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7권 10화 – 샌드웜뱃속의 타이탄
샌드웜뱃속의 타이탄
“여기는 어디지?”
칠흑과도 같은 어둠, 단 한 점의 미세한 빛조차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비몽사몽간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커다란 쇠기둥 에 가슴이 꿰뚫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헉!”
급히 가슴을 만져보는 라이, 그게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막에 오기 전 지급받았던 최고급 경갑옷의 가슴 부위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가슴 부위의 구멍 사이 로 손가락을 넣어보자 맨살이 만져진다. 그리고 가슴 부위의 구멍은 손을 전부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 외에도 옷이 걸레가 될 정도로 수많은 상처들의 흔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살아났나?”
아무리 자신이 키메라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재생력은 정말 적응이 안 된다. 어쩌면 불사신이 된……,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 당시 키메라들은 머리통을 자르 면 죽었다. 그걸 보면 불사신은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정도 상처로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주변이 너무 어둡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다 보니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판단하기가 힘들다. 분명 정신을 잃기 전에는 괴물의 입속에 있었으니, 지금쯤이 면 뱃속이지 않을까?
하지만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전혀 뱃속 같지가 않다. 마치 마차나 배 같은 것에 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젠장, 뭐가 보여야…….”
라이는 등에 맨 배낭으로 손을 뻗어 작은 불꽃을 만드는 마법도구를 꺼냈다. 모닥불을 피우거나 할 때 쓰라고 지급받은 거였는데, 사용해 보니 여러모로 요긴한 마 법도구였다.
마법도구나 컵 같은 건 배낭 옆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 들어있었는데, 마법도구를 꺼내면서 보니 아무래도 배낭의 감촉이 이상했다.
“이렇게 납작하지 않았는데?”
손가락만큼 짤막한 막대형 마법도구를 들고 “화이어!”하고 시동어를 외치자 마나를 조금씩 빨아들이며 불꽃을 일으킨다. 촛불보다 작은 불꽃이었지만 코앞조차 보이지 않던 상황에서는 정말 큰 도움이 된다.
급히 배낭을 벗어보니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고, 안에 들어있던 물건은 하나도 없다. 물통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비상식량 꾸러미조차 남아있는 게 없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은 남아있다는 것 정도.
샌드웜에게 삼켜지는 과정에서 검은 잃어버렸기에, 단검이나마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마도구가 내뿜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주변을 둘러보자 주변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라이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금속 덩어리들이 수도 없이 울룩불룩 불규칙하게 솟아올라 있고, 그것들은 모두 단순한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샌드웜이 살아있을 때는 근육과 연결되어 움직이던 뼈대들이었겠지만, 언데드가 되어 뼈대만이 홀로 움직이다 보니 뭔가 기괴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물론, 생명체의 구조 따위는 알 리가 없었던 라이의 눈에는 이 모든 게 괴이하고 신기하게만 보였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자신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돌기들로 뒤덮여 있는 탓에 돌기 뒤편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저 뒤를 하나하나 살펴봐야 하나?
라이는 곧이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쓸데없는 짓이다. 만약 적이 저 어둠 속에 숨어있었다면, 자신이 기절해 있을 때 공격해서 끝장을 내버렸을 테니까. 좋게 생각하자. 이 안으로 들어오려면 저 무시무시한 이빨들을 통과해야 한다. 키메라가 된 자신이야 이렇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살아서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건 밖에 있던 수많은 언데드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라이는 자신 외에 두 명을 샌드 웜이 더 삼켜버렸다는 걸 몰랐다. 그렇기에 그는 주변을 수색하기보다는 탈출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는 먼저 단검을 꺼내 단단히 움켜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을 가해봤다. 이곳도 금속질로 된 뼈대로 되어있긴 했지만, 어쩌면 이빨보다는 약할지 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카캉!!
순간 불꽃이 번쩍이며 미세한 흠집이 나긴 했지만 놀랍게도 곧이어 흔적도 없이 복구되어버린다. 이런 상황이면 몸체에 구멍을 뚫고 밖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구멍을 뚫을 수 없다면, 이미 있는 구멍을 통해 탈출하면 된다.
