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권 10화 – 섬서분타를 비우다
섬서분타를 비우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매영인과 악양소소는 막 잠이 들려는 순간 인기척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한밤중에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시커먼 옷 을 입은 사람이 검을 차고 뛰어 들어왔으니 그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뛰어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마화였고, 그들은 적이 안심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짜증스러움이 잔뜩 묻어 있는 마화의 말에 정신이 뒤죽박죽 얽히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까지 준비 안 하고 뭐 하고 있는 거야?”
“예?”
“야행(夜行) 준비하라는 지시 못 들었어? 짐은 꾸렸어? 이런, 짐을 하나도 안 꾸려 놨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마화는 다짜고짜 그녀들이 이곳에 와서 장만한 몇 가지 되지도 않는 옷가지 등을 품속에서 꺼낸 시커먼 보자기 위에 집어 던졌다.
“정확히 한 시진 후에 모두 섬서분타에서 떠날 거야. 그런데 왜 준비를 하나도 안 한 거야?”
“예? 떠나다뇨?”
아직도 멍한 그들을 보며 인상을 쓰던 마화는 뭔가를 떠올린 듯 갑자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맹렬한 분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화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짐을 재빨리 챙긴 후 그녀들에게 차갑게 말했다.
“야행복(夜行)은?”
“…..”
둘 다 대답이 없자 마화는 뭔가 억누른 듯한 음성으로 이를 갈 듯 말했다.
“하기야, 야행복을 지급해 줬을 리가 없지. 잔말 말고 따라와.”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밖으로 나왔을 때 평상시와 상당히 다른 어떤 분위기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기척이 나지 않게 재빠른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흑색 야행복을 입고 있었다.
마화는 두 여인을 데리고 창고 쪽으로 가서 두 벌의 야행복을 받았다. 그리고는 근처에 늘어선 건물로 무턱대고 걸어가 방문을 확 열어 보더니 아무도 없자 야행복 을 그녀들에게 건네주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갈아입어. 그리고 이 보자기에 너희들이 입던 옷을 넣어 가지고 와.”
싸늘한 냉기를 풀풀 날리는 사무적인 말투……. 그들이 여태껏 보지 못했던 마화의 또 다른 면이었다. 그들은 감히 저항하거나 이의를 제기해 보지도 못한 채 안 으로 들어가서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주머니에 보면 두건이 있을 거야. 두건도 써.”
두 개의 눈구멍이 뚫려 있는 두건까지 쓰자, 그들은 이제 주위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무사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 마화는 그들의 차림새를 찬찬히 훑어보며 말 했다.
“이동하면서 아무 얘기도 하지 마. 그리고 보따리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뒤만 따라와야 해. 알겠어?”
“예.”
“가자.”
마화가 그녀들을 이끌고 간 곳은 입구가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는 한 건물의 지하였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그녀들과 똑같은 복장의 인물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빨리빨리 나가. 이봐, 다음 조 들어오라고 해.”
아닌 밤중에 계속되는 해괴한 사건으로 반쯤 얼이 빠져 버린 매영인과 악양소소가 자신들의 자리를 재빨리 찾아 이동하기는 어려운 노릇. 일곱 평(坪)이 될까 말 까 할 정도로 좁은 지하실에서 이리저리 걸리적거리자 한 흑의 복면인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야, 거기 두 놈. 빠릿빠릿하게 못 움직여? 빨리빨리. 다음!”
그의 지시에 따라 지하실 한쪽 구석에 뚫린 지름 3척(약 91센티미터) 정도의 동굴 속으로 재빨리 복면인들이 기어 들어갔다. 마화도 그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도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노릇인지 알지 못하고 마화만 따라다니던 두 여자도 그녀의 뒤를 따라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겨우 동굴의 높이가 3척이 될 듯 말 듯 했기에 일어서서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열심히 기어서 마화의 뒤를 쫓았지만 이놈의 동굴은 도대체가 끝이 어딘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앞에서 사사사삭 하며 옷이 땅에 스치는 소리가 들리니까 사람이 있는 줄 아는 것이지, 동굴 속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고개를 조금만 들면 동굴 천장에 머리가 닿았다.
