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3권 5화 – 새로운 추격자
새로운 추격자
덩굴의 공격이 또다시 있을까봐 대장과 샘은 돌아가면서 밤새도록 경계했지만,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라이가 간신히 잠에 빠져든 것도 날이 밝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샘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해독약을 발라주긴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서서히 독기가 가 라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축 늘어져 있는 라이를 흔들어 깨우는 대장.
“이봐, 일어나.”
“끄응…….”
“다리는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요. 어젯밤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이다. 걸을 수는 있겠냐?”
라이는 몸을 일으켜 몇 발자국 걸어 봤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고통 탓에 절룩거릴 수밖에 없긴 했지만, 그럭저럭 걸을 만은 했다.
“그 정도면 거의 다 나은 거나 마찬가지네. 짐 챙겨라. 출발해야지.”
“밥도 안 먹고요?”
“이상한 식물이 공격해오는 이곳에서? 아서라.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후에……..
이때, 주위를 둘러보고 온 샘이 돌아왔다.
“뭔가 찾아낸 거 있냐?”
“아뇨. 하지만 좋은 걸 발견했습니다.”
“뭔데?”
“동굴입니다.”
싱글거리며 웃는 샘과 달리 대장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되물었다.
“동굴? 동굴에서 뭐하려고?”
원래 날이 밝으면 최대한 멀리 도망칠 계획이었다. 뿌리를 땅에 박고 사는 식물인 만큼 쫓아오지는 못할 테니까.
“동굴에 들어가 봤는데, 꽤 깊고 넓더라고요.”
깊다는 말에 대장의 눈이 번쩍 빛났다.
“동굴 안으로 끌어들이자는 건가?”
“그렇죠. 이 망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 수가 없고, 또 어디까지 분포해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싸워야 한다면 차라리 우리가 유리한 곳으로 적을 끌어들이 는 게 좋지 않을까요? 게다가 저놈 발이 저래서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도 힘들 테니 말입니다.”
“자네 말이 옳군.”
고개를 끄덕인 대장은 주위를 쓱 둘러본 다음 신경질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식인식물 따위야 볼 수만 있다면 별것도 아니지. 두고 보자. 아주 박살을 내 줄 테니까.”
이곳에서는 주변 식물들과 섞여있는 통에 놈의 본체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동굴처럼 아무런 식물도 자랄 수가 없는 곳이라면 얘기가 틀리다. 그곳으로 들 어온 식물은 몽땅 다 식인식물일 테니까.
대장과 라이는 샘을 따라 동굴로 갔다. 과연 샘의 말대로 동굴은 꽤 컸다. 입구는 작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넓어졌다.
“괜찮은데.”
만족해하는 대장과 달리 라이는 암흑이 짙게 깔려 있는 동굴 안 깊은 곳을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살펴봤다. 예전에 동굴 속에서 놀(Gnoll)에게 뜨거운 맛을 본 적이 있었던 그였기에, 이런 음침한 동굴에 있어야 한다는 게 달가울 리 없었던 것이다.
불안해하는 라이의 마음을 알았는지 대장은 다행히도 동굴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요는 식인식물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으니까. 대장은 주위를 대충 훑어 본 뒤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라이, 넌 불을 피워라.”
그리고 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넌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가 땔감을 주워오도록 하자. 혹시 모르니 밤새도록 태울 수 있도록 넉넉하게 말이야.”
식인식물에 쏘인 탓에 다리가 불편한 라이를 위한 배려였다.
밖에서 땔감을 잔뜩 장만해 와 모닥불부터 피웠다. 대장과 샘이 장만해 온 나무들은 모두 축축하게 젖어있었기에 연기를 잔뜩 뿜어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들은 바람이 동굴 속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기가 동굴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연기의 방향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식인식물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정말 그것들이 동굴까지 쫓아올까요?”
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글쎄다. 나도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뭐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식물 주제에 주위 상황을 파악하며 공격할 지능은 없을 것 같은데.”
대장의 의견에 샘도 동의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어젯밤의 공격패턴으로 봤을 때, 놈들은 주위에 먹잇감을 발견하면 무조건 공격하는 것 같습니다. 줄기가 많이 잘려 버린 탓에 지금은 잔 뜩 웅크리고 있겠지만, 밤이 되면 또 다시 공격해 올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겠죠.”
