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4권 9화 – 두목의 계략
두목의 계략
마를린은 괴한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며 미행했다. 괴한은 막강하기 그지없던 키메라 부대를 혼자서 맨손으로 전멸시킨 놀라운 무위를 지닌 존재.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를린은 괴한을 은밀히 미행하며 이해하기 힘든 여러 의문점들을 찾아냈다. 처음 괴한을 미행할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음에 틀 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을 떨쳐내기 위해 그토록 미친 듯 내달렸을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땅바닥에 벌렁 누웠다가 일어난 후, 모든 게 바뀌었다. 이상하게도 괴한은 자신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듯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 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나를 안심하게 한 후, 기회를 노려 단숨에 죽여 없애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뭔가 이용해 먹을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행동하는 건가? 도통 짐작이 안가네…………….’
그녀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괴한이 갑자기 기억상실이라는 병에 걸린 게 아니라면, 자신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이런 식으로 행동할 리가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마를린은 한동안 고민해야 했다. 이대로 계속 괴한을 감시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고 연구소로 돌아갈 것인가.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그녀가 선택 할 수 있는 답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어떻게 되었건 괴한의 배후를 밝혀 공을 세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대로 포기하고 연구소로 돌아간다면 경비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목이 날아갈 게 뻔했으니까. 자신이 그동안 보아 온 연구소장의 성격이라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죽어라 괴한의 뒤를 쫓을 수밖에.
그렇게 괴한의 뒤를 미행하던 도중에 미처 몰랐던 사실을 한 가지씩 알아내기 시작했다. 우선 강물에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나온 괴한의 나이가 그녀 의 예상보다 어려도 너무 어렸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게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작은 마을 근처에서 다리에 앉아 쉬고 있던 여자에게 한두 마디 건넨 뒤 곧바로 주먹을 휘둘러 기절시킨 다음, 옷을 빼앗아 입을 때는 괴한의 흉폭함보다는 왠지 모를 변태스러움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한 가지 의아했던 것은 더 이상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고 그냥 가 버렸다는 점이다. 나중에 여자의 얼굴을 확인해 보니 꽤나 미인이었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마를린을 혼란스럽게 했던 건 그 후 며칠 뒤의 일이었다. 또 다른 마을을 발견한 뒤 사내가 밤에 은밀히 성벽을 기어올랐다. 그런데 성벽을 넘는 모습이 너무나 허접했다. 그녀가 그를 미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단숨에 절벽을 날아오르는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했었지 않은가. 능력이 없다면 몰라도, 있으면서도 저렇게 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마을로 잠입한 사내가 한 행동이라고는 마치 촌놈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마를린은 그 모습을 보고 터져 나오는 감 탄사에 입을 다물기 힘들었다. 만약 자신이 지금까지 사내의 뒤를 쫓아오지 않았다면, 분명 여느 시골 마을의 평범한 청년으로 착각했을 게 분명했으 니 말이다.
그러기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국가 단위의 거대 조직에서 키워지고 교육을 받은 사내라고. 그렇지 않다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막지 한 실력과 자연스럽게 마을에 녹아드는 그 연기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감탄사를 터트리면서도 마를린은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았다. 사내는 누군가 자신을 미행한다 해도 저런 어리숙한 모습으로 방심을 유도한 뒤, 연 구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누군가와 분명 접촉을 할 거라고 찰떡같이 믿고 있었으니까.
마을 안을 이리저리 빈둥거리며 돌아다니기를 거의 하루.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 무렵, 갑자기 상황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기 시작 했다. 사내가 웬 여자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마을 안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두 사람은 골 목길 안쪽 구석진 곳에 위치한 철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또 다른 사내와 나온 괴한은 이번에는 뒷골목에 자리 잡은 낡은 여관으로 들어갔 다.
두목의 지시가 있었기에 루크는 라이를 시장통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여관 근처까지 자신이 직접 안내했다.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저 여관에서 일단 대기하고 있어라. 참, 한동안은 내가 널 관리하게 될 거다. 내 이름은 당코라 한다.”
