 냄새가 솔솔 풍겨온다.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뚝뚝 흘리며 입맛을 다시는 트롤.

조심조심 살금살금 움직이는데다가 어둠까지 짙어 호비트들은 자신의 접근을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 은밀한 행동이 힘들다고 생각될 때까지 사냥감과 의 거리를 최대한 줄였다고 판단되는 순간, 트롤은 몸을 날렸다. 유연한 그의 몸은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전속력까지 가속할 수 있었다. 사냥감이 자신의 존재를 깨 달았을 때는 이미 자신이 내리찍은 몽둥이에 골통이 빠개져버린 후가 되리라.

하지만 그 순간, 트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갑자기 호비트 한 마리가 벌떡 일어서는 게 아닌가. 그놈은 언제 빼들었는지 번쩍거리는 긴 쇠막대 까지 들고 있다. 자신의 접근을 용케도 눈치챈 모양이다. 순간, 트롤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저따위 얄팍한 쇠붙이 따위로는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는 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을 무시하고 예정대로 처음 찍은 사냥감을 공격하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사냥감의 대가리를 박살낸 뒤 그 시체를 들고 나올 동안 저놈의 공격을 그대로 허용해야만 할 게 아니겠는가. 어지간한 상처 따위 금방 재생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트롤은 어쩔 수 없이 공격 목표를 바꾸 기로 했다. 먼저 먹나 나중에 먹나의 차이일 뿐, 어차피 저 세 마리의 호비트들은 모두 다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될 테니까.

워낙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트롤이 땅바닥을 두어 번 박찼을 뿐인데도, 이미 목표물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트롤이 흉포한 울음을 흘리며 커다란 몽둥이로 호비 트의 대갈통을 내리찍으려는 그 순간, 트롤의 눈앞에서 은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바로 그때였다. 멍하니 대장을 바라보고 있던 라이의 머리 위로 뭔가가 휙 하고 날아간 것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물을 바가지로 흩뿌린 것 같이 축축한 뭔가가 그 에게로 뿜어져 날아왔다. 짙은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으, 으아악! 이, 이게 뭐야?”

라이의 머리 위로 날아간 것은 커다란 몽둥이를 꽉 움켜쥐고 있는 트롤의 팔이었다. 거기에 얻어맞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긴 했지만, 잘린 팔에서 뿜어져 나온 핏물 을 고스란히 뒤집어 쓸 줄이야.

“우엑, 갑자기 이, 이게 뭐야……?”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던 라이는 일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리통을 잃어버린 트롤의 몸이 몇 발자국 걸어가는 듯 하더니 털썩 땅바닥에 나뒹구는 게 아닌가. 그 광경을 본 라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설마, 저 순해 빠진 인상의 대장이 혼자서 트롤을 해치워 버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으니까. 게다가 드잡이질도 아닌 단칼에 목을 베어 버리지 않았는가. 저런 실력자를 몰라보고 여차하면 도끼로 찍어버리고 튈 생각을 했다니. 라이는 일순 온몸에 소름이 짝 끼치는 것을 느꼈다.

대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장검에 묻은 피를 깔끔하게 닦아 검집에 집어넣고는 라이에게 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다친 데는 없지만, 냄새가 정말 지독하네요…….”

트롤의 사체를 숲에 가져다 버리고 엉망이 된 모닥불가를 대충 정리한 뒤, 다시 모여 앉았을 때, 갑자기 라이가 대장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저를 제자로 삼아 주십시오!”

라이의 난데없는 부탁에 대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뭐, 뭐라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대장님처럼 강하신 분은 처음 봤습니다. 제발 저를 제자로 삼아 주십시오.”

물론 그래듀에이트라는 올란도가 더 강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처음부터 자신을 삐딱하게 보고 있었던 탓도 있고, 용병단에서 상급자와 부하라는 수직관계였기에 아예 스승으로 모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장이라면, 아무래도 사람 좋아 보이는 겉모습 때문인지 그 어떤 부탁이라도 하면 들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라이를 바라보며 대장은 내심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는 척하고 있던 자신을 향해 은근슬쩍 살기를 흘리던 놈이었다. 그 런 녀석이 갑자기 제자로 받아들여 줄 것을 청해 오다니. 도무지 라이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사제의 인연을 맺기에 적합한 상황인가? 어찌어찌 산맥을 무사히 넘는다고 해도 장밋빛 미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허어, 나 같은 퇴물에게 그런 제안을 해 줘서 고맙긴 하다만 그건 안 될 말이야.”

“예? 그건 어째서…….”

