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권 16화 – 총타 공격

총타 공격

마교의 총타가 있는 곳은 대산(大山)이었다. 십만대산(十萬大山)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수많은 봉우리를 가진 대산은 매우 험악한 산세를 자랑한다. 그 산세를 의 지하여 대산 깊은 곳에 마교가 똬리를 튼 후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마교는 대산 곳곳에 수많은 함정과 기관, 진세를 설치했고, 중요한 교통로에는 요새들을 건설했 다. 지금에 이르러서 십만대산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 있었다. 수많은 명문정파들이 한 번씩은 자신의 집구석을 털려 보았지만 마교는 아직 그런 경험 이 없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는 무리가 있었다. 흑의를 입고 오른쪽 어깨와 왼쪽 발에 자그마한 흰색 천을 붙인 무리들이었다. 각자 가지고 있 는 검(劍)은 그을음을 묻혀서 빛이 하나도 반사되지 않았다.

그들은 개개인이 대단히 뛰어난 무공을 지닌 듯 그 움직임은 매우 재빨랐고, 그들의 행동을 눈치 챈 몇몇 보초들은 거의 순간적으로 목숨을 내주어야 했다. 그들이 통로를 개척하자 그들보다는 조금 무공이 떨어지는 무리가 그 뒤를 이어 이동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는 도저히 무림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수천의 무리가 뒤따랐다. 중후한 갑주를 걸치고, 달빛에라도 반사되어 빛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각자 흑색의 펑퍼짐한 옷을 갑주 위에 입고 있었다. 그들은 갑주의 무게 때문인지 경공술을 쓰는 대신 거대한 말을 타고 있었는데, 말발굽에는 두꺼운 천을 덧대어 발굽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술을… 드셔도 괜찮겠습니까?”

설무지의 조심스런 물음에 묵향은 입에 대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바야흐로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복수가 이루어지려는 순간인데, 축배(祝杯)가 빠질 수는 없지. 장인걸 녀석, 뒤통수를 얻어맞은 걸 깨달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그 녀석도 나를 함정에 밀어 넣을 때 이런 생각을 했을까? 흐흐흐.

묵향이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 있을 때 산봉우리 쪽에서 빨간 불빛이 세 번 반짝이고 사라졌다. 웬만해서는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희미했지만, 묵향도 설무지 도 그 불빛을 놓치지 않았다. 설무지는 바위 위에 앉아 뭐가 좋은지 혼자 키득거리는 묵향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세 번째 목표인 마천령(魔泉嶺)을 점령했다는 보고입니다. 아직까지도 조용한 걸 보면 천리독행 장로님이 상당히 분투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수석장로는 어디로 갔나?”

“예, 차석장로님과 함께 천랑대 제5대를 거느리고 총타 반대쪽으로 가셨습니다. 잘하면 그분께서 가장 큰 공을 세우실 수 있을 겁니다.”

“도주로를 차단하러 갔군.”

“예.”

“하지만 쓸데없는 일이야. 도망치려고 하는 극마에 오른 고수를 그 정도 인원으로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수하들도 분투하고 있는데, 이제 슬슬 본좌도 가 봐 야겠군. 자네는 여기 있게나. 전체적인 대국(對局)을 바라보며 인원을 움직일 인물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묵향의 말에 설무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부교주님.”

묵향이 앞으로 달려가자 주위에 서 있던 10여 명의 흑의인들이 그의 뒤를 좇았다. 이들은 묵향의 호위들로 천랑대에서 뽑은 정예였다.

“무슨 일이냐?”

요란스레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경악한 장인걸은 잠자리를 박차고 나와 부서질 듯 문을 열고는 호위 무사를 향해 외쳤다. 문 앞에 서 있던 호위 무사는 깊숙이 머 리를 숙였다.

“옛, 제1급 비상 신호음입니다. 교내에 적이 침입한 모양입니다.”

