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4권 1화 – 그랜딜 공작의 고심

그랜딜 공작의 고심

말토리오 산맥에 엘프들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착착 진행되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백만 인구를 지닌 국가를 건설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 겠는가.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옵니다, 전하.”

에스테반 장로의 말에 그랜딜 공작은 한숨을 푹 내쉰 후 한참을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드워프들을 좀 더 쥐어짜면………?”

그러자 그랜딜의 좌측에 서 있던 팔로마 장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언했다.

“전하, 더 이상은 안 되옵니다. 지금도 한계까지 쥐어짜다 보니 드워프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사옵니다. 이러다 자칫 더 이상은 못하겠다며 손을 놓을 위험이 너무 큽니다. 우리처럼 지혜로운 엘프가 아닌, 대가리에 든 게 근육뿐인 무식한 놈들인지라 눈이 뒤집히면 그분과의 면담을 요청해 따지 겠다고 덤벼들 우려까지 있습니다.”

그렇다. 지금까지는 아르티어스의 명령이라며 드워프들의 등골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자신들이 그분의 명령을 사칭하고 있었다는 걸 드워프들이 눈치라도 채게 된다면 역으로 이쪽이 당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되는 건국 자금을 충 당할 길이 없는 것이다.

말토리오 산맥에 정착시킨 엘프보다 아직 크루마에 남아있는 엘프가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유한 자금은 벌써 그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을꼬? 드워프들의 물건이 아니라면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뭔가가 우리에게는 없지 않은가?”

“있사옵니다.”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는지 에스테반 장로가 곧바로 답해왔지만, 그랜딜 공작은 회의적이었다. 그는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혹, 마법도구를 생각하고 있다면 말을 꺼내지도 말게나. 그런 물품이 대량으로 풀린다면 알카사스에서 곧바로 조사에 나설 테니까.”

마법왕국인 알카사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마법도구 시장의 동태를 면밀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고품질 마법도구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은 수량이 시장에 풀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포착하게 된다면, 그들은 곧바로 막대한 인력을 투입하여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할 게 뻔 했다.

아직 자리조차 잡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되게 된다면 엘프들의 왕국 건국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 리가 없다. 특히 크루마 제국이 엘프들의 이탈을 가만히 놔둘 리 없을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랜딜 공작은 마법도구 판매가 엄청난 수입을 가져다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엑스시온을 판매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엑스시온을?”

타이탄의 심장인 엑스시온이라면 한두 개만 팔아도 최고급 마법도구 수백, 수천 개를 판매한 만큼의 수입이 들어온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 어 마어마한 판매가격 때문에 이건 개인이 구입할 수 있을만한 물건이 아닌 것이다. 국가 단위라면 혹 몰라도………

옆에서 말을 듣고 있던 팔로마 장로가 불쑥 끼어들었다.

“팔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걸 어디에다가 판매한단 말이오? 괜히 팔겠답시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자칫 우리들의 정체만 탄로 날 위험이 있지 않 겠소.”

에스테반 장로는 그 정도는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팔로마 장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르곤이 있지 않소. 신성제국 아르곤이라면 우리가 운만 살짝 띄어도 구입하겠다며 미친 듯 달려들 것이오. 게다가 돈이라면 넘치는 나라가 아르 2014…….”

일리가 있었기에 그랜딜 공작은 고개를 주억거리다 의구심 어린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흠, 아르곤이라면 충분히 괜찮은 판매처지. 하지만 현재 우리 사정상 공식적으로 판매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 아닌가. 그렇다고 크루마의 이름을 팔아 엑스시온을 수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크루마는 신성제국 아르곤을 잠재적국으로 보고 전략물자의 수출을 엄금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크루마의 이름을 사칭해 엑스시온을 팔겠다고 하면, 자칫 이것이 크루마 황실의 허가를 받고 행한 공식입장으로 오해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엑스시온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르곤에서 혹시라도 크루마 황실에 감사를 표하는 사신이라도 보낸다면 끝장인 것이다.

“게다가 비밀리에 어찌어찌 판매했다손 치더라도 그 대금은 어떻게 받아올 거요? 엑스시온 1개의 판매 대금이 한두 푼도 아니고…………. 결국 이쪽의 정체를 밝히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겠소.”

팔로마 장로의 지적에 그랜딜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장로의 말이 옳구려. 어쨌거나 이쪽의 정체를 밝히고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잘 되겠소?”

“걱정 마시옵소서, 전하. 제가 예전에 엑스시온을 판매하며 안면을 터 둔 대신관이 한 명 있사옵니다. 그를 잘 설득할 수만 있다면……….

