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권 1화 – 심장을 찌른 칼

심장을 찌른 칼

길지(佶止)는 오늘도 정연(鄭蓮)이 년하고 만나기 위해 ‘달구경’을 하러 나왔다. 사실 오늘은 달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군데군데 불을 밝히고 있는 외등 에 비춰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도 그의 달구경 행각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이놈의 ‘달구경’을 명분으로 정연이 년하고 밤마다 놀아나고 있 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얼마 전 타주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살기를 풍기는 몇몇 마인들을 보고 혼쭐이 났을 만도 하건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다음 날도 어김없이 정연이라는 하녀와 산책을 즐겼다.

하인, 하녀들에게 독방은 주어지지 않았고, 적으면 네 명에서 많으면 2, 30명이 들어가는 큰 방에서 집단생활을 하는지라 처녀, 총각이 사귈 만한 오붓한 공간이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나이가 젊을수록 큰 방에 왕창 때려 넣었다. 결혼을 한 하인, 하녀들은 한 방에서 지내도록 배려하지만 총각, 처녀들에게 그 정 도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이 장원 주인의 신념인지 총각, 처녀들의 집단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하기야 나이가 젊을수록 신분은 낮을 수밖에 없으니 그런 식의 대접을 받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사실 집단생활은 하녀들에게 정조를 지키는 데 매우 유리하다. 여자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에 침입해서 여자를 건드릴 만큼 간 큰 자도 없을뿐더러, 만약 어느 놈이 미쳐서 뛰어 들었다고 해도 그 많은 여자들을 모두 다 비명도 못 지르게 제압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열두 명의 젊은 하녀들이 자는 방에 여섯 명의 하인들이 침입했다가 비명 소리에 출동한 무사들에게 잡혀 반죽음이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지 않는가? 하지 만 그런 유리한 점이 있는 반면 배우자를 만드는 데 가장 불리한 게 또 집단생활이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하는 일이 다르다 보니 낮에 는 도저히 만날 가능성이 없다. 그렇다면 밤에라도 오붓하게 만나 대화로써 정을 쌓아 나가야 하는데, 그럴 공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정연이에게는 아주 운이 좋게도 길지라는 성실한 남편감이 생겼고, 그들은 밤마다 달구경을 하면서 친해졌다. 어디에 내놓기도 힘든 외모 때문에 ‘이러다 가 결혼도 못해 보고 죽는 게 아닌가’하고 불안해하던 정연이의 마음은 매일 계속되는 달구경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놈의 목석 같은 길지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혼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둘의 달구경 행각은 거의 다섯 달이 다 되어 오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길지가 정연이를 좀 더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들어가면서 처음의 가벼운 입맞춤은 이제 제법 농도가 짙어졌고, 길지의 손은 어느 결에 정연이의 말캉하면서도 탄 탄한 젖가슴을 주무르게 되었다.

야밤에 으슥한 곳에서 주고받는 서로에 대한 달콤한 애무를 멀찍이서 훔쳐보던 금석(金奭)은 입맛을 쩍쩍 다시며 옆의 동료 장경(張莖)에게 속삭였다.

“오늘은 뭔가 할 것 같지 않냐?”

금석과 같이 검은 옷으로 잘 위장하고 낮게 엎드려 있던 장경은 그쪽 풍경은 볼 가치도 없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뭘? 저러다가 또 그냥 돌아가겠지. 병신 같은 녀석……. 완전히 밥이 다 익고 뜸까지 들었는데, 또 시간을 끈단 말이야. 저러고 앉았다가 죽 쒀서 개 주지…….” 금석은 두 하인들의 하는 짓거리를 보다가 또다시 낮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할 거 같은데?”

“저 병신 같은 녀석은 안 돼. 한 달 전부터 저 하녀 유방을 주물러 댔으면서 아직까지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가는 거 보면 오늘도 글렀어.”

“그래도…….”

“아, 글쎄 보초나 제대로 서. 저 연놈들 하는 거 구경하려면 반 년은 더 있어야 할걸?”

