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6권 12화 – 엄마가 그랬어. 여자는 근육이라고

엄마가 그랬어. 여자는 근육이라고

월터는 다이아나 일행과 동행하기로 결정한 후, 미끼로서 선행시키고 있었던 서부지부장을 돌려보냈다.

더 이상 낚시질이나 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일전에 기습을 당했던 건 정보부 쪽 말대로 우연히 재수 없게 일어난 일이었던 모양이다.

낚시질을 그만둬야 했지만, 월터는 파벨은 돌려보내지 않았다.

다이아나에게 소개했듯 파벨은 서쪽 대륙 사정에 밝았고, 서쪽 대륙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를 약간이나마 구사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이아나와 함께 온 상인들도 서쪽 대륙의 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제대로 된 통역을 해주고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게 훨씬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월터가 직접 상인들을 고용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들을 믿지 못한다는 점도 작용했고,

그들은 42일에 걸친 강행군 끝에 서쪽 대륙에 도착했다.

그들만이라면 좀 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겠지만, 상인들과 함께 이동해야 했기에 그 이상의 시간 단축은 무리였다.

“드디어 도착했다!”

저 멀리 국경 검문소가 보이자 여자들은 두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사막을 건너오며 거의 씻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들 중 두 명이나 마법사였기에 청결을 위한 간단한 생활마법을 구사할 수 있어 그리 더러운 몰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다.

우선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오랜 여행에 지친 육체적, 정신적인 피로를 풀고 싶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었고, 세 번째로는 제대로 된 푹신한 침대에서 숙면을 취하고 싶었다.

그들은 검문소를 통과하자마자 곧장 근처 호텔로 달려가 방 두 개를 잡았다.

하나는 월터를 위한 커다란 더블 침대가 놓여있는 2인용 객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여자들을 위한 특실이었다.

특실이 아니라면 욕실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특실을 선택한 것이다.

“일단 욕조에 물부터 채워주세요. 뜨거운 물로 가득!”

“예.”

라디아가 종업원과 얘기하고 있을 때, 다이아나는 파벨을 향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시…, 월터와 같은 방을 쓰고 싶은 건 아니지?”

현재 직속 상관인 월터의 의중을 몰라 파벨이 머뭇거리기만 할 뿐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하자, 다이아나는 월터에게로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넓고 푹신한 침대에서 혼자 편히 쉬는 게 월터에게도 좋겠지? 그럼 파벨은 우리가 빌려 갈게.”

월터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오랜만에 혼자서 뒹굴거리며 잘 수 있겠네.”

“우선 간단하게 목욕부터 하고, 그 다음에 밥 먹으러 가자.”

“알았어. 그런데,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한 시간 후에 만나.”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월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사막을 건너오며 딱딱한 빵조각과 육포만 질리도록 먹어 왔기에 이곳에서의 첫 식사를 무척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빨리는 안돼?”

“우리 세 사람이 함께 들어가 목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빨리는 안돼.”

목욕 후에 어떤 걸 먹으러 갈 건지를 두고 꺅꺅거리며 흥분해서 떠들고 있는 여자들을 월터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바라봤다.

겨우 사막 하나 건넌 거 가지고 뭘 저리 호들갑을 떠는지…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사막 횡단이라는 고난을 통해 여자들끼리의 결속력이 무척이나 높아졌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두 사람에게 말도 못 걸던 파벨도 꽤나 대화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여자들이 우르르 특실로 몰려갔다.

특실 문을 여니, 작은 복도가 나오고 방문 4개가 나란히 보였다.

제일 안쪽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커다란 문이 메인 객실로 들어가는 문인 듯 보였다. 그리고 두 개는 고용인들이 사용할 작은 방의 문이었고, 나머지 하나가 욕실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여자들이 제일 먼저 열어본 건 욕실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그래도 특실이었기에 나름 기대치라는 게 있었는데, 한 사람이 간신히 발을 뻗고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욕조 하나와 요강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에게~, 특실이라면서 이게 뭐야?”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다이아나에게 라디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독였다.

“사막에 붙어있는 국경지대 호텔 수준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그건 그래.”

욕실을 본 다이아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복도 끝 제일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이아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려는 라디아를 향해 파벨이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나는…, 어느 방을 쓰면 돼?”

“여기 두 개 중에서 아무거나 써. 둘 다 하인들을 위한 방이니 구조는 똑같을 거야.”

“그럼 내가 바깥쪽 방을 쓸게.”

“그렇게 해.”

파벨은 일부러 바깥 출입문에 가까운 방을 선택했다.

모두들 그녀에게 잘해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벨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할 리 없었다.

