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5권 13화 – 자네 혹시 사막에 가 봤나?
자네 혹시 사막에 가 봤나?
월터가 사라진 후, 파벨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주변을 감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대로 앉아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다는 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밤을 새우는 거라면 몰라도 아늑한 방안에서, 줄기차게 수면을 유혹하는 침대를 옆에 두고 잠을 참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은 그녀의 정신을 극도로 빨리 소모시키고 있었다.
다음날이면 온다고 했던 월터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따뜻한 오후….. 파벨은 햇볕이 들어오는 따뜻한 창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너무 피곤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파벨은 화들짝 일어서긴 했지만, 작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문 쪽을 바라봤다. 누가 문을 두드리고 있는 거지?
이때,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안에 없어? 젠장, 밖에 나갔나?”
바짝 긴장하고 있던 파벨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들려온 목소리는 자신의 기억에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급히 달려가 상대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기 전에 문을 벌컥 열었다. 뒤돌아 걸어가고 있던 월터가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뒤로 돌리는 게 보였다. 틀림없는 월터였다. 파벨은 반가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돌아오셨군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배신감과 두려움에 홀로 떨고 있던 파벨이었으니, 월터의 등장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격한 반응은 월터로서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뜻밖의 것이었다. 겨우 사흘 보지 않았을 뿐인데, 뭘 저렇게 감격하고 난리지? 어이가 없었던 월터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간 줄 알았는데, 자고 있었나?”
“아뇨. 괜찮아요.”
피곤에 찌든 얼굴을 보고, 월터는 그녀가 최선을 다해 임무 수행을 하고 있었던 거라고 해석했다. 꽤 사명감이 있는 녀석을 소개해 줬군. 물론 여자라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내려가서 같이 식사나 하지. 내가 없는 동안 혼자 감시하느라 피곤했던 모양인데, 좀 먹고 푹 쉬도록 해.”
“가・・・ 감사합니다.”
월터가 도착한 다음 날, 알카사스 지부에서 나온 안내원이 접선하러 왔다. 물론, 월터에게 온 게 아니라 미끼와 접촉했다는 말이다. 그것을 보며 월터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는 안내원이 오기 전에 습격을 받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접선이 이뤄졌다.
‘정보부 말대로 그때는 우연이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월터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 많은 마법사와 기사들. 더군다나 놈들은 다짜고짜 기습공격부터 시작했어. 우연일 수가 없지.’
미끼는 그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알카사스 서부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뒤를 월터는 파벨과 함께 은밀하게 쫓았다. 어떤 때는 어쩔 수 없이 미끼와 함께 이동하게 되기도 했었는데, 그런 때는 전혀 안면이 없는 척하며 서로를 외면했었다.
이동마법진을 통해 알카사스 서쪽 끝단의 성읍도시 링카에 도착하자 주변 경치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알카사스의 동쪽 끝단에서 서쪽 끝단으로 이동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색적인 모양의 나무들과 동물들. 링카 성에서 서쪽으로 나흘 정도만 이동하면 알카사스 국경선에 도달하게 된다. 아마 습격이 있다면 그 안에 이뤄질 거라고 월터는 생각했다.
링카 성은 사막을 건너오는 산물들이 통과하는 교역의 중심지이자, 서쪽 방어선의 중심이기도 했다. 그만큼 성의 규모는 상상을 불허하는 규모였다. 수많은 인파와 마차, 수레들이 길을 꽉 채우며 이동하는 것을 본 파벨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올라 있는 거대한 탑. 저 마법탑이야 말로 마도왕국 알카사스의 상징물이었다. 월터는 잠시 마법탑을 바라본 후, 시선을 중천에 떠 있는 태양 쪽으로 옮겼다. 이곳은 사막에 지어진 성읍이라고 들었는데 전혀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의 힘 덕분일 것이다.
“기후조작 마법의 수준이 정말 놀랍네요.”
