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5권 7화 – 지붕 위의 라이

지붕 위의 라이

뚜각, 뚜각, 뚜각……

둔중한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무게에 삐걱삐걱 비명을 질러대는 계단과 복도. 오래된 목조건물만이 지니고 있는 장점이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넷…, 아니 열 명쯤 되겠네. 둔중한 소리 속에 작은 울림들이 숨어있어. 패거리를 모아서 본격적으로 복수전을 해보겠다는 건가?” 예전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당했지만, 이번에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 혹시나 싶어 가죽갑옷까지 입은 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놈들이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뒤끝이 강한 놈들이니 말이다.

라이는 벽에 걸어놨던 검대(劍帶)를 벗기려다 멈칫했다. 롱 소드는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싸우는 데는 그리 좋은 무기가 아니다. 그리고 수많은 목격자가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서 살인을 하게 되면 대처하기 힘들어진다.

라이는 롱 소드 대신 침대 옆에 세워놓은 피에 젖은 짤막한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이미 한 번 써봤지만, 미친개들 때려잡는 데는 이거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쾅쾅쾅!!

“문 열어! 문!”

문짝이 부서져라 쾅쾅 두들기는 소리. 이건 좀 의외였다. 무작정 문을 때려 부수고 들어올 거라 생각했었는데……………

한 손에 몽둥이를 든 채 피식 웃으며 문을 열어주는 라이. 여유 넘치던 라이의 얼굴이 문밖에 서 있는 사내들을 본 순간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내 넷이 착용하고 있는 갑옷의 형태 때문이었다.

광을 내 번쩍거리는 투구, 사슬 갑옷 위에 입은 푸른색 서코트(Surcoat : 소매 없는, 무릎까지 길게 내려오는 얇은 옷. 갑옷에 직접 문장을 그려 넣기 어려운 경우에 애용된다)에는 늑대를 형상화한 것 같은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영지군 병사임이 틀림없었다.

‘병사가 왜?’

선두에 선 병사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네가 저 사람들을 아무 이유 없이 폭행한………….”

여기까지 말하던 병사의 눈이 라이가 쥐고 있는 피 묻은 몽둥이로 향했다. 병사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증거물까지 있으니 저들의 말이 틀림없군. 자, 순순히 포박당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지금까지 위협과 협박으로 아래층 손님들을 괴롭히던 놈들이 설마 병사들을 끌어들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는데, 정말 마지막까지 치졸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놈들에 대한 복수는 나중 문제였다. 지금 당장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자리를 어떻게 빠져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저런

중무장한 병사가 상대라면 이런 몽둥이 따위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설혹 상대를 할 수 있다고 해도 병사들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라이는 몽둥이를 던져 버린 뒤 재빨리 벽 쪽으로 달려가 걸려있던 검대를 벗겨 들었다. 그 순간, 뒤쪽에서 병사들의 경고성이 들려왔다.

“네놈! 감히 저항할 생각이냐?”

물론, 저항할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라이는 무기를 손에 쥐자마자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좁은 방이었기에 세 발자국도 채 가지 않아 창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라이는 생각할 것도 없이 창문으로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빠져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창문이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병사들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어어 거리기만 했다. 저렇게 좁은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는 3층. 자칫 머리부터 떨어지면 즉사를 면키 힘들 것이고, 갖은 재주를 부려 한 바퀴 회전에 성공하여 다리부터 착지한다고 해도 다리뼈가 부러질 가능성이 컸다.

‘자살할 생각인가?’

병사들이 후다닥 창문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창문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었을 때,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창 아래로 떨어진 놈이, 어떻게 착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꽁지가 빠지게 내달려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에 병사들은 더 이상 추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다급한 김에 단 하나의 탈출로인 창문 쪽으로 돌진, 손을 앞으로 쭉 뻗어 좁은 창틀 속으로 머리부터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달려 들어간 속도가 있었기에 다행히 중간에 걸리지 않고 다리까지 모두 다 빠져나가는 데 성공하긴 했다. 하지만………….

‘으아악!!’

머릿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비명을 지를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순식간에 지면이 그의 눈앞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생과 사의 갈림길인 그 찰나의 순간, 라이의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것은 검술의 한 초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살려줬다. 너무나도 쉽게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고, 착지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방금 전에 자신이 패닉에 빠질 뻔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을 정도로 쉽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지?’

