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33화 : 발키란 성으로 – 2


발키란 성으로 – 2

잠시 후, 미네르바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등에 찔린 상처는 둘째 치고, 놈의 움직임이 도저히 내상을 입은 자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상을 입게 되면 마나를 제대로 운용하기가 힘들어지기에 평소와 같은 근력과 속도를 낼 수가 없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놈의 속도는 처음과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수십 년 이상 고된 수련을 쌓았던 그녀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햇병아리 기사는 놀라운 속도로 위로 도약하여 미네르바와의 거리를 벌리더니, 곧장 그녀를 향해 막강한 검기 덩어리를 날려왔다.

검술(劍術)은 기본적으로 도술(刀術)과 달라 찌르기 공격이 주를 이룬다.

도는 두꺼운 가죽이나 장갑을 베어야 하기에 무겁게 발전할 수밖에 없지만, 검은 관절과 관절 사이와 같이 비교적 방어력이 취약한 부분을 꿰뚫는 것으로 발전해 왔다.

즉, 무형의 검기였지만, 검이 찌른 방향을 본다면 검기가 어느 방향으로 날아올지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지금 미네르바는 언데드가 되어 있기에 일반적인 사람의 시각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보고 있었다.

상대의 움직임은 물론이고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까지 모든 게 감각으로 뚜렷이 보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언데드가 되어버린 그녀의 움직임은 과거에 비할 바 없이 느렸지만, 저런 기가 응축된 공격을 회피하는 건 오히려 살아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욱 쉽다고 할 수 있었다.

미네르바는 살짝 뒤로 물러서며 검기 덩어리들 사이를 교묘하게 회피했다.

그 직후 도약하며 상대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그녀의 새로운 몸은 뼈대로만 구성되어 있어, 과거 그녀가 마나를 운용하던 방식으로는 파워를 발휘할 수가 없다.

그리고 단전 대신, 죽음의 기운이 응축되어 있는 곳은 가슴뼈로 보호되는 흑암의 구체, 즉 베슬이다. 그곳에서 죽음의 기운을 꺼내 검 쪽으로 보낸다.

마스터의 경지를 개척했던 그녀에게 있어서 죽음의 기운을 움직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과거와 달리 뼈대 속으로 기운이 움직이는 것까지 모두 시야로 볼 수가 있다 보니 움직이는 건 더욱 쉬웠다.

‘죽음의 기운 역시 마나를 운용하듯 하면 될 거야. 결국 이름만 다를 뿐이지, 기운이란 점은 똑같으니까.’

새로운 몸을 얻은 이후, 미네르바가 이렇듯 본격적으로 죽음의 기운을 운용해 몸을 움직여보는 건 처음이다.

혼자서 그걸 연구하고 실험해 볼 만한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처음 상대를 햇병아리라고 판단했던 자신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어지는 미네르바였다.

지금 보여주고 있는 현란한 몸놀림을 생각하면, 놈은 햇병아리인 척하고 있었던 백전노장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마스터의 경지까지 밟아봤음에도 거기에 홀딱 속아 넘어갔던 것이고. 정말이지 짜증나는 상황이다.

놈은 놀라운 몸놀림으로 언데드들의 몸 위를 밟으며 뛰어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간혹 자신의 발판이었던 언데드에게 검격을 날리기도 했다.

요리조리 움직이며 대형급 이상의 언데드들만 파괴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동료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녀석이 보여주는 기술은 점점 더 수준이 높아지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그게 녀석이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판단했다.

햇병아리가 전투를 통해 실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건 영웅담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 그런 기적은 절대 일어날 수가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마나의 운용에 있어서는 상대가 월등하게 우세한 상황이었다.

미네르바는 마나를 쓸 수 없고, 죽음의 기운조차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있었기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미네르바에게 강점이 있다면, 각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형형색색 아름다운 색채로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땅바닥은 물론이고 초목까지, 즉 만물이 지니고 있는 마나가 모두 색깔로 보인다.

덕분에 상대의 공격을 미리 파악하고 대처해 나갈 수가 있었기에 최악의 사태로 흘러가는 것만은 피할 수가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실력이야. 저런 실력자가 첩자로 이런 변방에까지 온다는 게 말이 돼? 거의 근위 기사급 정도 실력인 것처럼 보이는데…………

상대의 실력만큼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지금까지 여러 번 자신의 공격에 적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놈이 멀쩡하다는 점이다.

그녀의 검격에는 죽음의 기운이 듬뿍 실려 있었기에 마나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처는 급속도로 악화되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검에 맞았음에도 저렇게 팔팔하게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일까? 설혹, 마스터급의 신체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저건 불가능했다. ‘저건 마치 언데드 같잖아. 사람이 저럴 수가 있어!? 저런 건 그년이라도 불가능해!’

자신과 같은 언데드는 죽음의 기운으로 모든 게 다 구성된다.

죽음의 기운이 남아있는 한 절대로 죽지 않는다.

저놈이 딱 그렇지 않은가. 피와 살로 이뤄진 사람이라면 결코 저럴 수가 없는 것이다.

처음에 미네르바는 자신의 실력을 알파17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적당한 수준에서 놈을 상대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호기심에 오기까지 더해지자 알파17 따위 생각도 하지 않고 점점 더 햇병아리 놈을 없애기 위해 광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죽음의 기운 이용법을 조금씩 터득해 나가며 그녀의 실력은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던 알파17이 경악할 정도로.

이때, 미네르바는 상대의 마나가 단전에서 빠져나와 몸속을 회전하며 점점 밝아지고 있는 걸 봤다. 뭔가 강력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거기에 말려들어 기습을 허용했을지 모르지만, 미네르바의 두 눈에는 놈의 몸속 마나의 움직임이 뻔히 보이고 있다. 그에 따라 미네르바도 죽음의 기운을 양쪽 다리로 보내며 급속 기동을 준비했다.