에스테반 장로의 말에 그랜딜 공작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엑스시온을 판매했다고? 그럴 리가, 크루마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들 중 하나가 신성제국 아르곤인데, 엑스시온 판매를 군부에서 묵인해 줄 리

가 없지 않은가?”

그 일은 그랜딜 공작이 아르티어스에게 끌려가 크루마에 없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팔로마 장로가 급히 입을 열었다.

“에스테반 장로의 말이 맞사옵니다, 전하. 당시 엑스시온 판매를 적극 추진한 게 군부 쪽이었으니까요.”

엘프리안이 브로마네스에 의해 파괴된 후, 황궁을 또다시 건설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미네르바는 그 재원 조달을 위해 150여 개에 달하는 엑스시온 판매를 추진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물량을 현금을 주고 구입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신성 아르곤 제국밖에 없었다.

크루마는 엄청난 돈을 받고 엑스시온을 아르곤에 은밀히 판매한 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암암리에 코린트와 크라레스를 움직여 알카사스가 아르곤에 엑스시온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적극 방해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마도전쟁 이후 굉장히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 르곤 제국은 아직까지도 당시 잃어버린 전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아르곤에 엑스시온 판매를 하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겠구먼.”

“맞사옵니다, 전하. 그리고 이번 기회에 엑스시온 판매를 통해 아르곤을 우리의 우군으로 만드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되옵니다.”

“흠, 우군이라……?”

에스테반 장로는 확신에 찬 어조로 강하게 대답했다.

“저희가 엘프 왕국 건립을 선포한다면 다른 강대국이야 모르겠지만 크루마는 반드시 적대적으로 반응할 것이 분명하옵니다. 크루마 마법 전력의 태 반을 차지하고 있는 게 저희 엘프들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어쩌면 크루마뿐만이 아니라, 다른 강대국들도 적대적으로 대응할 확률이 농후하지. 그들로서는 기껏 안정되어 있는 현 대륙 정세가 우리로 인해 흐트러지는 걸 원치 않을 테니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군으로 포섭할 수 있는 나라는 어떻게 해서든 저희 쪽으로 끌어들여야 하옵니다.”

그랜딜 공작은 에스테반 장로의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엑스시온이라고 해 봐야 몇 개 되지도 않는데 그것만으로 그들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아마 받아들일 거라 생각되옵니다.”

“경이 그렇게 확언을 할 정도라면 충분한 복안이 있다는 말이겠지?”

“그렇사옵니다. 대신 예전에 실험을 하다 폐기한 듀얼 엑스시온 기법을 그들에게 알려줄까 하는데…, 괜찮겠사옵니까?”

그랜딜 공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별 쓸모도 없는 건데, 그거 가지고 괜찮겠느냐?”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좋아. 경에게 전권을 맡길 테니 알아서 잘해 보게나.”

“전하의 신뢰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그래, 부탁하네.”

예를 갖춘 후, 물러나는 에스테반 장로의 뒷모습을 보던 그랜딜 공작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팔로마 장로를 향해 물었다.

“참, 일전에 왔던 호비트는 어떻게 처리했는가?”

아르티어스가 무슨 짓을 한 건진 알 수가 없지만, 꽤 수준 높은 기사 한 명이 위대하신 분의 명을 받았다면서 찾아왔었다. 쓸 일이 있으면 부를 테니 그때까지는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말을 위대하신 분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면서.

“아, 그 호비트 말씀이시군요. 일단 아래쪽 마을로 내려보냈사옵니다.”

그랜딜 공작은 걱정스럽다는 듯 턱수염을 신경질적으로 쓰다듬었다. 한낱 호비트 하나를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한 그랜딜 공작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 는 그자가 아르티어스가 보낸 호비트라는 점이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셨다는데, 마을에 내려보내도 괜찮을까……?”

“너무 근심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듯하옵니다. 만약 위대하신 분의 연락이 와도 마법으로 곧바로 데려올 수 있지 않사옵니까. 그리고 절대 마을 밖을 벗어나지 말라는 확답까지 받아놓았고, 혹시 몰라 감시자 몇 명을 붙여 두었사옵니다.”

“감시자를?”

“예. 위대하신 분의 명을 받았다고는 하나, 저희가 직접 들은 것도 아니지 않사옵니까.”

여기까지 말한 팔로마 장로는 혹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그리고 혹 그분의 밀명을 받고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온 것인지도 의심되옵니다.”

