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권 14화 – 정사대전(大戰)
정사대전(大戰)
정사대전의 서막은 정파의 선발대 2천이 섬서분타를 기습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기습이 아니었다. 상대방은 그들이 올 걸 알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진하랏!”
군데군데 찢어진 청의를 입은 젊은이가 검을 휘두르며 수하들을 독려했지만, 그에 응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매우 교묘하게 위치를 선정하여 어떤 곳에서 적이 침 입해 오더라도 화살이나 연노(弩)를 발사할 수 있게 구축된 보루들 때문이었다.
연노에 장착되는 화살은 길이가 짧고 가늘기 때문에 강노(强弩)처럼 사정거리가 길지도, 또 파괴력이 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수의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 탓에 침입자들은 거의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로 화살 세례를 받고 있었다.
폭포처럼 퍼부어 대는 화살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기습 전에 수집한 정보로 모두 널찍한 나무 방패를 하나씩 구해 둔 덕분이었다.
무림인들은 원래 이렇게 커다란 방패를 가지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간밤에 각자 나무를 잘라 서둘러 만든 것이 이렇듯 도움이 되고 있었다.
급조(急造)한 방패라서 방어력은 현저히 떨어졌지만,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그들에게는 그 정도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각자가 들고 있는 방패에는 적게는 한두 개, 많게는 수십 개씩의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와 같은 형상이었다.
청의를 입은 젊은이 장 소협의 독려에 힘입어 수하들은 수십 개의 화살이 박힌 방패를 의지하여 천천히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소협이 거느린 선발대 를 뒤따라 각각의 젊은이들이 거느리는 무사들이 속속 진격했다.
“적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모두 힘을 내라! 이보게 육 소협! 자네는 오른편 보루를! 그리고 이 소저는 왼편 보루를 맡아 주시오. 자, 돌격하라!”
공격자들은 각 문파의 젊은 기재들인 만큼 그 왕성한 혈기로 밀어 붙이며 전투를 점차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쏟아지는 화살 덕분에 뛰어난 고수가 아닌 자들은 운신하기도 힘이 들었지만 그들은 지속적으로 적을 압박해 들어갔다.
공격자들은 각 보루에서 엄청난 화살비가 쏟아지는 것에 대해 오히려 마음을 놓고 있었다. 마교란 원래가 힘을 숭상하는 단순 무식한 단체였다. 교묘한 진세나 모 략을 잘 모르는 단체. 그렇기에 그들에게 강력한 힘을 지닌 세력이 있다면 초반부터 그들을 투입해 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으로써 쓸데없는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 고, 또 적에게는 더 큰 피해를 입히려고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격이 시작되고 나서 거의 2각이 지나도록 상대는 각각의 보루를 중심으로 완강한 저항을 하고 있을 뿐, 강력한 고수들을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서서히 밀어 붙이던 공격자들은 이제는 아예 총력을 기울여 돌진해 들어갔다. 백도의 젊은이들이 맹렬히 공격해 들어가자 각 보루의 두터운 문짝이 파괴 되고 곳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처럼 쏟아지던 화살의 양은 점차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쩝,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이제 어떻게 하지?>
공격해 들어오는 상대방의 방패에다가 일부러 화살을 쏘던 황의를 입은 인물이 전음(傳)으로 역시 옆에서 화살을 날리고 있는 동료에게 물었다. 이곳 섬서분타 의 외곽 방어대는 청, 황, 백, 흑색의 네 가지 색상의 옷을 입었다. 각 색깔에 따라 방어하는 방위(方位)가 달랐기에 유사시에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또 자신들 이 맡은 영역에서 이탈하는 것을 파악하기 쉬웠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기회를 봐서 슬쩍 후퇴해야지. 그건 그렇고 왜 이 지경이 되도록 위쪽에서는 지시가 없는 거지?>
<그러게 말일세. 설마 여기서 죽으라는 것은 아닐 테지?>
그는 자신들을 이곳 섬서분타에 밀정으로 박아 넣고는 이 위급한 때에 아무런 연락도 없는 얄미운 상관에 대해 욕지거리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이때 옆에서 동료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말을 건네 왔기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봐, 저 녀석 좀 보라구!>
동료가 살짝 가리키는 곳에는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품고 은근슬쩍 힘에 밀리는 척 후퇴하는 놈이 있었다. 그 황의인은 세 백도인의 공격을 여유 있게 막아 내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본격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뒤로 뒤로 물러서는 중이었다.
<저놈은 어디에서 들어온 놈이지?>
<제길! 알 게 뭐야. 지금 남 걱정하게 생겼어? 지시가 아직도 없는 걸 보면 적당히 패잔병에 섞여서 이동하라는 말이겠지 뭐. 자, 빨리 후퇴하세. 어쨌든 여기서 살 아남아야 마교 놈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 거 아닌가?>
황의인이 화살을 하나씩 날리면서 슬슬 엉덩이를 뒤로 빼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갑자기 전세(戰勢)가 뒤집히는 경이적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상대의 주력이 섬서분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후에야 천진악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원래 이런 식의 머리를 써야 하는 전술을 마교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 지만, 그건 상대보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있을 때 일이었다.
