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7권 3화 – 사막의 참극
사막의 참극
참극은 병사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에 일어났다.
알카사스 왕국의 링카 영지에서 출발한 6만에 달하는 대병력, 왕국의 서쪽 관문을 책임지고 있는 링카 변경백이 공을 들여 키운 정예병이다.
도시국가에서 파병한 구원병이 매복지까지 도달하려면 며칠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남쪽으로 정찰병들을 촘촘하게 깔아놓은 후, 앞으로 다가올 전 투에 대비해 푹~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이다.
한낮에는 갑옷조차 입기 힘들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해가 진 후에는 이빨이 덜덜 떨릴 정도로 차갑게 기온이 식는다. 그런 상황이니 체력을 유지하는 것도 쉬 운 일이 아닌 것이다.
도시국가의 구원병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꽤 남았기에 아무런 전투 준비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그것도 수많은 언데드의 기습을 당한 것이다.
최대한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갑옷조차 다 벗은 상태에서 당한 기습이었기에 그건 정말 악몽과도 같았다.
갑옷을 입는 건 생각조차 못 하고 모두들 무기만 주워 들고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방패를 든 사람조차 거의 없었을 정도였으니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할 리 없었다.
놀랍게도 전투는 시작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종료되었다.
사막 전체가 피로 물들었고,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시체들이 모래 위를 나뒹굴었다.
《단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크하하핫!》
수많은 사막 몬스터의 사체로 이뤄진 언데드 집단을 지휘하고 있는 해골인간.
사람의 귀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소리를 내질렀지만, 언데드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병사들을 학살했다.
걸레짝이 된 낡은 옷 사이로 말라붙은 살점과 뼈가 살짝살짝 보인다.
엄청난 수의 언데드 집단을 지휘하고 있는 것만 봐도 저급한 스켈레톤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가슴뼈 중간에 둥실 떠 있는 시커먼 색의 구체(球體)! 스켈레톤이 진화를 거듭해 엘더(Elder)급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보유한 죽음의 기운을 한군데로 끌어모아 다크 베슬(Dark Vessel)을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다크 베슬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해골인간은 스켈레톤의 정점 중 하나라는 리치(Lich)였다. 그것도 주인으로부터 특별히 ‘알파17’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아주 고등한 리치였다.
구분을 위해서 주인이 편의상 대충 붙여준 이름이긴 했지만, 주인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은 리치들은 자신의 이름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시키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멍청한 하급 언데드들과의 확실한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부정한 기운을 몸속에 축적하며 성장해, 이윽고 자아(自我)를 획득하여 독립적인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때, 거대전갈을 마치 말이라도 되는 듯 타고 해골인간 하나가 달려왔다.
그는 전갈의 등 위에 올려뒀던 시체들을 아래로 내던졌다.
옷차림으로 봐서 그 시체들은 마법사인 듯 보였다.
알파17 리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끝냈느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해골인간. 그 해골인간의 가슴 속에도 다크 베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자아를 지니지 못한 탓에 제대로 언어 소통이 안 된다는 게 속 터지는 노릇이긴 했지만, 하급이라도 데스 나이트(Death Knight)였다.
전력에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다.
《이제 시작하자. 시간이 없다.》
용기사들은 밤에 움직일 수 없다. 그렇기에 해가 뜨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 하는 것이다.
《이리 와라.》
알파17의 지시를 받은 데스 나이트가 전갈에서 내려 그에게로 다가온다.
오래전에 언데드가 되었는지 데스 나이트가 착용하고 있는 갑주는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허름한 옷차림과는 다르게 그가 등에 지고 있는 물건은 너무나도 눈에 띄는 것이었다. 길이 2미터 남짓, 둘레 1미터 남짓의 원통형 막대 두 개. 한눈에 봐도 범상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막대의 표면에 새겨진 수많은 해골과 뼈들이 서로 엉킨 듯한 끔찍한 형상의 조각은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고, 끊임없이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 을 뿜어내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막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악한 기운에 잠시만 노출되어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알파17이 들고 있는 지팡이 역시 그에 못지않은 끔찍스러운 형상이었다.
데스 나이트가 가지고 있는 막대와 마치 한 짝이라도 되는 듯 지팡이 표면은 해골과 뼈가 뒤엉켜있었고, 지팡이에서는 더욱 흉흉하고 암울한 기운이 거칠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지팡이를 위로 치켜들면서 기괴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알파17.
그러자 주문에 동조해서 그의 다크 베슬이 요란하게 맥동치기 시작했다.
리치는 이 다크 베슬 속에 모아둔 부정한 기운을 이용하여 흑마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끼에에엑!!