팔로마 장로의 시원한 일 처리가 마음이 든 그랜딜 공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잘 처리했군. 그래, 뭐 수상쩍은 부분은 없고?”

“그런 건 없었사옵니다. 다만………….”

팔로마 장로가 대답을 주저하며 말끝을 흐리자 그랜딜 공작은 호기심에 다급히 되물었다.

“다만?”

“저희 쪽의 방심을 유도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사오나 매일매일 주색잡기(酒色雜技)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옵니다. 게다가 감시자로 붙여 놓은 여 엘프에게도 하룻밤 어떻게 안되겠냐면서 얼마나 치근거렸던지 남자 엘프로 교체해 달라는 불만까지 접수되어 있는 상태라……”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말에 그랜딜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 그것참 이상하군……………”

아르티어스가 보내온 사람이다. 당연히 그자를 조사해 보지 않았을 리 없다. 뷰 마나포스만 해봐도 대제국의 근위기사급에 이르는 엄청난 수준의 그 래듀에이트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 자가 수련은 내팽개치고 주색잡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그래듀에이트가 되기 위해서는 재능만이 아닌,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반복되는 고된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래듀에이트가 되었다는 소리 는 그러한 훈련이 완전히 몸에 익어 하루라도 훈련을 하지 않으면 찝찝해 가만히 있지 못한다.

잠시 고심하던 그랜딜 공작이 단호한 표정으로 지시했다.

“감시 인력을 3배로 보강하여 밤낮을 가리지 말고 철저하게 감시하도록! 그리고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고 왕국을 위해 그 호비트를 꼬실 여 엘프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즉시 이행하겠나이다, 전하.”

공간이동 마법으로 아르곤으로 간 에스테반 장로는 예전에 엑스시온 판매 건으로 인해 안면을 터 뒀었던 대신관을 은밀히 수소문하였다. 이 일은 극 비를 요하는 것이었기에 아르곤의 타이탄 생산에 있어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그를 찾아가 직접 담판을 짓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 사이에 아르곤 제국 내에 20명밖에 없다는 주교(敎)가 되어 있었고, 타이탄 생산과 구매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엘프들을 보호해 주시는 신께서 가호를 베풀어 주고 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주교와의 면담은 즉시 받아들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르곤에서는 아직까지도 에스테반 장로가 크루마의 엑스시온 판매 책임자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엑스시온이 절실했던 아르곤으로서는 당연히 에스테반 장로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저쪽입니다.”

주교의 집무실 문 앞에는 중무장한 기사 둘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값비싸 보이는 화려한 갑옷만 봐도 일반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에스테 반은 그들의 허리춤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그의 예상대로 금박을 입힌 신성문자들이 빽빽이 아로새겨진 20센티미터 길이의 짧은 막대 기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성기사(聖騎士)의 상징인 오러 소드(aura sword)였다. 아르곤 제국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들인 주교에 대한 경호원인 만큼 상당한 실력자들일 것이 뻔했다.

주교실 안으로 안내받아 들어가니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던 노인이 그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에스테반 장로가 주교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20여 년쯤 전이다. 수백 년의 수명을 지닌 엘프에게 있어서 20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니었지만, 인간인 주교는 그 사이에 몰라볼 만큼 노쇠해 있었다. 하기 야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아무리 신성력으로 노화를 억누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나이는 이미 90세에 이르러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에스테반 장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주교의 뒤에도 성기사 2명이 서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주교와 나눌 대화 내용은 극비를 요하는 것이었기에 성기사들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에스테반 장로는 자신의 그런 속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아무리 엑스시온을 판매하며 안면을 익혔다고는 하나 그 후로 벌써 20여 년이 지난 후에 갑자기 불쑥 나타나 면회 신청을 했으니 주교로서도 무척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경호를 서고 있는 성 기사를 물려달라고 요청한다면 의심부터 할 게 뻔했다.

주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없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에스테반 장로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서로 간에 인사가 오간 후, 주교가 먼저 서두를 꺼냈다. 지위가 지위인 만큼, 에스테반과 언제까지나 한담만 나누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여기는 어쩐 일인가? 혹, 판매 허가가 떨어지기라도 한 것인가?”

크루마에서 엑스시온을 아르곤에 마지막으로 판매한 것이 20년쯤 전이다. 그 이후, 더 이상의 추가 물량이 없자 아르곤에서는 몇 번이고 은밀히 사 신을 보내 엑스시온을 판매해 달라는 요청을 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 크루마는 이런저런 변명만을 늘어놓을 뿐, 지금까지 단 1기의 엑스시온도 추가 판매하지 않았다.