하지만 조금 전의 일을 회상하며 생각에 잠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자신이 뛰어내렸던 창문 밖으로 병사들의 얼굴이 튀어나오는 것을 봤던 것이다. 라이는 재빨리 달려 행인들 속으로 몸을 감춰 버렸다.

지금 라이의 머릿속에는 치졸한 놈들에 대한 복수도, 여관에 놔두고 온 릴리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오로지 방금 전에 자신이 행한, 믿겨지지 않는 몸놀림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이런 것도 가능했다니…………”

검술에 포함되어 있는 보법(步法)을 조금만 응용해도 놀라운 몸동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라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다. 경공술은 장거리를 달리기 위해 발달된 기술이다. 내공을 이용하여 최대한 몸무게를 가볍게 하는 한편, 근력을 증가시켜 놀라운 속도로 달릴 수 있게 한다.

그 때문에 경공술의 최고봉으로 초상비(草上飛)가 꼽힌다. 하늘거리는 풀을 밟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을 가볍게 하는

경신술(輕身術)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극단적인 경우고, 일반적으로 경공술이라 하면 장거리를 안정적으로 달리기 위해 가급적 내공 소모를 최소화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 라이가 사용하는 검술에 포함되어 있는 보법의 경우는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검술의 파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공격이 시작되는 중심점의 무게가 무거운 쪽이 좋다. 45킬로 몸무게의 가녀린 아가씨가 내리찍는 검압과 120킬로 몸무게를 지닌 건장한 사내가 내리찍는 검압의 차이! 둘이 사용한 검이 똑같은 것이라고 해도 사내 쪽 검의 파괴력이 월등할 것은 뻔한 이치다.

그 때문에 검술에 포함된 보법에는 몸을 가볍게 하는 경신(輕身)과 함께 천근추墜)로 대표되는 몸무게를 가중시키는 신법이 복합적으로 사용된다. 적의 공격을 맞받거나, 혹은 적을 공격할 때는 무게가 곧 파괴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공 고수의 입장에서 본다면 라이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내공 소모가 극심한 비효율적인 것이었지만, 라이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예전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몸놀림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환희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상황은 점점 더 최악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백여 명에 달하는 샐러맨더 파의 지원세력이 다란툼에서 도착했고, 그만큼 검문검색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배신자가 루크 단 한 명이라 아직까지는 그들의 이목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쪽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 녀석들의 코앞을 지나간다 해도 붙잡힐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틀림없이 배신자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중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건, 루크 휘하에서 일하던 녀석들이다.

‘놈들을 몽땅 다 해치워 버려? 아냐, 그러다 정보 수집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서는 곤란하지. 이 상황만 무사히 넘긴다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놈들이니까……………

그리고 지금은 모두들 안전한 곳에 끼리끼리 뭉쳐서 숨어 있는 상황이다. 단독행동이 불가능한 만큼, 지부에 있는 전원이 통째로 놈들에게 투항한다면 몰라도 한두 명이 살그머니 빠져나가 투항한다는 것은 힘들었다.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이야……. 초조해할 것 없어. 어설프게 움직이면 오히려 놈들에게 발각될 확률만 높아지는 거야.’

라이에게 샐러맨더 파의 수뇌부를 척살하라고 지시를 내리기는 했었지만, 박스터는 라이가 그걸 해낼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에 계획했던 건 샐러맨더 파가 블루썬더 파의 존재를 모르는 만큼, 이 모든 혐의는 숙적인 블랙울프 파에게로 쏠릴 거라는 거였다.

그렇게 시비가 붙어 투닥거리다 결국 그 두 거대조직은 델카의 지배를 위해 정면충돌을 향해 달려갈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리고 라이가 행하게 될 샐러맨더 파 두목에 대한 ‘암살미수’는 블랙울프 파의 짓으로 포장되어 그 둘의 충돌을 더욱 가속화 시키게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첫 단추부터 어긋나 버렸다. 루크 녀석이 배신하고 블루썬더 파의 존재를 샐러맨더 파에 밀고해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샐러맨더 파는 지금 블루썬더 파의 조직원들을 찾아 눈에 불을 켜고 요새를 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떠그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이러면 코비 녀석이 잭을 블랙울프 파에서 보낸 자객인 것처럼 위장해 준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잖아.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건가?”

한참을 궁리하던 박스터는 이 사태를 타결하려면 한 가지 희망밖에는 없다는 데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라이의 존재였다.