줄기에 휘감기거나 찔리지만 않는다면 그다지 상대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에 대장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자, 밤새도록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고생했으니 뭐라도 좀 먹고 푹 쉬도록 하자. 오늘 밤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나저나 라이의 발이 빨리 나아야 할 텐데.”
험한 몰몬트 산맥을 넘으려면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힘들었다. 그렇기에 대장은 무리해서 산맥을 넘기 보다는 차라리 하루 푹 쉬며 체력을 회복하는 게 더 낫겠다 는 생각에 이렇게 결정한 것이다.
모닥불 위에 작은 냄비를 걸고 곡물을 넣어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라이가 죽을 끓이는 동안 샘은 육포를 잘라 일부는 죽 속에 넣고, 나머지는 나무막대에 꽂아 불 에 구웠다. 고기가 익으면서 구수하면서도 누릿한 냄새가 동굴 속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모두들 동굴 밖을 경계하며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적은 의외로 동굴 밖이 아닌 동굴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취익, 칙!”
등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온 콧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뒤쪽으로 돌아갔다. 오크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오크라고 단정 짓기에도 어려웠다. 오크와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훨씬 더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겉모습뿐만이 아니다. 라이는 놈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예전에 지겹도록 맡았던 오크 냄새와 조금 다르다 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생김새로 봤을 때, 오크 말고 딱히 떠오르는 다른 몬스터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변종 오크…, 인가요?”
라이의 질문에 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글쎄다……. 뭐, 오크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생긴 거 보니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샘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쳤다. 오크 따위가 변이가 일어나서 강해져 봐야 얼마나 강해지겠는가. 그래 봐야 오크인데……. 그가 활에 장전하기 위해 막 화살을 꺼내들려 할 때였다.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던 변종 오크가 움직인 것은.
탓!
그런데 이건 평범한 오크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눈 깜박할 새에 좁힌 변종 오크가 제일 먼저 노린 것은 샘이었다. 만약 샘이 어설픈 궁수였 다면 그 일격에 숨통이 끊어졌으리라.
위기감을 느낀 샘이 급하게 몸을 굴려 가까스로 변종 오크의 기습적인 일격을 피해냈다. 그와 동시에 모닥불빛에 변종 오크가 들고 있는 무기가 뭔지 드러났다. 그 런데 놈이 들고 있는 것은 투박한 나무 몽둥이 따위가 아니었다.
“창?”
그것도 엉성하게 만든 엉터리 창이 아니라, 날카로운 쇠붙이가 제대로 장착되어 있는 진짜 창이다. 뒹구르르 몸을 굴려 공격권에서 도망치려는 샘을 바짝 따라붙 으며 변종 오크가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놈의 창이 샘의 몸통을 막 꿰뚫으려는 찰나, 대장의 장검이 번쩍였다.
챙!
그와 동시에 쌍방 간의 무기가 불을 뿜었다. 화려한 창놀림. 수준 높은 창술은 아니었지만 기본은 갖추고 있다. 저게 오크가 맞나? 아니면 오크의 탈을 쓴 사람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쌍방 간의 승부가 갈렸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변종 오크. 가슴이 쩍 벌어져 있고, 피가 샘솟듯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걸 본 라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던 도끼 를 아래로 슬그머니 내렸다. 저 정도의 상처라면 치명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곧이어 변종 오크가 무너지듯 쓰러지리라.
하지만 라이의 예상은 또다시 빗나갔다. 비틀거리던 변종 오크가 갑자기 도약하더니 라이를 향해 창을 휘둘러 왔던 것이다. 방심하고 있던 라이는 기겁을 하며 도 끼를 들어 올려 간신히 공격을 막아냈다.
챙!
도끼를 들어 막지 않았다면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뻔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방금 전의 공격은 죽기 전에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식의 발악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기습공격이 실패하자 변종 오크는 마치 춤을 추듯 창을 휘두르며 연속적으로 라이의 목숨을 노려왔다. 도끼로 창날을 겨우겨우 쳐내던 라이는 우연히 놈의 가슴어림을 보게 되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장이 보일 정도로 쩌억 베였 던 변종 오크의 가슴에서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숨이 차오를 만큼 격하게 움직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거 오크가 아니라 트롤이었나? 하지만 아무리 봐도 오크인데…….”