“서로 간에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이들은 생성된 에너지를 기후조작에 돌리고 있고, 우리 쪽은 방어에 돌리고 있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사실, 온화한 기후와 풍요로운 대지를 가지고 있는 코린트 제국은 굳이 기후조작에 방대한 에너지를 투입할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한다. 그 외에도 에너지를 쓸 곳이 얼마나 많은데…………….
“저쪽으로 가자.”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미끼의 뒤를 따라가는 중이다. 누군가 엿보고 있는 자가 있을지 모르기에, 서로 모르는 척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안내역으로 합류한 인물은 월터와 파벨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방금 전에 나간 손님들이 구입한 물품들, 우리들에게도 주시오.”
“사막을 건너려고 하십니까?”
“그렇소.”
상인은 월터와 파벨을 힐끗 바라보더니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곳에서 오랜 세월 장사를 해온 만큼, 눈앞의 손님이 사막을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을 한눈에 꿰뚫었기 때문이다.
조작된 온화한 기후만 생각하고 사막에 도전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 더군다나 사막지역에 서식하고 있는 강인한 몬스터들은 저딴 얄팍한 롱 소드 따위로는 대적조차 불가능했다.
“상단과 동행하실 겁니까?”
파벨의 옷차림은 약간 고급스런 것이었지만 자신의 행색이 남루하기 짝이 없다는 걸 월터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주변 사람들은 월터를 파벨을 모시고 이동하는 호위나 용병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파벨이 후드를 벗고 있었다면 한눈에 마법사라는 걸 알아봤을 테니 이런 친절을 베풀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평소 같았으면 정보 수집을 위해 상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을 것이다. 하지만 월터는 지금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미끼와 너무 멀어지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상인의 말문을 막기 위해 일부러 퉁명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이미 계약해 놓은 상단이 있소. 그러니 물건이나 빨리 챙겨 주시오.”
“아…, 예, 그러셨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쇼.”
상인은 황급히 물건을 챙겨 월터에게 건넸다.
링카 성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들은 사막을 건널 수 있는 완벽한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식량과 밤에 덮을 두터운 담요 등 각종 물품들은 물론이고, 낙타라는 해괴하게 생긴 승용 짐승까지 두 마리 구입했다.
“자네 말…, 아니 낙타는 탈 줄은 알겠지?”
물론 탈 줄 안다고 파벨은 대답했었다. 하지만 낙타를 타고 얼마 가지도 않아 월터는 눈치챘다.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월터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내달릴 것도 아니었고, 천천히 걸어가는 녀석 위에 앉아 있기만 해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필요성은 며칠 후에는 사라진다. 복수전이 끝나고 나면, 서부지부장과 함께 돌려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링카 성문을 벗어나자마자 방금 전까지 온화하게만 느껴졌던 태양이 본성을 드러내며 주변 온도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시무시한 열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출 텐데도 이 정도니, 본격적으로 중천에 떠 있을 때는 그 열기가 어느 정도나 될지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다. 이렇기 때문에 모두들 사막에서는 주로 밤에 이동하는 것이리라.
사막이라고 해서 완전히 모래밭인 것만을 상상했었는데, 의외로 군데군데 풀이 많이 자라 있었다. 그 때문에 전체적인 정경은 드넓은 황무지하고 비슷했다. 나무가 거의 없는 것만 뺀다면……….
월터는 묘한 감흥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게 사막인가………….”
열사의 사막을 뚫고 들어가 임무를 수행할 걸 생각하면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단장인 크로데인 공작이 자신에게 했던 제안이 떠올라 헛웃음이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월터, 자네 혹시 사막에 가 봤나?」
가보지 않았다는 자신의 대답에 크로데인 공작은 잘됐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었다.
「그럼 잘됐군. 이번 기회에 사막이란 게 어떤 곳인지 구경이나 좀 하고 오게. 이곳과는 풍광이 전혀 다를 거야. 그러니 가서 두루두루 살펴보고 견문 좀 넓히고 오라고.」
그때 생각이 떠오르자 울컥 속이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그렇게 보고 싶으면 자기가 직접 갈 일이지…………’
월터의 중얼거림에 강한 짜증이 어려 있는 건 느꼈지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파벨이 당황해서 질문을 던져왔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월터님,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아, 혼잣말이었을 뿐이야. 그건 그렇고, 자네는 사막에 와본 적이 있나?”
