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6권 14화 – 언데드 출현

언데드 출현

월터 일행이 도시국가들로 가기 위해 사막을 다시금 횡단하기 시작한 후, 다섯 번째 성읍에 접근하고 있을 때였다.

해가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아직 대지가 뜨겁게 달아오르지는 않은 상태였다.

더 더워지기 전에 여행자 숙소에 자리를 잡아야 했기에 월터 일행은 발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시야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모래땅을 파고 있는 게 보였다.

남자들은 땅을 파고 있었고, 여자들은 하얀 천에 감긴 뭔가를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었다.

형태로 봤을 때 시체 같아 보였다. 그것도 다 큰 어른의 시체였다.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을 때, 월터 일행은 이해하기 힘든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땅을 다 판 사내들 중 한 명이 시체를 땅에 묻기 전에 도끼를 들고 거침없이 시체의 목을 잘랐던 것이다.

하지만 고인을 능욕하는 이런 미친 짓에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사내의 행동을 제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슬피 울며 침통한 표정을 하고는 있었지만, 모두 당연한 장례 절차를 보고 있는 듯한 반응들이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월터는 낙타에서 내려 그들에게 따지듯 물었다.

“도대체 시체의 목은 왜 자르는 거요? 아무리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해도, 이미 죽은 고인인데 목까지 자르는 건 너무 심하지 않소?” 그런데 파벨이 월터의 말을 통역하여 그들에게 묻자마자 시체를 끌어안고 울던 여자들 중 몇몇이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사람들의 두 눈은 분노로 인해 시뻘겋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그 거친 분위기에 심약한 파벨은 재빨리 뒤로 내뺐고, 그녀들의 분노를 월터 혼자 떠안아야 했다.

연약한 여인들에게 무력을 쓸 수도 없고, 왜 이러는지 알고 싶었지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월터가 곤혹스런 표정으로 악에 받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파벨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죽은 남편의 목을 자르는 것도 억울한데, 왜 그런 말을 하냐며 따지고 있습니다.”

당황한 파벨이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지만, 황당하기 짝이 없는 작금의 상황에 월터는 그걸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억울하다면서 목은 왜 자르는 건데?”

월터가 고개를 파벨 쪽으로 돌리며 의아하다는 듯 묻자, 그녀는 유창한 사막 부족의 말로 여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잠시 후, 여인들과의 대화를 끝낸 파벨은 머뭇거리며 월터에게 설명했다.

“믿기 힘들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네요.”

월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고? 살아나면 좋은 거잖아.”

하지만 파벨이 말한 살아난다는 건 정말 살아나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파벨이 재빨리 월터의 의구심에 대한 답변을 해주었다.

“정말 살아나는 게 아니고, 언데드가 된다는 얘기 같습니다.”

월터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는 처음 들었으니까.

“언데드? 훗, 그럴 리가…………… 시체가 언데드가 되어 살아나는 지역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런 곳은 대부분 늪지대 아냐?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미신이 들어온 모양이군.”

미신이라 치부하며 가볍게 넘기려는 월터를 향해 파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뇨. 미신이 아니라 정말 언데드가 된다고 합니다. 지금껏 정보 분석을 해오면서 티투스 대사막에서 언데드가 나오는 지역이 있다는 보고서는 단 한 건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곤혹스럽지만 말이죠.”

그 말에 월터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미신이 아니라고? 그럼 땅에 묻은 시체가 정말 언데드가 되어 돌아다니는 걸 본 사람이 있다는 거야?”

“예. 목을 자르지 않고 그냥 묻으면 한 달도 채 안 돼서 무덤을 뚫고 나온다네요.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이나 짐승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고…………….”

“사실이라고?”

잠시 생각하던 월터는 곧 파벨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분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이것 좀 물어봐. 시체를 그냥 묻으면 언데드가 되는 게 저 옛날부터 그랬던 건지, 아니면 요 근래 그런 현상이 시작된 건지 말이야.”

