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권 12화 – 알 수 없는 미래
알 수 없는 미래
옥로조상풍수림(玉露凋傷楓樹林) 무산무협기소삼(巫山巫峽氣蕭森) 강간파랑겸천용(江間波浪兼天湧) 새상풍운접지음(塞上風雲接地陰) 총국양개타일루(叢菊兩開他日淚) 고주일계고원심(孤舟-繫故園心) 한의처처최도척(寒依處處催刀尺) 백제성고급모침(白帝城高急暮砧)
옥 같은 이슬 맞아 단풍 숲 시드니 무산 무협에는 가을 기운 쓸쓸하다. 강물의 파도 하늘로 용솟음 치고
변방 위의 바람, 구름 땅을 덮어 음산하다.
국화 더미 두 차례 피어나니 지난날이 눈물겹고
외로운 배 한결같이 매어 둔 것은 고향 생각 때문이라.
겨울옷 만드는 곳마다 가위, 자 바삐 놀리고
백제성 저 높이 저녁 다듬이 소리 급하다.
아련한 금음(琴音)을 타고 쓸쓸한 노래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가을의 흥취(秋興)」라는 제목의 이 시는 당나라의 대시인 두보(杜甫)의 걸작 중 하나다. 하 지만 두보는 그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젊었을 때부터 전쟁에 쫓겨 타지로 타지로 방황하다가 객사(客死)한 불우한 시인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노래들 중에는 고향을 그리는 서글픈 내용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노래를 끝낸 매영인은 금(琴)에서 살며시 손을 떼며 가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상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 사이에서 살짝 한숨이 새어 나 왔다. 이 시를 지은 두보의 심정이 자신과 같았을까? 두보는 전쟁통에 쫓겨 이리저리 떠돌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나마 도 없는 것이다. 새장 안에 갇힌 새. 어쩌면 이것은 어려운 때에 태어난 여자들의 숙명인지도 몰랐다.
1년만 지나면 돌려보내 준다고 하지만 그걸 믿기는 힘들었다. 처음 마교도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인질이 되었을 때는 1년 내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 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 또한 ‘여자’이기 전에 ‘무림인’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니.”
“너 또 집 생각이 나는 모양이구나. 마화 언니가 1년 후에는 돌려보내 준다고 했잖아? 1년은 금방 지나간단다. 조금만 참아라.”
악양소소는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매영인을 살며시 끌어안으며 토닥거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매영인의 마음을 잡기 힘들었다.
“언니는 그 말을 믿어요? 이곳에 온 후에도 언니는 그 말을 믿느냐구요. 척 봐도 곧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지잖아요. 마교와 정파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우리가 과연 이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또 필요가 있다고 해도 그건 필히 우리 가문에 해가 되는 것일 게 분명한데.”
“그렇게 나쁜 방향으로만 생각하지 마. 최악의 경우에는…….”
악양소소는 빼앗기지 않고 허리에 매여 있는 검 손잡이를 살며시, 하지만 나중에는 꼭 그러쥐었다.
“너는 무영문의 자랑스러운 제자잖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오세요.”
할 수 있는 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악양소소가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거의 생기(生氣)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신들의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상태라면 자신들의 앞날이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이었다. 문이 열리면서 마화가 웃음 띤 얼굴로 들어왔다.
“요즘 바빠서 자주 찾아오지 못하는구나. 미안해.”
“괜찮아요, 언니.”
마화는 급격하게 생기를 잃어 가는 매영인의 얼굴을 측은한 듯이 바라봤다. 마화 또한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상당히 고심하고 있으리라 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마화도 짐작할 수 없었다. 예전엔 무림인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마교도들의 생리에 대해 잘 몰 랐을 때는 분명하게 말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그녀는 서서히 그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마화는 일부러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 다.
“잘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고마워요, 언니.”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같이 술이나 한잔할까?”
“예.”
