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3권 6화 – 대체 어떤 놈들이지?
대체 어떤 놈들이지?
처음에는 예상보다 침입자가 멀리 도망쳐 버렸기에 늦어지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키메라 오크들을 내보낸 후 1시간이 흘러가자 여마법사는 뭔가가 잘못되 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렇게까지 늦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즉각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외곽경비대를 집합시켰다. 외곽경비대는 ‘4호’라고 불리는 CE004 1마리와 ‘3호’라고 불리는 CE003 30마리로 이뤄진 강력한 집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CE003이 7마리나 빠져 버려 24마리로 줄어 있었다.
오크의 강력한 후각을 이어받은 덕분에 키메라들은 곧장 동료의 흔적을 찾아내어 뒤를 쫓아갔다. 격전은 그리 먼 곳에서 벌어진 게 아니었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 진 흔적과 함께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키메라의 사체들. 모두 다 하나같이 몸통과 머리가 분리되어 있었다.
흔적들을 살펴보고 있던 여마법사의 눈에 특별한 물건이 하나 들어왔다. 그녀가 땅바닥에서 집어 든 것은 언뜻 창이라고 오판할 정도로 크고 긴 화살촉이었다. 그 녀는 이런 화살을 쓰는 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도렌 영지?”
하지만 곧이어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겨진 흔적으로 봤을 때 적의 숫자는 겨우 셋. 병사 따위가 2배수가 넘는 키메라를 처치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지만, 도 렌 영지병들이 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런 깊은 곳까지 들어올 리가 없다.
“아니야. 병사는 아닌 것 같고…, 어쩌면 현지에서 고용된 용병이겠지.”
이런 투박한 화살을 쓰는 용병의 실력이야 뻔한 것일 테고, 나머지 둘의 실력이 상당한 모양이다. CE003 여섯 마리를 해치우고도 아무도 죽지 않은 걸 보면 말이 다. 그렇다면 그 둘은 꽤 이름 있는 모험가일 가능성이 컸다.
“제길, 일이 귀찮게 됐잖아. 녀석들이 이곳에서 키메라를 발견했다는 소문을 사방에 퍼뜨리는 것만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해.”
키메라가 던전을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생각하고 수도 없이 많은 모험가들이 이리로 몰려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겠는가. 그것들을 몽땅 다 해치우든지, 아니면 연 구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든지 양자택일을 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곳에 이 정도 규모의 연구소를 건설하는 데 얼마나 많은 자금이 투입되었는데……. 결단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연구소장이 자신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부대에 유일하게 있는 CE004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CE004는 CE003을 더욱 개량한 키메라로서 CE003보다 50%정도 더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 고 있었다. 그런 그를 여마법사는 대장으로 임명하여 부려먹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놈들을 찾아서 반드시 죽여라.”
“취칙, 알겠다…….?
키메라들에게 용병들의 추적을 명령하려던 그녀는 곧이어 자신이 미처 하지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섯 구의 사체들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그걸 그녀 혼자서 없애려면 꽤나 힘들고 성가시다. 이런 경우에는 키메라의 도움을 받는 쪽이 한결 수월하다.
“가기 전에 배를 채울 수 있도록 저것들을 다 먹어치워. 그리고 핏자국과 삼키지 못하는 뼈는 한곳에 모아 놓도록.”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키메라 오크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앞 다투어 동료의 사체들을 뜯기 시작했다.팔 한짝을 들고 뜯어먹거나, 두 손 가득 내장을 들고 먹거나.
순식간에 주위는 사체에서 뿌려진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런 피 튀기는 식사 모습이 너무나도 역겨웠던 그녀는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 렸다.
“젠장,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를 않네.”
처음부터 휘하 전력을 몽땅 다 투입했어야 했는데……. 어쨌거나 저들을 다 투입한 이상, 녀석들의 질긴 명줄도 이걸로 끝일 것이다. 놈들의 실력이 제 아무리 좋 다고 해도 저들을 상대로는 절대 살아날 수 없을 테니까.
오도독, 와드득.
뼈째로 생살을 씹어 먹는 끔찍한 소리에 귀까지도 틀어막고 싶어진다. 그녀는 키메라들의 식사 장면이 보기 싫어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그런데, 이때 뭔가 이상 한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능선 위쪽 파란 하늘에 찍혀 있는 시커먼 점 하나. 처음에는 독수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곧이어 그녀는 그게 와이번이라는 것을 깨달 았다. 마법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재빨리 품속에서 작은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와이번은 야생이 아니라 사람이 부리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와이번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이 둘 보였다. 워낙 멀어 얼굴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것을 보자마자 여 마법사는 자신의 타고난 조심성으로 마법을 쓰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마법을 썼다면, 저 와이번의 뒷 자리에 타고 있는 마법사가 금방 눈치챘을 테니까. 마법사는 다른 건 몰라도, 마나의 움직임에는 아주 민감한 족속인 것이다.
