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4권 10화 – 첫 번째 살인
첫 번째 살인
라이가 습격을 하기 위해 잠복을 하고 있는 곳에서 약간 떨어진 위치에 있는 여관 3층.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루크가 석궁을 들고 라이의 머리통 을 겨누고 있었다. 만약 배신하려는 눈치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곧바로 쏴 죽여 버리기 위해서.
루크는 좀 전까지 자신에게 건방을 떨던 라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까불어 봐야 아직 애송이인 것이다. 설마 자신의 머리통 을 석궁이 겨누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살짝 불쌍하기까지 했다.
녀석과의 거리는 대략 70여 미터 정도. 이 정도 거리라면 판금갑옷으로 몸을 가린 기사라 할지라도 그냥 꿰뚫어 버릴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녀석 의 몸을 가리고 있는 건 판금갑옷도 아닌 얄팍한 천 쪼가리가 전부였다.
주위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기에 70여 미터라고는 하지만 라이의 머리통을 겨누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지금처럼 녀석이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 있다면 몰라도, 달아나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면 쏘아 맞힌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리라.
“흐음…, 일단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칠 생각은 없는 것 같군.”
블러드 엑스가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린 지도 어느새 1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설마 정보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멀리서 호위 4명을 거느리고 블러드 엑스가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젠장! 그냥 내가 쏴 죽였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마음은 굴뚝같아도 그럴 수가 없었다. 녀석을 죽이는 건 간단해도 그 이후가 문제였다. 증거를 남기지 않고 놈을 없애기는 아주 힘들다. 더군 다나 놈들은 이곳 요새는 물론이고, 영지 내에서 절대강자였다. 놈들이 조사해 들어오면, 머지않아 이쪽이 저지른 일이라는 것이 들통 날 게 뻔했다. 루크는 블러드 엑스가 항상 호위 넷을 거느리고 다닌다는 것을 라이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블러드 엑스의 두 걸음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사내 하 나만이 호위라고 착각했다가는 큰코다친다. 스무 발자국쯤 앞에서 걷는 한 녀석과 뒤쪽 50여 미터쯤에서 따라오고 있는 두 명도 블러드 엑스의 호위 였다.
괜히 알려줬다가 겁을 집어먹으면 안 되기에 일부러 호위에 대한 정보를 숨긴 것이다.
“저 건방진 애송이가 제대로 한칼 먹이고, 모든 죄를 뒤집어써야 할 텐데…………….”
루크가 석궁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잭이 갑자기 잠복해 있던 곳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블러드 엑스에게로 쭈뼛쭈 뼛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젠장, 습격을 해도 힘든 판에 왜 벌써 모습을 드러낸 거야? 막상 칼질을 하려 하니 쫄은 건가? 게다가 긴장에 잔뜩 굳은 저 어색한 몸동작하고 는……………. 이거 초짜 새끼 하나 때문에 미치겠구만.”
철문 안쪽에서 녀석과 직접 드잡이질까지 해 봤기에 아직 어리긴 해도 잭이라는 녀석의 실력이 제법 뛰어나다는 것쯤은 루크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싸움과 살인은 다르다. 싸움질이 실력이라면, 살인은 굳건한 배짱이 최우선이었다. 상대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어서는 아무리 실력 이 좋은 놈이라 해도 살인을 할 수가 없는 법이다. 저렇듯 상대의 기세에 쫄아 버려서는 될 일도 안된다.
그래도 루크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잭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독 묻은 칼로 놈을 슬쩍이라도 찔러 주기만 한다면, 그것만 해도 충 분했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게 예상대로 순조롭게 흘러갈 것이다. 지금껏 조직에 애를 먹여 왔던 블러드 엑스 놈은 독약 때문에 죽을 거고, 잭은 놈의 호위들 에 의해 곧바로 붙잡혀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 자신의 배후를 실토할 수밖에 없으리라. 블랙울프라는 조직에 의해 이번 일이 벌어졌다는 걸………….
루크는 웃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이 기가 막힌 계책은 루산나가 잭에게 자신은 블랙울프 파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했다는 걸 들은 두목이 꾸민 음모 였다. 잔머리가 뛰어났던 두목은 실력이 좋은 잭을 조직이 직접 없애려면 피해가 크겠기에 아직 어리숙한 성격을 최대한 이용해 먹기 위해 고심에 고 심을 한 끝에 만들어진 음모였다. 그 때문에 잭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루크가 아닌 블랙울프 파의 중간보스들 중 하나인 ‘당코’라고 말해뒀었다. 녀석 은 샐러맨더 파에 끌려가 당코라는 사내에게서 지시를 받았다는 걸 실토하게 되겠지.