“하앗!”

상대가 뭐라 기합을 내지르는 것 같긴 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저 생명력 덩어리로 이뤄진 상대의 얼굴 아랫부분이 열리는 것만 보였을 뿐이다.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도와도 같은 빛의 덩어리들! 마스터의 경지를 개척했던 그녀였지만, 검기의 덩어리를 이렇듯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미네르바는 급히 움직여 그 덩어리들 사이로 피해 나갔다.

거의 곡예와도 같은 움직임!

하지만 그런 움직임을 취해야 한 탓에 상대와의 거리는 급격히 멀어졌다.

놈은 검기를 날림과 동시에 전속력으로 도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추격해서 없애버려?”

곧이어 미네르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은 간절했지만, 손쉽게 처치가 가능한 놈이 아니었다. 아니, 그녀가 지닌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상대가 쉽지 않은 놈이다.

지금 그녀는 죽음의 기운이 가지는 여러 가능성에 대해 연구해 볼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다못해 녀석과 같은 검기나 검풍조차 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곧이어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도망친 줄 알았던 놈이 멀찍이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가 싶더니 공간이 열리며 검은 윤곽의 거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시커먼 덩어리의 중심에는 밝은 빛을 뿜는 선이 혈관처럼 뻗어있다. 가슴 중심쯤에 두 개의 빛 덩어리가 놓여있는 게 보인다. 빛무리로 보이긴 했지만 표면의 윤곽이 어떤 형태인지는 알아볼 수 있다.

저건 타이탄의 모습이었다.

‘저게 타이탄인가? 그런데 왜 엑스시온이 두 개나 달려있지? 그동안 엑스시온 파워 증가의 대책으로 개발한 기술이 저건가?’

상대가 오너일가능성도 있다는 걸 염두에 뒀어야 했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햇병아리인 줄 착각했기에 그럴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고, 그다음부터는 상대의 실력이 뜻밖에 너무 대단해서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던 탓이다.

타이탄의 머리 부분이 열리고, 놈은 행여나 미네르바의 방해가 들어올까 염려하여 재빨리 탑승했다.

그 순간, 미네르바는 엑스시온들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봤다.

엑스시온에서 시작된 빛은 타이탄의 전신 구석구석을 향해 뻗어갔다.

이런 식으로 타이탄의 움직임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언데드의 시각에서 본 타이탄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미 늦었어.’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네르바는 전속력으로 알파17에게로 돌아갔다.

《타이탄입니다. 이미 글렀습니다. 다음을 노리는 게 좋겠습니다.》

타이탄이 나오는 건 알파17도 봤다.

알파17은 적이 타이탄의 오너라는 것보다, 그런 상대와 놀라운 선전을 펼친 베타1의 실력에 더욱 놀랐다.

데스 나이트의 전투력이 이렇게까지 놀라울 거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같은 최상위 언데드로 꼽히고 있었지만, 데스 나이트 따위는 리치에 비해 한 수 떨어지는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알파17은 언데드들에게 다급히 명령했다.

《모두 모래 속으로 들어가라!》

명령과 동시에 꾸물꾸물 모래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언데드들.

물론 적들 코앞에 위치해 있던 것들은 모래 속에 몸을 감추기 전에 도끼에 찍혀 박살이 나버렸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언데드들이 모래 속으로 대피하는 데 성공했다.

뼈밖에 없는 몸체 덕분에 언데드들이 모래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속도는 놀라울 만큼 빨랐다.

깊숙이 들어가 버린 후에는 부드러운 모래가 방어벽이 되어줘 더 이상 피해를 받지 않게 된다. 《자네의 실력이 정말 놀랍군.》

미네르바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떠오르는 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그게 잘 먹혀든 것뿐입니다.》

알파17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떠오르는 대로 움직였다?>

그렇다. 자신도 흑마법을 배운 게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흑마법 등 필요한 건 다 알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도 그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리치와 달리 데스 나이트가 가진 문제는 검술에 있었다. 검술의 정점은 마나의 활용에 있다. 하지만 언데드는 마나를 쓸 수 없고, 대신에 죽음의 기운을 쓸 수 있다. 즉, 그가 알고 있는 고급검술은 하나도 쓸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둘 다 기운인 만큼, 뭔가 비슷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데스 나이트가 제대로 된 검술을 구사할 줄 모른다면 리치와 함께 최상위 언데드에 꼽힐 리가 없다.

이쪽은 흑마법을, 저쪽은 죽음의 기운을 이용한 검술을…………. 그게 맞겠지?

《축하한다. 제대로 된 데스 나이트의 힘을 각성하게 된 것을. 자네의 미래가 정말 기대되는군.》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는데, 그다음 말이 없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는 재빨리 말을 돌려 알파17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의 전력으로는 타이탄의 상대는 불가능합니다.》

걱정스러운 미네르바의 물음에 알파17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좀 더 전력을 모아 다시 시작하면 되지.》

타이탄이 수십 기쯤 모였다면 모를까, 고작 한기 가지고는 알파17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샌드웜 하나만 동원해도 저런 건 간단히 끝장을 낼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잠시 숨어서 동정을 살피자니 적들은 서둘러 성 쪽으로 철수해 버렸다.

대량의 언데드가 모래 속에 숨어있는 곳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건 당연했다.

인적이 사라진 후에야 알파17은 베타1과 함께 언데드가 매복해 있는 곳에 나타났다.

《적들이 위치를 알고 있는 만큼, 이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다. 모래 속 깊숙이 숨어있는데 무슨 문제가 되겠나. 더구나 이곳에는 성상의 보권이 둘이나 설치되어 있다. 여기만큼 적합한 곳도 달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