말을 하며 루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돈벼락』이라는 간판이 무색할 정도의 엄청 낡은 여관 하나가 보였다. 3층 정도 되는 높이. 처음에 만 들어졌을 때는 꽤 그럴듯한 곳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당장이라도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낡은 건물이었다.
라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여관을 바라보고 있자 루크는 난감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만약 진짜 신입 조직원이 이런 표정이 었다면 벌써 쌍욕이 튀어나왔겠지만, 장정 서너 명을 홀로 묵사발을 내놓은 실력의 소유자가 아닌가. 당연히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 다.
“겉모양은 저렇게 낡아 보여도 보기보다 꽤 지낼 만한 곳이야. 무엇보다 안주인의 요리 실력이 좋아서 여기 음식 맛이 끝내주거든. 좀 더 사람의 왕
래가 많은 곳에 세웠다면 저런 꼴은 되지 않았을 거야.”
루크는 라이가 혹 불만을 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그 말을 끝으로 볼일이 있다며 서둘러 돌아가 버렸다.
‘건물이 남긴 했지만, 음식이 먹을 만하다니 그건 좋군.’
어차피 머리만 눕히면 어디서든 잠을 잘 수 있도록 단련이 되어 있는 라이였다. 오크 굴에서 몇 년이나 살았던가. 그곳에서 나온 후로도 안락한 잠자 리와는 인연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음식만큼은 양보하기 싫었다. 얼마 전까지 쉬어빠진 육포로 배를 채워야 했고, 오크 떼와의 전투 이후 그조차도 없어 쫄쫄 굶다 물로 겨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음식만큼은 제발 맛있는 걸로 배부르게 먹고 싶다는 식탐이 무의식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여관 외관을 이리저리 훑어 보던 라이는 곧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가 어두워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낡고 지저분하지는 않았 다.
이때 들려 온 맑고 깨끗한 음성.
“어서 오세요, 손님. 여기는 처음이시죠? 저기에 앉으세요.”
곧이어 예쁜 소녀가 후다닥 튀어나왔다. 낡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데도 드러나는 미모, 나중에 크면 상당한 미인이 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층은 식당이었다. 4각형 식탁이 6개 놓여 있고, 그중 셋을 손님들이 차지하고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중이다. 아직까지는 식사할 생각이 들지 않았 기에 라이는 소녀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밥 먹으러 온 게 아니라 투숙하러 온 거야. 빈방 있냐?”
소녀는 라이의 행색을 슬쩍 훑어본 뒤 얼른 대답했다.
“예, 있어요. 다인실은 5타라짜리 동전 한 닢이에요. 혹시 다른 집보다 조금 비싸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아침 식사까지 제공하거 든요.”
라이는 전혀 비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격만큼은 꽤나 저렴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낯선 사람들과 한방에 투숙해야 한다는 건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
“1인실은 없냐?”
“1인실은 10타라에요.”
라이는 품속에서 두목에게서 받았던 작은 가죽주머니를 꺼내 1실버짜리 은화 한 닢을 꺼내 소녀에게 건넸다.
“일단은 10일 동안 묵고 싶다.”
소녀는 은화를 받아 들고 안쪽으로 후다닥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안에서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뚱뚱한 아줌마 한 명이 걸어 나왔다.
“1인실에서 묵겠다는 장기투숙 손님은 정말 오랜만에 보네.”
아줌마는 방실방실 웃으며 라이에게 키를 건넸다. 은화가 손에 들어온 게 꽤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열쇠는 여기 있수. 3층에 올라가서 끝방, 5호실이라우.”