에스테반 장로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경호를 서고 있던 성기사들을 향해 계속 시선을 돌리자 주교는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걱정 말게. 신앙심이 독실한 기사일 뿐만 아니라 내 허락 없이는 입조차 뻥끗하지 않을 믿을 수 있는 아이들이니 말일세.”

“예, 그럼 일단 주교님께 한 가지 먼저 양해를 구하고 싶은 사안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우리 쪽에서 엑스시온을 판매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핫핫, 그건 걱정하지 말게. 어차피 비공식적으로 구입하는 게 우리로서도 이익이니까 말이야.”

에스테반 장로는 주교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거래가 크루마와 아르곤의 국가 간의 거래가 아니라 저와 주교님과의 개인적인 거래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래 대금 역시 크루마가 아니라 저에게 주셔야 하는 거지요. 그리고 이 거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주교님 이하 극소수로 해 주셔야만 합 니다.”

그 말에 주교는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흐음,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군. 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주교님.”

“흐음, 자세한 속사정도 모른 체 그렇게 해 줄 수는 없다네. 아무리 내가 책임자이긴 하지만 그건 내 권한을 벗어나는 일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그것 의 가격이 어디 한두 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비밀을 유지해 주실 수만 있으시다면 지금껏 주교님께서 단 한 번도 취급하지 못하셨던 최상급품을 제공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수량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주교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최상급품이라고?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신성 아르곤 제국의 성립이 선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당시 최강국들이라 할 수 있던 코린트, 크라레스, 크루마, 알카사스는 협정을 맺어 1.25 이상급의 엑스시온을 아르곤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그 이하급조차도 가급적이면 아르곤으로 흘러들어 가지 못하도록 틀어막았다. 광신 도 국가인 아르곤의 군사력이 증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능하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주교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만약 최상급품을 우리가 아르곤에 제공했다는 것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코린트나 다른 나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것은 중대한 협정 위반이 된다. 최악의 경우, 제3차 제국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만큼, 이렇게까지 비밀 엄수를 요구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닌 것이다.

“최상급품이라고만 하지 말고…, 정확히 어느 정도의 출력을 낼 수 있는 걸 제공해 줄 수 있는지 알려줄 수는 없겠는가? 그래야 내가 다른 주교들을 설득할 수 있지 않겠나.”

에스테반 장로는 상체를 앞으로 뻗어 최대한 주교와 가깝게 한 후,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해줬다. 성기사들이 엿듣지 못하도록.

“1.5를 드릴 수 있습니다.”

“헉!”

지금껏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노회하기 짝이 없는 주교였지만, 이번만큼은 놀라움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과거, 아르곤에서 교황 전용의 고성능 타이탄을 제작하고자 했을 때, 거기에 들어가는 최고급품의 엑스시온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엑스시온 가격보다 코린트나 다른 나라들에 수입허가를 받기 위해 로비하는 데 들어간 돈이 몇 배는 더 많았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물건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그 정도라면 주교원에 얘기를 넣어 볼 수 있겠구먼.”

“언제쯤 결과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리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는 처지라서………….”

“물량은 어느 정도나 공급해 줄 수 있겠는가?”

“송구스럽습니다만 비밀유지에 대한 확답을 받기 전에는 공개할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주교님.”

“내일…, 내일 알려주도록 하겠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주교님.”

다음날 약속시간에 맞춰 에스테반 장로는 주교에게로 안내되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성기사들의 존재는 변함이 없었지만, 주교실 안에 배치되어 있던 성기사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두 사람이 나눌 대화가 중요하다는 걸 주교가 알아차린 것이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주교는 활짝 웃는 얼굴로 에스테반 장로를 맞이했다. 그의 표정만 봐도 주교원의 허락이 떨어졌음을 에스테반 장로는

직감할 수 있었다.

“주교원의 허락이 떨어졌다네. 이번 거래는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될 테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게. 그래, 물량은 어느 정도 공급해 줄 수 있나? 주교 원에서는 그걸 가장 궁금하게 여기고 있다네.”

“쌓여 있는 재고를 판매하는 게 아니니 수량을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만, 현 상황이라면 1개월에 1개 정도는 공급할 수 있을 듯합니다.”