일행중에서 평민인 건 그녀 혼자뿐이었으니까.

여기까지 함께 여행하며 다이아나와 라디아를 통해 얻어들은 단편적인 정보들을 종합해 보면, 라디아는 치레아 기사단 소속 마법사인 모양이다.

치레아 기사단의 명성으로 봤을 때, 그녀의 실력이 궁정마법사급일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었다.

파벨은 그런 사람들과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게 꿈만 같았다.

하인들을 위한 방은 정말 작았다. 작은 옷장 그리고 일인용 침대 두 개가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은 공간이 오히려 그녀에게 안정감을 안겨주었다.

누구의 눈치조차 보지 않으며 이렇게 편안한 잠자리에 누워보는 게 얼마만 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상관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의해 시작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여행. 그리고 끔찍하리만큼 힘겨웠던 사막 횡단은 사무실에서 주로 임무를 수행해 왔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고난 그 자체였다.

그나마 일행들이 격의 없이 편안하게 그녀를 대해줬기에 여기까지 어떻게든 참고 버티며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파벨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후드가 달린 검정색 로브를 벗어 맞은편 침대 위로 던졌다. 그리고 자신의 상체를 꽉 죄고 있던 가죽갑옷까지도 벗어던졌다.

그러자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아 살 것 같았던 그녀는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때, 바깥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문 앞을 지나간다. 아마 욕조에 물을 넣으려고 온 종업원들의 발소리인 모양이다.

자신은 두 사람이 목욕을 마친 후에나 들어가게 될 테니 물은 거의 식어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목욕을 다 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테니, 잠깐 눈 좀 붙일까?’

정말 오랜만에 가져보는 편안한 시간이다.

모두 자신에게 잘 대해 준다고는 하나, 의식 깊숙한 곳에서는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파벨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 있게 되니 그동안 쌓여왔던 긴장이 풀리며 사르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막 횡단을, 그것도 강행군을 막 끝낸 자신의 몸은 극심한 피로를 호소해 오고 있었다.

여기까지 뒤처지지 않고 따라온 것만 해도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다.

이것도 다 강행군을 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하고, 피로를 풀어줬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파벨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려는 그녀를 라디아가 제지했다.

“괜찮아. 그냥 편안히 누워있어.”

그렇다고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파벨은 일단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런 파벨을 라디아가 당혹스러운 듯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그동안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는데, 파벨에 대해 아직도 너무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되어서 말이지. 이렇게 관능적인

옷차림을 좋아할 거라고는……”

파벨은 라디아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파벨은 깨달았다. 자신이 로브는 물론이고, 가죽갑옷까지 다 벗어버렸다는 것을.

덕분에 파벨이 안에 입고 있었던 가죽옷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 가죽옷은 정보부에서 미인계를 위해 특수 주문제작한 옷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입고 있는 가죽옷이 그렇게 농염(濃艶)한 형태는 아니다. 너무 과도한 노출은 상대에게 오히려 경각심을 안겨줄 수 있기에 노출은 최소화하였다.

대신 고급스런 디자인에 은근히 몸매를 드러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옷이 그녀가 입기에는 치수가 좀 작다는 것.

그 때문에 은근한 강조가 조금 심한 강조로 바뀌어 있었다.

가죽 특유의 밀착감으로 인해 그녀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가슴 윗부분은 터질 듯 솟아올라 있었다.

지금껏 함께 여행하며 로브를 외투 겸 이불 삼아 줄곧 껴입고 생활했었기에 안에 뭘 입고 있는지 보여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파벨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따로 챙겨온 옷이 없었기에 파벨은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 하… 하…, 내가 좀 야했나?”

“흠,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라디아는 다 알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몰랐어. 파벨이 월터를 유혹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있는 줄은…….

“에? 그건 무슨 말씀……?”

당황한 탓에 존댓말이 입에서 튀어나오자 곧바로 엄한 질책이 가해진다.

“반말로 해.”

“미안. 조심할게.”

파벨이 황당해하건 말건 라디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가 봤을 때 앙큼하게도 시치미 떼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저만한 남자 만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그것도 사막을 횡단하며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가까워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근데 이거 어떻게 하지? 기대 많이 했을 텐데, 본의 아니게 우리들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아버렸네.”

라디아의 말에 파벨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고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오해를 바로잡으려니 얘기가 복잡해진다. 월터를 유혹하기 위해 이런 옷을 입고 있다? 아니면 내 원래 취향이 이런 걸 좋아한다?

둘 다 아니었지만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은 남자를 유혹하기 딱 좋은 그런 야시시한 옷이었으니까.