아줌마에게서 열쇠를 받아들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음이 요란하게 울린다. 몸에 걸친 것도 거의 없는 상태인 데도 이 정도인데, 중무장을 갖춘 상태라면 계단이 내려앉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귀에 무척 거슬렸지만, 라이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 다. 누군가 몰래 자신을 습격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고 해도, 걸을 때마다 울려 퍼지는 삐걱거리는 소음 때문에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여기로군.’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상대로 냄새가 풀풀 나는 정말 작은 방이었다. 가구라고는 벽 한쪽에 놓여 있는 침대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나마 작은 창문이 있어 답답하지 않은 건 마음에 들었다.
라이는 먼저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부터 시키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창문 아래쪽으로 옆집 지붕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유사시 에 창문을 통해 옆집 지붕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라이는 한층 마음이 놓였다.
방 안 벽에는 나무못 몇 개가 박혀 있어 옷을 걸어 놓을 수도 있었지만 라이는 본 척도 하지 않고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신발도 벗지 않고.
‘윽! 이게 뭐야……….??
황급히 천을 들어 침대 바닥을 보자 거무죽죽한 색깔의 깔판이 보인다. 슬쩍 코를 대보니 불쾌한 냄새의 근원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설마…, 짚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갈지 않은 건 아니겠지?”
잠시 투덜거리던 라이는 다시 침대 위로 편안한 모습으로 벌렁 드러누웠다. 냄새나는 침대면 어떤가. 이렇게 제대로 된 잠자리에 누워 보는 것도 정 말 오랜만인데 말이다. 루산나라고 했던 그 여자에게서 꽤나 많은 돈을 뺏은 덕에 주머니 사정이 넉넉했을 때도 하수구가 흐르는 으슥한 다리 밑에서 밤을 지새웠으면 지새웠지, 여관에 들어가서 잘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갑자기 불심검문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그대로 잡혀가 교수형에 처해질 거라는 두려움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가만히 누워 있자니 긴장이 풀리며 오늘 겪었던 상황들이 하나씩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떠오른 건 골목길에서의 싸움이었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 게다가 4명이나 됐음에도 그렇게 쉽게 제압할 수 있을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그가 대련일망정 검을 맞대 봤던 인물들 중에서 만만했던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내가 그렇게 약한 건 아닌가 보네. 아니,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건지도?”
그 뒤로 루산나라는 여인의 기습을 왠지 모를 나쁜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며 반응했던 일. 상념은 계속 이어져서 철문에서의 함정을 예감만을 믿고 과감히 대처하며 돌파했던 것까지. 한편으로는 이전까지의 나약했던 모습이 아닌, 꽤나 강한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 만 그 과정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좌충우돌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라이는 그동안 자신의 어리숙함이 어떤 결과로 되돌아왔는지를 기억해 내며 이를 갈았다. 단 한 번의 실수가 노예로 이어졌고, 그 뒤로 겪어야 했던 일들은 기억하기 싫을 만큼 참혹하지 않았던가. 웃으며 접근해 와 태연하게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연놈들로 인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 다.
어쩌면 자신의 문제는 무력보다 아직 어린아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클지도 모른다. 만약 루산나가 본부로 안내를 해 주겠 다고 했을 때 자신이 좀 더 교활했더라면, 좀 더 정보를 모으고 대비 태세를 갖추고 찾아갔더라면 지금 이런 상황으로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지난 일이기에 후회로 밤을 새우긴 싫었지만, 똑같은 실수를 계속 저질러서는 안 되리라. 라이는 마음을 다잡고자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마 치 스스로 자신에게 세뇌를 시킬 것처럼.
“모든 것을 의심하자. 만약 적의를 보인다면 주저하지 말고 먼저 검을 휘두르자. 이용당하기보다 먼저 뒤통수를 치자. 만약 이렇게까지 마음을 먹었 는데도 또다시 뒤통수를 맞는다면 난 죽어도 마땅한 병신 새끼다.”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중얼거리던 라이는 언제 잠에 떨어졌는지도 모르게 스르륵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동안 팽팽히 당겨진 끈처럼 긴장감에 휩싸 여 살아왔던 라이였기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에 달했던 것이다. 그런데 분명 정신을 잃을 정도로 잠에 빠져든 것처럼 보이는 라이였지만 손은 검의 손잡이를 꼭 붙잡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잠이 깬 라이는 놀라서 화들짝 몸부터 일으켰다. 경계심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좁디좁은 방 안이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그에게 안정감을 찾아 줬 다.
