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5권 12화 – 꿈속의 검술이 사라지기 전에
꿈속의 검술이 사라지기 전에
“나를 찾았다고?”
무표정한 잭의 물음에 코비 지부장은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예, 어르신. 이곳에서의 임무도 다 끝나셨는데, 굳이 그런 허름한 여관에 묵고 계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미 좋은 데로 숙소를 잡아뒀습니다. 지금 당장 그쪽으로 옮기도록 하시죠.”
코비 지부장의 제안에 라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이제 요새로 돌아가야지.”
“그러지 마시고 다만 며칠이라도 푹 쉰 뒤 돌아가시죠. 제가 기가 막힌 계집들이 있는 곳을 잘 알고 있는데…………. 마음에 꼭 드실 겁니다.”
라이는 손을 내저으며 짜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나는 그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물론 라이 역시 코비 지부장의 달콤한 권유에 마음이 동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직까지 그런 곳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저들은 지금 자신을 대단한 실력의 노회한 암살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술집에 가서 미모의 여자들을 옆에 앉힌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아직 여자의 손조차 잡아보지 못한 자신으로서는 어리버리할 건 뻔했고, 설마 하는 의구심을 저들이 갖게 될 게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코비 지부장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는 아주 곤란했다. 하지만 이런 라이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코비 지부장은 자신의 제의를 단칼에 거부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달콤한 제의를 곧바로 거부해 온 건 잭이 처음이었으니까.
“아, 그, 그러십니까? 그, 그럼 어떤 걸 좋아하시는지? 혹시 돈이 필요하신 건……?”
“너무 신경 쓸 거 없다. 내가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이런 젊은 모습으로 위장해 상대를 방심하게 한 것도 있겠지만, 그런 쓸데없는 데 관심을 갖지 않은 면도 아주 크니까.”
라이는 짐짓 자신이 아주 나이가 많은 것처럼 말했다. 속으로 좀 켕기는 건 사실이었지만, 자신을 이리로 데리고 온 조장들을 비롯해서 모두가 자신의 나이가 많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의 착각이 맞다고 생각하도록 놔두는 게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꺼낸 말이었다.
“아, 예. 어르신의 깊으신 뜻도 몰라 뵙고……………
“그런 건 됐고, 나하고 같이 왔던 녀석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설마, 지금 당장 델카로 돌아가시려는 건……?”
“이곳에 죽치고 앉아 있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코비 지부장은 재빨리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소년에게 물었다.
“델카에서 온 손님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하지만 소년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라이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다. 임무도 끝났으니 어딘가에서 신나게 퍼마시고 있겠지. 나는 릴리와 먼저 돌아갈 테니, 그 녀석들은 천천히 돌아와도 된다고
전해라.”
“그, 그럴 수는
“괜찮다. 여기 올 때야 지부의 위치를 모르니 안내를 받아야 했지만, 델카로 돌아가는 것까지 그 녀석들의 안내를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라이는 돌아서면서 릴리를 보고 말했다.
“릴리, 이제 출발하자.”
“그, 그렇게 갑자기 가신다고 하시면 제가 너무……..?
코비 지부장은 급한 김에 품속에 손을 넣어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있던 예비 돈주머니를 꺼냈다.
“이거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만, 돌아가시는 길에 여비에 보태 주십쇼.”
사실, 반나절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였기에 여비라고 해 봐야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코비 지부장이 건네준 돈주머니는 꽤나 묵직한 것이었다. 그의 직업 특성상 불시에 긴급 상황이 터졌을 때를 대비해서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흠, 자네 성의를 봐서 받아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어르신.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제가 근사한 곳으로 모셨을 텐데…, 이렇게 급하게 돌아가실 줄은…………….”
“괜찮아. 임무를 마쳤으니 빨리 두목에게 돌아가서 보고도 해야 하고…………… 그런데, 이리로 올 때 타고 왔던 마차는 지금 어디에 있지?”
마차의 행방에 대해서 물어올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일순 코비 지부장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어르신께 피, 필요한 마차였습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어디 있는지만 말하면 돼.”
코비 지부장은 난처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보고했다.
“그냥 팔아 버리면 된다고 해서..”
“누가?”
“해리슨…, 어르신을 여기로 모시고 온 조장 중 한 명인 해리슨 녀석이 그랬습니다요. 저는 혹시 나중에 필요하실지도 모른다고 말렸습니다만, 그 녀석이 하도 우기는 바람에…………..?
