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6권 15화 – 베이라 성 기습 작전

베이라 성 기습 작전

페가수스 용병단은 낮에는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쉬고, 밤에만 이동했다. 뜨거운 태양 빛을 피해 체력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은밀하게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홉킨스는 지도를 잘 살펴보고, 성읍 근처로는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원주민과 접촉하게 되면 자신들의 행적이 발각되지 않도록 무조건 죽여버리라는 명령까지 부하들에게 하달해 둔 상태였다. 다행이라면, 사막 성읍들은 서로 꽤 넓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건설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주변에서 거둬들일 수 있는 자원의 양도 빈약할뿐더러, 성읍은 필연적으로 물을 얻을 수 있는 위치에 건설해야 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페가수스 용병단은 성읍과 성읍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막 깊숙이 숨어들어 갈 수가 있었다.

베이라 성은 과거 알카사스 부족연합에서 방어거점으로 만든 성들 중 하나로, 진흙벽돌로 만들어진 허접스럽기 짝이 없는 전형적인 사막 성읍들과 달리 석벽으로 제대로 축조된 성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알카사스 부족연합이 이 일대에서 철수할 때, 성에 설치되어 있던 마법진을 해체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만약 마법진이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었다면 홉킨스는 절대로 이런 무모한 작전을 감행하지 않았으리라.

마법진으로 보호되는 막강한 성벽은 타이탄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뚫고 들어가는 게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베이라 성 인근에 도착한 홉킨스는 부하들에게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한 후, 휘하 대대장들과 마법사들만을 거느리고 정찰을 나섰다. 그가 이번 작전에 지원받은 마법사는 모두 여섯 명이다.

그 때문에 자신의 직속으로 한 명을 두고, 나머지는 각 대대장들에게 붙여 두고 있었다. 통신기로 쓰기 위해서.

아직 자신들에게 위험이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 푹~ 놓고 있을 때 기습하면 손쉽게 성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는 홉킨스의 기대와는 달리 베이라 성의 경계 상태는 삼엄했다.

어떤 놈이 성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경계심이 많은 성격인 모양이다.

커다란 성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옆에 있는 작은 쪽문만이 열려있어 그곳으로만 사람과 가축들이 드나들고 있다.

높게 솟은 망루에는 꽤 많은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성문을 향해 공격해 들어오는 적들을 향해 화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는 보루(堡壘)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들어있을지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렇듯 삼엄한 경계 태세로 봤을 때 보루가 비어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했다.

“썩을! 주변이 이렇게 탁 트여있는데, 누가 쳐들어온다고 경계 태세가 이렇게 좋아?”

사실, 베이라 성의 경계 태세가 강화되어 있는 건 알카사스와는 전혀 무관했다. 최근 들어 사막 쪽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보니 그 때문에 경계가 강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홉킨스 일행이 알 리가 없다 보니, 자신들 때문이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베이라 성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수석대대장 스미스가 입을 열었다.

“저런 상태라면 기습은 불가능합니다, 연대장님.”

홉킨스는 인상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수립한 작전은 적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기습하여 성문에다 아이템을 설치한 뒤 폭파시켜 문을 뚫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성벽 위에서 쏴대는 공격에 기습하는 부하들이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위험이 있긴 했지만, 적이 방심하고 있다면 그리 큰 피해 없이 점령이 가능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과는 경계 태세가 너무 달랐다. 저 정도로 경계가 철저하다면, 아무리 전격적으로 기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개활지를 건너 성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멸당할 가능성이 컸다.

설혹,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작전을 성공시켜 성문을 뚫고 들어간다고 해도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할 게 뻔했다. 페가수스 용병단의 병력은 고작 천 명 남짓, 성문 하나 점령하겠다고 무리하다 병력 손실이 커지면 오히려 이쪽이 베이라 성의 반격에 전멸당할 가능성이 컸다.

“대상(隊商)으로 위장해서 접근하면 어떻겠습니까?”

