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7권 5화 – 황실과 원로원의 암투
황실과 원로원의 암투
마도왕국 알카사스에서 국왕과 동등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원로원(元老院).
그들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커다란 세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존재가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알카사스 왕실에서 어떻게든 원로원을 제압하고 싶어도 그 위치는 물론이고, 그 구성원조차 알아내지 못했기에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왕실은 완전 히 밖에 다 드러나 있었고…….
밖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원로원 의장인 크리스티안 에스테반 단 한 명뿐이었다.
그의 존재가 왕실에 알려져 있는 것은, 국왕과 회담을 하여 담판을 지려면 원로원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야 했고 그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크리스티안 에스 테반이었다. 그리고 그라면 왕실에서도 인정할 만큼 격에 맞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어떤 인물들이 원로원에 소속되어 있는지 아무도 모를 만큼 철저히 비밀에 싸여있었다.
“링카 변경백이 사막 무역로를 정벌하려는 건 모두들 아실 겁니다.”
왕실에서 원로원에 이번 전쟁의 전술에 대해 통보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정보부를 움켜쥐고 있는 원로원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만큼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은 건너뛰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도시국가 연합을 치기 위해 매복해 있던 변경백 직속 6개 사단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갑자기 사라졌다고요? 그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허어, 6만씩이나 되는 대병력이, 어찌 그럴 수가……? 그렇다면 뭔가 흔적이라도 남아있을 게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군요. 확실한 정보입니까?”
“현재 팔콘 기사단 분견대에서 보유하고 있는 모든 용기사들을 투입해 확인 중이라고 합니다. 매복해 있던 주변 일대를 현재 샅샅이 훑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까 지는 그 어떤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마치 그쪽에 아무도 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정말 믿기 힘든 일이군요. 혹시 뭔가 징조라도 없었다고 합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설마…, 드래곤이 개입한 겁니까?”
정보부를 쥐고 있는 원로의 말에 회의장에 앉아있던 다른 원로들이 인상을 찡그리며 제각각 입을 열었다. 질문을 던지는 원로들의 말은 다 달랐지만 반응은 모두 들 똑같았다. 그건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링카 성 마법탑의 보고에 따르면, 그 일대에 대규모 마법이 사용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약 드래곤이 그 짓을 했다면 자신이 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흔적을 남겨놨을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마법이 사용된 흔적은 물론이고, 시체조차 단 한 구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 가장 상석에 앉아 지금껏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던 에스테반 의장이 입을 열었다.
“왕실 쪽 동태는?”
“아직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변경백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이번 사태의 범인이 드래곤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 몸을 사리는 것 이겠지요.”
“흠, 그럼 링카 변경백 쪽은?”
“미지의 적에 대한 방어태세를 구축하고 있는 중입니다.”
“변경백의 힘만으로 방어가 가능할까?”
“드래곤만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던 에스테반 의장은 자신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기사단 쪽에 지시는 내렸나?”
“이미 팔콘 기사단장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링카 영지에 은밀히 전개, 미지의 적습에 대비하라고 말입니다.”
“잘했군. 그럼 이제 미지의 적이 누구인지 알아낼 차례인가?”
에스테반 의장은 시선을 돌려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노인에게 물었다. 그는 정보부를 책임지고 있는 원로였다.
“뭔가 알아낸 게 있나?”
“놀랍게도 전혀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도시국가 연합 쪽으로 보낸 첩자들과의 연락이 모두 끊기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원흉인 건 틀림없어 보입니다.”
“흠, 그놈들만으로 이런 대담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테니 배후에 드래곤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로군.”
아무리 도시국가 연합의 뒤를 실버 드래곤이 봐주고 있다지만 그건 적국이 공격해 들어올 때의 얘기였다. 만약 뒤를 봐주는 실버 드래곤만 아니었다면 링카 변경 백의 힘만으로도 도시국가 연합을 박살낼 수 있을 만큼 알카사스와 도시국가 연합과의 전력 차는 컸다.
그런데 그런 도시국가 연합이 아무 대책 없이 도발을 감행했을 리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드래곤의 협조 내지는 허가를 받았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잠시 눈가를 찌푸리며 고심을 하던 에스테반 의장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는 듯 침통한 표정의 노인에게 지시했다.
“드래곤이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면 팔콘 기사단을 전진 배치하는 건 너무 위험해. 링카 변경백과 정보부를 움직여 콘도르 기사단을 전면에 내세우도록 하 게.”