낮게 깔리는 아주 껄끄러운, 도저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괴상한 소리가 알파17에게서 울려 나온다.
그와 함께 데스 나이트의 등에 지고 있던 끔찍한 형상의 2개의 막대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점차 노도와도 같은 기세로 지팡이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지팡이에서 뭐라 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음산한 암흑의 기운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놀라운 능력을 지닌 아티펙트와 그걸 숨 쉬듯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리치.
이 둘의 협업이 만들어 낸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턱이 빠질 정도로 경악스러운 상승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모두 일어서라!》
사람의 청각으로는 알아듣기 힘든 소리였지만 사체들은 아무런 무리 없이 알아듣는 모양이다.
그의 명령에 호응하듯 수도 없이 많은 사체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경악스러운 권능이었다.
만약 월터 일행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팔시온의 지시를 기다리느라 반나절 이상 대기하고 있어야 했던 데다, 그들이 추적 중이었던 언데드 떼도 이곳에 아직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馬)의 사체 2만을 포함해 합계 8만이 넘어가는 엄청난 언데드 집단.
하지만 말 위에 타고 있는 시체는 아무도 없었다. 데스 나이트급이 아닌 이상, 시체마를 조종할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는 기마병이었더라도 지금은 말과 사람이 각기 따로 움직였다.
그렇다고 해서 죽기 전에 익힌 것들이 언데드에게 전수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른 좀비들에 비해 훨씬 더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고등한 개체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그런 개체들은 모두 마법사나 신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직 자아를 지니고 있지는 못했지만, 부정한 기운을 좀 더 흡수하게 된다면 고등한 리치로 진화하게 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너희들은 나에게로 오라.》
알파17의 명령에 따라 마법사와 신관 복장을 하고 있는 좀비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크흐흐…, 괜찮군. 그래듀에이트의 시체가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숫자가 제법 되니 이 정도만 해도 만족하시겠지.》
대량의 언데드 병력을 손쉽게 확보한 알파17은 흥겨운 기분으로 새롭게 자신의 수하로 들어온 리치들을 살펴봤다.
134채씩이나 되니 상당한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알파17은 리치들을 본거지로 공간이동 시켰다.
본거지로 보내진 리치들은 어둠의 기운을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방으로 옮겨질 것이다.
리치나 데스 나이트처럼 고위 언데드들이 보다 힘을 강화할 수 있도록 주인이 공을 들여 만든 아티펙트가 방 중앙에 위치해 있는 놀라운 장소였다.
알파17처럼 임무를 부여받은 게 아니라면 고위급 언데드들은 모두 다 그곳에서 대기하며 힘을 키우게 된다.
알파17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안구(眼球)가 없는 그의 시야는 생명체가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의 시야에 보이는 건 천연색의 다채로운 색상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기운들이 보인다…, 아니 느껴지는 거라고 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도 과거 살아있었을 때의 습관일 뿐, 그에게는 고개를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저 습관적으로 하늘을 둘러본 것일 뿐, 해가 뜨려면 아직 4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방금 전에 발휘되었던 엄청난 기운의 회오리라면 수백 킬로미터 밖에 있는 마법사라도 감지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마도왕국이라 불리는 알카사스의 마법탑이라면, 더욱 정교하게 그 위치까지 특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실버 드래곤들이 이곳에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두지 않았다면, 이상 현상을 감지하자마자 곧바로 공간이동 해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 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곳으로의 공간이동은 불가능했다. 그런 만큼 적들은 새벽에 시야 확보가 되는 대로 용기사를 보낼 것이다.
지금 그가 거느리고 있는 언데드 8만은 갓 생명을 받았기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다. 링카 영지군을 기습 격멸시켰던 정예 언데드 집단과는 능력이나 이동속도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 때문에 알파17은 정예 언데드 집단을 전투가 끝나자마자 다른 곳으로 먼저 이동시켰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하자 알파17은 언데드 집단을 이끌고 이동을 시작했다.
갓 언데드가 된 상태라 모두들 움직임이 느릿느릿하다. 속이 터질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알파17은 짜증 하나 내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모래 위 에 남겨진 흔적을 바람마법으로 지워나갔다.
모래위의 흔적이었기에 바람마법으로 그 흔적을 흩어지게 하는 건 아주 쉬웠다.
언데드 집단을 이끌고 가급적이면 참사가 벌어진 전장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여 매복시켜야 했다.
귀찮다고 전장 근처에 매복시키면 아무리 모래 속 깊숙이 숨겨둔다 해도 들킬 우려가 있었다.
