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7권 15화 – 데스 나이트 미네르바 (37권 끝)

데스 나이트 미네르바

기사단 정찰조와 페가수스 용병단 1개 연대가 언데드 군단이 잠복하고 있던 지역을 관통하고 있을 때, 정작 그곳을 관리하고 있어야 할 알파17은 다른 일 때문에 본부에 가 있었다.

샌드웜을 지휘하는 알파3이 상당량의 그래듀에이트 시체 및 타이탄을 거둬들인 후, 알파5의 데스 나이트 생산 작업은 점점 더 활기를 띄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데스 나이트는 죽은 그래듀에이트의 영혼과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다.

계약이라는 게 네 소원을 들어줄 테니 평생을 나에게 복종하라는 노예계약이었기에, 그걸 받아들이는 정신 나간 영혼은 극히 드물었다.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나 집착이 있지 않은 한 계약을 받아들이는 자는 없다.

더군다나 그 영혼 계약은 그야말로 사기였다. 새로이 태어난 데스 나이트는 자아를 지니지 못하고 있기에, 그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조항을 이행해 주지 않아도 끝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듀에이트의 시체가 있고, 또 절대적인 신물인 마신의 은혜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마신의 은혜 옆에 시체를 놔두고 장시간 암흑의 기운으로 유골의 정기를 타락시키는 것만으로도 데스 나이트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얻는 게 있는 만큼 잃는 것 또한 있었다. 영혼이 제외되기에 데스 나이트의 성능은 순수하게 뼈의 품질만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영혼과의 계약을 한 데스 나이트는 오랜 세월 정기를 축적하면 과거의 자아를 회복하게 된다. 그 말은 곧 자신이 예전에 익혔던 기술들을 다시금 쓸 수 있게 된다 는 얘기였다.

그에 비해 유골을 마신의 은혜로 타락시켜 만든 데스 나이트는 영혼이 애초에 빠졌기에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나중에 자아를 가지게 된다 고 해도 과거에 익혔던 기술 따위가 있을 리 없기에 새로이 자신이 익혀 나가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데스 나이트를 포섭하는 게 좋겠지만, 그들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주인인 드래곤이 그 렇게 성격이 느긋한 생명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주인의 명령이 떨어졌으면 무조건 해야만 하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그렇기에 데스 나이트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알파5는 포섭을 해보고 안 되면 무덤을 파헤쳐 뼈를 가져와 강제적으로 데스 나이트로 만들고 있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알파17의 물음에 알파2는 느긋한 어조로 대답했다.

《주인님께서 새로운 실험을 해볼 것을 지시하셨다. 모든 준비가 다 갖춰졌는데, 거기에 쓸만한 실험체가 없어서 자네를 부른 거지.》

《제 데스 나이트가 필요하십니까?》

《자네가 제법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손대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가 없구만. 웬만한 데스 나이트는 이미 다 실험에 소모했어. 심지어 자네 것보 다 더 우수한 것들까지도…….》

《그렇게까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아까워할 필요는 없다네. 새로운 데스 나이트를 지급받게 되면 왜 저런 쓰레기를 지금까지 아끼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테니까 말이야.》

알파3이 완벽한 상태의 타이탄을 가져온 후부터 그들의 주인인 실버 드래곤은 그걸 운용할 수 있는 기사를 원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주인의 지시를 받은 심부름꾼 몇 명이 서쪽 대륙으로 파견되어 용병기사의 고용을 타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언데드의 편리함을 알아차린 드래곤이 데스 나이트를 이용해 타이탄을 조종할 수는 없는지에 대한 연구를 하라는 지시를 알파2에게 내렸다는 데 있었다.

데스 나이트가 가슴에 품고 있는 베슬에는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은 데스 나이트의 생명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타이탄을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은 죽음의 기운과 정반대인 생명의 기운, 마나라는 점이다

데스 나이트가 생명의 기운을 뿜어내야 한다는 모순이 발생해야만 타이탄의 조종이 가능하게 되니, 알파2를 비롯하여 그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리치들이 골머리 를 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조금씩 방법을 개량해오며 수많은 실험을 했지만, 그중 살아남은 데스 나이트는 단 1기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실험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들의 주인에게 불가능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상당히 특별한 녀석이라 될 수 있으면 보존해 두고 싶었는데…….’

