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4권 11화 – 지배인 나오라고 해!
지배인 나오라고 해!
그날 자정, 사위가 짙은 어둠에 잠겨 희미한 달빛만이 겨우 비치고 있을 때 라이는 형제잡화점 앞에서 루크와 다시 만났다. 그는 낮에 봤을 때와는 달리 매우 강력해 보이는 석궁을 한 자루 등에 메고 있었다. 마을에는 석궁 같은 사냥도구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기에 그런 행색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루크는 라이의 앞을 스치듯 지나가며 나직이 속삭였다.
“내 뒤로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와.”
그러고는 마치 모르는 사이라도 되는 듯 라이를 지나쳐 계속 걸음을 옮기는 루크. 라이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서로간의 거리가 꽤나 벌어진 후 에야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대낮이었다면 이곳 시장통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기에 이런 식의 미행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은 비틀거리는 취객들만 몇 명 보일 뿐 인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좀 더 걸어가자 주변의 경관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동부시장의 입구 쪽으로 가자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게 불을 밝힌 술집과 거기에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호객 행위를 하는 여인들과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술집들을 기웃거리는 취객들로 인해 지 금이 오밤중이라는 걸 착각할 정도다. 라이는 걸음을 빨리 해 앞서가고 있는 루크와의 거리를 좀 더 좁혔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시야에서 놓칠 우려 가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이렇듯 흥청거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목숨을 걸고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사냥꾼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술과 여자를 탐하며 흥청 망청 써댔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마치 내일이 없다는 듯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사냥꾼들에게 술과 여자를 제공하고 돈을 버는 뒷골목 의 조직들. 라이가 보기에도 술집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그만큼 막대한 이윤이 발생하리라.
유흥가를 반쯤 지나 내성의 높은 첨탑(塔)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루크는 라이에게 슬쩍 눈짓을 보내 어둑한 골목길 그늘 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길 반대편에 자리 잡은 커다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바로 여왕벌의 둥지야. 건물 전체를 놈들이 관리하고 있지.”
변경의 요새 도시에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크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든든한 뒷배가 있는 샐러맨더 파의 최대 자금줄이라고는 했지만 설마 저 렇게 큰 건물을 통째로 쓸 줄은 몰랐다. 저 큰 술집 어디에 칼릭스라는 놈이 처박혀 있는지 찾아낸단 말인가. 뒤지는 것만으로도 최소 2~30분은 걸릴 것이고, 그 정도 시간이면 흩어져 있던 샐러맨더 파의 조직원들이 새까맣게 모여들기에 충분하고도 넘칠 시간이다.
“헉, 저길 나 혼자 들어가라고! 지금 농담해?”
라이의 황당하다는 반응에 루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칼릭스가 있는 곳의 위치 정도는 알려줄 테니까. 칼릭스는 저 건물의 지하에 있어. 녀석은 자신이 직접 접대해야 할 정도의 거물이 오지 않는 한, 대부분의 시간을 안전한 지하에서 생활하거든. 그러니까 넌 우선 심부름으로 주인에게 돈을 전달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하면 안으로 들여보 내 줄 거야……….”
루크의 설명을 들으면서, 라이는 문 앞에 서있는 경비원 둘을 자세히 살펴봤다. 한눈에 봐도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갑옷은 겉모습만 화려한 것일 뿐,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었다. 하기야 경비를 한답시고 부동자세로 오랫동안 서 있으려면 실전용의 무겁고 두꺼운 갑옷을 착용해서는 힘들어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경비원은 저놈들 외에 몇 명이나 더 있지?”
“실내에 다섯 명.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겉모양만 멀쑥한 양아치들이야. 어제 상대했던 블러드 엑스의 호위 근처에도 못 따라갈 놈들이지. 실력 있 는 녀석들이라면 용병질을 하거나 몬스터 사냥을 하지, 저런 데서 푼돈 받고 잡일이나 하고 있겠어? 저놈들을 여기서 쓰는 건, 키가 크고 잘생겼기 때 “문이야.”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건 그렇고,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은 어디에 있지? 저 정문을 기준으로 설명해 봐.”