그녀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근심을 날려 버리기 위해 일부러 쾌활한 척 담소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그들은 한결같이 밝은 미래와 또 과거에 있었던 재미있었 던 시간들을 재잘거렸지만, 현실을 직시한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리라. 마화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 화기애애한 술자리에서도 매영 인과 악양소소는 허리에 차고 있는 검집을 풀지 않았다.
한편 그들과 마찬가지 처지에 놓인 여인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진영 공주. 과거 묵향을 혼내 주려다가 오히려 혼찌검이 났던 장본인이다.
“여봐라,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그녀의 채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그녀를 호위해 왔던 무장(武將)은 고개만 푹 수그린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냐? 아니면 골육상쟁(骨肉相爭)이 벌어진 것이냐?”
“…..”
“그렇지 않다면 왜 본녀가 이 별궁에 구금된 것이며, 또 별궁을 포위하고 있는 저 군사들은 또 무엇이냐? 속 시원히 대답을 해 보거라.” 공주가 계속 채근하자 무장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2황야께서 모반을 꾀하셨다 하더이다. 폐하께서 승하하시자마자 역심(心)을 품고 1황야와 3황야, 4황야를 암살하셨는데, 엄승 대감 께서 이를 포착하시고 보호하시어 5황야만은 생명을 부지하신 줄로 아옵니다.”
무장의 말에 공주는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사력을 다해 옆에 놓인 탁자에 몸을 의지하며 억지로나마 의연한 척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 에는 짙은 회의(懷疑)가 드러나 있었다.
“둘째 오라버니께서 모반을?”
공주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무장은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고 자책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말을 이었다.
“예, 그 때문에 지금 2황야를 지지하고 있는 반역도의 무리들을 응징하기 위해 엄승 대감께서 각 장군들에게 격문(格)을 돌리고 계십니다.”
“설마, 그럴 리가……. 둘째 오라버니는 절대 모반 같은 것을 꾀할 분이 아니야. 네가 잘못 안 것이 아니냐?”
“아니옵니다, 공주 마마. 가증스럽게도 2황야는 모반에 실패하자 자취를 감추었사온데, 아마도…….”
무장이 잠시 말을 끊자 공주는 그 뒷말을 채근했다.
“아마도?”
“아마도 2황야를 따르는 군부의 장군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옵니다.”
“그렇다면 곧 토벌당하시겠구나…….”
공주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무장은 그녀의 말에 정직하게 답했다.
“아니옵니다, 공주 마마. 지금 전 군사력은 진천왕의 반란에 투입되어 있사옵니다. 그런 형편이기에 토벌군을 곧 편성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옵니다. 오히려 잘못하 면 2황야의 반란이 성공할지도 모르옵니다. 그 때문에 엄승 대감께서는 각 장군들에게 2황야 토벌의 격문을 보내고, 각지에서 추가로 군사를 모집을 하고 계십니다 만, 어쩌면 천도를 해야 할지도…….”
무장의 말에 공주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천도? 천도라고 했느냐? 사태가 그 정도로 위중하단 말이냐?”
“예.”
마지못한 무장의 대답에 공주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자신의 마음속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아름답게 빛나 는 밤하늘.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하늘도 함께 찌푸려 줄 듯도 하건만, 하늘은 인간 세상을 굽어보며 그 유치한 짓거리들은 자신의 구경거리도 안 된다는 듯 자신의 마음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진영 공주는 한껏 밤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밤하늘이 그 해괴한 무림의 고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와도 타협을 하지 않으며,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 마교의 고수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일행에게 위협이 닥칠 때마다 유유히 헤쳐 나갔던 그의 모습을 그녀는 아직도 기 억하고 있었다. 제일 마지막에 개 맞듯이 맞은 것까지도…….
“괘씸한…….”
그녀의 중얼거림에 무사는 재빨리 귀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
“아무것도 아니다. 물러가거라.”
“예, 마마.”
물러가는 무장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공주는 창문을 통해 궁을 포위한 병사들을 살폈다. 그녀는 지금 사태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병사들의 표정을 바라보고 유추해 보았다. 병사들은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그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외부로 도망가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 봐도 이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때는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편했고, 또 돌아갈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구나. 어쩌면 이다지도 의지할 만한 인물이 없을까?”
