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7권 13화 – 허접한 놈들이 만든 타이탄

허접한 놈들이 만든 타이탄

다음날, 사막에 나갔던 콘도르 기사단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그에 맞추기라도 한 듯 라이도 링카 성에 도착했다.

링카 성으로 귀환하자마자 라이는 수석마법사의 호출을 받고, 그를 만나야만 했다.

심하게 악취가 풍기는 가죽갑옷만큼은 대장간에 수선을 맡기고 수석마법사에게 가려 했지만 전령역으로 온 마법사는 단호했다.

“수석마법사님께서는 사막에서 돌아온 복장 그대로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전령을 따라 수석마법사에게로 가자 그는 라이가 입고 있는 가죽갑옷을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자국 기사단에서 지급해준 갑옷이 아니었기 때문 이다.

물론 자국 기사단에서 지급해 주는 것도 상당한 품질의 마도구였지만, 현재 라이가 착용하고 있는 가죽갑옷은 그보다 훨씬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수석마법사는 악취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호오, 기사단 신입 주제에 꽤 괜찮은 가죽갑옷을 입고 있구만. 냄새는 좀 심하게 나지만…….’

라이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이건 대장간에 수선을 맡기고, 수석마법사님을 만나러 오겠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수석마법사님께서 이 복장 그대로 오라 하셨다고 해서…….”

“그래,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지. 그나저나 일단 자네 그 갑옷부터 벗어서 내게 주게. 냄새가 너무 심해서 견딜 수가 없구만.”

“예?”

혹시나 갑옷을 뺏기는 게 아닌가 해서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라이에게 수석마법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갑옷을 압수하려는 게 아니네. 마도구를 수리하는 건 대장간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마법사들이 하는 거지. 내가 깨끗하게 만들어서 돌려주도록 하 겠네. 한 며칠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말이야.”

수석마법사의 생각이 행여 바뀌기라도 할까 라이는 급히 갑옷을 벗었다. 피와 온갖 오물이 잔뜩 묻어있는 갑옷을 계속 입고 있기에는 자신도 찝찝했었으니까.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최근 며칠 동안 귀관의 행방이 묘연했기에 규정상 어쩔 수 없이 소지품 검사를 해야 하는데, 협조해 주겠나? 기사단에서 지급받은 거 외에는 모두 다 내 앞에 꺼내놓게.”

누구의 말이라고 감히 거절하겠는가. 라이는 재빨리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다 꺼내놨다.

시체를 뒤져 챙긴 물건들을 꺼내놓을 때는 찝찝한 마음이 좀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약 검사라도 한다면 바로 발각될 테니 말이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이 곳에 끌려오지만 않았다면, 그런 물건들은 자신의 짐 속 깊숙이 숨긴 뒤 왔을 것이다.

“호오, 꽤나 묵직하군.”

묵직한 돈주머니를 열어본 수석마법사의 눈매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돈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건 모두 금화뿐이었다. 정찰조에 소속된 하급 기사가 지니고 있을 만 한 액수가 아닌 것이다.

눈치를 보던 라이도 수석마법사가 돈주머니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다는 걸 금방 알아챘다. 그랬기에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 돈주머니는 원래 제께 아닙니다. 주, 주웠다고 해야 하나…….”

“뭐? 이렇게 많은 돈주머니를 주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사, 사실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그 이유란 걸 한번 말해보게. 제대로 설명해야 될 걸세. 오해를 사기 싫다면 말일세.”

“절대 훔친 돈주머니는 아닙니다. 단지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돈주머니를 습득하기까지의 과정이 좀 복잡한데…….”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네. 정리가 되지 않아서 힘들다면 그냥 시간 순서대로 차근차근 설명하면 되니까.”

결국 라이는 자신이 전투 중에 갑작스러운 샌드웜의 습격으로 그 뱃속에 들어간 것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른다. 그저 기절해 있다가 눈을 떠보니 샌드 웜의 뱃속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본 샌드 웜의 뱃속의 광경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그동안 수석마법사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상당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경청만 했다. 그만큼 라이가 겪은 상황은 마법사로서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 야기였다.