“두어 달 전부터 이런 괴이한 현상이 시작됐답니다. 그전에는 이런 일이 전혀 없었다네요.”

월터는 낙타에 앉은 채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디아 쪽으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마법 쪽은 파벨보다 라디아가 월등하게 뛰어났으니까.

“라디아, 탐지마법으로 주변을 좀 살펴봐.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말이야.”

파벨과 월터의 얘기를 듣고 있던 라디아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주변을 탐지마법으로 훑었었다.

하지만 이상한 건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었다.

라디아는 난처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글쎄…………. 이미 주변을 꼼꼼히 살펴봤는데 이상한 건 전혀 보이지 않아. 게다가 이런 건 신관 쪽이 전문 분야라서 말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신관도 한 명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때늦은 후회를 하는 월터였다.

“혹시 이 근처에서 신관을 고용할 만한 데는 없을까?”

사막을 지나치며 지금껏 그들이 접한 성읍들은 말이 좋아 성읍이지, 아주 작은 정착촌 정도 규모의 촌락이었다. 그런 작은 촌락에 정식 신관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무역로상에 있는 정도 규모의 큰 성읍이 아니라면 이 근처에서 신관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할 거야. 모험가 파티와 우연히 만난다면 또 모르겠지만.”

“공간이동도 되지 않는 이런 불모의 대지에 모험가 파티가 들어올 리가 없잖아.”

월터는 잠시 생각을 하다 다이아나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떻게 할래? 무역로 쪽에 있는 커다란 성읍이라면 신관을 구할 수도 있을 텐데.”

“그냥 가자. 그쪽으로 간다고 해서 제대로 된 신관을 만난다는 보장도 없고, 기껏 신관을 데리고 왔는데 별거 아니라면 너무 시간이 지체되잖아?”

다이아나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일행의 막강한 전투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타이탄을 소유한 오너급 그래듀에이트가 둘, 그리고 마법사가 둘이다.

부정한 대지에서 태어난다는 언데드 몬스터의 대명사인 좀비나 스켈레톤 따위가 그녀에게 심적 압박감을 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월터 일행이 사막 횡단을 시작한 뒤 여덟 번째 만난 성읍.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그들은 성 밖에 위치한 외지인을 위한 숙소에 짐을 푼 다음 성문 쪽으로 걸어갔다.

소모된 물자를 보충하고, 성내 분위기를 탐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경비병도 보이지 않았다.

“이보쇼! 누구 없소? 경비병!”

월터는 물론이고 파벨이 사막 부족의 언어로 경비병을 불러 봤지만, 성벽 위쪽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이상했다.

이미 해가 뜬지 오래라 주위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활동할 만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뜨거운 정오라 해도 성벽 주위를 경계하기 위한 경비병 한두 명은 반드시 있었다.

“사람이 없는 빈 성인가?”

사막 부족은 기본적으로 유목을 통해 식량을 자급자족한다. 때문에 한 지역에서 오래 머물지를 않았다.

아무리 풀이 수북이 자라 있다 해도 가축들을 풀어 놓으면 한 달도 채 지나기도 전에 주변은 풀 한 포기 찾기 힘들 정도가 되어버리기에, 사막 여기저기에 이런 성읍을 몇 개씩이나 지어놓고 계속 옮겨 다니며 생활한다.

그렇기에 주민이 없는 텅 빈 성읍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경우 여행자는 성 밖에 위치한 숙소에서 묵고, 떠날 때 적당히 돈을 놓고 가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월터의 감이 그를 성벽 위로 올라가게 했다.

얼마 전에 봤던 그냥 파묻으면 언데드가 된다고 해서 시체의 목을 자르던 사람들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월터는 가볍게 뛰어오르는 것만으로도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성벽 위로 올라간 월터의 두 눈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성 안쪽에 수도 없이 쓰러져 있는 가축들의 사체들을 봤기 때문이다.

