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4권 4화 – 이용하고, 버리고

이용하고, 버리고

“이야~, 당신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길은 잃어버렸지…, 먹을 건 하나도 없지………

짐짓 너스레를 떨고 있는 월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대방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은밀하게 눈빛을 번뜩이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런 깊은 산골짜기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하기에는 실력들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식량을 얻어먹는 와중에 이들이 꽤나 오랜 시간 산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건 말라비틀어지고 냄새나는 건 조 식량뿐이었으니까.

‘트레저 헌터(Treasure hunter)들인가? 아니면 밀수꾼?’

자신들의 정체에 대해 저렇게까지 연막을 치는 것으로 보아 그것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무엇보다 월터의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있었 다. 그건 라이라는 소년에 대한 의문이었다.

대장이라 불린 중년 사내와 샘은 라이가 지니고 있는 진면목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월터는 느끼고 있었다. 은근히 흘러나오고 있는 마나의 기 운을…………. 그리고 그 기운이 월터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상급반 수련생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되는 기운이긴 했지만, 문제는 수련생이라고 하기에는 기운의 크기가 너무 일정하다는 데 있었다. 훨 씬 더 강한 기운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을 때에나 저런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을 월터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소년의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은가.

의뭉을 떨며 일행의 정체에 대해 고심을 하던 월터의 상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뭔가 음습한 기운이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 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월터가 홱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봤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왜 그런지 몰라 고개만 갸웃하며 서 있을 뿐이다. “갑자기 왜 그렇게 긴장한 표정을 짓는 거요?”

미심쩍은 듯 숲을 노려보고 있던 월터가 다급히 대답했다. 급속도로 접근해 오는 수십이 넘는 기척들. 몬스터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기운의 형태가 너무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저쪽에 뭔가가…….”

이때, 저 멀리 울창한 수풀을 헤치며 공포에 질린 사내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여기저기 찢어진데다가 풀잎이나 흙이 잔뜩 묻은 옷은 엉망이었다. 게다가 험한 수풀을 헤치면서도 앞에 신경을 집중하지 못하고 뒤를 힐끔거리던 탓에 나뒹굴기까지 하고 있었다. 사내에게 저렇게 까지 공포를 안겨 준 게 도대체 뭘까?

순간, 대장과 샘, 그리고 라이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오른다. 키메라 오크 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키메라 오 크가 그리 흔한 것도 아니고, 또 어쩌면 말이 씨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곧이어 또 다른 사내가 한 명 더 수풀을 뚫고 달려 나왔고, 그 뒤를 쫓아 시커먼 형체 하나가 숲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두세 마리가 더 튀어나와 가 장 뒤처져 달리고 있던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짝 긴장한 채 숲 쪽을 바라보던 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휴우~, 난 또 뭐라고. 코볼트잖아.”

코볼트는 놀과 비슷하게 생긴 유인원형 몬스터다. 놀에 비해 덩치가 좀 더 크긴 했지만 위험성 면에서는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물론 비무장 상태인 민간인에게는 큰 위협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잘 훈련을 받은 병사나 갑주를 단단하게 챙겨 입은 모험가들에게는 그리 큰 위협을 줄 수 없는 몬스 터다.

몬스터가 코볼트임을 확인한 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왜 도망치고 있는 거지?”

코볼트 서너 마리에게 쫓기는 사내들은 멀리서 봐도 꽤나 단단하게 무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대장의 의문에 샘이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 로 대꾸했다.

“떼거리한테 공격받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대비도 안 하고 야영하고 있다가 습격당한 거겠죠. 아니면 저런 놈들조차 처리 못 할 정도 로 허접한 놈들이거나.”

“흠, 그럴지도…….”

이때, 숲 속에서 코볼트 몇 마리가 더 달려 나왔다. 녀석들은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 뒤처져 있던 사내를 덮쳐 버렸다. 사내는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 러내고 덮쳐드는 코볼트의 목을 붙잡아 뒤로 밀어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코볼트는 그 한 마리만이 아니었다. 다른 녀석들이 양옆에서 달려들며 마 구 씹어댔다. 잘 다듬어 놓은 가죽갑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삽시간에 걸레쪽이 되어 버렸고 시뻘건 핏물이 솟구쳤다.