물론 라이가 언데드 쪽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지워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수석마법사는 더욱 귀를 기울여 라이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혹시라도 얘기 도 중에 뭔가 어긋나는 점이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파괴된 타이탄의 조종석을 열어보니 거기에 시체가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샌드 웜에게 삼켜질 때 지니고 있던 모든 보급품을 잃어버렸기에 혹여나 쓸만한 게 있 을까 싶어서 시체의 몸을 뒤졌습니다. 그때 찾아낸 게 바로 저 물건들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벗어드린 가죽갑옷도 그 시체가 입고 있던 걸 벗겨서 입고 있던 거죠.” 말을 듣던 수석마법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마법사이기에 타이탄이라는 게 얼마나 막강한 전투력을 지닌 마법병기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낱 언데드 따위가, 아무리 그게 덩치가 좀 크다고 하지만 타이탄을 파괴할 정도로 강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껏 타이탄의 상대는 타이탄 외에는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그의 믿음을 저버릴 만한 진술이었으니까.

하지만 라이가 내놓은 소지품을 보자 그 말을 무조건 불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당히 고급품으로 보이는 마법반지와 짤막한 막대기 하나. 특이한 게 있다면 거기에 빽빽이 새겨져 있는 문자였는데 그건 룬 문자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건 신 성문자였다. 성기사가 사용하는 신성도구(神聖道具 : 줄여서 ‘신구’라고도 함)였던 것이다. 마도구가 마나를 필요로 한다면, 이건 신성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 은 쓸 수도 없는 물건이다.

물론 진짜처럼 보이는 허접한 짝퉁일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새겨진 신성문자가 아주 정밀한 것으로 봤을 때 진품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라이가 가진 소지품을 얻기까지의 설명이 모두 끝났음에도, 수석마법사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그 증언을 하나씩 다시금 곱씹어보았다.

믿기 힘든 내용의 연속이었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기에는 그 내용이나 묘사가 너무나도 충실하고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언데드 샌드 웜의 뱃속 광경이라든지, 그 속에 들어있던 타이탄들의 모습, 그리고 그중 하나와 계약한 뒤 샌드 웜의 항문을 열고 탈출한 것까지.

수석마법사가 오랜 연륜을 지니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가 언제 언데드 샌드 웜의 뱃속에 들어가 보았겠는가.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세상에 몇 사람이 나 있겠는가.

당연히 라이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릴 방법이 없는 것이다.

“좀 전에 그곳에서 타이탄과 계약을 맺었다고 했었지?”

“예.”

“내게 그 타이탄을 보여줄 수 있겠나?”

수석마법사의 제안에 라이는 흔쾌히 답했다.

“어렵지는 않은데 여기는 너무 좁아서 안 될 것 같습니다. 밖으로 나가시죠.”

수석마법사는 라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면서 기사 한 명을 불렀다. 그 기사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수석마법사를 보호할 오너급의 기사였다.

사실, 수석마법사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래듀에이트가 근접에서 갑작스럽게 기습을 해오면 당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 이제 타이탄을 꺼내 보게나.”

“예, 케이론, 나와 봐.”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육중한 타이탄이 공간을 가르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얘기가 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만약 타국의 첩자였다면 이렇게 순순히 타이탄을 불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일개 첩자에게 타이탄을 지급한다? 타이탄이 가지는 엄청난 가치를 생각한다면 그건 아무리 부유한 알카사스 왕국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얘기였다.

수석마법사는 일단 의심은 접어두고 공간을 가르며 나온 타이탄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모습이나 팔다리의 길이, 그리고 어깨까지의 높이까지. 대체적으로 표준 수치인 것 같았지만 왠지 이질적이라는 느낌을 버리기 힘들었다.

“저도 처음 보는 형태의 타이탄입니다. 흠, 가슴에 그려진 이 문장은 과연 어느 나라의 타이탄일까요?”

따라온 기사의 질문에 수석마법사는 타이탄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다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기존 형태의 타이탄이 아냐. 외관이 너무 이상해. 이걸 보게. 끝마무리가 너무 대충이잖나. 본국의 수출용 저가 타이탄도 이 정도로 허접하게 만들지 는 않아.”