“들어가서 왼쪽에 있어. 일반인들이 내려갈 수 없도록 문으로 막아 놨는데 그 문 앞에는 경비원이 항시 지키고 있지.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을 거야.”
“비밀통로 같은 건? 내가 치고 들어갔을 때, 놈이 뒷구멍으로 살그머니 내빼 버리면 어떻게 해?”
순간 루크는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참기 힘들었다. 저 앞에 서 있는 경비 녀석들의 실력이야 허접한 건 맞다. 하지만 지하에 있는 샐러맨더 파의 정 예들까지 그렇게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친다. 특히 칼릭스가 다란툼 성에서 데리고 들어온 아홉 명의 직속 부하들 개개인의 실력은 거의 두목하고 맞 먹을 정도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건물 안에 들어감과 동시에 제압당하거나 살해당할 게 뻔하다고 봐야 했다. 그런 주제에 지부장이 도망칠 것을 걱정하는 꼴이라니. 기가 막혀 쓴웃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런 루크의 얼굴을 라이가 차가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니 루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마치 비 웃는 듯한 표정을 금방 알아챈 것이다.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루크가 얼른 표정을 바꾸며 대답을 해 주었다.
“비밀통로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걱정하지 마.”
루크는 등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의 3층을 슬쩍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 조직이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하는 어설픈 조직인 것 같나?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겠지만, 저 건물을 빙 둘러서 블랙울프 최고의 사수(射手)들 을 배치해 뒀지. 너를 피해서 녀석이 밖으로 기어 나오는 순간, 녀석은……………”
루크는 자신의 목을 손가락으로 쓱 긋는 시늉을 하며 키득거렸다.
“큭큭, 단번에 이렇게 되는 거지. 지하를 싹 쓸어버렸는데도 칼릭스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바로 밖으로 나와. 아마 그때쯤이라면 탈출하다가 우리가 쏜 화살에 맞고 뒈진 후일 테니까.”
물론 모두가 허풍이다. 라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난리가 날 텐데 괜히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걸리면 한 마디로 뭐 된다.
그럼에도 라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싸늘한 눈빛에 변함이 없자, 루크는 짐짓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신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뿐만이 아니야. 저기 창문이 닫혀 있는 3층 방이 보이지? 그곳에서 나 역시 이걸 들고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던 석궁을 툭툭 쳐 보였다.
“내 임무는 네 녀석의 퇴로 확보야. 그러니 잡스러운 생각은 집어치우고 칼릭스를 해치우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해.”
“좋아, 믿지. 참, 저기 책임자 이름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책임자?”
“그래. 설마 칼릭스가 모든 술 손님을 직접 상대하는 건 아닐 거 아냐.”
“아, 그건 지배인이 하고 있지. 지배인의 이름은 제임스, 제임스 란드레프야. 그런데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다 쓸데가 있어.”
“뭐,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저 방에 올라가서 신호를 보내면 행동을 개시하도록 해. 알겠어?”
고개를 돌려 건물을 바라보던 라이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약 날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거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명심해. 혹 내가 죽는다 해도 지옥 끝에서 살아나와 그 댓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주지.” “다, 당연하지. 어쨌든 잘해 보라구. 그럼 행운을 빈다.”
루크는 더 이상 라이와 말을 섞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후다닥 여관 3층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 모습을 뒤에서 쳐다보고 있던 라이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번 믿어 본다. 하지만 혹시라도 내 뒤통수를 친 거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살인의 경험이 가져다 준 정신적 충격도 컸지만, 블러드 엑스를 죽일 때 발휘되었던 막강한 힘은 라이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예 전이었다면 꾹 참고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으니까!
살인을 경험한 뒤 불과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라이의 내면은 빠른 속도로 변해 가고 있었다.
당코의 신호를 기다리던 라이는 일단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가지고 있는 무기라고는 달랑 허리춤에 차고 있는 짤막한 검 한 자루뿐이었지 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평온했다.
“그래, 난 이번에도 살아남을 거야. 반드시.”