한참을 고심하던 미하엘이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계책 하나를 제안해 봤지만 다른 대대장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들의 행색을 좀 봐라. 과연 상인으로 위장이 가능한 몰골들인지…………?”

“뭔가 팔 만한 상품으로 위장할 만한 물건도 없잖아.”

“천 명이나 되는 중무장한 떼거리가 나타났는데, 너 같으면 상인이라고 믿겠냐?”

대대장들의 말을 듣고 있던 홉킨스의 시선이 좋은 생각이 없냐는 듯 마법사들로 향했다.

마법사들의 두뇌가 뛰어나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마법사들인 만큼 뭔가 획기적인 방법이나 마법으로 이 난관을 돌파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홉킨스는 자신의 직속마법사인 펜달을 향해 입을 열었다.

“펜달,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펜달은 홉킨스보다 열 살쯤 나이가 많은 마법사였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마법사들 중에서 그가 가장 나이가 많았기에 홉킨스의 직속 통신기로 선택되었다.

경험 많고 노련한 마법사인 만큼 홉킨스는 펜달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청하고 있었다.

“아주 튼튼하게 잘 축성해 놓은 성곽이야. 유일한 단점이라면 방어 마법진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거지. 내가 알기로는 공성병기는 가져오지 않은 걸로 아는데, 뭔가 준비해온 게 있나?”

이동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공성병기를 보지 못했기에 묻는 것이다.

펜달의 질문에 홉킨스는 씨익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번 작전을 위해 단장님께 말해서 특별히 웜 킬러(Worm Killer)를 받아왔지.”

웜 킬러는 샌드웜(Sand Worm)이나 록 웜(Rock Worm) 같은 초대형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폭발형

마법아이템이다.

웜 종류의 몬스터는 외갑이 금속성으로 워낙 단단해서 전투도끼로 찍어도 흠집조차 내기 힘들었다. 거기에다가 웜 종류는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숨을 수도 있었기에 집중공격을 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된 게 바로 웜 킬러였다.

웜에게 먹일 수만 있다면, 강력한 폭발력으로 웜을 확실하게 처치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튼튼한 금속성 외피를 몸에 두르고 있다 해도 몸 안에서 터져나오는 폭발에 버틸 수는 없을 테니까.

홉킨스가 웜 킬러를 가져온 이유는 뻔했다. 그 강력한 폭발력을 이용해 성문을 파괴하고 들어가겠다는 것이리라.

“흠, 적에게 들키지 않고 성문 앞까지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가 관건이로군.”

“바로 그거야. 뭔가 방법이 없겠나?”

펜달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난감한 듯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베이라 성 주변은 탁 트인 평지다.

사막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키 작은 관목들과 억센 풀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을 뿐이다.

성 위로 높게 솟아있는 전망탑에서 바라보면 10킬로미터 밖의 움직임까지도 훤히 보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두 명도 아니고 천 명이 움직이는 걸 숨겨야 하는데, 통신기로나 쓰이고 있는 저급 마법사들의 능력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물론 천 명이 동시에 움직이지 않고 극소수의 공격조만 투입한다면 침투, 폭파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파괴된 성문을 적들이 복구하게 된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모두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고심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마법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대책 회의에는 관심이 없는 듯 그저 사막 저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뭔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눈에 확 띄는 붉은 머리카락, 단장에게서 얘기를 들었던 바로 그 마법사였다. 가급적 그를 쓰지 말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를 외면하기에는 힘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홉킨스는 그를 불렀다.

“자네, 랄프 디겔이라고 했나?”

그러자 천천히 시선을 돌려 홉킨스를 바라보는 사내, 마치 조각을 한 듯한 아름다운 얼굴이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자네 표정을 보니 뭔가 방법이 있어 보이는군.”

여유로운 표정의 랄프 디겔을 보자 어쩌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홉킨스는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차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아르티어스의 대답에 홉킨스는 하마터면 발작할 뻔했다.