“이 타이탄을 만든 국가에서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요?”

“그보다는 제철 기술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 내 예상대로라면 이 타이탄은 아마 아르곤에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그 말에 깜짝 놀란 기사는 다급히 되물었다.

“신성 아르곤 제국이라고요? 거긴 타이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엑스시온을 제작할 능력이 안 되는 거지, 타이탄을 못 만드는 건 아니야. 쇠를 다룰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몸뚱이는 만들 수 있는 거니까. 게다가 소량이긴 하지만 엑스시온을 수입해 자체적으로 실험용 타이탄을 제작하는 걸로 알고 있거든. 아무래도 그쪽이 완성품을 수입하는 것보다는 저렴할뿐더러, 그 과정에서 타이탄 제 작 기술 또한 발전할 수 있을 테니까.”

수석마법사의 대답에도 기사는 여전히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눈앞의 타이탄이 신성 아르곤 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외관이 거칠게 처리된 몇몇 부분만 보고 아르곤 제국에서 만든 거라고 단정 짓는 건 너무 무리가 아닐까요?”

“후후, 사실 타이탄만 보고 이렇게 단정 지은 건 아닐세. 내가 그렇게 예측할 수 있었던 건 이 안에서 발견되었다던 오러 소드 때문이야.”

“성기사들이 쓴다는 그 오러 소드 말씀이십니까?”

오러 소드는 신성 아르곤 제국의 성기사들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짤막한 막대 형태의 신성도구였는데, 막대에 신성력을 부여하면 막대 끝에서 빛으로 된 검날이 튀어나온다고 한다. 그 위력은 기사들의 오러 블레이드급이라고 했다. 따라서 오러 소드를 사용하는 것 하나만으로 어지간한 실력의 그래듀에이트는 모두 참살이 가능할 정도의 사기적인 아이템이었다.

“그래. 반지나 목걸이, 팔찌 같은 형태의 신구는 여러 교단에서 만들고 있네만, 오러 소드를 생산할 수 있는 건 오직 아르곤 제국뿐이거든.”

말을 마친 수석마법사는 라이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조종석을 살펴봐도 괜찮겠나?”

“물론이죠, 수석마법사님.”

라이는 타이탄을 바라보며 지시했다.

“케이론, 머리를 열어줘. 여기 수석마법사님이 보실 수 있도록 말이야.”

그 순간, 철컹하며 뒤로 젖혀지는 타이탄의 두부. 그리고 이중 장갑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고 있는 조종석이 드러났다.

조종석을 내려다보던 수석마법사의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타이탄 생산에 관여해 본 적은 없었지만, 기사단에 오랜 세월 근무해오며 수많은 타이탄을 보았고, 그 방면에 대해서는 꽤나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 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오늘 접한 타이탄은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타이탄과도 조종석의 형태가 달랐다.

좌석 아래쪽에 엑스시온이 하나 장착해 있는 방식이 아닌, 아래쪽의 좌우에 각 1개씩이 V자형으로 배치해서 장착되어 있었다. 즉, 이 타이탄에는 엑스시온이 2개 나 들어 있었던 것이다.

“허어, 아르곤 놈들, 아주 재미있는 짓을 해놨군. 엑스시온을 두 개나 넣을 생각을 하다니……. 그런데 이렇게 해도 타이탄이 동작할 수나 있는 거였나?”

수석마법사의 중얼거림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오너급 기사가 타이탄의 어깨 위쪽으로 따라 올라왔다. 그도 신기한 걸 보는 듯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입 을 열었다.

“엑스시온을 둘이나 넣은 타이탄은 저도 처음 봤습니다, 수석마법사님.”

“아무래도 마르코에게 한번 물어봐야겠어. 이런 제작 기법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지 말이야.”

한눈에 봐도 알카사스에서 제작된 출력 0.8짜리 표준형 엑스시온이었다. 요즘은 이런 저급형은 수출용으로도 거의 제작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비해 성능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저급 엑스시온 두 개를 붙여 정규급 이상의 출력을 낼 수 있는 타이탄을 만들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아마도 고출력 엑스시온을 구입할 수 없었기에 찾아낸 그들 나름대로의 해법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0.8짜리를 두 개 붙인다고 해서 1.6의 출력을 안정적으로 낼 수 있느냐 하는 거겠지. 만약에 그게 된다면 이건 획기적인 발명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야. 고출력 엑스시온을 개발하는 건 그만큼 어려운 문제니까.”