“나는 조직을…, 아니 왕실을 배신한 사람이야. 그런 나를 스승으로 삼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설마 평생을 반역자의 제자라는 굴레 속에서 살고 싶다는 게냐?” “어차피 산맥을 넘어 타국으로 망명을 하실 거잖아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라이의 반박에 일순 대장은 할 말을 잃었다. 살기 위해서 타국으로 도망을 가는 주제에 왕실에 대한 미련이 아직까지 남아있었다니. 그걸 깨달은 대장은 씁쓸한 미 소를 지었다.

“뭐, 그건 그렇다만은. 그래도 혹시 네가 내 제자라는 게 알려지게 된다면 너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될 걸 각오해야 할 거야. 충성을 다한 신하에 대한 예 우는 신경 쓰지 않아도, 한번 반역자의 굴레를 뒤집어쓰게 되면 세상 끝까지 쫓아와 죽이려 드는 게 현실이니까.”

“전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어쨌거나 생각을 해 보자. 앞으로도 시간은 많이 남아있으니까 말이야.”

그걸로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던 대장은, 지금이 라이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걸 깨달았다.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라이라 는 녀석의 숨겨진 과거를 물어보기에…….

“참, 그러고 보니 제자로 받아들이려고 해도 내가 너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산전수전 다 겪어온 대장이 타국으로 망명을 하려고 하는 순간에 제자 따위를 받아들이려 할 리 없다. 게다가 수상쩍은 구석이 하나둘이 아닌 놈이 아닌가. 대장은 라이가 자신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미끼로 그의 과거를 캐려는 것이다.

라이가 제 아무리 약은 척을 해도 아직 어린 나이다. 수십 년 동안 왕실에서의 흉험한 음모를 겪으며 살아왔던 대장이 봤을 때에는 라이 정도의 교활함은 어린애 장난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대장의 속셈도 모르고 라이는 흔쾌히 대답했다.

“궁금한 게 있으시면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하나도 숨기지 않고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흠, 네 억양을 들어보면 크라레스쪽 사투리가 묻어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서 태어났으니까요.”

라이는 일단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지금까지 자신의 신상에 대해 대장에게 거짓말을 했었노라고 사과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부모가 어떻게 해서 크라레스를 떠나 북부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한 치의 가감도 없이 이야기했다. 당시의 힘든 여정 중에 어머니가 죽었고, 백작을 따라 나선 가신(家臣)들 속에서 성장했다고 말이 다.

지금까지 라이가 했던 얘기들과는 달리 이번 얘기는 앞뒤가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주 그럴듯했다. 라이의 아버지가 모셨다는 제럴드 폰 로티넨 백작에 대해 대 장은 알지 못했지만, 로티넨 영지가 얼마나 노른자위 땅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 영지를 다스렸을 정도라면 꽤 실력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트롤에 쫓기다가 오크에 사로잡혀 노예 생활을 한 이야기, 겨우 벗어났더니 이번엔 노예상인에게 팔아넘겨져 검투사가 될 뻔하다가 또다시 팔아넘겨져 용 병단에 들어가는 등……. 평범한 아이였다면 단 하나도 겪어보지 못했을 일들을, 라이는 그동안 숱하게 겪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대장은 혀를 차며 라이를 애잔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쯧쯧, 너도 참 순탄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구나.”

“뭐, 그래도 지금 잘 살아 있잖아요.”

“내가 지금까지 누구를 가르쳐 본 적이 없다보니, 너를 잘 가르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구나…….

대장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 하더니 라이를 향해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단 짬짬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쳐 줄 테니 한번 배워 봐라.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시 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을 해 보는 것도 좋겠지.”

이 정도까지라도 허락을 받은 게 어딘가 하는 생각에 라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 마법탑이 가장 많이 세워져 있는 나라가 바로 알카사스 왕국일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세워져 있는 거대한 탑. 그걸 보고 일반인들은 마 법사들이 쓸데없는 곳에 돈을 너무 낭비한다며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건 뭘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초대형 마법진들을 컨트롤하는 핵심시설이 바로 마법탑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마법진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더욱 거대하고 높은 마법탑을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

알카사스 동부 제일의 상업도시 ‘토가’. 토가는 거대한 호수 옆에 건설된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였다. 토가의 중심부에도 어김없이 마법탑이 건설되어 있었다. 그 것도 다른 도시들보다 훨씬 더 거대한 마법탑이.

마법탑의 가장 윗층에서 내려다보면 토가 시가지는 물론이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옥색의 트룬가 호수까지 한눈에 보인다. 토가 시내에서 이 방의 전망이 최고로 뛰어나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정작 이 방의 주인이 되면 창밖을 내려다볼 잠시의 여유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곳 마법탑의 주인이 알카사스 마법사 길드 동부지구 전체를 책임지고 있었으니까.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방 안에는 눈매가 날카로워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노인이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보고서를 읽고 있다. 그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이 유는 최근 마법사 10여 명이 행방불명돼 길드 분위기가 아주 흉흉했기 때문이다.