이때, 또 다른 한 명이 숲 속에서 달려 나오더니 쓰러진 사내의 몸을 게걸스럽게 물어뜯고 있던 코볼트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 사내는 먼저 튀 어나온 두 사내에 비해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단 한 번의 칼질에 코볼트 세 마리의 목이 베어져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사내가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부축하려 할 때, 숲 속에서 코볼트 수십 마리가 더 달려 나왔다. 마치 시체를 노리는 까마귀들처럼 사내들을 덮치는 코볼트들로 인해 그 일대가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마지막으로 달려 나온 사내의 실력이 놀랍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동료를 죽음에서 구해 낼 수는 없었다. 그가 몇 마리의 코볼트를 베고 있는 동안, 그의 동료는 뒤쪽으로 돌아 공격해 온 코볼트들에 의해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버린 것이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도와주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저런 유인원형 몬스터들은 군집을 이뤄 살아간다. 아무리 약한 몬스터 라도 수십, 수백 마리가 달려들면 당할 도리가 없다.

지금 보이는 코볼트가 20여 마리도 채 되지 않았지만, 저 숲 속에 얼마나 더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 사내들에게는 안됐지만, 코볼트들이 저들을 공격한다고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에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대장, 아직 몇 마리 되지 않을 때 구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가 힘을 합한다면 충분히 저들을 구할 수 있잖아요?”

무시무시한 대장의 검술 실력을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라이의 말에 샘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헛소리하지 마! 그보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어지간한 위급 상황에서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샘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을 본 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겨우 코볼트 몇십 마리 정도 가지고………….”

“코볼트가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대장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코볼트 떼를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코볼트가 맞는데…………?”

“빌어먹을… 저건 놀입니다.”

코볼트와 놀이 비슷하게 생긴 건 사실이었지만, 그 둘을 헷갈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놀은 코볼트의 반 토막이라고 할 정도로 체구 가 작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잘 훈련된 병사라면 놀 서너 마리는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정도로 약한 몬스터였다.

“놀이라고? 저렇게 덩치가 커다란 놀이 어디 있어?”

아무리 숲과 몬스터의 습성을 꿰고 있다는 레인저인 샘의 말이었지만 대장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여우와 늑대만큼이나 코볼트와 놀의 차이는 컸다.

“얼마 전에 우리도 경험했지 않습니까? 덩치가 트롤에 필적할 정도로 컸던, 그 빌어먹을 오크들 말입니다.”

샘의 말에 대장은 경악했다.

“허걱! 그렇다면 설마 저것들도 키메라라는 말이야?”

“예, 틀림없습니다.”

“젠장,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자.”

대장 일행이 당황한 표정으로 몬스터와 반대 방향으로 재빨리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도 월터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예의 소유자였으니까.

오히려 월터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저게 놀이라고? 게다가 키메라?”

코볼트만 한 덩치를 지닌 놀이라니…………. 마법을 잘 알지 못하는 월터였지만 저 몬스터가 정말로 놀이라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의 근본이 뒤집어 진다고 봐야 했다. 키메라 제작이라는 게 각 생명체의 가장 우월한 부분만을 잘라내어 짜깁기한 후, 마법을 통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그는 알 고 있었다.

즉, 코끼리의 몸통에 사자의 머리통을 가져다 붙이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사자를 코끼리만 하게 덩치를 불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하 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키메라들은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 들리지 않도록 쑥덕거리던 사내들의 말이 맞다 는 전제하에서.

“흐흐흣, 이 근처에 외지인이 들어오기만 해도 알카사스 놈들이 경기를 일으킨 이유가 바로 저것 때문이었군.”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자신 하나를 잡겠다고 대규모의 병력이 동원되어, 기습공격을 가해 오지 않았던가. 방심하고 있던 월터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 황당스런 사건이었지만, 왜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던 것인지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즉, 외지인에 대해 철통 같은 경계망이 펼쳐져 있는 곳에 그가 발을 집어넣은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여행자처럼 꾸미긴 했지만 별다른 일도 없이 여 관에서 며칠 동안 빈둥거리며 놀기까지 했으니, 충분히 첩자라는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이다.