영문도 모르고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그 어두운 공간을 기어가자니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서서히 공포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갑자기 저 어둠 속에서 칼이라 도 튀어나오는 것 아닐까? 또는 귀신이라도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까지 하게 되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자 차츰 다른 생각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무예로 단련된 육체라고 하지만 2각 정도 전력을 다해 기고 나니까 삭신이 쑤셔 왔다. 얼마나 기었는지 손바닥, 발바닥이 아픈 것은 물론이요, 무릎도 까졌 는지 쓰라리고 아팠다. 하지만 가장 지독한 통증을 호소해 오는 곳은 허리였다. 사람은 원래가 기어 다니는 동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상태로 1각 정도 더 기고 나자 숨이 턱 끝에 차고 드디어 눈앞에서 별이 왔다 갔다 했다.
“야, 앞에 녀석! 빨리 안 기어?”
“벌써 숨이 가쁘다니, 도대체 수련 안 하고 뭐 한 거야? 어디의 누구야?”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빨리 안 기어? 뒤로 층층이 밀리잖아!”
앞에 가던 그들이 꿈지럭거리자 뒤에서 지독한 욕설들이 들려 왔다. 하지만 그들은 마화의 지시도 있고 해서 감히 대꾸는 못 하고 지독한 육체적 고통을 참아 내며 다시 죽자고 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공을 깊이 익힌 고수라고 하지만, 보통 무예수련을 하다 보면 쓰는 근육만 계속 쓰게 마련이다. 그들이 평생 이렇게 오랜 시 간, 장거리를 기어 다닐 일은 없었기에 당연히 쉽사리 지친 것이다. 그러니 뒤에서 줄기차게 따라오는 녀석들을 보면 아무래도 평상시에 이런 암굴을 기어 다니는 훈련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녀들이 정말 죽을힘을 다해 장장 한 시진을 기어가서야 동굴은 끝이 났다. 원래 동굴의 중간 중간에 작은 방들이 뚫려서, 혹시나 모르는 외부의 침입자를 막기 위해 매복할 수 있게 되어 있고, 또 침입을 막도록 강철 문이 군데군데 달려 있었다. 동굴 속이 무지무지하게 어둡기도 했지만, 딴 곳에 신경 쓸 정신이 없을 만큼 지 쳤었기에 그녀들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그냥 동굴을 통과했던 것이다.
가까스로 동굴을 빠져 나오자 그곳에는 수많은 흑의 복면인들이 모여 있었다. 어느 정도 복면인들이 더 모이자 한 흑의 복면인이 나직이 말했다.
“제6대, 인원 이상 없나?”
“예.”
“출발.”
흑의 복면인의 질문에 대답한 또 다른 흑의 복면인이 1백 명은 되어 보이는 무리를 이끌고 조용히 출발했다.
“제7대, 정렬하라.”
흑의 복면인이 명령하자 마화가 재빨리 두 여인을 이끌고 정렬한 인물들 속으로 끼어들어가서 섰다.
“응?”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수를 세는 흑의 복면인에게 다른 흑의 복면인이 물었다.
“왜 그러나?”
“그게, 이상하게 두 사람이 더 많습니다.”
“뭐야?”
그와 동시에 그는 살기를 피워 올리며 나직이 외쳤다.
“모두 복면 벗어. 첩자가 있다.”
재빨리 마화가 복면을 벗은 후 그에게 다가갔다.
“제가 두 명 데리고 왔어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
흑의 복면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싸늘한 어조로 명령했다.
“좋아. 출발!”
마화라면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교주의 총애를 받고 있는. 그런 그녀가 이들의 신분을 증명하는 데야 더 이상 군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흑의 복면인들의 무공은 대단히 뛰어났다. 사실 그들은 더욱 빨리 목적지에 갈 수도 있었지만 마화 등 무공이 약한 인물들이 섞여 있었기에 적당히 쉬면서 천천히 이동했다. 그 때문에 제7대는 제법 일찌감치 떠났음에도 새벽이 다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요새(要塞)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하여튼 성(城)이라고 하기에는 작았고, 요새라고 하기에는 약간 컸다. 하지만 흑의 복면인들과 함 께 요새 안으로 들어간 후 두 여인은 그 첫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에서 본 모습은 거의 성의 규모였기 때문이다. 처음 에 그걸 느끼지 못한 것은 절벽 안에 동굴을 파서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는 숨겨진 부분 때문이었다.