장경의 시큰둥한 대꾸에도 불구하고 금석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그는 나지막하게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흐흐흐, 그래도 보초 서면서 유일한 낙이 저거 구경하는 거 아니겠냐? 저것들은 우리가 보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만 말이야. 그 덕분에 여기서 보초 서려면 얼 마나 경쟁이 심한데? 네놈도 혹시나 구경할 수 있을까 해서 이리 온 거잖아.”

“어쨌든 오늘도 아닐 거야.”

“아냐, 어쩌면 오늘 할지도 몰라.”

계속 치근덕거리는 금석을 향해 장경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저것들이 안 한다는 데 열 냥 걸지.”

“나는 한다는 데에…….”

걸어 오는 내기를 마다할 정도로 쫀쫀한 금석이 아니었기에 둘의 내기는 곧이어 성립되었다.

“열 냥 벌었군, 흐흐흐.”

장경과 금석은 서로의 승리를 자신하며 자그마치(?) 동전 열 냥씩을 걸었다. 원래가 마교에서는 수하들이 무공에만 전념해야만 한다는 미명 아래 봉록이 매우 짰 다. 그들이 건 돈은 딴 사람들이 봤을 때는 소액인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꽤 큰 돈이었다.

금석과 장경은 외당과 내당 사이의 열두 곳에 투입된 24명의 보초들 중 한 조였다. 다섯 달쯤 전부터 시작된 하인과 하녀의 달구경은 이곳에 보초를 서는 자들 중

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사내 녀석이 어지간히 숫기가 없는지 마냥 느려 터져서는 구경하는 사람 복장 터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 다.

둘은 꽤 으슥한 곳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만 만났고, 그게 마침 제8조가 보초 서는 부근이었기에 고것들이 하는 행동이 그곳에서는 상당히 자세히 보 였다. 거기에 보초 서는 인물들은 마교에서 잔뼈가 굵은 우수한 고수들이 아니던가? 이 정도 어둠은 그들의 안력(眼力)으로 봤을 때 아무런 장벽이 되지 못했고, 행 여 바람을 잘 만나면 그 둘이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초기에 그 둘이 언제 할 건지에 대한 내기가 오고 갔다. 그런데 사내 녀석이 미적거리는 통에 ‘얼마 안 있다가 사고(?) 친다’는 쪽에 걸었던 자들은 모두 다 피 같은 돈을 날려야만 했다.

거의 2각(30분) 정도가 지난 후 두 연놈들의 하는 짓거리를 감상 중이던 금석이 장경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장경이 고개를 돌리니 그 둘이 자리를 옮기고 있었 다. 아무래도 오늘 따라 하는 짓거리가 조금 이상했다. 앞으로 한 시진(2시간) 정도는 더 쑥덕거려야 정상인데, 벌써 일어서다니? ‘오늘 진짜 하려나?”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둘은 조금 더 움직여 더 구석진 곳에 처박혔다. 그 뒤쪽은 아예 벽으로 막혔고 앞쪽에는 물건이 야트막하게 쌓여 있기에 보는 이들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저것들이 오늘 정말 뭔가 하려나? 제길, 열 냥 잃었군. 이렇게 된 거 구경이라도…….”

장경은 군침을 꼴딱 삼켰다. 사내 녀석이 여자를 끌고 간 곳은 며칠 전 물건을 다 꺼내서 비어 있는 창고였다. 물건이 없으니 문을 잠가 놓지 않았고, 자연히 둘이 숨어 들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거기가 아늑한 둘만의 공간일 테니…….