뜨거운 열기에 사체들은 미라처럼 바짝 말라붙어 가고 있었지만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인지 성벽 안은 사체가 썩어가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바람 방향이 월터의 앞쪽이 아닌 등 쪽에서 불어오고 있었기에 사체가 썩어가는 냄새를 성벽 아래에서 맡지 못했던 것이다.

월터가 말없이 가만히 서 있자,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파벨이 큰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고 서 있어? 뭔가 있어?”

월터는 대답 대신 아래로 내려가 살짝 파벨을 껴안고 다시금 성벽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꺄악! 뭐, 뭐 하시는 거예요?”

깜짝 놀란 파벨이 새된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그녀는 월터와 함께 성벽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사체들이 즐비하게 쓰러져있는 참혹한 광경을

성안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이해가 빠를 거 같아서…….”

“이, 이건 뭐죠? 어떻게 이런 끔찍한…….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어.”

이때, 아래쪽에 있던 다이아나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곧 성안의 참혹한 광경을 보자마자 그녀 역시 월터의 뒤를 따라 성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잠깐! 같이 가, 월터!”

월터의 이름을 부르며 땅바닥에 채 내려서기도 전에 다이아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껏 부패되어 가고 있던 가축들의 사체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던 것이다.

일어선 가축들의 사체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떤 사체는 부패가 너무 진행되어 눈알이 빠져 텅 빈 눈구덩이만 있기도 했고, 또 어떤 사체는 다리가 두어 개 떨어져 나가 일어서지 못하고 땅바닥을 꿈틀꿈틀 기어 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가축들의 사체 종류는 다양했다. 양들과 염소, 낙타, 말………….

사막 부족들이 키우던 모든 가축들의 사체가 꿈틀거리며 일어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월터와 다이아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사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 순간, 월터의 검이 부드럽게 검집을 빠져나왔다.

화려한 칼부림과 함께 피떡이 되어 반대편으로 터져나가듯 흩어지는 가축의 사체들! 그와 함께 가죽 속에 농축되어 있던 악취가 터져 나오며 지금껏 맡아보지 못했던 끔찍스런 악취가 코를 찌른다.

“컥!!”

월터를 돕기 위해 칼을 뽑으려던 다이아나는 급히 숨을 멈추고 재빨리 성벽 위로 도망쳐 버렸다.

너무 지독한 악취 때문에 사체들을 분쇄할 마음이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월터가 이 정도 사체들 정도로 곤란해지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우욱!!”

참혹한 광경과 지독한 악취에 파벨은 성벽 위에서 연신 구역질을 하고 있었지만, 다른 두 사람은 망연한 표정으로 성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로지 월터 혼자만이 성벽 아래에 남아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분쇄하고 있었다.

“월터! 잠깐만! 차라리 성문을 열어두는 건 어때?”

한참 칼부림을 하고 있던 월터는 라디아의 말에 성벽 위로 도약해 올라와 물었다.

“성문을 열어주자니, 그건 무슨 말이야?”

가축들의 사체들은 월터가 갑자기 자신들의 앞에서 사라지자 일행들이 서 있는 성벽 아래쪽으로 모여들었다.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지만, 사체들은 계단 쪽으로는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월터 일행이 서 있는 성벽 바로 밑쪽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체들의 썩어 문드러진 눈으로 월터 일행을 보고 공격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생명의 기운에 반응해 공격해 왔었던 모양이다. 생명의 기운은 부정한 기운만큼이나 언데드들이 아주 좋아하는 양식이었으니까.

그때쯤 되자 성안에 있는 집에서 하나둘씩 사람들의 시체들이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와 가축 사체와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 역시 이 끔찍한 지옥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집 속으로 도망쳐 숨어있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리라. 사람의 시체…, 좀비라 불리는 그들 역시 월터 일행이 서 있는 성벽 아래에서 가축들의 사체들처럼 우왕좌왕하고 있는 걸 보면, 지성은 없는 모양이다.