“여기가 어디? 아 참, 여관에 투숙했었지. 낡아빠지고 냄새가 심한 여관…….”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아직 밖은 환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다소 여유가 있는 듯했다.
‘이런, 깜빡 잠이 들었었던 모양이네.’
사람을 대상으로 실전을 치른 것이 처음이었던 탓일까? 아니면 사내들과 싸우던 장면을 떠올리며 잠이 들었던 탓일까. 라이는 오랜만에 예전에 꿨 었던 이방여인의 꿈을 꿨다. 한낱 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과 행동은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선명하게 그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꿈속에서 보았었던 놀랍기 짝이 없던 그녀의 검술. 처음 그녀의 꿈을 꿨을 때는 허무맹랑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왠지 자신도 약간은 흉내라 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꿈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던 라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쯧, 이런 개꿈을 꾸고 그걸 따라 했다고 해서 고수가 될 수 있다면 세상천지 마스터가 아닌 놈이 없겠네. 헛된 생각에 휘둘리지 말고 현실에 충실하 자, 라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라이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푹 잔 덕분인지 허기가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삐걱거리는 요란한 소음을 내 는 계단 탓인지 채 1층 바닥을 밟기도 전에 점원 아이가 눈치채고 말을 걸어 왔다.
“외출하실 거예요, 아니면 식사하실 거예요?”
“지금 식사 준비해 줄 수 있니?”
“예. 저쪽에 앉으세요.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건물 자체가 작다 보니 1층 식당 또한 작고 옹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걸 본 라 이의 마음에 기대 심리가 살짝 피어올랐다. 건물은 허름하지만 음식 맛은 괜찮을 거라는 사내의 말이 떠오른 탓이다. 게다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 듯 이렇게 손님들이 많은 걸 보면, 제법 음식 맛이 괜찮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라이는 일단 음식을 혼자 먹기 힘들 만큼 넉넉히 주문했다. 지금까지 겪은 경험으로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배를 채워 두는 게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었으니까. 더군다나 두목이 준 돈주머니에는 이 정도 음식 따위는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있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라이의 두 눈은 어느샌가 점원 아이의 뒤를 쫓고 있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 소녀가 지루한 시간을 잊게 해 줄 정도로 제법 예쁘다는 것도 크게 한몫했다. 아니, 예쁘다는 것만으로 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아니었다. 상당수 의 손님들이 단골들인 모양인지, 그들과 친밀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싱그럽게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았다.
아무리 열두어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뒷골목에서 성장하다 보면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 따위야 빠르게 사라지고 변해 갈 수 밖에 없다. 그런 걸 감안하면 꽤나 밝게 성장한 모양이다. 라이는 그게 부러웠다.
‘젠장, 내가 저 나이 때는 아버지한테 잡혀서 검술을 익힌다고 죽을 고생을 다 했었는데 말이야.’
더군다나 자신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조차 받아 보지도 못했으니………….
이때, 라이가 자리 잡은 테이블 옆자리에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앉았다. 행색으로 보아 사냥꾼 같아 보였다. 별로 강력 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휴대하기에 간편해 보이는 석궁으로 무장하고 있는 걸 보면, 잡기 손쉬운 사냥감들을 사냥하러 다니는 모양이다.
“어서 오세요, 아저씨들.”
“핫핫핫, 세라. 오늘도 역시 예쁘네.”
“헤헤, 감사합니다. 뭘 드실래요?”
식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무척 바빠 보임에도 사내들은 주문은 하지 않고 빙글거리며 잡담이나 건네고 있었다.
