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7권 14화 – 전장의 향방을 바꿀 힘
전장의 향방을 바꿀 힘
“1차 목표는 충분히 달성한 것 같습니다, 소장님.”
로므렌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건넨 보고서였지만, 그걸 읽고 있는 연구소장의 표정은 왠지 떨떠름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엄청난 돈과 시간을 퍼부은 만큼, 지금쯤은 뭔가 결과가 나와야만 했는데, 결국 로므렌이 해낸 것이다.
로므렌 덕분에 실험 결과가 나와 자신의 자리가 더욱 굳건해지기는 했지만, 연구소장은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이건 그가 원하던 결과물이 아니었으니까.
“생존율 향상을 위해서 혈청의 순도를 대폭 낮췄는데, 그 덕분인지 실험체의 혈액을 식물에 투여해도 마물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연구소장은 심드렁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오크 키메라를 생산할 때도 혈청의 순도를 대폭 낮추면 괜찮을지 모른다는 얘기로군.”
로므렌은 은근히 연구소장의 눈치를 보며 급히 대답했다.
“제법 가능성이 크긴 합니다만, 그 방법은 예전에 제가 실험했을 때 실험체의 파워가 급격히 떨어지는 문제 때문에 포기했었습니다.”
그러자 연구소장은 인상을 한껏 찡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 문제는 인간 키메라에도 동일한 현상으로 나타날 게 아닌가?”
“아마 그럴 겁니다.”
주저하지 않고 튀어나오는 로므렌의 대답에 연구소장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흠, 그건 그냥 넘기긴 어려운 문제로군. 안 그래도 나약한 암컷 쪽의 생존율이 높은데, 문제해결을 위해 파워까지 하향시켜야 한다니…….
잠시 뭔가 궁리하는 듯하던 소장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수컷 쪽의 생존율을 높일 방법은 찾아냈나?”
“예, 실험 결과 일전에 보고드렸던 가설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방질이 높은 쪽의 생존율이 높다는 거 말입니다. 지방질이 높은 실험체에 혈청을 투입한 결과, 낮은 실험체보다 비약적인 생존율 향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키메라화에 소모되는 에너지가 너무 많기에 초래된 결과인 것 같습니다.”
“흐음…, 그건 좀 의외의 실험 결과로군. 살이 뒤룩뒤룩 찐 둔해 빠진 것들이 오히려 생존율이 높다니…….?
“예. 그렇기에 요즘 조건에 맞는 실험체를 구하기가 아주 힘들어졌습니다. 지방질이 높은 수컷 노예는 그리 흔한 게 아니니까요.”
음식을 잔뜩 처먹으면서도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야 살이 찐다. 물론 물만 마셔도 찌는 체질이 있긴 하지만 그건 예외적 경우고 대체적인 사람들은 그렇다. 연구소에서 실험에 필요한 실험체는 보통 전쟁포로나 노예를 사와 실험에 쓰인다. 전쟁포로는 활용도가 높기에 입찰 경쟁이 치열했고 노예의 경우, 살이 뒤룩뒤룩 찌도록 주인이 절대 내버려 두지를 않기에 수급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물론 비만인 노예들이 어쩌다 있기는 했지만 정쟁에서 패하거나 가문이 쫄딱 망해 경매에 나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생산한 개체의 숫자는 얼마나 되지? 대충 100마리는 넘었나?”
“예, 소장님. 정확하게는 106마리입니다. 수컷이 35마리, 나머지는 암컷입니다.”
“그 정도 숫자면 어느 정도 실험체 확보가 된 셈이군. 앞으로는 더 이상 숫자를 늘리지 말고, 정신제어 술식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확인에 집중하도록 하게.”
연구소장의 말에 로므렌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집단생활을 하는 몬스터의 경우, 아직까지 정신제어 술식이 깨진 적이 없었습니다만…….”
