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6권 8화 – 랄프 디겔의 스승

랄프 디겔의 스승

고블린은 아주 약한 몬스터다. 덩치도 작고 힘도 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열 마리도 안 되는 소수의 무리쯤은 초보 모험가들에게조차도 간단하게 토벌될 정도다.

하지만 이들이 한곳에 자리를 잡고 지하에 거대한 둥지를 구축한 후에는 용병 중대(대략 50명 규모)가 포위망을 구축하고 몇 달에 걸쳐 토벌전을 전개해야만 겨우 박멸이 가능할 정도로 매우 귀찮은 존재가 된다.

페가수스 용병단처럼 강력한 용병단에서조차도 병력의 상당수가 고블린 토벌에 묶여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크처럼 전면전이라도 벌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땅굴을 파고들어간 뒤 어떻게 해서든 결전을 회피하는 교활한 고블린을 상대로는 시간만 엄청나게 낭비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용병단이 될 수 있으면 고블린 토벌 의뢰를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용병길드에서는 임무를 회피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1년에 몇 건을(용병단 규모마다 수행 횟수는 다르다) 고블린 둥지 토벌로 채워 넣지 않으면 다른 의뢰를 받지 못한다는 페널티를 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모두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페가수스 용병단에 찬란한 서광이 비췄으니……………

요즘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다섯 명의 호위병만 거느린 채 단출하게 움직였다.

선행해서 미리 고블린 둥지 근처로 이동한 용병들이 마법진 설치를 위한 사전작업을 끝내놓고 기다리면,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도착한다. 그리고 탐지마법으로 대충 고블린 둥지의 중앙을 확인한 후 그 위치에 마법진을 설치한다. 마법진 설치에 걸리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마법진 설치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 본부에 임무 완료했다는 걸 보고하고, 또 새로운 임무를 하달받기 위해 마법통신을 보낸다.

“이쪽은 끝났습니다.”

「수고했군.」

“새로운 임무는 어딥니까?”

아르티어스의 물음에 본부 쪽 마법사는 일정표를 살펴보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당분간은 일거리가 없으니 본부로 돌아와 대기하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아르티어스는 수정구를 품속에 집어넣은 뒤, 호위 조장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했다.

“본부로 돌아오라는군.”

“이미 준비는 완벽히 끝났습니다, 마법사님.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호위 조장의 얼굴에는 위대한 마법사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했다.

지금껏 용병 생활을 해오며 아르티어스만큼 뛰어난 마법사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대기하라는 걸 보면 한 며칠 휴식을 주려는 모양입니다. 마법사님.”

“근래 강행군을 하셨으니까요.”

“오랜만에 푹 쉴 수 있겠군요.”

호위들이 그런 말을 할 만도 했다.

아르티어스가 이들과 팀을 짠 후 궤멸시킨 고블린 둥지만 해도 벌써 열여섯 개였다. 거의 이틀에 하나 꼴로 박살 내고 다녔다는 말이다.

도시 간의 이동이야 공간이동 마법진을 쓴다고 하지만, 그곳에서 고블린 둥지가 있는 곳까지는 말을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는 척 연기하고 있는 아르티어스였기에 그건 어쩔 수 없는 중노동이었다.

그나마 고블린 둥지들이 마을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빨리 끝낼 수 있었지만, 마을 근처의 고블린 둥지가 다 토벌되고 나면 산속 골짜기에 자리 잡은 둥지들을 없애러 돌아다녀야 하기에 이동에 할애되는 시간은 지금보다 훨씬 더 늘어날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르티어스 일행이 페가수스 용병단 본부로 돌아오는 데는 겨우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공간이동 마법진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다.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호위 조장은 아르티어스를 비롯한 조원들의 통장을 모아서 행정부로 달려갔다. 월급 수령을 하러 간 것이다. 현금을 바로 주는 게 아닌 만큼, 편의를 위해 이렇듯 대리 수령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료를 못 믿겠다면 자신이 직접 행정부로 달려가든지.

그런데 용병단 본부에는 뜻밖에도 아르티어스를 만나고 싶다는 손님이 한 명 와 있었다.

정확하게는 아르티어스가 아니라, 그가 분장한 랄프 디겔을 만나기 위해 온 손님이었지만.

“마법사님의 스승님께서 와 계시답니다.”

“뭐? 내 스승?”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스승이라는 존재를 둬본 적이 없었던 아르티어스였기에 그게 무슨 소린지 이해하는 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랄프 디겔의 스승이 찾아왔다면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르티어스에게는 그 어떤 감흥도 오지 않았다. 예전에 유희하면서 이런 일이야 수도 없이 겪었기에 이골이 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 안 되겠으면 스승이라는 놈을 없애버리면 되지, 하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음에야 무슨 위기감을 느끼겠는가.