용기사의 정찰에 마법사가 함께 한다 해도 하늘을 고속으로 이동하며 훑는 방식이라면, 모래 속 깊이 파고든 언데드들을 포착하는 건 힘들다.
하지만 참사가 벌어진 지점을 특정하고, 강력한 탐색마법으로 그 주위를 샅샅이 조사해 나간다면 얘기가 다르다.
그렇기에 가급적 전장에서 최대한 멀리 거리를 벌려 매복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섯 시간쯤 언데드 집단을 이동시킨 알파17은 더 이상의 이동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이미 해가 뜬지 한 시간쯤 지난 상태다.
링카 성과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용기사가 날아올 위험이 점차 커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언데드 집단에 모래 속 깊숙이 몸을 숨기라고 지시한 후, 알파17은 호위겸 짐꾼으로 데려온 데스 나이트에게 지시했다.
《성상(聖上)의 보권(寶卷)을 내려놔라.》
『마신의 은혜라는 아티펙트를 마신의 권속이라 할 수 있는 언데드들은 감히 『마신』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고 성상의 보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알파17의 지시에 따라 데스 나이트는 자신의 등에 지고 있던 두 개의 아티펙트들 중 하나를 끌러 모래 바닥에 내려놨다.
끊임없이 암흑의 기운을 뿜어내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아티펙트였지만, 언데드들에게 있어서 이것만큼 은혜로운 지보도 없었다. 그들의 생명 그 자체였으니까.
알파17이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우자 마신의 은혜는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며 모래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대로 지하 20미터 정도 깊이에 넣어두면, 이 일대에 매복시킨 모든 언데드들에게 충분한 암흑의 기운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만약 몬스터의 사체가 있다면 그것도 언데드로 만들어주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알파17은 지금껏 사막 여기저기에 이 마신의 은혜를 파묻고 있었던 것이다.
알파17은 품속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지금껏 그와 그의 동료 리치들이 마신의 은혜들을 묻어놓은 위치를 표시해 놓은 지도였다.
지금까지 그와 동료들이 사막에 묻은 마신의 은혜는 무려 500개가 넘었다.
이만한 숫자의 마신의 은혜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주인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알파17은 먼저 방금 전에 마신의 은혜를 파묻은 위치를 지도에 표시했다. 그런 후, 지도를 천천히 살펴봤다.
《저쪽으로 20킬로 지점인가.. 약간은 도움이 되겠지만, 8만의 양식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절반은 4일쯤 더 북상해서 거기에다가 매복시키는 게 좋겠군.》 마신의 은혜가 아무리 엄청난 재보라고 해도 하나만으로 8만씩이나 되는 하급 언데드에게 암흑의 기운을 제공할 수는 없다. 대략 4~5만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알파17은 데스 나이트와 함께 적의 대군을 몰살시켰던 장소 – 즉, 정예 언데드 집단과 헤어졌던 곳으로 공간이동 했다.
그곳에는 정예 언데드 집단이 이동하며 남긴 흔적이 사막 저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알파17은 정예 언데드 집단이 지나간 길을 뒤따르며 그 흔적을 빠르게 지워나 갔다.
정예 언데드들의 이동속도가 비록 빠르긴 했지만, 알파17의 이동속도와 비교될 수는 없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알파17은 정예 언데드 집단을 따라잡았다.
《정지! 모두 모래 속으로 들어가라.》
수면이나 휴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언데드였기에 목적지까지 몇 날 며칠이고 달려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적에게 들킬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밤에만 이동해서 목적지까지 가라는 지시를 내릴 수도 없었다.
자아를 갖추지 못한 이상, 간단한 명령이라면 몰라도 그런 복잡한 명령은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귀찮긴 하지만 이렇게 밤마다 와서 언데드들을 목적지까지 이동시키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알파17은 슬쩍 하늘을 바라봤다. 신경을 써서 바람 마법을 약하게 구사하며 오긴 했지만, 아무래도 흔적을 들킬까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다. 링카 영지에 위치된 마법탑의 탐색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기에 그런 것이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용기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제서야 알파17은 마음을 놓으며 다시금 지도를 꺼내 살펴보았다. 링카 영지를 습격하기에 적당한 위치에 있는 마신의 은혜를 찾는 것이다.
마침 적당한 위치에 숨겨져 있는 게 하나 눈에 띄었다. 링카 영지를 습격하기도 좋고, 만일의 경우 무역로 쪽을 공략하기도 좋은 위치였다.