공주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한탄에 답하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하하, 이 세상에 널린 것이 대송(大宋)의 백성들인데, 왜 사람이 없다고 탓하시옵니까?”
그 목소리는 남자 목소리답지 않게 맑고 청아했다. 하지만 공주는 외간 남자가 자신의 처소에 잠입했다는 것에 놀라 우선 몸을 사렸다. 곧 정신을 차린 그녀는 창 밖을 훑어봤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제법 컸기에 밖을 지키고 있는 군졸들이 눈치 챘을까 하는 우려감 때문이었다.
“누구냐?”
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살며시 흘러나오자 정체 불명의 괴한은 그 목소리에 답하듯 재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야행(夜行)을 하는 주제에 눈에 잘 띄는 밝은 청의(靑衣)를 입은 준수한 사내였다. 사내는 천천히 공주의 앞에 부복(?伏)했다.
“공주 마마를 뵈옵니다. 천세(歲) 천세 천천세!”
상대의 준수한 외모나 복장, 그리고 깍듯한 예의를 보고 그가 도저히 악한으로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공주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상대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소인(小人)은 수황련(守皇聯)의 우호법 왕길(吉)이라 하옵니다.”
왕길은 자신의 소개를 하면서 푸른 옥(玉)으로 매우 세밀하게 용의 무늬를 아로새긴 자그마한 패(牌)를 품속에서 꺼냈다. 「守(수)」라는 웅혼한 필치의 글자가 중간 에 쓰인 아름다운 물건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공주가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부복한 채로 자신의 머리 위에 양손으로 바쳤다.
그 패를 잠시 바라본 공주는 황궁 내에서 비밀리에 구전(口傳)하는 수황련의 표식과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에 속으로 경악하면서 재차 물었다.
“수황련이라 했느냐?”
“예.”
깊숙이 부복하는 왕길을 바라보며 공주는 사내의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황련은 황가를 지키는 비밀 수호 단체로서 태조 (太祖)께서 창건하셨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수황련의 활동은 미미했고, 그나마 1백 년쯤 전부터는 아예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황련의 무사가 지금, 그것도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아무리 패가 있다고 해도 그건 어느 정도 그 모양에 대해 주워들 은 것만 있다면 누구든지 모조품을 만들 수 있고, 또 수황련이 모습을 감춘 후 1백 년 동안 그 누구도 그 패를 구경하지 못했다.
“공주 마마께서 속하를 의심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옵니다. 수황련은 황가를 지키기 위해 존속하는 단체. 요 근래에는 태평세월이었기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사오나, 작금의 정세를 판단해 보건대, 속하들은 도저히 이 사태를 묵과할 수 없다고 중지(志)를 모았사옵니다.”
“그렇다면 우선 그대에게 본녀가 한 가지 묻겠다.”
“예.”
“본녀는 구중궁궐(九重宮闕)에 갇혀 있는 처지. 현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대가 속 시원히 답해 보라.”
공주의 질문에 왕길은 잠시의 지체도 하지 않고 속히 답했다. 여기서 망설이거나 하는 기색을 보이면 공주가 자신을 의심할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예, 먼저 간신 엄승이 자신의 혈족을 황위에 올릴 욕심으로 대부분의 황자(皇) 전하들을 암살했사옵니다. 이때 속하들도 포착하지 못한 제3의 세력이 2황야 전 하를 탈출시켰사온데, 그로 인해 혈족 간의 쟁투(爭鬪)가 벌어지려 하옵니다.”
왕길의 입에서 공주가 혹시나 하고 추리하고 있던 줄거리가 그대로 튀어나오자 정작 놀란 것은 공주였다.
“그… 그대의 말이 사실인가?”
“추호도 거짓이 없나이다. 태조 폐하의 뜻은 대송의 번영(繁榮)과 황실의 융성(隆盛). 속하들은 더 이상 현실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행동을 개시하였사옵 니다.”