이제 조만간 마을 안에서 자신들의 조직과 세력을 다투던 샐러맨더 파와 블랙울프 파의 대혈투가 벌어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그럼 자신 들은 휘파람을 불며 옆에서 구경이나 하다가 어부지리(漁父之利)만 챙기면 되는 것이다.
블러드 엑스는 전방에서 어색한 몸짓으로 다가오고 있는 라이를 잠시 훑어본 후, 곧바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길 가던 행인이 자신의 험악한 인상에 겁을 집어먹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몸에 짤막한 단검 하나를 허리에 차고 있긴 했지만, 마을 사람 대다수가 사냥이 주업인 만큼 그 정도 무장 은 어린아이도 하는 수준이다.
블러드 엑스는 짐짓 인상을 더욱 일그러트렸다. 최근 조직의 세력이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 보니 자신을 알아본 마을 사람들이 겁에 질려 움찔거리 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했다. 그랬기에 일부러 길 한가운데로 걸어가며 사람들이 자신을 피해 옆으로 부리나케 도망치는 것을 은근히 즐 기고 있었다.
라이가 블러드 엑스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언제 뽑아들었는지 라이의 손에 들린 단검이 블러드 엑스의 옆구리를 빠르게 찔러
들어갔다. 여관 3층에서 라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루크조차도 라이의 단검이 블러드 엑스의 몸에 박힌 후에야 알아봤을 정도였다. 쨍.
“헛, 이런 대갈빡에 아직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감히 나를 공격해!?”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기습을 당한 블러드 엑스가 노성을 지르며 허리에 차고 있던 손도끼를 뽑아든다. 라이의 검이 놈의 몸통에 박히는 것을 보며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한 루크. 하지만 곧이어 그는 일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정도로 깊게 찔렸다면, 독약 탓에 곧바로 쓰러져 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던 루크는 곧이어 허탈한 듯 털썩 주저앉았다. 놈이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라이의 단검이 녀석의 몸에 작 은 상처 하나 남기지 못하고 막혔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될 가능성은…………….
“설마…, 저 헐렁한 옷 안에 사슬갑옷이라도 껴입고 있었다는 건가?”
사슬갑옷은 그 특성상 둔기(器)가 주는 충격은 전혀 걸러내지 못하지만, 방금 전처럼 도검류의 공격을 저지하는 효과는 매우 탁월했다. 특히 베기 공격은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고 보는 게 옳았다. 라이가 지니고 있는 무기가 단검뿐인 것을 감안한다면, 라이의 실력이 루크가 예상한 것의 두세 배 쯤 더 뛰어나다 해도 결코 블러드 엑스를 죽일 수는 없으리라.
블러드 엑스가 공격을 당하자마자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호위가 황급히 검을 뽑아들며 달려와 합류했다. 그리고 멀찌막이 따라오고 있던 호위 두 명 역시 검을 뽑아들고 달려오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이런 젠장, 그냥 내가 쏴야 하나?”
석궁의 좁고 날카로운 화살은 사슬갑옷의 빈틈을 아주 쉽게 파고 들어가 녀석을 끝장내 버릴 수 있다. 더군다나 화살촉에는 라이에게 건넨 것과 똑 같은 독약이 발라져 있는 만큼, 블러드 엑스가 아무리 날고뛰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지만 블러드 엑스를 사살한 뒤가 문제였다. 자칫하다 자신까지도 호위들에 붙잡힐 위험도 있었고, 미리 확보해 둔 도주로를 따라 무사히 도망친다 해도 블랙울프 파와 싸움을 붙이려는 계책은 실패할 확률이 너무 높다. 탐문을 하다 보면 이곳에 자신이 묵고 있었다는 걸 머지않아 녀석들이 알아내 게 될 테니까.
루크는 잠시 머리를 굴려 고민을 해 봤지만 결국 석궁의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슬그머니 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씨팔! 얼굴은 겁을 상실한 오크처럼 무식하게 생긴 놈이, 옷 안에 사슬갑옷을 껴입고 있었을 줄이야. 젠장, 한동안 잠수를 타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이제 기대할 거라고는 잭이 자신의 배후를 블랙울프 파라고 하는 말에 녀석이 속아 넘어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 건가.”