거의 3장(약 9미터)은 되어 보이는 높은 담장에는 이중으로 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문들은 다 강철이었다. 또 벽에는 줄기가 가느다란 덩굴 식물들이 우거져서 외부에서 그것을 잡고 성벽을 오르기는 어려웠고, 또 그 식물들 덕분에 멀찍이서 보면 요새가 있는지 알아채기 힘들었다.
그녀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마화에게 묻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조용히 이동하고 있었기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마화 또한 그녀들 에게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고 묵묵히 일행들을 따라서 이동했다.
마화는 그녀들을 자그마한 방으로 안내해 주고 급히 요새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이제 더 이상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기에 그녀는 복면을 벗어 품속에 집어 넣고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갑자기 거의 1천여 명에 달하는 식구가 새로이 늘어났기에 복도는 흑의인들로 북적거렸다.
마화는 「暗黑大殿(암흑대전)」이란 현판이 붙은 방 앞에 서 있는 무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군사를 뵙게 해 줘요.”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흑의 무사는 평소와는 달리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화를 알아보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밖으로 나온 흑의 무사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들어오시랍니다.”
마화의 표정은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더욱 싸늘하게 바뀌었다. 아니, 들어가면서 바뀌었다는 것보다는 군사를 보고 나서 그렇게 바뀌었다는 것이 정확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마화가 냉기를 펄펄 날리면서 다짜고짜 대들자 설무지는 약간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인질로 잡고 있던 아이들을 그곳에 남겨 두려고 했잖아요?”
“그건… 설마, 자네가 데려온 것은 아니겠지?”
설무지의 어색한 대답에 더욱 확신을 굳힌 마화는 그를 다그쳤다.
“데려왔어요. 왜요? 뭐 잘못되었나요? 그 아이들을 그 위험한 곳에 일부러 놔두고는 정파가 기습했을 때 죽으면 그걸 이용해서 뭔가 꾸밀 생각이었죠?”
마화가 예리하게 지적하자 설무지는 김빠지는 듯한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얼버무렸다.
“하하…, 억측이 너무 심하군, 마화.”
“억측이 아니에요. 그 아이들을 죽일 게 아니라면 왜 거기에 놔두려고 했죠? 조만간에 쑥대밭이 될 게 뻔한데?”
예리하게 파고드는 마화를 향해, 무림이 어쩌구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설무지는 자신이 계획을 세우고 묵향이 승인한 그 계획을 조금 후퇴하기 로 했다.
“흐음, 기왕에 데려왔으니 하녀 하나를 붙여 주기로 하지. 나는 일이 많아서 바쁘니까 이만…….?
은근슬쩍 도망치려는 설무지였지만, 마화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 말아요. 제 생각이 맞죠?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들은 공식적인 인질이잖아요. 인질을 받았을 때는 인질을 보호해 준다는 무언의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요?”
그녀가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자, 설무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차근차근 말했다.
“물론 알고 있네.”
“어떻게 된 일인가요? 부교주님의 허락이 내려진 일인가요?”
“물론. 그분의 허락이 있었으니까 일을 시작했지.”
그 말에 경악한 마화. 그녀는 묵향이란 인물을 믿고 있었기에 충격이 조금 컸다.
“어떻게 그럴 수가…….”
“무림이란 곳은 먹고 먹히는 곳이야. 철저한 약육강식이 판치는 세상이지. 부교주의 적들은 너무나 강하고, 그들을 없애려면..
“하지만 그 아이들은 그렇게 강하지도 않잖아요. 또 그 아이들의 배후도 그렇게 강대한 문파는 아니잖아요?”
“무력은 약하지. 하지만 무영문은 알아주는 정보통이야. 또 악양세가는 정보력도, 무력도 약하지만 오랜 세월 인술(仁術)을 베풀어 왔기에 대단히 높은 신망(信 望)을 얻고 있어.
그들이 우리의 인질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악양세가도, 무영문도 정파 무리에게 의심의 눈길을 받게 되겠지. 그만큼 그들의 입지가 약화된다는 말이야. 우리는 우리대로 그들을 지키려고 최대한 노력했지만 분타가 무너지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죄는 그들을 죽인 정파에 있다, 뭐 이런 식으로 밀고 나가면 정파 안에서 자중 지란(自中之亂)도 가능하지. 그래서 부교주도 허락한 것이고…..”