공주는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왕길의 등짝을 얄미운 듯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의 노기를 머금은 눈에서는 곧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왕길이 이렇듯 정곡을 찔 러 말하지 않아도, 공주는 현재 돌아가는 궁내의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충 ‘이럴 것이다’하고 생각하는 것과 상대의 입에서 확실한 답을 듣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마도 호위 무장에게서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공주는 상대의 앞에서 못난 꼴을 보였을지도 몰랐다.
공주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형제간의 골육상쟁은 어떻게 흘러가도 멈춘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원래가 황실 내부의 골육상쟁은 언제나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지만, 그 와중에 자신이 끼어 있다는 점이 운이 없을 뿐이었다.
공주는 온 정신을 쏟아 마음을 바로잡으며 현실을 직시하려고 노력했다. 그것만이 자신이 더욱 비참한 지경으로 떨어지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예, 2황야께서는 아마도 엄승과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이때 그분께서 마음 편히 싸우시려면 엄승의 수중에 인질이 없어야 하옵니다. 다른 분들 께옵서도 허락하셨사오니 마마께서도…….”
왕길은 의도적으로 뒷말을 살짝 흐리게 말했다. 오히려 그편이 더욱 상대에게 호소력이 클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고, 대충 말해도 못 알아들을 만큼 멍청한 공주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본녀가 갈 곳은?”
“예, 정석대로라면 2황야 전하께로 모셔야 하겠으나, 지금 전하의 행방이 묘연하시기에 행적이 밝혀질 때까지는 저희들이 모셔야만 하겠사옵니다. 시간이 별로 없사옵니다. 서둘러 주시기를……”
“잠시 기다리거라.”
공주는 돌아서며 습관적으로 궁녀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소리를 억눌렀다. 이런 일일수록 비밀을 유지하는 것 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궁녀를 부르는 대신 자신이 직접 짐을 꾸렸다. 하지만 그녀 혼자만 가야 하는 만큼 그 분량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공주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패 물들 중에서 몇몇 아끼던 것들만을 챙겨 넣었다.
왕길은 그녀가 자그마한 주머니 속에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몇 가지 물건들을 서둘러 집어넣는 모습을 조심스레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밖을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왕길이 속한 단체는 실패를 용서치 않는 강대한 단체. 그렇기에 왕길은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성공하기 위하 여……..
어두운 밖을 관찰하기 위해 왕길은 기(氣)를 끌어 모아 시력을 돋구었고, 그의 눈동자에서는 잠시지만 은근한 마기가 살짝 풍겨 나왔다. 왕길의 눈에 저편에서 자 신의 신호를 기다리는 수하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몇몇 황족들의 실종은 당연히 엄승 나으리에 의해 비밀리에 처리되었다. 그따위 사실을 발표해 봐야 자신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궁이란 곳 자체 가 매우 존귀하신 분들이 사는 곳이기에 그 비밀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는 중신(重臣)들이라도 “황후 마마께 서는 폐하의 승하 이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슬퍼하시어 만나 뵐 수 없다”는 한마디면 해결되었다.
그 말을 떠들어 대는 놈들이 엄승의 수하들이었기에 의심을 품는 인물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감히 그것을 확인하려고 모험을 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지체 높은 집안의 안주인을 외간 남자가 만나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일국의 황족이 싫다는데도 만나려고 드는 간 큰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관대작들은 저마다 어느 쪽에 가담하는 편이 좋을지 궁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 황위를 찬탈하다시피 한 엄승 나으리는 재빨리 자신의 수중에 넣은 암행감찰기관인 금의위를 십분 활용해서 반대 세력 축출에 전력을 기울이는 형편이었기에 딴 곳에 한눈 팔 정신은 더욱 없었다. 그 때문에 평소에는 어느 정도 필 요에 의해 정보 수집 활동을 하던 무림이라는, 고도의 무예를 쌓은 위험인물들이 모여 있는 집단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틈을 내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