잭이라는 패를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리는 게 아깝기는 했지만 그래도 좋은 정보 하나는 건지지 않았는가. 블러드 엑스가 옷 안에 사슬갑옷까지 껴 입고 다닌다는 건 꽤나 가치 있는 정보였다. 왜냐하면 다음에 포섭할 제2의 잭은 사슬갑옷 따위는 손쉽게 꿰뚫고 들어가는 스틸레토(끝이 뾰족한 쇠 막대처럼 생긴 찌르기 전용 검)를 사용하게 될 테니까.
“큭큭, 어린 애송이 놈이 함부로 까불다가는 어떤 꼴이 되는지 이 인생 선배가 제대로 교훈을 준 것에 감사하라고, 잭.”
루크는 장전되어 있던 화살을 서둘러 해제한 뒤 화살집에 넣고, 석궁을 등에 멨다. 혹, 잊어버리고 놔둔 건 없는지 주위를 둘러봤지만, 더 이상 눈에 띄는 건 없다. 잭의 습격이 실패로 끝난 만큼 녀석은 블러드 엑스에게 붙잡혀 끌려갈 테고, 분명 동료가 있나 호위들이 이 근처를 샅샅이 뒤질 게 뻔 하다. 그러기 전에 튀어야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벗어나려던 루크의 발길이 은근슬쩍 다시 창문 쪽으로 향했다. 저 건방진 애송이가 분노한 블러드 엑스에게 어떤 식으로 박살이 나 는지 구경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미 안전한 도주로를 확보하고 있는 이상, 그 정도 볼 짬은 있었으니까.
단번에 피떡이 되어버릴 거라는 루크의 예상과는 달리 잭은 제법 선전하며 버티고 있었다. 급하게 달려온 호위들은 잭을 포위한 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여유롭게 밀어붙였다. 만약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겠지만, 생포하여 배후를 캐려는 심산인지 치명 적인 공격은 자제하는 듯했다.
그에 비해 잭은 맹렬하게 호위들을 공격하며 빠져나가기 위한 빈틈을 만들어 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허, 비쩍 마른 놈이 체력 하나는 정말 끝내주네. 웬만한 놈들 같았으면 벌써 헥헥대며 지쳐 쓰러져 살려달라며 울고 있을 텐데 말이야. 재수 없는 놈이긴 했지만, 저 체력 하나만큼은 인정해 줄 수밖에 없군. 젊어서 그런가?”
하지만 저런 헛된 발악도 조만간에 끝날 거라는 것을 루크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인지가 문제일 뿐.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뭔가 분위기가 으스스하게 변한다 싶더니, 잭을 포위하고 있던 호위들 중 한 명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 를 흘리며 나자빠지는 게 아닌가.
“어? 무슨 일이지…………. 방심하다 한칼 맞았나?”
싸움 장면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루크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세에 몰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 았던 잭이 갑자기 미친놈처럼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한 놈을 쓰러트릴 때까지만 해도 호위들이 방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잭의 손에 들린 짤막한 단검 한 자루가 번뜩일 때마다 어김없이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호위들은 한 명씩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믿기기 힘든 이 상황에 루크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창문 밖으로 쭉 빼고 지켜보고 있는 사이, 어느새 호위 네 명은 모두 다 싸늘한 시체가 되어 땅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경악에 찬 것은 루크만이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블러드 엑스가 뒤에서 손 놓고 마냥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는 부하들이 더 이상 죽지 않도록 잭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가자 당황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순식간에 부하들이 모두 죽자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블러드 엑스, 샐러맨더 파의 행동대장으로 수많은 격전을 치르며 그 잔인함으로 위명을 떨쳐 왔던 그가 지금 공포에 떨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뒤로 물러서는 그를 향해 잭의 단검이 빛을 뿜어냈을 때, 블러드 엑스의 허리께에서 붉은 피 분수가 터져 나오는 게 보였다. 얼마나 깊게 베였는지 내장까지 쏟아져 나왔다. 순간 루크의 머릿속이 멍하니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저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분명 옷 안에 사슬갑옷까지 껴입고 있…….
여기까지 생각하던 루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만약 사슬갑옷을 껴입고 있었다면 단검 따위에 저렇게 베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처 음 공격에 블러드 엑스가 무사했던 건? 루크는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옆에 차고 있던 도끼 면에 운 나쁘게 단검이 박힌 걸지도……………. 거리가 멀어 그 장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기에 자신이 착각을 한 것이리라.