잠시 고심하던 파벨은 억지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느니 그냥 상대방이 오해하도록 놔두기로 하였다. 어차피 이번 임무만 끝나고 나면 더 이상 얼굴 볼 일 없을 테니까.

파벨은 최대한 평상심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파르르 눈가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그렇게까지 방해된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호호호, 그렇다면 다행이고. 참, 내가 온 용건은 파벨이 먼저 씻으라고, 레이디께선 뜨거운 물에 목욕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거든. 여기 특실을 일부러 잡으신 건 나를 위해서 그런 거지.”

라디아가 「레이디께선」이라는 말을 했지만 파벨은 감히 조심하라며 질책하지 못했다. 그저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디아 먼저 씻어. 그다음에 내가 들어갈게.”

“그래, 그럼 내가 먼저 씻을게.”

“신경써줘서 고마워.”

“뭘, 우린 죽음의 사막을 함께 건너온 동료잖아.”

그러면서 유쾌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가는 라디아.

분명 방금 봤던 자신의 야한 옷에 대한 얘기가 다이아나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물론 라디아가 더욱 자극적으로 살을 듬뿍 붙여서. 그리고 그 얘기는 다이아나를 통해 월터의 귀에까지 들어갈 게 뻔했다.

‘젠장할. 앞으로 다른 사람 얼굴을 어떻게 보지?”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그 속에 머리통을 집어넣고 싶은 파벨이었다.

“모두들 빨리 나와. 배고파! 밥 먹으러 가자!”

마지막으로 목욕을 끝낸 다이아나가 준비를 끝내자마자 복도에서 외쳤다.

대공가 영애인 만큼 최고 품질의 가죽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

갑옷과 로브를 벗으면 좀 여성스런 몸매로 바뀌지 않을까 싶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옷에 감춰져 있던 근육질이 뚜렷이 드러나며 더욱 남성화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황급히 방에서 뛰어나온 라디아나 파벨은 로브로 몸은 물론이고 얼굴까지도 가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미모는 보자마자 마법사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기에 스스로 알아서 조심하는 것이다.

“안에 갑옷 입었어?”

라디아의 물음에 파벨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여기는 호텔 안인데 갑갑하게 갑옷은 왜 입어? 이럴 때 월터에게 그 사랑스런 몸매를 보여줘야 할 거 아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벗고 나와.”

“계속 놀리면 나 화낼 거야!”

파벨이 분개한 척 해보지만, 그녀의 소심함을 라디아가 모를 리 없었다. 아마 한동안은 안에 입은 가죽옷으로 놀려댈 게 뻔했다.

“크크, 다음에 둘이서만 오붓이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오늘은 사막을 횡단한 후 기념비적인 첫 식사니까 모두 함께 먹자고.”

뒤따라가던 다이아나가 라디아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둘이서만 오붓한 시간이라니, 그거 무슨 말이야?”

“아, 그런 게 있어. 셀리나는 몰라도 돼. 그건 그렇고 뭐, 맛있는 게 있으려나?”

“나는 맥주! 더울 때는 시원한 맥주가 최고지!”

그리고 그 뒤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따라가고 있는 파벨.

‘아, 정말…….’

감히 신경질을 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 자리에 월터가 없다는 것.

만약 월터 앞에서 라디아가 저런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파벨로서는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함께하는 식사라고는 해도 같이 온 상인들과 용병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이아나나 월터의 진정한 신분을 아직 모르는 상태였다.

둘의 첫 격돌 때 두 사람이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두 사람의 신분 때문이라도 그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되었기에 모두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기름진 음식과 향기로운 술을 잔뜩 시켜놓고 포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사막을 건너오면서 먹은 것이라고는 바짝 마른 빵조각과 육포 조각, 그리고 말린 대추야자 열매가 전부였다. 그러니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어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기가 막히군. 최고야. 이렇게 맛있을 수가…………”

월터의 과장된 호들갑에 라디아가 새침한 어조로 반박했다.

“냉정하게 음식 맛을 평가한다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지금까지 워낙 부실하게 먹었기에 이게 맛있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지.”

“누가 들으면 사막 건너기 전에는 정말 맛있는 음식들만 먹고 살았는 줄 알겠다. 이거 꽤 맛있네.”

그에 반해 다이아나는 식사가 꽤 마음에 든다는 듯 커다란 고깃덩이를 우적우적 씹어먹은 후,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러던 다이아나는 파벨을 힐끔 쳐다본 후 우려 섞인 질문을 던졌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는 식사가 입에 맞지 않은 듯 깨작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벨은 음식이 입에 안 맞아?”

음식은 맛있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이 그것도 특히 라디아 때문에 식욕이 뚝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에 파벨은 월터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맛있어.”