잠시 기다리고 있자 여관 3층의 창문이 살짝 열리며 당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와 눈을 맞춘 그가 살짝 턱짓을 하는 것으로 신호를 보내자 라이 는 건물을 향해 주저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깔끔한 옷을 입고 있긴 하지만 아직 어려 보이는 라이가 다가오자 입구에 서 있던 경비원 중 하나가 곧바로 제지하며 나섰다.
“어이,여기는 너 같이 어린놈이 오는 데가 아니야. 다른 데로 가봐.”
라이는 곧바로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근사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 심부름을 왔는데요.”
“심부름?”
“예. 입구에서 란드레프라는 분을 찾으면 저희 주인님께 안내해 주실 거라고 하셔서.
경비원은 그제야 라이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꽤나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의 주인님이란 분이 지금 이곳에 계시단 말이냐?”
“예, 오늘 영 끗발이 안 좋다고 하시면서 빨리 돈을 가져오라는 전갈을 하셔서요. 마님 명령을 받고 급히 달려온 거거든요.”
그제야 경비원은 입구에서 몸을 비켜 안으로 들어가는 걸 허락해 주었다. 도박장에서 돈을 잃자 하인을 시켜 자금을 가져오게 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고맙습니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호화로운 실내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자신의 주인이었던 마인 테귤러의 집무실만큼이나 실내는 호화로 웠다. 중앙에는 커다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주위로 10여 명에 달하는 미모의 여인들이 앉아 있었다. 체형이나 나이, 옷차림 등은 각자 제 각각이었다.
터질 듯 풍만한 유방의 위쪽 부분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섹시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여인, 솜털도 아직 채 벗지 못한 듯한 작고 마른 체형의 앳된 여 자아이 등등……………. 심지어는 메이드 복장을 하고 있는 여인도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메이드 복에 비해 훨씬 짧은 치마에, 가슴골이 푹 파인 퇴폐적인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마 갖가지 연령대와 체형을 갖춰 손님의 취향대로 고르라는 나름대로의 서비스인 모양이다.
여인들은 매우 친밀한지 귓속말로 서로 소곤대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라이가 실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잡담을 멈추고 일제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곧바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금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깔끔한 옷을 걸치고 있긴 하지만 절대 돈 많은 귀족 자제나 상인의 자제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리라. 만약 여인들이 돈 냄새를 맡았다 면 후다닥 일어나 추파를 떨며 달라붙었겠지만 좋게 봐야 돈 많은 집 하인이라고 판단했기에 관심을 끊은 것이다.
라이는 오히려 여인들의 그런 무관심이 반가웠다. 괜스레 애교를 부리며 다가오면 곤란해지는 쪽은 라이였다. 라이는 슬쩍 실내를 살펴보며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문 앞에 경비원들이 배치되어 있다고 했었는데.’
실내에서 왼쪽으로 나 있는 화려한 문양의 문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라이는 한눈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 문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있 었다.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는 문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라이는 그 문을 향해 천천히 걸으며 경비원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건물 정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이 둘.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 문을 지 키고 있는 녀석이 하나. 그렇다면 나머지 두 명은 어디에 있지?
이때 바닥을 닦고 있던 꼬맹이 하나가 라이를 발견하고 후다닥 달려왔다.
“어떤 곳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러면서 라이의 아래위를 쳐다보는 것이 이런 곳에 출입하기 힘든 옷차림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듯했다.
라이는 일부러 인상을 왈칵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에 제임스라는 개새끼 있지? 제임스 란드레프 말이야.”
“지배인님 말이에요?”
“그래 그 새끼, 지금 어디 있어?”
라이는 도저히 분노를 참기 힘들다는 듯 품속에서 다짜고짜 단검을 뽑아들며 살기 어린 어조로 외쳤다.
“그 개새끼가 내 누나를 건드렸단 말이다.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보지? 빨리 나와! 제임스, 이 오크보다 못한 개새끼야!”
라이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자 삽시간에 실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 입구 쪽에 나 있던 방문 중 하나가 벌컥 열리며 40대 중반쯤으로 보이 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 중년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바닥을 닦던 꼬마에게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기에 가게에서 이 소란이냐!”
