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3권 8화 – 설마 드래곤의 저주?
설마 드래곤의 저주?
죽은 듯 누워 있는 라이를 바라보는 대장의 시선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변절자조차도 스승으로 삼으려고 들 정도로 절박한 처지에 놓인 소년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20여 마리가 넘는 키메라 오크 떼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을 때, 대장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대장은 라이를 향해 악을 쓰듯 소리쳤다.
“뒤로 후퇴하는 순간, 놈들에게 당한다. 무조건 막아라! 그것만이 살길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대장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키메라 오크 떼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순간, 대장은 도저히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맞서 싸우기에는 키메라 오크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물론, 이런 때가 올 것을 대비해서 세운 작전이 있었다. 그 작전을 세우게 된 기본적인 정보는 자신들을 덮쳤었던 키메라 오크 여섯 마리에게서 얻었다. 원래 키메 라들은 단독행동을 하지 않는다. 지능이 떨어지기에 지휘하는 사람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지휘하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 전에 여섯 마리와 싸웠을 때, 키메라 오크들의 지능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샘이 화살 공격을 시작하자 샘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더니, 라이가 화살 공격을 하 니 놈들은 곧바로 방향을 바꿔 라이를 향해 무조건 달려들었다. 달려오는 오크들을 한 마리씩 맡아 처리하긴 했지만 당시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본 대장은 키메라 오크들이 자신들에게 적대감을 보인 사람에게 먼저 달려든다는 걸 짐작했다.
만약 지휘하는 사람이 있어서 키메라 오크들을 효율적으로 운영한다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겠지만, 혹시라도 없다면? 그때의 경험에 기초하여 대장과 샘은 라 이를 미끼로 던지고 도망칠 계획을 미리 세웠다.
조직적인 공격을 하지 못하는 녀석들이다. 그렇다면 몇 마리씩 짝을 지어 공격을 하거나, 추격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키메라 오크들이 뒤쳐진 라이를 향해 벌떼처럼 달려드는 동안 자신들은 도망칠 생각이었다. 물론, 놈들이 라이를 해치우는 데 몇분 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 리라.
키메라 오크들의 시선이 정신없이 도끼를 휘두르는 라이에게 몰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두 사람은 미리 짠 계획대로 정신없이 달아났다. 무조건 앞만 보고 내달리 던 대장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힐끗 뒤를 돌아봤다. 라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 궁금했으니까. 아직까지 막아 주고 있을까? 아니면 오크들이 이미 라이를 해치 우고 자신의 뒤통수를 향해 육박해 오고 있을까?
이때, 그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미친 듯 오크를 살육하고 있는 라이의 공포스러운 모습을. 방금 전까지 쥐고 있었던 그의 도끼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 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라이는 맨손으로 오크를 잔인하게 찢어 죽이며 미친 듯이 살육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장은 달리던 것도 멈추고 멍한 얼굴로 라이를 바라봤다. 오크의 팔을 붙잡고 통째로 뜯어내 버리는 게 과연 인간으로서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악마…….”
그렇다. 오크의 사지를 뜯어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심장을 뽑아내어 터뜨리고 있는 라이의 모습은 악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그 악마 같 았던 모습을 회상하며 멍한 얼굴로 기절해 있는 라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샘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 기회에 죽여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샘의 목소리에는 짙은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그 제안이 솔깃하게 들리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니리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언제 키메라 떼가 또다시 나타날지도 모르고, 이젠 감찰부의 추격자들도 신경 써 야 할 시기다. 공포스럽고 무섭기는 했지만 엄청난 힘을 지닌 라이만 자신들을 도와준다면 무사히 국경을 넘는 것도 꿈은 아니리라. 물론 미쳐 날뛰는 라이의 손에 자신들이 죽을 위험도 다분히 높긴 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이 녀석 덕분에 목숨을 건졌잖아.”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이 녀석이 싸우는 모습을 조금 전에 보셨잖습니까? 세상에. 키메라 오크의 사지를 무 뽑듯 뽑아 버리다니.”
사지를 뽑는 정도가 아니었다. 라이와 키메라 오크들 간의 격투는 그들의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다. 주먹으로 키메라 오크의 머리를 수박 터트리듯 박살내 버렸고, 칼도 잘 박히지 않는 탄탄한 가슴을 마치 두부라도 되는 듯 손을 쑤셔 넣어 심장을 뽑아냈다. 그리고 꿈틀거리던 심장을 단번에 터트리며 미친 듯이 웃어대던 라이 의 모습. 샘은 그때만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올 정도였다.
대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애써 변명했다.
“최소한 우리를 공격한 건 아니지 않나.”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장님도 보셨잖습니까? 완전히 이성을 잃고 날뛰던 것을. 만약 그때 우리가 옆에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샘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괜찮아, 괜찮아. 공격하지만 않으면 덤벼들지 않을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건 샘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대장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이성을 잃고 키메라 오크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던 라이의 공포스런 모습 을 떠올리면 한 순간도 녀석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었으니까. 녀석이 살의를 품는 순간, 두 사람은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우리를 잡겠다고 키메라 오크들뿐만 아니라, 이제 곧 감찰부의 추격자들까지 몰려올 텐데. 살아서 국경을 넘으려면 악마에게라도 의지하 는 수밖에.”
“그, 그래도…….”