한참 언데드들을 바라보던 라디아가 월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야. 건조한 사막은 부정한 기운이 모이기에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거든. 그걸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저것들을 성 밖으로 풀어놓는 거지.”

“풀어놓다니?”

“성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자신들의 양식이 되는 부정한 기운이 더욱 짙은 곳을 찾아갈 거야. 만약 이곳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거라면 여기에 남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부정한 기운이 더욱 강한 곳을 향해 이동을 시작하겠지.”

“그럼 라디아는 부정한 기운의 근원이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얼마 전에 지나쳤던 성읍을 생각해 봐. 그곳에서는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며 목을 자르고 있었잖아. 그곳에 비해 여기는 완전히 시체판이고 말이야. 이 괴이한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라디아는 고개를 돌려 남쪽을 보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성문을 열어주면 시체들이 저쪽을 향해 이동할 가능성이 커.”

언데드들을 싹 다 소탕한 다음 성안을 조사해 볼까 생각했던 월터였지만, 라디아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

한참을 구역질하던 파벨은 자신 혼자 겁에 질려 못난 꼴을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입가를 대충 닦은 후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그녀의 온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 딴에는 최대한 숨기려고 했겠지만, 월터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파벨을 힐끗 바라본 월터는 다이아나에게 말했다.

“일단 충분히 휴식부터 취한 후에 성문을 열기로 하자. 저놈들이 얼마나 멀리 갈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야.”

여기까지 말하던 월터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급히 말을 덧붙였다.

“참, 저런 언데드들이 활동하기 좋아하는 시간대가 따로 있나? 언데드들은 음침하고 습기 찬 그런 환경을 좋아한다는 얘기는 들었던 거 같은데…”

“그런 건 없는 걸로 알고 있어. 그리고 음침하고 습기 찬 환경이라는 것도, 그런 곳이 부정한 기운이 모이기 쉬운 곳이기에 그런 것이고, 부정한 기운만 있다면, 여기처럼 열사의 사막이라도 언데드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흠, 그렇다면 라디아는 이 참극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 설마 마왕이라도 강림하려는 건가?”

아니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젓던 라디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그럴 리가…………… 그것보다는 누군가가 몹쓸 장난을 치고 있다고 보는 게 옳겠지. 강력한 신성력(神聖力)을 지닌 아티펙트(Artifact)를 통해 광대한 성역(聖域)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

라디아의 말에 월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의문을 제기했다.

“신성력? 이런 말도 안 되는 부정한 기운이?”

월터의 의문에 파벨이 옆에서 슬쩍 끼어들었다.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면 백마법과 흑마법 역시 한 갈래에서 갈라진 거예요.”

“또! 또! 존댓말!”

다이아나의 지적에 파벨은 찔끔해 하며 황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 죄송……. 아, 아니 미안해.”

“파벨은 우리가 함께 다니기로 한 조건을 자꾸 잊어버리는 거 같아. 조심해. 그건 그렇고 계속 말해 봐.”

“백마법과 흑마법은 둘 다 신적 존재로부터 그 능력을 받아 권능을 행사하는 거야. 한쪽은 신, 또 한쪽은 마신 대상만 다를 뿐이지 신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사용한다는 건 똑같아. 그런 이유 때문에 두 마법은 우리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마법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거야.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마나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이거든.”

“그, 그랬군……………. 몰랐어.”

월터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신성 아르곤 제국의 성기사가 그토록 막강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탄에만 탑승하면 젬병이었던 거구나. 그리고 아르곤에서 마법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타이탄을 제작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러니까 백마법으로 가능하다고 하면 흑마법으로도 가능할 거라는 얘기지?”

“이렇게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성역으로 만들려면 얼마나 엄청난 아티펙트가 필요한 걸까?”

“꼭 한 개라는 법은 없지. 어쨌거나 이 얘기는 그만하자. 나도 그쪽으로는 더 이상 아는 것도 없고 말이야.”