천진악의 명령에 따라 2백여 명의 흑의인들이 장검을 뽑아 들고는 안으로 기어들려고 발악을 하는 백도인들의 뒤통수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곧 병장기 부딪치 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리는 가운데 지독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드디어 정파의 젊은 공격자들이 우려하던 일, 즉 마교 쪽에서 강력한 고수들을 투입해 왔던 것이다.
이제 공격자들은 자신들이 보루들을 점령해 나가면서 항아리와 같은 형상으로 개척해 놓은 통로 속에 갇혔다. 앞은 진세, 좌우는 상대방의 보루, 뒤에는 악귀와도 같은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 화살이 간간이 쏟아지는 가운데 벌어진 육박전은 처절했다. 공격자들은 자신들의 뒤통수를 향해 들이닥치는 상대의 공격 때문에 처음 의 계획대로 후퇴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죽자고 발악하는 것뿐이었다.
거의 2각에 걸친 접전이 벌어진 후에 음희 설약벽이 거느리는 염왕대 제13대가 가세했다. 그들은 백도인들에게는 장벽이었던 진세를 매우 간단하게 통과하여 밖 으로 돌격해 나왔다.
완전히 포위되어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발악을 하던 백도인들의 힘은 한창 한계점을 향해 치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이들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상대방이 거느린 고수의 수가 3백여 명 정도뿐이라는 것이었다. 힘을 뭉쳐 한 곳을 뚫고 나간다면, 일부는 살아서 도망칠 가능성 이 다분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미 두 번에 걸쳐 앞뒤로 기습을 당한 그들의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눈에 그 실낱같은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대부분이 이런 대규모 살상극에 익숙하지 않은 애송이들이라는 것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지휘 체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뿔뿔 이 흩어져서 발악을 하다가 죽어 갈 뿐이었다.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모든 게 문주님의 예상대로 되었습니다.”
총관이 허겁지겁 달려 들어오며 외치자, 실내의 화초들을 섬세한 손길로 매만지고 있던 옥화무제 매향옥은 살짝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하지만 평소에 무게 있는 행동을 하던 총관이 저렇게 허둥대는 것을 보면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의 점잖지 못한 행동에 주의를 주지는 않고 천천히 발 뒤편에 가 앉으면서 약간 짜증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말인가요?”
옥화무제가 자리에 앉자 총관은 재빨리 용건을 말했다.
“문주님의 예상대로 정파의 선발대는 전멸했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수라도제는 진격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상외의 정보였다. 옥화무제는 묵향이 없는 섬서분타를 접수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리고 상당한 피해를 보리라고 예측했다. 이런 식으로 초전부터 섬서분타 쪽이 압승을 거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멸? 섬서분타의 피해는?”
“첩자의 보고에 의하면, 사상자가 5백여 명 정도라고…….”
“사상자가 5백뿐이라고? 본녀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예상을 한 적은 없어요. 최소한 그 배는 넘는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묵향은 도대체 섬서분타에 어느 정도의 전력을 놔두고 간 거죠?”
“예,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천진악과 설약벽, 그리고 3백여 명의 흑의 고수들이 접전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음…, 그게 묵향이 섬서분타에 남겨 둔 전력의 전부라고 해도, 그로서는 상당히 무리를 한 게 분명하군요. 천진악과 설약벽. 그리고 그 흑의 고수들은 아마도 천 랑대일 가능성은 별로 없고, 염왕대일 가능성이 크겠죠?”
“속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첩자에게 그 부분을 더욱 자세히 알아보라고 지시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염왕대만 해도 본녀로서는 상상 이상이니까 말이에요. 묵향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그렇게 큰 전력을 뺀다면 이제 벌 어질 총단 공격에 커다란 틈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 때문에 옥화무제가 약간은 짜증스럽게 말하자, 총관은 자신의 추측을 조심스레 설명했다.
“아마도 그 정도 전력은 없어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이 아닐까요?”
옥화무제는 살짝 머리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글쎄요…….”
섬서분타가 정사대전의 초전에서 능력 이상의 대승을 거두자, 그에 충격을 받은 정파는 두 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만반의 대비를 했다. 섬서분타가 웬만 한 무림의 분타들과 달리 의외로 강력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각종 방어 장비들이 현지의 대장간에서 관군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제작 되어 납품되었다.