하지만 알파2의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드래곤이 귀찮아서 대충 지어준 이름일지라도 순번이 정해진 이상 그에 따라 계급서열이 정해져 버린 것이다. 아무리 공을 세운다고 해도 그 순서는 바뀔 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알파2는 주인님의 지시에 따라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는 명분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의 지시를 거부했다가는 자칫 주인의 지시를 거부했다는 모함으로 연결될 수도 있었다.

괜히 데스 나이트 하나 살리려다가 잘못하면 자신이 처분당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걸 잘 아는 알파17은 억울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의 지시인데 그깟 데스 나이트가 뭐라고 제가 아끼겠습니까.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가져가셔도 괜찮습니다.》 《클클, 전폭적인 협조, 고맙구먼.>

알파2는 전혀 고맙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알파2는 데스 나이트를 향해 손짓하며 지시했다.

《따라와라.>

알파 17의 데스 나이트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뚜벅뚜벅 그의 뒤를 따라갔다.

어느 순간 미네르바는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던 시커먼 기운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건?》

갑자기 뇌리에 떠오르는 장면 하나.

그렇다. 누군가와 계약을 맺었었다. 데스 나이트가 되어준다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데스 나이트가 뭔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추악하기 짝이 없는 언데드 마물이었다!

하지만, 매력적인 제안이기도 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서 흥정을 걸고 있는 리치와 대등한 존재로 알려져 있는 언데드의 정점들 중의 하나가 데스 나이트였으 니까.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제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데스 나이트가 됐던 뭐가 됐건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도 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대로 죽어버리면 그토록 온 힘을 다해 소중히 키워왔던 조국 크루마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 자신의 죽음이 알려진다면 주변 강대국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에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 고위귀족들이 자신의 탐욕을 채우 기 위해 얼마나 발광을 하겠는가.

그동안은 자신의 힘으로 그들을 강제로 억눌렀지만 만약 자신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 곧바로 탐욕의 이빨을 들이대 크루마 제국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게 분명했 다.

그만큼 그녀는 국가와 황제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거의 독재자와 같은 권력을 휘두르며 크루마 제국을 지탱해 왔었다.

그러는 와중에 양지에서 차마 밝힐 수 없는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저질러왔는지 모른다. 물론 그 모든 것이 국가를 위한다는 변명으로 다 치부해 버렸지만 말이 다.

어쩌면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에 죽음을 당한 게 세인들이 말하는 천벌이라는 것을 받은 것인지도…….

그 모든 것을 총명한 그녀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새로운 생명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껏 왜 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살 아왔는데!

“계약을 받아들이겠다.”

그녀는 데스 나이트가 되면, 기회를 봐서 리치를 없애버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생각이었다. 언데드가 되면 어떤가.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은 자신의 겉 모습이 어떻게 바뀌건 상관없이 계속 충성을 바쳐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쓰는 것이다. 대크루마 제국의 찬란한 역사를! 할 일이 너무나도 많 다. 너무 많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불사의 마물이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계약을 하겠다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모든 게 암흑에 삼켜지기 시작한다.

“이게 데스 나이트가 되는 과정인가?”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멈춰버렸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극심한 고통과 함 께 갑자기 정신이 든 것이다.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으으윽!》

자신에게서 토해져 나온 소리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 따위가 아니다.

“그렇지. 나는 데스 나이트가 된 거였지. 그런데 가슴이 왜 이렇게 아프지? 이런 극심한 통증이라니…….?

뭔가 상황이 묘했다. 구속 틀 위에 눕혀진 채, 손과 발은 물론이고 목과 허리까지 단단히 묶여있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다. 목이 묶여있어 머리조차 움직이기 힘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방안의 모든 게 훤히 보인다. 아니 느껴진다. 신기한 건 자신의 턱은 물론이고 눈으로 절대 볼 수 없는 입 안의 이빨들까지도 하나하나 다 느 껴진다는 점이다. 각종 기운들만이 뚜렷이 느껴지는 듯한 괴상한 색깔들. 신기하게도 꼭 눈에 보이는 것처럼 뇌리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 감각 하나만으로도 자신이 언데드가 되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제부터는 이렇게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 건가…….?