《일단은 이곳에 언데드들을 주둔시켜 놓으면 되겠군. 크크크크…….》
알파17은 그러다 불만 어린 시선으로 호위인 데스 나이트를 노려봤다. 저놈이 조금이라도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의 일이 약간은 편해졌을 텐데…….
물론 이런 불만조차 사치였다. 주인 밑에 있는 리치들 중에서도 자아를 지녀 이름을 하사받은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마신의 은혜를 통해 계속 성장시키고 있는 만큼 조만간에 이름을 하사받는 자들의 숫자는 하나둘 늘어날 것이다.
사실, 성장 가능성이 높은 상급 언데드들은 모두 다 『성장의 방에 넣어 집중적으로 육성시키고 있는 중이다.
방 중앙에 마신의 은혜를 놓고, 그걸 중심으로 상급 언데드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다. 자신처럼 밖으로 돌아다니며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은 자 아를 갖췄거나, 아니면 자아를 가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언데드뿐이다.
호위인 저 데스 나이트가 자신에게 할당된 것도, 그가 성장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으로부터 데스 나이트 생산의 중임을 맡은 것은 알파5였다.
초기에는 알파17도 그의 휘하에 배치되어 대륙 곳곳을 훑으며 그래듀에이트의 무덤을 찾아다녔었다.
영혼과 협상을 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건 흑마법사와 리치뿐이었기에, 비교적 한가한 리치들이 거기에 총동원되었었다.
하지만 포섭에 성공한 데스 나이트는 기대와 달리 너무 적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꾐에 넘어갈 만한 영혼들은 이미 마도전쟁 때 거의 다 데스 나이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알파17이 자신의 호위인 데스 나이트의 영혼을 만난 건 무명합장묘였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시체를 한곳에 합장시켜 놓은 커다란 묘였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응답이 있었다.
강한 영기를 지닌 영혼이었기에 알파17은 무척 기대를 했지만 만들어진 결과물은 형편없는 졸작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데스 나이트는 육체를 가지고 있지 못한 영혼으로 만들었고, 어쩔 수 없이 주변의 잡뼈들로 자신의 몸을 형성해 데스 나이트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데스 나이트들 중에서도 더욱 하급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육신이 분쇄됐음에도 흩어지지 않고 남아있었을 정도로 강한 집착과 원념(怨念)을 지니고 있던 영혼이다. 하지만 자신의 육신을 잃어버린 탓으로 그가 제대로 된 데스 나이트로 성장할 가능성은 영영 사라져 버린 셈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녀석이라 할 수 있었다.
호위인 데스 나이트를 바라보던 알파17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거나, 가까운 시일 내에 이름을 하사받은 데스 나이트가 하나라도 나와야 할 텐데…….’
아직까지 주인에게 이름을 하사받은 상급 언데드는 모두 다 리치들뿐이다. 전력 균형을 생각한다면 이건 좀 문제가 있었다.
요즘 알파5는 더 이상 대륙을 떠돌며 그래듀에이트의 영혼들과 협상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는 협상에 응하지 않는 놈들밖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그것들의 유골을 가져와 마신의 은혜에 오염시켜 데스 나이트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영혼이 빠지는 만큼 제대로 된 데스 나이트가 만들어질 가 능성은 없었지만,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때의 인연으로 알파5와는 만날 때마다 약간씩이라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알파5에게 들은 말로는, 최근 그는 대륙에서 이름을 떨쳤던 전설적인 영웅들의 유골을 훔쳐와 그것들을 마신의 은혜로 오염시키고 있다고 했다.
영혼을 타락시키는 게 최고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결과물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물론 전설적인 영웅의 뼈라고 해서 다 최고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 영기가 옅어지게 되고, 주변 환경이 나쁘면 그건 더욱 가속화된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웅의 뼈가 데스 나이트로 만들기에는 최고의 재료인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뼈를 수급하기가 힘들었다. 아직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은 영웅의 묘는 그만큼 경비가 철저하기에 도굴하기가 힘든 것이다. 코린트 제국의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과 크루마 제국의 지크리트 루엔 공작의 유골을 확보했으며, 조만간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의 유골도 입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알파의 자랑에 알파17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본이 엄청난 만큼 얼마나 뛰어난 성능의 데스 나이트가 만들어질지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얄궂게도 자신의 호위인 데스 나이트와는 정반대의 경우다. 이쪽은 영혼만이……, 저쪽은 찬란한 유골만이 있는 셈이니까.
둘을 합쳐서 데스 나이트로 만들 수만 있다면 최고의 걸작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이미 한쪽이 데스 나이트가 되어버린 상황이었기에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모쪼록 훌륭한 결과물이 나왔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