물론 첩자는 맞긴 했다. 이곳이 아닌, 사막에 대한 정보 수집 임무를 지닌 첩자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일단 저들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저들이 코 린트의 정보부 소속 병사이거나, 아니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증거와 증인이 있어야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게다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니 절대 평범한 모험가들은 아니다.

마음을 먹은 월터는 도주하고 있는 사내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 이쪽이야. 이쪽으로 오라고!”

놀에게 쫓겨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사내들은 월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방향을 바꿔 그를 향해 미친 듯 달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황급히 도망치고

있던 대장 일행에게까지 들렸다.

“저런 미친 새끼! 그렇게 죽고 싶으면 혼자 죽을 것이지, 왜 저런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해!”

투덜거리는 샘을 향해 대장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닥치고 전방이나 신경 써! 저놈들이 키메라들을 막아 주는 동안 우리는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야 한다. 그게 우리들이 살 길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대장은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그것에 맞게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100여 마리가 넘는 유인원형 몬스터들이 숲 속에서 새까맣게 달려 나오고 있는 것을.

‘제기랄! 당최 편하게 넘어가는 날이 단 하루도 없군. 키메라에 쫓기질 않나, 저런 미친놈을 만나질 않나. 이러다 코린트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 나 모르겠군.’

대장은 사람들을 구한답시고 소리를 지른 월터를 원망했지만, 사실 이 모든 사단을 만든 원흉은 그 자신이었다. 그가 비밀연구소를 들쑤셔 놓지 않 았다면 이런 사달이 벌어졌을 리 없었으니까.

***

“이런 젠장! 어떻게 된 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어!”

키메라들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여기까지 도망쳐 오는 동안 적어도 100마리는 넘게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숫자가 전혀 줄어든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키메라들이라고는 하지만,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입맛이 썼다. 새까맣게 모여들고 있는 광기 어린 키메라들! 이런 상황이라면 부하를 구하는 건 고사하고, 자신의 목숨마저도 위태로울 지경이다. 그런데 이때, 그의 시야에 온몸이 피로 흠뻑 젖은 몬스터 한 마리가 들어왔다. 코볼트도 그렇고, 놀 역시 마찬가지다. 그 생김생김이 비슷해 어느 놈 이 어느 놈인지 구분을 하기 힘들다. 그런데 굉장히 낯이 익다. 가슴을 가로질러 길게 벤 상처 자국까지. 분명 자신이 죽인 놈이다. 어쩌면 이번이 처 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전에도 이런 녀석들을 숱하게 봤었지만, 워낙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냥 넘어갔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놈을 보는 순간, 앤트러스의 뇌리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재생능력이 좋았던 오크들. 그렇다면 저 피에 흠뻑 젖은 채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고 있는 저놈 역시 나에게 두 토막이 났었다가 되살아난 것이 아닐까?

순간 앤트러스는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여기서 절대 살아서 돌아갈 수가 없다.

‘어쩔 수 없군. 나라도 살아야겠어. 하지만 너희들의 복수는 반드시 해 주마. 이 빌어먹을 원로원 놈들. 두고 보자!’

부하를 버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고작 부하 한 명을 구하겠다고 자신까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 닌가.

결단을 내린 앤트러스는 부하를 보호하는 것을 포기하고 키메라들이 적은 방향을 향해 힘으로 뚫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자신의 결단 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주위를 둘러싼 키메라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숲 속에서 코볼트로 보이는 키메라보다 더욱 큰 원숭이형 키메라들이 떼거리로 달려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저놈들이 이곳에 도착 하는 순간, 자신의 목숨도 끝장이 나리라.

살기를 포기했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원로원파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타격을 받게 될 테니까. 그저 원로원파의 일그 러진 얼굴들을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게 원통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제대로 보고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런데 그때였다. 절망 속에서 힘겹게 검을 휘두르고 있던 앤트러스의 귓가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이봐! 이쪽이야. 이쪽으로 오라고!”

앤트러스의 부하 역시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기를 쓰고 그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싼 키메라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목소 리를 듣고 흠칫하는 그 짧은 순간, 빈틈을 파고든 키메라 한 마리가 부하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진 것이다.

