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권 11화 – 간신과의 합작
간신과의 합작
군대라는 무리는 한없이 특이한 성질을 가졌다. 강한 상대 앞에서는 순한 양떼와 같이 겁이 많고, 약한 상대 앞에서는 굶주린 늑대와도 같이 포악하다. 상관의 명 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만, 그 상관의 위엄이 손상되었을 때는 가차 없이 상관을 베어 버리기도 한다. 원래가 외적(外敵)을 막기 위해 그들을 키우지만, 그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을 때는 오히려 외적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로 둔갑하는 것이 바로 군대다.
하지만 그 군대라는 것들이 아무리 폭도(暴徒)로 바뀌었다고 해도 그들을 이끄는 사람은 꼭 존재하게 마련이다. 대규모의 무리가 효과적으로 움직이려면, 그들을 통제할 인물이 필수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나 지금이나 군대라는 이 양면성을 가진 무리들을 효과적으로 휘어잡으려면 가장 윗계급 몇 명 만을 족치면 된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진리였다. 하지만 대 송제국에서는 지금 그 진리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대송제국은 그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진 대가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군사력을 보유해야만 했다. 무려 112만에 달하는 어림군(禦臨軍 : 중앙군)을 유지해 야만 했고, 각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는 2백만에 달하는 향방군(鄕防軍) 또한 유지해야 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 겨울철의 농한기(農閑期)에는 6 백만이 넘는 대비군(對備軍 : 예비군)을 소집하여 무예를 가르쳐야 했다.
이 모든 게 거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112만의 어림군 병졸들이 굶지 않게 밥만 줘도, 거기에 소모되는 액수는 천문학적인 숫자다. 그런데 이렇게 막대한 거금을 들여 키운 이 군대라는 것이 지금은 대 송제국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
대 송제국이 요를 정벌하기 위해 투입한 군사력은 무려 103만 대군. 물론 이중에서 실질적인 주력 전투군은 어림군 35만과 향방군 15만이었다. 하지만 이 50만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50만이 넘는 대비군이 차출되어 보급선을 유지하기 위해 피땀을 흘리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이번 전쟁을 도와준 고려와 여진, 정안국에 어 떤 형식으로든 약간의 사례는 해야 했기에, 송으로서는 몇 년에 걸쳐 비축해 둔 금, 은을 탕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자금 따위가 아니었다. 엄청난 군사력이 국외로 원정 나간 틈을 이용해 진천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거기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중요한 때에 황제 폐하까지 갑자기 붕어(崩御)하다 보니 대 송제국은 급격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를 이용해서 권력의 전면(面)에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호화롭게 꾸며진 넓은 방 위쪽에 마련된 의자는 그 방 넓이에 어울릴 정도로 크면서도 화려했다. 그리고 그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역시 그 큰 의자에 어울릴 만큼 비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살이 뒤룩뒤룩 붙은 이 인물은 그 살덩어리에 묻혀서 얼굴의 윤곽이 많이 무뎌졌지만, 아직도 제법 준수한 생김새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살이 찌기 전에는 대단한 미남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팔(八) 자 수염을 슬슬 쓰다듬으며 작고 교활한 눈을 반짝였다.
“어떻게 되었느냐?”
그 돼지 같은 인물의 옆에 서 있는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재빨리 귓속말을 했다. 사내의 말이 시작되었을 때 활짝 웃던 그 돼지는 갑자기 수하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예…, 2황야가 갑자기 실종되었습니다. 지금 백방으로 수색하는 중이온데……”
“이런 머저리 같은 것들!”
퍽!
“쿠엑!”
그 돼지는 육중한 몸을 일으켜 바닥에 주저앉은 수하의 멱살을 그러쥐고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살기가 배어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찾아내라. 10일의 말미를 주겠다. 만약 그때까지 2황야의 목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네 녀석의 목이 대신 잘릴 것이다.”
상관의 살벌한 말에 수하는 식은땀을 흘렸다.
“알겠사옵니다.”