그 둘은 이제 별빛마저 비치지 않자 자그마한 등에 불을 붙여 들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환기가 잘되어야만 오래 저장할 수 있는 물품들을 넣어 두는 창고였기에 창문이 제법 널찍했다. 그들은 마침 뚫려 있는 창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창문에 창호지를 발라 놓기는 했지만 물건이 없으니 그 창문마저 다 열어 놔서 안에서 하는 짓거리를 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생겼다. 사내 녀석이 계집을 꼭 껴안으며 주저앉아 버리자 둘의 대가리만 보일 뿐 뭔 짓거리를 하는지 도통 알 재주가 없었다. 오늘은 그 런 대로 바람의 방향이 좋아서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무슨 소린지 명확하지는 않았다. 보초를 서던 금석과 장경은 군침을 꿀꺽 삼키면서 청각에 온 신 경을 집중시켰다. 이것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열 냥의 돈이 주인을 뒤바꾸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계집이 살며시 일어섰다. 옆에 있는 등불의 약한 불빛 때문에 계집의 표정까지 다 보일 정도였다. 놀랍게도 계집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옷! 이런 좋 은 구경거리를 둘이서만 볼 수는 없는 노릇. 하여튼 거기에 걸린 내기 돈이 엄청났기에 두 연놈의 행동은 모든 보초들의 공통적인 관심사였다.

금석은 살며시 신호를 보내 주위에 있던 동료들에게도 관음(觀淫)의 즐거움을 선물했다. 살짝 보낸 신호였지만 주위에 퍼져 있던 녀석들은 모두 다 모였는지 금석 의 주위에는 여덟 명 정도의 동료들이 둘러서 있었다. 모두 입을 헤 벌리고는, 얼굴은 별로였지만 통통한 몸매에 봉긋한, 매우 탄력이 있을 듯한 아름다운 유방이 드 러나는 광경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이때 한 곳에 보초들이 집중되면서 벌어진 틈으로 유유히 진법을 돌파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의도대로 보초들이 한 곳에 집중된 듯 주위에 인기척이라고는 느 껴지지 않았다. 사실 보초들이 지킨다고 해도 그의 능력으로도 조용히 돌파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진법이었다. 그는 진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깡통이었기에 아주 서 서히 돌파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까딱하면 보초들에게 들킬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보초들이 매복하는 장소들이 진법의 돌파가 가능한 몇 곳 안 되는 생문(生門)의 위치라는 것은 진법의 왕초보라도 눈치 챌 수 있는 사실이다. 생문은 보초 들이 막고 있지만 몇 장 되지도 않는 그 가까운 거리를 두고 보초들의 이목을 속이면서 침투해 들어간다?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보초들을 죽이고 들 어가면? 타 문파의 보초들과 달리 그들의 막강한 실력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것 또한 불가능까지는 아니겠지만 그에 준할 정도로 힘들 것이다. 전에 들어왔다 가 돌아가신 자객도 그게 불가능함을 알고 수면제를 풀어서 모두 비몽사몽간 헤매게 만든 후 들어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똑같은 수법이 두 번 통할 리는 없었다. 그는 이곳의 주인이 중상을 입었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진법을 뚫 고 들어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위에서 비밀리에 ‘아무래도 뭔가 수상한 점이 많으니 좀 더 사태를 관망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사실 이 집 주인이 그 정도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면 그의 적들이 아직까지 조용할 리가 없었다. 그는 시간이 좀 지나서 이곳 주인이 단지 장기간의 외출을 했을 뿐, 멀쩡하다는 걸 알아냈다. 그래서 그 는 더 치밀하게 준비를 했고, 이제서야 자신의 계획을 조심스레 실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외당에는 대단히 많은 수의 첩자들이 활동하는 게 분명했다. 이번 비무대회를 통해 2천여 명을 선발하자마자 그에게 곧바로 진법의 침투 경로가 자세히 그려진 지 도가 살며시 도착했을 정도니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진법을 통과하여 내당으로 들어선 그는 파해법이 담긴 종이를 완전히 찢어 입속에 넣은 후 꼭꼭 씹어 꿀꺽 삼켜 버렸다. 자신이 통과해 온 백영환혼진(魄影還混 陣)은 살상용 진법이 아닌 환영을 통해 외당에서 내당으로 들어가는 것만을 저지하는 진법이다. 대신 내당에서 외당으로 나가는 데는 진법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그냥 통과하면 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철저히 외부에서의 침입은 힘들게, 내부에서 외부로 진출하기는 쉽게 된, 아주 강력한 고수들을 내부에 많이 보유한 곳에만 설치할 수 있는 진법이었다.