“저 사람이 지배인님을 찾아왔는데, 자기 누나를 어떻게 했다며 갑자기 검을 뽑아들고…………….”
지배인이라는 중년 사내는 험악한 표정으로 싸구려 칼을 뽑아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라이를 힐끗 쳐다봤다. 순식간에 중년 사내의 인상이 싸늘하 게 굳는다. 이때, 왼쪽에 있는 방문 중 하나가 벌컥 열리며 거기서 경비원 두 명이 육중한 발소리를 내려 달려오는 게 보였다.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경 비원 둘이 그 방 안에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곳이 녀석들의 휴게소인지도 모른다.
지배인은 라이에게 말조차 걸지 않았다. 그는 달려오는 경비원들을 보며 곧장 싸늘한 어조로 질책부터 시작했다.
“경비를 어떻게 섰기에 이런 놈이 가게로 기어들어와! 뭣들 하는 거야? 당장 이놈을 잡아 가게 밖으로 쫓아 버리지 않고.”
“옛, 지배인님. 당장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지배인은 그렇게만 지시한 후, 짜증 가득한 얼굴로 방금 전에 자신이 나왔던 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지배인의 뒤에서 착잡한 얼굴로 허리를 굽히 던 경비원들은 라이 쪽으로 돌아서서 분노를 터뜨렸다.
“이런 망할 놈의 새끼! 여기가 감히 어딘 줄 알고 행패야, 행패는! 넌 오늘 몸성히 집에 돌아가지 못할 줄 알아라. 그런데 밖에 있는 놈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런 놈을 들여보내고!”
이때, 정문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경비원들이 안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후다닥 달려 들어왔다. 계단이 있는 방문 앞의 경비원까지 합하면 모두 다 섯 명. 당코가 말했던 경비원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자신의 주위로 경비원 넷이 달려와 험악한 인상을 지을 때부터 라이는 주춤주춤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척하며 단검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한껏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라이. 경비원들은 그런 라이를 완전히 얕잡아 보고 있었다. 칼을 뽑기는커녕, 칼집 근처에 손 을 대고 있는 경비원조차 하나 없을 정도다.
정문 앞에서 근무를 서던 경비원들을 보자, 방 안에서 튀어나온 경비원들 중의 하나가 투덜거렸다.
“야, 저런 놈을 가게 안으로 들여보내면 어떻게 해?”
“낸들 알았나. 우리들한테는 돈 심부름을 왔다고 거짓말을 했단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욕을 얻어먹은 경비원은 라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으르렁거렸다.
“이 개새끼,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군.”
“야 이 새꺄, 그렇게 죽고 싶으면 나무에 목을 매달아. 여러 사람 귀찮게 만들지 말고.”
“시끄러우니까 빨리 끌고 나가. 이러다 지하실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우리는 아주 좆되는 거야.”
“알았으니까, 자꾸 지랄거리지 마. 젠장, 별 거지 같은 놈 하나 때문에 이게 뭐야?”
“씨발, 또 어떤 년을 건드렸기에 이 지랄이야!”
경비원들은 성질을 내면서도 지배인이 사라진 방 쪽을 바라보며 투덜거리느라 라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절호의 기회! 아무리 실력이 없는 놈들이라 고 해도 다섯이나 된다. 정면승부를 해서는 아무리 라이라 해도 제압하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걸 잘 아는 라이였기에 빈틈을 노 려 번개처럼 기습을 가했다.
그의 싸구려 단검이 번쩍이는 순간, 겉모양만 멋있는 얄팍한 가죽갑옷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잘려나가며 피 분수를 뿜어냈다.
“커억!”
“큭!”
“뭐, 뭐야? 이 미친 새끼!”
“빨리 비상종을 울려!”
방심한 대가는 아주 컸다. 라이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경비원들은 기습을 당해 순식간에 셋이 당해 버렸고, 그나마 장검이라도 뽑아들며 반항하는 흉내라도 낼 수 있었던 것은 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들과 같이 바닥에 나뒹구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경비병들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본 여인들이 째질 듯한 비명을 질러 댔다.