“맛있다면서 그것밖에 안 먹어?”

“충분히 먹었어. 배불러.”

“그렇게 새 모이만큼 적게 먹으니까 체력이 없는 거야. 봐, 라디아도 마법사인데 잘 먹잖아. 엄마가 그랬어. 여자는 근육이라고. 잘 먹어야 근육도 붙는 거야.”

“마법사가 근육 키워서 뭐하게? 마법사라면 역시 두뇌지. 두뇌를 원활하게 움직이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는 건 상식이야. 그래서 우수한 마법사가 되려면 잘 먹어야 하는 거야.”

설마 공작부인이 그런 무식한 말을 했으려고? 하지만 곧 주변국 요주의 인물 중 하나인 치레아 공작부인의 특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오크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우람한 덩치, 그렇다면 다이아나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순전히 그쪽 집안의 개인적 편견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지만.

파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식당 안을 휙 둘러보았다.

국경 마을에서 제일 큰 식당이라고 들었던 만큼, 꽤나 넓었고 손님도 많았다.

파벨이 아무리 살펴봐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쑤군거리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식사를 즐기는 활기찬 얼굴로, 예상했던 전쟁의 기운이라고는 손톱만큼도 감지할 수 없었다.

‘잘못 온 거 아닐까?’

그 개고생을 하면서 건너온 사막이다. 그런데 초장 분위기부터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파벨은 자신의 느낌이 잘못된 것이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렇지 않다면 여기까지 오느라 그 고생을 한 게 완전히 허사가 될 테니까.

처음에는 바짝 긴장해서 의심 어린 눈길로 이곳저곳을 정탐했지만, 아무리 봐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보내는 족족 첩자들이 행방불명된 곳이었건만, 서쪽 대륙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아무래도 잘못 짚은 거 같아.”

월터의 말에 다이아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잘못 짚었다니…, 그런 결론을 내린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그래. 느낌이.”

월터가 이런 특수작전에 대한 경험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사한 시간이 너무 짧았기에 다이아나는 선뜻 그의 의견에 동조하기 힘들었다.

“느낌은 무슨? 겨우 2주일 정도밖에 정탐하지 않았는데 무슨 느낌 타령이야. 최소한 한 달은 조사해보고 그런 소리를 해야지. 게다가 우리는 아직 왕도 쪽은 둘러보지도 않은 상태잖아. 내일 바로 왕도로 떠나자고.”

그때 지금껏 아무런 말도 없었던 파벨이 끼어들었다. 그동안 함께 지낸 것만 해도 벌써 2개월이 다 되어갔다. 덕분에 심약한 그녀 역시 자신의 의견을 타진할 수 있을 정도로 반말에 익숙해져 있었다.

“난 월터의 의견에 동감이야.”

다이아나 일행은 첫 만남에 보여줬던 파벨의 어리숙한 모습에 월터와 같은 뛰어난 기사가 왜 저런 멍청한 계집을 데리고 다니나? 하는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월터가 파벨을 데리고 온 게 단지 마법 실력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숫기 없는 파벨이 어렵게 말을 꺼낸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다이아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설마, 파벨도 느낌이라고 얼버무릴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면 나 진짜 실망할 거야.”

살짝 비꼬며 놀리는 듯한 다이아나의 말투에 소심한 파벨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듯 그녀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아, 아닙니다. 레이디 다이아나.”

“레이디 다이아나라고 부르지 말랬지?”

“죄, 죄송해요. 셀리나 님.”

“존칭인 「요」나 「님」도 다 빼고. 이러면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 힘들겠는데. 월터, 얘는 그냥 돌려보내지?”

“미, 미안, 셀리나.”

다이아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래. 그렇게 말하면 돼. 계속 말해 봐.”

“아, 알다시피 내 전공은 정보 분석이야. 정보부에 입사한 이래 지금껏 그것만 해왔어.”

그녀의 소심한 성격 탓에 정보 분석과 통신 외에 다른 일을 맡길 수가 없었기에 취해진 조치였지만, 그 덕분에 그녀는 정보 분석에 있어서만큼은 상당한 수준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안 그래도 두뇌가 뛰어난 사람만이 마법사가 될 수 있는 만큼, 그녀의 분석력은 월터와 같은 사람 수십 명이 투입된다 해도 따라갈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외국에서 숨어들어오는 첩자들을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없애고 있는 걸 보면 뭔가 큰일을 벌이려고 한다는 건 알 수 있겠지? 그리고 그런 일이라면 전쟁 외에 뭐가 있을까? 이런 건 몇 군데만 집중적으로 조사해 보면 돼. 이곳의 용병길드, 몇몇 유력 상인들, 그리고 요충지에 위치한 성채나 요새에 주둔 중인 병력 상황………….