팔콘 기사단은 원로원 직속이지만, 콘도르 기사단은 왕실 직속이다. 그런 만큼 드래곤이 개입해 들어와 아군에 커다란 피해를 안긴다 해도, 그 책임을 슬쩍 왕실 쪽으로 뒤집어씌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의장님.”
***
새벽녘에 베이라 성을 탈출한 페가수스 용병단은 무려 이틀 밤낮에 걸쳐 전속력으로 후퇴했다.
물론 처음에만 전속력으로 달렸을 뿐, 그다음부터는 말이 지쳐버려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없었지만 말이다.
사흘째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홉킨스는 전 부대원들에게 잠시 휴식을 허용했다.
사막은 메마른 땅이었기에 대부대가 이동하면 모래 먼지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그런 만큼 혹시 뒤쫓는 무리가 있다고 해도 곧바로 발견이 가능했다. 문제는 이 쪽의 움직임도 적들이 포착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이었지만.
수석대대장 스미스가 홉킨스에게 보고했다.
“다행히도 따라붙는 적의 추격은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물 보급을 받을만한 데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젭니다.”
베이라 성으로 진격해 들어갈 때는 후방으로부터 식량과 물을 보급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들이 어느 쪽으로 이동하게 될지조차 정확히 알 수가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보급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병사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말이 버티지를 못할 겁니다.”
베이라 성에서 약탈한 수많은 금은보화들이 수레에 실려 있었기에 말이 지쳐 쓰러지면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용병들이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하는 건 오로지 돈 때문이다.
물론 돈보다야 목숨이 중요하겠지만 만약 말을 버리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되면 부대 내에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랬기에 한참을 고심하던 홉킨스는 지도를 바라보다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동쪽으로 15킬로 정도쯤 가면 작은 성읍이 하나 있다. 거기서 물을 보충받으면 되겠지. 무슨 문제는 없는지 미리 정찰조를 보내 철저히 확인하도록.”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파견했던 정찰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작은 성읍이라 딱히 큰 문제는 없다고 판단한 홉킨스는 부하들을 독려하여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지금은 작은 위 험 따위는 감수할 만큼 식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홉킨스의 명령에 강행군을 한 덕분에 예정보다 조금 빨리 목적지인 작은 토성 인근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때 앞서 보냈던 정찰대가 돌아와 보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뭐냐?”
“인기척이 없어 성안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이곳 토착민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네다섯 개의 토성을 쌓아두고 목초지를 찾아 계속 이동하면서 생활한다. 안 그래도 풀이 적은 사막에서 가축들을 키우자니 어쩔 수 없이 발달한 생활양식인 셈이다. 그렇기에 정찰대는 토성이 빈 곳인 줄 알고 들어갔던 모양이다.
곧이어 홉킨스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정찰대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성안이 언데드로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언데드?”
“예. 사람이건 동물이건 성안에 있는 건 모두 다 언데드였습니다.”
홉킨스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뭘 잘못 본 거 아냐? 이렇게 건조한 지역에 언데드라니…….”
그러자 답답하다는 듯 정찰대원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말투가 흘러나왔다.
“제 두 눈으로 몇 번이고 확인한 후 보고드리는 겁니다. 정히 못 믿으시겠다면 다른 정찰대원을 불러 물어보시죠?”
“젠장, 네 말을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하도 어처구니없는 보고라 그런 거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홉킨스는 마법사인 펜달에게 조언을 청했다.
“사막에서 언데드가 나타나기도 하나?”
그러자 펜달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사막 같은 악조건에서 살아가는 데는 물과 식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언데드가 훨씬 유리한 게 사실이니까.”
“어쨌거나 여기서 물을 보급 받으려면 그 잡것들을 박살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군. 이봐, 스미스! 모두 전투 준비하라고 해! 그리고 부 대원 중에서 언데드와의 전투 경험이 있는 병사가 있는지 알아보고.”
홉킨스의 지시에 22대대장 스미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하지만 홉킨스의 기대와 달리 언데드와의 실전경험을 지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었다.
페가수스 용병단이 활동하고 있던 주 영역이 건조한 반사막지대인 알카사스였던 만큼, 그건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뭐, 어쩔 수 없지. 저놈들을 제물로 실전경험을 쌓는 수밖에. 다행히도 녀석들은 토성 안에 갇혀 있는 상태다. 먼저 성벽 위를 장악하고, 놈들이 성벽 위로 올라올 수 있는 길들을 모두 차단해라.”
홉킨스의 명령에 부하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가수스 용병단의 이름이 헛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빠르고 숙련된 움직임이었다.
그런 용병들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희희낙락 프라이스를 데리고 구경하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잘 보십쇼, 스승님. 이거 정말 돈 주고도 보기 힘든 구경거리니까요.”