알카사스 왕국은 엑스시온 및 타이탄을 타국에 대량으로 판매함으로써 마도왕국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2.0을 상회하는 고출력의 엑스시온 개발에는 번번 이 실패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실력까지 뒤떨어지다 보니 요 근래에 이르러서는 코린트, 크라레스, 크루마의 삼대 강국에 비해서 한 수 뒤처지는 전력을 지니고 있다며 폄하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니 차세대 초고성능 타이탄의 개발에 있어 두 개의 엑스시온 장착을 하는 기법은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저…,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만, 엑스시온이라는 게 뭡니까? 수석마법사님.”

“간단하게 타이탄의 심장이라고 알고 있으면 될 걸세.”

“아…, 예.”

수석마법사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타이탄이 뭔가 특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라이였다.

수석마법사는 다른 타이탄들과 달리 케이론에는 심장이 두 개 달려 있다고 했다. 지금껏 의식하지 않았었지만 케이론의 목소리가 뭔가 두 사람이 동시에 얘기하는 것처럼 묘하게 울리는 게 아마도 그 때문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한 생각은 곧이어 라이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심장이 둘이건, 셋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자신이 사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데 말이다.

라이에게 자신이 호위로 데리고 갔던 오너와 타이탄 모의전까지 시켜본 후, 수석마법사는 통신실로 달려가 자신의 오랜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넣었다.

마르코는 마법진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지금은 알카사스 왕국의 타이탄 생산 쪽에 종사하고 있는 마법사였다.

“마르코, 잘 있었나?”

「어? 자네가 웬일인가?

“오랜만에 이런 걸 물어봐서 미안하긴 한데, 내 주위에 자네 말고는 물어볼 만한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호오, 대단하신 기사단 수석마법사님의 부탁인데, 기밀사항이 아니라면 도와줘야겠지. 그래, 대체 알고 싶은 게 뭔가?」

인사를 나누자마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버리는 마르코. 두 사람이 무척 친했기에 스스럼이 없는 걸 수도 있었지만, 마르코가 워낙 바쁘기에 붙은 습관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친구의 모습에 수석마법사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아르곤 제국에서 만든 걸로 추정되는 타이탄을 한 기 입수하게 되었는데 말이지…….”

아르곤 제국의 타이탄이라는 말에 마르코의 흥미가 급격히 떨어지는 게 표정에서 고스란히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르곤 제국에 수출되는 타이탄이라고 해봐야 2선급의 타이탄뿐이었기 때문이다.

“쯧쯧, 아직 내 말 끝나지 않았으니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자네에게도 꽤나 흥미가 있을 만한 주제니까 말이야.”

지금껏 오랜 친구인 수석마법사가 빈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마르코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 계속 말해봐.」

“자네, 혹시 아르곤 제국이 우리 왕국에서 엑스시온을 수입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

「우리 공장이야 싸구려 엑스시온은 생산하지 않기에 그쪽과 거래가 없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조금씩 수입해가고 있는 모양이더군. 뭐, 타이탄 생산이 가능한지

시험해보고 있는 거겠지. 완성체를 수입하는 것보다는 엑스시온만 수입하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만드는 쪽이 훨씬 싸게 먹히니까.」

“흐흐, 그건 그렇지. 그러면 최근 아르곤에서 어느 정도 수량의 엑스시온을 수입해 갔는지 전체적인 수량을 알아봐 줄 수 있나?”

「그런 건 알아서 뭐 하려고?」

“그러지 말고 좀 알아봐 줘. 곧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줄 테니까 말이야.”

「쳇, 별 쓸데없는 데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군.」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마르코는 수정구 옆쪽으로 고개를 돌려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렸다. 몇몇 공장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곳에 연락을 넣어 아르곤에 판매한 엑스시온의 수량을 집계해 오라고 말이다.