아르티어스는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어디에 계신다고 하던가?”

“제가 마법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소식을 전한 호위 조장이 앞장서서 안내하려 했지만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만류했다.

“아니야. 자네도 오랜만에 본부로 돌아왔으니 휴식이 필요할 텐데 그런 수고까지 끼칠 수는 없지. 스승님께서는 어디에 계신다고 하던가? 위치만 말해 주게.”

「붉은 사과라는 여관입니다. 본부 정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위병에게 물어보시면 바로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나는 오랜만에 스승님을 뵙고 와야겠군. 혹시 누군가 나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전해주게.”

“예, 마법사님. 좋은 시간 보내십쇼.”

찾는 사람이 왔다는 전갈을 받고는 2층 계단에서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다가 자신을 보자마자 실망감 어린 표정을 짓는 늙은 노마법사.

겉모습만 봐서는 70세쯤 되어 보였는데, 마법사들의 장수하는 특성으로 미뤄보아 진짜 나이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페가수스 용병단에서 나온 사람인가?”

행여 제자의 소식을 가져온 사람인가 싶어 노마법사의 목소리에는 깊은 기대감이 묻어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랄프 디겔이라는 이름만 도용하고 있을 뿐, 간 크게도 그의 모습은 전혀 모방하지 않았다.

생김새가 신분증과 다르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상대에게 여자에게 인기 좀 얻으려고 마법으로 얼굴 좀 바꾸고, 머리카락 색깔은 눈에 확 띄는 색으로 염색했다고 우겼을 뿐이다.

마법사가 얼굴 모양 바꾸는 건 흔한 일이었고, 머리카락 색 또한 염색 외에는 답이 없는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었기에 상대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었다.

그런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옛 제자를 떠올린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 랄프 디겔의 스승이시죠?”

“그렇다네.”

“제자분의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순간 노마법사의 얼굴에 환한 생기가 떠올랐다.

“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잠시 어디 조용한 데서 얘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내 정신 좀 보게. 자, 내 방으로 가세.”

방으로 올라가기 전, 노마법사는 식당도 겸하고 있는 여관주인에게 손님에게 대접할 차를 자신의 방으로 가져다 달라며 주문하는 걸 잊지 않았다.

노마법사가 묵고 있는 방에는 손님을 접대할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가 빌린 2층의 방은 아주 작았다. 여비는 넉넉하게 남아있었지만, 이 지역이 용병들과 얽혀 움직이는 상권이었던 만큼 이런 작은 방밖에 구할 수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온 노마법사는 손님에게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권하고, 자신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노마법사의 얼굴에는 한시라도 빨리 제자의 소식을 듣고 싶다는 간절함이 묻어있었다.

“그래, 전할 말이라는 게 뭔가?”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대답은 노마법사가 간절히 바라던 소식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았던 아래층에서는 꽤나 공손한 태도를 취했던 아르티어스였지만 자리에 앉는 순간 그 분위기는 돌변해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질책하듯 말했다.

“제자가 죽은 지 벌써 8개월이나 지난 걸로 아는데, 아직까지도 그걸 모르고 있었나?”

기대감으로 잔뜩 상기되어 있던 노마법사의 얼굴이 일순 새파랗게 질리는 것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었다.

“아,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 내가 죽인 건 아니니까. 랄프 디겔의 신분증을 나에게 건네준 녀석들은 그가 8개월쯤 전, 미스티라에서 죽었다고 하더군.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는 듣지 못했어. 관심도 없었고, 어쨌거나 그 신분증이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나한테로 들어온 거지.”

여기까지 말한 아르티어스는 손가락을 딱 하고 가볍게 튕겼다.

그와 동시에 노마법사가 은밀히 구동하고 있던 마법이 해제되어 버렸다.

기습을 위해 위력은 약해도 최대한 빨리 구동시킬 수 있는 마법을 구사하려 했지만, 노마법사의 주변에는 이로 인해 적잖은 마나가 응집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응집되어 있던 마나들을 손가락을 튕김으로써 간단히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이건 노마법사가 지금껏 알고 있던 마법지식으로는 있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력한 존재였다. 새파랗게 질려버린 노마법사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아르티어스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마. 널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네 제자가 이미 죽었고, 누군가가 제자를 사칭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쫙 퍼진다고 해도 나는 별 상관없거든. 굳이 살인멸구까지 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는 말이지.”

죽이지 않겠다는 말에 노마법사는 약간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는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은 디겔이 죽었다는 소식은 이미 오래전에 들었었소. 하지만……,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그가 살아있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여기까지 달려온 내 잘못이지요. 녀석이 만약 살아있다면 가장 먼저 나한테 소식부터 전했을 걸 잘 알면서도… 흑흑.”