대장은 싸늘한 목소리로 샘의 불만을 틀어막았다.
“더 이상 군소리 하지 마! 이곳에서 살아서 도망치려면 이 녀석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 난 이미 라이와 함께 할 것을 결정했어.”
“에휴, 알겠습니다. 대장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샘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대장은 그의 어깨를 두들겨 안심시켰다.
“걱정 마, 잘 될 거야. 앉아서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거라면 주변이나 살펴보도록 해. 혹시 이쪽에도 식인식물 같은 게 있는지 말이야. 참, 아까 라이가 죽인 그 오크들 사체부터 살펴보는 게 좋겠네. 그놈들이 주변에 있다면 피 냄새를 맡고 그쪽으로 몰려들 테니까.”
“알겠습니다.”
샘이 수색을 위해 자리를 비우고 나자, 대장의 시선은 또다시 라이에게로 향해 있었다. 마치 잠을 자고 있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라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대장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어떻게 자신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능력을 모른 채, 이렇게 어리숙한 모습으로 살 수가 있을까? 그것도 오랜 세월 수련을 거쳐야 만 얻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아닌, 타고난 능력을 말이다.
라이가 자신에게 한 말을 되새겨보면 스스로의 이런 능력을 모르는 것이 확실했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노예로 끌려가 그런 개고생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트윈 헤 드 오우거가 사람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이런 일은 결단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음유시인들이 구슬픈 가락으로 불러대던 옛 용사들의 전설담이라면 또 몰라도…….
이때, 갑자기 대장의 머릿속을 번쩍하며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호, 혹시?”
그렇다. 이런 얘기는 드래곤에 얽힌 전설들 중에 간혹 나오는 주제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용사가 사악한 드래곤의 저주를 받고 기억을 봉인당해 바보같이 생 활하는 이야기.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기억을 회복한 용사가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고는 동료들을 모아 드래곤에게 복수한다는, 뭐 그런 내용 말이다. 대장은 다시 한 번 라이의 얼굴을 자세히 훑어봤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심해했지만, 좀 전의 그 살이 떨릴 정도의 잔악한 학 살극을 떠올리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처럼 느껴졌다. 라이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가만, 드래곤은 겉모습쯤은 마법을 통해 손쉽게 바꿀 수 있다고 하잖아. 그럼 나이가 어려 보이게 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지.’
드래곤이 기억을 봉인한 용사. 그렇다면 이자의 본모습은 도대체 뭘까? 드래곤이 겉모습을 바꾸고 나이가 어려 보이게끔 할 정도의 용사라면 최소 그래듀에이트 급 이상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알아낼 방법이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왕국 내에서 최고의 실력을 지닌 기사들이 모인 곳이라면 근위대밖에 더 있겠는가. 근위기사들에 대한 내용은 모든 게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그들이 적국의 암살 자에게 암살이라도 당하게 되면 큰일이었으니까.
더군다나 라이는 알카사스의 기사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녀석의 억양에 크라레스쪽 사투리가 짙게 배어 있는 것을 보면. 라이는 아버지가 섬기는 백작을 따라 저 머나먼 북쪽지방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성장했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것조차 드래곤에 의해 심어진 가짜 기억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알카사스의 근위기사에 대한 것도 모르는 판에 타국의 기사들을 알 수 있을 리 없다.
“갑자기 사라진 크라레스의 기사라……?”
타국 기사의 신상 따위 그가 알 리 없었지만 그럼에도 ‘크라레스’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긴 했다. 바로 크라레스 제국의 전설적인 영웅, 치레아 대공이 다.
하지만 그는 여자인데다가 수십 년 전의 인물이다. 그녀에 얽힌 전설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었다. 어린 여자애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농염한 미모를 지닌 중년 여성 이라는 것까지……. 워낙에 상반된 얘기들이 많아 반쯤은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가 아니었던가.
대장이 심란한 마음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이리저리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라이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마치 낮잠이라도 한숨 잔 듯 살짝 눈을 떴다가 대장 이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어, 어떻게 된 거죠?”
한숨이 나올 만큼 맹한 표정. 저 표정만으로 봤을 때, 얼마 전에 벌어졌던 학살의 주인공이라고는 전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더군다나 지금 주변에는 키메라 오 크의 시체라고는 하나도 없다. 키메라 오크를 다 해치운 라이가 한동안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풀썩 쓰러졌기 때문이다.
대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충 둘러댔다.
“기절한 널 업고 탈출한다고 죽는 줄 알았다. 누구 한명 다치지 않고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만도 자비의 여신님의 도움을 받았음이야.”
“그, 그렇습니까……?”
라이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 신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수십 마리씩이나 되는 키메라 오크 떼에게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로서는 상 상조차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대장의 실력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것. 그것 외에는 키메라 오크들의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 까. 라이는 자기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때의 상황을 이해했다.
“몸은 좀 어떠냐?”
라이는 몸 여기저기를 만져 봤다. 오크와 싸우다가 정신을 잃은 것 치고는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쨌거나 아픈 데는 없었으니까.
“괜찮은 거 같아요.”
“샘이 주위를 살펴보러 갔는데,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다. 그때까지 조금 더 쉬어 둬라. 언제 또다시 그 망할 놈의 오크새끼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오늘은 좀 무
리를 해서라도 멀리 이동할 테니까.”
“예, 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