앞쪽에 있는 구멍은 자신이 끌려 들어온 목구멍일 것이다. 어스름한 불빛의 도움을 받아 자세히 살펴보니, 목구멍일 것이라 짐작되는 구멍이 하나 있을 뿐, 그 외 에는 단단하게 닫혀있다. 그 틈을 어떻게 비집고 들어간다고 해도 구멍 저쪽은 무시무시한 이빨들로 뒤덮여 있는 지옥이다.
“앞쪽은 안돼.”
진저리를 친 라이는 시커먼 어둠으로 뒤덮여 있는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쪽에 비해서 뒤쪽은 그래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샌드 웜도 살아있을 때는 먹고 그 찌꺼기를 배설했을 테고, 그러자면 항문이 뚫려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라이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쌀 한 톨, 물 한 방울 남아있는 게 없었으니까.
샌드 웜이 계속 움직이고 있는지 울룩불룩 솟아올라 있는 구조물들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에 보이는 벽면 전체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건 기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구조물들 중에서 작은 건 라이의 키 정도였지만, 간혹 라이의 몇 배나 될 정도로 커다란 것들도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뒤쪽으로 이동해야 하다 보니, 예상한 것 보다 훨씬 느릿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신기하네…….?”
자신이 지금 직접 겪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초대형 언데드 뱃속에 들어가, 그 안을 이렇게 구경할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라이는 만약 자신이 키메라가 되지 않았다면 결코 이 안에서 살아 들어올 수 없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과연 살아서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일 뿐.
이때, 어둠 속에서 뭔가 이질적인 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오면서 봤던 샌드웜의 뱃속 기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더군다나 꼼짝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더 욱 이질적이었다.
“저게 뭐지?”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눈에 익은 거대한 강철 덩어리가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5미터쯤 되는 거체였는데, 샌드 웜의 이빨에 갈린 탓인지 표면에는 수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중에 몇몇 부분은 속의 1차 장갑까지 보일 정도로 커다란 구 멍이 나 있었다.
“타이탄이다! 설마, 이놈이 타이탄까지 삼켰을 줄이야…….”
라이는 타이탄의 위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요! 거기 혹시 살아있는 사람 있나요? 이봐요!”
몇 번이고 커다랗게 외쳐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마 탑승했던 기사는 죽었을 것이다. 어쩌면 기사는 탈출하고, 타이탄만 샌드 웜의 뱃속에 들어온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라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타이탄의 기본적인 작동기작을 생각하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타이탄이 상처를 입기 시작하면, 그 상처를 수복하기 위해 마나를 급속히 뺏기기 시작하고 그런 이유 때문에 탑승자가 타이탄보다 먼저 사망한다는 걸 라이는 아 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타이탄까지 저렇게 됐을 정도인데, 과연 탈출이 가능할까?”
박살난 타이탄을 보자 점점 더 회의감이 싹터왔지만, 라이는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도왕국 알 카사스의 정규기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기 전에는 절대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좀 더 뒤쪽으로 들어가자 타이탄이 하나 더 보였다. 방금 전에 봤던 것과 똑같이 생긴 타이탄이었는데, 이건 이전과 달리 상처 하나 없는 아주 새것이었다.
“이렇게 생긴 타이탄이었구나. 굉장히 멋있게 생겼네.”
좀 전의 타이탄은 이빨에 갈린 듯한 수많은 흠집들 탓에 가슴에 그려진 문장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타이탄은 공장에서 막 나온 새것처럼 아주 깨끗했다.
“이게 어느 나라 문장이지?”
기사가 되면 각 나라의 문장들에 대한 특별 교육을 받는다. 타이탄에는 소속 국가를 뜻하는 문장과 기사단 문장, 그리고 탑승자 가문의 문장이 기본적으로 그려진 다. 그 때문에 수도 없이 많은 문장들을 기억해야 했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외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정찰조 소속 기사가 각 나라의 문장을 몰라 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몸통에 12라는 숫자가 쓰여 있는 시커먼 황소 문장.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저런 국가 문장은 본 적이 없다.
