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7권 4화 – 노마법사의 절망
노마법사의 절망
베이라 성의 외성지역을 장악한 홉킨스는 내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병영에 임시본부를 차렸다.
벽 곳곳에 얼룩져 있는 핏자국들이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전술적으로 봤을 때 여기만큼 넓고 좋은 건물이 없었기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병영이었던 만큼 다수 병력이 휴식을 취하기에도 좋고,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농성하기도 좋았다. 그리고 내성과의 거리도 가까워 만약 내성의 적들이 밖으 로 치고 나온다면 급히 구원하러 달려가기도 용이했다.
지휘본부로 정한 커다란 방 안에 앉아있던 홉킨스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걱정한 것에 비해 너무 수월하게 성문을 통과하여 외성지역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부하들이 약탈해 놓은 최고급 술을 술잔 가득 부어 통쾌하게 들이켰다.
“크으, 기가 막힌 맛이네! 내가 언제 이런 비싼 술을 마셔보겠냐…….”
지휘본부 한쪽 구석에는 부하들이 홉킨스 몫으로 가져다 놓은 최고급 술들과 금은보화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점령한 외성지역을 약탈한 부하들이 관례에 따라 홉킨스의 몫으로 가져다가 놓은 것이다.
여기에 자리 잡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중이다.
베이라 성이 동서무역의 중심도시였던 만큼, 약탈품의 질과 양은 홉킨스와 부하들을 크게 만족시켜주고도 남았다. 하지만 가장 많은 보물이 쌓여있을 게 뻔한 내 성(城)을 아직 점령하지 못한 게 아쉽기만 했다.
물론 지금까지 약탈한 보물들만으로도 당장 용병 생활을 청산하고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렇기에 내성 쪽을 바 라보며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그나저나 아깝게 됐네……..
이번 임무는 너무나도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이 기회를 최대한 살려야 했다.
모든 대대장들이 부하들을 닦달하여 약탈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다. 그 때문에 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앉아있는 건 방금 전까지 내성에 대한 경계 임 무를 하다 56대대와 교대하고 돌아온 35대대장 미하엘뿐이었다.
미하엘을 제외한 35대대원들은 모두 눈이 벌게져 약탈하러 달려가 버린 상태다.
“내성 쪽의 동향은 어때?”
“쥐 죽은 듯 조용합니다. 아마 구원군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죠.”
보고를 하면서 미하엘은 탁자 위에 놓인 술을 한 잔 따랐다. 짙은 황금빛 액체가 영롱하다. 마시기 전에 향을 음미해 보는 미하엘. 그와 동시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 졌다. 생각한 것보다 강한 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망설일 것 없이 단숨에 쭉 들이켰다. 교대를 한 이상 약탈 외에 더 이상 할 일도 없었다. 그는 두세 잔 더 마신 다음, 방에 들어가서 푹 잘 생각이었다. 이미 약탈품은 충분히 챙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미하엘의 보고에 홉킨스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 딱한 녀석들. 구원군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미하엘은 술잔에 술을 한잔 더 따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일그러진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정말 안타깝군요.”
잠시 히히덕거리며 웃던 홉킨스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미하엘에게 말했다.
“이러면 어떨까? 병력 일부를 성 앞에서 횃불을 잔뜩 피워 마치 구원병이 온 것처럼 꾸미는 거야. 그러면 구원병이 온 줄 알고 놈들이 내성 밖으로 뛰쳐나오면 곧 바로 기습해서 작살을 내는 거지. 어때?”
“흐흐, 기가 막힌 계책입니다, 연대장님.”
겨우 천 명 남짓한 홉킨스의 부하들만 가지고 구원병이 온 것처럼 꾸미는 건 쉽지 않겠지만, 술 한잔한 김에 기분이 좋아진 홉킨스와 미하엘에게 있어서 그건 문제 가 되지 않았다. 진짜로 그 계획을 실행할 것도 아니었고…….
사실, 내성까지 털 필요도 없었다. 금은보화가 쌓이고 있는 속도로 짐작하건대 며칠 더 지나고 나면 외성의 보물들만으로도 링카까지 어떻게 옮길지를 고민해야 할 수준이 될 거라고 추정될 정도였다.
홉킨스는 뿌듯한 표정으로 한쪽 구석에 쌓여있는 약탈물들을 바라봤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약탈물을 챙긴 건 자신이 용병 생활을 한 이후 처음이었으니까. 이때,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놈이 나타났다.
“크, 큰일 났어!”
문을 벌컥 열고 급히 들어온 사람은 바로 마법사 펜달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주민들이 반란이라도 일으켰어?”
다급한 펜달의 안색을 보며 홉킨스는 반란을 생각했다. 약탈을 당하던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여 반항을 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그런 건 부하들이 알아 서 처리했을 것이다.