“아뇨.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럼 이 근처 지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겠군.”
“와본 건 처음이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일대의 경우, 알카사스의 중요한 교역로이기에 많은 정보가 흘러들어오고
있거든요.”
“그거 다행이로군.”
월터는 어둑해지고 있는 앞쪽 먼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앞쪽에 마을 같은 건 있나? 아니면, 링카 성이 끝인가?”
“물론 있습니다. 저렇게 보여도 사막 안에서도 물이 나오는 곳이 간혹 있거든요. 거기를 중심으로 마을이 건설되어 있는 거죠.” “하기야, 그런 게 있으니까 사막 민족 녀석들이 번성하고 있는 거겠지.”
잠시 후, 해가 지기 시작하며 놀라운 장관이 펼쳐졌다. 황금색, 혹은 갈색에 가까운 색상을 띄고 있는 사막에 노을이 지자 붉은색이 더욱 붉게 물들며 보는 이의 마음을 경건하게까지 만들어줬다.
“저 모습 하나만 해도 여기에 온 보람이 있네요. 저런 장관은 정말 처음이에요.”
노을 탓인지 몰라도 얼굴이 새빨간 색으로 물든 파벨이 감동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입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월터도 그녀의 의견에 동감이었다. 저 모습 하나만으로도 여기에 온 보람이 있다고. 하지만 저 사막 안쪽에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지금껏 저곳에 투입된 사람들 중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사막 민족이 강하고, 또 경계가 삼엄하다고 해도 그건 너무나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때, 월터의 기감(氣感)에 강인한 존재감이 잡혔다. 그는 급히 파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녀는 주변 경계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노을이 붉게 물든 서쪽 하늘만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월터는 한숨을 푹 내쉰 후, 강렬한 존재감을 은은히 뿜어내고 있는 상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서로 간의 거리가 꽤 떨어져 있는 덕분인지 아직 상대는 월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상대의 시선도 파벨처럼 노을을 향하고 있었다.
‘쯧, 사내놈이 꽤나 감상적이군. 노을 따위에 정신이 팔려……………?
여기까지 생각하던 월터는 곧 자신의 짐작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사내라고 착각할 정도로 엄청난 근육질의 신체를 지닌 상대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던 것이다. 낙타에 타고 있기에 정확한 신장을 가늠하긴 힘들었지만, 키도 꽤 큰 듯 보인다. 그리고 낙타 안장에는 중병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가 매여 있었다. 무게가 10킬로그램씩이나 나가는 저런 중검을 애용하는 건 사내들 중에서도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하물며 여자들 중에서 저런 걸 쓰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정말 타고난 신력을 갖춰야 가능한 일이었다.
“호오, 제법 저릿저릿한걸. 알카사스에 저만한 기사가 있을 줄이야. 4대 강국에 들어간다는 게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저 여자가 내 상대라는 건가?”
씨익 살기 어린 미소를 짓는 월터. 저 정도 수준의 기사라면 감히 자신에게 도전해 온다 해도 용서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저 여자 혼자만이 동원된 게 아닐 거라는 점이다.
‘저런 여자가 넷 정도만 되어도, 파벨의 안전은 보장하기 힘들겠군.’
하지만 파벨도 흉험하기 짝이 없는 정보부에서 잔뼈가 굵어온 마법사인 만큼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알아서 대처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뭐, 좀 믿음이 가지 않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잘해낼 거야. 어찌 되었든 정보부 요원이잖아.’
월터는 뜻밖에 만난 상대에게 바짝 주의를 기울였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까? 아니, 상대의 반응을 기다릴 거 없이 이쪽에서 선수를 치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을 거 같은데……………
상대를 힐끔거리며 어떻게 할까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노을을 바라보고 있던 상대가 슬쩍 시선을 돌려 월터를 본다. 그러면서 살짝 미소를 짓는 상대. 미인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나름 매력이 있는 얼굴이었다. 온몸의 근육질만큼이나 여자치고는 강인한 인상을 지니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런 여자가 이쪽을 보고 미소를 지으니, 꼭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잡아먹을 것인지 궁리하며 희색이 만연한 듯 보인다.