결국 참지 못하고 노마법사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는 소맷자락으로 급히 눈물을 닦은 뒤 아르티어스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 미안하구려. 녀석이 살아있던 내 마지막 제자였기에……………”

참 지지리 제자 복도 없는 마법사였다. 애써 키운 제자들이 전부 다 스승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버린 걸 보면.

아르티어스는 노마법사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해 주었다.

물론 노마법사를 없애버리는 게 가장 깔끔하긴 하지만, 그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따라서 노마법사를 해치운다면 그 후속 조치로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그런 귀찮음을 없앨 수 있다면 이 정도 수고쯤이야…………

“그냥 팔자려니 생각하게. 아니, 아직 늦지 않았으니 제자를 몇 명 더 키워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

“그러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구려.”

“제자가 살아있다는 소식에 여기까지 단숨에 달려온 거 보면 그리 늙은 것도 아니지.”

노마법사는 문득 아르티어스를 꼼꼼히 살펴봤다. 훤칠한 키에 무척 잘생긴 미남이었다.

물론 상대의 본모습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마법사들은 자신의 얼굴 형태를 마법으로 바꿀 수가 있기 때문이다.

환영마법으로 눈가림을 하는 게 아니라, 근골을 뒤트는 것이기에 6개월 정도만 지나면 뼈가 완전히 굳어버려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그 모습이 유지된다.

그 때문에 마법사치고 미녀나 미남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남자 마법사들은 굳이 미남형을 고집하지 않는다. 여자를 꼬실 때는 좋을지 몰라도, 확 튀는 외모는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모두에게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하기 위해 오랜 시간 마법을 시전해야 하는 마법사에게 있어서 그건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내 삶이 그리 많이 남은 것도 아닌 것 같으니 또다시 제자를 키운다는 건 힘들 것 같고, 대신 내 한 가지 청을 들어줄 수는 없겠소?”

순간 어이가 없어진 아르티어스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소리쳤다.

“왜 내가 당신의 청을 들어줘야 하는데? 지금까지 좋게좋게 대해줬더니 주제를 모르고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오려고 해서는 곤란하지.”

“내 제자의 이름을 도용한 댓가라고 하면 어떻소?”

도용한 댓가라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으며 마치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 호탕하게 말했다. 들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안 들어주면 그만이었으니까.

“좋아. 청이라는 게 뭔지, 일단 들어나 보지.”

“나는 내 제자와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험을 하고 싶었다오. 그 때문에 최선을 다해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걸 전수했었지.” 노마법사가 서두를 떼자마자 아르티어스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지금까지와 달리 노마법사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정중한 말투로.

“스승님의 소원이시라는데 제자가 어찌 외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들어드리죠.”

아르티어스의 돌연한 변화에 노마법사는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정말 괜찮겠소? 나하고 있는 동안에는 나를 스승으로 모셔야 할 텐데?”

아르티어스는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스승님. 제가 꿈에 그리던 완벽한 모험을 겪게 해 드리죠. 자, 일단 제 숙소로 가시죠. 근사한 모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노마법사는 알 리가 없었다. 지금 아르티어스가 마음속으로 얼마나 신나 하고 있는지를.

아르티어스가 용병대에 들어와 지금껏 하고 있었던 게 고블린 사냥이었다. 그것도 알카사스 전역을 부리나케 쫓아다니며 강행군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만약 노마법사가 그를 따라다닌다면 십중팔구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과로사할 게 뻔했다. 아니면 그 전에 모험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던지.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참이었기에 아르티어스에게는 또 다른 유희거리가 생긴 셈이다.

덤으로 노마법사의 오랜 꿈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도.

“이쪽입니다, 스승님.”

아르티어스가 노마법사와 함께 숙소에 도착해 보니, 조원들 모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급 수령을 위해 행정부에 갔던 호위 조장까지도.

조원들이 아르티어스와 함께 숙소로 들어오는 노마법사에 대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가 급조된 스승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이분은 어릴 적 내게 마법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이시다. 내가 여기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함께 모험을 하시고자 오셨으니 잘 모시길 바란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호위들은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짓긴 했지만 어쨌거나 대답은 했다. 하늘 같은 상관의 명령이었으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나는 랄프 디겔의 스승인 리오 프라이스라고 한다네.”

랄프 디겔 같은 하급 마법사 제자들만 배출한 걸 보면 이름이 알려진 실력 있는 마법사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용병들이 유명한 마법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호위들은 존경하는 마법사인 아르티어스를 가르친 그의 스승에게 격식을 갖춰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소개했다.

“저는 호위 조장을 맡고 있는 데리라고 합니다.”