모험을 다니다 보면 죽을 수도 있고, 행방이 묘연한 자들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그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건 그런 어설픈 마법사들 때문이 아니었다. 마법탑에서 일하는 마법사들, 즉 모험을 떠날 하등의 이유가 없는 마법사 10여 명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들 중 두 명은 꽤나 고위직에 있는 마법사들이었다.

물론 누군가가 간 크게도 마법탑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 마법사들을 납치해 간 것은 아니다.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갔던 사람들이 마치 햇살에 증발이라도 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으니까.

‘흐음…, 마법탑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납치한 것으로 보아 범인은 뻔하다고 봐야 하겠지.’

마법왕국인 알카사스를 건드릴 정도로 간 큰 나라는 딱 셋밖에 없었다. 코린트, 크라레스, 크루마 제국이다. 아르곤 제국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알카사스가 엑스 시온 판매를 중단하면 끝장이었기에 알아서 기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코린트는 적이 없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흑기사 30기로 이뤄진 발렌시아드 기사단만으로도 충분히 황도(皇都)를 보호할 수가 있기에, 공간 이동을 방해하는 마법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그리고 그건 드래곤의 비호(?)를 받고 있는 크라레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들은 방대한 국력을 동원하여 아르티 어스가 내준 과제를 처리하는 것만도 버거운 상황. 다른 데 눈을 돌릴 형편이 아니다.

오직, 크루마만이 공간이동 마법을 방해하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타국의 기사단이 자국의 수도에 공간이동을 통한 기습공격을 할 수 없게 만들기만 하면, 황도 주위에 포진시켜 둔 대규모 전력을 자유자재로 써먹을 수 있게 되기에.

하지만 공간이동 마법을 방해하는 방법을 모르는 지금으로서는 막강한 전력이 황도를 보호하기 위해 꼼짝없이 묶여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건 심증일 뿐,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동부지구장은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문밖에서 부하 한 명이 급하게 들어왔다.

“지구장님, 긴급상황입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연신 누르고 있던 동부지구장은 그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뭔가 범인의 흔적이라도 잡은 것이더냐?”

“아, 그것과는 다른 사안입니다만…….”

“이런 젠장! 어지간한 건 내게 가져오지 말고 너희들이 알아서 좀 처리하란 말이다!”

동부지구장은 왈칵 성질을 내며 부하를 째려보았다.

“저, 그런데 이건 지구장님께 반드시 보고해야 할 사안이기에 달려왔습니다.”

“뭔데 그러는 것이냐? 만약 허접한 일 때문에 이런 호들갑을 떤 것이라면 호된 맛을 보게 될 줄 알거라.”

그러자 부하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2시간 전쯤에 도렌 영지로 수녀 한 명이 찾아와 영주를 만나기를 청했다고 한다. 전염병 때문에 긴급히 상의드릴 일이 있다고 했기에, 영주는 그녀를 만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주를 만난 수녀는 대신관께 보고를 해야겠으니 통신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수녀가 마법통신을 사용할 수 있도록 채널을 연 마법사는 길드에 소속된 자였다. 그는 전염병이라는 화급을 요하는 정보를 길드 쪽에서 보다 자세히 파악하기 쉽 도록 통신채널 2개를 동시에 열었다. 하나는 수녀가 통신을 원하는 채널에, 그리고 또 하나는 길드 쪽의 채널을 열어 수녀가 상부에 보고하는 내용을 엿들을 수 있 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 때문에 부하가 단숨에 동부지구장에게로 달려오게 된 것이다.

부하는 일단 동부지구장을 이끌고 수정구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마법주문을 외워 상대편 마법사를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자네가 방금 전에 상부에 지급으로 보고했던 영상, 이쪽으로 전송해 주게. 그…, 수녀가 상부에 보고한 암호문 말일세.”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수정구에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마법사의 모습이 수정구에 투영된다. 낯선 얼굴이긴 했지만, 옷차림을 본 지구장은 한 눈에 그가 길드 소속 마법사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에 그려진 복잡한 문양들 속에는 마법사 길드의 문양과 함께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문 양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으니까.

“저 자는 누구지?”

“이 정보를 획득할 수 있게 한, 공이 가장 큰 마법사입니다. 일단 계속 보고 말씀하시기를..

곧이어 메마른 목소리가 수정구에서 들려왔다.

「못 보던 얼굴인데, 귀하는 누구신가?」

마법사는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신전(神殿)과 연결되었습니다. 수녀님, 얘기 나누시죠.」

곧이어 예쁘장하게 생긴 수녀가 수정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급히 말했다.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없음을 용서해 주세요.」

수녀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마법사가 행여 훔쳐볼까 힐끔거리며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수정구 앞에 쫙 펼쳤다. 수정구 한가득 문자가 투영된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이상하게 생긴 문자들이..