“적이라고? 제길! 어떤 미친 녀석이 감히 1천 년 동안 한 번도 외인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 이곳을 넘본단 말이냐? 혁무상 장로를 불러라.”

“옛!”

급히 답한 호위 무사는 재빨리 혁무상 장로의 거처로 뛰어갔다.

호위 무사가 달려 나간 후반 각(약 8분)도 지나지 않아 엄청난 마기를 뿜어내는 인물이 장인걸 앞에 나타났다. 교주 독립 호위대의 대장인 마혈검귀(魔血劍鬼) 왕 천(王壇)이었다. 왕천은 도착과 동시에 3교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독립 호위 대원들을 황급히 불러 모으는 한편, 교주의 원거리 호위대인 수마대(守魔隊)에 특급 경계령을 내렸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학살인도(虐殺人屠) 박용(朴龍)이 거느리는 교주 직속의 무력 단체인 사사혈시마대(邪死血屍魔隊)에도 전령을 보 냈다.

교내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천마혈검대가 교내에 없으니, 두 번째 전투력을 지닌 수라마참대는 아마도 소무면 장로의 지휘 아래 적이 침입한 곳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 번째 전투력을 지닌 사사혈시마대를 불러 들여 교주가 기거하는 천마대전(天魔大殿)을 호위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장인걸이 팔짱을 끼고 묵묵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도 사태는 매우 급박하게 움직였다. 박용이 끌고 온 사사혈시마대가 천마 대전의 외곽에 포진했고,

흑수천마(黑手千魔) 여진(呂震)이 거느리는 호법원의 고수들이 재빨리 장인걸의 가족들을 천마대전으로 모아 들였다.

장인걸은 두 명의 처와 열두 명의 첩을 거느렸고, 서른 명에 가까운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이 있었다. 그들을 빠른 시간 내에 끌어 모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 었지만 호법원의 고수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일을 완수해 냈다.

그러는 사이 장인걸에게 전령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적의 주력은 북쪽에서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현재 6진부터 3진까지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진입 중입니다. 속하가 달려올 때 삼면인마 장로께서 수라마참대 를 거느리고 그곳으로 직행하고 계셨습니다.”

전령은 혁무상 장로에게 몇 가지 지시를 받고 전장으로 다시 달려갔다. 첫 번째 전령의 보고를 들은 장인걸은 내일 아침이 되면 이번 습격을 잘 막아 낸 소무면 장 로에게 보검을 한 자루 선물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소무면 장로가 거느린 수라마참대라면 상대를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채 반 각도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전령이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북동쪽에서 자성만마대와 적이 충돌했습니다.”

혁무상은 신중한 태도로 전령의 보고를 들으며 머리를 회전시켰다.

‘놈들은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펼치는 것이군.’

“놈들의 수는?”

“옛! 대략 7천 정도입니다.”

“뭣이, 7천? 이런 험준한 요새를 향해 7천이나 투입했다는 말이냐? 정파 놈들이 아무리 대가리가 굳은 놈들이라고 해도, 변변한 방어 장비도 없이 그 정도 인원을 이런 험준한 곳에 투입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무림인들은 원래가 갑주나 방패 따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둘의 사용 방법이나 효능을 몰라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걸리적거리기 때문이었다. 또 그런 것 을 가지고 이동한다면 도중에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관군들이 그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그래서 무림인들의 표준 장비는 장식용으로 인정되는 검(劍)이나 도(刀) 정도가 한계였다. 창을 사용하는 인물들은 보통 서너 토막 친 칼을 가지고 다니다가 적이 나타났을 때만 연결해서 사용했다.

아무리 무림의 일을 관이 묵인해 준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무림인인 척하고 중무장을 한 군대가 침입해 올 가능성이 있는 한 무림인은 절대로 전투 용 중장비를 휴대할 수 없었다.

전령은 곧 혁무상의 의문에 답했다.