“맞아. 내가 착각한 걸 거야. 정말로 사슬갑옷을 입고 있었다면 저런 싸구려 단검으로 행하는 횡 베기에 배때지가 쫘악 갈라지겠어?”
고개를 끄덕이던 루크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곳에서 격투가 벌어진 지 시간이 꽤나 지났다. 어쩌면 지금쯤 샐러맨더 파의 조직원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자칫 자신이 샐러맨더 파 조직원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이 사 건의 배후가 자신들이 벌인 것이라는 게 탄로 나게 된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흔적을 지우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서두른 탓에 루크는 꼭 봐야 할 장면을 놓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블러드 엑스와 그 호위들을 모두 죽여 버린 라이가 도망치기는커녕 땅바닥에 주저앉아 웩웩거리며 토하고 있는 모습을………….
지금껏 많은 햇병아리들이 조직에 들어와 성장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지켜봐 왔던 루크다. 그 자신도 첫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에 받았던 충격을 아 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 점차 감정이 무뎌져 몇 번의 살인을 더 저질렀지만 처음만큼의 충격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첫 번째 살인 후 겪어 야 했던 정신적 고통은 아직까지도 잊지 못할 만큼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었으니까.
만약 살인 후 땅바닥에 주저앉아 토하는 모습을 봤다면 라이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루크는 도망치기에 바빠 그쪽은 아 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덕분에 라이에 대한 그의 평가에 오해가 가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라이는 자신이 어떻게 여관까지 돌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의 방에 도착해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런 젠장…….”
꽤나 오랜 세월 용병생활을 했고, 실전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그게 다 몬스터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지만.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게 이렇게까지 정신적 충격을 안겨 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라이였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도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정도였다. “쓰레기 같은 놈 몇 명 죽인 거 가지고 내가 왜 이러지?”
뱃속에 있는 걸 다 토하고 신물이 넘어올 정도인데 아직까지도 속이 메슥거렸다. 그런 나약한 마음을 다잡으려고 라이는 자신을 향해 열심히 중얼거 렸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놈들을 몇이나 더 죽여야 할지 모르는데, 매번 이런 식이면 아주 곤란하잖아. 맞아, 당코가 그랬어. 죽이면 사람들이 좋아할 만큼 아주 악질적인 놈이었다고. 어쩌면 나를 노예로 팔아넘긴 그놈들처럼 인간말종일 게 분명해. 그런 놈들을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동안 인간형 몬스터들은 많이 죽여 봤잖아. 놈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형 몬스터야. 인간형 몬스터!”
그건 첫 살인 후 겪게 되는 죄의식을 이기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런데 정신없이 이런저런 말을 하다 보니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뒷골목의 깡패들 과 용병대의 올란도 중대장, 얼마 전에 자신의 뒤통수를 거하게 쳤던 대장의 기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으드득.
인간을 죽였다는 죄의식에 허덕거리던 그의 마음이 순간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들에 대한 원한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죄의식을 이기기 위해 그들에 대한 원한이 그만큼 깊은 것으로 착각하기를 바랬기에 그런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찌 되 었든 그 방법은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잠깐 동안이지만 죄의식에 사로잡힌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 쓰레기 같은 놈들은 누구라도 치워야 해. 그래야 나 같은 피해자가 또다시 안 나타나지.”
라이는 의식적으로 살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 시작은 몇 번이고 꿈속에 나타났던 여인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사실 블러드 엑스에게 찔러 넣은 단검이 뭔가에 막히기라도 한 듯 쇳소리와 함께 전혀 들어가지 않았을 때, 라이는 하마터면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옷 안에 가죽갑옷까지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 속에 사슬갑옷까지 걸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주위에서 달려온 호위들에게 포위까지 당해 버렸다. 어떻게 해서든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도무지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절체절명이었던 그 순간,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꿈속에서 봤던 그 이국적인 여인이 검술을 펼치던 장면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방법이 전혀 없으니 그 여인의 환상적인 검술이라면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녀가 구사했던 검술을 자신도 한번 따라 해 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든 것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런 꿈같은 일 외에는 더 이상 그 어떤 방법 도 없었기에 행한 마지막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른다. 반쯤은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꿈속에서 보았었던 그녀의 검술을 따라 하는 순간, 라이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가 있었다.
“내가 그때 어떻게 했던 거지?”
라이는 아직도 그때의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이는 황급히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동물 가죽을 벗기는 데나 쓰면 딱 좋을 만 한 싸구려 단검이다. 이런 검이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신검이나 되는 듯 블러드 엑스의 사슬갑옷을 진흙 베듯 썽둥 썰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녀 석의 뼈와 살까지 함께 한 번에……. 당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에 차 부릅떠져 있던 녀석의 두 눈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 다.