이게 다급한 마음에 소피아 수녀가 나름대로 보안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다가 찾아낸 해법이었다. 원래 그녀가 가고자 했던 목적지는 도렌 영지가 아니 었다. 하지만 산맥 안에서 길을 잃고 무작정 서쪽으로 3일을 달리다보니 도렌에 도착해 버린 상태.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 것도 속상한데, 이동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는 도시까지 가려면 또다시 하루라는 시간을 더 소비해야만 했다.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소 보안이 취약하더라도 일초라도 더 빨리 상부에 그들의 배신을 보고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옆에 앉아 있는 마법사가 보지 못하도록 조심해서 수정구 앞에 펼친 자신의 암호문을 감찰부의 마법사 말고 또 다른 마법사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동부지구장은 매서운 눈빛으로 다급히 부하를 다그쳤다.

“이 암호문의 내용이 뭔지 알아봤나?”

“물론입죠, 지구장님. 이미 알아냈으니까 이렇게 달려와서 보고를 드리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부하의 표정을 보자 동부지구장은 금방 눈치를 챘다.

“흠, 왕실에서 사용하는 암호였나 보구나.”

“예. 놀랍게도 감찰부에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그 암호를 해독한 내용입니다.”

부하가 건넨 보고서를 단숨에 읽은 동부지구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이번엔 제대로 한 건 했구나. 정말 수고했다. 당장 길드장님을 연결하거라. 사안이 사안인 만큼 내가 직접 보고를 드려야겠다.”

그런 지구장에게 부하는 은근슬쩍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굳이 길드장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이 정보를 길드장에게 보고하면 그 후속조치는 중앙지구장이 맡게 될 게 뻔합니다. 공공연히 중앙지구장이 자신의 후계자임을 밝히고 있는 판국이니, 공을 세울 수 있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다른 지구장에게 절대로 주지 않을 거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정보를 얻기 위해 개고생을 한 우리는 찬밥 신세가 되는 거고, 공로란 공로 는 모두 다 중앙지구장이 독차지하게 될 게 아니겠습니까?”

원로원의 힘이 왕실의 힘과 맞먹을 수 있었던 것은 국왕을 끊임없이 견제하며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해온 덕분이다. 만약 그자들을 잡아들여 감찰부의 비리를 확보 할 수만 있다면, 감찰부에 치명타를 입힐 수가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왕권의 약화로 연결될 것은 뻔한 일.

왕권의 약화는 원로원의 힘이 그만큼 더 강해짐을 의미했다. 그런 커다란 공을 세운 인물을 원로원에서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이번 일만 잘 해결할 수 있다면 자 신이 길드장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니라는 것을 동부지구장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걸 잘 알면서도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화가 날 뿐이다.

동부지구장은 입술을 질근 깨물며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젠장,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 그 자들이 있는 몰몬트 산맥이 얼마나 넓은지 너는 모르느냐? 만약 놈들을 잡겠답시고 내가 우리 지구 길드원들을 대규 모로 동원한다면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너구리 같은 길드장이 눈치챌 거야.”

공로를 독식하기 위해 이런 중요한 정보를 일부러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게 발각되면 질책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칫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 기에 동부 지구장이 이런 큰 ‘껀수를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이고만 있는 것이다. 막강한 힘을 지닌 마법사 길드였기에 그 권력 싸움 역시 상상을 초월할 만큼 치열했다.

“그걸 제가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지구장님.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서 이런 말씀을 드린 겁니다.”

“호오, 그래? 그 좋은 생각이란 게 대체 무엇이냐?”

평상시에도 기발한 계책을 곧잘 내곤 했던 부하였기에 동부 지구장의 눈빛이 일순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길드장님이 눈치채기 전에 우리 쪽에서 미리 놈들의 신병을 확보하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광활한 산맥을 뒤지는 것인 만큼 길드원 몇 명 보내 봐야 어림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대규모로 보내자니 상부에서 눈치채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 올 테니 그게 문제가 아니냐.”

“흐흐, 길드원을 동원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몰몬트 산맥의 길목인 세브롱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단을 이용하시라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정보가 누설될 일도 없고, 혹시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을 빼 버리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충분히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였기에 동부지구장은 다급히 물었다.

“세브롱 요새의 기사단이라고……?”

세브롱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건 호크 기사단의 분견대였다.

“분견대장인 스트론은 비리를 저지른 게 들켜 좌천된 놈입죠. 지구장님께서 손을 뻗으신다면, 미친 듯이 핥아댈 겁니다.”

부하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즉시 알아챈 동부지구장. 그의 얼굴에 음흉스런 미소가 번졌다. 이 일을 잘만 처리할 수만 있다면 그토록 바라던 마법사 길드의 길드장 이 되는 탄탄대로가 열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