그가 사고를 대차게 쳐주기만 한다면, 그래서 샐러맨더 파의 이목을 그쪽으로 조금만 끌어주기만 한다면 어쩌면 이곳 요새에서 탈출할 빈틈이 생길지도 모른다.

탈출만 한다면 산맥 속에 숨어들어 10년이든 20년이든, 샐러맨더 파의 추격이 잠잠해질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릴 수 있으리라. “그래, 지금 믿을 건 그놈밖에 없어. 그놈이 조금만 시간을 벌어 준다면…………

박스터는 잭이 샐러맨더 파의 이목을 끌어주길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지만, 지금 라이가 이목을 끌고 있는 건 다란툼의 시민들과 병사들이었다. 라이는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최근에 익힌 몸놀림에 신이 나 있는 상태였다.

다다다닷………….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길. 라이는 골목길 양옆에 놓여 있는 건물들의 벽면을 지그재그로 건너뛰어 순식간에 건물 꼭대기로 올라섰다. 예전에는 맨몸으로도 이런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묵직한 가죽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허리에는 장검까지 찬 채로 해낸 것이다.

“설마, 가능할까 했는데…, 이렇게 쉽게 되다니…………”

그날 창밖으로 탈출한 후, 이런저런 몸놀림을 연습하는 데 꼬박 이틀을 썼다. 밤새도록 성안을 뛰어다니는 게 힘이 들긴 했지만,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라이가 주로 내달린 곳은 건물의 지붕 위였다.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뛰기도 하고, 또 건물 위쪽으로 뛰어오르기도 했다. 실수로 지붕이 내려앉는 참사가 몇 번 벌어지기도 했지만, 집주인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재빨리 도망치는 것으로 그 자리를 모면했다. 병사들도 그런 라이의 뒤를 쫓기는 했지만, 어떻게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만약 라이가 대낮에 그런 짓을 했다면 화살이라도 퍼부었겠지만, 깜깜한 한밤중에 지붕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보니 뒤쫓을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살인 사건도 아닌, 그저 시비가 붙어 사내들끼리 투닥거린 정도의 사건이었기에 적극적으로 쫓지도 않았고 말이다.

밤새도록 지붕 위를 뛰어다니다 날이 밝아오면 라이는 여관 근처로 돌아와 숨어서 시간을 보냈다. 따뜻한 지붕 위에서 간혹 낮잠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가 여관 근처를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지부장이 언제 연락을 보내올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부로 찾아갈 수만 있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라이는 지부의 위치를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는 릴리의 방에 은밀히 들어가 혹시 지부장이 보낸 사람이 찾아오면 창문에 흰 천을 걸어 두라고 당부해 뒀다. 그날 이후 라이는 릴리의 방 창문에 흰 천이 걸려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여관을 찾았다.

리카에게 앤트러스를 인도한 후, 월터는 복수전을 위해 알카사스로 돌아갈 궁리를 시작했다. 자신이 복수전을 위해 다시금 예전에 이동했던 루트를 경유해서 들어갈 것이라는 걸 리카에게 말해뒀으니, 자신의 직속상관인 제2근위대장 까미유 드 크로데인 공작에게로 보고가 올라갔을 거다.

만약 대장이 그 의견에 반대라면 리카가 돌아간 바로 그 날 자신에게 통보가 왔었으리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할 일이나 하라고. 하지만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면 암묵적인 허락을 얻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더 이상의 증원을 받기 힘들다는 것. 앤트러스를 이송하는 것과 같은 하찮은 임무에 리카 같은 거물이 달려온 것만 봐도 뻔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제1근위대나 다른 곳에 증원을 청하기도 힘들었다. 지원받은 마법사를 통해 정보가 새나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증원을 받으려면 왜 증원이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알카사스에서 벌어진 일은 우연히 월터가 휩쓸린 게 아닐까 하는 정보부의 분석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보가 새 나가 자신의 행보가 탄로 났을 가능성 역시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우연이건, 첩자가 끼어 있었건 확실하게 확인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만약 첩자가 정말 있다면, 그놈이 나중에 더욱 높고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고 앉아 제국의 최고 기밀을 알카사스에 누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토리아 지국장과 통신을 하고 싶다.”

