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32화 : 발키란 성으로 – 1
발키란 성으로 – 1
함정은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언데드는 숨을 쉴 필요가 없기에 모래 속에 얼마든지 매복이 가능했다.
알파17은 2중으로 포위망을 구성했다. 문제는 그 중심으로 라시드 놈들이 들어올까? 하는 것과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고 튀어 나갈 멍청한 언데드가 한둘은 있을 거라는 점이다. 그중 후자가 알파17을 가장 속 썩이고 있는 부분이었다.
알파17은 잘 알고 있었다.
본능만이 남은 언데드들을 데리고 완벽한 매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왜냐하면 먹잇감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무조건 달려 나갈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파17은 매복진에 2개의 마신의 은혜를 묻어놨다. 일단 그걸로 배를 채우게 해주면, 새로운 먹잇감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먹어라! 배를 채워라. 크흐흐흐…….》
알파17의 명령에 언데드들이 일제히 모래 속에서 튀어나와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었다.
알파17의 뒤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미네르바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명령이 조금만 복잡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는 본능 덩어리인 하급 언데드 떼를 이용해서 이렇게 완벽한 매복 작전을 펼칠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놀라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더욱 큰 놀라움에 묻혀버렸다
적들 중에 그래듀에이트가 하나 끼어있었던 것이다. 놈의 검술에 대형 언데드들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놈은 놀라운 속도로 이동하며 동료들이 상대하기 힘든 대형급 이상의 언데드만을 노리고 파괴해 나갔다.
득실거리는 언데드들의 위를 도약하며 이동하는 몸놀림도 놀라웠지만, 놈이 구사하는 검술은 놀라움을 넘어 환상적이기까지 했다.
이런 시골 촌구석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정말 완벽하면서도 치명적인 검술이었다.
‘근데 크라레스의 기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눈에 익은 검술, 미네르바가 크라레스의 실력 있는 기사들이 사용하던 검술을 몰라볼 리가 없다.
자신이 알던 것과 조금 다르긴 했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비슷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수십 년 전에 사라진 전설적 영웅이었지만, 미네르바에게는 얼마 전까지 지지고 볶던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던 사람이다.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크가 아르티어스와 함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는 것을 미네르바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시간은 브로마네스의 브래스와 함께 정지되어 버렸으니까.
현재의 시대 상황에 대해서 누구 하나 그녀에게 알려주지도 않았고, 어디 가서 배울 수도 없었다. 이놈의 해골만 남은 몸으로는……………
크라레스의 검술을 보며 미네르바는 과거의 악몽이 떠올랐다.
다크라는 존재와 얽혀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공포만을 맛봤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생을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했는데, 또다시 크라레스와 얽혀야만 하다니.
저 정도 실력자가 뜬금없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게 너무 찜찜했다.
미네르바는 마스터의 경지에까지 올랐던 초고수다.
기사가 고급검법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전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저런 햇병아리 기사는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정찰조에 소속되어 경험을 쌓거나, 최악의 경우라 해도 한두 명의 지도역을 붙여주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으면 채 피어보기도 전에 목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니까.
미네르바는 급히 저 뒤편 사막 쪽부터 주의 깊게 살펴봤다.
마나는 제대로 활용을 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암흑기운마저 완벽히 운용이 가능한 게 아니다. 그렇다 보니 데스 나이트 본연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눈에는 저 사막 너머로 그 어떤 생명체의 존재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저놈 하나만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상황은 그녀에게 구경만 하고 있게 해주지 않았다.
대형급 이상 언데드들이 줄줄이 파괴되고 있자 알파17이 미네르바에게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이다.
《베타1, 저놈을 죽여라.》
저자를 죽이는 거야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만, 또다시 다크와 얽히게 되는 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유를 알파17에게 말해줄 수도 없다.
자신이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회복했다는 걸 실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미치겠군.’
하지만 그래듀에이트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보면, 자신이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동안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죽고 바로 살아난 건 아닐 거라는 것 정도는 안다.
최소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이 흘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수백 년 이상을 살 수가 없다.
어쩌면 다크가 오래전에 죽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 새파랗게 어리던 외모를 생각하면 죽었을 거라는 가정 자체가 믿음이 가지 않긴 하지만…………….
‘뭐, 그때는 그때지. 여기가 내 짐작대로 티투스 대사막이 맞다면, 크라레스와는 엄청난 거리가 있어. 저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기사단에서 정보부에 파견해 준 녀석이라고 보는 게 옳겠지. 그것 외에는 저런 놈이 혼자서 움직이는 경우는 아예 없어. 단독행동 중이라면, 이 사막 한복판에서 놈이 죽어버렸다는 걸 그년이 알아챘다 하더라도 바로 달려오지는 못할 거야. 게다가 여기는 실버 드래곤의 영역. 그년의 뒤를
봐주고 있는 골드 드래곤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실버의 영역을 감히 넘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까지 가슴속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던 뭔가가 쑥 내려간 듯, 몸이 가벼워진다.
‘그래, 괜히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지금은 저 해골놈의 신뢰를 얻는 게 첫 번째 목표야. 그래야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저런 햇병아리가 고수와의 대결 경험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대련이라면 몰라도 생사를 걸고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런 햇병아리를 죽이는 건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쉬웠다.
지금은 마나가 아닌 암흑기운을 사용해야 해서 고급검법의 구사는 불가능했지만, 검로에 대한 이해가 어디로 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살아있을 때 축적해 둔 수없이 많은 전투 경험이 있다.
알파17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미네르바는 놈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전속력으로 달린 건 아니다. 녀석이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레 접근할 필요가 있다.
데스 나이트인 그녀의 존재감은 강력한 것이지만, 이 주변은 너무나도 많은 언데드들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대형급을 넘어가는 언데드들도 많았기에 미네르바의 존재감은 그들 속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고급 검술의 초식을 전개하는 도중에 멈추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검을 휘두르는 동작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몸속의 마나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함께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억지로 멈추면 마나의 이동로에 커다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고, 최악의 경우 깊은 내상을 입게 된다.
햇병아리 기사가 검술을 전개해 막강한 검기를 뿜으며 대형 언데드를 파괴하려 하는 그 순간을 노려 미네르바의 검이 햇병아리의 등을 쑤시고 들어갔다.
“크으윽!”
자신의 검이 닿기 직전에 녀석은 먼저 회피를 시작하고 있었다.
억지로 초식을 멈춤과 동시에 몸을 앞으로 날렸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네르바의 검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고, 등에 제법 깊은 구멍이 뚫려버렸지만 말이다.
‘즉사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조금 얕았나? 뭐, 그래봤자 목숨을 잠시 연장한 것뿐이겠지만….?
미네르바가 원한 것보다는 얕게 들어갔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녀석은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내상을 입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로 공격을 그칠 미네르바가 아니었다.
피를 내뿜으며 언데드 떼 사이로 추락한 녀석의 뒤를 쫓아 도약하는 순간, 녀석이 주변의 언데드들을 베며 다시금 몸을 일으키더니 위로 도약하는 게 보였다.
‘포기할 줄 모르는 놈이군. 몸은 이미 죽어가는 중일 텐데……………?
간단히 따라잡아 끝장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방금 전에 치명상을 입은 녀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속도가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