사실은 지부에 마차를 놔둘 곳도 없었기도 했지만, 잭이 릴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데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임무가 끝날 때까지 그녀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붙잡고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기에 임무를 끝내고 잭이 돌아가면, 그녀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든지 아니면 사창가에 팔아넘길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미 처분해 버렸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너도 협조해 주느라 수고가 많았다. 내 두목에게 너에 대해 잘 말해주도록 하지.”
뜻밖의 라이의 말에 코비 지부장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릴리와 함께 요새도시 델카를 향해 걸어가고 있긴 했지만, 라이는 델카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란툼으로 오기 전의 자신과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실력이 급성장해 버렸다는 것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신분증 따위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 없어도 발길 가는 데로 어디든 갈 수 있었으니까. 예전에 그토록 무섭게만 보였었던 병사들이 자신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한다는 걸 이미 체험하지 않았던가.
라이는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려 뒤따르고 있는 릴리를 힐끗 바라봤다. 물론, 릴리를 데리고 떠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내던지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두목한테 부탁하면 되겠지.’
자신이 다란툼을 향해 떠나지만 않았다면 릴리의 아버지가 죽지도 않았을 거다. 물론 그 책임을 자신이 질 이유는 없었지만, 순진하고 착한 릴리에게 그 정도 은혜는 베풀어 주고 싶었다. 다란툼으로 왔기에 자신이 이렇게까지 급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또 한 가지 델카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수련을 할 장소가 필요했다. 다란툼에서처럼 남의 집 지붕 위를 뛰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수련하는 동안 필요한 각종 물품들을 보급받을 수 있으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라이는 자신도 올란도처럼 강해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싹트고 있었다. 그때, 난공불락의 성벽 위로 단신으로 도약해 들어가 적을 학살해 버리는 올란도의 신위를 보며 얼마나 경악했었던가. 영웅담에 나오는 용사를 보는 것만 같았었다. 도저히 올려다볼 수도 없는 천외천의 영웅.
하지만 막상 해보니 성벽을 도약해서 올라가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중무장한 샐러맨더 파 조직원 수십 명을 가볍게 짓이겨 놓기까지 했다.
자신에게는 훌륭한 스승도 없고, 검술을 수련할 때 조언해 줄 사람도 하나 없다. 하지만 이번에 다란툼에서 샐러맨더 파와 싸우며 꿈속의 검술을 수련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틀린 길을 가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꿈속의 검술이 뇌리에서 사라지기 전에 완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기억이라는 건 언제 잊어버리게 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오크 굴에서 그토록 개고생을 했던 때로부터 몇 년 흐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때의 기억이 희미해져 가고 있지 않은가.
“여기였던가?”
요새도시 델카의 블루썬더 아지트는 뒷골목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길눈이 밝은 자가 아니라면 한두 번 와 봐서는 찾아가기 힘들었다. 뒷골목에 형성된 미로와도 같이 좁은 길을 자신의 앞마당처럼 알고 성장한 아이들과 달리, 라이는 작은 마을에서 성장했기에 길눈이 매우 어두웠다.
“여기가 아니었나? 젠장…….”
뒷골목에서 헤매기를 거의 한 시간…………. 이 정도로 뒷골목을 헤집고 돌아다녔으면 블루썬더 파의 조직원 중 누군가라도 라이를 알아봤을 게 아닌가. 당코, 아니 루크와 함께 다닐 때 그가 허름한 옷차림의 소년들과 뒷골목에서 숙덕거리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떠그랄 엄청 큰 조직인 것처럼 떠들어 대더니, 그거 순 거짓말 아냐? 본거지 주변인데도 조직원으로 보이는 놈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다니, 이게 말이 돼?”
그때였다. 정말 운 좋게도 눈에 익은 건물이 발견된 것은 주변의 건물들에 비해 훨씬 튼튼해 보이는 외관.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만큼 작은 철문.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봤었던 블루썬더 파의 아지트가 틀림없었다. 당시 저 작은 철문을 들어갈 때 어쭙잖은 수작을 부렸던 게 기억에 떠올랐다.
하지만 라이는 몰랐다. 이쪽은 뒷문이었고, 저 앞문 쪽으로 가면 철문이 박살 난 채 나뒹굴고 있으며 중무장한 샐러맨더 파
행동대원들이 그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운이 나쁘게도 좁은 골목길 쪽으로 걸어 들어왔기에 그 모습을 못 본 것이다.