비밀기지에 배속되어 있는 하급 마법사 따위가 월터의 진정한 신분이 뭔지 알 리 없다. 하지만 그도 눈치라는 게 있다. 제2근위대 사령부의 직통 통신채널을 알고 있으며, 수정구슬에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에게 그곳의 마법사 한 명을 지금 당장 이쪽으로 파견해 달라고 지시하는 것을 직접 옆에서 들었으니까. 이러고도 상대의 신분이 뭔지 대충이나마 짐작하지 못한다면, 마법사를 때려치워야 하는 것이다.

마법사는 월터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월터님. 최대한 빨리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라고 했지만, 토리아 지국장과 연결되는데 월터는 거의 30여 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기사단 본부 같은 경우, 통신회선이 항상 열려 있기에 채널만 알고 있다면 언제든지 통신이 가능했다.

하지만 정보부는 달랐다. 워낙에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는데다, 기밀 누출을 방지하기 위해 상부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회선은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리저리 빙빙 돌아서 위쪽으로 연락이 올라가야 했기에 이렇게 시간이 걸리게 된 것이다. 통신이 연결됐다는 마법사의 말에 월터가 통신실로 가보니, 커다란 수정구 안에 노회한 인상의 중년인의 모습이 떠올라 있는 게 보였다. 그 중년인은 월터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건넸다.

하하핫, 오랜만입니다, 월터님. 저를 급히 찾으셨다고요.」

“지원을 요청할 게 있어서 말일세.”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이곳도 여력이 거의 없어서……………」

월터의 청에 지국장은 난감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노회한 인물답게 곧바로 해결책을 제시해 왔다.

「어쨌거나 말씀해 보십쇼. 여기서 정 안 된다면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면 되니까요.」

“두 명만 지원해 주게. 한 명은 마법사, 그리고 또 한 명은 토리아 지국에서 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로 말이야.”

토리아 지국에서 지위가 높은 인물을 지원해 달라는 말에, 지국장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월터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으니까.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 말씀이십니까? 실례지만,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미끼로 쓰려고…………….”

순간 지국장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는 걸 본 월터는 급히 덧붙여 말했다.

“아, 걱정 말게.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적들과 싸우는 사이에 도망치면 돼. 그 때문에 마법사가 한 명 필요한 거고.”

그때처럼 떼거리 공격을 받는다면 월터가 제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미끼의 생명을 보장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월터가 추가로 원한 게 바로 마법사였다. 그가 복수전을 펼치고 있는 동안 미끼를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키는 게 가능하니까. 그리고 마법사를 데리고 가면 적들의 움직임을 탐지하는데도 유용할뿐더러 통신기로도 써먹을 수 있다.

월터가 제2근위대 소속 기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월터의 앞 통신구에 비춰진 토리아 지국장은 그 몇 명 중에 속해 있었다. 월터의 지위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요청을 거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신분은 지고한 것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월터님. 알카사스 쪽에서 군침을 흘릴만한 인물이라면 서부지부장이 딱이겠군요. 알카사스 쪽 첩보망과 연계해서 일을 해왔던 만큼, 알카사스 쪽도 서부지부장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는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런 그가 나타났다는 걸 알기만 하면 모두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요.」

“그럼 서부지부장으로 부탁하겠네.”

「예, 그럼 미끼는 그로 하기로 하고…, 그런데 마법사가 문젭니다. 월터님의 눈에 찰만한 쓸 만한 마법사가 없어서 말이지요.」

유사시에 혼자도 아니고 동행까지 데리고 탈출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평온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도 아니고, 급박한 상황에서 실행해야 하니까. 더군다나 탈출시켜야 하는 사람이 토리아 지국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만큼, 그의 안전은 아주 중요했다.

잠시 궁리하던 지국장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3일 정도만 기다려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본국에 증원을 요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데………….

「그, 그러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지국장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떠오르는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곳 토리아 지국에 배치된 이후, 줄곧 통신실을 지켜온 파벨이라는 여자 마법사였다. 변방에 배치된 것치고는 꽤나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용되지 못하고 있던 이유는 첩자로 투입하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심문을 가해도 눈물을 질질 흘리며 어렸을 적 기억부터 시작해 모든 걸 술술 불 것 같은 그런 심약한 인물을 어떻게 써먹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괜찮을 듯싶었다. 무려 근위기사씩이나 되는 인물과 함께 가는 것인 만큼, 적에게 포로로 붙잡혀 심문당할 염려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한 명 빼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1시간 내로 그곳에 도착할 수 있도록 처리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