수세에 몰린 라이는 급하게 대장을 찾았다. 방금 전의 격돌 이후로 대장은 뭔가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듯 멍하니 서있었다. 그 때문에 변종 오크의 공격을 라이 혼 자 감당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오크였다면 즉사를 해도 몇 번은 했을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공격을 해오니 라이로서는 환장할 지경 이었다.
“이봐요, 대장! 이 괴물 좀 어떻게 해 봐요!”
비명에 가까운 라이의 외침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대장은 변종 오크의 뒤쪽으로 재빨리 다가서더니 단칼에 목을 날려 버렸다. 떨어져 나간 변종 오크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올라왔다.
라이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목이 잘린 오크가 다시 일어나 창을 휘두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죽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휴, 죽다 살았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라이는 대장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바뀌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는 동굴 안쪽을 힐끗 바라봤다. 혹시 대장은 저 안에서 변종 오크들이 우글우글 달려나올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대장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야 돼!”
대장의 말에 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바람이 동굴 안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건 사실입니다만, 지금 당장 도망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모양을 보니 제대로 된 오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제대로 된 오크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 빨리 나가자!”
라이는 모닥불 위에 굽고 있던 고기를 힐끔 바라봤다. 그의 마음을 느꼈는지 대장이 채근한다.
“어서 서둘러!”
마지못해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라이. 그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걸 느낀 대장이 말해줬다.
“저건 키메라야.”
“키메라요? 그런 몬스터 이름은 처음 들어보네요. 난 오크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마법생물 키메라 말이다. 너는 키메라가 뭔지도 모르냐?”
라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쉰 후 말했다.
“설명은 나중에 시간 날 때 자세하게 해 주마. 어쨌거나 키메라라는 건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마법사들이 만든 마물이야.”
대장의 말에 샘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저 안에 던전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마법사가 저런 키메라를 단 한 마리만 만들었을 리는 없다는 것을.”
“던전이라면 들어가서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 속에 마법사가 숨겨 놓은 보물이나…….”
아직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한 라이가 순진한 얼굴로 끼어들었다가 대장의 야단만 맞았다.
“이게 어디서 주워들은 영웅담을 떠올리는 모양인데, 던전 탐험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냐? 방금 전에 키메라하고 싸워봤잖아. 얼마나 강한지 말이야. 그런 게 수십 마리쯤 달려 나온다면 너 상대할 자신이나 있는 거냐?”
전설에나 나오던 미지의 던전을 탐험한다는 것에 혹해 있던 라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아뇨.”
“자 조금만 더 도망치자. 던전을 지키는 놈들일 테니 밖에까지 따라 나오지는 않을 거야.”
“젠장, 제가 제대로 정찰을 했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대장.”
“자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나. 어쨌거나 이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둘 수가 없다는 게 한이로군. 모험가 길드에 이 위치를 알려 주면 두둑하게 한몫 받아낼 수 있었 을 건데…….”
일행이 동굴 밖으로 빠져나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키메라 오크 여섯 마리가 동굴 속 깊은 곳에서 꿀꿀거리며 달려 나왔다. 그들은 목이 잘린 채 쓰러져 있는 동 료를 발견하자마자 한 마리는 다시 동굴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고, 나머지는 그 주위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가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고, 키메라 오크는 던전을 지키는 파수꾼일 거라는 대장의 예상이 맞은 것일까? 키메라들은 침입자의 존재를 파악했음에도 불구하
고 밖으로 달려 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죽은 동료의 사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주변을 경계하는 척이라도 하고 있 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시선은 사체로 집중되었다.
그들이 사체를 둘러싸고 모인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주르륵..
굵은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는 입술 사이로 침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중 한 마리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사체의 손을 붙잡고 덥석 베어 물었다. 처음 시작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러자 주위에 둘러싸고 있던 다른 오크들 역시 사체의 각 부분을 노리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우직우직…, 쩝쩝쩝
동굴 안쪽이 환하게 밝아 오기 시작하더니, 웬 여자의 상큼한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콜록콜록! 이게 무슨 냄새야? 멍청한 것들! 이상이 있으면 나한테 보고하라고 했더니, 그런 것도 제대로 못해?”