왜냐하면 정문은 마차로 짐을 운반하기 용이하도록 큰길 쪽에 위치해 있었다. 만약 라이가 마차를 타고 정문 쪽으로 오게 되었다면(물론 길을 잘 찾아왔다는 가정하에서) 그 모습을 당연히 봤으리라.
어쨌거나 라이는 일이 잘 풀린다며 희희낙락해서는 작은 철문 앞에 서서 기분 좋게 문을 두드렸다.
콩콩콩!
곧이어 철문 상단 쪽에 있는 작은 구멍이 철컥 열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닫힌다. 그리고 활짝 열리는 철문. 라이는 상대가 자신을 알아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큼성큼 철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환한 햇볕이 내리쬐는 밖에서 실내로 들어선 순간 눈앞이 캄캄하게 바뀐다. 그런데 놀랍게도 몇 발자국 채 들어가지 않아, 또다시 예전에 느꼈던 그 서늘한 감각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씨발! 이 새끼들은 사람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공격하고 지랄이야.”
눈앞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지만 라이는 재빨리 손을 움직여 방어를 시작했다. 그의 손에는 언제 뽑아들었는지 허리에 차고 있던 롱 소드가 들려 화려한 궤적을 수놓고 있었다.
챙! 챙!
아마 다란툼의 샐러맨더 요새에서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몽땅 다 토막이 난 채 사방으로 흩뿌려졌으리라.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요령을 터득한 라이다. 이런 하수들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 그저 적당히 힘 조절을 하며 그들의 공격을 흘릴 뿐이다. 곧이어 어둠에 적응한 시야에 주변의 광경이 들어왔다. 라이를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은 넷. 모두들 토막 난 무기를 든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라이가 아무리 살펴봐도 눈에 익은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부두목은 지금 어디 있냐? 부두목한테 안내해라.”
그때 제정신을 차린 녀석 중 하나가 갑자기 품에서 호각을 꺼내 불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익!!
라이는 그걸 뻔히 보면서도 이들이 블루썬더 패거리일 것임을 의심치 않고 있었기에 별다른 제재는 가하지 않았다.
“나는 적이 아니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나를 부두목한테 안내하기나 해. 그러면 내가 누군지 알게 될 테니까.”
“부두목? 검을 쓰는 것도 그렇고, 이거 제법 거물인 모양이네.”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사내들을 바라보며 라이는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라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동안, 주위의 상황은 점점 더 이상하게 흘러갔다.
쩔그럭거리는 요란한 쇳소리를 울리며 달려 들어오는 10여 명의 장한들!
그들의 갑주를 보며 라이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루썬더 패거리들은 이곳 요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몬스터 사냥꾼으로 위장하기 위해 둔기공격의 방어에 특화된 대몬스터용의 갑옷을 착용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게 아니었다. 모두들 사슬갑옷 같은 도검 방어에 특화되어 있는 갑옷을 입고 있다.
“다 어디로 튀어 버렸나 했더니, 이 멍청한 놈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네.”
“부두목을 찾아왔답니다.”
“호오~, 잘됐군. 얘들아, 죽이지 말고 꼭 생포하도록 해라. 알겠냐?”
그제서야 라이는 감을 잡았다. 이들이 블루썬더 패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튀었다가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고? 너희들 혹시 블루썬더 패거리 아니냐?”
사내들 중 하나가 피식 웃긴 했지만, 라이의 의문에 이죽거리며 대답을 해줬다.
“블루썬더? 하여튼 좀도둑 새끼들이 이름은 거창하게 지어요. 우리는 그 이름도 찬란한 샐러맨더 파의 조직원들이다. 들어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다면 쓸데없는 저항 그만두고 칼을 버려라. 꿇어앉아 싹싹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줄지도 모르지.”
“샐러맨더라고? 그럼 여기에 있던 녀석들은 다 어디로 갔냐?”
“보아하니 투항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얘들아, 쳐라!”
자신 있게 명령을 내렸지만, 곧이어 사내는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솜털도 제대로 못 벗은 애송이 한 놈과 겁에 질린 여자애 하나. 그에 비해 이쪽은 오랜 세월 함께 하며 그 실력이 어떤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부하들이다. 그리고 전투를 대비하여 모두들 단단하게 무장을 갖추고 있었기에, 설령 이곳 요새도시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을 상대로 한다 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거라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어억!”
“크윽!”
“이, 이럴 수가……………. 네 녀석은 도대체 뭐냐?”