“오늘은 왠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는데,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사내의 말이 맞는지 세라는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활짝 웃으며 대꾸를 해 주었다.
“에이, 그런 거 없어요.”
“쯧, 우리들이 세라를 어디 하루 이틀 봤어? 척 봐도 기분 좋아 보이는 티가 확 나는구만. 어서 말해봐. 무슨 일인데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싱글 벙글하는지 말이야.”
“헤헤, 뭐 특별한 건 아니고 오늘 엄마를 만나는 날이거든요.”
“아하, 부잣집에 들어가 가정부를 하고 계시다는? 이거이거 세라가 기분 좋아할 만하네. 오랜만에 엄마를 만나게 됐으니 말이야.”
남자들이라면 돈을 벌기 위해서 최악의 경우 용병이라도 하겠지만, 여자들은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 세상이다. 육체적 능력이 떨어지는 만큼,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에는 모험가로서 사내 못지않게 이름을 떨치는 여자도 간혹 있긴 했지만, 그건 극히 희귀한 경우라고 봐야 했다.
만약 전쟁터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사고로 인해 집에 돈을 벌어올 남자가 없으면 여자들만으로는 일을 해서 먹고 살기 무척 힘들다. 당연히 그런 집 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돈을 벌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 눈앞의 세라처럼 식당에서 일하거나, 아니면 도둑질이나 소매치기를 하거나.
“지금 주문하지 않으실 거면 나중에 다시 올게요.”
그러기는 싫었는지 사내들은 저마다 먹고 싶은 것들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라이는 천천히 식당을 나섰다. 최소한 6개월 정도…, 어쩌면 그 이상 이 마을에 머물게 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가 해야 하는 일은 폭력조직에 관련된 만큼, 아주 위험한 일일 가능성이 컸다. 이런 경우, 마을 내의 샛길들을 잘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뒷골목의 지형을 얼마나 잘 알 고 있느냐에 따라 생과 사가 갈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을의 규모가 조금만 커져도 어디가 어딘지 헷갈리기 시작한다는 게 문제였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성장한 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계속 왔다갔다 하다 보면 어느샌가는 머릿속에 굵게 새겨지지 않을까 하는 게 라이 의 바램이었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마주친 대장간. 각종 농기구나 사냥도구가 파는 물품의 대부분이었다. 라이가 예전에 잠시 사용했었던 도렌 영지에서 제작된 초 대형 활 같은 게 여기에서도 판매되고 있었다. 활만이 아니었다. 저런 무기를 들고 산속을 뛰어다닌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은 그런 것들도 꽤 많았 다.
‘이 근처에 초대형 몬스터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군. 그렇지 않다면 저런 무식한 무기들을 이렇게 팔고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라이는 시선을 잡아끄는 초대형 무기들로부터 눈을 돌려 자신이 구입하려고 한 무기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가 찾고 있는 건 단검이었다. 뒷골목 깡패 싸움에는 롱 소드 같이 기다란 무기보다는 휘두르기 편한 짤막한 단검이 훨씬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 저기 있다.”
대장간에는 기대한 것 이상으로 다양한 종류의 단검들이 보기 좋게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었다. 사냥물로부터 부산물을 잘라 내는 데 효과적일뿐더 러, 여차하면 보조무기로도 써먹을 수 있는 그런 단검들이었다.
“이거 괜찮네.”
라이가 고른 건 50cm 정도 길이의 한쪽 면에만 예리하게 날이 서 있는 단도였다. 이 정도 크기면 몸속에 숨기기도 용이할뿐더러, 여차할 때 무기를 든 상대와 접전을 벌여도 그리 크게 밀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단도를 집어든 라이는 칼날부터 확인했다. 역시, 산골 마을 대장장이가 만든 딱 그 정도 수준의 물건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좋은 걸 사려면 그만큼의 돈을 더 지불해야만 할 테니까.