1개월에 1개라도 결코 적은 게 아니다. 왜냐하면 하급 출력의 엑스시온이 아닌, 1.5급의 최상급품 엑스시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교의 얼굴에 서는 짙은 실망감이 피어올랐다. 그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과거 크루마에서 엑스시온이 대량으로 수입되었을 때, 성능은 비록 1.0급이었다고 하지만 단 1년 동안에 무려 150개의 엑스시온이 쏟아져 들어왔 었다. 그런 엄청난 생산력을 지닌 크루마를 주교원에서 얼마나 질투하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워했었는지… 당시 수입을 총괄했던 주교는 그 공을 인정받아 이 자리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쯧, 아무리 1.5급이라지만, 기대한 것에 비해 물량이 너무 적구먼. 귀국은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 좀 더 많이 판매해 줄 수는 없겠는가? 물품 대금은 넉넉히 책정해 주도록 하겠네.”

주교의 말에 에스테반 장로는 이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힐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저 노회하기 짝이 없는 주교가 뭔가 수상쩍 다는 것을 느낄 테니까.

“제가 처음부터 극비밀리에 이번 거래를 요청하게 된 건 사정이 있어서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저는 크루마를 대표하여 이곳에 와 있 는 게 아닙니다.”

“허, 역시 그랬었구먼………….. 그렇다면 지금 자네는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겐가?”

에스테반 장로는 자신이 엘프 왕국을 대표하여 왔음을 밝혔다. 그리고 현재 엘프 왕국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설명을 했다. 그런 그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주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야 에스테반 장로를 만나며 느꼈던 의문이 이해가 되었으니까.

그동안 아르곤으로의 엑스시온 판매를 철저히 틀어막고 있던 크루마에서 갑자기 1.5급 고성능 엑스시온을 판매해 주겠다고 제안을 해왔기에 주교 는 내심 수상쩍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늙은 여우는 그걸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단 1개라도 수입을 할 수 있다면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게 바로 1.5급의 엑스시온이었으니까.

그건 그만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자네가 왜 그렇게까지 비밀 유지에 집착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구먼. 좋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 최선을 다하도록 할 테니 안심해도 좋을 걸 세.”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교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해야 이쪽도 물건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양을 더 늘릴 수는 없겠는가? 한 달에 겨우 1개라면 우리들이 기대 했던 것에 비해 너무 적은 양이야.”

“저희도 좀 더 많이 판매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현 상황에서는 그 정도가 한계입니다.”

“흠, 혹시 엑스시온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면 이쪽에서 모든 걸 제공할 용의가 있네. 그래, 그게 좋겠군. 그쪽에서는 엑스시온 을 가동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마법사들만 보내주면 되네. 나머지는 이쪽에서 모두 다 제공하도록 하지. 우리 아르곤 제국에 대규모 엑스시온 생산 시설을 만드는 거야. 어떤가?”

“그, 그건 좀…….”

에스테반이 가정하고 있던 최악의 순간이 도래했다. 이쪽의 정체를 밝히게 되면 상대가 이런 제안을 해 올 것이 당연하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이것 만큼은 가장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거절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대는 아르곤을 이끄는 절대자들 중의 한 명이었으니까. “물론 날로 먹을 생각은 전혀 없다네. 엑스시온이 한 개 한 개 생산될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충분히 지불하도록 하겠네.”

하지만 그건 절대 승낙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여기에 대량의 마법사들을 투입했다가, 아르곤에서 그들을 덜컥 억류해 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 는가. 물론 저 주교는 바깥세상과 오랜 세월 교류를 해온 비교적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기에 신뢰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그의 나이 90이 넘 은 상황. 그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그의 후임자도 엘프들에게 잘해 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그건, 힘들겠습니다.”

“자네가 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다네. 걱정 말게. 이곳에 오는 엘프들의 안전은 내가 책임질 테니 말일세.”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득하려는 주교를 향해 마냥 반대만 할 수 없었던 에스테반은 화제를 슬쩍 다른 쪽으로 돌렸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1.0에서 1.2 정도의 엑스시온이라면 알카사스에서 얼마든지 구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허, 거참. 말도 말게나.”

엑스시온 수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일단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주교는 멈출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만큼 평소에 쌓인 것이 많았던 것이리라. 그렇 다고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터놓고 하소연을 할 수 있는데도 없었을 것이고. 때마침 자신의 고충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상대를 만나지 않았는가. 더군다나 그 상대가 자신의 고충을 해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1.0 이상급의 효율 높은 엑스시온을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몇 나라 되지 않는다네. 문제는 그들 중에서 본국에 엑스시온을 판매해 줄 만한 나라는 알카사스 정도밖에 없다는 사실이지.”