지금껏 여자의 시선을 받아보고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쳐보기는 난생 처음인 월터였다. 그는 급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딴전을 피웠다.
“파벨, 아무리 낙타에 타고 있다고 하지만 앞을 잘 봐. 자칫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주의하겠습니다, 월터님.”
월터는 낙타를 천천히 몰며 어둠에 가려져 있는 사막 속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의 온 신경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미지의 적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지금 주변을 탐색해 봐. 뭔가 걸리는 게 있나?”
그러자 곧바로 주문을 외운 후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파벨이 대답했다.
“주변에 신경 쓰실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습니다.”
“뒤쪽에도?”
“예. 뒤쪽에는 네 명으로 이뤄진 대상(隊商)이……..”
여기까지 말하던 파벨은 흠칫하더니 재빨리 월터의 안색을 살펴온다. 그제서야 그녀는 깨달은 것이다. 저 뒤쪽에서 수십 마리의 낙타에 짐을 가득 싣고 따라오고 있는 대상의 인원이 모두 여섯 명이라는 것을.
네 명은 뷰 마나 포스의 효과로 인해 온몸이 특이한 색깔로 얼룩져 보이고 있다. 두 명은 일반인이었고, 두 명은 꽤나 무예를 연마한 듯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나머지 둘이었다. 시커먼 윤곽만 보이고 있을 뿐, 그들의 마나 상태가 어떤지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옆에서 낙타를 몰고 있는 월터처럼……………
파벨은 애써 두려움을 감추며 나지막이 월터에게 속삭였다. 정체불명의 무리와는 꽤나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행여 그들이 자신의 음성을 듣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적인가요?”
“아직은 모르겠어. 적인지, 아니면 우연히 지나가는 모험가들인지… .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말이야.”
“예, 월터님.”
라이는 조장들과 합류하기만 하면 곧바로 부두목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부두목을 만난 것은 조장들과 합류한 후 거의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것도 거리를 샅샅이 뒤지고 있던 조장들 중 하나가 우연히 밖으로 나온 동료를 찾아낸 덕분에 합류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부두목, 아니 이제 두목이 된 박스터는 라이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이 질문부터 던져 왔다. 그로서는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최근 샐러맨더 파에서 수색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쪽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정말로 잭이 해낼 거라고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고 있었다. 이건 정말 기적이었다!
이렇게 되면 요새를 탈출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아니,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 막강했던 샐러맨더 파를 자신들이 흡수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생긴 것이다.
“정말 수고가 많았네. 이만 가서 푹 쉬도록 하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두목은 알리에게 명령했다.
“잭을 가장 좋은 숙소로 안내해라.”
“예, 두목.”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떠날 거야. 내가 전에 말했던 거 준비해 놨겠지?”
라이가 말하는 게 위조신분증이라는 건 박스터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라이를 떠나게 놔둘 수가 없었다. 그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잡아둬야 하는 것이다.
“미안하네. 미처 준비하지 못했어. 자네도 잘 알거 아닌가? 그 이후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이미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고 물은 거였다. 하지만 라이는 일부러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보고 박스터는 급히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이 일이 정리가 되는 대로 확실하게 처리해 줄 테니까. 완벽한 신분증을 만들려면 관의 협조를 받아야 하기에 시간이 좀 걸리는 것뿐이야.”
“관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고?”
꽤 그럴듯한 대답이다. 하기야 그렇게만 된다면 완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분증을 발행하는 기관에서 만든 신분증. 즉, 그건 더 이상 위조가 아니라 진짜 신분증이라는 말이 되는 거니까.
“그게 가능할까?”