라이는 며칠 지나지 않아 두목으로부터 뭔가 지시가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꽤 오랜 시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갑자기 사람이 찾아왔다.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해 줬던 ‘당코’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였다.
“잘 지냈나?”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으며 당코는 창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창문을 조금만 열고 밖을 살피며 입을 여는 당코. 꽤나 조심성이 많은 사내였다.
“자네가 해 줄 일이 하나 생겼다.”
상대가 먼저 반말로 나왔기에 라이도 태연하게 반말로 대꾸했다. 얕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분명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당코였지만 이 런 사소한 것조차도 기싸움으로 인식한 라이였다. 게다가 싸운다면 충분히 이길 만한 상대였기에 이런 태도에 부담이 없었다.
“오랜만이네. 그래, 무슨 일이야?”
아직 어린놈의 새끼가 반말로 대꾸하자 당코, 아니 루크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런데 며칠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라이의 표정과 말투가 많 이 변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어설프게 말을 했던 놈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이런 바닥에서 몇 년은 구른 듯한 느낌 마저 들 정도다. 만약 며칠 전의 어리숙한 모습을 보지 않았었다면 믿기 힘들 만큼의 변화였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눈치가 빨라야 한다. 루크는 눈치도 빨랐지만 그에 따른 처세술도 뛰어났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깜짝 놀랄 만큼 변해 버린 라이를 보며 뒷골목에서 닳고 닳은 루크는 빠르게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건방지든, 변화가 있든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뒈질 놈인데.
“이곳 시장통에 꽤나 골치 아픈 녀석이 하나 있거든. 그 녀석을 해치우라는 두목의 명령이야. 네 실력을 감안한다면 아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 야.”
순간 자신의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걸 느낀 라이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상대에게 그게 꽤나 어설픈 미소로 보인다는 것도 모른 채. “해치우라면, 놈을 죽이라는 말인가?”
“당연하지. 설마 우리가 소꿉장난이나 하자고 조직을 운영하고 있겠어?”
6개월 동안 조직과의 세력 다툼에 끼어 패싸움 정도는 생각했지만 갑자기 살인이라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던 라이가 잠시 후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몇 명이나 이 일에 투입되는 거지? 설마 나 혼자 그 일을 하라는 건 아니겠지?”
“맞아, 너 혼자 해야 해.”
그 말에 당혹스런 표정으로 라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루크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요즘 우리가 장악하고 있는 동부시장 구역 안으로 샐러맨더 파 녀석들이 슬금슬금 기어들어오고 있어. 아, 혹시 샐러맨더 파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있나?”
라이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젓자 루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폭력조직치고는 뒷배가 꽤나 튼튼한 놈들이야. 구역 싸움이 일어나 그 자리에 있던 조직원들이 몽땅 다 경비대에 체포되더라도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풀려났고, 이쪽은 돈을 처발라 봐도 반쯤 병신이 되어야 풀어주니 이거 원 더러워서………….”
루크는 창밖으로 침을 탁 뱉은 후 말을 이었다.
“그 덕분에 알토란같은 우리 구역 몇 군데를 녀석들에게 뺏겼고, 그 빌어먹을 새끼들은 급격히 세력을 불리며 거들먹거리고 있는 중이지.”
루크가 하고 있는 말은 형편에 끼워 맞춘 거짓말들이었지만 그걸 라이가 알 리가 없다. 워낙에 능청스럽게 말하는 통에 라이로서는 상대의 말을 곧 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형씨 말은 결국 이곳에 연고가 없는 나보고 해결사 노릇을 해 달라는 소린가?”
“그래, 바로 그거야. 잭, 네가 우리 조직원이 된 걸 아직 아무도 모르니 일을 벌인다 해도 걸릴 일이 없지.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너 혼자 이 일을 맡아야 하는 거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살인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라이였기에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루크는 라이가 고민을 할수록 절대 좋은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에 얼른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핫핫, 아주 악질적인 쓰레기 같은 새끼라 놈을 죽이면 꽤나 많은 시장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놈을 해치우고 싶지만, 그랬 다간 우리 조직으로 경비대 놈들이 개떼처럼 몰려올 테니 그러지도 못하고.”