“그저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꿈이 분명했는데 그게 사실일 줄이야…………. 이럴 수도 있는 거야?”
꿈속에서 본 검술을 따라 했더니 그게 진짜 되더라는 얘기는 동네 코흘리개 꼬맹이들조차 믿지 않을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다. 하지만 그게 진짜 현 실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더군다나 그 덕분에 목숨까지 건졌으니…………….
라이는 일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방금 전에 자신이 블러드 엑스 패거리들을 해치우기 위해 사용했던 검술을 떠올리려 애썼다. 사고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몸의 떨림은 서서히 잦아들어 갔다.
물론, 이건 그가 무의식적으로 익히고 있던 태허무령심법 덕분이었지만, 라이는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애를 쓴 보람이 있었는지 검술을 떠올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마음을 어느 정도 차분히 안정시킬 수는 있었다. 마음이 안정되자 자연스럽게 이번 임 무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었다. 그제서야 라이는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거리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자각을 할 수 있었 다.
블러드 엑스 패거리를 해치운 후, 당황한 나머지 이곳까지 정신없이 도망치면서 수많은 흔적들을 그대로 남겨 두고 온 것이다. 자신이 살인하는 장 면을 봤을 증인들도 부지기수일 터이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현재 머무르고 있는 여관까지 헐레벌떡 곧바로 내달려 왔다는 점이다.
라이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 놨던 자신의 로브를 바라봤다. 로브는 이미 검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을 최대한 활용해 도망치기는 한 것 같은데 자신의 허둥대는 모습을 괴이하게 바라본 사람이 한둘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로브에 묻은 핏자국을 본 자도 있을지도.
‘참, 여관으로 들어올 때 나를 본 사람이 있었나?”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당황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런 젠장!”
라이는 후다닥 창가 쪽으로 달려가서 바깥부터 살폈다. 혹시 누군가 수상쩍은 사람이라도 있나 싶어서……………
임무를 성공시키면 안전한 은신처와 도주로를 제공하겠다던 당코라는 사내를 라이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몇 시간도 채 지나 지 않아 당코가 달려왔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창문 쪽으로 달려가 혹시 누군가 자신의 뒤를 쫓아온 자가 있는지 철저하게 살펴본 후에야 라이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했어. 역시 실력이 대단한걸. 네 일 처리 솜씨가 마음에 드신다며 두목님께서도 크게 기뻐하고 계신다.”
사실은 기뻐했다기보다 당황해 했다는 게 맞았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잭은 블러드 엑스를 습격해서 죽이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그 후 호위들에 게 붙잡혀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다 자신의 배후가 블랙울프라는 걸 실토했어야만 했다.
그래야 샐러맨더 파와 블랙울프 파가 정면으로 격돌하게 될 테니까. 자신들은 그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싸움 구경이나 하면서 전쟁이 더 확대 될 수 있도록 이간질이나 살살하면 만사 OK였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애인인 루산나를 욕보인 잭이라는 놈에 대한 복수까지 완성할 수 있 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두목의 예상과는 달리 잭이 블러드 엑스는 물론이고, 그의 호위들까지 몽땅 다 죽여 버리는 괴력을 발휘해 버렸다. 덕분에 지금 마을은 발칵 뒤집혀져 있는 상태였다. 독이 바짝 오른 샐러맨더 파의 전 조직원들이 개떼처럼 몰려나와 마을 곳곳을 샅샅이 뒤지며 작은 단서라도 확보하려 하고 있는 중이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최악의 상황!
가장 좋은 건 간부급들 몇몇과 잠수를 타는 건데, 오히려 그건 이쪽이 했다고 자백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대로 모르는 척 가만히 있을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샐러맨더 파의 조직원은 물론이고, 경비대원들까지 몰려나와 살인자를 찾아 탐문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조만간 잭에 대 한 단서를 찾아낼 거라고 두목은 우려하고 있었다.
부두목과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잔머리를 굴리던 두목은 결국 잭을 다시 한 번 더 써먹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버릴 패였다. 그렇다면 아예 혼란 을 더 키워 놈들의 시선을 잭에게로 집중시켜 버리는 게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그래서 급하게 루크가 달려온 것이다. 잭이 발각되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써먹기 위해. 루크는 품속에서 제법 묵직해 보이는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 라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이번 임무를 훌륭하게 성공시킨 것에 대한 두목님의 만족의 표시야.”