“으아악!”

우둑, 우두두둑.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부하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갈가리 찢겨 버렸다. 그리고 찢어낸 살점들을 들고 아귀아귀 뜯어 먹기 시작하는 키메라들!

위쪽에서 그들을 불렀던 사람도 그 장면을 본 모양이다. 상황이 위급하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밑으로 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이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들을 구해 주겠다고 달려오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 힘겹게 검을 휘둘러 키메라들을 베 고 있던 앤트러스의 얼굴에 짙은 절망감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국경수비대 병력이 온 줄 알았더니 그저 미친놈이었잖아!”

어디를 가도 꿇리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신도 목숨을 포기해야 할 판인데 간덩이가 부은 미친놈 하나가 더 추가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저 시체 한 구가 더해질 뿐이다. 하지만 곧이어 앤트러스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사내의 몸이 잔상을 보일 정도로 쭈욱 늘어나더니 엄청난 속도로 산 밑으로 달려 내려왔다. 그리고 갈가리 찢긴 부하의 시체를 게걸스럽게 뜯어먹고 있던 키메라들을 스쳐 지나갔다.

파파팟!

“키에에엑!”

그가 언제 검을 뽑아들었는지 볼 수도 없었다. 감찰부 내에서 검술이라면 한가락 한다고 자부하던 앤트러스조차도 그저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피 를 뿌리며 목이 잘려나가 나뒹구는 키메라들을 봤을 뿐이다.

사내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 내려왔다. 그 와중에 그의 근처에 있던 키메라들은 모두 다 마치 괴상한 마법에라도 걸린 듯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앤트러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키메라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것조차 잠시 잊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저게 과연 사람 이 익힐 수 있는 검술의 경지일까? 근위대에서조차도 저런 놀라운 신위를 보여주는 그래듀에이트는 본적이 없었다.

그 순간, 사내의 몸쪽에서 뭔가 퍼런 빛줄기들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워낙에 빠른 데다가 마치 꿈인 듯, 환상인 듯하여 미처 그가 반응 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축축한 뭔가가 그의 몸을 뒤덮었고, 피비린내가 확 풍겨 왔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키메라들이 산산조각이 났던 것이다.

“괜찮소?”

얼이 빠져서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서 있는 앤트러스를 이리저리 둘러본 사내. 다친 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사내는 앤트러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짜고짜 옆에 끼고는 산 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많은 키메라들 또한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사내가 놀라운 속도로 내달리고 있긴 했지만, 그는 건장한 장정 한 명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상태. 앤트러스가 놀랄 정도로 내달리는 사내의 속도가 빠르긴 했어도, 그들을 뒤쫓고 있는 키 메라들과의 거리는 조금씩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월터가 사내들 중 한 명을 구출해 오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들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걸 본 대장 일행은 기절초풍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월터의 뒤로 수백에 달하는 키메라들이 괴성을 질러대며 새까맣게 따라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빌어먹을! 야, 이 새꺄. 죽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죽어! 왜 그것들을 몰고 이쪽으로 오는 건데?”

하지만 월터는 말없이 내달렸고, 대장 일행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기 시작했다. 대장 일행이 죽을힘을 다해 헐레벌떡 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 일행은 저 망할 월터 새끼가 자신들을 추월해서 앞으로 달려가 버리는 걸 기가 막히는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 었다.

“헉헉헉! 이런 빌어먹을!”

대장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힐끗 바라봤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는 키메라들을! 살기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광기 어린 눈동자. 괴성을 질러대고 있는 입에서는 거품처럼 침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다.

“허걱!”

절망적인 상황! 키메라들이 달려오는 속도가 그들이 내달리는 속도보다 월등한 만큼, 벗어날 방법은 전무했다.

“망할 놈! 우리하고 무슨 원수가 졌다고!”

“헉헉, 어떻게 합니까? 대장!”

셋 중에서 가장 체력이 떨어지는 게 샘이다. 그의 안색을 보니 더 이상 달렸다가는 키메라들과 싸울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싸운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대장은 이번에도 라이를 미끼로 던져 주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도 없었으니까.