순간, 그녀는 키메라 오크들을 이대로 보내도 괜찮을까 고민했다. 와이번이 날고 있는 방향으로 봤을 때, 어쩌면 저들과 키메라들의 동선이 겹치는 지점이 생길 우 려가 있었던 것이다.
잠시 고민하고 있던 그녀에게 키메라 오크 대장이 다가왔다.
“취익, 다 먹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자신이 지시한 대로 한곳에다가 뼈들을 모아 놓은 게 보였다.
“이제 놈들을 쫓아가 죽여. 죽인 뒤 시체를 먹어치우는 건 상관없지만 머리통은 꼭 가져와. 알겠어?”
“취칙! 알겠다.”
키메라 오크들을 보낸 후, 홀로 남은 그녀는 마법을 사용해서 흔적을 태워 버릴까 고민하다가 그냥 놔두기로 했다.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법을 쓰면 용기사 일행이 눈치챌 게 뻔했으니까.
“조심해야겠군. 이 일대는 순찰을 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요 근래에 순찰 범위에 포함된 모양이지? 대규모 마법을 쓰기 전에는 필히 대공 감시를 해두는 게 좋겠 어.”
발로 흙을 밀어 뼈 위에 대충 덮은 그녀는 와이번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국경 순찰을 돌고 있는 용기사를 본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좀 쉬었다가 가자.”
대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거리는 샘. 누가 봤으면 그가 가장 초보자인 줄 알겠지만, 사실 숲 속에 있어서 최고의 전문가는 바로 샘 이었으니 작금의 상황이 정말 특이한 경우라고 봐야 했다.
“견딜 만하냐?”
“예, 대장.”
대장은 품속에서 돌덩이 같은 육포 조각을 꺼내 들며 라이에게 건네주었다.
“틈틈이 뭐라도 좀 먹어 둬. 이런 때는 체력이 떨어지면 끝장이니까 말이야.”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까 보니 도끼를 아주 잘 다루던데…, 누구에게서 배웠나?”
“용병단에 있을 때 루베르크라는 교관님께 배웠습니다. 루톤식 도살법(屠殺法)이라고 하던데요.”
라이의 대답에 대장은 어이가 없었다. 루톤식 도살법이라면 가장 기본적인 도끼술들 중 하나가 아닌가. 겨우 그런 기초만을 배워서 키메라 오크와 그 정도로 싸울 수 있다면 누가 고급 도끼술을 배우려 들겠는가. 그렇다면 해답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혹시 도끼 말고 다른 무기를 다뤄 본 적이 있나?”
이미 모든 걸 털어놓은 터라 라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물론 있죠. 아버지께 검술을 배웠습니다. 대장님처럼 뛰어난 검객은 아니셨지만, 섬기던 백작 휘하의 기사들 중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셨죠.” 그렇게 말하는 라이의 어조에는 약간의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아버지의 뛰어난 검술 실력은 그의 어릴 적 자랑거리였었으니까.
“그럼 왜 검을 쓰지 않고, 도끼를 쓰는 게냐?”
예전의 험난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라이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노예로 잡혀간 처지에 입맛에 맞는 무기를 고를 수가 있어야죠. 창고에 쌓여 있던 수많은 고철들 중에서 이게 그나마 쓸 만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라이의 대답에 대장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허어…, 그것 참…….”
어쨌거나 라이가 검술을 배웠다는 게 확실해진 이상, 대장은 그의 실력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대장은 내심 라이가 꽤 높은 수준의 검술을 익히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기초적인 도끼술만 가지고 키메라 오크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대장은 자신의 검을 라이에게 건네주고, 샘에게 단검을 잠깐 빌려달라고 했다. 자신의 장검을 라이에게 건네준 이유는, 라이가 장검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격해 봐.”
대장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미 알고 있는 라이였기에 마음 놓고 검을 휘둘렀다.
챙챙!
대련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키메라 오크가 또 나타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서 라이의 실력을 본답시고 체력을 너무 소모할 수 없었던 게 첫 번째 이유였 고, 두 번째 이유는 라이의 실력이 예상보다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 실력이 그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 어 쨌거나 몇 차례 검을 부딪쳐 본 대장은 더 이상의 대련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그만! 이 정도면 됐다.”
대장은 장검을 돌려받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칭찬을 했다.
“제법 쓸 만한 실력이긴 하구나.”
갑작스런 중단에 라이는 의아한 듯 대장을 바라봤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기술을 몇 가지 써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그만두자니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볼 필요 없다. 이 정도면 네 실력을 충분히 알았으니까. 또, 지금 이런 걸로 힘 빼고 있을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지 않느냐.”
대장은 샘이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해 숨이 진정된 듯 보이자 뒤를 한 번 돌아본 후 말했다.
“어서 출발하자. 더 이상 추격해 오지 않는다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