돈주머니를 끌러보자 금화 몇 개와 신분증 하나가 보였다. 급히 꺼내 보니 라디에르란 이름이 보인다. 신분증에 기록된 그의 신체적인 특징은 라이
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 이 정도라면 국경 경비대도 별 의심 없이 통과시켜 줄 거라고 생각되었다.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하지 않았었나?”
“운이 좋았지. 너하고 비슷한 나이와 체형을 지닌 사람을 찾아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
“아주 깨끗한 거야. 절대로 발각될 염려도 없어. 그 신분증은 슬쩍 소매치기해서 훔친 게 아니라 소유자를 깨끗하게 해치워 버린 뒤 얻은 거거든. 시 체야 땅속 깊이 파묻어 버렸으니, 도난신고가 접수될 리도 없고 말이지.”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창고 구석에 수북이 쌓여있던 신분증들 중에서 잭이라는 녀석과 비슷한 용모를 지닌 것으로 대충 골라서 가져온 것일 뿐, 저걸 사용할 수 있느냐는 차후의 문제다. 요는 지금 이 순간, 잭이라는 녀석을 안심시켜 줄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라디에르, 라디에르라………….”
“왜? 라디에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라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건 아니야.”
라이의 시선이 이번에는 금화 쪽으로 돌아갔다. 얼핏 봐도 10개가 넘어 보였다. 예상보다 커다란 금액에 라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목께선 다른 건 몰라도 약속하신 건 언제나 확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지. 그 금화는 여비로 쓰라고 넣어 두신 거야. 그건 그렇고,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어.”
물론 두목에게서 받은 금화는 훨씬 더 많았지만 이미 루크의 품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차피 죽을 놈인데 뭐하려고 그렇게 큰돈을 준다는 말 인가. 요는 놈을 안심시켜, 다음 함정으로 인도하면 되는 것뿐인데 말이다.
“마지막 일이라고?”
“상황이 우리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두목께서 네게 제안을 하나 하셨다. 술집 주인 하나를 더 죽여 준다면 네가 계약의 조 건을 모두 이행한 것으로 쳐주시겠다고 말이야.”
라이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방금 전에 들은 게 사실일까?
“그게 정말이야? 이 마을을 떠나도 된다고?”
“물론이지. 그 증거로 네가 원한 신분증과 여비까지 이미 받았잖아. 두목께서 그러시더군. 자신도 어렸을 때 갖은 개고생을 해서인지 네놈을 봤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그래서 이 정도로 계약을 완수한 걸로 해 주시겠다는 거지.”
“그럼 그냥 놔주면 되는 거 아냐. 그런데 또다시 누군가를 죽이라고?”
이번 일만 하면 계약을 끝내주겠다는 말은 좋았지만, 또다시 살인을 해야 한다는 조건은 너무 싫었다. 얼마 전에 블러드 엑스 패거리를 죽인 후에도 정신없이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또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쯧, 이래서 애송이들이란 자기 생각만 한다니까. 그놈을 죽이는 건 우리 조직을 위한 것도 있지만, 너를 위한 것도 있어.”
“나랑 관련이 있다고?”
“그래. 지금 샐러맨더 파가 이 마을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이유가 뭐겠어? 원래 샐러맨더 파의 본거지는 다란툼 성인데 말이야.” 전혀 모르겠다는 듯 라이가 어깨만 으쓱하자 루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예전에도 내가 말해 줬었던 것 같은데? 샐러맨더 파를 여기 높으신 나리들이 밀어주고 있다고 말이야. 즉, 샐러맨더 쪽에서 이곳 요새 지휘관부터 시작해서 핵심 요직에 있는 자들을 몽땅 다 자기편으로 포섭하고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통로가 바로 자네가 죽여야 하는 술집 주인 ‘칼릭스’라는 놈이고 말이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잭이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걸 본 루크는 짐짓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이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잭이 깊은 내막을 알지 못하는 걸 아니 이렇게 사기를 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잭에게 미리 건네준 신분증도 지금 꺼낼 말을 하기 위해 급히 준비 해서 가지고 온 것이었으니까.