문제는 그 외에 다른 문장은 그 어디에도 그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교육받은 거와 다른 거야?”
그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봤던 타이탄인 쟈디렌은 가슴 중앙에 국가문장 하나만이 그려져 있었다. 소속 기사단도, 주인도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그 외에 다른 문장 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면, 쟈디렌에 그려져 있던 것과는 뭔가 화법이 다르다고 할까, 디자인이 다르다고 할까, 아무튼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국 국적의 타이탄이라는 느낌이다.
샌드웜의 뱃속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황소 문장의 타이탄은 멋있었다. 쟈디렌과는 급이 다른 멋진 모습!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타이탄에 더욱 가깝게 다가갔다. 그리고 불빛을 들어 올려 황홀한 듯 타이탄을 구경했다. 언제 이렇듯 타이탄을 자세히 구경할 기회가 있겠 는가. 방금 전에 온통 이빨에 갈린 듯한 볼품없는 타이탄을 본 뒤에 봐서 그런지 작은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한 모습의 타이탄이 더 멋지게 느껴졌다.
“쟈디렌하고는 비교가 되지를 않네.”
덩치도 쟈디렌보다 월등하게 컸다. 그리고 외형도 훨씬 더 강인하게 보인다. 아래위로 길쭉한 형태의 거대한 타원형 방패는 왼손에 부착되어 있었지만, 오른손에 는 아무것도 든 게 없었다. 아마도 삼켜지는 과정에서 무기는 놓쳐버린 모양이다.
『희미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J
“헉!!”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라이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사람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음색. 이곳이 샌드 웜의 뱃속이라서 그런지 묘하게 울리고 있 긴 했지만,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맞다. 그때, 라이놀 조장 덕분에 겪어봤던 상황이었지. 하지만, 그래도 설마 하며 라이는 중얼거렸다.
“설마……, 타이탄 네가 말한 건가?”
『그대는 나와 맹약을 맺기를 원하는가?』
“그럴 수 있는 거야?”
『그대는 자격을 갖추고 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나와 맹약을 맺기를 원하는가?』
라이는 작금의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타이탄의 가치가 워낙 엄청나다 보니 그 주인이 되려면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야 겨우 된다고 라이놀에게서 들었 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주인이 된다니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훈련을 하면서 봤던 타이탄의 모습에 언젠가 자신도 그 주인이 될 수 있기를 얼마나 소망했던가. 그런데 이렇게 그 기회가 자신에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
그리고 타이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지지 않겠는가.
순간 라이의 가슴속은 희망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네 이름은 뭐지?”
『케이론.
라이는 예전에 라이놀에게 배운 대로 천천히 의지를 담아 말했다.
““케이론, 너하고 주종계약을 맺고 싶다.”
『이제부터 그대와 나는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골렘의 맹약에 따라 주종이 되었다. 내 이름은 케이론이다. 그대의 이름은?』
“내 이름은 라이, 라이 위너스야. 앞으로 잘 부탁해.”
맹약을 맺은 케이론은 현재 등을 기대고 반쯤 누워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예전에 탑승해 봤던 쟈디렌은 탑승할 때 머리통이 뒤쪽으로 젖혀졌었다. 케이론의 머리 통도 그런 식으로 열린다고 가정하면, 저런 자세로는 머리가 뒤로 젖혀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부축해서 저 큰 쇳덩이를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케이론, 일어설 수 있어? 아니면 그 자세로 머리를 열어줄 수 있어?”
그 말에 케이론은 천천히 양손을 아래로 뻗어 바닥을 짚으며 힘겹게 상체를 앞으로 일으켰다. 그리고는 머리통을 뒤로 젖혀 탑승석을 드러냈다.