사람은 물론이고 낙타, 양, 소, 닭 등등 성 내의 모든 동물들이 다 언데드가 되어 있었다.
살점이 짓물러 터져 허연 뼈가 곳곳에 드러나 있는 끔찍스러운 고깃덩이들이 느릿한 움직임으로 성벽 아래로 몰려들었다. 눈알이 빠져 텅 빈 동공이었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성벽 위쪽을 향해 들고 있었다. 마치 성벽 위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끔찍한 모습에 프라이스는 하마터면 구토를 할 뻔했다. 하지만 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을 가장하며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저, 저게 언데드라는 것인가?”
“예. 특이하게도 이런 건조한 지역에서 발생했네요.”
천 명이나 되는 대병력인 만큼, 작은 성벽 위로 다 올라갈 수는 없었다. 일부 병력이 만일을 대비하여 성문 쪽에 방어진을 갖추고 있는 가운데, 활을 지니고 있는 용 병들만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며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다.
“화살을 쏴라!”
명령에 따라 성벽 위 용병들의 손에서 수많은 화살이 날아갔고 무방비로 서 있던 언데드들은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버렸다.
홉킨스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미소를 짓는 것도 한순간, 그는 급히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사격 중지!”
놀랍게도 언데드들은 온몸에 화살이 잔뜩 박혔음에도 전혀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쓸데없는 화살 낭비밖에 되지 않는다. “불화살을 쏘라고 할까요?”
옆에 서 있던 스미스 대대장이 슬쩍 제안을 해 왔지만 홉킨스는 인상을 일그러트릴 뿐이었다.
“그게 효과가 있을까?”
고심을 하던 홉킨스는 마법사인 펜달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무래도 칼이나 휘두르는 자신들보다 그래도 공부를 많이 한 마법사가 조금이나마 낫지 않을까 하는 기 대감 때문이었다.
“뭔가 방법이 없겠나? 화살은 전혀 먹히지 않는 것 같아. 그럼 창칼도 별 효과가 없을 거 같거든.”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펜달은 한참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본 기록에 의하면 저런 썩어 문드러진 언데드는 일반 날붙이로는 그 어떤 타격도 입힐 수 없다고 하더군. 언데드에 가장 효과적인 건성수(聖水)라고 들었 어.”
“이런 젠장, 지금 여기서 그런 걸 어떻게 구해!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쯧쯧, 성질머리하고는. 내 말 아직 다 안 끝났어. 간단해. 뼈를 박살내면 될 거야. 언데드의 생명의 근원은 뼈에 있거든.”
“뼈?”
“그래, 뼈. 저 썩어빠진 살덩이는 아무 의미가 없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살덩이는 다 썩어서 떨어지고 뼈다귀만 남게 되지. 그게 언데드의 본모습인 거야.” 언데드와 대치한 이래 처음으로 홉킨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호…, 뼈를 부수면 된다 이거지?”
홉킨스는 스미스를 향해 고개를 돌려 명령했다.
“도끼나 둔기를 가진 병사들만 집합시켜.”
그때 펜달이 옆에서 조언했다.
“혹시 병사들 중에서 마법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집합시키게. 언데드에게는 마법무기가 아주 잘 먹히지.”
홉킨스의 지시에 따라 즉각 병사 차출이 이뤄졌다. 도끼나 철퇴, 망치 등 각종 둔기류를 지닌 병사들과 소수이기는 했지만 마법무기를 소유한 병사들이다. “뼈를 산산이 부수기만 하면 죽일 수가 있다고 한다. 자, 공격!”
마법무기가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했지만, 기사들과 달리 마나를 그리 많이 보유하지 못한 용병들이 그걸 장시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마법무기를 든 병사보다 오히려 둔기를 지닌 병사들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머리통에 화살을 맞은 채로도 움직이던 언데드들이었 지만 두개골이 박살이 난 후에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 외에 다른 뼈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정량 이상의 뼈가 박살이 나면 생명이 다하게 되는 모양이다.
언데드들에게 공격이 먹힌다는 것을 안 용병들은 용기백배하여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퍽! 퍽!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언데드들의 육체가 하나둘씩 박살이 났다. 썩은 체액과 살점들이 사방에 튀는 처참한 모습! 곧이어 그보다 더욱 끔찍한 악취가 사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우윽, 냄새!”
“크윽, 코가 썩어들어가는 것 같아! 이런 지독한 악취는 내 살다 살다 처음이다!”
“우웨에엑!”