감히 지금처럼 중요한 회의 중에 딴생각이라니! 딴 놈 같았으면 가죽을 벗겨 뜨거운 사막 위에 던져놨겠지만, 그는 애써 참았다. 단장의 당부가 떠오른 탓이다.

홉킨스는 화를 억누르며 방금 전에 했던 얘기를 반복해 아르티어스에게 들려줬다. 그리고 분노어린 눈빛으로 아르티어스를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자네라면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중요한 회의 중에 딴생각을 하고 있을 리가 없겠지. 안 그런가?”

당장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홉킨스가 그냥 넘어갈 리 없다는 것을 좌중의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분노한 홉킨스 앞에서도 디겔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뭔가 대책이 있는 걸까?

아르티어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쓱 넘기며 홉킨스를 향해 말했다.

“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아르티어스의 태연한 말투에 속이 뒤집힌 건 다른 마법사들이었다.

그들도 디겔이 대지마법 쪽 전문이라는 소문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상태였다.

대지마법은 다른 마법사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분야였다. 그런 되먹지도 않은 마법으로 고블린 킬러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것만 해도 속이 뒤틀리는데, 그 조그만 명성을 믿고 저렇게 오만하게 나오다니.

이렇게 되면 여기 있는 지휘관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펜달이 다른 모든 마법사를 대표해서 아르티어스를 향해 이죽거렸다.

“흥! 자네는 그까짓 알량한 대지마법으로 저 단단한 성벽을 부술 수 있다는 건가?”

아르티어스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내 능력으로 성벽을 부술 수는 없지요. 그것도 저렇게 튼튼한 성벽은 말이죠.”

아르티어스의 말에 뭔가 느낀 듯 홉킨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부술 수는 없다고 했지만, 뭔가 방법이 있다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이다.

“그럼 성벽까지 들키지 않고 지하 터널이라도 팔 수 있다는 건가?”

“아닙니다. 이럴 때는 대지마법보다 환영(幻影)마법이 쓸만하죠. 그걸로 경계병들의 시야를 가리면 되니까요.”

환영마법은 대지마법보다도 더 인기가 없는 마법이었다.

남들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된 환영을 만들기도 어려웠고, 그 정도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얻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 너무나도 신통찮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딴 마법을 익히는 쪽이 훨씬 나았다.

“자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병사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천 명이란 말이야.”

아르티어스를 매섭게 꾸짖은 펜달은 홉킨스에게로 시선을 돌려 거침없이 단언했다.

“저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하지만 홉킨스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지금까지 방법이 있다며 대안을 말한 마법사는 그가 유일했으니까.

“환영마법으로 그게 가능하긴 한가? 펜달의 말대로 천 명씩이나 되는 대병력을 감춰야 하는데?”

“훤한 대낮이라면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야음을 틈타 움직인다면 그리 고난도의 환영마법이 아니더라도 경계병들의 눈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성벽에서 사오십 미터 근처까지 접근한다면 혹 발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아르티어스의 말에 충분히 가능성을 엿본 홉킨스의 분노는 이미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회의 중에 딴짓을 해도 될 만큼의 유능한 마법사였으니까.

홉킨스는 아르티어스의 두 손을 덥석 붙잡으며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물론이지. 그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어도 충분해. 부탁하네. 자네 어깨에 이번 작전의 성패가 달려있으니 말일세.” “참. 대원들에게 가급적 금속성 빛이 노출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검정 천으로 몸을 감고, 병장기는 그을음을 묻혀 빛이 반사되지 않도록 하고 말입니다. 환영마법은 적의 시야만 혼란시킬 수 있을 뿐, 소리는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소리가 날 만한 것들은 최대한 막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핫핫, 걱정하지 말게. 내가 지금껏 야습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니,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도록 확실하게 준비하지. 그럼 자네만 믿겠네. 이봐, 뭐 하고들 있나! 빨리빨리 대원들에게 방금 들은 대로 철저하게 준비를 시켜!”

그러자 약이 바짝 오른 펜달은 아르티어스에게 으르렁거렸다.