“그건 그렇지만 몬스터처럼 인간에게도 정신제어 술식이 안정적일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네. 명심하게. 만약 인간 키메라의 정신제어 술식이 깨지게 되면, 몬스터 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골치가 아파지게 될 거라는 걸 말이야. 트롤이나 오크와 같은 몬스터는 술식이 깨졌을 때 본능적으로 발광이라도 했지만, 인간도 그럴 거 라는 보장은 전혀 없어. 어쩌면 눈치를 보느라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을 수도 있지. 만약 그런 경우라면 어떻게 정신제어 술식이 깨졌는지 확인할 수 있겠나?” 연구소장의 말을 듣고 난 후에야 로므렌은 자신의 실험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제어 술식이 정상 작동하는 한 키메라는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만 한다. 즉,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거다. 하지만 정신제어 술식이 깨져버렸다면?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뒤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고 봐야 했다.
그건 아주 위험했다. 연구원들은 마법사들이다. 경계심이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하게 된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실험하던 인간 키메라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골치가 아파진 로므렌은 인상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제어 술식이 정상 작동하고 있는지를 어떻 게 점검할 수 있지?
그런 로므렌을 바라보던 소장이 심드렁한 말투로 물었다.
“표정이 왜 그렇게 엉망이지?”
속마음이야 ‘네놈이 자꾸 일을 만드니 그렇지!’ 하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직속상관에게 차마 그렇게 말은 못 하고 로므렌은 억지로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문제가 있다는 걸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어떻게 술식이 깨졌는지 테스트를 해야 할지 난감해서 말입니다.”
그러자 연구소장은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 곧바로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나? 실험체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극한까지 몰아붙여 보면 금방 드러날 텐데 말이야. 예를 들면 고문을 하던지, 잠을 재우지 않고 뭔가를 시켜보던지……. 만약 술식이 깨지지 않은 정상적인 키메라라면 무슨 짓이든 태연하게 시키는 대로 하겠지.”
그 말에 침울하던 로므렌의 안색이 금방 환하게 바뀌었다. 그런 기발한 방법이 있을 줄이야…….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이 정도 문제쯤은 금방 해결책을 내놓으실 정도로 소장님은 역시 현명하십니다.”
“그건 네가 멍청해서 그런 거지! 이런 사소한 문제까지 내가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하나! 빨리 인간 키메라의 정신제어 술식의 안정성을 확인하도록 해. 참, 그건 그 렇고 일전에 나한테 실험 삼아 몇몇 개체에 무술을 가르쳐 봤는데, 꽤 효과가 좋았다고 보고했었지?”
“예, 소장님.”
“아직도 무술 교육을 시키고 있나?”
“아닙니다. 다른 것도 실험할 게 많은 데다, 실력 있는 무술 교관도 없고 해서 지금은 그만둔 상태입니다.”
각 무기술의 기본기는 정신제어 술식을 통해 키메라의 뇌에 각인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본기를 응용하는 고급 부분은 따로 가르칠 교관이 필요한 것이다. 심드렁한 로므렌의 대답과 달리 연구소장은 아주 만족스러운 안색으로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건 잘했군. 무술 쪽은 키메라의 안정성이 입증된 후에야 하는 게 좋을 테니까 말이야. 일단, 안정성을 입증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고 철저하게 쥐어짜 봐. 참, 기왕에 실험체들을 쥐어짜는 김에 어느 정도까지 근육을 강화할 수 있는지 그것도 함께 알아보는 게 좋겠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장님.”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며 로므렌은 소장의 유연한 사고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사고가 편협된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소장처럼 나이가 많아지면 일단 형성된 편견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다. 자신조차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멍했었는데, 즉시 해결책을 생각해 내다니. 과연 이런 독립 연구소를 꿰차고 있을 만큼 충분히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하긴 오랜 세월 키메라 연구를 한 사람이라면 실험체의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된다. 정신제어 술식이 워낙에 막강한 탓에 주인의 명령 한 마디라면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던져버릴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연구소장의 말은 충분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었다.
로므렌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방금 전까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소장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로드렌이 좀 맹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항상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연구하더니, 결국 근사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예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도출되었다는 점이었지만.
“흠, 보고서를 어떻게 써야 할까?”