“그렇다면 약간 성능이 떨어지더라도 0.8 정도를 구해서 사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 정도 등급이라면 생산할 수 있는 나라가 꽤 될 텐데요.” “마도대전을 거치며 타이탄 전력에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은 국가가 바로 본국일세. 그 이유는 명확했지. 정규급 출력도 내지 못하는 저급 타이탄은 아무리 많이 만들어서 가지고 있어 봐야 쓸모가 없다네. 오히려 인명피해만 가중시킬 뿐이지.”

이런 주교의 반응을, 사실 에스테반 장로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준비해온 카드를 꺼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주교가 이곳에 엑스시 온 생산 공장을 만들겠다는 억지를 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걸 준비해 왔던 거니까.

“주교님께서는 혹시 타이탄 안에 엑스시온을 두 개 집어넣는 기법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1기의 타이탄 안에 말인가?”

“그렇습니다.”

주교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대답했다.

“그게 가능한 얘긴가?”

“물론 가능합니다. 과거 본국에서 코린트의 흑기사를 대적하기 위한 고성능 타이탄을 제작하기 위해서 연구했었던 테마들 중의 하나였으니까요.”

“내 아직까지 그런 타이탄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네. 그렇다는 소리는 그 실험은 실패했을 확률이 높겠구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에스테반의 대답에 주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금 물었다.

“실패한 실험에 대한 얘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뭔가?”

에스테반 장로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실험 자체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문제가 좀 많아서 실전배치를 하지 않았던 것뿐이지요.”

“어떤 문제인데…………?”

“타이탄마다 자아(Ego)가 있고, 그 자아는 엑스시온에서 나온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한 몸뚱이에 자아가 두 개 존재하니 어떤 일이 벌어지 겠습니까?”

딱히 상대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라는 듯 에스테반 장로는 계속 말을 이었다.

“고성능의 엑스시온일수록 자아가 강해지는데, 저희들이 연구한 것은 초고성능을 추구한 타이탄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말 안 듣는 타이탄의 자아가 둘씩이나 되다 보니 도저히 통제 불능이라서 생산해 봐야 도저히 쓸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런 이유로 크라레스 최강의 타이탄인 청기사보다도 더욱 막강한 성능을 지녔던 그 실험용 타이탄은 해체되는 것으로 그 짧은 생을 끝마쳐버렸다. 기념비적인 존재로 황궁에 전시해 두기에는 재룟값이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듣고 보니 이해가 가는구먼.”

“하지만 주교님께서 원하시는 건 이 정도의 고성능 타이탄이 아니지 않습니까. 0.8 내외의 저급 엑스시온은 자아도 약합니다.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 다는 얘기지요.”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는 말에 주교의 관심도가 급격히 높아진다.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아있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허~, 그래? 그럼 0.8 엑스시온 둘을 넣는다면 출력을 어느 정도 낼 수 있나? 한 1.0 정도는 낼 수 있는가?”

“두 엑스시온 간의 상호 간섭으로 인해 출력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출렁거리는 게 좀 탈이긴 합니다만, 1.0에서 1.4 정도까지는 충분히 낼 수 있습니 다. 문제는 고급 엑스시온에 비해 저급 엑스시온들의 경우 증폭효율이 떨어지는 만큼, 마나 소모가 크다는 게 탈이지요. 하지만 그것도 탑승하는 기 사가 미리 알고 대처한다면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일입니다.”

1.0에서 1.4 정도의 출력을 낼 수 있다는 말에 주교는 군침을 꿀떡 삼키며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만큼 그 말이 준 충격이 강했던 탓이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처럼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엑스시온을 팔아 달라며 애걸복걸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실험을 통해 충분히 통 제가 가능하다고 하지 않는가.

“허,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로군. 이런 말 하면 염치없지만, 제조법을 좀 알려줄 수 없겠는가. 댓가는 후하게 지불하도록 하겠 “네.”

저자세로 부탁해 오는 주교의 모습에 에스테반 장로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신성 아르곤 제국과 장차 탄생할 엘프 왕국 간의 우정을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허허, 정말 감사한 일이로군. 내 교황 성하께 엘프 왕국의 이런 기특한 마음을 그대로 전하겠네.”

어찌 되었건 이번 협상으로 인해 아르곤 제국과 엘프 왕국 둘 다 서로 간에 필요한 것을 충분히 챙길 수 있었다. 그 후 좀 더 구체적인 협상을 통해 개당 가격과 인도 방법 등을 논의한 뒤, 에스테반 장로는 기분 좋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