“만약 실패하기만 해봐. 이 바닥에는 아예 발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마.”

아르티어스는 맞받아치는 대신 어깨만 으쓱한 다음 홉킨스 연대장 일행을 뒤따라 걸어가 버렸다.

저런 송사리하고는 싸울 의욕조차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야음을 틈탄 기습이긴 했지만, 오늘 밤은 야습하기에 그리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두 개의 달 중에 큰 달이 밤하늘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홉킨스는 위장에 더욱 만전을 기하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시작해!”

홉킨스의 지시에 따라 아르티어스가 마법을 구사하여 용병들의 앞을 어두운 사막의 환영으로 가려 버렸다.

마법으로 가릴 수 있는 면적에 한계가 있기에 될 수 있으면 종대를 유지하여, 환영마법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다.

용병들에게는 저급 환영마법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아르티어스가 사용한 건 5싸이클급이었다.

이 정도라면 성 앞 10미터까지 접근해 들어가도 경계병들이 이쪽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됐습니다.”

홉킨스는 긴장 어린 시선으로 저 멀리 보이는 성벽 위를 바라봤다.

성벽 위 여기저기에는 횃불이 밝혀져 있었고, 수많은 병사들이 예리한 눈빛으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무리 밤중이라고 하지만 달빛까지 훤히 비추고 있는 상황이라 이 많은 병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곧바로 경계병들의 시야에 잡힐 것이다.

홉킨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흑갈색의 조잡한 환상.

이 환상이 성벽 위의 경비병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홉킨스로서는 짐작하기조차 힘들었다.

이것만 믿고 전진해도 될까? 하는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디겔의 능력을 믿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마음을 굳힌 홉킨스는 손을 번쩍 들었다가 앞으로 쭉 내뻗으며 낮지만 절도 있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진격!”

그의 명령에 따라 각 대대장들이 부하들을 이끌며 앞으로 나섰다.

“각 중대 전진! 최대한 소음을 줄여라. 각 중대장들은 환영 밖으로 대원들이 나가지 않도록 잘 살펴봐라!” 환영마법의 중심축인 아르티어스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감에 따라 환영도 앞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그 환영 뒤에 숨어 숨조차 죽이고 전진을 시작했다.

성벽 위에 경계병들이 득실거렸기에 만약 발각이라도 되는 순간 전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아무리 환영마법으로 앞을 가리고 간다고는 하지만 이건 보통 용기를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성 주변이 모래 사막인 만큼, 발소리가 날 걱정이 없어 좋았다.

환영마법으로 이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일말의 의구심 때문에 용병들은 모두 방패로 자신의 앞을 철저히 가리며 걸었다. 발각됨과 동시에 성 위에서 우박처럼 화살비가 쏟아지게 될 거라는 걸 모두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천천히 접근하다 보니 어느덧 100여 미터 앞까지 다가섰다.

용병들 모두 바짝 긴장한 탓인지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성벽 위 여기저기에 횃불이 밝혀져 있었기에, 경계를 서고 있는 적병들의 표정까지도 훤히 보였다.

그들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아직 이쪽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100미터 정도의 거리라면 돌격해 들어가도 충분하다.

하지만 홉킨스는 섣부른 돌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여기서 돌격해 봐야 곧바로 성벽에 가로막히게 되기에 그 부분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돌격은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홉킨스는 긴장감에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더욱 거리를 좁혀나갔다.

아르티어스가 50여 미터까지는 괜찮다고 했으니, 좀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발 그리고 또 한발…………….

어느 순간 홉킨스의 손이 위로 번쩍 들렸다.

그 수신호에 따라 부하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부대별로 돌격 진형을 갖추었다.

달빛이 밝은 상황에서 이토록 성벽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는 홉킨스의 시선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아르티어스의 마법적 능력만으로도 홉킨스가 수립할 수 있는 작전의 폭은 더욱 넓어지게 된다.