지시를 다 내린 후, 마르코는 수정구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르곤에 수출이 허용되는 건 저급 엑스시온 뿐이야. 그런 걸로 타이탄을 만들어봐야 훈련용으로나 쓸까, 제대로 된 타이탄은 만들 수 없다고.」

“나도 그 정도쯤은 알고 있다네. 하지만 이번에 아르곤에서 꽤 쓸만한 걸 만들어낸 모양이야.”

「아르곤 놈들이 어떤 쓰레기 같은 타이탄을 만들어냈건 내가 알 게 뭐야. 전혀 궁금하지 않으니 빨리 진짜 용건이나 말해. 안 그럼, 나 통신 끊는다.」

이때, 수정구로 마르코에게 쪽지 하나가 전달되는 게 보였고, 그걸 읽던 마르코의 두 눈이 일순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급 엑스시온의 수입량이 왜 이렇게 많아?! 0.7짜리 84개, 0.8짜리 145개, 0.9짜리가 74개씩이나 되잖아. 이 정도 양이면 국내에 남 은 저급 엑스시온 재고를 몽땅 다 긁어갔다는 말인데..

놀라운 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다른 공장에 연락을 넣어 수출량에 대한 정보를 집계한 모양이다.

마르코는 수석마법사를 쏘아보며 급하게 물었다.

「자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지? 빨리 말해보게. 왜 이렇게 많은 저급 엑스시온을 아르곤 놈들이 수입해 간 거지?」

“이번에 내가 입수한 타이탄에는 특이하게도 엑스시온이 두 개나 장착되어 있더군. 0.8짜리로 말이야.”

그 말에 마르코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타이탄 한기에 엑스시온을 두 개씩 넣는다면 그렇게 엄청난 수량의 저급 엑스시온을 수입해 갔다는 게 납득이 된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그건 말 도 안 되는 짓이었다.

「엑스시온을 두 개씩이나 장착한다고?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수석마법사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가능하니까 자네한테 말을 꺼낸 거지. 내게 그 증거물이 있거든.”

「증거물이 있다고? 어디에?」

“처음에 내가 말했었잖나. 아르곤 제국에서 만든 걸로 추정되는 타이탄을 한기 입수했다고 말이야.”

그제서야 통신 초반에 그 말을 했다는 걸 기억해 낸 마르코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수긍했다.

「참, 그랬었지.」

“좀 전에 타이탄끼리 모의전까지 치르도록 하고 자세히 살펴봤네. 그럭저럭 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더군. 물론, 0.8짜리 두 개를 넣었다고 해서, 1.6의 출력이 나 오는 것 같지는 않았네. 그보다는 훨씬 출력이 낮은 것처럼 보였거든. 뭐, 조종하는 기사의 실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처럼 보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엑스시온 2개를 장착하고도 잘 움직인다는 수석마법사의 말에 마르코의 호기심이 급상승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쪽으로 가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힘을 좀 써 주겠나?」

“누구의 부탁인데 거절하겠나. 시간 날 때 언제든 오게. 참,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링카 성일세. 당분간 여기에서 주둔하게 될 거야.”

「링카 성? 알았어. 장비 챙겨서 그쪽으로 가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통신은 뚝 끊겨버렸다.

“거, 급한 성질머리하고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모두 얻은 수석마법사는 집무실로 돌아가며 환하게 웃었다. 친구인 마르코의 타이탄에 대한 탐구욕을 알기에 이 정도 떡밥이면 친구가 절대 가만히 앉아있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흐흐, 궁금해서 미치겠지? 더군다나 시간을 낼 수 없으니 더 미치겠을 걸? 킥킥.”

마르코는 굉장히 바쁜 사람이었다. 시간을 내서 그를 찾아가도 느긋하게 얘기를 나누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걸 미루어 생각한다면 링카 성에 있을 때 만날 수 없 을지도 모른다. 이 임무가 끝나면 바로 연락을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이쪽으로 쫓아오는 헛걸음을 방지할 수 있을 테니까.

월터와 다이아나는 각자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타이탄을 삼켜버릴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언데드 몬스터의 존재에 상부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월터나 다이아나 둘 다 손꼽힐 만큼 강한 기사들이다. 그런 둘이서, 그것도 둘 다 타이탄을 꺼내야만 상대가 가능할 정도의 괴물이 존재할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 나 할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할 거야?”