설무지는 계속 이야기를 하다가 마화의 눈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비난을 감지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설무지는 마화의 자부심 높은 무인의 눈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말을 이해 못 하는 마화가 답답하게도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순수함을 언제까지고 지켜 주기를 바랐다. 그 자신도 왜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큰일 났습니다.”
천리독행의 말에 묵향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냐?”
“그게, 그녀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들?”
“예, 악양세가와 무영문의
“도망쳤나? 도대체 감시를 어떻게 했기에 도망친단 말이냐? 보초들은 뭐 하고 있었고?”
“그것이…, 보초들은 밖으로 나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딱 잡아떼는 판이라서 그게……. 그리고 밖으로 나간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으니, 정말 귀신이 곡을 할 노릇입니다.”
천리독행은 묵향이 소중한 인질들의 실종에 대단한 짜증을 낼 줄 알고 조심스럽게 변명을 했지만, 의외로 묵향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뭐, 운 좋게 도망쳤다면 된 거지. 그냥 놔둬라. 어차피 소모품으로나 쓸 생각이었으니,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그래, 철수 작업은 순조롭게 끝마쳤나?”
“예, 모두 조용히 떠났습니다.”
“몇이나 남았나?”
“염왕대 제13대, 1백 명입니다.”
“정면 공격을 받아도 그들만으로 충분히 탈출은 가능하겠지?”
묵향이 더 이상 두 여인의 탈출에 대해 거론하지 않고 넘어가자 천리독행은 적이 안심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대와 싸우는 것도 아니고 뒷정리를 끝내고는 그냥 튀는 건데, 제13대주 곽철(鐵)의 실력이라면 충분할 겁니다.”
“좋아. 이제 무대 준비가 거의 끝났으니, 배우들만 불러들이면 되겠군, 하하하.”
“흐흐흐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빨리 그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한참 웃음을 흘리던 묵향이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었다.
“자네는 아직도 나를 벨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물론 이 말은 여태껏 이야기를 나누던 천리독행에게 한 게 아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대답 또한 들리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에 답하는 무뚝 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지 웬만한 사람이 알아내기는 힘들었다.
“물론입니다. 제가 당신의 수하가 되는 조건 중에 하나였으니까요.”
이 대답을 하는 인물은 과거 묵향을 거의 죽일 뻔했던 살수 흑월야사(黑月夜死) 전룡(全龍)이었다.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나?”
묵향의 말에 약간 궁금증을 품은 예의 그 목소리.
“무슨 부탁이신가요?”
“앞으로 석 달 동안만 내 딸을 부탁하네.”
“예?”
“딸 말일세. 얼마 전에 왔을 때 봤을 텐데? 그 아이는 정파의 제자라 아는 척을 안 했지만 말이야. 바로 그 아이가 내 딸이라네.”
믿어지지 않는 듯 의심스런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녀가 딸이었습니까?”
““내 양녀지. 딸아이가 죽는다 해도 자네에게 책임은 없네. 자네는 자네의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그녀를 보호하면 돼. 자네가 막을 수 없는 상대가 나타난다면, 그 아이를 보호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켜봤다가 배후 인물만 나에게 알려 주게. 그래서 은잠술에 뛰어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니까 말이야. 해 줄 수 있겠나?” “정말 양녀가 죽어도 상관없습니까?”
“상관없네. 그 아이의 무공은 형편없어. 무리해서 그 아이를 보호한다고 날뛰다가 자네가 죽어 버린다면, 딸아이의 목숨은 그걸로 끝장이지. 또 나는 그 배후조차 알 수 없어진다네. 대놓고 보호할 수 없어도, 복수는 해 줘야 할 거 아닌가?”
“냉정한 분이군요.”
“별로 냉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내가 여태껏 살아온 삶이 그랬는데, 없던 정이 하늘에서 떨어지겠나? 어쨌든 부탁을 들어 주겠나?”
“예, 그럼 석 달 후에 뵙겠습니다.”
더 이상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으나, 묵향이나 천리독행은 뭔가가 이동하는 기척을 느꼈다. 묵향은 그 기척이 느껴지기도 전에 이미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 었고, 천리독행은 상대가 움직인 지금에야 상대가 숨어 있던 위치를 눈치 챘다는 것이 달랐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