“무영신마 장로께서는 상대가 아무래도 무림인이기보다는 군대(軍隊)인 것 같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올지 하명해 주십시오.”

혁무상은 기가 차다는 듯 되물었다. 군대가 마교를 건드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진천왕이 반란을 일으켜서 시국이 어수선한 때였다.

“군대라고?”

“옛! 강노(强弩)와 강궁(强弓)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매우 치밀한 움직임을 보입니다. 거대한 마상용 장도(長刀)에 중갑주를 입은 것으로 보아 무림인은 아닌 듯 생각됩니다.”

한밤의 기습이었기에 상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무림인들과 관군들은 그 싸우는 방식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군대는 기계 장치를 이용해 수 개에서 수십 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장치인 노(弩)라든지, 투석기, 충차(衝車 : 성문을 부수는 데 애용됨) 등의 효과적인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했고, 개개인의 무술 실력보다는 집단적인 힘을 강조했다. 그 때문에 각종 진법(陣法)이나 병법(兵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전체적인 틀보다는 개개인의 무술 실력을 중시했다. 칠성검진 따위의 각종 진세가 발전하기도 했지만, 군대의 진법과는 달리 개개인의 무술 실 력에 따른 융통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혼자서만 움직인다면 몰라도 수백, 아니 수천 명이 이동하면서 전투를 한다면 서로의 차이점은 확연히 드러나게 되 는 것이다.

상대는 수천 명이었고, 또 그들이 집단적으로 공격해 오는 모양새를 보고 무영신마는 곧 그들이 군인들이라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전령의 보고를 들은 장인걸 은 의문에 빠져 들었다.

“군대가 왜……?”

장인걸이 깊은 생각에 감겨 있는 동안, 혁무상은 재빨리 혓바닥을 놀렸다.

“이 일을… 너는 원로원에 보고하라. 본교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옛!”

전령이 원로원으로 달려가는 것을 볼 겨를도 없이 혁무상은 짙은 수염을 길러선지 퇴폐적인 인상을 지닌, 50대 초반의 인물에게 고개를 돌렸다.

““박용 대주는 사사혈시마대 5백 명 정도를 거느리고 가서 무영신마 장로를 도와주시오. 상대가 관군이라면 귀혼강신대법(歸魂?身大法)을 익힌 사사혈시마대가 더 효과적일 것이오.”

“알겠습니다.”

갑작스런 기습으로 마교 총타가 갈팡질팡하는 동안 마교의 중심부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진격해 들어가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을 막아서는 인물들이라고 해 봐 야 총타 외곽 호위 무사들 정도로, 그 실력이 많이 떨어졌기에 이들을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기습해서 들어오는 무리들은 다름 아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솥밥을 먹던, 호위 무사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정예들. 어디에 기관 장치 가 있고, 또 어디가 매복하기 좋은지는 환히 알고 있었다. 또 외곽 호위 무사들이 경계를 위해 주둔한 위치까지도.

그렇기에 외곽 호위진은 매우 빠른 시간 안에 무너져 버렸고, 침입자를 포착한 것은 적이 중심부에 근접해 들어왔을 때였다. 서둘러 출동한다고 했지만, 소무면 장 로의 수라마참대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기도 전에 적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칼부림이 벌어지고, 맹렬한 육박전이 시작되었다. 소무면 장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상대가 정파의 무공이 아닌 마교의, 그것도 상승의 무공을 사용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소무면 장로는 제발 자신의 짐작이 틀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짐작은 점점 현실로 나타났다. 저쪽에서 자신도 익히 잘 아는 인물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기 때 문이다. 흑색 옷을 입은, 적당히 마른 체구의 인물. 격전이 벌어지는 사이를 느긋하게 걸어왔지만, 그를 막는 자는 없었다.

어쩌다 병장기나 강기의 파편이 그쪽으로 날아갔지만 그의 몸에 어떤 피해도 줄 수 없었다. 오히려 그쪽으로 검을 날렸던 사람들의 무기가 뭔가에 막힌 듯 튕겨 나 가며 자세가 허물어졌고, 여태껏 싸우던 상대방에게 목숨을 날렸다.