루크는 대놓고 해치워야 할 상대가 쓰레기 같은 놈이니 부담 가질 필요 없다는 것과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설득했다. 그래 도 라이가 쉽게 승낙을 하지 않자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당연히 잭, 너는 홀가분한 상태니까 걱정할 것 없어. 지금 자네가 여기에 묵고 있다는 건, 조직 내에서도 나하고 두목님 정도밖에 아는 사람이 없 어. 그런데 샐러맨더 그 개자식들이 네 행방을 어떻게 찾아내겠느냐고. 안 그래?”
“……”
말은 안 했지만, 라이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루크는 더욱 은근한 어조로 꼬드겼다.
“그 빌어먹을 새끼들 때문에 요즘 우리 조직이 좀 쪼그라들긴 했지만, 자네 한 명 지켜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것 없어. 여차하면 요새 밖 으로 내빼 산골 마을로 숨어 들어가면 끝이니까 말이야. 아, 참! 두목께서 그러더군. 만약 이 일만 훌륭히 해낸다면 계약 기간을 삼 개월로 확 줄여 주 시겠다고 말이야.”
루크의 마지막 말은 라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삼 개월! 삼 개월만 참으면 이 마을을 떠날 수 있다. 물론, 이곳 마을을 벗어난다고 해서 곧바로 고향 에 도착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계약 기간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건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 다.
“크크, 잘 생각했어. 우리 조직은 다른 건 몰라도 의리만큼은 확실히 지키니 너무 걱정하지 마. 참,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 경비대에 붙잡히게 되더 라도 절대 우리 조직에 대한 말은 단 한마디도 해서는 안 돼. 우리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꼭 구출해 줄 테니 말이야.”
루크는 라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이 좋은지 비릿한 웃음을 연이어 흘렸다.
“알겠으니, 내가 해치워야 할 놈이 누군지 말이나 해.”
“블러드 엑스(Blood Ax)라는 놈이야.”
커다란 덩치에 빡빡 민 대머리를 하고 있는 야만적인 인상의 사내라고 했다. 더군다나 이마 한가운데에 붉은 도마뱀 문신까지 새겨놓은 탓에 그의 인상은 더욱 흉악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녀석을 알아보기는 아주 쉬울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놈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그 별명에 어 울리게 커다란 전투도끼를 사용하지만, 평소에는 작은 손도끼 두 개를 양쪽 허리춤에 차고 다닌다고 했다.
“아, 그러고 이거 받아.”
이런저런 설명을 마친 루크는 품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라이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독약이야. 그놈은 워낙에 덩치가 크고 튼튼해서 웬만한 상처로는 잘 죽지도 않는 괴물이야. 이런 게 없다면 어떻게 놈을 죽일 수가 있겠어? 검 끝에 조금만 발라 둬도 충분해.”
루크는 라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자, 이것만 봐도 우리가 자네를 죽이러 보내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겠지? 자네는 그걸로 놈에게 작은 상처만 안겨 주면 되는 거야. 그러면 곧바로 게거품을 흘리며 뻗어 버리겠지.”
라이는 찝찝한 기색 없이 흔쾌히 독약이 담긴 병을 받아들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지만 아직까지도 썩 내키지 않은 상태다. 그 런데 직접 목숨을 끊는 게 아닌, 적당히 상처만 내면 알아서 죽는다고 하니 그편이 훨씬 마음이 가벼웠기 때문이다.
“식사 후에 이곳 유흥가로 온다는 정보니까, 아마도 해 질 무렵쯤이 될 거야. 물론 그보다 조금 빨라질 수도, 늦어질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주위가 어둑해질 때니 습격을 한 뒤 튀기에는 꽤나 괜찮은 상황이야. 절호의 기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