“저는 로이드라고 합니다. 특기는 궁술이죠. 만약 전투가 벌어지면 얼른 제 곁으로 오시면 됩니다.”

뒤따라 롤랑, 말로, 매튜도 자신의 소개를 했다. 그들은 칼과 방패를 함께 사용하는 방어전에 특화된 용병들이었다.

통성명이 끝난 후, 아르티어스는 호위 조장 데리에게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데리는 품속에서 통장을 꺼내 아르티어스에게 건네줬다.

“여기 있습니다, 마법사님.”

별생각 없이 통장을 주머니 속에 넣으려던 아르티어스는 곧이어 생각을 바꿔 통장의 내용을 살펴보는 척했다.

레어 안에 쌓아놓은 수많은 황금들을 생각한다면 이깟 푼돈은 어찌 되어도 상관이 없었지만, 통장의 액수조차 확인하지 않고 그냥 주머니에 넣는다면 주위의 용병들이 그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제대로 계산이 됐나?”

이곳으로 와서 첫 달에 받은 월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블린 사냥을 떠나는 용병 중대와 함께 다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월급은 아르티어스가 호위대만 이끌고 신속하게 이동하며 마법진만 설치하고 다녔기에 전멸시킨 고블린 무리의 숫자 단위부터가 달랐다.

그 숫자는 무려 열여섯.

각 무리당 임무 참가수당과 성공수당이 따로 책정된다.

무리가 열여섯이다 보니 수령액이 워낙 커서 아르티어스의 기본급은 그야말로 새발의 피밖에 되지 않는다.

웬만한 용병이라면 그가 수령한 액수를 보기만 해도 입에 거품을 물것이 분명했지만, 아르티어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수당이 제법 짭짤하긴 하군.”

호위 조장이 급히 행정부에서 들은 말을 전달했다.

“행정부 쪽 말로는 설치하신 마법진들 중에서 세 개가 아직 기동하진 않았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으셨기에 그것까지 포함해서 계산했다고 하더군요.”

아르티어스가 설치한 마법진은 자연의 마나를 흡수하여 그 마력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날씨가 얼마나 좋으냐에 따라 발동에 걸리는 시간차가 아주 컸다.

“제자야, 월급을 얼마나 수령했는지 내가 한 번 살펴봐도 괜찮겠느냐?”

노마법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능청스럽게 연기를 펼쳤다. 두 손으로 공손히 통장을 노마법사에게 건네주며 고개를 숙인 것이다. “물론입니다. 스승님. 이 모든 것이 다 스승님 덕분이니까요.”

통장에 기록되어 있는 액수를 확인한 노마법사의 눈이 일순 휘둥그레져지며 잔경련을 일으켰다.

사실, 어느 정도 실력 있는 마법사라면 그 정도 액수는 그리 큰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삼류 마법사인 그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액수였던 것이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수입은 곧 실력을 말해준다.

자신의 기습공격을 간단히 취소시켜 버리는 걸 보고 상당한 실력자인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게 다 고블린을 때려잡아 번 돈이라는 것을.

“조장, 다음 임무에 대한 얘기는 있었나?”

“아뇨. 아직 후속 임무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대기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얼마나 대기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기회에 푹 쉬시라는 전갈이었습니다.”

“그럼 자네들은 좀 쉬도록 하게. 나는 스승님을 모시고 용병단 본부 안을 구경시켜 드리고 올 테니.”

아르티어스의 말에 호위대 전원이 환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좋은 시간 보내시길 빕니다.”

부하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후, 아르티어스는 노마법사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뭔가 필요한 게 있으셔서 구입하실 때는 제 이름으로 하도록 하십쇼. 방금 전에 확인하셨듯 돈은 꽤 넉넉하니까 말입니다.”

이미 탐색마법으로 주변 확인을 다 했음에도 노마법사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아르티어스에게 속삭였다.

“근처에 아무도 없으니 하는 말인데, 우리 둘만 있을 때는 굳이 스승으로 대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네. 나도 염치가 있지, 어떻게 그것까지 바라겠나.”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 너무 신경 쓰지 마십쇼.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좋으니까요. 대신 함께하는 동안만큼은 최대한 스승님으로 모시겠지만, 하루 종일 옆에 붙어있을 수는 없다는 것만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걱정 말게. 일이 있으면 난 신경 쓰지 말고 언제든 일 보시게.”

“혹시 용병 일은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부끄럽게도 이 나이 되도록 사회 경험은 거의 없다네.”

“그럼 따라 나오시죠. 이곳 용병단 본부를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너무 고맙구먼.”

“저도 돌아가신 스승님을 다시 만난 듯하여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자, 일단 밖으로 나가시죠. 규모가 큰 용병단이다 보니 소소한 볼거리가 제법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