펜달이 당황할 정도로 커다란 반란. 적의 잔존병력이 포함되거나, 부호들의 사병들이 결집된 대규모 병력이 반기를 든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했다.
그의 부하들은 모두들 약탈하느라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황이니, 재수 없으면 큰 피해를 당할 우려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떻게 처리할지를 순간적으로 고심하고 있는 홉킨스에게 펜달이 답답하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변경백 쪽에서 지금 당장 작전을 중지하고 회군하라는 지시를 보내왔어.”
시간이 지날수록 급속도로 쌓이고 있는 약탈물을 생각하면 이건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다.
부호들이 집 구석구석에 은밀하게 감춰놓은 보물들을 찾아내는 거야 시간상 포기한다고 해도, 대략적이나마 뒤지는데도 최소한 삼사일은 더 필요했다. 이게 어떻 게 얻은 절호의 기회인데…….
“미친 새끼들! 어떻게 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무시해버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뭔가 심상치 않아. 통신 말미에 도시연합 쪽에서 보낸 지원군을 요격하기 위해 출동했던 6개 사단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대. 그러니 최대한 빨 리 회군해서 안전한 지역으로 탈출하래.”
그 말에 홉킨스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펜달을 노려봤다. 이놈이 미친 건가? 그것 외에는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드넓은 사막 안에서 병사 한둘 없어지 는 거야 그럴 수 있다손 쳐도, 6만씩이나 되는 대병력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아무 흔적도 없이?
“혹시 너 술 마셨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대충 장단을 맞춰주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연대장에게, 펜달은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이야. 어젯밤에 엄청난 마법이 발동된 걸 링카 성의 마법탑에서 포착했다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서 요격부대의 마법사들과 통신을 시도했는데, 전혀 연락 이 되지를 않더래.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용기사들을 투입해 매복지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있는데 흔적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는 얘기였어.”
용기사는 밤에는 날 수가 없으니, 해지기 전에 수색을 종료하고 링카 성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링카 성 영주는 결단을 내려 후퇴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고.
하지만 홉킨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거창한 마법이 발동되었다고 해도 6만씩이나 되는 대병력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는 게 말이 되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홉킨스에게 펜달이 다급히 말했다.
“병사들이 없어진 탓에 지금 당장 도시연합 쪽에서 밀려오고 있을 적병을 막을 병력이 없다는 게 문제야. 안 그래?”
펜달의 지적에 그제서야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는 홉킨스.
링카 영지군이 행방불명된 게 남의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런 젠장! 그럼 큰일이잖아.”
홉킨스는 급히 지도를 꺼내 살펴봤다.
자신들이 외성을 점령했을 때, 도시국가 연합의 구원군이 출발했다고 가정한다면…, 시간적 여유가 얼마나 있을까?
무엇보다 링카 성 마법탑에서 포착했다는 마법의 존재가 껄끄러웠다. 링카 성에서조차 포착이 가능했을 정도라고 했으니 엄청난 대마법이 사용됐다고 봐야 한다. 그랬기에 6만이라는 대병력이 한 방에 날아가 버린 것일 게다.
시쳇더미를 찾고 못 찾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미하엘이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설마 드래곤이 개입한 게 아닐까요?”
정신없이 지도를 바라보고 있는 홉킨스를 대신해서 펜달이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겠지. 인간의 힘으로 6만을 날려 버릴 마법사가 존재할 리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여기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드래곤이 언제 들이닥칠지.
펜달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만약 드래곤이 우리를 박살낼 생각이었다면, 벌써 이곳으로 왔을 테니까.”
펜달의 말에 홉킨스는 정신을 차린 듯했다. 창백했던 핏기가 살짝 돌아온다.
“6만 대군이 사라지게 만든 마법이 포착된 게 어젯밤이라 했어. 만약 드래곤이 개입했다면 그 즉시 이쪽으로 왔을 거야. 우리는 여기서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 지만, 드래곤은 자유자재로 쓸 수 있거든.”
펜달의 설명에 홉킨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그렇지. 아마 자네 추측이 맞는 거 같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냐. 당장 전 대대장들 불러들여. 그리고 약탈하러 나간 녀석들도 빨리 복귀하라고 전달해.”
홉킨스의 지시를 받은 미하엘은 약탈 나간 대대장들을 소집하기 위해 밖으로 달려 나갔다.
리오 프라이스는 다 늙어가지고 괜히 모험을 떠났다며 후회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가 상상해 왔었던 모험과 실제 모험은 완전히 달랐다.
모험을 시작한 이래 그가 마법을 써서 적을 공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오로지 말 타고 강행군만을 계속해 왔을 뿐이다.