로므렌의 보고대로라면, 몬스터를 굳이 키메라로 만들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능력 향상률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 인간인 병사들이 쓸 수 있 는 강화약물과 같은 형식으로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엄청난 능력 향상률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번에는 능력 향상률이 너무 과하다는 게 문제였다. 능력 향상률이 높으면 정신제어 술식이 깨질 가능성 또한 비례하여 증가하게 된다는 게 밝혀졌으니까.
“그래. 성능을 약간 낮추고, 대신 안정성을 대폭 높이는 방향으로 나가는 게 좋겠어. 강화물약으로 능력이 강화된 10만 명의 병사와 전투마! 그 정도면 전장을 지 배하는 건 일도 아니지. 혹시 그래듀에이트를 강화하는 것도 가능할까? 정말 필요한 건 그쪽인데 말이야. 흠, 문제는 이딴 약물로는 마나 운용력을 강화할 수가 없 다는 거지. 그것만 가능하다면 원로원에 진입하는 것도 꿈은 아닐 텐데 말이야.”
마나에 관계된 능력을 강화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성된 약물을 써먹을 곳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실험대상으로 써먹어 볼 만한 건 소규모 용병단이 적합할 것이다.
효과가 좋으면 원로원에 보고하고, 그렇지 않으면 깨끗하게 증거를 인멸해버리면 그만이다. 그 정도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최근, 링카 변경백이 사막민족들을 정벌하고 무역로의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는 소문은 들었다.
상당히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듯싶은 만큼, 2차적인 테스트는 거기에서 진행하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소규모 인원 동원으로는 알아낼 수 없었던 데이터를 많이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막인 만큼, 증거인멸이 용이할 것이라는 것도 마음에 든다.
2차 마도대전이 끝난 지도 벌써 수십 년. 당시 입은 막대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각 나라마다 정신이 없다 보니 대륙은 어쩔 수 없이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후 복구는 이미 다 끝났고, 그동안 쌓여왔던 막강한 국방력은 흘러넘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만약 어떤 일이든 작은 계기만 생긴다면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가 거칠게 불 거라고 연구소장은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로므렌이 개발한 약물은 뜻밖에도 쓸만할지도 모른다.
소수의 초강력 키메라보다는 대량의 병사들의 능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두려움도 모르고,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엄청난 신체 능력을 가진 막강한 병사들. 그야말로 전쟁의 향방을 일순간에 바꿀 수 있는 최강의 병사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약물을 개발해 낸 자신은 단숨에 원로원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용병대부터 시작해볼까?”
드래곤이 적일 가능성이 있는 이상, 한 곳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켜두는 건 좋지 않다.
그걸 잘 알고 있는 그루시아 후작은 자신의 호위분대를 제외한 모든 전력을 링카 영지 여기저기로 분산하여 배치했다. 그리고 휘하의 정찰조들도 그건 마찬가지였 다.
사막에 대한 장거리 정찰은 팔콘 기사단 분견대의 용기사들이 맡고 있었기에,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사막 깊은 곳까지 강행정찰은 하지 않고 있었다. 무엇 보다 초대형 샌드 웜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느 정도 배치를 해둔 뒤 상부의 새로운 지시를 기다렸다. 언제쯤 공격 지시가 내려올까? 그건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라이가 속한 정찰조는 362정찰조와 함께 141분대를 서포트하라는 지시를 받고 작은 요새에 배치되었다.
1개 분대당 2개 정찰조. 이게 타이탄 분대의 표준적인 조합이었다.
141분대는 작은 요새에 둥지를 틀고는, 2개 정찰조를 주위에 포진시켜 주변의 탐색에 집중하고 있었다.
초대형 언데드 샌드웜이 타이탄마저도 삼켜버릴 수 있다는 정보가 하달된 이상, 대비에 만전을 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석마법사는 친구의 호기심에 불을 지피긴 했지만, 설마하니 마르코가 이렇게 빨리 자신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 마르코는 한 공장의 수석책임자였다. 그것도 상 급 타이탄만을 제작·생산하는 그런 공장을 총괄하는 마법사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자리를 비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조수 여덟 명까지 함께 대동하고 달려온 것이다. 그것도 각종 고가의 장비들까지 잔뜩 짊어지고서.