“가능하지. 샐러맨더 파가 붕괴된 그 자리를 우리가 파고 들어갈 거니까. 영주에게는 자신을 대신해서 더러운 일을 처리해 줄 조직이 필요하거든. 그리고 그건 꼭 샐러맨더 파일 필요는 없지. 안 그런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잭이 미소를 짓자 박스터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물론 미소의 색깔은 조금 달랐다. 라이의 것에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면, 박스터의 것은 음흉함이 듬뿍 묻어 있었으니까.
“자자, 신분증이 만들어질 때까지 푹 쉬고 있으라고, 알리, 잭을 최고로 좋은⋯
“아니, 여관은 필요 없어. 인적이 없는 곳에서 수련을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은 장소 알고 있는 데 없나?”
라이의 물음에 박스터는 잘됐다는 듯 활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런 데라면 많지, 산채(山寨)를 쓰면 편리할 거야. 알리, 넓적바위 동굴로 잭을 안내해 줘. 그리고 필요한 물품도 장만해 주고.”
언제까지라도 잭을 붙잡아두고 싶었던 박스터였기에 얼마나 머물 건지는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로서는 잭이 거기에서 한도 끝도 없이 처박혀 있길 바랬으니까.
“예, 두목.”
“그리고 또 필요한 거 없나?”
“참, 이쪽으로 올 때 데리고 온 릴리라는 여자애가 있는데, 걔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 주면 좋겠는데……………
“릴리?”
인상을 찌푸리며 뭔가 생각하는 듯한 박스터를 보며, 라이는 급히 덧붙여 말했다. 박스터의 고민이 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나하고 함께 갔었던 조장들이 어떻게 생긴 애인지 알고 있어. 찾으면 나한테 기별만 해주면 돼. 나한테 끌고 올 필요는 없고 말이야.”
“알았어. 그렇게 해 주지.”
“그럼 부탁하지.”
알리와 함께 잭이 나간 후에야 박스터는 잭이 자신에게 존칭 비슷한 것도 쓰지 않고 대화를 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이제 떠날 거라고 생각할 테니 그럴 수도 있겠지.’
처음부터 그랬지만 라이는 그의 부하가 아니었다. 일종의 동업자였다. 위조신분증을 미끼로 한……………. 문제는 그게 얼마나 오랫동안 먹혀들어갈지 알 수가 없다는 거였지만.
“큰일이야. 떠날 때 떠나더라도 조직이 좀 안정된 뒤에 떠나야 할 텐데……………. 녀석을 붙잡아 둘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잭이 위조신분증을 원한다는 거였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성심껏 잘 구슬리면 녀석의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껏 알게 모르게 갖은 고생을 했었을 테니 말이다.
“짐은 그거뿐이…, 야?”
알리는 꽤 탄탄한 경력을 갖추고 있는 중간보스급이다. 더군다나 예전부터 박스터와 친하게 지냈었기에, 그가 두목이 된 이후 그의 위치는 다른 중간보스들보다는 약간 더 윗줄에 놓여 있다고 봐야 했다. 그에 비해 잭은 이제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새파란 애송이다. 두목의 지시에 따라 그를 데리고 나오며 무심결에 말을 걸었는데, 끝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찜찜한 것이다.
잭의 겉모습은 저렇게 어려 보여도 단신으로 샐러맨더 파를 박살 내 버린 괴물이다. 더군다나 두목과는 야자하며 말을 놓고 있는 걸 옆에서 봤지 않은가. 그런 사람한테 반말을 해도 괜찮을까? 혹시 나중에 시비를 걸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지만 다행히도 알리의 우려와 달리 잭은 담담하게 맞받았다.
“응. 원래 이리로 들어올 때부터 빈털터리였어.”
“산채에서는 얼마나 지낼⋯, 건데?”
“아직 계획은 없어. 일단 한 달 정도 있어 보면서 생각해 봐야지.”
“한 달이나 있을 거면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 네.”
알리는 곰처럼 생긴 것과 달리 꽤 꼼꼼하게 준비물을 챙겨 줬다. 한 달이나 있어야 하는 만큼 음식물이 부패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바짝 말린 건조식량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그 양이 엄청나게 많아진다.