“그래, 우선 식사부터 하자고. 이번 추적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지 알 수가 없으니, 든든하게 먹어놓고 시작해야지.”

하루 동안 푹 휴식을 취한 월터 일행은 든든하게 식사까지 마친 후에야 행동을 시작했다.

오후 4시쯤이었기에 뜨거운 열기는 한풀 꺾인 시간이다.

모두들 멀찌감치 떨어져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월터 혼자 성으로 달려가 성문을 활짝 열었다.

성문을 열자마자 월터도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내빼버렸기에, 언데드들은 생명의 기척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한동안 돌아다녔음에도 생명체의 기운을 감지할 수가 없자, 수색을 포기한 언데드들이 성 밖으로 빠져나와 동쪽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라디아의 말대로 자신들의 양식인 부정한 기운이 강한 곳을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언데드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그들의 예상과 달리 동쪽이었다.

도시국가가 있는 동남쪽으로 갈 거라 예상했었는데……………

“어라? 동쪽으로 가네.”

“그렇다면 이 짓을 한 범인은 도시국가가 아니라는 소리네. 시체들이 알카사스 쪽으로 가는 거 보니, 범인은 알카사스가 틀림없어.” 월터의 말에 파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것들이 동쪽으로 간다고 해서 알카사스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가 없어. 사막을 언데드 소굴로 만들어 놓으면 더 이상 사막을 통한 무역은 불가능해져. 그렇게 되면 그 이익은 고스란히 도시국가들이 차지하게 되지 않겠어? 그런 이유로 나는 도시국가가 이 사태의 범인일 거라 생각해.”

그러자 라디아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봐. 만약 사막이 언데드 소굴이 되면 도시국가들도 무사할 수가 없거든. 그리고 그들이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드래곤들이 알게 되면 되레 드래곤들에게 멸망당할 수도 있어. 아니면 버림받거나.”

라디아의 주장에 파벨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으니까.

“맞아, 드래곤은 사악한 것을 싫어하니까.”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대적이 불가능한 마왕 강림을 지금껏 모두 해결한 것은 드래곤들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지만, 드래곤이 사악한 것을 싫어해서 그렇게 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드래곤과 마왕이 싸우게 된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다 보니 드래곤은 사악한 것을 싫어한다고 사람들은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다이아나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드래곤에게 영문도 모르고 묵사발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던 그 끔찍한 기억. 그리고 아빠와 엄마가 나누는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에 대한 추억담(?)을 우연히 엿듣기도 했었는데, 그건 공명정대하고 위대한 이라는 단어와는 아예 거리가 먼 존재였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이 사실을 여기에서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동료지만 월터는 코린트 제국의 근위기사다. 적국의 기사에게 자신들의 수호룡(?)에 얽힌 뒷얘기를 들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타국에서는 모두들 치레아 공국이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줄 알고 감히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라디아의 말이 맞아. 아직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야. 괜히 선입견을 가져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어.”

그런 다이아나의 말에 월터가 반박했다.

“섣부른 예단이 아니야, 셀리나, 기후 조건으로 봤을 때, 언데드가 발생하기에 가장 힘들다고 할 수 있는 사막에서 언데드가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잖아. 만약 라디아의 말대로 이게 아티펙트로 인한 거라면, 그런 무시무시한 권능을 지닌 아티펙트의 가치 또한 엄청난 것이겠지? 그런 아티펙트를 한두 개도 아닌 대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나라는 이 근처에서 알카사스밖에 없어.”

물론, 이건 월터의 개인적인 감정이 듬뿍 실린 의견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알카사스와는 감정이 안좋았으니까.

“흐음…, 월터의 말대로 알카사스가 가장 의심스럽긴 하지. 이동 방향도 그렇고.

여기까지 말하던 다이아나는 다시 라디아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알카사스 정도면 이런 아티펙트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을까?”

라디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이건 마법과는 계통이 아예 달라. 하지만 알카사스의 풍부한 재력이라면 어딘가에서 구입해 올 수는 있겠지.”