어두운 곳에 몸을 감춘 그는 보초들이 제 위치로 돌아가는 것을 언뜻 느꼈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위해 무려 다섯 달 동안 공을 들인 계집이다. 그의 최면술(催眠術) 에 걸려 사랑하는 상대와 정사(情事)를 벌이는 줄 알고 헥헥 대다가 아마 지금쯤은 탈진해서 뻗었을 테니, 내일 아침까지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 보초들도 정사를 나누는 계집의 간드러진 신음 소리가 멈추었으니, 입맛을 다시며 제자리로 돌아가서 또다시 보초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게 분명했다.

그는 조용히 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분타주의 방이 어딘지는 대단히 알아내기 힘들었다. 내당에는 하인들도 믿을 수 있는 인물들만 뽑혀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 지만 그들의 입을 통해 살며시 내당의 사정이 퍼져 나갔고, 대략적인 위치도 파악되고 있었다. 거기에 상대는 현경의 고수라 그런지 일부 귀찮은 목표물들처럼 방을 자주 옮기지도 않았다. 하여튼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그 덕분에 지금 명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 그 정도 약점도 안 드러내면 죽일 방법이 없지..

그는 살며시 타주가 머무는 방의 마루로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그는 더욱 자신의 기척에 신경을 썼다. 될 수 있으면 기(氣)를 쓰지 않아야 했기에 그의 행동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은잠술을 사용하여 소리라고는 정말 낙엽 떨어지는 소리 정도도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마루 아래, 두 짝의 신발이 놓여 있는 섬돌 뒤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서서히 귀식대법(鬼息大法)까지 운용해서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없애 버

렸다. 일반적인 경우 기환술(幻術) 따위를 이용해서 몸체를 아예 땅속에 숨기기도 하지만 괜히 내공이 많이 사용되는 그런 고급 기술을 써먹으면 오히려 뛰어난 고수에게는 발견되기 쉬웠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최대한 기척을 없애는 게 성공할 확률이 높다.

그가 가사 상태로 들어가기 직전 최후로 한 일은 허리띠에 꽂아 둔 비장(秘藏)한 쇠꼬챙이 손잡이를 꼭 쥐고서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 는 끝났다. 목표물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주님, 말씀하신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호오, 수고했네. 어디 보세나.”

설무지는 두툼한 종이 뭉치를 조심스레 건넸다.

“화경에 이르는 일부 고수들을 제외하고는 우열을 가리기가 아주 어려워서 2천5백 명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이것이 그 명단과 그들의 상세한 내력입니다.”

묵향은 설무지가 건네준 서류 뭉치들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대충 뒤적이며 말했다.

“흐음, 일단 그 실력 덕에 무림에 드러난 인물들은 첩자일 가능성이 없어서 좋지. 문제는 이놈들을 어떻게 포섭하느냐 하는 것이로구먼.”

“그렇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뚜렷이 어떤 파에 귀속되지 않은 걸출한 인물들이니,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라고 봐야겠죠.”

“그런데 여기 첫 번째에 올려진 이 녀석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난가?”

“불계불황(不戒佛皇)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렇습니다. 3황 5제 4천왕을 모르십니까? 그는 누가 뭐라 해도 3황의 수위를 차지하는 괴물인지라…….?

“4천왕하고 두 명의 황(皇)은 잘 알지. 한 사람은 내가 죽였고, 한 놈은 내가 필히 죽여야 될 놈이니까. 그 외에는 잘 몰라. 그런 것에 신경을 쓴 적이 없으니까 말일 세. 그런데 그런 고수가 왜 이토록 세력이 없는가?”

“그자가 천성적으로 도당(徒黨)을 형성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죠. 남을 부리는 것도 싫어하지만 남에게 귀속당하는 것은 더욱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불계(不戒)? 지키는 계율(戒律)이 없다는 건가? 이 녀석은 파계승이냐?”