다행히도 산채 안에는 기본적인 살림도구들이 있었고, 만일을 대비한 비상식량도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알리는 산채에 비축되어 있지 않은 걸 위주로 해서 구입했다. 라이로서는 그곳에 어떤 물품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기에, 모든 건 알리가 앞장서서 처리했다.
알리의 안내를 받으며 거의 다섯 시간 동안 산길을 걸은 후에야 산채가 있다는 커다란 바위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쪽에 산채가 있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어?”
하루 종일 함께 하며 얘기를 나눴기에 알리의 말투는 어느덧 자연스럽게 바뀌어 있었다. 어쩌면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일지도…………….
알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아무리 봐도 인공적인 구조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알리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만했다. 이렇게 코앞에 접근했는데도 불구하고 외부인이 봤을 때, 산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어 놨으니까.
“모르겠어. 어디야?”
알리는 바위 옆 귀퉁이에 있던 덤불더미를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거기에 가려져 있던 작은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덤불더미를 아주 꼼꼼하게 이어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어 놨기에 이게 동굴 입구를 가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목이 ‘넓적바위 동굴’이라고 하더니, 산 위쪽에 있는 바위틈에 나있는 작은 동굴을 개조하여 산채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아주 교묘하게 잘 만들었네.”
“기가 막히지? 자, 안으로 들어와 봐. 더 놀라게 될 테니까.”
입구가 작았기에 동굴 안으로 기어서 들어가야 한다는 게 단점이긴 했지만, 위장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리라. 앞서 들어간 알리를 따라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가니, 칠흑과도 같은 암흑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불켤 테니까.”
탁탁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주위가 환히 밝아졌다. 동굴 안쪽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넓었다. 이 정도 넓이라면 다닥다닥 붙어 눕는다면 10여 명쯤은 충분히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다.
알리는 방금 들어왔던 동굴 입구 쪽에 드리워져 있는 가죽휘장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일단 들어오면 저 휘장을 잘 펼쳐서 안쪽의 빛이 동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 낮에는 별 상관없겠지만, 밤이 되면 바로 들통 날 수 있거든. 아래쪽에 보이는 산길은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야.”
“주의하지.”
동굴 안을 쓰윽 둘러보던 라이의 눈에 한쪽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아궁이가 보였다. 시커먼 숯덩이가 깔려있는 걸 보면 여기서 불을 피워도 되는 모양이다.
“저기에다가 불 피워도 되는 거야?”
라이가 물어보기를 기다렸다는 듯, 알리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지. 여기다가 불을 피울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 아궁이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그 위쪽을 봐봐.” 과연 아궁이 위쪽에는 사람 하나가 간신히 기어 올라갈 수 있을 정도 넓이의 굴이 위쪽을 향해 끝도 없이 뚫려 있었다.
이 동굴이 자연동굴인 것을 손을 봐서 적당히 넓혀놓은 거라면, 위쪽으로 뚫려있는 작은 굴은 순수하게 사람의 노동력으로 뚫어 놓은 것이었다. 얼핏 봐도 수십 미터는 넘게 파낸 것 같았다. 이 좁은 굴을 뚫는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을 것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도적질 몇 번 하겠다고 이런 엄청난 중노동을 감내하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존경스런 놈들이었다.
“산길에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만들어 놨으니까 얼마든지 불을 피워도 괜찮아.”
“이거 만든다고 고생꽤나 했겠네?”
“물론이지. 교대로 한 명씩 들어가서 하루 종일 팠는데도 한 달 이상 걸렸어. 우리가 만든 산채들 중에서 이거 만든다고 가장 고생했지. 하지만 보람은 있었어. 저 아래쪽으로 보이는 산길이 밀수꾼들이 지나다니는 주 통로거든.”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서 만들만도 했었군.”
알리의 말로는 이곳 외에도 여러 개의 산채들이 있는 모양인데, 요새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세워져 있는 게 바로 이곳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산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만들어져 있는 만큼, 위장에 엄청나게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고
했다. 아주 중요한 산채인 만큼, 밀수꾼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해 줄 것을 알리는 재삼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