천천히 걸어나오는 여자의 앞에는 환하게 빛나는 구체(體) 하나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마법사들이 어두운 곳에서 횃불 대용으로 흔히 사용하는 라이트 마법 이다.
여자의 용모는 이런 동굴 속에서 흉칙하게 생긴 오크 떼와 어울리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방금 전 동굴 안으로 달려갔던 오크 한 마리가 그녀의 뒤에서 풀이죽은 채 따라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녀가 이 오크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밖에 불이라도 난 거야? 어?”
싸늘하기만 했던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극도의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동굴 바닥에 어지러이 찍혀있는 발자국과 모닥불의 흔적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 흩 뿌려져 있는 시뻘건 핏자국도…….
“침입자?”
여행객들이 애용하는 두터운 가죽부츠가 남긴 발자국이다. 그녀는 모닥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모닥불 주위에 흩뿌려진 시뻘건 핏자국으로 다가섰다.
축축하게 피에 젖은 흙을 조금 집어 만져 보기도 하고 냄새도 맡아 보며 분석을 하는 여마법사. 곧이어 그녀는 이 피가 오크의 것이며, 피의 상태가 아주 신선하다 는 것을 파악해 냈다.
여마법사는 싸늘한 표정으로 키메라들에게 일갈했다.
“이 망할 놈들아! 내가 먹는 걸 허락하지 않은 사체는 절대 먹지 말라고 했잖아. 앙!”
그러자 마치 엄마에게 야단맞은 애들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딴청을 피우는 키메라들.
대장은 동굴 속에 대마법사가 건설한 던전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사실은 원로원에서 건설한 비밀연구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오크형태의 키메 라도 이곳 비밀연구소에서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만들어 낸 작품들 중 하나였다.
모델넘버 ‘CE003’, 연구원들끼리는 보통 ‘3호’라고 불리는 이 키메라 오크는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대가리가 너무 나쁘다는 점이 흠이었고, 그 점 이 그녀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머리가 나쁘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해도 좋겠는데, 이놈들은 시키는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있었다. 이번 경우가 그 좋은 예다. 먹는 걸 허락받지 못한 사체는 절대 로 먹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놨건만, 식욕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인내심이 형편없는 놈들이었다. 하기야 오크 대가리를 붙여 놓은 키메라에게서 뭘 더 바 랄까만은..
침입자들의 발자국은 키메라들이 짓밟아 엉망으로 되어 있었고, 사체는 깨끗하게 뜯어먹어 버려 커다란 뼛조각 몇 개 외에는 남은 게 없다.
“으이그, 내가 미쳐. 이런 돌대가리 자식들을 데리고 경비를 해야 하다니…….”
어쩔 수 없이 여마법사는 마법으로 대지의 기억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고차원적인 마법이라 꽤나 힘이 들었지만 어쩔 것인가. 이것 외에는 침입자를 알아낼 방법 이 없는데.
대지의 기억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마법사는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냈다. 침입자는 모두 셋. 희미한 영상이긴 했지만 그들의 행색 으로 봤을 때 모험자 패거리인 듯했다.
여마법사는 키메라들에게 동굴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명령했다.
“이곳에 들어왔던 침입자들을 찾아서 죽여.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머리통만큼은 반드시 가지고 와. 알겠어?”
머리통을 가져와야 키메라들이 침입자들을 확실히 없앴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그렇게 명령한 것이다. 시체를 먹어도 된다는 말에 키메라 오크들은 신이 나서 동 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여마법사는 핏자국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청소를 시작했다. 오크 뼈는 물론이고 주위에 흩뿌려진 핏자국까지도 마법으로 깨끗하게 태워 없앴다. 키메라의 사체는 피 한 방울조차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처리해야만 했다. 이 피를 흡수한 식물이 식인식물로 변태하는 것이었으니까.
이 문제점만 없었다면 키메라 오크는 오래전에 대량으로 생산되어 알카사스 왕국의 군사력 증대에 일익을 담당했었으리라. 하지만 아직까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소량만이 생산되어 연구소의 경비용으로 사용되며 테스트되고 있는 중이었다.