“예, 그건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공공(空空)대사라면 소림사의 전대(代) 장문인이었던 공지(知)대사의 사형이지요. 그는 소림 무예의 대부분을 통달 한 기재였는데, 너무 무공에 힘을 기울이다가 주화입마를 당하는 바람에 마기가 골수까지 뻗쳐 그만 돌아 버렸죠.”

그러자 묵향은 시큰둥한 어조로 되물었다.

“미쳤다면 쓸모없는 인간 아닌가?”

“헤헤, 그것도 완전히 미쳐야 되는데 아주 조금, 조금만 미쳐버려서 인간성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으니 더 큰일이죠. 음탕하고 호색한 데다 탐욕이 목구멍까지 차 서, 지금은 소림사에서도 아예 자사(自寺)에서 배출한 고수라는 것을 숨기기에 급급할 정도니까요.”

“그럼 더 이상 먹칠하기 전에 없애 버리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신경을 쓰나?”

“그게 불가능하니까 그렇죠. 타주께서도 어떤 면에서 보면 그와 비슷한 입장이 아니십니까?”

묵향은 이제서야 이해가 되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흐음, 그렇군. 이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지?”

“산속에 토룡문(土龍門)이라는 문파를 하나 세워 놓고는 수하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주지육림의 쾌락 속에 파묻혀 살고 있죠. 말은 문파인데, 깡패 소굴이나 다름 없이 별의별 불법적인 사업들을 벌여서 주변에서 금전을 훑어 들여 그 비용을 조달하는 모양입니다. 거기에 툭하면 반반한 계집들을 납치해 가는데도 그놈의 무공 이 원체 강한지라…….”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모두 그를 3황의 우두머리로 취급할 정도입니다. 하는 짓과는 달리 아직도 불문의 정통 무공을 기억하고 사용하는 것을 보면 완전히 미치지는 않은 것이 확실하 죠. 역근신공(易筋神功)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 구미가 당기는 인물이군. 그런데 두 번째로 기록된 만통음제(萬通音帝)는 또 뭔가? 5제에 들어가는 인물인가?”

“예,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나서 신비한 척하는 인물입니다. 하는 짓은 공명정대한데, 성질이 더럽고 손속이 잔인해서 정사의 중간에 놓이는 인물입니다. 이자도 아 마 뚜렷한 단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음공(音功)의 고수지요.”

“이놈도 탐이 나는군. 이놈의 위치를 확실히 파악하도록!”

“존명!”

묵향은 그 서류뭉치들을 뒤적이다가 갑자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 명호가 걸작이군. 비사비협(非邪非俠)이라…….”

“명호에 비해서 아주 뛰어난 인물입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뭔가?”

“중원인이 아닙니다.”

“새외 무림의 인물인가?”

“예, 가끔 무공 자랑을 한다고 중원에 나오기는 하는데, 요즘은 어디로 숨었는지 잠잠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쓰여 있는 인물들 중에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인물은 몇 명인가?”

“8백여 명 정도죠. 대부분이 떠돌이 고수들이라 정확한 위치 파악이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으음, 실력이 어중간한 녀석들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녀석들에게 맡기기로 하지.”

“믿을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어. 만약 그자들 중에서 첩자가 있었다면 아마 그들은 이리 오지도 못했을 거야. 그러니 그 녀석들의 영입은 여지고 수석장로에게 맡기고, 여지고 장로에게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배반에 철저히 대비하라고 지시하게.”

“존명!”

“사실 그 녀석들을 확실히 믿을 수는 없으니까 아예 외부에 일거리를 줘서 보내 버리는 편이 좋을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밤도 깊었는데 이만 가 보게. 내일 마저 얘기하기로 하지.”

“예.”