“라이! 어쩔 수 없다. 맞서 싸우자. 네가 앞에서 버텨라. 우리가 뒤에서 받쳐 주마.”

전에도 그렇게 해서 무시무시했던 키메라 오크들의 포위망을 돌파했었다. 싸우던 도중에 정신을 잃었는지, 그 과정은 전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말 이다. 어쨌거나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던 기억이 있는 이상, 이번에도 그게 통하기를 기대하고 대장의 지시를 따르는 수 밖에. 이번에도 대장이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 굳게 믿은 라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장의 명령에 라이는 도끼를 뽑아 쥐며 뒤로 돌아섰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대장과 샘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뒤를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속도를 내서 내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월터는 키메라들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고 도망치는 동안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우연히 만나 잠시 동행했던 모험가들이 키메라들에 의 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 정도는 할 법도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키메라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잠시 동안이지만 길벗을 했던 자들까지 미끼로 던져줬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뒤쪽을 살펴볼 만큼 마음의 여

유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그들이 처절하게 싸우다가 죽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을 만큼 그는 변태가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짙게 숲이 우거져 있는 곳이라 빽빽이 자리 잡은 나무들로 인해 마음먹고 보려 하지 않는 이상 뒤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기 도 힘들었다. 그런 이유로 만약 봤다면 정말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음에도 그는 볼 수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월터는 충분히 안정권에 들어갔다고 판단되자 키메라들에게서 구출해 온 사내를 땅바닥에 내려놨다. 울창한 숲 속을 미친 듯 달 린 월터에게 안겨 있었던 탓인지 중년 사내는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그가 정신을 차리자 월터가 물었다.

“방금 전의 그 키메라들은 뭐요?”

앤트러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의뭉을 떨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키메라라니? 설마 그 흉악한 몬스터들이 키메라란 말이요?”

월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다.

“우리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귀하의 소속을 밝히시오. 그게 가장 선행되어야 할 확인 작업인 듯하니까.”

앤트러스는 잠시 망설였다. 눈앞에 있는 사내가 적인가, 아니면 아군인가? 만약 국왕파에 속한 기사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신분을 그대로 밝힐 수도 없었다. 감찰부에서 이곳에 파견한 특임대는 자신들뿐이었고, 자신들은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었으니까.

앤트러스는 짐짓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는 콘돌 기사단 제32정찰조 소속 기사들이오. 이 일대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와 그것을 알아보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았소.”

콘돌 기사단이라는 말에 월터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런 이런…, 나는 본국의 정보부원들인 줄 알고 구출했던 거였는데…………. 뭐 그렇지 않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지. 어쨌거나 내가 알고 싶은 것만 알 아내면 되니까.”

본국의 정보부 운운하는 걸 듣자마자 앤트러스는 직감했다. 저자는 국왕파도 원로원파도 아닌 타국의 첩자라는 것을. 순간, 상대가 보여줬던 그 놀 랍던 무예와 자신이 알고 있던 타국의 무예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교차되며 사라져 갔다.

“혹시…, 코린트에서 오셨소?”

월터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나에 대해 모르는 편이 귀하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소?”

그 말이 옳았다.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저자는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참 동안 고심하던 앤트러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살아남아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상부에 보고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개죽음당 하고 싶지도 않았고,

“뭘…, 알고 싶으시오?”

월터는 꽤 오랜 시간 앤트러스를 닦달하며 심문해 봤지만, 수확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앤트러스도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키메라를 만든 곳이 원로원 소속 비밀연구소인 것 같다는 것과 콘돌 기사단 기사임에도 이런 고성능 키메라가 생산되고 있다는 걸 전 혀 모르고 있었다는 정도.

앤트러스가 자신의 진짜 신분은 철저히 숨기면서도 키메라에 대한 사실 만큼은 솔직히 말을 해 줬기에 월터는 그의 말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 리고 키메라에 대한 이런 엄청난 정보를 왕실에 단 한 마디도 보고하지 않은 걸 보면, 원로원에서 뭔가 좋지 않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추 측성 말에는 고개까지 끄덕였다. 알카사스에서 왕실과 원로원 간의 반목은 이미 공공연한 일이었기에, 그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