졸지에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수하는 촌각이 아까운 듯 재빨리 밖으로 튀어나갔다. 하지만 그는 그 바쁜 와중에도 주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준비 절차로써 문 옆에 풀어 놓았던 자신의 장검을 회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돼지는 멀어져 가는 수하의 뒷모습을 보다가 자신의 꽉 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의 주먹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잘 알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방법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번 계획은 거의 10여 년 전에 수립된 것이었다. 자신의 여동생이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급상승하기 시작한 부귀(富貴)와 권세(權勢). 하지만 여인에 대한 남자 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바보 멍청이는 없다. 이성 간의 사랑은 빨리 불타오르지만 그만큼 빨리 식는 것이 정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여동생은 황제의 총애를 지속시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거듭했고, 15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황제의 총애를 받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황제는 새로운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60세가 넘은 늙어빠진 노인네가 노망이 났는지, 아직 15세도 되지 않은 예쁜 궁녀에게 푹 빠 져 버린 것이다. 돼지는 이제 자신이 오래전에 계획한 일을 실행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궁녀나 혈족들이 황제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점잖지 못한 짓들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연히 연적(戀敵)인 돼지의 여동생을 숙청하려는 짓도 끼어 있을 게 뻔했다. 돼지 또한 과거에 그런 짓 을 했으니까.
돼지는 궁녀 쪽에서 손을 쓰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돼지가 황제를 죽이는 것은 매우 간단했다. 거금을 들여 구입한 강력한 정력제를 황제께 바치는 것만으로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물론 그 일일(日) 사용량을 조금 과하게 아뢴 것 외에는 그에게 죄가 없었다. 덕분에 황제는 총애하는 궁녀의 방에서 복상사(腹上死)를 하게 되는 행운을 얻었지만 말이다.
황제의 승하와 동시에 돼지는 민첩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이미 이를 위해 무리하게 자신의 심복을 금의위 대영반에 올려놨고, 황제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던 옥 영진 대장군을 처치했다. 그가 옥영진 대장군을 처치하고 나자 그의 권세에 경악한 수많은 인물들이 머리를 조아려 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심복들을 중요 한 관직에 올리기도 하고, 또 자신의 파벌을 굳건하게 구축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돼지는 황제를 죽인 후 자신이 구축해 놓은 파벌을 움직여 뒷마무리를 시작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동생이 낳은 5황야를 황위에 올려놔야만 했던 것 이다. 뛰어난 황제의 재목이었던 1황야, 그리고 준수한 얼굴의 3황야,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던 4황야가 그런 이유로 돼지의 심복들 손에 이승을 떠났다. 그런 데 문제는 2황야였다. 그가 살아서 도망친 것이다.
돼지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지고(至高)한 자리는 진천왕처럼 한낱 무력에 의지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모략과 술수, 그리고 약간의 행운만 함께한다면…, 흐흐흐.”
한참 밤하늘을 쳐다보며 히죽거리던 돼지는 갑자기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혼잣말 같았지만, 돼지의 말에 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딘지 음산한 느낌을 주는 탁한 목소리였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예.”
“이유는?”
“상대보다 더욱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면, 모략이나 술수를 쓰는 것보다는 단순히 무력에 의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흠, 그렇다면 노부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나?”
“엄승 대인은 모략과 술수를 쓰시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대인의 가장 큰 적이 누구인지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군부의 꽉 막힌 노장(老將)들이나, 중신(重臣)들은 이미 힘을 잃었어. 군부의 영감들은 진천왕과 싸운다고 딴 곳에 신경 쓸 시간적 여 유가 없지. 그리고 알량한 지식에 의존해 권세나 탐하는 영감들은 갑작스런 황제의 붕어(崩御)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고. 그런데 본좌에게 아직도 적이라고 부를 만 한 자가 남아 있다는 말인가?”
“엄승 대인께서 잘 생각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한참을 궁리하던 엄승이 답했다.
“진길영 원수??
예의 음산한 목소리는 약간은 핀잔을 주듯 껄끄러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크흐흐흐, 진길영 원수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1만 리 밖에 있습니다. 그가 돌아올 때쯤이면 모든 일은 끝났겠지요.”
“그렇다면 진천왕?”
“진천왕 또한 정북원수부의 이태진(李太眞) 원수에게 걸려 한눈 팔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흐음, 그럼 설마 진성왕(眞誠王)이?”
그 목소리는 또다시 음산한 웃음소리를 곁들이며 들려왔다.