사막에 접해있는 국가들 중에서 동쪽 대륙으로의 침공을 획책할 만큼 강대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있다면 그만한 능력을 지닌 대국이 사막에 접해있는 어떤 나라와 손을 잡은 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 나라가 혼자 몰래 군사력을 비축하는 거라면 몰라도 여러 나라가 연합하게 되면 비밀유지는 몇 배나 어려워진다.

거기에 자국의 대규모 병력을 사막에 접해있는 다른 나라로 이동시키는 것이라면 비밀유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소국에서 대국의 대병력이 자국을 그냥 통과해 지나간다는 말을 믿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뭔가 불협화음이 터져 나와야 정상인데, 이곳에는 그 어떤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추론을 말한 파벨은 천천히, 하지만 힘있게 고개를 들어 다이아나를 바라보며 결론을 말했다. “여기는 절대로 아니야.”

그 말에 다이아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를 살펴보자는 거지?”

다이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파벨은 다시금 고개를 푹 숙이며 자신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도, 도시국가 연합……”

다이아나는 힐끗 라디아 콜린스의 눈치를 살핀 후 입을 열었다. 똑똑한 그녀의 생각도 자신과 같은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인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건 다이아나도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도시국가 연합을 살펴보자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거기는 알카사스는 커녕, 무역로를 제압할 군사력조차 없어.”

월터도 다이아나의 의견에 동감이었다. 그는 여기는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그렇다고 범인이 도시국가 연합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셀리나의 말이 맞아. 도시국가 연합 따위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대제국과 비등한 군사력을 키운다는 건 말도 안 되지.”

두 사람의 반대 의견에도 파벨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도 살펴볼 만한 곳은 거기뿐이라고 생각해.”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이유는?”

쏘아붙이듯 튀어나온 다이아나의 질문에 파벨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냥 대답을 하지 않고 버틸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기에는 항구가 있기 때문이야.”

항구라는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라디아였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외쳤다.

“그래! 항구를 생각하지 못했네. 항구를 통해서라면 대규모 병력은 물론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손쉽게 수송할 수 있지. 그것도 주변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이야.”

하지만 월터는 파벨의 의견에 찬성할 수가 없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추측이야, 파벨. 남쪽 바다는 드래곤이 설치는 탓에 병력 이동이 아예 불가능해.”

월터의 반박에 대신 대답해 준 것은 라디아였다.

“월터의 말도 맞긴 해. 하지만 그건 서쪽 대륙의 국가가 도시국가를 침공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일 때의 일이지. 만약 그 침공 세력이 도시국가들이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 말에 월터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도시국가들이 주가 되고, 서쪽의 몇몇 나라들이 그들을 도와 지원군을 파견해주는 경우를 말하는 거야. 이렇게 되면 드래곤이 간섭할 가능성이 없어지지. 그들은 도시국가들과 한편이니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라디아의 말을 듣고 있던 월터가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듯하긴 한데, 라디아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몇 가지 있어. 우선 드래곤 탓에 알카사스가 마음껏 군사력을 투입할 수 없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무역로를 통째로 뺏기게 된 상황에서도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도시국가들이 아무리 많은 부를 축적했다고 해도 알카사스에 비할 수는 없어. 그들이 드래곤에게 1톤의 황금을 줬다면, 알카사스는 그 열 배, 아니 백배라도 건네줄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잠시 말을 멈춘 월터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드래곤만 눈감아준다면 알카사스의 전력은 도시국가 따위는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어. 설혹 도시국가 연합이 어떻게 줄타기를 잘해서 무역로를 삼키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끌어들인 외세에 역으로 잡아먹힐 가능성이 다분하지. 알카사스를 제압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외세를 도시국가 연합이 통제할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되거든. 그건 도시국가의 지도자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래서 월터는 도시국가 연합이 이 일과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로군.”

월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이아나는 그렇지 않았다.

“월터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도시국가들 외에 딱히 의심이 가는 국가도 없는 만큼 지금은 파벨의 의견대로 도시국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다이아나의 제안에 라디아도 찬성했다.

“나도 파벨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이야.”

“월터의 생각은 어때?”

모두의 시선이 월터에게로 쏠렸다.

분명 도시국가로 가는 게 헛걸음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다이아나까지 이렇게 나오니 월터로서도 더 이상 반대를 하기도 그랬다.

게다가 다른 뚜렷한 대안도 없었고 말이다.

월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삼대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그래, 도시국가로 가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