“이런 아티펙트를 만들 수 있는 국가는?”

“동쪽 대륙에서는 아르곤 제국…..”

라디아의 말에 월터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잠깐! 신성 아르곤 제국은 흑마법이 아니라 백마법이잖아.”

“그건 나도 잘 알아. 아르곤 제국이 얼마나 흑마법을 증오하고 있는지 말이야.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흑마법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과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도 아르곤이야.”

그제서야 라디아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를 깨닫고 월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호오, 그러니까 그 지식을 이용해서 이런 아티펙트를 제작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소리지?”

“맞아. 그동안 축적된 방대한 지식으로 만들던지, 아니면 흑마법사들을 잡아다가 만들던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라디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동쪽 대륙에는 아르곤 제국 말고는 이 정도 아티펙트를 제작할 능력을 지닌 사람이나 나라가 없어. 마도대전 이후로 흑마법사들을 철저하게 없애버렸으니까. 하지만 서쪽 대륙은 얘기가 다르지. 내 생각에는 서쪽 대륙에서 이 아티펙트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커. 그리고 이런 아티펙트의 가격은 엄청나게 고가일 테니, 그걸 사들여서 여기에 사용한 건 아주 재정이 넉넉한 나라일 거라는 것도 유추해 볼 수 있겠지. 아니면 서쪽 대륙에서 엿 먹어라 하는 심보로 이런 사단을 벌인 것일 수도 있고.”

“어쨌거나 계속 따라가 보자. 시체들이 어디로 가는 건지, 저것들의 뒤를 쫓다 보면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겠어? 그놈의 아티펙트인지 뭔지………….”

월터 일행은 언데드들이 자신의 기척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멀찌감치 거리를 벌린 상태로 그 뒤를 쫓았다.

공격할 때는 제법 재빠른 움직임을 보였던 언데드들이었지만, 이동할 때는 아주 느릿하게 천천히 움직였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네. 언데드가 어떤 건지 얘기는 들었지만, 어떻게 저런 상태로 움직일 수가 있는 거지? 부패 상태를 보면 근육은 오래전에 제 기능을 상실했을 텐데 말이야.”

파벨의 의문에 라디아가 대답해줬다. 다른 사람들은 언데드에 대해서 거의 그렇다 하더라 정도밖에 아는 게 없었으니까.

“부정한 기운(대개 흑마법)에 오염된 시체 혹은 뼈가 언데드가 되잖아? 근육이나 살점이 붙어있는 경우에는 좀비, 뼈만 남아있는 경우에는 스켈레톤이라고 부르지만 어쨌든 둘 다 언데드야. 결론은 언데드에게는 근육이 있든 없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 저들이 움직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생명체로부터 뺏은 생명력과 부정한 기운이거든.”

“그래서 가만히 있다가 우리들이 나타나자 움직이기 시작한 거구나? 우리들의 생명력을 뺏으려고.”

“그런 거지. 하지만 우리들이 사라졌으니, 저들은 또 다른 힘의 원천인 부정한 기운을 찾아 움직이고 있는 거야.”

“아까 성읍에는 부정한 기운이 없었을까?”

“있었으니 저것들이 생존하고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저들은 본능적으로 더욱 많은 부정한 기운을 원해. 아마 저들이 가고 있는 저쪽 방향에 뭔가가 있을 거야. 저들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든 뭔가가………….”

파벨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는 태양을 힐끗 바라본 다음 중얼거렸다.

“최대한 빨리 찾을 수 있으면 좋겠네. 저 느릿느릿한 굼벵이 같은 것들을 쫓기 위해 이 뜨거운 태양 빛에 온몸이 익어가는 건 정말 싫어.”

월터의 기지로 하루 푹 쉬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모두 밀려드는 잠과 싸우며 시체들의 뒤를 쫓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언데드들의 저 느릿한 움직임으로 봤을 때, 이 미행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될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