“부, 부교주님.”

경악감에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소무면 장로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에 답하는 목소리는 소무면 장로를 놀리는 듯 부드러웠다.

“오랜만이군, 소무면 장로.”

“어떻게, 어떻게…….”

도저히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기에 소무면 장로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아군일 때는 매우 든든하지만, 그 반대로 적일 때는 최 악의 상대. 마교의 1천 년 역사를 통틀어 최강의 고수가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소무면 장로가 검을 뽑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서 있자 묵향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본좌는 본교의 율법을 바로 세우려고 왔다. 자네는 본교의 율법을 수호해야 할 아홉 명의 장로 중 하나. 선택은 자네에게 달려 있네. 어떻게 할 텐가?”

소무면 장로는 재빨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묵향을 바라봤다. 소무면 장로와 눈이 마주치면서 묵향은 그가 더 이상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은 죽음을 각오한 눈빛이었다.

‘기어이 피를 볼 생각인가?”

묵향은 상대가 먼저 손을 써 오기를 기다렸지만, 소무면 장로는 검을 뽑는 대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율법을 바로 세운다 하시면 어떤 뜻입니까?”

소무면 장로의 말에 묵향은 나지막하지만 힘 있게 답했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비열하게 암습을 해서 본좌를 해치고, 또 교주를 해친 인물을 척살하고자 한다.”

“그다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것은 엄연한 개인적인 복수. 개인적인 복수를 가지고 율법을 운운하실 수는 없습니다. 복수 후에는 어쩌실 겁니까?” “강자지존强之尊)!”

묵향의 대답은 단 한 마디. 하지만 그 짧은 한마디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무면 장로의 머릿속에는 마교에서 자라나며 뿌리 깊이 박힌 하나의 이상이 있었다. 바로 그것은 힘, 순수한 힘에 대한 열정이었다. 마교에서 가장 인망이 높은 소무면 장로가 장인걸의 독주를 제지하지 않았던 것도, 전대 교주였던 한중길은 마교의 이상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한중길 교주가 소무면이 지닌 이상에 맞게 행동했다면, 마교는 일찌감치 그 강대한 무력으로 마도천하를 이룩하기 위한 어떤 행위에 들어갔어야 했다.

묵향은 다른 의미에서 소무면 장로의 이상에 맞지 않았다. 묵향은 힘을 추구하기는 하되, 오로지 개인적인 힘에 국한시켰다. 사람이 발휘하는 힘은 하나 더하기 하 나를 했을 때 열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묵향은 집단의 힘을 등한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수련에만 빠져 들며, 마교가 추구하는 힘의 율법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묵향이 지금 ‘강자지존’을 들고 나왔다. 그 말은 곧 마교라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뜻. 그가 교주가 된다면 더 이상 마교 내의 반목은 있을 수도 없었고, 또 그를 중심으로 마교도들은 빠른 시간 안에 단합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단합된 힘을 이용하며 마도천하를 이룩할 가능성이 최소한 장인걸보다는 높았 다. 그는 강했기 때문이다.

“전투를 중지하랏!”

웅후한 음성으로 외친 소무면 장로의 몸은 마치 힘이 다해 버린 듯 천천히 아래로 무너졌다. 소무면 장로는 무릎을 꿇고 검을 뽑아 무릎 앞쪽 땅속 깊이 박아 넣었 다. 그는 검 손잡이를 잡은 채 포권하는 듯한 형상으로 정중하게 말했다.

“속하, 본교의 장로로서 율법을 바로 세우지 못한 죄, 처분을 기다립니다.”