“참, 홍진 막주에게 연락해서 포섭할 자들의 위치를 더욱 세밀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하도록. 겨우 8백 명 정도만 위치를 알아서야 뭘 하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묵향은 설무지가 나가자 방 중앙에 좌정하고 명상에 들어갔다. 이제 서서히 꼬리가 잡히기 시작한, 대지의 기를 포착하는 작업을 시도 때도 없이 하고 있었던 것이 다. 조금만 더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기에 그는 요즘 들어서는 아예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그는 누군가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세한 대지의 진동…… 그는 조금씩 자신의 육체가 깨어나도록 만들었 다. 하지만 너무 많이 깨어나면 안 된다. 아주 조금만, 약간씩의 움직임 정도만 가능할 정도로…….

그리고 그는 배 위에 올려놨던 쇠꼬챙이를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다리 두 개가 보였다. 물론 상대는 마루에 걸터앉아 편안한 자세로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지 금!

푹!

그의 쇠꼬챙이는 곧장 마룻장을 뚫고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반응이 있었다. 사람의 육체를 뚫고 들어가는 그 미세한 감각이 말이다.

사람의 몸은 금강불괴(金剛不壞)니 호신강기(護身剛氣)니 하면서 수련할수록 무지막지한 방어력을 갖게 된다. 특히 공력이 높은 고수일수록 그 보호의 벽은 두터 워서 웬만한 보검으로도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몸을 보호할 때의 얘기고, 아무런 대비도 없이 진기의 유통이 막혀 있을 때는 보통의 살이요 가죽이었고 또한 뼈다귀었다. 강철과 같은 강도(强度)를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묵향은 아침에 일어나서 신발 신다가 엉덩이에 구멍이 뚫리는 황당한 일을 당했다. 쇠꼬챙이가 몸에 닿는 순간 거의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한 덕분에 깊은 상처 는 입지 않았지만 그래도 반 치(약 1.5센티미터 깊이의 구멍이 뚫린 것이다. 묵향이 본능적으로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사이, 마루 아래에서 엄청난 예기를 뿜어내 는 2척 길이의 보검을 든 검은 복면의 인물이 튀어나와 묵향을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묵향은 상대의 하는 짓거리가 꽤나 재미있었기에 천천히 죽일 생각으로 그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손 치더라도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이제 묵향은 놈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그 대가는 아주 작은 상처 하나일 뿐이었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묵향의 맨손과 상대의 짧은 보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묵향은 일부러 그를 한껏 밀어붙여 서로 간의 간격을 벌렸다. 상대는 거 의 1장 반 정도 뒤로 튕겨 나갔다가 중심을 잡고는 다시 검을 겨누었다. 그는 아직도 상대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못 버리고 묵향의 빈틈을 노렸다. 그 놈은 현경의 고수를 상대로 이제 본격적인 정면 대결을 하려고 드는 것이다. 간이 큰 건지, 자신의 실력을 믿는 건지…….

“크흐흐흐, 제법 간덩이가 큰 놈이군. 실력도 대단하고.. 본좌를 속이고 엉덩이에 구멍을 뚫다니, 그대의 실력을 높이 사 편히 저세상에 가게 만들어 주지.” 묵향은 급할 게 없다는 듯 이제서야 천천히 묵혼검을 뽑아 들었다. 어떤 무공으로 저놈을 토막을 칠까 궁리를 하면서.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 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신이 핑핑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묵향이 물었다.

“도대체 뭐냐? 독은 아닌 것 같은데?”

“당연히 독이 아니죠. 만독불침인 현경의 고수에게 독을 쓰는 놈이 있겠소? 독한 몽혼약(?昏藥)에 춘약(春藥)이랑 산공분(散功粉)도 좀 섞었죠. 어때요? 뿅 가는 기분 아니오?”

묵향은 핑핑 도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흐흐흐, 내 몸에 약 기운이 퍼질 때를 기다리고 있었군. 누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자네의 그 배포는 인정해 줘야겠군. 하지만 실력도 그 정도 되는지 궁 금한데.