“흐흐흐흐, 예, 진성왕 또한 숨겨진 적들 중의 하나지요. 진성왕이 뭔가 흑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동남 원수부의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실로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진성왕 또한 동남원수부를 슬쩍 장악하고는 권좌(權座)를 노리고 있겠죠. 하지만 진짜 강한 적은 진성왕 따위가 아닙니다.”
“끄응, 그렇다면?”
“들어 보셨습니까? 무림에는 혈교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의 힘을 대인께서 얕보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과거 혈교의 분타 하나를 부수는 데 흑풍단 전력 의 반이 무너졌습니다.”
엄승은 신음성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흑풍단이 막대한 타격을 입었을 때, 그 사건은 대외적으로 기밀에 속했기에 엄승은 잘 몰랐던 것이다. 이민족 들을 억누르고, 반역 세력을 파해하는 최강의 힘을 자랑하던 흑풍단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우선 이민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엄승 정도의 지위에 있는 인물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그런 것을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승은 그 당시 흑풍단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 다. 엄승이 흑풍단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노골적인 반감을 품기 시작한 것은 몽고 원정 이후부터였기에 그전에 흑풍단의 힘이 어떠했는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 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정도나 강한가?”
“예, 하지만 다행히도 혈교는 전력을 다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정파(正派)들을 견제해야만 하기 때문이죠. 현 무림에서 최강의 세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정파이니까 말입니다. 정파가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떤 구심점 없이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대한 적이 나타났을 때 는 얘기가 다르죠.”
돼지는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좋은 지적이군. 그렇다면 혈교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그건 아닙니다. 자신들의 힘을 밖으로 드러내기는 힘들겠지만, 상대편의 중요한 인물 몇을 암살하려고 들지도 모릅니다. 혈교는 사이한 술법을 잘 쓰고, 또 대단 한 고수들도 많이 거느리고 있습니다.”
엄승은 ‘암살’이라는 말에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자신의 저택에도 많은 사병(私兵)들이 있었지만, 지금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인물이 자신의 집을 제집 드나들 듯해도 눈치 채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엄승의 표정을 보고 상대도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의 신변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본교의 고수 20명이 물샐틈없는 경비를 하고 있으니까요.”
“험험, 그런가?”
“예.”
“이제 숨어 있는 적은 더 없나?”
“아닙니다. 그 외에 정파에서도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뛰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수많은 정파의 문파들 중에서 그런 야심을 가질 만큼 강대한 문파는 몇 되지 않지요. 또 정파는 지금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만큼 한가하지는 않습니다. 본교에서 그들이 황궁에까지 신경을 돌리지 못하게 공작 중이니까 말입니다.” 그 말에 엄승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대인께서도 지켜 주셔야 합니다. 무림의 일에는 당분간 절대로 간섭하지 말아 주십시오. 정파를 적대하게 된다면 정파에서는 대인을 없애기 위해 궁리를 할 것입니다. 한동안은 정파에서 황궁 쪽에 신경을 쓰지 않아야만 합니다. 무림과 황궁은 서로 불가침의 영역이니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정파에서 도 모르는 척해 줄 것입니다.”
“알겠네. 그건 지켜 주지.”
“감사합니다, 대인.”
“참,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왔나?”
“예, 교주님의 전갈을 가지고 왔습니다. 본교에서는 정파 무림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무림인들이 칼부림을 할 것이니, 규모가 지나치다 싶더라도 진천왕의 반란 진압을 핑계로 묵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정파 또한 본교와 싸운다고 황궁 쪽에 신경을 쓰지 못할 것이니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알겠네. 내 그렇게 하지. 교주에게 노부가 권세를 잡은 후 결코 섭섭하지 않게 대우하겠다고 전하게.”
“감사합니다, 대인 소인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음산한 목소리가 작별 인사를 하자 엄승은 또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름달의 휘황한 광채 아래 드러난 화려한 정원은 주인의 시선을 끌기 위해 노력했지 만, 그의 시선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엄승은 그따위 것에 신경 쓸 정도로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먼저 조카를 황위(皇位)에 올려야 해. 그런 후…, 흐흐흐, 내가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하지만 나에게 반대할 만한 모든 세력을 없애는 게 우선이지. 군부 를 장악하고, 그다음은 무림을.. 흐흐흐.’
엄승의 그 투실투실한 뺨이 달빛에 희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