방어 장비라고 해 봐야 철판을 덧댄 대형 방패라든지, 얄팍한 갑옷 따위가 전부였지만, 이것은 일반적으로 무림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만큼 정파에서 는 수천의 정예 무사가 모여 있음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마교의 전진 기지 섬서분타를 우선적으로 초토화시키는 것이 이번 정사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열쇠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정파에서 자신들의 계획대로 섬서분타 쪽에 막대한 전력을 투입하자 신이 난 쪽은 마교 총단의 수뇌부들이었다. 이제 어부지리를 남에게 뺏기지 않도록 준비만 하 고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교주님”
마교 총단의 대 회의실의 중간에 놓인 탁자에는 세세하게 그려진 중원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지도 위에는 빽빽하게 뭔가가 꽂혀 있었다. 혁무상 장로는 길쭉한 지휘봉을 들고 신이 나서 지도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떠들어 댔다.
“정사대전의 초반을 압승으로 장식한 섬서분타를 없애기 위해 정파의 각 문파들은 숨겨뒀던 정예 무사들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비영대의 최신 정보에 따르면 무 당(武當), 화산(華山), 당문(唐門), 종남(終南)에서 5백여 명의 정예를 추가로 차출하여 파견했습니다. 그들의 전진 속도가 엄청난 것으로 볼 때 6일 후에는 수라도 제의 주력과 합류할 것입니다.”
“좋아, 자네는 이번 회전에서 묵향과 정파가 공멸(共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게나.”
“예, 지금 각지에서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이간책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정파는 섬서분타를 본교에서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 건설한 교두보(橋頭堡)라고 굳게 믿 고 있죠. 게다가 묵향이 초전을 대승으로 장식했으니, 그곳에 본교의 중원 침략을 위한 정예가 주둔 중이라는 것을 공포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라 일은 더욱 쉽게 풀리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뭔가?”
“예, 구휘의 무덤에 꼬인 날파리들은 이번 정사대전에서 빠졌다는 게 흠이지요. 그들은 지금 구휘의 무덤을 두고 심각한 대결 구도를 취하고 있기에 정사대전 쪽 으로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모양입니다.”
“크크크, 괜찮아. 송사리 몇 마리쯤 빠져 나갔다 해도 대어(大魚)만 놓치지 않으면 상관없지. 이제 중원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군. 지금이 중요한 때야. 이 기회를 헛 되이 넘기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겠지. 자네의 의견은 어떤가?”
“예, 지당하신 생각이십니다. 속하의 얕은 생각으로는 이때를 이용해서 본교의 고수들을 선동하여 마교 천하를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 다. 무림일통은 본교 무사들의 꿈이니만큼, 현 상황이 얼마나 본교에 유리한지를 잘 설명한다면 원로원도 지지해 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본교 내부의 의견을 하나로 통일하여 내부로는 더욱 단합을 굳건히 하고, 외부로는 본교가 중원을 제패할 수 있는 주춧돌을 놓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현재 중립을 지키는 세력들을 충동질하여 묵향을 더욱 압박하면서, 그에 응하지 않는 단체들은 없애 버려야 하지요. 물론 이것은 묵향이 한 짓이라는 충분한 증거를 남겨 두고 말이죠.”
“좋은 생각이야. 그대들의 의견은 어떤가?”
장인걸의 말에 수하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속하들도 같은 의견입니다!”
어느 정도 소란이 가라앉자 혁무상은 말을 이었다.
“교내의 여론이 일치되면 우선적으로 몇몇 원로원의 노고수들을 교외로 내보내야 합니다.”
“응? 원로원은 왜?”
“물론 독수마제를 고립시키기 위해서죠. 본교의 모든 이목이 무림일통 쪽으로 기운 상태에서 혈수라(血修羅)와 지령마객(地靈魔客)에게 각각 임무를 주어 교외로 보내는 겁니다. 본교 최대의 숙원을 이루려는 성전이 선언된 마당에 원로원 전체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수 몇 명만을 쓰겠다는데, 독수마제도 반대할 수는 없겠 죠. 그들이 가 버린 후 홀로 남은 독수마제를…, 크흐흐흐흐.”
혁무상은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흐리며 음흉한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의 말뜻을 못 알아들을 멍청이는 없었기에 이곳에 모인 고수들은 저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장인걸을 실질적인 힘의 중심으로 마도천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들떠 있는 수하들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장인걸은 찬찬히 살 펴봤다. 구양운, 소무면, 여진, 장영길, 진란…….
핵심 고수들의 표정을 훑어가던 그의 시선은 혁무상의 얼굴에서 멈췄다. 혁무상은 자신의 생각대로 모든 일이 되어 가자 매우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교주에게 칭 찬을 받은 데다가 동료 고수들도 자신의 의견을 지지했기에, 더욱 기분이 좋을 것이다.
현재 혁무상은 그만큼 장인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장인걸의 얼굴은 다른 수하들처럼 함박꽃 같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지만, 혁무상을 향한 그의 시선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