“어서 오게나. 연락하고 겨우 1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 생각보다 빨리 왔군.”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있어야지. 아르곤 놈들이 당최 타이탄에 어떤 짓을 해놨는지 말이야. 그 타이탄과 계약을 맺은 기사를 빨리 이리로 데려오게.”
일전에 마르코와 말할 때, 그 타이탄과 모의전을 했다는 얘기를 해줬었다. 모의전을 하려면 누군가가 계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 그 타이탄의 주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처음 만나서 하는 얘기가 타이탄 얘기라니. 친구의 급한 성격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숨을 푹 내쉬는 수석마법사였다.
“이봐, 가서 라이를 데려오게.”
아르곤의 신형 타이탄에 대한 실험은 사막에서 진행됐다. 사막 쪽으로 조금만 나가면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지역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마르코 일행은 자신들이 가져온 각종 장비들을 라이의 타이탄 조종석에 설치했다.
“그럼 한 번 움직여보게.”
그리고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다양한 동작들을 취해보라며 계속 주문을 넣었고, 라이는 그 요청에 맞춰 타이탄을 움직였다.
마르코 일행이 없는 시간을 쪼개서 링카 성까지 쫓아온 만큼, 테스트는 자잘한 건 패스하고 핵심적 요소만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그중에는 대 타이탄 간의 전투도 포함되어 있었다.
1시간 정도 쉴 틈도 없이 진행되던 테스트가 얼추 끝났을까? 마르코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라이에게 소리쳤다.
“수고했네. 일단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제 조정석에서 내려와도 좋네.”
타이탄에서 내리는 라이에게 마르코가 가까이 다가와 제안을 던졌다.
“이 타이탄을 나에게 양도해 줄 수는 없겠는가? 물론 공짜로 달라는 소리는 아닐세.”
마르코는 지금까지 라이와 연습전을 했던 타이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싸워봤으니, 자네 타이탄보다는 저 타이탄이 훨씬 더 좋다는 것쯤은 잘 알겠지?”
라이는 자신과 연습전을 펼쳤던 카르마2급 타이탄을 힐끗 바라봤다. 자신의 타이탄보다 훨씬 덩치도 크고 무거웠다. 기사 간의 실력 차이도 큰 데다, 타이탄의 성 능까지 차이가 나다 보니 연습전은 일방적으로 밀렸었다.
“예. 충분히 공감합니다.”
“자네 타이탄을 저 카르마2급과 교환해 주겠다는 말일세.”
카르마급은 국가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근위용으로 제작된 만큼 아주 멋지게 제작된 타이탄이었다.
근위대의 타이탄이 최신형인 카오스급으로 대체되며, 카르마급은 전량 레드 이글 기사단으로 보내졌다. 카르마급은 단 50기만 제작되었기에 남은 3개 기사단에 보급되려면 더 만들어야 했다. 카르마2급은 카르마급의 생산단가를 줄이기 위해 외형을 단순화시킨 모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외형을 단순화시켰다고 해도 기본 뼈대가 근위대 납품용이었던 카르마2와 실험용으로 대충 디자인된 라이의 타이탄은 외형에서조차 비교 자체가 될 수가 없었다.
타이탄에 대해 거의 지식이 없었던 라이는 이 제안이 얼마나 파격적인 것인지 몰랐다. 하지만 겉모양만 봐도 저쪽 타이탄이 자신의 것보다는 훨씬 멋있다는 것 정 도는 알고 있었다.
“정말이십니까?”
“물론일세.”
“…..”
너무 형평이 맞지 않는 거래 조건이다 보니 의심이 덜컥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겉모습은 저쪽이 훨씬 멋지지만, 알맹이는 자신의 타이탄 쪽이 훨씬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밑지는 교환 얘기를 꺼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라이가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걸 느낀 마르코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볼 필요가 없네. 내가 자네 타이탄을 원하는 건, 저게 성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해주지. 단지 지금까지의 타이탄은 엑스시온이 한 개 장착되어 있는 데 반해 자네의 타이탄은 두 개를 장착해 넣은 것일세. 두 개를 넣은 이유는 고성능 엑스시온을 구할 수가 없었기에 저성능 두 개를 장착해 그 만큼의 성능 확대를 노린 것이라네.”