베이라 성을 기습하기 위해 달려갈 때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뭔가가 있었다. 간혹가다 진귀한 몬스터의 사체를 구경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고기의 맛도 볼 수 가 있었다. 지금껏 상상만 해왔던 모험이 현실로 이뤄지고 있었기에 더욱 각별한 체험이었다.
하지만 프라이스가 환상에서 깨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모험 한번 해보지 않은 연구실 마법사였다. 그가 꿈꿔온 전투는, 앞에서는 거대한 타이탄들끼리 격전이 벌어지고 뒤에서는 마법사들이 치명적이지만 화려하 기 그지없는 마법을 적을 향해 난사하는 그런 것이었다. 실로 장엄하지만 피를 볼 일은 없는, 그런 멋진 전투였다.
하지만 그런 상상과 달리 실전은 전혀 달랐다.
연대 내의 마법사는 자신을 포함한다 해도 고작 일곱 명. 그들 모두 통신기로서 참전한 것이었을 뿐, 화력지원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벌어진 병사들 간의 전투는 처절하기 짝이 없었다. 전장에 흐르는 흥건한 피와 갈가리 찢겨진 시체들……. 프라이스는 그 끔찍함에 진저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고,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현실의 전투는 낭만이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처절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죽어가는 병사들의 모습에 전투에 참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새파랗게 질려있는 프라이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아르티어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스승님, 자 가시죠. 사방에 전리품이 널려있습니다. 전투의 꽃은 전리품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드시는 거 있으시면 모두 다 챙기십 쇼.”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와 거기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핏물들!
짙은 피 냄새에 현기증과 함께 속이 메슥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쭈그려 앉아 구토라도 하고 싶었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서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치밀어 오르 는 역겨움을 애써 참고 있던 중이었다.
치열했던 전투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그다음부터 시작된 것은 잔인한 약탈이었다.
용병들은 저항하는 부자와 그의 사병들을 학살하고, 닥치는 대로 뺏고 있었다.
가진 게 별로 없는 일반 시민들은 용병들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직 부자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을 중점적으로 약탈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살육에 미친 용병들은 겁에 질린 일반 시민들조차 잔인하게 죽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특히나 반반한 미모의 여성을 발견하면 주저 없이 허리 춤을 풀고 달려들었다.
사방에 넘쳐흐르는 핏물과 처절한 비명,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시체들까지.
얼마 전까지 평온한 삶을 살던 프라이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아, 아니……. 나는 괜찮네.”
프라이스의 심정이 어떤지는 그의 표정만 봐도 뻔히 알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그의 곁에 바짝 붙어서 속을 살살 긁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후회하실 텐데요.”
프라이스는 오만정이 다 떨어졌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걱정 말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그럼 저는 실례하겠습니다. 무역로의 중심도시니, 정말 괜찮은 게 많거든요.”
하지만 이런 광란의 약탈 행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처참한 광경을 보지 않기 위해 숙소에 들어박혀 귀를 막고 있기를 며칠, 오랜 행군의 여독이 채 풀리기도 전에 아르티어스의 부하인 매튜가 달려 들어왔기 때문이 다.
“어르신,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합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인가?”
“철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미 어르신께서 드실 식량과 식수는 충분히 말에 실어뒀으니 개인 짐만 챙겨서 빨리 나오십쇼.”
“고맙구먼. 그런데 아직 내성조차 함락하지 않았는데 어디로 출발한다는 건가? 설마 또 다른 적이라도 출현한 건가?”
프라이스의 물음에 매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고, 즉시 출발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만 받았을 뿐입니다. 제자분께서도 이미 준비하고 계시고요.”
베이라 성을 기습하기 위해서 진격할 때는, 자신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밤에만 은밀하게 이동했고 낮에는 쉴 수가 있었다.
낮에는 살이 익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진 사막이었지만, 아르티어스가 마법으로 깊게 판 모래 구멍 속은 의외로 쾌적하여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물론 아르티어스 자신이 쉴 곳을 판 김에 노마법사에게 그 옆에서 쉴 수 있도록 해준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베이라 성에서 벗어나 링카 성의 본부로 회군할 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최대한 빨리 후퇴하는 것만이 살길이었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당연히 허약한 노인의 몸이 그런 강행군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도, 도대체 언제 쉴 수 있는 게야? 아이고 허리야…….”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던 프라이스는 자신의 제자 흉내를 내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노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런 환상적인 모험을 할 수 있게 해주어 너~무 고맙네. 아마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걸세.”
마치 꿈에서 나올까 겁난다는 듯 끔찍한 표정으로 말하는 리오 프라이스.
그런 노마법사의 표정을 아르티어스는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속마음은 어쨌건 그의 말투는 아주 정중했다. 그 점이 프라이스를 더욱 불쾌하게 하고 있 었지만 말이다.