라이는 희망과 기대감에 차 조종석에 올라탔다. 쟈디렌보다 훨씬 더 고성능인 타이탄이라 그런지 탑승석도 많이 다르다. 이런 부분에 기초적인 지식이 없었던 라 이로서는 쟈디렌의 조정석과 뭐가 다른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라이가 탑승하자 머리가 제자리로 돌아가며 탑승석을 완벽한 밀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쟈디렌에 탑승했을 때처럼 주변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걸 가능하게 해 주는 게 타이탄과의 교감이라고 라이놀이 말해주었었다.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이긴 했지만, 타이탄의 눈을 통해서 보니 흐릿하긴 해도 약간은 구분할 수가 있었 다.
“이 정도라면 그럭저럭 움직일 수는 있겠어.”
라이는 라이놀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그때 타이탄에 대한 기초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었다면, 뜻하지 않은 타이탄이 생겼다고 해도 어떻게 다 뤄야 할지 전혀 몰랐을 테니 말이다.
만약 여기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조원들, 특히 조장에게 자신의 새로운 친구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조원들은 아무도 가지지 못한 타이탄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다.
라이가 조정석에 앉아 마나를 본격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케이론은 라이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첫 주인보다 못한 인물이라 생각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라이가 공급하는 마나는 아주 순수해서 전 주인보다 훨씬 더 강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 었던 것이다.
하지만 케이론은 그에 대한 의문을 라이에게 제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케이론도 이제 겨우 두 번째 주인을 맞이했을 뿐이었기에 대부분의 주인들이 라이 정도의 등급인 것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자, 가자!”
외침과 동시에, 라이는 자신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타이탄이 움직이기 위한 에너지를 빨아들인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잃어버 린 검을 복구하기 위해 마나를 흡수한 것이었다.
케이론은 왼손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검을 든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뒤쪽으로 움직이려던 라이는 마음을 바꿔 케이론의 몸을 빙글 돌려 앞쪽으로 걸어가게 했다. 바닥이 울퉁불퉁 한데다, 어둠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주위에 솟아있는 돌기들은 아주 단단해서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걸어간다기보다는 기어간다는 게 옳은 표현일 정도로 엉금엉금 전진했다. 기어가기 시작한 그 시점에서야 라이는 타이탄의 오른손에 장검이 들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있었는데, 내가 못 봤던 모양이네. 하기야, 워낙 어두웠으니까…….’
방해가 되는 장검을 일단 타이탄의 허리에 있는 검대에 꼽은 후, 다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타이탄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정도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곧이어 라이가 목표로 했던 위치에 도착했다. 파괴된 타이탄이 있던 자리였다.
라이는 타이탄이 지닌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전혀 모른다. 그럼에도 이리로 온 것은 타이탄 안을 뒤지면 혹시 탈출할 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 하는 기 대감에 온 것이다.
“어느 나라 타이탄이지? 쯧, 뚜껑을 열어보면 알게 될지도.”
기사단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대충 수박 겉 핥기 식으로만 배운 라이로서는 타이탄의 흉갑에 크게 그려져 있는 문장을 보고도 어느 나라의 타이탄인 지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타이탄의 머리를 뒤쪽으로 젖히는 건 아주 쉬웠다. 그리고 탑승석에는 라이의 예상대로 시체 한 구가 앉아있었다.
시체의 복장은 라이가 링카 성을 거쳐 오며 흔히 볼 수 있었던 사막민족 특유의 복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케이론, 머리 좀 열어봐. 아래로 내려가 보게.”
시체가 있던 조정석으로 내려간 라이는 순간 코가 마비될 것만 같은 냄새에 눈살을 왈칵 찌푸렸다.
“커억! 와, 냄새 한번 지독하네!!”
시체는 한창 부패되고 있는 중이었다. 악취가 진동을 하긴 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코를 움켜잡으면서도 혹시 뭔가 유용한 게 없나 시체의 몸을 뒤져 봤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시체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라이처럼 필요한 물품을 배낭에 넣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낙타나 말 같은 것에 싣고 이동하던 중 타 이탄에 탑승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가지고 있는 짐이 없을 리가 없다.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와 시체 손가락에 끼어 있던 반지, 그리고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 모를 짤막한 금속성 막대 하나, 시체 품속에서 꽤 비싸 보이는 단검 한 자 루를 얻을 수 있었다.