“핵심 간부들 중 하나인 블러드 엑스가 비명횡사를 당했는데, 샐러맨더 놈들이 멍하니 손 놓고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녀석들은 자신들의 조직원만으 로 범인을 잡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자, 요새 고위 관리들에게 전폭적인 수색 협조를 요청하려 하고 있다고. 칼릭스를 빨리 해치우지 못한다면, 범인 이 잡힐 때까지 국경부터 시작해 모든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가 틀어 막힐 거야. 자네에게 준 신분증이 꽤나 안전한 것이긴 하지만, 보다 강화된 검문 검색까지 통과할 수 있을지는…………….”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는 데 깜짝 놀란 잭이 황급히 신분증을 꺼내 살펴보는 것을 보며 루크는 미소를 감추기 힘들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넘어가 리라…………….
“오늘 밤, 칼릭스가 요새 내의 고위층들을 자신의 술집에 초청했다는 극비 정보를 입수하고 곧바로 이리로 달려온 거야. 자네는 놈이 그들에게 영지 외부로 나가는 모든 통행로를 틀어막아 달라는 요청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해. 그 방법은…, 방금 전에도 말했지?”
“그래서, 칼릭스를 죽여야 한다는 건가?”
“그래. 칼릭스만 죽이면, 자네는 이 마을을 떠나도 돼. 좀 더 도움을 받았으면 좋긴 하겠지만, 뭐 사실 그다음은 우리들의 힘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 이 가능하니까 말이야.”
라이는 하마터면 홀딱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지금껏 이런 식으로 입에 발린 말에 넘어갔다가 뒤통수를 맞은 게 어디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 게 생각하니 뭔가 수상쩍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야기가 자기한테 너무 좋은 쪽으로 흘렀다. 두목이 자기를 언제 봤다고 이렇게 까지 호의를 베풀 리 없지 않겠는가.
“나한테 좋은 건 알겠고, 그렇게 했을 때 그쪽이 얻는 이득은 뭐지?”
홀딱 넘어갈 듯하던 잭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루크는 짜증이 확 치밀었다.
‘정말 깐깐한 놈이네. 자기 잇속만 챙기면 됐지, 남까지 신경 쓸건 또 뭐야?’
“물론 자네 혼자 좋으라고 이러는 건 아니야. 당연히 이쪽에도 이익이 있지. 무엇보다 칼릭스 그 녀석은 그야말로 우리 블랙울프 파에 있어 눈엣가 시 같은 존재거든. 왜냐하면 녀석이 있음으로 인해 샐러맨더 파가 이곳 요새의 고관들을 포섭할 수가 있었으니까.”
“인맥이 무척 넓은 모양이군.”
“인맥이 넓다는 것보다 사람 다루는 수완이 좋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요새의 고위 관료들을 구워삶으려면 일단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허긴…….”
“놈이 운영하는 ‘여왕벌의 둥지’는 여기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최고급 주점이지. 더군다나 요즘은 술과 계집장사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도박장까지 운영하면서 돈을 아주 긁어모으고 있는 중이야. 거기서 벌어들인 그 엄청난 돈으로 관리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세력 확장을 하고………….”
라이는 더 이상 들을 것 없다는 듯 손을 저어 상대의 말을 끊어 버리며 말했다.
“그 부분은 됐고, 말을 듣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빨리 말해봐. 상세하게 설명해 줄 테니까.”
“그런 거물을 죽여 버리면, 녀석과 사이가 좋은 고관들이 가만히 있을까? 친구의 원수를 갚겠다고 들면서 검문검색을 강화한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닐 까?”
제법 예리한 구석이 있단 말씀이야, 하고 생각하며 루크는 머리를 굴려 변명했다.
“자네 말이 맞아. 하지만 자네는 그 전에 이미 이 마을을 벗어난 후일 텐데 뭐가 걱정이지? 두목께서 원하는 건 자네가 칼릭스를 죽인 후에도 이 마 을에 계속 남아서 도와달라는 게 아니잖아. 자네는 칼릭스를 죽인 후, 검문검색이 강화되기 전에 빨리 이곳을 떠나 버리면 된다고.”
“…….”
“자자, 자네는 쓸데없는 걱정 할 필요 없어. 일이 끝난 후에 탈출로는 내가 직접 안내해 줄 테니까. 별문제야 없겠지만, 혹시 난리통에 서로 못 만날 수도 있으니 이 일대 거점이 기록되어 있는 지도를 주지.”