‘크흐흣, 앞으로 가능하면 옆에 꼭 끼고 다녀야겠군. 뺀질뺀질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제법 재능이 있어. 에구, 귀여운 놈.’ 홉킨스는 시선을 돌려 최선두에서 자신의 수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공격조를 바라봤다.

공격조를 이끄는 건, 가장 위험한 이번 임무를 자원한 신참 중대장이었다.

얼마 전에 붉은전갈 용병단의 연대장을 벴다고 하는 놀라운 무용의 소유자였기에, 그가 눈여겨보고 있는 부하들 중 하나였다. 홉킨스는 손으로 그 중대장을 가리킨 후 성문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시작하라는 신호다.

공격을 개시하라는 신호를 받은 브로마네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천천히 앞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 중 경험이 풍부한 네 명만을 성문 파괴 임무에 차출시켰다.

은밀하게 접근해야 하는 만큼, 부하들 전원을 데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의 실력을 뻔히 알고 있는 브로마네스였기에 그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성벽 위쪽에서 경비병들이 삼엄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브로마네스의 뒤를 따르고 있는 부하들은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 거리가 가까운데, 경비병들이 아직 자신들의 움직임을 모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부하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브로마네스의 뒤를 따랐다.

어차피 적들은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포복을 해서 움직이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서서 천천히 움직이는 쪽이 오히려 적들의 시야에 잡히는 면적이 적다.

성벽과의 거리가 가까우니만큼, 적들이 이쪽의 움직임을 포착하기만 한다면 바로 죽은 목숨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혀 긴장하지 않고 거침없이 걸어가는 브로마네스의 담대함에 뒤따르는 부하들 모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르티어스의 마법 실력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오해였다.

아르티어스가 펼친 환영마법은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성벽 10미터 정도까지는 접근해도 적들이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마법이었던 것이다.

모두의 손에 땀이 흥건하게 배일 정도로 긴장해서 바라보는 가운데, 공격조는 성문 앞 20미터 앞까지 접근했다.

좀 더 성벽 가까이 접근했으면 좋겠지만, 저급 환영마법으로 그 이상 가겠다고 우기는 건 아르티어스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사실 지금 이 정도 거리까지 온 것만 해도 저급 환영마법으로는 너무 과할 정도였다.

브로마네스가 방패를 천천히 머리 위로 올리자 뒤따르던 부하들도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방패를 들어 머리 위로 올렸다. 이제 곧이어 돌격 명령이 떨어질 것이니까.

“돌격!”

이제부터는 적이 눈치채기 전에 성문 앞에 바짝 달라붙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부하들은 머리 위로 방패를 든 채 브로마네스의 뒤를 따라 성문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앗! 저, 저거 뭐야?”

“누군가 성문 앞에 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성벽 위 경계병들이 뒤늦게 이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건 환영마법에 감춰진 윤곽인 데다, 어둠 속이라 제대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들이 적의 공격이라는 것을 확신한 건 브로마네스와 그 부하들이 성문 바로 코앞까지 접근한 이후였다. 성문 위에 설치해 놓은 쇠종이 요란한 경보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땡땡땡땡땡

“적이다!”

“쏴라!”

콰콰콰쾅!

경비병들이 접근해 오는 적들을 향해 다급히 화살을 날리기도 전에 엄청난 폭발음이 울리며 성문이 산산조각 터져나갔다. 베이라 성 경비병들 입장에서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기습!

성문이 박살 나자마자 마치 땅 밑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한 듯 수많은 적들이 뚫린 성문을 향해 달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대의 최선두에 서 있던 미하엘이 칼을 뽑아 들고 휘하 대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대대 돌격!”

“우와아아!!”

35대대를 선두로 해서 페가수스 용병단원들은 모두 성안으로 돌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선두에는 공명심에 눈이 먼 브로마네스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애검을 마구 휘두르며 호탕하게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핫, 다 죽었어!!”

“적이다!”

“누가 공격해 온 것이냐?”

외성(外城) 쪽 경비병들이 부르짖은 적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내성(內城)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병사들은 규정대로 재빨리 내성 성문부터 바로 닫았다.