“좋은 추억이 되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스승님.”
“모처럼 자네가 모험에 데려와 줬지만, 내게는 여기까진가 보구먼. 나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더 이상 오래 있다가는 자네의 짐이 될 거 같아서 말일 세.”
프라이스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집으로 돌아가시다뇨? 이 깊은 사막 한가운데서 어떻게 혼자 돌아가실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르티어스가 자신의 마법 실력을 너무 형편없이 보는 것 같아 더욱 기분이 나빠진 프라이스는 약간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공간이동 마법이 있잖은가. 내 실력이 비록 자네에 비해 미천하긴 하네만, 링카 성까지는 공간이동이 가능하다네. 그러니 어서 링카 성 인근의 공개 좌표만 알려 주게.”
링카 성에서는 공간이동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으니, 그걸 이용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뜻이리라.
드디어 아르티어스가 지금까지 숨겨왔던 걸 말할 때가 됐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동안 얼마나 입이 근질거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겉으로는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공간이동이라니요? 모험을 그렇게 꿈꾸셨으면서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프라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뭘 모른다는 건가?”
“스승님께서는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는 지역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당연히 모를 리가 없다. 알카사스 왕국 전역이 그런 공간이동 불가 지역이었으니까.
국가에서 건설해 놓은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일반인들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마법사의 공간이동은 역장왜곡을 통해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곳이 알카사스였다.
인근에서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코린트 제국이 공간이동하여 기습 공격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해놓은 것이다.
알카사스왕국에서는 역장왜곡망을 가동하기 전에 마법사 길드를 통해 전 대륙의 마법사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었다. 그래야 엉뚱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테니까. “알카사스 왕국 내에서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 그런데, 그건 왜 묻는가?”
“쯧쯧, 알카사스만 그런 게 아니라 여기도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기 때문이죠.”
“서, 설마 그럴 리가……?”
아르티어스의 말에 프라이스의 표정에는 짙은 의문이 떠올랐다. 이 망할 놈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스승님께서는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는 불모의 대지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
곰곰이 머리를 굴려봤지만, 모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던 리오 프라이스가 그런 얘기를 들어봤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가 읽은 모험담 중에도 그런 말도 안 되는 공간을 다룬 얘기는 없었다. 그런 곳에는 마법사가 아예 모험을 하러 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리오 프라이스도 이곳 사막에서 공간이동 마법으로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걸 사전에 알았다면 절대로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보는구먼.”
“대륙 간 무역을 방해하기 위해 실버 드래곤들이 장난질을 쳐놓은 탓에 이곳 사막지대에서 공간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 승님도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모르고 계실 줄이야.”
프라이스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자 아르티어스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손까지 내저으며 변명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알카사스 왕국 전역에 설치되어 있는 공간이동 마법을 방해하는 역장 체계도 이곳 사막을 참고해서 만들어 놓은 거라고 하더군요. 제 말이 의심스러우시다면 근처 다른 마법사들을 붙잡고 물어보십쇼. 제 말이 거짓말인지.”
리오 프라이스로서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이 끔찍한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이 아르티어스의 말에 산산조각나고 말았으니까. 지금껏 프라이스가 버틸 수 있었던 버팀목은 언제든 공간이동 마법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 희망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남은 건 처절한 절망뿐이다.
그래서인지 프라이스의 얼굴은 이미 한껏 일그러져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허~, 이런 난감할 데가……. 그렇다면 공간이동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아르티어스는 광소를 터뜨리고 싶었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며 짐짓 미안한 척 고개를 숙였다.
“예, 스승님. 어쩔 수 없이 좀 더 모험을 하셔야겠습니다. 모험에 있어서 초보이신 스승님께 처음부터 이런 힘든 모험을 하게 해드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설마, 우리 페가수스 용병단이 이렇게 필사의 탈출을 감행해야 할 상황이 벌어지게 될 거라고는 이 제자,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정말 죄송합니 다.”
“허어,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겠는가. 멋모르고 따라온 내 잘못인 것을.”
아르티어스의 사죄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프라이스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중히 사죄하는 그 말조차 왠지 거슬렸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리오 프라이스를 놀려먹은 뒤, 아르티어스는 다시금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막. 처음에는 부정한 기운이 남쪽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북쪽으로 꽤 먼 거리를 이동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북쪽 저 먼 곳에 서도 부정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가 처음에 생각했었던 가설이 무너진다. 그는 이 부정한 기운에 실버 드래곤이 어떤 형식으로든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 리그 시작이 저 북쪽이었고, 그 부정한 기운이 점차 아래쪽으로 퍼져 내려오고 있지 않은가.
“대체 무슨 일이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구만. 정말 마왕이라도 강림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