처음에는 언데드들의 끔찍한 모습과 악취 때문에 비위가 상해서 그러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온갖 전쟁터를 전전하며 피 튀기는 접전을 경험해 왔 던 용병들이다. 이보다 더 끔찍한 전투도 수없이 경험했을 노련한 용병들이 저렇게 구역질을 해대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구토를 해대는 용병들을 바라보던 펜달은 뭔가 떠올랐는지 다급히 홉킨스에게 외쳤다.
“병사들을 후퇴시키는 게 좋겠어. 빨리!”
전투가 순조롭게 잘 전개되고 있는데 후퇴하라는 펜달의 말에 홉킨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럴 이유가 있나?”
“이건 시독(屍)이야. 빨리 뒤로 물려!”
동물의 사체가 썩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들의 총칭이 시독이다. 흡입하면 즉사하는 맹독은 아니지만 해독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용병들이 격렬한 전투를 하는 중이라 가쁜 호흡을 타고 시독이 급속히 몸에 퍼지게 된다는 것도 문제였다.
“시독이라고? 이봐! 스미스! 병사들을 뒤로 퇴각시켜! 빨리!”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홉킨스는 머리를 움켜쥐며 절망했다.
언데드를 잡으려면 가까이 근접하여 둔기와 같은 무기로 놈들의 뼈를 박살내야만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시독에 중독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언데드들의 시 독이 사라지고 백골만 남게 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으니 정말 난감한 것이다.
저 망할 놈의 언데드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고 있는 홉킨스에게 펜달이 암울한 표정으로 조언했다.
“헛수고하지 말고, 어서 여기를 떠나는 게 좋겠어.”
“무슨 소리야? 현재 보유 중인 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잘 알면서……..”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런 말을 할까? 물론 병사들을 시독에 걸리든 말든 갈아 넣어서 언데드들을 박살낸다고 치자고. 그런데 저놈들을 봐. 사체에서 흘러내린 시독 이 이미 우물을 오염시켜 버렸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나? 그러니 아무리 물이 급해도 미련을 버리자고.”
펜달의 조언에도 홉킨스는 미련 가득한 시선으로 우물을 바라봤다.
우물은 성 중앙의 공터에 있었기에 성벽 위에서도 잘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우물 위에 허접하게나마 뚜껑이 덮여있다는 점이 었다. 어쩌면 아직 우물이 오염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 그래도 우물 깊이가 있는데,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
“좋을 대로 하게. 결정은 자네가 하는 거니까.”
홉킨스는 주위에 서 있는 대대장들과 마법사들을 빙 둘러보며 물었다.
“뭐, 좋은 의견 있는 사람 있나?”
모두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대장들과 마법사들을 쭉 훑어보던 홉킨스의 시선이 랄프 디겔에게서 멈췄다. 이 전에도 기가 막힌 해결책을 제시했었으니 어쩌면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하지만 애타는 그의 속마음과 달리 랄프 디겔은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디겔은 그리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가 익힌 잡다한 마법들이 상황에 딱딱 맞아떨어진 것이었을 뿐. 실망한 홉킨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진 실이 아니었다. 아르티어스는 그저 가급적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뒤로 물러선 것뿐이다. 하지만 홉킨스는 혹시나 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아르티어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디겔, 뭔가 방법이 없겠나?”
아르티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시큰둥한 말투로 대답했다.
“글쎄요. 이쪽은 제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전문 분야?”
그 말에 홉킨스는 자신이 기본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언데드 퇴치를 전문으로 하는 건 마법사가 아니라 신관이다. 문제는 용병단에 흘러들어온 신관의 실력이라는 게 뻔하다는 것이었지만. 홉킨스는 얼른 신관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모두들 종군 중에 수고들 많으시오. 혹시 효과적으로 언데드를 퇴치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신관분은 없으시오?”
홉킨스의 기대와는 달리 선뜻 앞으로 나서는 신관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신관들 중에서 언데드와의 전투가 가능한 것은 성기사와 같이 전문적인 전투 교육을 받은 신관들뿐이다. 용병대에 속해 있을 정도의 신관이면 그 능력이야 뻔한 것이고. 더군다나 알카사스처럼 건조한 지역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언데드를 볼 일이 없었기에 그에 대한 정보조차 아예 깜깜했다.
식수는 다 떨어져 가고, 말을 버리자니 힘들게 약탈한 금은보화를 버려야 하니 홉킨스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좌중에 있는 모든 대 대장과 마법사들, 신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휘부 안은 암울한 기운이 무겁게 가라앉아 모든 사람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오로지 단 한 사람, 아르티어스만이 내심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