마룻바닥이 부서지고 초반의 격돌로 그렇게 큰 소리가 났는데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미련한 인물은 이곳에 없었다. 묵향의 개인 호위들과 분타에 남아 있던 천 랑대의 고수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곧 묵향의 앞에 검을 들고 서 있는 흑의 복면인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무기를 뽑아 들고 그 복면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묵향의 목소리에 멈춰야 했다.

“멈춰라……. 본좌를 찾아온… 손님이다.”

흑의 복면인은 묵향이 직접 손을 쓰려고 들자 약간은 놀라는 듯했다. 상대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것인지, 몸의 상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직접 나서려 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기회는 있지.’

“흥! 지금쯤 정신이 없을 텐데 무리하는 거 아니오?”

복면인의 속셈은 비꼬는 듯한 어조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여기서 탈출은 불가능. 그렇다면 목표물이라도 확실히 죽여야 할 텐데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그것도 불 가능하니 슬슬 긁어서 상대가 직접 손쓰게 만들려는 것이다.

하지만 묵향의 목소리는 전혀 그런 것에 자극을 받지 않은 것처럼 평온했다. 묵향은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했다.

“자네의 실력을… 한번 보고 싶군.”

묵향이 검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급속도로 공력이 흩어지는 건 저따위 살수를 상대하는 데는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놈의 몽혼약과 춘약……. 온몸 의 혈관이 계집을 찾아 불타올랐고 점점 더 의식이 흐릿해졌다.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묵향 자신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묵향은 그대로 상대를 향해 몸을 날리며 직접 공격을 시도했다. 묵향의 눈에는 상대가 둘이 되었다 넷이 되었다 해서 상대와의 거리조차 잡기 어려웠다. 곧 상대의 검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자신을 향해 덮쳐 왔다. 평상시라면 문제될 거리도 아니었지만 묵향은 그것들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묵향은 그대로 몸 속의 공력을 모아 터뜨리며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강력한 반월형의 푸른 검강이 형성되어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상대는 그 강력한 공격에 놀라 혼신의 공력을 쏟아 부어 방어에 들어갔다. 묵향이 자신과 일대일 대결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솔직히 그는 묵향이 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자신이 사용한 약물은 대단한 것이었다. 무림인치고는 작은 덩치를 하고 있는 묵향의 네 배쯤 되는, 황소만 한 인간에게 쓴다고 해 도 단 한 방울이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그 약은 효과가 좋았다. 하지만 묵향과 대결을 하며 그는 묵향의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경’이 란 경지가 딱지치기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펑!

그 막강한 강기를 받아 내며 네다섯 걸음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아직은 견딜 만한지 침입자는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묵향은 그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내며 압도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묵향이 그놈의 약 기운 덕분에 마지막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려다 잠시 주춤한 사이, 흑의 복면인은 미세한 기 회를 포착하고 묵향의 심장에 검을 틀어박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묵향에게서 뿜어 나온, 반탄 강기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엄청난 기운…… 펑!

흑의 복면인은 그 강대한 기운에 2장여를 쭉 밀려 벽에 부딪쳤다. 복면인은 뒤로 밀리지 않으려고 천근추(千斤錘)의 수법을 사용했기에 그가 밀려간 땅에는 깊은 흔적이 파여 있었다. 복면인은 벽에 부딪친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엄청난 기운 때문에 내상을 입은 탓인지 벽에 부딪치는 순간 분수와 같이 피를 토했다. 그 런 후 잠시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뻗어 버렸다.

묵향은 두 번째로 자신의 심장에 박힌 검을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모든 게 자신의 자만심 탓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묵향이 천천히 쓰러지면서 내 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제길, 약 기운 정말 세군……. 아주… 뿅 가는데…….”

묵향이 쓰러지자, 무모한 묵향의 행동에 대해 내심 욕설을 퍼부으며 인근에 유명하다는 의생을 부르러 가는 패거리, 뻗어 버린 살수의 몸속에서 자살용 독약을 꺼 내고 감옥에 집어넣는 패거리, 또 쓰러진 묵향을 방 안으로 조심스레 옮기는 패거리, 하여튼 순식간에 발생한 일로 북적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