동굴을 벗어난 라이 일행은 입에서 단내가 나오도록 산길을 내달렸다.
“저 위로 올라가자!”
대장이 가리킨 곳은 산봉우리 위쪽이었다. 그쪽은 돌이 많아서 그런지 키 큰 나무가 거의 자라지 못해 넓은 공터를 이루고 있었다.
셋은 미친 듯 치달리다가 숨이 턱 끝에 차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걸음을 멈췄다.
헐떡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는 샘. 그에 비해 라이는 거친 숨을 내쉬고는 있었지만 다소 여유가 있는 표정이었다. 이건 확실히 대장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었다. 어린놈의 체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렇지, 산악전 전문가인 레인저보다 더 좋다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인식물에 발을 찔려서 제대로 걷기 조차 힘들어했지 않았던가.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녀석이로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까지 체력이 좋을 수가 있지? 웬만큼 훈련해서는 도저히 저런 체력을 만들 수 없는데 말이야…….” 잠시 라이를 쳐다보던 대장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지금은 라이의 체력 따위에 신경을 쓸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키 작은 관목이나 풀밖에 없었기에 저 아래쪽까지 훤히 내려다보였다.
“헉헉, 따라오는 거 같냐?”
“아,아뇨. 따라오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헉헉, 대장님 예상대로 그 키메라는 던전을 지키는 파수꾼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안심하기는 일러. 그 던전 속의 마법사가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에 따라서 키메라들의 대응이 달라질 테니까 말이야. 마법사가 오래전에 죽어 버 렸길 비는 수밖에.”
그 순간 대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풀을 뚫고 여섯 마리의 키메라 오크들이 달려 나오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태생적 한계상 다리가 짧은 놈들이었지만, 치달리고 있는 그들의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았다.
키메라 무리들을 자세히 살펴보던 대장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우려했던 것보다 숫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법사도 없는 듯했다. 키메라를 만든 고위급 마법사가 함께 따라왔다면 죽었다고 복창해야 했을 텐데 말이다. 저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으리라.
빨리 해치우고 더욱 멀리 도망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대장은 아직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샘의 등을 툭툭 쳤다.
“이봐, 나왔어.”
샘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느라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며…, 몇 마립니까?”
“여섯 마리. 어쨌거나 다행이야. 마법사가 만든 키메라가 몇마리 되지 않았던 모양이니까 말이야.”
샘은 자신들이 있는 쪽을 향해 짧은 다리로 뒤뚱거리면서 부지런히 달려오고 있는 키메라 오크들을 바라보다가 가래침을 퉤 뱉으며 투덜거렸다.
“망할 놈의 새끼들.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지?”
“독화살 준비해. 아까 보니까 회복력이 좋아서 화살 따위로는 죽지도 않겠더군.”
샘은 품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마개를 연 다음, 화살촉을 차례로 병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독을 묻힌 화살은 옆에 따로 가지런히 놨다. 혹시 실수로라도 화살촉에 긁히기라도 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운 것이다.
샘은 자신의 행동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고만 있는 라이에게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소리쳤다.
“뭐하고 있어? 너도 묻혀.”
“예? 예.”
라이도 서둘러 자신의 화살을 꺼내 독을 묻히기 시작했다.
“맹독성이니까 끝에만 살짝 묻혀도 충분해.”
라이의 화살은 워낙 크고 길기에 연사에는 불리했다. 그렇기에 그는 화살 3개에만 독을 묻혔다. 많이 쏴 봐야 3발 정도가 한계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샘과 라이, 두 명은 시위에 화살을 건 채로 키메라 오크들이 사정권 안에 들어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사정권 안에 들어왔음을 확 신한샘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피웅!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키메라에게 명중할 때쯤, 샘은 벌써 다음 화살을 장전한 채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모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살에 가슴을 명중당한 키메라가 전혀 데미지를 입지 않은 듯 계속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분명 바뀐 건 있었 다. 화살에 맞은 키메라의 흉성이 폭발한 듯 기괴한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오던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이다.
“혹시 병이 헷갈린 거 아냐?”
대장의 물음에 샘은 짜증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쇼. 헷갈릴 게 따로 있지. 제가 지니고 다니던 독병을 헷갈리겠습니까?”