명성이 높은 모험가나 기사처럼 보이기만 했어도 이런 질문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애송이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강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순식간에 부하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것도 믿기 힘들었지만, 자신의 손에서 검이 언제 튕겨져 나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 튕겨져 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지금껏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벴던 검이었는데, 녀석을 베려고 하는 순간 자신의 손아귀를 찢어 버리고 달아나 버린 것이다.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명령을 내리는 걸 보니, 네놈이 여기서 지위가 제일 높은 모양이지?”
하지만 사내는 아직 라이와의 접전에서 받은 충격에서 못 벗어나고 있었다. 손아귀가 찢어져 버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있던 녀석들은 다 어디로 갔지?”
“모른다.”
“몰라?”
라이는 사내를 붙잡아 벽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벽에 부딪치더니 바닥으로 쓰러지는 사내. 라이는 그런 사내에게로 다가가 발을 콱 밟으며 물었다.
우두둑.
“이래도?”
“크윽!”
사내는 목이 긴 장화를 신고 있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데다, 가죽도 소가죽보다 훨씬 두껍고 질긴 몬스터의 것으로 되어 있었기에 상당한 방어 능력이 있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라이가 짓밟아대자 흡사 절구로 짓이기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 몰려왔다.
“모, 모른다.”
라이는 발을 들었다가 힘껏 아래로 내리찍었다. 천근추까지 운용하고 있었기에 사내의 다리뼈는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가루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크아아악!”
“이래도 몰라? 어? 기절해 버렸네. 뭐, 괜찮아. 아직 물어볼 놈들은 많이 남아있으니까.”
라이는 사내 옆에 쓰러진 채 부들부들 떨며 바라보고 있던 녀석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봐, 넌 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겠지?”
쓰러져 있는 샐러맨더 파의 행동대원들 중에서 거의 절반은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상대의 숫자가 열넷이나 되다 보니 첫 번째 충돌 때와는 달리 적당히 봐주면서 공격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이들 모두를 살려둘 필요가 없는 것도 작용을 했고.
옆에서 멍하니 서 있던 릴리는 라이의 행동이 점점 더 잔인하게 변해가자 더 이상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잭이라는 의문의 사내를 지금껏 그녀는 아주 좋게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같이 지내는 동안 그녀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는 아주 점잖은 성품의 사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잔인한 모습에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공포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무심결에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어느덧 그녀의 몸은 철문 근처까지 와 있었다.
그녀는 철문 쪽을 살펴본 후, 다시 한 번 잭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잭은 이쪽으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철문 밖으로 살그머니 나갔다.
만약 이때 잭이 ‘너 어디로 가는 거야?”라고 했다면 그녀는 재빨리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후에도 잭으로부터는 그 어떤 질책도 없었다. 철문 밖으로 나온 그녀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저런 미친놈과 함께 있다가는 언젠가는 저쪽에 쓰러져 있던 사내들과 같은 꼴이 될 게 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잠시 후, 라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이미 그의 앞에 쓰러져 있는 샐러맨더 조직원들 중에서 살아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을 살려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다란툼 여관에서 깡패 녀석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 바보같이 적당히 손을 쓴 덕분에 자신이 어떤 꼴을 당했던가. 이곳에 와서 블루썬더 패거리와 합류하지도 못한 상황인데, 또다시 요새 경비병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면 블루썬더 패거리와의 합류는 더욱 힘들어지게 될 게 뻔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녀석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는 죽여 없앨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아니군. 루크 녀석이 배신했다는 건 좋은 정보였어. 루크가 배신했으니 부두목도 서둘러 이곳을 포기하고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었겠지. 그건 그렇고 어디로 도망친 건지 알아야………..”
그때 뭔가를 떠올렸는지 라이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렇다. 알아낼 방법이 있었다. 자신이 릴리와 함께 먼저 출발했다는 걸 안 조장들이 급히 뒤따라 올 게 틀림없다. 그들과 만나 상의해 보면 될 게 아니겠는가.
“맞아. 그놈들이 있었지.”
라이는 철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릴리! 갈 곳이… 응?”
라이는 그제서야 릴리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설마 납치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이어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납치되었을 리 없다. 만약 샐러맨더 패거리의 지원 병력이 왔었다면 고문한다고 정신이 팔려있던 자신의 뒤를 기습했겠지, 릴리를 납치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어디로 간 거지? 분위기가 흉흉하니,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있는 건가?”
라이는 철문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펴봤지만 릴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시체들만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건물 안에 홀로 있을 생각이 없었던 라이는 일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조장들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그는 릴리부터 찾아 거리를 돌아다녔다. 혹, 필요한 게 있어서 뭔가를 구입하러 나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릴리를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