반지나 막대 표면에는 상당히 복잡한 주문이 빽빽이 음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마법도구인 듯싶었다.
문제는 사막민족 복장 안쪽에 입고 있는 상당히 고급품으로 보이는 가죽갑옷이었다. 시체의 옷까지 벗겨 입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자신의 갑옷은 이미 샌드 웜의 이빨에 씹혀 너덜너덜한 상태였고, 마법진이 깨졌는지 마법도구로서의 기능이 멈춰버린지 오래다.
찝찝한 마음이 들지라도 시체의 가죽갑옷으로 갈아입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코를 찌르는 악취를 참아가며 간신히 가죽갑옷을 벗기다 보니 나중에는 후각이 마비되어 악취가 나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었다.
“휴우, 겨우 벗겼네!”
가죽갑옷의 원주인에게는 미안했지만, 라이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샌드 웜에게서 탈출하는 도중, 또 어떤 위험한 상황을 겪게 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 다. 그런 만큼 쓸만해 보이는 가죽갑옷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벗겨낸 가죽갑옷에는 시체에서 흘러나온 액체와 오물이 잔뜩 묻어있었고, 지독한 악취까지 풍기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이는 자신의 갑옷을 벗어던지고 새로 얻은 가죽갑옷으로 갈아입었다. 만약 탈출에 성공한다면, 그때 세척을 하든지 아니면 버리든지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작 필요한 식량이나 물을 단 한 방울도 얻지 못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케이론이 반응해주길 기대했기에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없다 보니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이 생겼다.
라이놀 조장은 타이탄이 최강의 병기라고 했었다. 타이탄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껍고 튼튼한 철판들로 보호되는 조 종석에 앉아 있으니 든든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다.
문제는 이 타이탄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뿐.
라이는 타이탄을 움직여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힘껏 휘둘렀다. 목표는 바닥에 돌출되어 있는 거대한 뼈들 중 하나.
캉!
검날이 깨질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지만, 번쩍하고 불꽃이 튄 것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검술을 써서 공격한 것보다도 훨씬 공격력이 약한 것처럼 느 껴졌다.
“에게? 이게 뭐야?!”
손상됐던 검도, 그리고 웜의 뼈대도 곧바로 복구되어 버렸기에 방금 전 자신이 뭔가 하기는 했던 걸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타이탄의 조정을 잘못한 걸까? 아니면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일까?
고심하던 라이는 타이탄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내가 검을 쓰는 방법이 틀렸나? 생각보다 너무 위력이 약한 거 같은데…….”
『아니다, 전의 주인도 그렇게 했었다.』
“네 전 주인도 너를 활용하는 연습을 많이 했겠지? 어떤 연습이었어?”
『타이탄 간의 대전연습을 주로 했었다.』
“내게 보여줄 수 있어?”
라이의 부탁에 케이론은 일어서서 자세를 잡았다. 왼쪽 방패를 머리 앞에 바짝 올려 방어를 하는 한편, 오른손에 든 검으로 공격 자세를 잡는다.
『이렇게 방패를 올려 상대의 공격을 막으면서, 오른손의 검으로 공격한다. 바닥이 고르지 못해 자세를 잡기 힘들지만, 이런 방식으로 검을 휘둘러 공격했었다.』 그러면서 케이론은 적을 공격하는 방식을 몇 가지인가 보여줬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너와 나는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들었어. 이를테면 네 시각을 통해서 이렇듯 어두운 밖을 볼 수 있듯이, 너 또한 내 시각을 공유 한다고 말이야.”
『정확하다.』
“그 정신적 공유는 계속 이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자신의 타이탄을 평상시에는 공간 저편에 들어가게 했다가 필요할 때만 밖으로 꺼낼 수 있다던데?” 『그렇다.』
“그렇다면 공간 저편으로 간 이후에도 나하고 연결되어 있는 거지? 내 말은,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네가 인지할 수 있느냐 하는 거야.”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네가 불렀을 때 응답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러네. 내가 너무 당연한 걸 물었네. 그렇다면 너는 전 주인이 너와 함께하지 않을 때, 뭘 했는지도 잘 알고 있겠네?”