그 말에 대장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두 사람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벌써 눈치챈 것이다. 저걸 만든 마법사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독 에 면역력을 심어놓은 것이라는 걸. 하지만 대장은 자신의 생각을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자칫 샘이나 라이의 마음이 흔들려 집중력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샘은 이미 동요하고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쏜 화살이 연거푸 빗나간 것이다. 대장은 샘의 어깨를 토닥이며 나지막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조언했 다.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금은 제대로 쏘는 데만 집중해. 어쩌면 독약 효과가 조금 늦게 나타나는 건지도 모르니까.”
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심호흡을 했다. 그런 다음 맨 앞에 달려오는 놈을 목표로 향해 시위를 놨다.
피웅~
퍽!
이번에는 정확하게 명중했다. 하지만 맞춰 봐야 뭐하겠는가. 첫 번째 화살에 격중되었던 키메라가 아직까지도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데……. 걸리적거리는 화살은 이미 뽑아 버린 상태였고,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도 어느덧 멈춰 버렸다. 가슴에 나 있는 핏자국만 아니라면 놈이 화살에 맞았는지조차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이런 씨팔!”
샘은 자신의 화살 공격이 키메라에게 별다른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대장은 고 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선을 라이에게로 돌렸다. 노회한 그였기에 레인저인 샘이 이 정도라면 라이가 얼마나 많이 동요하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던 것이다. 그 런데 놀랍게도 라이는 전혀 흔들림 없이 화살을 키메라에게로 겨눈 채 시위를 놓을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사실, 라이는 샘의 첫 번째 화살이 키메라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도망치고 싶다는 욕구에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대장과 샘이 키메라 떼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동안 자신만 몰래 도망친다면? 하지만 곧이어 라이는 생각을 바꿨다. 지금 이 위급한 상황에서 겨우 빠져나간다고 해 봐야 자신이 잡힐 때까지 끝없이 쫓기는 일만 남을 테니까. 결국 키메라나 추격자의 검에 목이 잘린 시체가 될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저 둘과 함께 협력해서 키메라와 싸우는 게 훨씬 더 생존 확률이 높은 것이다. 무엇보다 라이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대장의 엄청난 검술 실력 때문이긴 했지만.
그런 라이를 보며 대장은 씁쓸한 미소를 감추기 힘들었다. 만약 이런 상황이 아닌, 탈출에 성공해 안정적인 삶을 살 때 만났더라면 제자로 삼아도 괜찮겠다는 생각 이 든 것이다. 하지만 라이가 기대한 것과 달리 그가 라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언젠가 미끼로 써먹기 위한 것이었다.
샘이 거의 조준도 하지 않고 속사(速射)로 쏘고 있는데 반해, 라이는 첫발을 아주 신중하게 조준했다.
사정권 안에 들어왔나??
아무래도 조금 먼 것 같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초조하게 망설이던 라이가 일순 시위를 놨다. 커다랗기 짝이 없는 그의 화살은 날아가는 박력 자체가 달랐다. 슈우우우-
거리가 짧아서인지 커다란 화살은 키메라의 머리통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퍽!!
샘이 쏜 화살에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던 키메라 오크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화살에 머리통이 꿰뚫림과 동시에 뒤로 벌렁 자빠져 버린 것이다. 산 아래로 데굴 데굴 굴러 내려가는 키메라를 보며 라이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커다란 활과 화살을 힘들게 들고 온 보람이 있는 것이다.
슈우우-
두 번째 화살에 맞은 키메라도 뒤로 자빠져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네 마리. 샘은 놀라운 속도로 화살을 쏴 대고 있었지만, 놈들에게 그런 공격은 모기에 물린 정도 의 타격밖에 입히지 못했다. 녀석들의 뛰는 속도조차 줄이지를 못하고 있었으니까.
피슝.
마지막 독화살까지 날린 후, 샘은 일반 화살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활을 내려놨다. 독화살도 통하지 않는 판에 일반 화살로 쏴봤자 헛짓거리라고 판단한 것이 다. 그는 등에 매고 있던 방패를 풀어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는 단검을 뽑아들고 곧이어 시작될 육박전에 대비했다.