“명령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지.”

다이아나야 부모에게 욕을 들을 각오를 하고 강행할 수 있겠지만, 월터는 입장이 다르다. 상부의 지시를 어기는 그 순간 명령 불복종이 되는 것이다. 자칫 처형당 할 위험성마저 있었다.

월터가 돌아가겠다고 하자 다이아나도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렸다. 그녀 혼자서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샌드 웜을 그녀 혼자 상대해야 했다면, 놈의 뱃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월터가 밖에서 협공해줬기에 그나마 샌드 웜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레이디, 돌아가셔야 합니다.”

라디아의 채근에 다이아나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돌아가자. 링카 성으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알카사스의 서쪽 국경 전체가 링카 영지로 할당되어 있다. 수비의 편리성은 물론이고 밀무역 등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서쪽 국경 전체를 자신의 지휘하에 둔 링카 변경백은 출입국은 오로지 링카 성을 통해서만 허용했다. 그쪽이 관리하기 편리하니까. 그렇기에 링카 성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링카 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뜻밖에도 아무 일 없이 평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지나가기 전에 그 일대에 있던 모든 언데드들이 알파17에 의해 북쪽으로 이동배치 되었기 때문이다.

링카 성에 도착한 월터 일행은 예전에 이곳을 떠날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성내 수비군의 변화다. 그전에는 나른한 듯 하품을 하고 있는 병사도 눈에 띄었었지만, 지금은 경계병들의 눈빛에서 긴장감이 넘친다. 사막 저편에 서 모습을 드러낸 행인들을 모두들 노려보듯 세심히 살펴보고 있다. 아무래도 이들도 사막에서 언데드 떼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챈 듯 느껴졌다.

“떠났을 때와는 뭔가 분위기가 다르네.”

링카 성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월터 일행은 곧바로 병사들 앞에 도착했다.

병사들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듯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일행을 제지한다.

“멈추시오. 사막을 건너왔소?”

“그렇습니다.”

월터 일행의 짐은 거의 없다. 낙타 등에 실린 거라고는 담요하고 약간의 식량, 물통 정도다. 무역상이 아님을 알아본 병사들이 더욱 수상쩍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 이다.

“서쪽 대륙에서 오는 길이오?”

“서쪽 대륙으로 가려다가 언데드가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고 되돌아오는 길입니다. 그 고생을 하고, 막대한 돈까지 썼는데도 건진 건 하나도 없다니……, 에휴~.” “아, 그러셨군요. 간단한 검문을 해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전원, 신분증을 주십시오.”

각자 지니고 있는 신분증을 꺼내 병사에게 내준다. 진짜 신분증은 아니었지만, 각 국에서 정식으로 발행된 것이기에 위조 신분증은 아니었다. 월터는 자작, 다이아 나는 남작. 그런 식으로 하급 귀족으로 되어있었다.

예전에 이곳을 통과해서 사막으로 나갈 때도 이 신분증을 썼었기에, 출국한 사람들의 명부를 확인해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이아나는 여성이라고 하면 오히려 눈에 띄므로 남자라고 되어 있었다.

상대가 하급이긴 하지만 귀족이라는 걸 안 병사의 태도가 정중하게 바뀐다.

“이쪽은 코린트, 그리고 이쪽은 크라레스 제국 분들이셨습니까.”

“우연히 사막에서 만나 동행하게 된 사입니다. 언데드 떼와 만난다면 사람 숫자가 많은 게 유리하니까 함께 동행하게 된 거죠.”

“아, 그러셨군요. 언데드와 접전은 하셨습니까?”

모두가 무장을 갖추고 있는 데다, 사내 둘은 특히나 강해 보였기에 묻는 말이다.

“아뇨. 얘기는 들었지만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여행객의 행색을 보면 전혀 전투를 한 흔적 따위 찾아볼 수가 없다.

쓱 훑어보며 일행의 행색을 확인한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운이 좋으신 분들이군요. 자, 들어가십쇼. 알카사스 왕국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검문을 통과하자마자 다이아나가 제안했다.