내성 안에 거주하고 있는 성주와 그 가족들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외성벽이 일반인들을 외적이나 몬스터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벽이라면, 내성벽은 성내의 핵심 인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벽이다.

외성벽에 비해 훨씬 더 두께와 강도가 뛰어났고, 정예병력이 배치되어 있어 점령하기가 한층 까다롭다.

홉킨스로부터 지시를 받은 미하엘은 휘하 대대를 이끌고 미친 듯이 내성을 향해 돌격했다.

선두에서 브로마네스가 놀라운 무용을 발휘하며 뚫고 나갔지만, 아쉽게도 내성 성문은 이미 굳게 닫혀버린 후였다.

“젠장!”

35대대 병력만으로 공성전은 아예 불가능했다. 게다가 공성장비조차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미하엘은 내성을 공격하는 시늉도 해보지 못하고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부하들을 후퇴시킬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대신 내성의 병력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걸 대비해서 튼튼하게 바리케이드를 쌓고 방어전에 돌입했다.

35대대가 내성 입구를 확실히 틀어막고 있는 동안, 다른 대대들은 흩어져 외성에 주둔하고 있던 적병들을 소탕해 나갔다.

외성에는 거의 3천에 달하는 병력이 있었지만, 전혀 상상치도 못한 급작스런 야습에 제대로 무기조차 들지 못하고 뛰쳐나오다 제대로 저항다운 저항조차 못 해보고 하나둘씩 각개격파당해 버렸다.

일부 주민들 중에서 용병들을 향해 무기들 들고 적의를 드러내는 자들도 몇몇 있긴 했지만, 용병들은 그들을 철저하게

짓밟아버렸다.

그들의 행동을 어설프게 처리했다가 자칫 주민들 전체가 일어선다면 큰일이었기에, 아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잔인하게 짓밟아버렸던 것이다.

알카사스 왕국의 10대 용병단에 꼽히는 만큼, 페가수스 용병단원들의 전투력은 놀라웠다.

베이라 성의 외성 주둔군을 싹 쓸어버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홉킨스는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외성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고, 급한 대로 자신의 직속인 스미스의 22대대만을 이끌고 미하엘이 있는 내성 쪽으로 달려왔다.

일단 내성에서 적병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던 35대대의 미하엘 대대장을 치하한 후 내성 쪽을 자세히

살펴본 홉킨스는 혀를 내둘렀다.

예상보다 훨씬 더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안에 적병이 얼마나 있는지는 알아냈나?”

홉킨스의 질문에 미하엘이 즉각 대답했다.

“포로들을 심문해 본 결과, 내성 주둔군은 약 2천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2천이라…….”

지금처럼 전격적인 기습이라면 몰라도, 정면대결로는 천하의 페가수스 용병단이라고 할지라도 점령은 거의 불가능했다.

공성장비도 전혀 없고, 병력의 수도 적병이 2배 이상 많다. 게다가 적들은 내성벽에 의지하여 싸울 수 있으니 몇 배나 불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홉킨스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지 태연한 표정이었다.

원래 이번 전투에서 용병단이 맡은 임무가 바로 베이라 성의 성주를 압박해 도시국가연합에 구원을 요청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굳이 내성을 점령한다고 피를 흘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홉킨스는 미하엘과 스미스를 보고 지시했다.

“일단 여기를 단단히 틀어막고 있어라. 그러면 다른 대대가 교대하러 올 거야. 그들에게 수비 임무를 넘긴 뒤 자네들도 알아서 한몫 두둑이 챙기도록 하게.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기 힘들다는 거 명심하고.”

금은보화가 가득 쌓여있을 내성을 털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지만, 점령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미련은 빨리 털어버리고, 해야 할 일부터 해야 했다. 철수하라는 변경백 쪽의 명령이 언제 떨어질지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으흐흐! 지금 당장 부호들의 저택부터 수색하기 시작하라고 해! 빨리!”

<묵향> 37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