라이가 세 번째 화살을 시위에 간신히 장전했을 때는 키메라 오크들이 20여 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까지 육박해 들어온 상태였다. 라이는 급히 세 번째 화살을 날 렸다. 워낙 코앞에서 쏜 화살이었기에 키메라는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무참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라이는 자신이 쏜 화살에 키메라 오크가 격중되었는지 살펴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곧바로 활을 던져버리고 허리에서 도끼를 뽑아들어 키메라가 내지르는 창부 터 막았다.
태앵!
창과 도끼자루가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이는 강한 힘으로 오크의 창을 튕겨 올림과 동시에 한손 도끼를 양손으로 붙잡고 힘껏 휘둘렀다. 그 덕분 에 평소처럼 왼손에 방패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불가능했을 빠른 속도로 키메라 오크에게 역공을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공격은 키메라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겼다.
키에엑!
키메라 오크가 뒤로 고개를 힘껏 젖힌 탓에 목을 완전히 잘라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1/3쯤은 잘라낼 수 있었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의외로 쉽게 한 놈 해치웠다고 생각한 라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대장은 예상대로 키메라 오크를 손쉽게 다루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샘도 위태롭기는 했지만 키메라 오크의 매서운 공격을 차분히 막아 내고 있었다.
“먼저 샘부터 도와주자.’
마음을 먹고 샘쪽으로 채 한걸음도 옮기기 전에 라이는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쐈던 자신의 화살에 가슴이 적중되었던 키메라 오크가 부시시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놈은 자신의 몸에 꽂혀 있는 화살을 분질러 버린 후, 남은 토막을 밀어서 몸에서 뽑아냈다. 화살이 뽑힌 자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지만, 그것도 잠시. 곧 이어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이 믿기지 않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라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게 가능한 일이야?”
그 순간 그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해괴한 느낌과 함께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몸이 옆으로 쓱 움직인 것이다. 그와 동 시에 자신이 서 있던 위치를 거칠게 훑고 지나가는 창 한 자루. 놀랍게도 그건 방금 전 자신이 해치웠다고 지레 짐작했던 키메라 오크놈이 휘두른 것이었다. “헉?!”
라이는 경악했다. 죽였다고 생각한 키메라 오크는 아직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목 부분에 붉은 피가 흥건하게 묻어있긴 했지만……
“이런 망할 놈! 정 그렇다면 다시는 살아날 수 없도록 모가지를 뎅강 잘라 주마.”
화살에 맞았던 키메라 오크가 여기에 도착하기 전에 놈을 해치워야만 했다. 살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저놈이 살아난 것을 보면, 남은 두 마리도 살 아날 가능성이 컸다. 만약 그놈들까지 모두 다 가세한다면 무조건 죽음뿐이다.
그런 초조함이 라이의 몸을 딱딱하게 경직시켜, 오히려 평소보다 몸놀림을 둔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놈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위치는 정해져 있다. 키메라 오크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방금 전에 베였던 목 언저리에 대한 방어를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 그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 둘 간의 대결은 라이의 기대와 달리 팽팽하 게 이어지고 있었다.
챙! 챙! 툭! 퍽!
결국 생각하기도 싫었던 사태가 벌어졌다. 두 번째 화살에 맞았던 키메라 오크가 전장에 도착한 것이다. 라이는 그때까지 눈앞의 키메라 오크를 어떻게 하지 못하 고 있는 상황. 라이의 눈에 절망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서걱.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기적이랄 것도 없었다. 대장이 자신이 맡고 있던 키메라 오크의 목을 날려버리고 달려오던 키메라 오크를 맞이한 게 어찌 기적이겠는 가. 라이가 기적이라고 느낀 것은 그만큼 이 기괴한 키메라 오크에게서 받은 심적 충격이 컸던 탓이다.
라이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대장은 전장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라이에게 또 한 마리의 키메라가 달려들자, 자신이 맡고 있 던 키메라 오크의 목을 단칼에 날려 버리고 전장의 균형을 맞춘 것이다.
대장이 트롤까지 해치운 실력자라는 걸 떠올리자 불안에 떨던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었다. 라이는 격렬하게 방패와 칼을 휘두르며 키메라 오크를 압박해 나가기 시작했다. 본인이 가진 실력이 유감없이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