“맥주 마시러 가자. 시원한 맥주가 정말 마시고 싶었어.”

하지만 월터는 그런 다이아나를 제지했다.

“아니, 일단은 링카 성을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월터는 살짝 턱짓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를 봐봐.”

성문 쪽이 잘 보이는 전망탑 위에 서 있는 세 사람. 마법사 둘과 그들을 호위하고 있는 병사 한 명.

월터는 제2근위대라 마법사의 탐지 마법에 대한 대책이 다 되어 있겠지만, 그건 다이아나 일행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다이아나는 월터가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저 사람이 왜? 이런 중요한 길목인데, 마법사들이 감시하고 있는 건 당연하잖아.”

“마법사가 아니라 그 뒤의 기사를 말하는 거야.”

투구도 쓰지 않았고, 간단하게 칼 한자루 허리에 차고 있는 모습이다. 일반적인 병사들이 착용하고 있는 갑옷보다 훨씬 방어력이 뒤떨어져 보이는 가죽갑옷만 입 고 있다.

마법사들이 인식저해 마법을 펼쳐놔서 그런지 마나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일반적인 호위병 정도로만 보였던 것이다.

“뭐, 기사일 수도 있지. 여기에는 팔콘 분견대가 주둔하고 있잖아.” “갑옷을 잘 봐봐. 저 갑옷에 그려진 문장은 팔콘이 아니라 콘도르야.”

다이아나는 눈을 실쭉하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더니 감탄사를 터트렸다.

“저 작은 걸 잘도 알아봤네.”

월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이 정도야 보통이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다이아나는 급히 말했다.

“콘도르 기사가 저 한 사람뿐일 가능성은 없으니까 빨리 링카 성을 빠져나가는 게 좋겠어.”

코린트 제국의 제2근위대원인 월터를 알아볼 사람은 없겠지만, 다이아나라면 얘기가 다르다. 치레아 대공가의 영애가 오우거만큼이나 몸집이 우람하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정규기사단 소속이라면 무도회 따위를 통해 멀리서 다이아나를 훔쳐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럼 바로 공간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가자.”

“맞아. 공간이동 끝내고 거기서 한잔하기로 하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

언데드의 공격권을 벗어난 후에도 홉킨스는 부하들을 닦달하여 밤새 달린 것은 물론이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에도 쉬지 않고 도망쳤다.

죽을힘을 다해 언데드의 공격권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밤새 지쳐버린 말은 제대로 걸음조차 옮기지 못했다. 억지로 말을 끌며 강행군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 모든 게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는 언데드 떼가 뒤따라와 공격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알파17이 지정한 곳을 언데드 떼가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 탓에 리오 프라이스는 첫 모험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죽을 고생을 해야만 했다.

드디어 저 멀리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올라 있는 링카 성의 첨탑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눈물을 줄줄 흘려야 했다. 사막으로 가기 전 에 통과했었던 링카 성을 멀리서 봤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까지 안심이 될 수 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드디어 끝이 났구나. 정말 힘든, 힘든 여행이었어.”

환희에 가득 차 있는 프라이스의 모습을 옆에서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말했다.

“처음부터 빡센 모험을 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고 말았네요, 스승님, 하지만 안심하십쇼. 이런 고난도의 모험은 평생에 한 번 얻어걸 리기도 힘듭니다. 어떠십니까? 다음에 다시 한 번……?”

프라이스가 꿈꿔왔던 건 이런 현실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멋진 마법과 웅장한 타이탄의 전투, 그리고 신화에 나올법한 멋진 몬스터들. 특히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드래곤을 먼발치에서라도 꼭 한 번 보고 싶었었다.

프라이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첫 모험에 그 모든 것들이 등장했었다. 드래곤을 비롯한 평생 가도 한 번 만나기 힘든 각종 몬스터들은 물론이고 타이탄들까지. 아르티어스 말마따나 평생에 한 번 얻어걸리기도 힘든 모험을 하고도 살아남았던 것이다.