『전 주인의 일상은 아주 단조로웠다. 매일 똑같은 일들을 반복했었지.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기도 하고, 샤이하드라는 신에게 기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때때로 동료들과 검술대련을 하기도 했고.』
“전혀 도움이 안 돼…….”
너무 뜬구름 잡는 듯한 설명이었기에 내심 실망하던 라이는 혹시나 싶어 케이론에게 다시 물었다.
“너를 만든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는 알아?”
『나를 만든 나라?』
“네 주인이 살았던 나라말이야.”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나라라는 게 뭔가?』
““나라! 국가, 몰라?”
『모른다.』
“이거 나보다도 더 무식한 녀석일세.”
타이탄이란 마법 생명체에 있어 모국(母國)이라는 개념은 물론, 나라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살아왔다면 전 주인들에게 뭐라도 들은 게 있을 게 아닌가.
혹시 생각보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나? 아니면 주인들과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 과묵한 타입인가?
“지금까지 주인은 몇 명이나 섬겼어?”
『섬긴다는 게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너하고 계약을 맺은 사람 숫자 말이야.”
『네가 두 번째 계약자다.』
케이론은 어휘력도 부족한 데다 상식 또한 상당히 부족했다. 자신 외에 주인이 한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대답에 라이는 케이론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타이 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 만들어진 지는…, 아니 태어난 지는 얼마나 됐지?”
『모른다.』
좀 더 얘기를 나눠보니 타이탄은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영원한 시간을 살아가는 마법 생명체에게 시간이라는 건 무의미한 개념 이리라.
“아, 정말……. 너하고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면 많은 걸 가르쳐야겠군.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내가 속한 나라는 마도왕국이라고 불리는 알카사스 왕국이야. 듣기 로는 제국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넓은 영토와 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데. 그런데도 스스로 왕국이라고 부르는 건, 무역을 하는 상대 나라에 조금이라도 약 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하더군. 코린트나 크루마처럼 강대국의 악평이 자자해서는 무역을 하기가 힘드니까 말이야.”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모르는 말이 너무 많다.』
“나중에 더 자세히 말해줄게. 지금은 그저 그런 게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
지금 자신의 말 상대라고는 오직 이 타이탄뿐이었다. 얘기를 해보니 워낙에 무식했기에 조금이라도 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대화를 할 수밖에 없 었다. 덕분에 안 좋은 현 상황을 잊어버려 잡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좋았다.
어둠 속에 갇혀 있다 보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잡아먹힌 이후로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게 분명하다.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는 타이탄의 눈을 통해 보는 게 약간 좋긴 했지만, 그래도 어두운 건 마찬가지다.
라이는 케이론에게 머리를 열어달라고 한 다음, 마도구의 불빛을 이용해서 주변을 관찰했다. 촛불보다 작은 불빛이긴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백배는 낫다.
샌드 웜의 몸속 움직임을 장시간 관찰하고 있다 보니, 그 움직임에 규칙적인 패턴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둘투둘 솟아올라 있는 샌드 웜의 뼈대들은 마치 시계추처럼 제자리에서 앞뒤로만 움직인다. 그리고 솟아올라 있는 뼈대들 간의 간격이 규칙적으로 줄어들었다 가 늘었다가 한다. 샌드 웜의 제일 뒷부분에서 보고 있자니 그 움직임의 파형이 몸 전체에 걸쳐 리드미컬하게 진행된다. 간격이 줄어들었다가 늘었다가 하는 게 저 앞쪽에서부터 시작해서 뒤쪽으로 빠른 속도로 물결친다.
그런 단조로운 움직임을 계속 보고 있자니 졸음이 슬슬 쏟아진다. 하지만 잠들면 안 된다. 지금 샌드 웜은 동료들을 먹잇감으로 쫓아가고 있을 게 틀림없다. 자신의 생각이 최악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라이는 그때 외에는 이곳을 탈출할 기회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때 를 기다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