마르코는 설명을 하다 보니 목이 타는지 잠시 쉬었다가 다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자네의 타이탄은 아주 커다란 결함이 있어. 엑스시온 두 개가 완벽하게 일치해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보니 약간의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네. 그 때문에 출 력이 안정적이지를 못하고 낮았다가 높았다가 출렁이는 걸 반복하고 있었지. 자네가 그걸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물론 지금 같은 연습전이라면 문제가 되 지 않겠지만, 찰나의 순간에 생사가 오가는 실전이 된다면 그건 치명적인 결점으로 다가올 걸세. 그리고 출력이 출렁이는 와중에 손실되는 분량도 클 테니, 일반적 인 타이탄에 비해 마나 소모도 훨씬 클 것이 분명해. 그 수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좀 더 정밀하게 실험을 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말이야.”
설명을 끝까지 들은 라이는 힐끗 수석마법사를 바라봤다.
비록 자신이 계약을 했다고는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교환을 해도 되나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전투 중에 습득한 타이탄이기는 했지만 타이탄이 가지고 있 는 가치는 그런 일반 관례를 가볍게 생략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라이의 눈길을 알았는지 수석마법사는 피식 웃으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콘도르 기사단 소속의 기사가 습득한 타이탄이었고, 적국의 타이탄을 연구하기 위해 교환해 준다는 훌륭한 명분까지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콘도르 기사단 의 수석마법사이다. 이 정도 일쯤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수석마법사의 승낙이 떨어지자 라이는 마르코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환을 제의한 상대는 수석마법사의 친구인데다, 아주 고위급의 마법사처럼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이 아주 고급스럽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대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는 게 아닐 것이다.
당연히 이 제안을 승낙하는 게 좋다는 걸 라이는 알고 있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만약 교환하게 되면 케이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연히 분해해서.
여기까지 말하던 마르코는 황급히 말을 멈췄다. 듣고 있던 라이의 표정이 확 변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타이탄과 교환해 준다고 해도 처음 계약을 맺은 타이탄에게 애정을 갖는 기사를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마르코의 짐작은 정확했다.
라이는 마르코의 대답에 교환을 원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짐을 느꼈다. 좀 더 성능이 좋은 타이탄을 얻기 위해 케이론을 죽음으로 내몰기 싫었기 때문이다. 라이가 샌드웜의 뱃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느꼈던 감정은 이젠 죽었구나 하는 암담함이었다. 그때 우연히 케이론을 만나 영혼의 맹약을 맺었고, 그와 함께 샌드 웜의 항문을 통해 밖으로 나옴으로써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케이론은 라이의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금 성능이 뛰어난 타이탄을 얻기 위해서 케이론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것이 라이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건 라이가 타이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내린 감정적인 판단이다. 카르마2급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었다면 결코 내릴 수 없는 결론인 것이다. 그만큼 둘의 성능 차이는 절대적이었으니까.
“죄송하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샌드 웜의 뱃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케이론 덕분이었습니다. 그런 생명의 은인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조심스럽게 건넨 거절의 말이었지만, 뜻밖에도 마르코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라이로서는 의외의 상황이었다. 제의가 아닌 상부의 명령으로 타이탄을 뺏어가도 아무 소리 못 할 정도로 마르코는 높은 위치의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뭐,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연락하게나. 참, 혹시 내가 필요로 할 때 자네 타이탄을 살펴볼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구먼.”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 정도는 얼마든지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르코가 강압적으로 나가지 않은 건, 아르곤의 타이탄을 분해한다고 해서 저 안쪽에 감춰져 있는 마법진을 분석해 낼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곤 제국에서 새로운 형태의 타이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그리고 오늘 행해진 실험으로 인해 그 타이탄의 기본 적인 성능은 이미 충분하게 알아낸 상태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