깊은 공력이 내재된 소무면 장로의 음성은 벼락 치듯 아수라장을 관통했고, 곧 싸움은 멈췄다. 수라마참대 소속의 고수들은 그들의 대주인 삼면인마 소무면 장로 의 행색을 보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재빨리 눈치 챘다. 자신들의 우두머리는 더 이상 싸움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약간은 허탈한 표정이었지만 묵묵히 소무면 장로와 같은 행동을 했다. 상대가 검으로 친다면 조용히 죽어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묵향이 거 느린 고수들은 재빨리 무릎 꿇은 그들의 옆을 지나쳐 들어갔다. 처음부터 묵향이 노린 목표물은 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상자들을 돌보라. 그들은 이렇듯 헛되이 피를 흘리도록 키워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장차 본교를 위해 더욱 값진 피를 흘릴 수 있을 것이다.”

묵향은 소무면 장로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빨리 돌아서서 수하들을 뒤따랐다. 묵향이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소무면 장로의 숙여진 고개는 들릴 줄을 몰랐다.

“소무면 장로께서 개선하시는 모양입니다.”

멀리서 엄청난 마기를 피워 올리는 고수들이 달려 올라왔다. 그것을 보고 수마대의 고수 하나가 내뱉은 말이었다.

닭들이 모인 곳에 오리 한 마리가 있다면 금세 알아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묵향이나 장인걸 둘 다 마교의 중추적 인물들이었고, 그들의 수하도 마 찬가지였다. 상대방이 정파라면 그 풍기는 기운이나 무공 따위를 보고 적이라는 것을 곧 알아챘겠지만, 엄청난 경공술을 발휘하여 돌진해 오는 인물들은 틀림없는 마교의 무공을 썼고 또 막강한 마기를 뿜어냈다.

소무면 장로가 거느린 수라마참대의 인원들은 천랑대의 무사들보다 한 끗발 높은 실력을 가졌다. 그 때문에 천랑대원들이 뿜어내는 마기는 약간 미약하겠지만, 그 래도 수라마참대와 구분하기 힘들 만큼 엇비슷했다. 따라서 상대가 적이라는 것을 알아채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천랑대가 접근해 올 때 박용은 5백여 명의 사사혈시마대 대원들을 거느리고 자성만마대를 지원하기 위해 출발하고 있었다. 개선해서 도착한다고 생각하던 무리와 이제 전장으로 떠나는 무리는 한순간 섞일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때 칼부림이 시작되었다.

수십 명에 이르는 사사혈시마대 대원들이 기습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머리통이 깨져서 뒹굴 때에야 장인걸 쪽에서는 그들이 아군이 아니라 적이라는 것을 눈치 챘 다. 사사혈시마대 5백여 명과 천랑대 8백여 명은 치열한 난타전을 벌였다.

“뭣들 하는 짓이냐?”

정말이지 고막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 때문에 몇몇 무공이 약한 시비들이 기절해 버렸을 정도였지만, 이곳에는 그 정도에 타격을 받 을 만큼 나약한 인물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괴성 속에 내재된 막강한 마기에 모두 움찔 했고, 혼전으로 치달으려던 싸움이 일순 멈춘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한쪽에서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10여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이건 뭣 하는 짓이야? 겨우 집안싸움 때문에 본좌를 부른 것이냐?”

매서운 표정으로 사내는 장인걸을 쏘아보며 외쳤다. 하지만 장인걸은 사내에게 고개를 돌릴 정신이 없었다. 저 멀리서 히죽 웃고 있는 흑의 사내를 쏘아보는 것만 으로도 그는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좌의 말이 말같이 안 들리는가, 교주?”

“예? 예, 태상교주님.”

장인걸은 시간을 끌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두뇌를 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도 그의 머릿속은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조금이라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험험, 원로원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변절자를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본교의 율법에 따라 원로원은 본교의 흥망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일에도 참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테지?”

이때 혁무상 장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예, 그러니까 원로원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지요, 태상교주님. 본교 내의 권력 다툼에서 원로원이 중립을 지킨다는 것을 속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묵향 부 교주 측에서 군대를 동원했다면 말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본교의 일에 외부 세력을 개입시키는 자는 율법에도 나와 있듯 참형(斬刑)에 해당합니다.”