“아니, 배려는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하겠네. 늙어버린 내 몸으로는 너무나도 과한 꿈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으니까. 딴 건 몰라도 도저히 내 체력이…….” “아닙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늙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정중한 목소리에 말의 내용은 분명 배려가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프라이스는 기분이 무척이나 더러웠다.

“아니야, 이젠 그만하고 싶어. 그렇게 평생을 간절히 원했던 모험이, 이제는 꿈에 나올까 두려운 것이 된 것만 해도 나로서는 충분해.”

“뭐, 그만둘 때 그만두시더라도 제 제안을 한번 생각은 해보십쇼. 이번 사막 행은 전혀 예정에 없었던 것이었기에 착오가 있었습니다만, 지금껏 제가 해오던 고블 린 사냥이라면 편안하게 모험을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이 더러운 사막은 뒤로 하고 저와 함께 고블린 사냥이나 즐기시는 건 어떻습니까?”

“고블린이라……?”

직접 상대해 본 적은 없었지만, 고블린이라면 아주 손쉬운 사냥감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모험담에서도 초반에만 살짝 등장하고 끝날 정도로 형편없이 약한 몬 스터가 아니었던가. 위험도 적고 손맛도 짭짤하게 볼 수 있는 고블린 사냥이라면……?

하마터면 아르티어스의 꾐에 넘어갈 뻔했지만, 프라이스는 곧 그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그는 모험이라면 치가 떨릴 정도로 피곤했기 때 문이다. 며칠 전에 마법진에서 기력을 쪽쪽 빨린 게 아직까지도 회복되지 않은 덕분이다.

“제안은 고맙네만 당분간은 집에서 푹 쉬고 싶군. 피곤해서 죽을 것만 같아.”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씨익 미소 지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연락 주십쇼. 또다시…, 아니 이번에는 안락하고 즐거운 모험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릴 테니까요. 자, 어서 가시죠.”

“아닐세. 자네도 바쁜 몸이지 않은가. 집으로 가는 것쯤이야 나 혼자서도 충분하네.”

프라이스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이 망할 놈과 헤어지고 싶었기에 그의 배웅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프라이스의 옆으로 다가서더니 귀에 바짝 입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쯧, 명색이 스승님이신데 제가 배웅은 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서야 프라이스는 뒤쪽에 아르티어스의 호위병들이 따라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자 놈이 말조심을 하고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아닙니다, 스승님. 자, 가시죠. 용병단에 소속된 몸이라 멀리는 어렵지만, 제자 된 몸으로 공간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까지는 배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르티어스가 호위병들과 함께 프라이스를 배웅하러 가고 있을 때,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어스의 모습으로 변신한 뒤 올란도와 만나고 있었다.

올란도의 얘기를 모두 들은 후에야 브로마네스는 그때 초대형 샌드 웜이 모래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목걸이로 정령과의 소통을 차단하지만 않았다면 정령들이 바로 알려줬었겠지만, 지금은 자신이 직접 마법을 써서 주위를 탐색해야만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그런 위험한 존재가 자신의 주위를 배회했음에도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걸 다른 놈들도 알고 있을까?”

올란도는 슬쩍 브로마네스의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아마 모르고 있지 않을까요? 그놈이 주인님이 계신 쪽으로 가다, 저를 포착했는지 방향을 바꿔 공격해온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니까요.”

그때의 상황을 잠시 떠올려보던 브로마네스는 지금껏 잊고 있었던 뭔가가 생각났다. 그건 당시 지원을 왔던 기사단원들이 언데드 무리의 습격을 당한 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다면 그때 기사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리가 없으니까. 전원 그래듀에이트였던 만큼 설마 모두 샌드 웜에 잡 아먹혔을 리는 없을 거야. 분명 몇 놈인가는 도주해서 그 사실을 상부에 알렸겠지. 흠, 그렇다면 당분간은 널 은밀하게 호위로 쓸 일은 없겠군. 좋아, 이번에는 꽤 고 생했으니 새로운 명령을 내릴 때까지 푹 쉬고 있도록 해라.”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주인님.”

“젠장, 당분간은 자유로군. 정말 힘든 임무였어.’

브로마네스와 헤어진 올란도는 곧장 술집을 향해 달려갔다. 시원한 맥주를 배터지게 마시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