곧이어 그녀는 가슴에서 느껴지고 있는 지독한 통증의 원인을 찾아냈다. 갈비뼈의 중심에 구형의 시커먼 구슬이 위치해 있는 게 보인다. 그 구슬을 향해 각 몸의

뼈대와 연결된 암흑의 기운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것이 자신의 생명의 중심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런데 그 생명의 중심인 소중한 베슬에 굵은 주삿바늘처럼 생긴 것이 깊숙이 박혀있었고, 그 바늘에서 불의 기운을 띈 마나가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생명의 핵인 베슬 안은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죽음의 기운과 생명의 기운이 무시무시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중인 것이다.

만약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당장 정신줄을 놨을 정도로 지독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뭔가 자신이 당하는 것 같지 않은 이상스러운 고통의 감각이다. 아마도 언데드 가 된 탓에 전신의 신경이 사라졌기에 진정한 고통은 느낄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 덕분에 이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고.

고통이야 어떻건, 극성인 기운이 베슬 안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는 건 언데드인 그녀에게 있어서 치명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생명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은 밀 려 들어오고 있는 마나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실험을 통해 알파2는 데스 나이트가 가급적 오랜 시간 생존할 수 있도록 투입하는 마나의 적정량을 찾아냈던 것이다. 물론, 그건 데스 나이트가 받 는 고통을 더욱 길게 연장시키는 역할만 했지만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의식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던 죽음의 기운이 밀려난 덕분에 간신히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아니 소멸을 직감했다. 왜냐하면 생명의 기운에 점유 당한 쪽의 베슬의 두께가 급격히 깎여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미친놈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이 상태라면 몇 분 지나지 않아 언데드인 자신의 몸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더 구나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는 여유조차 없다.

‘젠장,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런 뭣 같은 상황이냐!?”

데스 나이트인 그녀가 마나를 조작할 생각을 감히 할 수 있었던 건, 살아생전에 마나를 극한까지 다뤄봤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그거 외에 다른 방법이 전혀 없기도 했고.

그녀는 먼저 의식을 집중해 베슬 안의 마나를 유도해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마음먹은 대로 마나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소량을 제어하는 데 성공한 그녀 는 곧장 베슬 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마나를 제어하여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베슬을 붕괴시키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면서.

그녀가 찾아낸 방법은 마나를 베슬의 중심부에 집중시켜 베슬이나 암흑 기운과 충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제어에 따라 마나는 회전의 속도를 천천히 올리며 베슬의 중심부에 모여 압축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암흑기운은 베슬의 표면 쪽으로 바짝 붙여 손상 된 베슬을 수복하게 하는 한편, 마나와는 충돌하지 않도록 유도했다.

‘휴우~ 일단 시간은 벌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적은 양이긴 했지만 마나가 외부에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고 있는 만큼, 베슬의 중심부에 모으는 것에도 한계가 올 게 뻔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암흑기 운과 부딪치는 순간, 그 둘은 충돌을 일으킬 거다. 더구나 그때쯤 마나는 더욱 고농도가 되어있을 테니 암흑기운이 마나를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분명 순식간에 무 너져버릴 게 분명했다.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해. 어떻게 해야 하지?”

떠오르는 좋은 방안이 없었다. 데스 나이트로 계속 살아오며 여러 경험을 쌓은 것도 아니고, 뼈대 안을 충만하게 채우고 있는 암흑기운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백지 인 상태다. 오히려 지금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마나에 대한 지식이 더 많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이 두 기운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만 봐도, 마나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미치겠네! 이게 다 그 미친 드래곤하고, 망할 년 때문이야!’

미네르바는 정신을 되찾자마자 드래곤조차도 풀지 못한 난제를 풀어야 했다. 실패는 죽음, 아니 영원한 소멸이었기에.

『<묵향>38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