혁무상의 말에 태상교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어디에 군대가 있다는 말이냐? 본좌의 눈에 외인(外人)은 보이지 않는데?”

“맹호령(猛虎嶺) 쪽에서 약 7천의 군세를 무영신마 장로가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외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저 녀석의 말이 사실이냐?”

태상교주의 말에 묵향은 슬쩍 비웃음을 흘렸다.

“반쯤은.”

“네놈은 외세를 개입시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냐?”

태상교주는 매서운 표정으로 묵향을 쏘아보며 질책했지만, 그에 반해 묵향은 유들유들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일부러 태상교주를 약 올리는 듯 느껴질 정도 로.

“아니, 군대를 끌어 들였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지. 내 수하들의 상당수는 해체된 찬황흑풍단의 무사들이니까 말이오. 그건 그렇고, 태상교주는 빠지시오. 이건 장 인걸과 본좌 사이의 일이니.”

묵향의 반말지거리에 분노를 터뜨린 것은 태상교주가 아닌 그를 수행하여 함께 온 두 노인들이었다.

“닥쳐라, 은퇴하셨다고는 하지만 네 녀석이 얕잡아 볼 정도로 태상교주님의 권세가 낮지는 않다.”

하지만 그들의 노성은 태상교주에 의해 가로막혔다.

“조용해야 할 것은 자네들이야. 본교의 율법은 바로 힘. 저 아이의 무공이 본좌보다 강하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찬황흑풍단은 이미 해체되어 버린 단체. 그들을 흡수했다면 외세를 개입시킨 것은 아니지. 원로원은 중립을 선언하겠으니 둘이서 잘 해결해 보게나.”

태상교주는 마치 그곳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기기나 하는 듯 서둘러서 떠나 버렸다.

이제 방해자는 없어졌지만 장인걸의 수하들과 묵향의 수하들은 서로 병장기를 들고 상대를 노려볼 뿐 본격적인 행동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이때 묵향이 천천히 앞 으로 나섰다.

“수하들을 쓸데없이 희생시키느니 일대일 대결이 좋지 않겠소?”

묵향과의 거리는 10장(약 30미터). 이 정도 거리에서는 암습 따위 할 수도 없었다. 서로 간의 거리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장인걸은 묵향이 더 이상 접근하지 않자 한숨을 푹 쉬면서 어기전성(御氣傳聲)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의 여지를 남겨 두기 위해서였다.

《대결할 필요도 없이 본좌가 졌네. 사실 자네가 이렇듯 빨리 손을 써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지. 나는 율법에 따라 은퇴하겠네. 패자에게 더 이상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겠나?》

묵향은 장인걸의 말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손쉽게 발을 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본좌를 건드린 이상 저세상에 가서 휴식을 취하라구.”

그와 동시에 묵향의 몸이 날아올랐다.

장인걸은 천마혈검대도 없는 상황에서 묵향과 정면 대결을 벌인다는 것이 자살 행위라는 것을 알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것은 다만 말뿐, 이 상황을 넘기기만 한다 면 구양운 장로와 합류하여 다음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다. 마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인물에게 더 이상 위해를 가하지 않았기에 ‘은퇴 선언’은 장인걸 이 택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하지만 묵향은 자신을 놓아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모양이니 장인걸로서는 또 다른 방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쳐랏!”

“우와아아아아아!”

장인걸의 명령에 따라 마교의 고수들이 묵향을 공격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들은 장인걸이 묵향을 상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사투를 벌이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묵향은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고수들을 베면서 장인걸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장인걸은 묵향과 정면으로 검을 섞으려고 들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는 달려오는 묵향을 향해 최대한 공력을 끌어 모아 흑살마장(黑殺魔掌)을 한 방 날린 후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