“까아악! 어떡해. 사람이 죽었어.”
“빠, 빨리 지배인님을 불러.”
라이는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장검을 주워들고 계단이 있는 방문 쪽으로 뛰기 시작했 다. 달리면서 자신의 단검은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제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칼릭스라는 녀석이 눈치채고 몸을 숨기기 전에 찾아내 죽인 뒤 최대한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집무실 문을 열며 지배인은 짜증 어린 목소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젠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게 무슨 일이람?”
지부장인 칼릭스는 아주 합리적인 인물이라 매상만 제대로 올려 준다면, 그 외에 무슨 일을 하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욕이 치밀 때마다 주점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건드리는 것으로 만족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건 곧이어 시들해졌다.
밀고 당기고 하면서 정복해 나가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여기 일하는 여자들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지배인인 그가 벗으라고 명 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치마를 벗고 다리를 벌려 주니 재미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을의 예쁜 처녀들을 꼬시기 시작한 게 벌써……..
“어떤 년의 동생인지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워낙 많은 처녀들을 건드리다 보니 이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전에도 깔끔하게 떨어져 나가지 않고 울며불며 매달린 여자나 그 가족들이 몇 있 긴 했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양민, 아니면 농노 출신인 그들이 뭘 할 수 있겠는가. 그의 뒤에 샐러맨더 파가 있다는 걸 알고는 알아서 떨어져 나갔었 다. 그러니 이번에도………………
“가만, 그게 아니잖아.”
이렇게 업소까지 쫓아와서 행패를 부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부하의 취미생활에 대해선 그게 아무리 엽기적인 것이라 해도 못 본 척 넘어가 주는 관 대한 칼릭스였지만, 그 취미로 인해 영업에 방해를 받게 된다면 얘기가 틀려질 수도 있다.
또다시 주제넘게 행패를 부린다면 그냥 쫓아내는 것 정도로 봐주면 안 되겠어. 반쯤 죽여 놓던지, 아니면 아예 죽여서 파묻어 버릴 거라고 결심하는 지배인이었다.
“아잉~, 왜 이렇게 늦게 와요?”
“괜찮아, 이제 다 해결됐어.”
칼릭스에게는 주점에서 제일가는 미녀를 붙여 줬고, 자정이 넘어 버렸기에 이제 더 이상 그를 찾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뭔가 일이 생겼다 해도, 방 금 전에 짜증 내며 방으로 되돌아가는 자신을 보고 그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다들 눈치챘을 것이다.
쉬쉬하며 알아서 조용히 처리하겠지.
서둘러 옷을 벗기 시작하는 지배인. 하지만 곧이어 그는 기껏 벗었던 옷을 다시금 입어야 하는 짜증스런 상황에 처했다. 밖에서 여자들의 요란한 비 명소리와 함께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또 뭐야! 이 개자식들! 일 처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기에…………….”
하지만 벌거벗은 채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미녀를 향해 짜증을 폭발시킬 수는 없는 법. 여기까지 끌어들인다고 쏟아부은 공이 얼만데.. 황급히 윗옷을 다시 주워 입는 한편 미녀를 다독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흐흐, 우리 귀염둥이,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는
미녀는 홑이불로 자신의 벗은 몸을 살짝 가리며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자기~ 빨리 와요~.”
문을 벌컥 열고 분노어린 발걸음으로 뛰쳐나온 지배인. 하지만 곧이어 그의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던 얼굴은 새파랗게 변해 버렸다. 여기저기 에 쓰러져 있는 경비원들. 그리고 그 주변에 흩뿌려져 있는 붉은 피가, 그들이 왜 쓰러진 것인지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이때, 그는 볼 수 있었다. 방 금 전에 행패를 부리던 그 새파란 놈이 지하로 내려가는 문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지배인은 황급히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지하실과 연결되어 있는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줄 끝에는 종이 달려 있었다. 외부의 기습을 당했을 때, 지 하에서 대기하고 있던 샐러맨더 파 조직원들에게 알리기 위한 비상종이었다.
“설마하니 두목님을 해치우겠답시고 본부로 뛰쳐 들어온 미친놈이 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