제대로 된 군사지도 같은 건 물론 아니다. 이곳 요새 일대를 대충 그려 놨고, 요새 내의 눈에 띄는 커다란 구조물들 몇 개를 그려 놓아 전체적인 축적 을 가늠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놨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그려진 작은 동그라미들에는 투박한 글씨로나마 상세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우리 조직에서 마련해 놓은 비밀 거점들을 기록해 놨어.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그쪽으로 가서 도움을 청하면 될 거야. 자세히 써 놓긴 했지만, 도저히 못 알아보겠다고 생각되면 여관으로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어. 나중에 데리러 올 테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라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폭력조직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치고는 꽤나 치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의 생각과 달리 루크가 건네준 지도의 진실은 다른 데 있었다.
지도의 거점들은 블랙울프 파가 구축해 놓은 진짜가 맞았다. 라이가 샐러맨더 파를 급습하러 들어갔다가 생포되었을 때는 상관없겠지만, 죽었을 때 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라이가 블랙울프 파의 조직원이라는 걸 샐러맨더 파에서 알 방법이 없으니까. 그 전에 블러드 엑스를 죽이라고 보냈을 때는 생포될 확률이 다분했기에 이런 걸 준비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번은 얘기가 다르다. 그곳에서 싸우다 죽어 버릴 가능성이 너무 큰 것이다.
그걸 위해서 만들어 온 게 바로 이 지도였다. 자신들이 지금껏 고생해서 파악해 놓은 블랙울프 파의 모든 것이 이 지도 안에 담겨 있었다. 비밀거점, 접선방법 등등…………. 샐러맨더 파에서 조금만 조사해 보면, 이 지도의 주인이 블랙울프 파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을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양쪽은 피에 피를 부르는 정면충돌을 할 수밖에 없게 되리라.
라이는 지도를 자세히 살펴본 후 조심스럽게 접어 품속에 갈무리했다. 탈출로가 담겨 있는 것인 만큼, 실수로라도 잃어버리면 곤란한 것이다. 절대 적으로 정보가 부족한 라이였기에 루크의 말을 믿고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이건 녀석의 초상화야.”
폭력조직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아주 세밀하게 잘 그려져 있는 초상화였다. 세세하게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아래쪽에는 상대의 용모에 대한 특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림으로 그리기 힘든 부분을 보완해 주고 있었다.
초상화에 그려져 있는 사내의 용모는 라이가 상상한 술집 주인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갸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주 이지적인 인상의 사내였다. 섬 세한 선을 지닌 여성적인 얼굴인 것에 반해 밑에 써져 있는 기록에 따르면, 아주 날카로운 눈빛의 소유자인 모양이다. 하기야 블랙울프 파가 눈엣가 시처럼 여길 정도의 실력자가 평범한 사내일 리는 없겠지.
“기억할 수만 있다면 머릿속에 담아 두는 게 좋아. 그 초상화는 없애 버리고 말이야. 그 초상화를 그린 사람이 영지에서 제일 실력 있는 화가거든. 화가를 족쳐 추적하면 우리 파가 뒤에 있다는 걸 금방 알아낼 수 있게 된다고.”
루크의 말에 라이의 의구심은 싹 사라졌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상대를 없애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머릿속에 담아 넣은 후 태워서 없애 버리도록 하지.”
초상화 또한 소중히 접어서 지도와 함께 잘 갈무리해 두는 라이. 물론 나중에라도 태워 없앨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일의 경우, 어딘가에 쓸데가 있 을지도 모른다. 당코 녀석이 태워 없애 버리라고 하는 걸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자, 이건 갈아입을 옷. 고급 술집에 가는데 그런 허름한 옷을 입고 가면 되겠나. 게다가 온통 피범벅이고 말이야.”
루크는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를 라이에게로 툭 던졌다. 라이가 풀어 보니 제법 깔끔해 보이는 옷이 그 속에 들어 있었다.
“이곳에서 숨도 쉬지 말고 조용히 있어. 지금 모두들 네놈을 찾겠다고 온 마을을 헤집고 있는 중이니까. 자정이 되면 여관을 몰래 나와 시장 쪽으로 쭉 걸어가. 그러면 잡화점이 하나 있을 거야.”
골목길을 파악하기 위해 요 며칠 돌아다니다 본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형제 잡화점?”
“그래, 거기서 보자고.”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라이가 루크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블러드 엑스를 해치울 때, 얼떨결에 펼쳤었던 그 검법 때문이었 다. 그 당시에는 자연스럽게 잘 펼쳐졌던 검법이 그 후로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라이는 다시 한 번 더 자신을 생사의 간 극 사이로 밀어 넣고, 그 검법이 펼쳐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만약 익힐 수만 있다면 자신의 인생이 확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에 목숨을 건 모험을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